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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간화선 수행체계 개관
2. 대혜의 간화선과 묵조선
1) 간화선의 탄생
간화선은 불교 수행방법 중 하나로 화두를 들고 참구하는 선수행법이다. 자기 자신의 성품을 깨닫는 참선법으로 화두선話頭禪이라고도 하는데, 석가모니 부처님 이래 인도와 중국을 거치면서 다듬어진 불교 수행법이다. 간화선법은 4세기경 달마 대사가 동쪽으로 건너와 전한 것에서 유래하여, 간화선의 원류가 되는 조사선祖師禪으로 구체화 되는 데는 7세기경 선종 6조가 된 혜능(慧能, 638~713)의 공로가 크다. 육조대사六祖大師, 조계대사曹溪大師 또는 대감선사大鑑禪師로 불리는 혜능이 돈오선법을 제창하면서 선종의 실질적인 기반을 확립하였으며, 조사선으로 진화하면서 기존 불교와는 다른 중국 선종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선종은 당, 송을 거치며 황금기를 구가하며 수 많은 선지식들을 배출하였는데, 12세기 중반 대혜 종고(大慧宗杲, 1089~1163)가 나오면서 조사와 수행자 사이의 문답을 정형화한 공안을 간소화하는 간화선을 창안創案 한다. 일상 생활에서 간소화한 공안, 즉 화두를 참구하는 간화선을 제창한 대혜는 안휘성安徽省 선주시宣州市 영국현寧國縣에서 태어났다. 태어나자마자 얼마 안 있어 가세가 기울었고, 10살 때는 화재로 집이 불타버리기도 하였다. 12세에 향교鄕校에 들어가 유학을 공부하였고, 16세에 출가出家, 불경을 공부하고 선어록을 보다가 선의 길로 접어들었다.
禪師는 1089년 北宋에서 태어나 1163년까지 살았던 임제종 제16대 법손이다. 요나라 침범이 번번하던 북송말기 선주 영국현 사람이고 성은 해씨奚氏 이다. 어머니의 꿈에 神人이 한 승려를 데리고 왔는데 얼굴이 검고 코가 높았다. 내실에 들어오기에 그 사는 곳을 물었는데 대답하기를 북악이라고 하였다. 곧 아이를 가졌는데 태어날 때에는 흰빛이 집을 꿰뚫어 읍민들이 모두 놀라고 기이하게 여겼다고 한다. 태어난 해는 북송 철종 원우 4년 11월 10일 사시(巳時)에 태어났다.
선사의 이름은 종고(宗杲)다. 나이 13세가 되어 향교에 들어가 同學과 장난치다가 벼루를 잘못 던져 스승의 모자에 맞고 삼백 냥을 갚아 주고 돌아와 말하기를 “세속의 책 읽는 것이 어찌 出世의 법을 궁구하는 것과 같겠는가?”라고 했다. 16세에 출가하고 여러 곳에 다니다가 태평주 은적암(隱寂庵)에 가니 암자의 스님이 후히 대접하였다. 그 암자의 스님이 말하기를 “어제 저녁 꿈에 가람신이 부탁하여 말하기를 다음 날 운봉열선사(雲峰悅禪師)가 절에 올 것이라고 했는데 그대가 이 분인가?”라고 하였다. 이에 열선사의 어록을 보였는데 선사는 한번 보고 바로 외우니 이로 부터 사람들이 운봉선사의 후신(後身)이라고 했다. (대혜종고 지음, 전재강 옮김『서장書狀』<대혜선사(大慧禪師) 행장(行狀)>에서 인용.)
처음 대혜는 조동종 부용도해(芙蓉道楷, 1043~1118)의 제자인 동산洞山의 미화상微和尙 등에게 조동선을 배웠고, 이어 21세 때 강서성江西省 의춘시宜春市 정안현靖安縣 보봉사寶峰寺에 머물면서 임제종 황룡파 3세 담당문준(湛堂文準, 1061∼1115)으로부터 가르침을 받는다. 담당문준이 죽으면서 원오극근圓悟克勤을 찾아가 ‘일대사를 이루라’고 하였으나, 대혜는 각범혜홍(覺範慧洪, 1071∼1128)의 문하에 머무는 등 10년을 떠돌다 그리고 37세 때인 1125년이 되어서야 문준의 유언을 따라 양기파 4세인 원오극근 선사를 찾아간다. 거기서 설법을 듣다가 문답 끝에 깨닫게 되는데, 이로서 대혜는 양기방회(楊岐方會, 993∼1046), 백운수단(百雲守端, 1025~1072), 오조법연(五祖法演, ?-1104), 원오극근(圜悟克勤, 1063 ~ 1135) 으로 이어지는 임제종 양기파의 법을 잇게 된다.
