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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여행기
며칠 전에 정각에게서 전화가 왔다. 엄마랑 같이 유럽 여행을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정각이가 동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알고 보니 정각의 회사에서 논문을 공모했는데 정각의 연구 논문이 최우수작으로 당선이 되어 휴가도 얻고 포상금도 조금 받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시간이 있다는 것이다. 참 고마운 일이다. 가겠다고 하고 정각의 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떠나기로 했다. 갑작스런 일이라 아무 사전 준비도 없이 간단한 옷가지를 챙겨 정각의 집으로 갔다. 독일 - 오스트리아 - 이탈리아 - 바티칸 - 스위스 - 프랑스 - 영국을 경유하는 여행이란다.
제1일(2008.9. 25. 목 826)
아침 일찍 막내며느리는 출근을 하고 정각과 같이 성남에서 공항버스(08:15)에 탔다. 인천공항(09:32)에 도착하여 여러 가지 수속을 밟고 12시 35분에 인천 공항을 이륙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암마인 공항까지 12시간 정도 소요된다고 한다.
- 인천공항-
기내 모니터에는 비행고도:9144m(30000피트)-10668m(35000피트)(公尺),
비행속도:830km-937km(公里), 바깥 온도 : 영하29-영하61C로 표시된다.
고도가 너무 높아 구름 위로 비행하기 때문에 창문으로 바라보아도 구름만 보일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기내식은 한식 양식 중에서 선택하는 것인데 두 번 모두 한식으로 했다. 비행시간이 길어서 너무 지루하고 다리도 아프고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빈자리가 많아서 부인은 눕기도 하고 다리를 뻗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암마인 공항에 17시 30분(현지시각=시차 7시간 늦음)에 도착했다. 마인 공항은 하루에 1600대 정도의 비행기가 이착륙하는 거대 공항이라고 한다.
독일의 정식명칭은 독일연방공화국(Federal Republic of Germany)이고, 영어로는 Germany이다. 북쪽으로 북해, 발트해(海)에 면하고 덴마크와 접하며, 동쪽으로 폴란드, 체코, 남쪽으로 오스트리아, 스위스, 서쪽으로 프랑스, 룩셈부르크, 벨기에, 네덜란드와 접한다. 국경선 안쪽으로 알프스산맥, 라인강, 다뉴브강, 슈바르츠발트산맥이 자리하고 있다. 행정구역은 16개주(Land:구동독지역 5개주)로 되어 있다. EU(European Union:유럽연합)의 창설국이며 EU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국가이다.
프랑크푸르트는 라인 지구대 북부 라인강(江)의 지류인 마인강(江) 연변에 있는 상공업도시이다. 문호 괴테의 출생지로 널리 알려졌으며, 18세기까지는 국왕의 선거 및 대관식이 거행되던 곳이었다. 1815년 빈 조약으로 독일의 4개 자유도시 가운데 하나가 되었고 1816년에는 독일연방 의회의 개최시가 되었다. 1848∼49년에는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가 열렸으며, 1871년에는 프랑스-프로이센전쟁의 화평조약이 이곳에서 체결되었다.
오늘날에 와서는 항공·철도·자동차 교통의 요지가 되었으며, 독일의 경제·금융의 중심지로서 주식·상품거래소가 있고 매년 국제박람회가 열리는데 특히 모피 및 서적의 국제박람회로 알려졌다.
공업으로는 염료·약품·광학·전기기기·기계·소시지 제조 등이 이루어지며, 프랑크푸르트암마인대학 ·국립예술대학, 각종 박물관, 기타 문화 ·교육시설도 정비되어 있다. 시가지의 중심에 있는 구(舊)시가는 12세기에 건설된 것이고 신(新)시가는 1333년 이래 확장된 것으로, 성벽에 둘러싸여 있었으나 1806년 이후 철거되고 산책길로 바뀌었다. 19세기 중엽 이후 외곽으로 새로운 시가지가 발전하였다.
프랑크푸르트는 면적이 서울의 1.6배 정도이고 70만의 인구를 가지고 있는 도시라고 한다.
프랑크푸르트:서울 1.6배의 면적, 70만(런던 600만, 베르린 350만)
고속도로 속도제한 없음 - 버스는 제외
Ibis hotel 투숙, 저녁식사 후 독일 중앙역 부근을 산책했다. 경전철이 다니고 있었다. 현지인들은 그냥 승하차하는 것 같았는데 표를 검사하는 사람도 없고 하지만 티켓을 구입하여 소지하고 있다고 한다.
독일은 정치인이 도덕성이 좋고, 국민 모두가 근검절약정신이 강하다고 한다. 2002년 EU통합하여 화폐, 자동차 번호판을 통합하였다고 한다.
화장실 사용료 50센트(50센트=850월)
제2일(2008. 9. 26. 금 827)
전용버스로 오스트리아 하이델베르크 고성외관 및 낭만의 대학가 거리, 구시가지, nekar강을 관광하고 인스부르크에 도착 호텔 투숙했다.
하이델베르크 시가지 관광을 하고 있는데 부인이 보이지 않는다. 사방을 이리 저리 둘러보아도 찾을 수가 없다. 같이 온 관광객에게 말하고 찾았으나 일행은 자꾸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있다. 정각에게 말했다. 정각이가 버스에서 내린 곳까지 뛰어 갔다 왔으나 없다는 것이다. 걱정이 되었다. 부인은 등산도 해보고 해서 멀리는 가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초조하다. 내가 다시 버스에서 내린 곳까지 가보았다. 그러나 부인은 보이지 않는다. 불안한 마음이 든다. 멀리서 정각이 헐레벌떡 뛰어오며 엄마를 찾았다는 것이다. 화장실에 다녀온 모양이다. 이 일이 있은 후에 가이드가 6개조로 조를 편성해 주고 조장을 두었다. 조장이 항상 인원을 파악했다.
하이델베르크는 네카강(江) 연안에 자리 잡고 있는 도시로 12세기에 처음 문헌에 등장하였다. 1225년 라인 백작령(領)이 되었으며 1720년까지 선제후의 거성이 자리 잡고 있었다.
1386년 선제후 루프레흐트 1세(Ruprecht I)에 의하여 설립된 하이델베르크대학교는 프라하대학교와 빈대학교의 뒤를 이어 독일어권에서는 가장 오래 된 대학으로 16세기에 종교개혁의 보루가 되었다. 30년 전쟁(1618∼1648) 이후 쇠퇴하였다가 프랑스혁명 전쟁 이후 옛 명성을 회복하여 19세기 독일의 대표적인 대학이 되었다.
1952년 이후로 유럽 주둔 미군 총사령부가 자리 잡고 있다. 또 16세기와 17세기 초에 건설되었다가 17세기 말 프랑스군에 의해 파괴된 고성으로도 유명하다.
이 성의 지하에는 하이델베르크 툰(Heidelberg Tun)이라는 약 5만 8080갤런 규모의 거대한 술통이 있다. 그밖에 1701∼1703년 건립된 시청사와 이 도시를 조망할 수 있는 ''철학자의 길(Philosophenweg)''이라 불리는 오솔길 등이 있다.
하이델베르크교리문답은 독일 신교도(칼뱅교도)의 신앙고백으로서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Friedrich III)의 요구에 따라 작성된 것이며, 1563년 발행된 후 널리 호응을 받아 여러 신교 교파에도 채택되었다. 기계, 정밀기기, 피혁, 담배, 목제품 등의 제조업이 활발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시되는 것은 관광산업이다. 하이델베르크성(城)을 중심으로 해마다 수백만 명의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다.
