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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어이야기
<3>서울로 간 홍어
내 고향은 전남 곡성군 고달면 고달리.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을 때 선배들이 신림동 막걸리 집에서 신입생 환영회를 연 날, 나는 “전라도에서도 가장 곡소리 나게 고달픈 동네에서 왔습니다”라고 말머리를 꺼냈다. 그래서 지금도 나의 고향을 정확하게 기억하는 선배나 동기들이 많다. ‘골짜기 안’이 ‘골안’ ‘고란’으로, 다시 ‘古達’로 표기되는 과정을 거쳐서, ‘고달프다’는 뜻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하지만 옛 古’에 통달할 ‘達’이라는 지명의 영향으로, 내가 전공으로 ‘역사학’을 선택한 게 아닌가 하는 억측을 가끔 해보곤 한다.
그런 시골에서 6㎞쯤 떨어진 읍내 중학교로 진학했다. 이 때 마을에 함께 살던 동창생 중 일부는 중학교로, 일부는 서울 등지로 떠나갔다. 그 때가 1976년이었다. 고향서 서울로 갈려면 대부분 기차를 타야 했다. 가을이면 코스모스가 잊지 않고 피던 길을 따라서였다. 꼭 나훈아가 불렀던 ‘고향역’ 풍경과 같은 농촌이었다.
▶전라선 곡성역. 익산에서 호남선과 갈라져 남원-곡성-구례-순천-여수로 이어진다. 옛역사가 깨끗하게 단장되었다. 현재 역사는 곡성읍쪽에 신축되었다. 사진=김승완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은 고향을 떠났다. 우리 마을 사람들도 해마다 “한번 살아보겠다”며 가재를 정리해 서울로 갔다. 어떤 집은 한 밤중 마을 앞 섬진강의 차디 찬 살얼음을 깨면서 아이들 손을 잡고 이촌향도(移村向都)했다. 청년들은 부산으로 배를 타러 가기도 했고, 신발공장에 취업하러 가기도 했다.
어렸을 때 “서울에서 돈 벌고 있다”며 하얀 얼굴을 하고 내려온 마을 출신 청년들을 보고, “나도 저렇게 얼굴이 하얗다면 좋겠다” 하고 생각한 때도 있었다. 공장에서 햇빛을 보지 못하고 ‘노동의 나날’을 보낸다는 것을 잘 알지 못했던 아스라한 기억의 한 페이지다.
▶섬진강을 따라 오르 내리는 전라선. 곡성역에서 압록역까지 직선화하면서 예전의 굽었던 선로를 이용해 관광용 기차를 오가게 하고 있다. '서울로, 서울로' 향하던 남도사람들이 호남선과 함께 이 전라선 열차를 타고 갔다. 나는 어린 시절 이 섬진강변에서 망태를 메고 소를 먹이기 위한 풀(당시 시골말로는 깔)을 베러 다녔다. 무더운 여름날이면 강물에 뛰어 들어가 헤엄을 쳤다. 중학교 1학년때까지 섬진강에 나룻배가 있어서 이것을 타고 강을 건너 중학교를 오가기도 했다. 사진=김승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서울로 올라갔다. 호남사람들의 서울행은 1960년대 무렵부터 쉼 없이 계속되었다. 고향 농촌에서도 호구지책(糊口之策)을 할 수 없었던 사람들, 더구나 그들에겐 배움의 기회를 갖기는 매우 어려웠다. 수도권에 둥지를 튼 호남 출신들은 정치적으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숫자를 차지해왔다. 보다 적극적으로 말한다면 매우 중요한 변수로 작용해왔다. 그만큼 비중이 컸다. 나는 이들도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나 살게 된 ‘디아스포라’라 생각한다. 마치 흑산도 사람들이 나주에 옮겨와 본향(本鄕)을 잊지 못했듯, 어찌 이들과 다르다고 할 수 있겠는가.
아래 시 한편을 보자. 외지에 살게 된 디아스포라 남도사람들의 정서를 바로 알아차릴 수 있다. 별 다른 설명 없이도 ‘시적 명료함’이 잘 드러나고 있다. 장옥관의 ‘흑산도집’이다.