선화 7년 을사(1125), 선사의 나이 37세시에 비로소 변경 천령사에서 원오극근 선사를 참례할 수 있었다. 겨우 40일이 지난 어느 날 원오 선사가 법당을 열고 법문하였다. “어떤 스님이 운문문언(雲門文偃,864-949) 선사에게 물었다. ‘무엇이 모든 부처님이 나온 곳입니까?’ 운문 선사가 말씀하였다. ‘동산이 물 위로 간다.’라고 하였는데 천령사의 원오는 그렇게 여기지 않는다. 나는 그 스님에게 이렇게 말하겠다.” “훈풍이 남쪽에서 불어오니 집 모퉁이에서 서늘한 기운이 생긴다.”라고 하였다. 대혜 선사가 이 말을 듣고는 홀연히 앞뒤가 끊어졌다. 원오선사가 그를 택목당에 살게 하여 시자의 일은 하지 말고 오로지 보림(保任)에만 힘쓰게 하였다.
뒷날 원오선사의 방안에서 어떤 스님이 “유(有)와 무(無)가 마치 등칡이 나무를 의지하는 것과 같다.”라는 화두에 대해서 묻는 것을 듣고는 대혜 선사가 드디어 물었다. “들으니 당시에 오조법연(五祖法演,?-1104) 선사에게서 일찍이 이 화두에 대해서 물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때 무어라고 말씀하셨습니까?”라고 하니 원오선사가 웃기만 하시고 답을 하지 않았다. 선사가 말하였다. “화상께서 이미 대중들이 있는데서 물었는데 지금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이 문제이겠습니까?” 원오 선사가 부득이해서 말씀하였다.
“내가 오조 선사에게 묻기를, ‘유와 무가 마치 등칡이 나무를 의지한 것과 같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오조 선사가 말하였다. ‘본을 뜨려고 해도 본을 뜰 수 없고 그림을 그리려 해도 그릴 수 없다.’ 또 물었다. ‘나무가 넘어지고 등칡이 말라버릴 때는 어떻습니까?’ 오조선사가 말하였다. ‘서로 따르느니라.’라고 하였다.”라는 말을 할 때, 그때 대혜 선사가 그 자리에서 활연히 크게 깨달았다. 그리고 말하였다. “저는 알았습니다.”라고 하니 원오 선사가 몇 단락의 인연을 하나하나 들어가면서 따져 물었는데 모두 다 대답하여 막힘이 없었다. 원오선사가 기뻐하여 선사에게 말하였다. “나는 그대를 속이지 못하겠구나.”라고 하며 임제정종기(臨濟正宗記)를 지어서 전해주고 기록을 관장하는 소임을 맡겼다. 선사는 이에 비로소 원오 선사의 제자가 되었다.(범어사 무비스님, 서장(書狀) 강설)
대혜가 살았던 북송 말, 남송 초는 금金나라의 공격으로 북송의 수도 개봉開封이 함락되는 등 혼란한 시기였다. 금과의 관계를 둘러싸고 주전파主戰派와 강화파講和派가 첨예하게 대립하였는데, 주전파인 대혜가 53세 때인 1141년 한 재齋에서 지은 '신비궁神臂弓'이라는 게송偈頌이 빌미가 되어 강화파인 진회秦檜에 의해 귀양을 가게 된다. 귀양을 가서도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 편지로 제자들을 지도하였는데, 유배생활 동안 대혜와 지식인들이 주고받은 이 편지들을 모아 엮은 책이 『서장書狀』이다. 때론 자상하고 간절하게, 때론 사정없이 질타하면서 재가 신도들을 가르쳤는데, 특이한 것은 이들 편지를 주고받은 인물들이 출가자가 아닌 재가자들이라는 사실이다.