오스트리아의 정식 명칭은 오스트리아공화국(Republic of Austria)이다. 북쪽으로 독일, 체코, 동쪽으로 헝가리, 슬로바키아, 남쪽으로 슬로베니아, 이탈리아, 서쪽으로는 스위스와 리히텐슈타인에 접한다. 유럽의 6개 영세중립국 중 하나이며, 헌법에 영속적 중립성을 명시했다. ''동쪽 제국(eastern empire)''이라는 뜻의 국명은 독일어(語)로 ''Osterreich''라고 하며, ''Old German Ostarrichi''에서 유래했다.
오스트리아는 해양성기후, 16개주, 8만 평방km, 800만 명, 내륙국가, 해발 500-600m인 산악국가로 터널이 많고, 자연 사랑이 남다르며, 침엽수림이 대부분이다. 석회층이라서 밭농사를 주로 하며 격년제로 농사를 짓는다고 한다. 주식은 빵, 맥주의 나라, 오후 3-4시에 퇴근하여 집에서 여가를 보내며, 무료교육을 받고, 의료보험제도 양호하며, 유치원도 의무교육인데 문자 숫자 교육하지 않는다고 한다. 1-13학년제(초.중.고)이며 성적표는 없고, 5-7학년에 영어교육을 하며, 대학졸업은 7-8년 걸리며 입학은 쉬우나 졸업은 어렵다고 한다. 10세 때 인문계 기술계를 결정하는데 담임의 의견이 많이 반영된다고 한다. 61%가 기술교육을 받는데 6년간 이론 교육을 받고 3년간 산학실습 후 국가기능자격시험에 응시하여 자격증을 따야 한다고 한다.
신생아는 6개월에서 1년까지 신생아 보조금을 지원받고, 16세까지 양육비를 지원받으며, 16세가 되면 대개 부모로부터 독립하며, 27세까지도 취직을 하지 못하면 양육보조금을 받는다고 한다.
부의 재분배정책이 잘 되어 있으며 학생들은 대중교통을 무임승차한다고 하며 유태인은 세금을 내지 않는다고 한다. 유네스코지정 문화유산의 40% 정도를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호텔식, 한식, 호텔식
제3일(2008. 9. 27. 토 828)
5시 30분 기상하여 아침 식사를 하고 7시 40분 인스부르크를 출발했다. 베니스로 가던 도중 11시쯤에 버스의 뒷바퀴가 펑크가 나서 도로변에 차를 세우고 기술자를 부르게 되었다. 토요일이라서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기사가 이리 저리 전화를 하고 야단인데 쉽게 해결 되지 않는다. 7시간 정도 지난 뒤에야 바퀴를 교환하고 베니스 관광은 내일로 미루고 베로나 아래나 원형경기장을 관람했다. 베로나 시내에 광광버스가 들어가려면 진입료로 350유로(595,000원)를 내야 한단다. 시내의 오염을 방지하기 위해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베로나는 브레네르 고개를 넘는 도로·철도가 이탈리아 북부의 평야에 들어서는 곳에 있으며, 예로부터 교통의 요지, 상업의 중심지로서 발달하였다. 로마 시대의 건조물로는 원형극장과 아디제강(江)의 다리 등이 남아 있다. 12∼13세기에는 롱고바르드(롬바르디아)의 지배하에 번영하였으며, 13∼14세기에는 겔프당(黨)과 기벨린당 사이의 투쟁이 있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비극은 이 투쟁을 배경으로 한다. 15∼16세기에는 조콘도, 산미켈리, 비토리오·피사노·파올로·베로네세 등에 의해 회화(繪畵)의 중심이 되었다. 오늘날은 중요한 곡물시장이며, 기계·제지·인쇄 등의 공업 중심지이기도 하다.
오스트리아는 지중해 중앙부, 북서에서 남동으로 약 1200km에 걸쳐 장화 모양을 한 반도와 시칠리아·사르데냐 두 섬으로 구성된다. 북쪽은 알프스 산맥을 경계로, 프랑스·스위스·오스트리아와 접하며, 동쪽은 아드리아해(海), 서쪽은 티레니아해에 면한다. 이탈리아 반도는 발칸·이베리아 반도와 함께 남유럽의 3대 반도의 하나로서 동(東)지중해와 서(西)지중해 사이에 위치하기 때문에 자연·문화면에서 두 반도와는 달리 순수한 유럽형을 이루고 동시에 지중해 지역의 특색을 가장 잘 나타낸다. 행정구역은 15개주(regione)와 5개 자치지역(regione autonoma)으로 되어 있다.
호텔식, 중국식, 호텔식
제4일(2008. 9. 28. 일 829)
아침 일찍 물의 도시 베네치아 관광을 시작했다. 운하, 산마르코사원, 산마르코광장, 한숨의 다리, 유리세공 견학, 곤돌라탑승, 수상택시 탑승(옵션 40유로=68,000원)했다.
베네치아는 이탈리아 북동부에 위치한 항구도시이며 인구는 23만 명 정도, 국민 소득 5만2천불, 1779년에는 흑사병으로 큰 재앙을 입었으며 로마, 피렌체 등과 함께 중요한 관광명소이다.
물의 도시 베네치아는 오래 전부터 많은 사람들의 찬사를 받아왔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이탈이라의 진주, 아드리아해의 여왕 등 '최상의 수식어'가 항상 뒤따랐다.
베네치아에는 118개의 섬과 177개의 운하를 가로지르며 약 400개의 크고 작은 다리가 놓여 있다. 섬과 섬 사이를 연결하는 수로가 항상 중요한 교통로이다.
베네치아의 첫인상은 아득한 옛날로 되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다. 특히 곤돌라를 타고 좁은 수로를 따라가며 고색 창연한 건축물을 볼 때 더욱 그렇다.
베네치아를 여행한 많은 사람들이 후일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곤돌라를 탄 것이라 한다.
- 베네치아 곤도라-
곤돌라는 베네치아를 상징하는 것이라 할 만하다. 겨울에는 추운 바닷바람과 짙은 안개로 운행되지 않고 3월이 돼야 승선할 수 있다. 유선형 길쭉한 배인 곤돌라의 사공을 곤돌라라고 부른다.
곤돌라 외에도 대중 교통수단으로 바포레토라는 수상버스, 모터보트인 수상택시가 있다. 베네치아만의 특징적인 현상은 어느 도시에서나 흔한 자동차가 없다는 사실이다. 온통 수로로 되어 있으니 자동차가 쓸모가 없다.
매년 9월이 되면 유면한 가면축제가 열린다. 그로테스크한 분장과 화려한 의상을 한 여인의 모습은 무척 이색적이다.
세계 명작에도 베네치아는 자주 등장한다.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의 무대이고 또한 세기적인 탕아 카사노바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카사노바는 처음에는 성직자였으나 추문으로 투옥된 후 프론 감옥에서 탈옥, 그 후 유럽 각지를 돌아다니며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다고 한다. 뛰어난 미남이었던 그는 능란한 화술로 숱한 여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그는 만년에 《카사노바의 회상록》을 저술했다.
오늘날 베네치아는 유리세공업으로 이름 높다. 베네치아 국제영화제도 매년 개최된다. 해수욕장과 카지노로 유명한 리도섬 역시 많은 관광객이 몰리는 곳이다.
