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시(詩)”에 나타난 잊혀져 가는 것들 (1부)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시'처럼 살았던 배우 윤정희>
1. 작품의 배경
영화배우 윤정희(손미자)가 얼마 전(2023,01.20) 향년 79세의 나이로 프랑스 파리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그가 활동했던 60~70년대 당시, 우아함과 지적인 이미지를 동시에 갖춘 한 여배우의 등장은 많은 사람들에게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이렇게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녀였기에 갑자기 들려온 여배우의 알츠하이머 투병사실은 안타까움과 쓸쓸함으로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했다. 더구나 병환 중에 가족들과의 법정소송 등의 불화설이 있었기에 그녀의 마지막 생의 애석함이 더해지면서, 2010년 그녀의 유작이 된 영화 『시(詩)』가 떠올랐다.
이 작품은 예술영화로 2010년 칸 영화제 각본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이창동 감독’은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사건’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이 사건은 2004년 당시, 밀양시에서 성폭행 가해자로 44명이 지목되었지만 밝혀진 숫자 일 뿐, 용의자는 100명이 넘었던 것으로 알려진 사건이다. 당시 가해자는 17~19살인 고등학생들이었기 때문에 소년법에 적용되어 그 누구도 전과자가 되지 않았던 사건이기도 하다. 2023년인 올해, 가해자였던 그들의 나이가 36~39살로 결혼 적령기가 된 시점이기에 밀양에 고향을 둔 청년들은 배우자 가족들의 결혼반대에 부딪히는 해프닝까지 생긴다고 하니, 이 사건은 시간이 지난 지금도 얼마나 중대한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작품 속에 나타난 성폭행 사건은 가치지향적인 사고의 주체로써 이 사건을 지켜본 이창동 감독의 사회를 보는 시선과 알츠하이머를 앓는 온화한 표정의 주인공 윤정희의 내면연기가 어우러져 실제사건의 중대성을 배가시키고 있다. 때문에 배우의 사망소식을 접한 이 시점에 작품 ‘시’가 갖는 의미를 되짚어본다.
2. 윤정희와 작품 속 알츠하이머
알츠하이머병은 1907년 독일의 정신과 의사 ‘알로이스 알츠하이머(Alois Alzheimer)박사에 의해 최초로 보고되면서 그의 이름에서 명명된, 퇴행성 뇌질환으로는 치매를 일으키는 가장 흔한 병으로 알려져 있다. 공교롭게도 작품의 내용 역시 알츠하이머로 기억을 잃어가는 여주인공(윤정희)이 기억을 붙잡기 위해 일상의 아름다움을 찾아 메모하고 글을 써간다는 이야기로 당시 윤정희 배우의 상황과 너무나 닮아있다. 알츠하이머는 병의 특성상 매우 서서히 발병하여 점진적으로 진행되는 경과를 보여주는데, 작품에서 주인공이 겪는 과정도 이와 유사하다. 그녀 역시 영화 『시』 촬영 당시 알츠하이머 초기 환자임에도 극중 알츠하이머 투병중인 ‘미자’역을 연기한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알츠하이머로 기억을 잃어가는 과정에서 보이는 치매 “초기에는 ‘名詞’, 그 다음에는 ‘動詞’가 떠오르지 않는다.”는 짧은 문장은 필자에게도 잊을 수 없는 대사로 남아있다. 영화 중반쯤 주인공 미자의 상태를 살펴보면, 의사와의 상담 중에도 어제는 ‘비누’란 말이 생각나질 않았다며 수줍게 웃는다. 병원을 나와 약국에 들렀을 때도 ‘지갑’이란 적절한 단어도 찾지 못해 약사에게 “말이 생각이 안 나네, 돈 넣는 거요. 요만한 거요.”라고 말한다. 택시를 타고도 “저기로 가주세요 저기! 시외버스 많이 있는데, 지방 가는 버스” 라며 기사에게 명확히 ‘터미널’이라는 행선지 단어를 못 밝힌다. 이렇듯 그녀는 일상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단어조차도 사용할 수 없는 상태의 치매 전조증상을 보여주고 있다. 알츠하이머를 65세 미만에서 발병하는 ‘조발성(초로기)’과 65세 이상에서 발병하는 ‘만발성(노년기)’으로 구분한다면, 작품 속 미자는 66세의 나이로, 서서히 진행되는 노년기 치매환자로 그려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작품 『시(詩)』의 줄거리
강가를 낀 어느 작은 마을. 졸졸 흐르는 청량한 물소리와 아이들의 말소리가 하모니를 이루는 아름다운 시골의 모습이 펼쳐진다. 그리고 여자아이(희진)의 시체가 떠오르고 물에 빠진 아이의 모습을 가리키기라도 하듯, ‘시’라는 글자가 수직을 보이며 영화는 시작된다. 화면은 다시 병원 대기실로 바뀌고, 양미자(윤정희)를 부르는 간호사의 안내로 의사와 마주한 미자. 그녀는 의사에게 팔 저림을 호소하지만 그녀의 말 속에서 의사는 뭔가 수상쩍음을 포착한다. 그의 나이 66세. 의사는 팔 저림보다 단어를 잊는 것이 더 시급하다고 말하지만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미자. 그녀는 병원을 나오면서 딸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건강이 평균치 이상임을 자랑한다.