편지 내용을 보면 간화선의 요지와 수행방법을 낱낱이 일깨워 주고 있는데, 당시에는 낯선 간화선으로 지도하고 있다. 이상한 것은 간화선법은 그의 방대한 저술1 에는 나오지 않고, 편지 같은 작은 서술에만 등장한다는 것인데, 대혜가 불교교육을 받지 못한 재가자들을 위해 개발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간화선은 불교 경전이나 공안집을 이해하지 못하는 재가자들을 위해 대혜가 고안한 지도방법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조주의 무자 화두는 공안의 핵심적 구절, 즉 오직 ‘없다’는 뜻의 한 마디 “무無”에만 마음을 집중시키는 수련법이다.
宋 시대에 공안이 명상의 도구로 사용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주로 大慧 宗杲(1089~1163)의 저술에 근거를 두어 왔다. 大慧는, 趙州의 단호한 “없다”와 같은, 특정 공안의 “핵심적 구절”(話頭)에 마음을 집중하는 방법을 주창하여 看話禪이라고 알려진 선 전통을 일으켰다. 그러나 大慧의 경우에 있어서도 상황은 결코 명백하지 않다; 大慧는 방대한 작품을 남겼지만, 화두에 대한 “비서술적인” 접근방법을 옹호하는 구절들은 대체로 그의 “편지”(大慧書)와 같은 소수의 작은 저술들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리고 이 “편지”들은 특히 불교의 경전적, 학문적 전통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거의 교육받지 못했던 재가 문인 사도들에게 보낸 것이었다. 大慧가 재가인의 후원을 얻기 위해 당시의 다른 선사들과 활발한 경쟁을 벌였던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며, 특별히 그는 그의 재가 신도들을 위해 간소화된 간화선을 고안했던 것으로 보인다. (로버트 샤프 Robert Sharf, 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선 공안, 어떻게 사고할 것인가 How to Think with Chan Gongans」(2010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Day 1 <간화선, 세계를 비추다>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p. 98.)
간화선이 불교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재가자들을 위한 수행법이라는 것인데, 송대 이후 일부 수도승들에도 지지를 받게 되면서 각광을 받게 된다. 로버트 샤프(Robert Sharp) 교수에 따르면, 송대 이후 후원이 급격히 줄어듦으로 인해 불교 저술 활동 또한 줄어들게 되었고, 복잡한 공안 장르 참여는 물론 공안 감상조차 어렵게 되어 간화선을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버드대 나타샤 헬러(Natasha Heller) 박사도 대혜의 가르침은 재가불교의 수행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간화선은 재가신자들의 요구에 맞도록 적응시킨 수행법이라고 말한다.
明本은 설법에서 瞿霆發(구정발, 1251~1312)이 특별히 불교에 전념했던 신자가 아니라는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벼운 불교 수행자임에도 불구하고 瞿霆發은 임종 때에 화두를 들었는데, 그가 재가신자로서 그렇게 했다는 것은 明本이 사대부 제자들에게 가르쳤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미리암 레버링Miriam Levering과 모튼 슐러터Morten Schlütter의 저술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간화선은 그 초기단계, 즉 大慧 宗杲(대혜 종고, 1089~1163)의 가르침에서부터 재가 불교 신자의 수행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었습니다. 미리암 레버링은 大慧가 보설普說 설법을 특히 재가신자들의 요구에 맞도록 적응시켰다고 주장합니다. (나타샤 헬러 Natasha Heller, UCLA,「거울을 닦는 도구: 中峰明本의 재가신자들에 대한 가르침에서 화두」(2010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Day 1 <간화선, 세계를 비추다>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p. 165.)
대혜가 68세 때인 1156년 진회가 죽자 만 15년의 유배流配 생활에서 돌아와 아육왕사阿育王寺의 주지로 취임하게 된다. 굉지정각의 추천이 있었다는데,『인천보감人天寶鑑』에 따르면 굉지는 그가 돌아오면 대중이 많아져 식량이 모자랄 것을 대비 물품을 두 배로 비축하였다가 전해주었다고 한다. 대혜와 굉지의 사이가 각별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굉지가 죽기 하루 전 대혜에게 유서를 보냈고, 대혜는 그날 밤으로 굉지가 있던 천동산으로 달려가 굉지의 장례식을 주관하였다고 한다.