아카데미아 미술관은 1756년에 세워진 곳으로 14~18세기의 미술작품이 많이 소장되어 있다. 베르니니의 〈성모 마리아>를 비롯 성모를 주제로 한 작품들이 많다. 구겐하임 컬렉션은 피카소·샤갈·달리 등 유명작가의 300여점이 넘는 소장품을 자랑한다. 현대 유럽 미술품 수집가로 널리 알려진 페기 구겐하임이 모은 작품들이다.
산마르코 광장은 구시가지에서 단연 돋보이는 곳이다. 옛 베네치아 공화국 전성기에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였던 곳이다. 광장에는 수많은 비둘기들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모이를 기다리고 있다.
오늘날 베네치아 사람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곳은 산마르코 사원일 것이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수호신인 산마르코의 유해가 안치된 이 사원은 832년에 헌당된 이래 긴 역사 속에서 파괴와 재건, 그리고 확장을 계속해 왔다.
12세기부터 17세기까지 무려 500년간 제작된 모자이크 성화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세계에서 여기처럼 다양한 성화가 그려진 곳은 별로 없다고 한다. 높은 천정의 열린 유리창으로 한줄기 빛이 스며들어 모자이크 성화를 비출 때 신비감이 감돈다.
베네치아는 슬픈 운명에 처한 도시이다. 바다로 이어지는 석호(潟湖) 위에 세워진 도시라서 지반(地盤)이 약해 오랜 기간 도시 전체가 계속 가라앉고 있었다. 현재 산마르코 광장까지 물이 올라온다고 한다. 언젠가는 이 도시 전체가 물속에 잠겨 지구상에서 몇 안 되는 고건축물의 보고가 우리 눈에서 사라질 것이다.
가이드 말에 의하면 지반 침하와 수면 상승으로 도시가 물에 잠겨버릴 것을 대비하여 몇 년 전부터 거대한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일명 ‘모세의 프로젝트’란다. 만약에 수면이 올라 베네치아가 수몰 위기에 이르면 바다 밑에서 물을 막아주는 벽이 올라와 방어한다는 것이다.
산마르코광장은 수많은 비둘기 떼와 사람들로 가득한 곳이다. 바다에 면해 선착장이 있는 부분은 피아체타(Piazzetta, 소광장)라고 하는데, 이곳에 멀리 콘스탄티노플에서 옮겨온 흰 대리석으로 만든 2개의 원주가 있다. 원주 위에는 베네치아의 수호신인 날개 달린 사자와 성테오도르상이 있다. 광장 동쪽으로 산마르코 대성당이 있고, 광장의 주위는 흰 대리석의 열주가 줄지어 있는 회랑이다. 이 광장을 보고 나폴레옹은 "유럽에서 가장 우아한 응접실"이라고 언급했다고 한다.
피렌체에서는 단테의 생가, 미켈란젤로 작 다윗상, 미켈란젤로 언덕을 관광했다. 며칠을 돌아다니며 보아도 묘가 보이지 않아 가이드에게 물었다. 묘가 없는 것은 아닌데 보이지 않을 것이란다. 마을 어귀에 평장으로 하는 장묘문화란다.
피렌체는 영어로는 플로렌(Florence)라고도 한다. 로마 북서쪽 233km, 아르노강(江)의 양안(兩岸), 구릉과 선상지상에 있다. 근교의 아르노강 연변의 저지는 신흥공업지대로 상공업의 중심을 이룬다. 근대적인 대도시로서 아르노강 연변의 교통로와 아펜니노 산맥을 넘는 교통로의 요지이기도 하다. 피렌체의 역사는 BC 10세기 무렵의 취락 빌라노바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도시로서의 발전은 BC 2세기부터 시작되었는데, 특히 로마에서부터 뻗어오는 카시아 가도(街道)의 중심으로 중요한 지위를 차지했다. 당시에 계획적으로 건설된 부분은 현재의 시가 중심부와 일치하며 폰트베키오(다리)의 우안(右岸)에 해당한다.
로마 행정, 경제, 관광 도시 ciociaria hotel 3박 투숙예정
호텔식, 현지식(성주루), 한식(금강산)
제5일(2008. 9. 29. 월 910
폼페이유적지를 관광했는데 폼페이는 AD79년 8월 24일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한순간에 멸망한 폼페이의 유적이 19세기에 들어 발굴된 곳이다. 드러난 유적은 고대 로마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재현하고 있다.
- 폼페이 유적지-
현지인들은 폼페이 유적을 스카비(Scavi)라고 부른다. 유적지의 입구는 마리나 문(Porta Marina)으로, 당시 마을에서 항구로 통하던 길의 성문이다. 이 부근에는 폼페이에서 가장 큰 건물인 바실리카, 아폴로 신전, 주피터 신전 등이 있다. 중앙광장인 포로(Foro)에는 도리아식 원주가 서 있고, 포로를 왼쪽으로 돌아나가서 마첼룸을 지나면 주요 건물 유적들이 있다. 파우니의 집, 베티의 집, 큐피드의 집 등 당시 부유한 귀족들의 저택들이 늘어서 있다. 폼페이에서 발굴된 회화, 조각 등은 나폴리 북쪽의 국립고고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유적지 부근에서 점심으로 스파게티와 오징어 볶음 요리를 먹었는데 스파게티는 먹을 수가 없고 오징어 볶음 요리는 그런대로 먹을 수가 있었다. 식사 후 쏘렌토로 가서 유람선을 타고 카푸리섬에 도착하여 미니버스를 타고 올라가 곤돌라를 타고 아나카프리산 정상까지 올라갔다.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카푸리섬 도시며 바다풍광은 너무 아름다웠다. 멀리 나폴리 쏘렌토 폼페이가 보인다. 다시 유람선 타고 나폴리를 관광한 후 로마 근교 호텔 투숙했다.(카푸리섬 옵션 120유로=204,000원)
카프리섬은 티레니아 해안 나폴리만(灣) 입구, 소렌토 반도 앞바다에 있다. 서쪽은 높이 600m를 넘는 고지를 이루고 섬 전체는 용암으로 뒤덮여 있다. 올리브 ·과일 등을 산출하며 온난한 기후와 풍경이 아름다운 관광지로서 유명하다. 특히 로마 시대부터 알려진 ‘푸른 동굴’은 길이 53m, 너비 30m, 높이 15m의 해식 동굴인데 햇빛이 바닷물을 통해서 동굴 안을 푸른빛으로 채운다. 또 신석기시대부터 인류가 거주한 흔적이 있으며 로마 시대에 있었던 등대의 터도 남아 있다.
카프리 섬에서
15세기에 해적을 피하여 고지에 형성된 취락이 현재 섬에 있는 카프리 ·아나카프리 2개 도시의 기원이다. 나폴레옹 전쟁 때 영국 해군에게 점령된 것 외에는 나폴리 왕국 또는 양(兩)시칠리아 왕국의 영토였으며,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티베리우스 황제의 별장지가 남아 있다.
가이드에 의하면 이탈리아는 로마가 476년에 멸망하고, 4-18세기(1,400년 동안)까지 분리공화국으로 이어져 왔기 때문에 지금도 지역감정이 극심하다고 한다. 현재는 의료 보장 100%, 교육비 전액 무상, 연금문제 심각, 유흥가는 없다고 한다.
호텔식, 현지 식, 호텔식
제6일(2008. 9. 30. 화 92)
바티칸 박물관을 관람하기 위하여 아침 일찍 갔으나 이미 관람객들의 줄이 몇 백 미터나 길게 늘어서 있다.