홍어회는 흑산도産이 제격,
얼치기 홍어회에 속아 본 사람들은 모두 흑산도집을 찾는다
어둠이 폐사뭉치로 굴러오는 변두리 시장 골목
덜컹거리는 유리문을 밀면
뿌연 수증기 속 맵고 찝찔한 공기,
급한 소주 몇 잔에 벌써 불콰해진 사람들
연탄 화덕의 가스가 취기를 부추긴다
주점 밖에 구죽죽한 늦은 봄비,
흐린 불빛 밖으로 열려진 연장통 안
밀려난 어둠이 웅크리고 있다
며칠씩 삭혀야 제 맛 난다는 홍어를 구하러 어저께 주인은 목포로 갔다
경상도 구미 땅에서 제바닥 홍어회를 먹기가 그리 쉬운 일인감
취객들은 모두 기다리는 데 이력난 사람들
오줌처럼 지린 입맛을 찾아 저녁 마다 몰려든다
얼마나 삭아야 제 맛이 나는 걸까
짝 없는 젓가락이 술상 밑에 뒹글고
환풍기는 쉴 새 없이 어둠을 뿜어 낸다
두 손으로 말아 쥔 술잔 속
출렁이는 비린 바다 탁한 물결 홍어를 구하러
바다로 간 주인은 아직 돌아오지 않고
더러는 고개 꺾어 제 속에 코를 박고,
썩어가는 익숙한 냄새에 취하기도 한다
고향 떠난 남도 사람 물려 드는 공단 변두리 흑산도집 위엔 밤마다 홍어 떼
무리져 날아다닌다.
이 시의 주인공들은 산업도시 구미의 공장에서 일하는 ‘고향 떠난 남도사람들’이다. 그들의 삶이라고 위로 받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 누가 위로해주랴. 그들의 마음과 같이 푹 썩어버린 홍어가 유일한 듯 하다. 사람으로부터 위안 받지 못하고, 고향에서 맡았던 ‘썩어가는 익숙한 냄새’ 바로 그것이었다.
결국, ‘고향의 맛’이 그들을 위로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학시절 신림동 하숙집 아주머니는 전주, 서울출신이었다. 전주 아주머니는 꼬막을 주기적으로 상에 올렸다. 한쪽 껍질을 까고 양념을 더했다. 서울 아주머니로부터는 꼬막을 한 번도 먹지 못했다. 불고기와 잡채를 맛있게 해주었다. 산뜻했다. 그러나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이따금 하숙집 경상도 친구들과 어울려 가던 소줏집 아주머니는 경상도 출신. 그곳에 갈 때면 으레 ‘고갈비(고등어갈비)’였다. 고등어를 등뼈를 기준으로 길게 반으로 나눠 은박지 위에 놓고 구운 것이었다. 맛있긴 했지만, 어렸을 때 먹던 것이 아니었다.
▶꼬막을 삶은 물에 살짝 데쳐 손톱으로 깠다. 그런 다음 참깨와 파, 간장을 버무린 감칠 맛 나는 양념을 해 놓았다. 꼬막 하나에도 정성의 단계를 넘어 남도의 문화를 버무렸다. 사진=권경안
음식은 문화적 유전인자이다. 이촌향도의 물결 속에서 디아스포라 남도인들은 그들의 음식문화를 계속 유지하면서 확대해왔다. 서울과 성남, 안산 등 서울 주변의 위성도시들로 간 남도인들이 낸 음식점의 기본 메뉴는 고향의 음식들이었다. 꼬막이 그랬고, 낙지가 그랬고, 홍어가 그랬다. 한정식도 그랬다. 특정한 고향의 음식을 먹으면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스스로 확인했던 것이다.
넓은 평야와 갯벌, 바다에서 난 농산물과 해산물은 전통시대부터 음식문화를 발달시켜왔다는 것은 새삼 강조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보성과 고흥 앞바다 득량만에서 나는 참꼬막, 무안과 영암의 갯벌에서 잡은 발이 매우 가느다란 세발낙지, 흑산도 앞바다에서 잡아 올린 홍어, 갖가지 입맛을 돋우는 젓갈 등 감칠 맛 나는 밑반찬이 특장인 한정식류 등은 남도사람들이 타향에서도 유지하던 문화적 유전인자요, 그 타향의 외지인들에게 보급한 음식문화이다.