20년 가까이 영달(榮達)을 누리던 진회(秦檜)가 죽자, 만 15년의 유배 생활(流配 生活)에서 돌아와 아육왕사(阿育王寺)에 자리를 잡은 종고(宗杲)는 이전(以前)의 칼날같이 날카롭던 성품(性品)이 원숙(圓熟)하여 부드러워졌다고 하는데, 이런 변화(變化)의 한 예(例)가 종고(宗杲)가 그렇게도 비난(非難)하던 조동종(曹洞宗) 묵조선(黙照禪)의 대종장(大宗匠) 천동 굉지 정각(天童 宏智 正覺 : 1091~1157)의 입적(入寂) 추모식(追慕式)에서 장례(葬禮)를 친(親)히 집행(執行)하는 여유를 보이기도 했고, 또 공자묘(孔子廟)를 짓는 공사(工事)에 자금(資金)이 부족(不足)해 중단(中斷)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20만 전(錢)을 보내는 등 불교(佛敎)․유교(儒敎) 등 종교(宗敎)의 벽을 두지 아니하고 초탈(超脫)하였다고 함. (박성일의 역사 ․ 문화 사전 카페에서 인용.)
2) 대혜의 묵조선 비판
대혜와 굉지 두 사람은 매우 긴밀한 사이였지만, 대혜는 굉지로 대표되는 조동종의 묵조선을 ‘묵조사선默照死禪’이라고 비판하였다고 한다. 묵조선을 직접적으로 비판 한 것은 아니고 묵조선을 빙자한 묵조사선을 비판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학계는 말한다.2 물론 묵조선과 묵조사선은 구변되어야 하겠지만, 금나라의 침입으로 북송이 멸망하고 조정이 남하하는 시기에 형식적인 선정과 의식에만 몰두하며 침묵하고 있는 조동종의 선풍에 반감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서장』에는 ‘근년 이래로 일종의 그릇된 무리들이 있어서 묵조선을 말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하루 중에 이 일에 관여하지 말고 쉬어가고 쉬어가되, 소리를 만들지 말라.”고 하면서 묘한 깨달음은 구하지 않고, 다만 묵묵함으로 지극한 이치를 삼는다고 비판하고 있다.
오늘날 도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승속을 막론하고 누구나 두 가지 병에 심각하게 걸려 있다. 그 하나는 말과 글귀를 너무 배워 그것을 근거로 기묘한 생각을 하는 병이다. 다른 하나는 달을 바라보면서도 손가락을 버리지 못하고 말과 글귀에서 깨달음에 들어가려 하면서도 佛法과 禪의 도는 말과 글귀에 있지 않다는 말을 듣고서는, [그 효용마저] 모두 폐기하고 줄곧 눈을 감고 죽은 체 하는 병이다.
말하자면 ‘조용히 바로 앉아 마음을 관찰하는 고요히 비추기(黙照)’라는 것이다. 이 사악한 견해로 무식하고 용렬한 사람들을 유혹하면서 말하기를, ‘하루 종일 고요하게 하는 것이 바로 하루의 공부이다’라고 한다. 안타깝구나. 정녕 알지 못하겠는가? 이 모든 것이 귀신 집의 살림살이처럼 무의미하다는 것을. 이 두 가지 심각한 병을 제거해야 비로소 배울만한 바탕을 지녔다고 할 만하다. (변희옥, 서울산업대 강사,「大慧의 文字 공부 비판과 言語 中道」)
묵조선을 단순히 적조정묵寂照靜默의 무기無記나 현실 도피주의의 한 형태라고 본 것이다. 깨달음에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한적한 곳에 마냥 앉아있기만 하는 묵조선의 수행형태는, 단지 돌에 눌려 있는 풀과 같아서 완전한 깨달음에는 이를 수 없다는 주장이다. 돌로 눌러 놓을 것이 아니라 풀은 물론이고 뿌리까지 남김없이 깡그리 뽑아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대혜는 그들이 만약 한적한 곳을 발견하고 아무 근심 걱정이 없는 상태를 얻게 되면 그들은 그것을 최상의 평화와 축복이라고 여기지만 그것이 단순히 돌에 눌려있는 풀과 같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 대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대전환의 체험인데 그것은 풀을 돌로 누르는 것처럼 단순히 우리의 문제를 억누르는 것이 아니고 풀을 뿌리 채 뽑아버리는 것이라고 대혜는 주장한다. (제임스 랍슨 James Robson, Harvard University,「大死大悟의 선: 종교유형으로서의 간화선에 대한 고찰 Born-Again Zen Again: Reflections on Kanhua Chan as a Religious Style」(2010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Day 1 <간화선, 세계를 비추다>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pp. 360~361.)