바티칸 박물관은 바티칸의 산 피에트르 대성당에 인접한 교황궁 내에 있는 미술관이다. 역대 로마 교황이 수집한 방대한 미술품·고문서·자료를 수장(收藏)하고, 또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의 대화가에 의한 내부의 벽화·장식으로 유명하다.
창설은 율리우스 2세(재위 1503∼1513) 때 벨베데레의 정원에 고대 조각이 전시된 것으로 시작되었지만, 일반에게 공개된 것은 클레멘스 14세 치하인 1773년이다. 현재 본관은 피오 클레멘티노미술관·도서관·성(聖)유물관·회화관 등 많은 부분으로 나뉘고, 또 각실은 보르지아실(室)·라파엘로실·지도실이라는 특유의 명칭으로 불린다. 미켈란젤로나 안젤리코의 벽화로 유명한 시스티나성당·파오리나성당·니코로 5세 성당 등도 미술관의 일부로 여기는 것이 보통이다.
주요 작품은 고대조각에 《아포크슈오메노스》 《벨베데레의 아폴로》 《벨베데레의 토르소》 《라오콘》, 고대 회화에 《오디세우스 이야기》 《아르드브란디니가(家)의 혼례도》, 중세 회화에 《웨르기리우스사본(寫本)》 《여호수아기(記)》, 그리고 르네상스 회화에 미켈란젤로의 《천지 창조》 《최후의 심판》, 라파엘로의 《성체의 논의》 《아테네의 학당》 《그리스도의 변용》,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성(聖)히에로니무스》, 카라바지오의 《그리스도의 매장》 등과 역사적인 고문서 ·공문서류도 소장되어 있다.
바티칸시국은 면적이 0.44평방km인 작은 나라로 로마교황청(Curia Romana)이라고도 하며, 가톨릭교에서는 성청(聖廳)으로 약칭·경칭하기도 한다. 전 세계의 가톨릭 신도를 통치하는 기구로서 독립국가인 바티칸시국의 행정기구도 겸한다.
바티칸 광장에서
1542년 교황 바오로 3세(Paulus Ⅲ)가 ‘이단심문의회(異端審問議會)’란 이름으로 설치한 상설 추기경위원회가 교황청 기구의 시작이다. 그후 교황이 바뀔 때마다 또 다른 기구들이 첨가되었으며, 1588년 교황 식스투스 5세(Sixtus Ⅴ) 때에 이르러 비로소 완성된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그뒤 시대의 요구에 따라 성성(聖省)이나 관서의 개폐(改廢)를 단행하고, 1917년 교회법전에서 기구로 확정하였다.
현대사회에 적응하고, 교회 쇄신을 논하기 위하여 개최된 제2차 바티칸공의회(公議會:1962∼1965)를 계기로 1967년 교황 요한 바오로 6세(Johannes Paulus Ⅵ)는 교황청 기구를 대대적으로 개편하였고, 이후 교황청은 필요에 따라 부분적인 개편과 많은 부서들을 신설하였다. 1989년 3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현대 행정체제에 맞게 모든 부서의 성격과 기능을 명확히 규정하고, 동등한 법률적 지위를 부여하였다.
바티칸의 통치기관이기도 한 교황청은 국무성성(國務聖省)을 중심으로 9개 성성(의회), 3개 법원, 11개 평의회, 3개 사무처, 그리고 교황궁내원과 교황전례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추기경위원회(樞機卿委員會)에서 모든 안건을 다룬다.
바티칸 박물관(14유로=23,800원 하루 2-3만 명 입장)을 관람하기 위하여 아침 일찍 기동하여 버스를 타고 갔으나 이미 관람객의 줄이 몇 백 미터나 길게 서 있었다. 소장된 유물은 물론이거니와 내.외부의 웅장함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그 시대의 건축술이 너무나 뛰어난 것 같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이어서 성 베드로성당을 관람했다.
성 베드로성당은 로마의 최대 명물이며, 세계 인류문화의 최고 금자탑이라고 하는 현재의 성 베드로 대성당은 3번째 지은 것이다. 처음에는 작은 누각처럼 사도 베드로 무덤 곁에 '기도소'식의 건물이 하나 있었다. 콘스탄티누스대제 때 와서 매우 크고 튼튼한 성당을 지어 약1200여 년간 사용하다가 이 성당의 남쪽 벽에 2~3미터 너비로 몇 개의 틈이 벌어지기 시작하자, 1400년경부터 성 베드로 새 대성당 건축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이어 마데르노가 현관 쪽을 길게 내었고, 베르니니가 광장 회랑을 비롯해 마무리 작업을 했다. 그러나 사실 1450년부터 신축설계가 거론되어 1506년 부활절 다음 주일에 본 건물을 착공한 후 1606년 부활 주일에 완공을 보았으나 마무리 작업까지에는 총330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렇지만 성 베드로 대성당은 아직도 미완성이다. 이 베드로 대성당은 동서의 길이가 211미터이고 남북의 길이가 150미터, 천정 평균 높이 45미터 중앙 돔의 직경이 50미터 그리고 종각 꼭대기까지는 153미터이다. 내부 넓이는 약 5,500평 정도 되며 지하실 소 성당들까지 합쳐서 50여 개의 제단이 있다. 수용인원은 약 27,000여 명, 세계 최대의 성당이다.
성 베드로 대성당 중심부에는 사도 성 베드로의 무덤이 있고, 유골 일부도 모셔져 있다. 그리고 사도 베드로의 묘를 중심으로 하여 역대 교황들의 묘가 260여 개소 모셔져 있어, 2천년 가톨릭의 역사와 전통을 느끼게 하고 있다.
바티칸시국은 관광수입만 해도 엄청날 것으로 생각된다. 바티칸 박물관의 관광수입을 간략하게 계산해 보았다. 관람객이 하루에 2-3만 명이라고 했으니 2만 5천 명으로 계산해 보자. 23,800원*25000=595000000. 하루 약 6억 원, 1년이면 약 2,160억 원이다. 조상들의 음덕이 아닐 수 없다.
오늘 오후에는 걷는 코스가 많다고 한다. 정각이가 엄마를 생각해서 벤츠 투어(옵션 50유로=85,000원)를 하였다. 29명 중에 벤츠 투어하는 이는 5명이다. 8인승 벤츠 승합차를 이용하여 관광지를 돌아보는 것이다.
가니꼴레언덕, 떼빼르강, 미켈란젤로 언덕, 베니스 광장, 통일 기념관, 무솔리니가 전쟁을 선포했다는 베니스 궁전, 거짓말을 하면 팔이 잘린다는 진실의 입, 콜로세움 외관, 트레비 분수(아이스크림 사 먹음), 로만포름, 대전차 경기장, 젊은이들의 약속 장소 나보나 광장, 1900년 전 건립한 돔 직경 43.2m나 된다는 판테온 신전을 관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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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일(2008. 10. 1. 수 93)
피사의 사탑, 두오모(주교가 있는 중심 성당), 세례당, 시내관광을 했다.
