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후기 청도 출신의 문신.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약생(若生), 호는 두촌(杜村). 밀직 부사 박양언(朴良彦)의 후예로서, 할아버지는 중서령 박원광(朴元光)이고 아버지 보승오위 박기봉(朴奇鳳)의 둘째아들이다. 청도 밀양 박씨 밀직부사공파 두촌공 문중의 입향조이다. 어머니는 직장 김인계(金仁桂)의 딸로서 경주 김씨이다. 처는 현령 백문질(白文質)의 딸로서 청도 백씨이다.
박양무(朴楊茂)[?∼?]는 고려 후기 공민왕 때 급제하여 선무랑(宣武郞)에 오르고 김천(金泉) 독우(督郵)[찰방]를 지냈으며, 포은 정몽주 문도들과 교유하며 준재로 촉망 받았다. 고려의 국운이 다함을 보고 이를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만수산(萬壽山) 깊은 골짜기로 들어갔다가 막역지우인 우현보(禹玄寶) 등 만수산 동지들에게 “사직이 없어졌는데 선사(先祀)마저 받들지 않는다면 훗날 지하에서 무슨 면목으로 군친(君親)을 뵈오리까.”라는 말을 남기고 도롱이에 삿갓을 쓰고 낙향하였다. 청도군 화양읍 대성산(大城山)에 들어가 은거하면서 스스로 두촌이라 호를 지었다. 세상에서도 이를 두고 두문동 72현과 같다고 하여 그를 ‘두촌 선생(杜村先生)’이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