대혜의 눈에 비친 묵조수행은 단지 정定에만 머물러 있는 고목선枯木禪에 불과하였다. 특히 초심자들에 있어 그냥 묵묵히 앉아있는 묵조선은 망상妄想과 무기無記에 빠지기 쉬운 단점이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간화선은 공안을 참구하게 하므로 써 깨어있게 하는 장점이 있다. 자극도 되고 그 효과도 커진다고 본 것이다.
간화선이 혜慧를 주主로 삼는 데 비해 묵조선은 정定을 주로 삼는다는 특징이 있다. 따라서 정과 혜의 어느 쪽을 주장하느냐에 따라 묵조와 간화가 나뉘게 되는데, 대혜에게 있어 공안은 단순히 고인의 선문답이 아니라 깨달음으로 가는 고속 수단이었던 것이다. 공안이 이전과는 다른 선법, 즉 공안“선”(간화선)이 된 것이다.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는 공안에 의해서 혼침(昏沈)과 산란한 마음(도거掉擧)의 망상을 제거하는 것을 그 첫째 목표로 삼았다. 그래서 대혜는 조주선사의 무자공안(無字公案)을 강조한다. 그리하여 무자삼매(無字三昧)에 들어 내외가 타성일편(打成一片)되는 심경에 도달하여 그것으로써 모든 분별망상의 삿된 생각을 불식시켜가는 것이다. 그리고 화두에 대하여 대의단(大疑團)을 불러일으켜 대의대오(大疑大悟)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제나 성성적적(惺惺寂寂)한 마음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 (김호귀, 동국대 강사, [불교쟁론] 20. 看話禪과 默照禪.)
대혜는 산란한 마음을 제거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화두를 참구하는 간화선법을 제안하였다. 화두에 전념하면 끊임없이 일어나는 잡념을 제거해 줄 뿐 아니라 ‘혼침昏沈’에 빠지는 것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화두에 몰두하다 보면 대의심을 유지하게 되고, 항시 깨어 있게 하여 종국에는 확철대오廓徹大悟에 이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간화선을 창시한 대혜의 눈에 비친 묵조수행은 목적의식조차 없는 나태한 고목 수행처럼 보였다. 묵조선은 깨달음을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깨달음을 얻을 필요도 없다고 방관 傍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묵조선에서는 고요하게 앉아서 좌선하고 있는 그 자체만으로 충분하다고 하는데, 이는 조동종의 독자적인 수행법이 아니라 인도의 고대로부터 내려온 오래된 수행법이기도 하다. 인도 불교가 중국에 소개되고 어느 정도 습선기를 거쳐 선종의 초기 모습을 보여주는 자료가『능가사자기楞伽師資記』다.3 이 책은 신수의 선법을 배운 정각(淨覺, 683-750)이 쓴 책으로『능가경』의 심요心要를 선지禪志로 한 초기 선종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책에는 시종일관 부처의 본질은 좌선이라고 강조하면서 경을 공부하기 보다는 좌선하라고 권하고 있다.
가만히 앉아서 아무 일도 없다면, 문 닫은 방안의 등불처럼 능히 어둠을 깨고, 환하게 물건을 비춰낼 수가 있다. 우리들 마음이 근원적으로 맑다는 것을 깨달으면, 모든 희망은 이루어지고, 모든 수행은 충족되고 모든 일이 맺어져서 다시 헤멤의 세계로 돌아가는 일은 없다.
(중략)
좌선은 참으로 효과가 있다. 그것은 몸으로써 실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림의 떡은 역시 먹을 수 없고, 사람들에게 음식물 이야기를 해준다고 어찌 그것으로 배를 채워 줄 수 있겠는가? (柳田聖山 著 / 楊氣峰 譯『초기선종사, 능가사자기·전법보기』pp. 94~96.)
좌선할 때는 정성을 다하여 자기의식이 비로소 작용해나감을 똑바로 알아야만 한다. [의식은] 끊임없이 움직여 흘러나가므로, 그 진행 실정에 따라 모든 동향을 똑바로 알아야 한다. 다이아몬드와 같은 지혜로써 그런 것을 거두어 마치 초목이 아무 것도 모르는 것처럼 [무심하게] 해야 한다. 아무 것도 아는 바가 없는 것이라야 모든 것을 아는 지혜라고 부른다. (柳田聖山 著 / 楊氣峰 譯『초기선종사, 능가사자기·전법보기』p. 108.)