피사는 아르노강(江)의 퇴적작용으로 인하여 현재의 해안선은 피사시(市)에서 서쪽으로 10km쯤 떨어져 있기 때문에 항만도시로서의 의미는 지니지 못한다. 11세기 말에 제노바·베네치아와 대립하는 강력한 해상공화국으로서 번영하였다. 13세기에 이르러 제노바에 패하였으나 그 후에도 문예의 중심지로서 번창하여, 갈릴레이도 이곳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아르노강 하구 부근에 있는 오래된 도시로 도로·철도 등 교통의 요지이며 기계공업을 비롯한 많은 근대공업, 대리석 가공업 등이 성하다. 주변 농업지대에서는 포도·올리브·곡물 등의 재배와 목축이 활발하다. 피사 대성당에 부속된 사탑은 갈릴레이의 이름과 더불어 유명하다. 세계유산목록에 등록되어 있다.
피사의사탑은 피사 대성당 동쪽에 있다. 흰 대리석으로 된 둥근 원통형 8층 탑으로 최대 높이는 58.36m이며 무게는 1만 4453톤으로 추정된다. 2008년 기준 기울기의 각도는 중심축으로부터 약 5.5˚이다. 294개의 나선형 계단으로 꼭대기까지 연결된다.
1173년 착공돼 1372년까지 3차에 걸쳐 약 200년 동안 공사가 진행되었으며 1173년~1178년의 1차 공사 후 지반 토질의 불균형으로 인한 기울어짐이 발견되었다. 이후 2차 공사에서 수정을 가한 뒤 다시 건설했지만 기우는 현상은 계속되었다. 이후 여러 차례 개
보수를 통해 기울기를 완화하려 노력했지만 현재까지 여전히 남서쪽으로 계속 기울고 있다.
갈릴레이가 이곳에서 새털과 쇠공을 떨어뜨려 낙하실험을 한 후 ‘지표면 위의 같은 높이에서 자유낙하하는 모든 물체는 질량에 무관하게 동시에 떨어진다’는 내용의 낙체법칙을 발견했다고 전해진다.
패션과 유행의 도시 밀라노 두오모(고딕 세계3위 높이 108.5m 1386년부터 440년간 공사), 스포리체코성당, 라스칼라좌 관광 후 hotel ristorante 투숙했다.
밀라노 두오모는 1386년 밀라노의 영주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의 의견에 따라 대주교 안토니오 디 사루초가 기공하였다. 프랑스나 독일의 대성당에 필적할 만한 것을 조영하기 위해 본국 외에 독일과 프랑스의 건축가를 참가시켰기 때문에, 이탈리아의 성당 건축 가운데 알프스 이북의 고딕적 요소가 가장 짙다. 반면에 설계와 시공에 관한 의견 조정이 지극히 어려워 1577년에야 헌당되었으며, 부대공사 모두가 완료된 것은 1951년이었다.
내부는 5랑식(廊式) 본당, 3랑식 익랑(翼廊), 주보랑(周步廊)이 달린 본전(本殿)으로 되어 있으며, 천장은 측랑(側廊)에서 신랑(身廊)에 걸쳐 계단 모양으로 높아지고 있다. 외부 벽면은 대소의 부벽(扶壁)과 번잡할 정도로 많은 소첨탑(小尖塔)으로 장식되어 얼핏 보아 지극히 호화로워 보이나 통일감이 없다는 지적도 있다.
가이드 설명 : 게르만 人은 4-10C 혼돈기였으며, 유럽의 건축물들은 11-13C에는 신 중심으로 성당은 높게 고딕양식이며, 13-16C 르네상스 시기에는 바로크양식의 건축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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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일(2008. 10. 2. 목 94)
새벽 2시 30분 기상하여 아침 도시락을 들고 전용버스(교통체증이 심함), 기차로 아침에 스위스에 입국(7:20)했다.
스위스의 정식명칭은 헬베티카 동맹(Confederation Helvetica)이고, 독일어로 ''Schweizerische Eidgenossenschaft'', 프랑스어로 ''Confederation Suisse'', 이탈리아어로 ''Confederazione Svizzera''라고 한다. 통상적으로는 스위스연방(Swiss Confederation)이라고 표현한다. 북쪽으로 독일, 동쪽으로 리히텐슈타인·오스트리아, 남쪽으로 이탈리아, 서쪽으로 프랑스에 접한다. 종족구성은 독일계(65%), 프랑스계(18%), 이탈리아계(10%)이며 면적은 42평방km, 인구는 700만 명 정도이고,
호수가 3천 여 개로 많으며 행정구역은 26개주(canton)로 이루어진다.
유럽의 지붕이라 불리는 해발 3,454m의 융프라우요흐 등정 얼음궁전, 만년설, 스핑크스 전망대를 관광했다.
융프라우지역은 스위스에서 처음으로 자연문화유산에 등록된 지역으로 융프라우 Jungfrau란 처녀라는 말로, 이곳이 '처녀 산(4158m)과 묀히 산(4099m)사이의 나지막한 곳'이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요흐 Joch'는 '산마루가 움푹 들어간 곳'을 뜻하는 독일어이다. 융프라우요흐 등산열차에는 한국어 안내방송이 중국어 일본어와 함께 나와 간이역의 이름과 정차시간을 쉽게 알 수 있다.
- 융프라우요흐 정상-
융프라우요흐 정상의 스핑크스전망대는 전면이 유리로 둘러싸여 있어 알프스의 장엄한 광경을 파노라마로 즐길 수 있다.
알레치 빙하 20m 아래에 위치한 '얼음 궁전'으로 가는 통로는 희미하게 빛나는 푸른 조명으로 더욱 차가운 느낌을 주며, 곳곳에 얼음을 조각하여 만든 작품들을 전시해 놓았다. 얼음궁전에는 방문객들의 체온을 이용하여 레스토랑의 난방에 사용하는 특수 장치가 설치되어 있다. 전망대에 내부에는 유럽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우체국이 있어 친구나 가족에게 기념 엽서를 보내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여기에서 먹는 컵라면(5유로=8,500원)의 맛은 일품이었다. 올라오기 전부터 융프라우요흐에 올라가면 컵라면을 먹겠노라고 다짐했었다. 정각이가 그것을 알았는지 화장실에 다녀오니 이미 컵라면을 사서 대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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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일(2008. 10. 3. 금 95)
제네바는 레만호 서쪽 끝자락에 있으면서 프랑스와도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고, 국제연합 유럽본부와 국제적십자 위원회가 자리한 작지만 국제적인 도시이다. 일부 지역이 스위스와 토지를 공유하고 있어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대표적인 도시이기도 하다. 제네바 시내는 론강을 중심으로 양편으로 나뉘어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데, 강의 왼쪽 기슭에 14세기부터 제네바의 중심으로 자리한 구시가가 있다.
전용버스로 제네바로 이동하여 초고속 열차(T.G.V)로 프랑스 파리로 이동,
절대 권력의 상징인 베르사이유 궁전, 샹제리제거리, 개선문, 콩코드광장을 관광했다.
파리는 프랑스의 정치·경제·교통·학술·문화의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세계의 문화 중심지로, ‘꽃의 도시’라고 불리며 프랑스 사람들은 스스로 ‘빛의 도시’라고 부른다.
'파리'라는 명칭은 기원전부터 이곳에 살던 갈리아족의 한 부족인 파리시이(Parisii) 부족의 이름을 딴 것이다. 로마인들은 지금의 시테섬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부락을 루테티아(Lutetia)라고 불렀으며 파리라는 이름은 3세기부터 사용되었다.