최근의 예를 들면 웰빙 음식으로 각광 받는 메생이를 수도권 사람들이 알기 시작했다. 겨울철 굴(석화)을 넣고 뜨겁게 끓여 먹는 해초 메생이도 그 전파자는 디아스포라 남도사람들이다.
▶메생이국이다. 굴을 넣고 끓였다. 남도사람들은 음식을 만들 때 참깨를 충분하게 뿌린다. 양념이 양이 많고 가짓수도 많다. 넉넉하고 풍성한 인심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역시 이 국에도 깨를 뿌려 고소한 맛을 더하고 있다. 겨울철의 별미다. 김이 하얗게 모락 모락 피어나고 있다. 찬 바람에 몸이 오싹할 때 뜨거운 메생이국을 입에 대면 단박에 추위가 가신다. 예전엔 김(해태)발에 묻어 천대를 받았다. 지금은 오히려 김보다 더 비싼 '웰빙식'이 되었다. 사진=권경안
꼬막은 소설 ‘태백산백’에서 ‘쫄깃쫄깃한 맛’으로 표현된 것이 전국으로 퍼지게 된 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물론 외지에서 남도사람들 중심으로 먹어왔고, 그 사람들이 저변을 이뤄왔다. 그것을 바탕으로 확산된 것이다.
홍어도 그렇다. 디아스포라 남도사람들을 중심으로 ‘먹히던’ 홍어가 대중성을 띠고 알려지고 확산된 계기는 호남 정치세력의 성장과도 관계가 깊다. 1980년대 초반에야 영등포 시장에 홍어가 거래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정치계’에 홍어가 등장한 것은 1988년부터였다. 김대중(전 대통령) 총재가 이끄는 평화민주당이 출범한 해였다. 이 때부터 김 총재가 대변인실이나 기자실로 홍어를 ‘공수’하면서 ‘전통’이 생겼고, 15대에는 그 뒤를 이어 큰 아들 김홍일 의원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주요한 행사나 고비 때마다 ‘홍어파티’를 당사에서 열었다.
‘정권창출’이라는 비원을 이루고자 하는 의지가 홍어에 깃들었다. 김대중씨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서는 행사 때마다 가장 귀중한 손님이 홍어였다. ‘그 홍어가 손님을 맞이 했다’. 서울에서 ‘호남=홍어’의 ‘정치적’ 등식이 성립하고, 일반에도 확산되는 추세를 이었다. 당시 목포에선 흑산도 홍어를 구하기가 어려웠을 때 사람들은 “아따, 잡자마자 바로 (서울로) 올라갔지!”라고 입을 열었다. “(흑산도 홍어들은) (그래서) 귀하디 귀하다”고들 했다. 흑산도 앞바다에서 홍어는 적게 잡혀왔다. 홍어배들이 열 척을 넘긴 적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민주당이 중앙당사를 서울 마포에서 여의도로 옮긴 뒤 2005년 10월 13일 자축 홍어파티를 했다. 왼쪽부터 손봉숙 의원, 박광태 광주시장, 한화갑 대표, 박준영 전남지사, 신낙균 부대표, 이낙연 의원. 사진=임현찬
김대중 전 대통령은 얼마 삭히지 않는 쫄깃하고 찰진 홍어를 즐겨 한다고 알려져 있다. 김 전 통령은 신안 하의도 태생으로 흑산도 홍어를 각별하게 ‘사랑했다’.
유종필씨는 (‘유종필의 아름다운 선택’이란 책에서) “홍어회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가장 즐기는 음식”이라고 했다. 1992년 대선에서 실패하고 나서 김대중씨는 영국으로 떠났다. “다시는 정치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서였다. 그 영국 시절 목포에서 홍어를 아이스 박스에 넣어 보낸 것을 받아 보고는 그렇게 좋아했다고 한다. 그 ‘삭히고’ ‘썩힌’ 홍어를 들면서 ‘절치부심(切齒腐心)’했으리라.