선종 초기는『능가경』의 심요를 바탕으로 수선하는 ‘능가종’이 주를 이루었으며, 이들은 묵조선에서 말하는 지관타좌, 즉 그냥 앉아있는 좌선 만을 강조하였다. 좌선하면서 오직 부처님 이름을 부른다거나, 자기 신체를 세밀하게 관찰하는 명상법을 소개하고는 있지만, 그 기반은 오직 좌선이고 특별할 것이 없는 묵조 그 자체였다.
대혜는 이런 기존의 좌선수행법을 보고 당시 이미 대중화된 공안선을 도입한다. 묵조 좌선법에서 드러난 허점을 보완하기 위한 공안을 참구하는 새로운 수행법을 개발하였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간화선 역시 좌선을 기본으로 하기 때문에 묵조선 자체를 완전히 부정할 처지는 아니었을 것이다. 기존 수행법에 당시로서는 선어록으로 무르익은 수행풍토인 공안을 반영한 새로운 수행법을 창안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대혜의 묵조선 비판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송나라가 북중국에서 망하자 대혜는 남쪽으로 피해 가 전의 스승 원오가 있는 곳에 잠시 머물렀다. 거기서 조동종의 선사 굉지정각(宏智正覺, 1091~1157)을 알게 됐을 법하다. 굉지정각은 그때 원오를 방문 중에 있었던 것이다.
(중략)
그의 스승 원오와는 달리 그는 조동종과 좋은 관계를 유지한, 관용성 있는 인물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조동종의 가르침의 일부 요소를 채용하기도 한 사람이다.
(중략)
중국 선의 남종과 북종 사이의 논쟁의 경우에서처럼 공안선과 묵조선 사이의 대결에 있어서 정확한 적대적 입장을 자세하게 이야기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묵조선의 대표인 굉지(宏智)에 의하면 깨달음은 사물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지식이며 실재의 대상을 만들지 않는 조명이다. 그래서 그 역시 대상 없는 명상을 주장했다. 그는 부수적으로 공안참구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자신이 필요에 따라서 새로운 공안을 만들고 선배들을 모델로 하여 시를 지었다. (柳田聖山 著 / 楊氣峰 譯『초기선종사, 능가사자기·전법보기』p. 115.)
부연하자면 대혜가 묵조선을 비판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기록을 보면 대혜는 묵조선을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당시, 딱히 묵조선이란 것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대혜는 기존의 좌선수행법이 빠지기 쉬운 적조정묵의 무기인 묵조사선을 비판하고 있을 뿐이다. 대혜가 좌선을 바탕으로 한 기존의 수행형태인 묵조라고 하지 않고 묵조사선이라고 한 것은, 당시 유행하던 아류의 묵조사선을 말한 것이지 굉지정각이『묵조명』에서 말한 묵조는 아니라는 것이다. 좀 더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묵조의 선과 묵조사선은 차이가 있다는 것으로, 그래야 대혜와 굉지의 관계 등을 포함 많은 것이 설명된다.
3) 조동종의 화두 수행
묵조선에서는 고요하게 앉아서 좌선하고 있는 그 자체가 이미 부처라고 하여 깨달음 자체를 부정한다. 원래가 부처인데 별도로 깨달음의 세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묵조선은 일상생활 속에 이미 본래면목이 드러나 있다고 보고 묵묵히 앉아 있는 것이고, 이와는 대조적으로 간화선은 화두를 의심하고 타파하는 것으로 본래면목이 드러나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몸을 단정히 하고 앉아서 ‘자수용 삼매’ 속에 고요히 머무르면, 그것이 그대로 부처님의 심신이며, 자기가 살고 있는 세계의 모든 존재가 깨달음의 세계가 된다는 말이다. 3업은 몸(행동) ․ 입(말) ․ 마음(생각)의 세 가지 실천 항목을 말하며, 여기에 부처님 마음을 표방하고 부처님 모습이 되어 ‘삼매’ 경지에서 단정히 좌선한다. 그저 멍하니 앉아있는 것과는 천양지차가 있다. (가마다 시게오 ․ 기노 가즈요시 지음, 양기봉 옮김, 『현대인과 禪』 p. 51.)
이해도 되고 수긍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깨달음을 떠나 적극적인 간화선에 비해 수동적이라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또, 속세를 떠나 수행에만 전념하는 수행자에게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사회참여에 적극적인 수행자나 속세에 살며 수행을 겸하는 재가자에게는 더욱 더 어려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 조동종은 화두 수행을 하지 않았는가?