갈리아 지방을 원정하였던 카이사르에게 점령된 다음부터 로마화(化)가 진행되어 목욕탕·투기장(鬪技場)·주피터신전 등이 축조되었다. 4세기에 게르만족의 침입, 5세기에는 훈족의 침입으로 대부분 어민·선원인 마을 사람들이 섬에 유폐되기도 하였으나 6세기 초 메로빙거왕조의 수도가 된 이후(10∼11세기경 랭스로 옮겼던 때를 제외하고) 정치중심지가 되었다. 그 당시에 훈족의 공격으로부터 파리를 지켰던 성녀 준비에브는 파리의 수호신이 되었다. 그뒤 9세기에 북방의 해적이었던 노르만인들이 침입해왔을 때 그들을 무찔렀던 파리 백작 위그 카페가 카페왕조를 세운 곳도 파리였다.
로마의 지배 밑에서는 선원조합이 생기고 상업이 활발하였으나 6∼10세기의 파리는 사제(司祭)의 도시로 바뀌었다. 1000년경부터 두번째 성벽이 축조되고 시정(市政)도 정비되었다. 그러나 중세 도시로서의 체제를 갖춘 것은 필리프 2세(재위 1180∼1223) 때이다. 이때 축조된 성벽의 이름이 지금도 두 군데에 남아 있다. 십자군이 활발하였던 시대에 파리에서는 노트르담대성당의 건설이 진행되고 신학 중심의 소르본대학이 창설되었다. 교황과 국왕이 세력다툼을 벌였던 14세기 초 필리프 4세(재위 1285∼1314)는 삼부회(三部會)를 소집, 시민들의 재력(財力)을 그의 편으로 끌어들이려 하였다.
백년전쟁(1337∼1453)이 한창이었을 때 상인조합(길드)이 선출한 시장 에티엔 마르셀은 국왕에게 반기를 들고 시정의 독립을 꾀하였다. 이 당시 파리는 3개의 도시가 결합된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즉, 시테섬은 왕과 사제의 도시(궁전과 노트르담대성당), 우안은 좁은 길을 따라 펼쳐져 있는 상인의 도시(항구와 조합), 좌안은 문교도시(소르본대학)였다. 15세기 전반에는 아르마냐크파(派)와 부르고뉴파의 싸움이 계속되었으며, 파리 시내는 치안이 극도로 문란해져서 살인과 숙청이 잇따르고 시내는 무법천지가 되었다. 잔 다르크의 노력 등이 주효하여 샤를 7세는 파리로 돌아왔으나, 중앙집권 체제를 확립한 루이 11세는 파리를 좋아하지 않아, 어용금(御用金) 징수 때나 봉건 영주에게 파리를 점령당할 위험이 있을 때에만 나타났다.
16세기부터는 이탈리아와의 전쟁을 계기로 르네상스 문화가 유입되는 등 궁중문화가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고 시민들도 이것을 지지하였다. 고딕 양식 대신에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이 등장하기 시작하여 생퇴스타슈·생테티인뒤몽 등의 성당도 세워졌다. 이와 함께 인구도 늘어나고 상업이 번창하는 한편 좁고 불결한 저지대에는 프랑수아 비용이 그림으로 묘사한 파리가 출현한다. 종교전쟁(1559∼1598) 때에는 비극의 현장으로 바뀌었으며, 루이 13세와 재상(宰相) 리슐리외는 파리를 절대왕정의 본거지로 삼았다. 생루이섬을 정비하여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저택을 세우고 마레·생제르맹·포부르 지구는 귀족들의 주택지로 만들었다. 리슐리외가 나중에 팔레 루아얄이 된 팔레 카르디날을 세운 것도 이때이다. 루이 14세는 파리에 살지 않았으나, 콜베르가 중상주의 정책을 실시함으로써 국력은 강화되고 고전문화가 번창하였으며 파리의 인구도 50만으로 팽창하였다. 이와 함께 생 뱅상 드 폴 등의 노력으로 복지사업이 발전하였다.
18세기는 경제적 발전기로, 파리는 계몽주의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카페에는 필로조프(哲人)들이 모여 새로운 사상·학문·예술의 발전을 논의하였다. 그러나 혁명중에는 건설보다 파괴가 더 많았고, 특히 교회는 폐허로 변하였다. 나폴레옹전쟁 중에도 틈틈이 지역 확장이 이루어졌고 새로운 가로망이 구축되었으며 수도설비를 개선하는 등 위생과 안전에 특히 심혈을 기울였다. 왕정이 복고되었을 때에는 지사(知事) 샤브롤의 노력으로 시청사를 개축하고, 새로운 다리가 가설되었으며 화랑이 문을 열기 시작하였다. 7월왕정 시대에도 120km에 이르는 새로운 하수도가 축조되고 많은 도로가 포장되었으며, 콩코르드광장에는 오벨리스크(方尖塔)가 건설되기도 하였다.
최후의 성벽(티에르 성벽)은 1845년에 완성되었으며, 그 자취는 지금의 외곽도로(불바르 에크스테리외르)이다.
그러나 지금의 파리 모습은 제2제정 시대에 오스망의 개조로 이루어졌다. 그는 파리에서 실직을 없애고 살기 좋고 청결하며 교통이 편리할 뿐만 아니라 싸움과 혼란이 없는 파리를 만드는 데 뜻을 두었다. 생미셸·세바스토폴·리볼리·도메닐·라스파유 등의 큰 거리가 개통되고, 주변 건물이 헐리면서 개선문·노트르담대성당·오페라극장 등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또한 중앙시장이 정비되고 주위에 철도가 부설되면서 가스등에 불이 들어왔으며, 이에 따라 파리는 면목을 새롭게 하였다. 시가지가 확장되어 몽수리·뷔트쇼몽 등의 공원도 조성되었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파리코뮌(1870∼1871)으로 파리는 많은 피해를 보았으나 그 와중에도 오페라극장이 완성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때에는 체펠린비행선의 폭격을 받기도 하였으나 피해는 작았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독일군에게 점령되었으나 비무장 도시이어서 큰 파괴는 면할 수 있었다. 드골 정권이 들어선 뒤 파리의 건물들은 말끔하게 정돈되어 ‘하얀 파리’가 되었다. 지금도 도시계획이 진행되고 있는 파리는 변모를 계속하고 있다. 1814년 나폴레옹이 전쟁에 패배하여 연합군에게 포위되었을 때와 1944년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이 밀어닥쳤을 때, 파리는 붕괴되거나 잿더미가 될 위기에 직면했으나 다행히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역사상 이 도시에서 개최된 중요한 회의도 무수히 많다.
행정상 20개의 구(아롱디스망)로 나누어지고 각 구는 번호로 불리는데 각각 4개의 소구(카르티에)로 구성된다. 구마다 현(縣)의 지사가 임명한 구장(區長)이 있다. 제1구는 시테섬의 서반부(西半部)와 루브르 등을 포함하며 시의 거의 중앙에 자리잡고 있다. 제1구의 북쪽에 오페라코미크·국립도서관 등이 있는 제2구가 있고, 여기서 오른쪽으로 회전하면서 각 구가 소용돌이꼴로 배열되어 있다. 6구까지가 시의 중심부를 이루는데 이곳에 낡은 건물과 좁은 도로가 집중되어 있다. 시가지의 중앙에서 남북 방향으로 생미셸대로(大路)·세바스토폴대로가 뻗어 있고, 이 대로와 직각을 이루면서 우안(右岸)에는 리볼리거리·포부르생탕투안거리가 있고, 좌안에는 생제르맹거리가 있다. 시가지는 좌안의 카르티에라탱이 문교지구, 우안은 상가·오락가(샹젤리제·그랑불바르·몽마르트르), 서쪽은 고급주택·관청가, 동쪽은 근로자 주택지이다.