지금은 서울 관악구청장인 유종필씨는 과거 민주당 대변인으로 이름을 얻었던 이다. 노무현씨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난 뒤 민주당에서 자신을 추종하는 지지세력을 이끌어내 열린우리당으로 분당했다. 열린우리당이 집권여당으로 권력을 행사했다. ‘미니’ 민주당은 ‘닭 쫓던 신세’가 되어버렸다. 이 민주당은 호남세력이었다. 하지만 유씨는 민주당을 지켰다. 민주당사에는 기자들 마저 찾아가지 않는 ‘만만한 홍어 거시기 신세’였다.
그런 가운데 ‘사기진작’ 차원에서 마포에 당사를 마련하고, 유씨가 ‘홍어파티’를 계획했다. 언론의 조명이라도 받아보기 위한 이벤트였다. 2005년 1월이었다. 그는 당시 “홍어는 민주당의 상징 어족으로, 당헌에는 없지만 관습당헌이나 마찬가지”라며 “민주당에 홍어가 돌아왔다는 것은 민주당의 부활을 알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 때 영남권세력 중심의 열린우리당은 더 이상 홍어를 먹지 않았다. 대신 ‘부산 도다리’를 먹었다. ‘도다리의 시대’였다.
정리하자면, 홍어는 정치적으로는 김대중 대통령 시절 ‘상한가’ 였다. 여의도 정치권에 몸담은 사람들과 또 정치권과 밀접한 이들은 “홍어가 무엇이길래” 하면서 홍어를 먹기 시작했다. 그것을 먹는다는 것 자체가 최소한의 ‘정치성’을 가미하지 않았다고 하지는 못할 것이다. 호기심 차원에서라도 먹기도 했을 것이다. 그럼과 동시에 일반 사람들에게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서울로 간’ 홍어는 1960년대 무렵부터 디아스포라 남도사람들을 중심으로 ‘기반’을 다져왔다면, 1990년대 후반부터는 호남정치세력의 성장과 더불어 ‘서울에 정착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그 홍어가 요즘 ‘정치계’에서는 포항 ‘과메기’에 밀리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 시절부터였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2008년 1월 18일 삼청동 금융연수원에서 기자들의 ‘노고’를 격려한다는 취지로, 이 당선인의 고향 포항에서 과메기 300상자를 수송해와 ‘과메기파티’를 열었다. 그 보다 5년 전인 2003년 1월 23일 인수위(노무현 대통령 당선인 시절, 이때는 민주당에서 열린우리당이 분당하지 않았다. 분당은 그 해 5월이었다.)시절에는 민주당 김홍일 의원(김대중 전 대통령의 아들)이 홍어 5상자를 보내와 파티를 열었다.
▶생김에 쪽파, 초고추장과 함께 올린 과메기.사진=허재성 기자
권력의 지각변동 속에서 홍어는 부활했다. 야당이 된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이 합당한) (통합) 민주당에 ‘홍어가 돌아온’ 것이다. (통합)민주당이 2008년 9월 18일 여의도 새 당사에 현판식을 갖고, 무소속으로 당선한 뒤 복당한 박지원 의원이 홍어 1마리를 지역구 목포에서 보내와 ‘홍어회 파티’를 열었다.
‘홍어의 시대’에서, ‘도다리의 시대’로, 다시 ‘과메기의 시대’로 정치 세계는 변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도 ‘서울로 간’ 홍어는 이제 대중적 사랑을 받는 단계로 적응한 것으로 보인다. ‘서울살이를 (그런대로) 잘 하고 있다’. 정치세력의 부침과 무관하게 이제 서울에서 홍어를 찾는 이들이 많아졌다는 것이 그 반증이다. 앞으로 홍어가 “서울서 살기 힘들다”며 귀향하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을 것 같다.
다음 <4>편은 '왜 홍어좆은 만만한 것인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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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곡소리나게 고달픈동네 곡성군 고달면 ㅎㅎ~아마 울친구들이 가장 마이 써묵은 본인소갯말인듯...먹고싶은 꼬막과 매생이국..정치판도가 홍어->도다리->과메기로 바뀌고 있다는 비유 ㅎㅎ~꿀한 정치세계의 한면을 보는것 같기도 하고..암튼 잘 읽었다..머리가 별로 안좋은 나로썬 에효~
야!!난 그놈 소개할때 더 웃지 못할 추억이 잇단다...ㅎㅎ 퇴근해 좋은글 읽고 머리 채우기 씨름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