중국에 가서 임제종과 조동종을 두루 공부하고 돌아온 일본 조동종의 개조開祖 영평도원永平道元4 선사는 300개의 공안을 모아서 공안집을 만들고 공안을 활용 지도하였다고 한다. 은밀한 선지도의 속성상 어떻게 공안을 어떻게 활용하였는지를 보여주는 기록들은 남겨져 있지 않다. 그러나 도원이 공안을 가까이하였고, 불교수행의 핵심적인 부분으로 간주, 제자들을 가르치는 도구로 사용하였다는 것은 학계의 정설이다.
개별적 참문을 위해 주지의 방에 입실入室했던 가까운 제자들을 가르칠 때 정확히 어떻게 도원이 공안을 활용했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은 없지만, 이런 문제는 대혜 이후 몇 세대에 걸쳐 임제종에 속했던 선사들을 포함해서, 송대 중국 그리고 카마쿠라 시대의 일본에 살았던 대부분의 선사들의 어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원은 공안 문학을 ‘불조佛祖’에 의해 남겨진 보리달마 법맥의 지혜의 보고寶庫로 간주했으며, 공안 공부를 불교수행에 핵심적인 부분으로 수용하고 권장했고, 공안에 대한 비평은 그의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사용했던 주요한 도구였다는 사실이 분명하다. (그리피스 포크 T. Griffith Foulk, 사라 로렌스 대학 Sarah Lawrence College,「도원道元이 사용한 여정如淨의 ‘지관타좌祗管打坐’와 다른 공안들 Rujing’s “Just Sit”(shikan taza祗管打坐) and Other Kōans Used by Zen Master Dōgen」(2011 제2회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Day 2 <간화선, 그 원리와 구조>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종학연구소) p. 35.)
도원의 저술들을 보면, 그가 ‘안목을 구족한[具眼]’한 사람과 ‘구족하지 못한[未具眼]’ 사람들을 구별하였으며, 고칙 공안을 파악하는 능력을 보고 도를 이루었는지 이루지 못했는지를 판단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서 논의한 굉지의 경우처럼 도원은 자신이 조동종이라고 주장한 적도 없었고, 공안을 참구하는 것을 나쁘게 보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임제종과 조동종을 두루 수행한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제자들을 지도하였던 것으로 보이고, 제자가 깨달음에 이르렀느냐 이르지 못하였느냐를 점검하기 위해서는 화두를 매개체로 하였다. 이를테면 임제종이나 조동종이나 화두를 척도로 하기는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참고로 화두는 오직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는 현 조계종의 주장은 오히려 조동종에 가깝다고 하겠다. 화두에 의심을 한다고는 하지만 답을 구하는 것을 금기시하여 화두를 그냥 들고만 있기 때문이다. 화두를 들고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묵묵히 앉아 본래의 청정한 마음만을 반조하는 조동종 묵조선 수행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종정을 지낸 도림道林 법전法傳 스님을 보자.
문수사에서 한 달 동안 지내면서 대중 모두 하루 10시간씩 정진했다. 나는 당시 ‘시심마(이뭣고)’를 화두로 들었는데 그 화두에 완전히 몰입했던 것 같다. 잠을 자다가도 눈을 뜨면 화두에 들어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중략)
봉암사 결사에 동참한 후 첫 결재에 들었다. 그때 내가 들었던 화두는 ‘무엇이 네 송장을 끌고 왔느냐’는 뜻의 ‘타사시구자拖死屍句子’ 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매 순간 화두와 일념이 되는 것을 느꼈다.
(중략)
그래서 꿈에도 화두를 놓치지 않았다. 남이 흉을 봐도 들리지 않았고 남의 흉도 보이지 않았다. 그만큼 몰입했다. 앉으나 서나 화두가 들리는 나날이 계속 되었다. (종정 법전 스님의 수행과 깨달음의 자서전『누구 없는가』 p. 46~68.)
그렇다고 화두 점검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니다. 화두의 투과를 도와주거나 인가하는 체계적인 수행체계를 갖추고 있지 않을 뿐이지, 지도자가 나름의 방식으로 점검을 하고 결과에 따라서는 인가도 이루어진다.
노장께 삼배를 드리고 나자 대뜸 물으셨다.
“송장을 끌고 다니는 이 놈이 어떤 놈이고?”
내가 들고 있는 화두에 대해 물은 것이었다. 전광석화와도 같은 대답이 필요할 뿐, 무슨 다른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기탄없이 오른 쪽 주먹을 썩 내밀었다.