시테섬은 파리의 발상지이며 이곳에 있는 노트르담대성당 앞 광장의 중앙이 파리의 원점(原點)이다. 여러 지방과의 거리는 이곳을 기점으로 계산된다. 센강을 건너는 32개의 다리는 돌로 만들어진 아치형이 많다. 유명 인사의 묘가 늘어선 묘지, 조상(彫像)·기하학적 식목·분수 등으로 꾸며진 공원, 동·식물원 등 녹지대가 많으며, 모든 가로에 보도가 딸리고 대로변에는 가로수가 줄을 잇는다. 한편 세계 최대의 콩코르드광장을 비롯한 많은 광장·로터리가 있기 때문에 건물이 차지하는 면적은 전체의 3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 가옥은 대부분 1860∼1914년에 건설되어 대개 7∼8층이지만 최근에는 20층에 이르는 고층 주택도 들어서고 있다. 센강 우안을 따라 고속도로가 완성되고 남북을 종단하는 2개의 고속도로도 건설되었다. 경치 좋은 장소가 수없이 많고 도시미관은 세계 제일이다.
파리는 그 자체가 하나의 박물관이다. 괴테의 말대로 ‘거리의 모퉁이 하나를 돌고, 다리 하나를 건널 때마다 바로 그곳에 역사가 전개’된다. 또한 파리는 역사적 유적의 무한한 보고일 뿐만 아니라 현대에 살고 현대에서 활동하는 도시이다.
내가 본 파리는 시가지가 잘 정돈되어 있으며 공동주택을 이용한다는데 대개 7,8층으로 18,9세기 건축물이란다. 면적은 서울의1/6이고 인구는 230만 정도이고 주변 위성도시에 800만 정도가 살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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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일(2008. 10. 4. 토 96)
오전에 에펠탑 전망대 3층까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전망대에 올라가 파리시가지를 관람하고 노트르담 대성당을 관람했다. 오후에는 루브르박물관(9유로=15,300원) 관람, 센강 유람선을 타고 광광을 했다.
에펠탑은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기념하여 프랑스의 교량기술자 A.G.에펠이 설계하여 만든 탑으로 1889년 파리의 만국박람회장에 세워졌다. 높이는 984피트(약 300m)로 그 이전에 건설된 어떤 건물에 비해서도 약 2배에 이르는 높이였다. 재료에는 프랑스에서 제조된 7,300t의 시멘즈 마르탕 평로강(平爐鋼)이 사용되었다. 탑이 만들어지던 당시에는 파리의 경관을 해치는 것이라고 반대가 심하였으나 완공 후 프랑스를 상징하는 조형물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탑의 시한인 20년이 지나 1909년에 해체될 예정이었으나 송신탑으로 이용되면서 계속 존속하게 되었다. 탑에는 저층부, 중층부, 상층부 3개소에 각각 전망 테라스가 있으며 각 전망대에서 내려 엘리베이터를 갈아타고 올라가야 된다. 관광객이 붐비는 시즌이면 지루하게 기다려야 된다.
-센강에서 바라본 에펠탑 -
노트르담 대성당은 센강(江) 시테섬에 있는 파리의 노트르담대성당(Cathedrale Notre-Dame de Paris)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성당이라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트르담(Notre-Dame)'은 가톨릭에서 쓰는 ‘성모 마리아’에 대한 존칭이며 프랑스어로는 '우리들의 귀부인'이라는 뜻이다. 성당을 짓는 공사는 1163년 주교 M.쉴리의 지휘 아래 내진(內陣) 건축이 시작되었고, 1330년 완공되었으나 그 후에도 부대공사는 계속되어 18세기 초엽 측면 제실(祭室)의 증설로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170년에 걸쳐 만들어진 고딕양식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그러나 18세기 프랑스혁명 때 건물이 심하게 파손되어 19세기에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하였다. 1831년 발표된 빅토르 위고(Victor Hugo)의 소설 《노트르담 드 파리> 로 더욱 유명해졌다.
-루브르미술관 -
루브르미술관은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궁전을 미술관 건물로 사용하고 있으며, 소장된 미술품의 규모는 세계 최대이다. 원래 루브르궁에는 역대 프랑스 국왕들, 특히 프랑수아 1세, 루이 13세, 루이 14세 등이 수집해 놓은 방대한 양의 미술품이 소장되어 있었는데 프랑스 혁명 후인 1793년 국민의회가 그것을 공개하기로 결정함으로써 미술관으로 정식 발족하고 그 뒤로도 꾸준히 미술품 수집이 계속되어 오늘날의 세계 3대 미술관 안에 드는 대미술관이 이루어졌다. 약 30만 점의 소장품이 있으며 그 중 2만 5천점이 전시되고 있다.
동서로 약 1km, 남북으로 약 300m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크기를 자랑한다. 미술관다운 건물을 만들기 위해 1981년 미테랑 대통령이 루브르박물관 대개조 계획인 '그랑 루브르(Grand Louvre)'를 세웠고, 이에 따라 1989년에 유리 피라미드가 완성되었다. 산만하게 흩어져 있던 출입구와 매표소, 상점 등을 유리 피라미드가 있는 중앙으로 모아 현재의 구조를 갖추게 되었다. 대개조 계획으로 복잡한 동선이 정리되긴 했지만 박물관 전체를 다 보려면 사나흘은 잡아야 한다.
센강은 프랑스 부르고뉴 ·상파뉴 ·일드프랑스(파리 분지) ·노르망디 등을 거쳐 영국해협으로 흘러드는 길이 776km의 거대한 강이지만 파리의 센강은 마치 도심의 수로처럼 작게 느껴진다. 센강변이 세계적인 관광지로 각광을 받는 이유는 아마 이곳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많은 시와 노래 그리고 예술가들 때문일 것이다. 유람선이 운행하는 구간인 시테섬 주변으로는 파리의 유서깊은 건축물들이 늘어서 있어 센강의 아름다움을 더한다.
루브르박물관, 오르세미술관, 노트르담대성당 등 화려한 건축조각이 센강변을 장식하고
있으며, 연인들의 다리로 알려진 퐁네프, 화려한 조각으로 장식된 알렉상드르3세교, 앵발리드 교 등이 이곳 정취에 흠뻑 빠져들게 한다. 화려한 조명과 함께 시작되는 센강의 저녁은 유람선 선상의 디너 파티와 강변으로 모여든 연인들로 더욱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한다.
강변의 선상주택이 있는데 선상에 화단을 조성한 것도 있고 여러 가지 장식을 한 집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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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일(2008. 10. 5. 일 97)
아침 6시에 도시락 지참하고 출발하여 고속열차(urostar)로 북역에서 해저 터널 통과 런던(8:07-9:57)에 도착했다. 해저 터널을 통과할 때도 해저라는 느낌이 나지 않았다. 비가 내렸지만 타워브리지전경, 하이드파크,
알버트 동상, 버킹검 궁전, 웨스트민스타사원, 국회의사당, 대영박물관을 관람했다.
타워교(Tower Bridge)는 런던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건축물 중의 하나이다. 19세기에 런던이 발전함에 따라 템즈강을 건너려는 사람들도 많아 졌다. 런던교의 서쪽으로만 다리가 지어지다가 동쪽에도 다리를 지으라는 시민들의 탄성이 높아만 갔다. 그래서 지어진 것이 타워교이다. 이 다리의 특징은 대형 선박이 지나갈 때 다리 가운데가 올라간다는 점이다.