그리고 미자는 병원을 나오는 길에, 실성한 듯, 울부짖는 엄마의 모습과 그 뒤를 따라가며 울먹이는 남자아이를 본다. 하지만 이들은 강물에 몸을 던져 떠내려 온 어느 여학생의 가족이었다는 것을 그때까지만 해도 알지 못했었고, 그 사건이 자기와는 무관한 일이었다. 간병 일을 하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하는 미자. 그녀는 서민 아파트에서 이혼한 딸이 떠맡긴 중학생 외손자와 단 둘이 생활하며, 중풍에 걸린 회장 할아버지 강노인(김희라)의 간병 일을 하며 어렵게 살아간다. 그 날도 간병 일을 마치고 아래층에서 슈퍼를 운영하는 강노인의 며느리에게 낮에 본 사건을 말해 보지만 강노인의 며느리 역시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미자 만이 그 사건이 중요할 뿐, 타인의 일에 모두는 관심을 두려하지 않는 모습이다. 집에 온 미자는 외손자 종욱(이다윗)에게도 그 여학생의 사건에 대해 물어보지만 “할머니가 알아서 무엇 하느냐”는 퉁명스런 대답만이 돌아온다.
미자는 다음 날 ‘시’를 배우겠다고 결심한 후, 서둘러 마을 문화원을 찾아가고 그곳에서 시인 김용탁(김용택)의 강의를 듣게 된다. ‘시를 쓰기 위해서는 잘 보는 것.’ 그녀는 모든 사물에 주의를 기울이고 아름다움을 찾으려 노력한다. 미자는 항상 하얀 모자를 쓰고 예쁜 옷을 좋아하고 가끔은 엉뚱한 질문을 하는 캐릭터로, 시를 쓰고자 하는 미자의 모습은 나이에 비해 들국화 같이 순수하고 청초한 여성으로 등장한다. 그녀는 처음에는 살구꽃 등 눈에 보이는 외적인 것들에서 아름다움을 찾고자 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미를 찾아가게 된다.
얼마 후, 작품 초반에 떠오른 시체는 중학생 외손자와 그의 친구들과의 집단 성폭행으로 인해 자살한 여학생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미자는 이 과정에서 죽은 여학생의 모습을 회상하며 아끼던 외손자에 대한 실망감과 죄책감에 이어 가해자 가족이 되어버린 자신의 복잡한 심정과 이 속에서 시상(詩想)을 찾아야 한다는 혼란을 겪게 된다. 이 사건이 있기 전, 그녀가 시상을 찾았던 곳은 아름답고 깨끗한 것이었으나, 외손자의 일로 가족의 죄를 인정하고부터는 세상의 더러움과 가족의 치부를 느끼게 되고 이에 속죄하는 것으로 시상을 찾게 된다. 이는 문화원 시인의 “시상은 스스로 오는 게 아니라, 자기가 찾아야 하는 것”이라는 말에 기인한다. 결국, 그녀는 외손자를 경찰에 신고하고 죽은 여학생을 향한 속죄의 뜻이 담긴 ‘시’인 희진을 향한 ‘아네스의 노래’를 써내려 간다.
"그곳은 어떤가요. 얼마나 적막하나요.
저녁이면 여전히 노을이 지고,
숲으로 가는 새들의 노랫소리 들리나요
(중략)
이젠 작별을 할 시간,
머물고 가는 바람처럼 그림자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