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크리스챤 문인협회
2004년 신춘문예 수필부문 입선작
차를 마시는 마음
심 현 섭
그릇 속에 아무리 값진 금은보화로 가득 채운다해도 그 순간 그릇은 그릇으로서의 쓸모를 잃어버리고 만다. 기가 막힌 아름다운 집이라해도 온갖 물건들로 가득 채우고 나면 사람이 편히 살수 있는 집으로서의 기능은 그 순간 상실하고 만다.
반지는 가운데가 비어 있기 때문에 반지로서의 쓸모를 갖게 되고 빈 종이는 누군가가 그림을 그려 올리기를 기다리고 있게 된다.
사람의 일상에서도 비어 있는 자리가 있어야 그 자리를 채울 수 있는 일이 스며들게 된다. 도무지 빈틈이라고는 찾을 수 없을 만큼 바쁘고 빠르게 돌아가고 있다면 다른 일이나 생각은 머물 자리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여유라는 것은 바로 새로운 것들이 깃들 수 있는 빈자리를 말하는 것이다.
넉넉하고 남음이 있으며 덤비지 않고 사리를 너그럽게 판단할 수 있는 마음의 상태.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조용히 머물 수 있는 여백을 찾는 여유가 필요한데 이 여유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확신, 자기의 모습에 대한 파악이라고 본다.
느림 속에 여유가 있고, 조용히 잠시나마 자신을 관조하는 데서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된다. 여유로운 시간 속에서만이 자신을 바라볼 수 있고 사물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다.
한힘이 산길을 걸어가며 딸아이에게 말하였다.
'산길을 걸어가며 물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오솔길을 걸어가며 새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기쁘다.
산길을 가면서도 옆에서 흘러가는 시냇물 소리를 듣지 못하고 오솔길을 가면서도 숲 속의 새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하다.
그 만큼 느낄 수 있는 행복을 놓치며 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조용히 귀를 기울일 때 평소에 듣지 못하던 소리와 평소에 보지 못하던 것을 볼 수 있게 된다.
차를 마시는 마음은 우리의 일상 속에서 잠시 일탈하여 일상 밖에 것들에 눈을 돌리고 귀를 기울이려는 마음이다. 단순히 차 한 잔의 물리적인 섭취만을 떠나서 그런 마음의 자세가 차 잔에 담겨야만 비로소 우리는 차를 마신다고 할 수 있게 된다.
차는 더불어 가기를 좋아한다. 정겨운 벗과 님이 창 밖에 휘돌아 날아가는 낙엽을 보며 따끈한 정담을 나누는 것을 도와준다. 잔잔한 음악, 한 줄기 난초와 대나무 숲의 그림이 함께 하기를 염원한다. 외줄기 하얀 연기를 치맛자락처럼 휘감으며 올라가는 선향의 향기와 간들거리
는 촛불이나 창 틈에 스미는 달빛을 함께 하고 싶어한다.
물소리 들리는 계곡이나 파도 소리가 밀려드는 바닷가 산장에서도 외로운 이의 벗이 되어 함
께 하기를 기꺼워한다.
여명이 밝아오는 새벽녘에 창가에 앉아 선정에 잠기는 이의 도반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으니 차의 여유롭고 풍성한 멋이 정갈하기만 하다.
세상을 살아가며 속세에 물들지 아니하고 세상을 초월하며 살아가려는 이의 조용하고 믿음직스럽고 향기로운 벗이다. 차는.
'하늘과 땅이 비어있지 않으면, 온갖 만물을 들어있게 할 수 없을 것이오,
큰 강이나 바다가 비어있지 않으면, 온갖 시냇물을 용납할 수 없을 것이오,
산과 연못이 비어있지 않으면, 여러 가지 빠른 것들을 숨길 수 없을 것이며,
온갖 구멍은 아주 비어 있는지라, 바람의 진동으로 소리가 울리고
온갖 틈은 아주 비어있는지라, 해와 달이 그 빛을 비추는 것이다.'
허달성의 허곡기(虛谷記)에 나오는 말이다.
우리 마음이 비어있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것들이 산처럼 쌓여있다 한들 어찌 담을 수 있을까. 우리 마음 속에 아무리 좋은 것들로 가득 차 있다한들 더 이상 담을 자리가 없다면 그 무슨 소용이겠는가.
차 한 잔으로 마음의 여유를 마련하는 것은 그래서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