기동 부분의 위로 보행자가 다닐 수 있는 길이 설치되어 있어 배가 통과하는 동안 엘리베이터를 오르내리게 하여 사람들이 다리를 건너가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곳에서 자살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 1909년 이후 중지하였다.
하이드 공원은 런던의 가장 넓은 왕립 공원이다. 원래는 헨리 8세의 사냥터였다. 찰스 1세가 공원으로 조성한 뒤 1637년부터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다. 도심에 이렇게 넓은 녹색공간이 있다는 사실이 부러워진다. 하이드파크에서 유명한 것은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는 스피커스 코너(Speaker’s Corner)이다. 1872년부터 지금까지 계속 유지되고 있는데, 최초로 의회 민주주의를 발전시킨 영국의 면모를 느낄 수 있다. 이곳에서는 숨진 다이애나 전 왕세자비가 살았던 켄징턴 궁전의 아름다운 정원을 볼 수 있다.
공원에는 승마를 할 수 있는 길인 로튼 로(Rotten Row), 음악 콘서트가 열리는 음악당(Bandstand), 아름다운 아치문인 마블 아치(Marble Arch)와 웰링턴 아치(Wellington Arch)가 있다. 하지만 이것들을 둘러 보기 위해 공원을 다니는 것은 공원이 너무 넓어 불가능하다. 여행 중 잠시 쉬어가는 장소로 적합하다.
버킹엄궁전은 영국 왕실의 공식적인 거처인 곳이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이곳에서 지낸다. 원래 버킹엄 궁전은 1702년에 버킹엄 공작의 런던 집으로 지어졌다. 1761년 공작의 아들이 그 집을 조지 3세에게 1774년에 팔았다. ‘여왕의 집’으로 이름을 바뀌었고 왕비 샤롯데가 거주하였다. 조지 4세는 1820년에 건축가 존 내시에게 궁전으로 변경할 것을 지시하였다. 건물의 규모가 2배가 된 대대적인 개축이었다. 프랑스의 네오 클래식 양식으로 궁전이 지어졌으며 1837년에 빅토리아 여왕이 버킹엄 궁전에 처음으로 거주하였다.
여름 기간에 엘리자베스 여왕은 스코틀랜드에서 지내는데 이 때에만 궁전의 몇 곳을 개방하고 있다. 하이드파크에 있는 티켓박스나 궁전의 오른쪽편에서 티켓을 구입하면 된다. 안으로 들어가면 오디오 가이드를 들으면서 관람할 수 있다. 내부 인테리어는 크리스탈 샹드리에와 화려한 장식으로 꾸며져 있다.
영국의 상징이 되어 버린 독특한 털모자에 빨간 상의를 입은 근위병들의 교대식은 4월~7월 중 매일 아침 11시 30분에 볼 수 있다. 이것을 보기 위해 그 전부터 버킹엄 궁전 앞은 미리 좋은 자리를 잡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영국 왕실의 공식적이 거처인 곳이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이곳에서 지낸다. 원래 버킹엄 궁전은 1702년에 버킹엄 공장의 런던 집으로 지어졌다. 1761년 공작의 아들이 그 집을 조지 3세에게 1774년에 팔았다. ‘여왕의 집’으로 이름을 바뀌었고 왕비 샤롯데가 거주하였다. 조지 4세는 1820년에 건축가 존 내시에게 궁전으로 변경할 것을 지시하였다. 건물의 규모가 2배가 된 대대적인 개축이었다. 프랑스의 네오 클래식 양식으로 궁전이 지어졌으며 1837년에 빅토리아 여왕이 버킹엄 궁전에 처음으로 거주하였다.
영국박물관은 세계적으로 희귀한 고고학 및 민속학 수집품들을 소장한 박물관으로, 런던의 블룸스버리 지역에 있다. 왕립학사원장을 지낸 의학자 한스 슬론경(Sir Hans Sloane)의 6만여 점에 이르는 고미술(古美術)·메달·동전·자연과학 표본류 등 방대한 소장품을 1753년 정부가 매입할 것을 의회에서 의결하고, 로버트 코튼경(Sir Robert Cotton)의 장서와, 옥스퍼드의 백작 로버트 할리(Robert Harley)의 수집품들을 합하여 1759년에 설립, 일반에게 공개하였다. 초기에는 17세기 프랑스 고성풍(古城風)의 진귀한 건물로 그레이트 러셀가에 있던 몬터규(Montagu) 후작의 저택에 전시되었다. 그러나 소장품이 증가하자, 1824년부터 로버트 스머크경(Sir Robert Smirke)의 설계로 동쪽에는 장서용, 서쪽에는 이집트 조각 전시용의 갤러리가 먼저 세워지고, 1852년 중앙부의 옛 건물 자리에 신고전양식(新古典樣式)으로 현재의 정면 건물이 완공되었다. 1881년 자연사 소장품들은 사우스켄싱턴에 신축한 자연사박물관으로 옮기고, 박물관 안의 도서관은 몇몇 주요 기관들의 장서를 합하여 영국도서관으로 독립하였다.
또한 1970년부터 민족학 부문 소장품들은 웨스터민스터의 벌링턴가든스에 있는 인류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주요 전시품에는 1802년 프랑스에서 얻은 이집트의 고고학 자료, 1806년에 수집한 타우네레, 1816년에 수집한 엘긴 대리석 조각, 이밖에 크니도스의 데메테르 여신상, 소크라테스의 소형상(小形像), 페리클레스의 반신상(半身像), 율리우스 카이사르 및 로마 제왕들의 흉상 등이 있다.
이외에 아시리아의 날개 달린 황소, 칼데아의 유물, 헨리 8세 궁전의 금붙이 세간, 중앙아시아의 옥수스의 유보(遺寶), 중국의 벽화·도자기 및 불상 등이 있다. 그밖에 성서의 알렉산드리아 사본, 색슨의 연대기, 마그나카르타, 옛날 인쇄·제본의 견본 등은 하나의 문헌으로서도 귀중하다. 2000년 11월 396.72㎡ 규모의 한국관이 신설되었는데, 구석기 유물부터 청자·백자 등 조선 후기 미술품 250여 점을 전시하고 있다.
오후 6시쯤 도시락 김밥 지참하고 런던 공항 도착하여 현지시각 오후 9시 OZ 522편 아시아나항공 편으로 귀국길에 올랐다. 10시간 정도 소요된다고 한다.
호텔식, 현지식, 김밥도시락
제12일(2008. 10. 6. 월 98)
10시간쯤 비행하여 기내식 2회를 하고 한국시각 15시50분에 인천공항에 착륙했다. 최고 속도는 시속 1057km/시(公里)이다.
정각은 저희 집으로 가고 공항버스로 응봉 3거리 하차 정운 집 1박하고 다음날 귀가했다.
이번 여행을 떠난다고 할 때 내심 걱정이 되기도 했다. 부인의 건강이 따라줄지 안심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보다 더 앞장서서 잘도 따라다녔다. 참 다행이다.
여행 중에 항상 정각이가 엄마를 잘 챙기고 옆에서 도와주고 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동행한 사람들로부터 정각이는 인기 만점이었다. 총각이냐고 묻는 이가 여러 사람이었다.
정운내외, 미라내외, 정각내외 덕에 좋은 여행을 하게 되어 참 고맙다. 특히 정각이는 12일간의 휴가를 부모를 위해 사용하고 동행해 주어 너무너무 감사하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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