“주먹을 내려놓고 얘기해봐라.”
이번엔 왼쪽 주먹을 내밀었다.
“주먹을 내놓지 말고 얘기를 하란 말이다.”
그때 내가 소리를 질렀다.
“아이고, 아이고!”
성철 스님이 소리쳤다.
“다시 한 번 일러봐라.”
뭐라 한마디도 말할 수 없었다. 앞뒤가 꽉 막힌 은산철벽과 같은 순간이었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앉아 있자, 갑자기 성철 스님이 달려들어 멱살을 거머쥐었다. 그러곤 밖으로 끌고나와 물이 담겨 있던 세숫대야를 들어 머리 위에 덮어씌웠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초겨울이라 살짝 얼어있던 물이 온 몸으로 흘러내렸다.(종정 법전 스님의 수행과 깨달음의 자서전『누구 없는가』 p. 69.)
전쟁의 폐허 속에서 중공업을 일으키고 자동차를 만들어낸 우리 방식으로 우리 조계종 특유의 간화선법을 창조해 낸 것이다. 와우! 이것은 좋다 나쁘다의 문제도 아니고 맞다 틀리다의 문제도 아니다. 우리나라 수행 환경과 지도자의 노력에 의해 자연스레 그냥 그렇게 된 것이다. 그대로 정형화되지 않은 한국 조계종의 간화선이 되었다.
스님은 ‘공안 인터뷰’ 라는 방법을 만드셨다. 용맹정진 기간 동안 이루어지는 공안 인터뷰는 개개인에게 한 가지 화두를 준 후 인터뷰를 하고, 이 인터뷰에서 대답을 잘 할 경우 다른 공안을 던져 주는 방식이었다. 이 방식은 자신이 계속 발전해 나간다는 느낌을 주었다. 한국에서는 스승이 화두를 한 번 던져주면 몇 년 동안 그 화두를 붙들고 참구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미국에서는 그렇게 두면 두세 달 만에 나가 버리는 사람들이 대다수이리라는 실정에 맞추어 만들어 내신 방식인 것 같다. (무량 스님 수행기 『왜 사는가 1』 p. 106.)
숭산 스님이 ‘공안 인터뷰’ 라는 방법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사실은 숭산 스님이 일본에 있을 때 경험한 일본 임제종 화두 점검 방식을 차용해서 가르치신 것이다. 필자가 오랜 세월 스님들을 만나고 그들의 쓴 체험담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본인들의 노력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뿐이지 수행방식에 의해 지배되는 것은 별반 크지 않다는 것이다. 현대 일본에서 행해지는 간화선 공안 수행법은 어떤 변화를 거쳐 지금에 이르렀는지, 일본의 간화선 수행체계가 송대 사원의 정예 수도승들의 공안 수행법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아직 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환경 따라 인연 따라 자신에게 맞는 수행법이 따로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고 보면 핵심은 사람의 간절한 마음과 노력이다.
4) 간화냐? 묵조냐?
한편, 대혜의 묵조선 비판을 당시 사대부들이 대부분 묵조선을 수행하는 것을 보고 그들의 후원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행했다는 주장도 있다. 대혜의 묵조선 비판이 단지 재가신도의 후원을 얻기 위한 경쟁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재가신자들의 관심을 끌려는 노력 가운데 선 수행의 본질에 대한 논쟁이 발생했습니다. 모튼 슐러터는 “조동曹洞종 묵조默照 수행에 대한 大慧의 비판은 재가신자의 후원을 얻기 위한 … 경쟁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증명했습니다. 슐러터는 大慧가 많은 사대부들이 묵조선을 배웠다는 것을 알게 된 때인 1134년 이후에야 묵조선을 비판하고 간화를 가르쳤다는 사실을 주목합니다. 大慧는 “내재적 불성을 강조하면서 비약적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해 요구되는 극도의 노력을 경시하는,”특히 재가불자들에게 매력적인, 묵좌가 유행을 끄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나타샤 헬러 Natasha Heller, UCLA,「거울을 닦는 도구: 中峰明本의 재가신자들에 대한 가르침에서 화두」(2010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Day 1 <간화선, 세계를 비추다>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pp. 165~166.)
묵조가 유행하는 것을 보고 대혜가 단지 재가신도의 후원을 얻기 위해서 그랬다는 것은 단순히 학자적인 견해이지 선 수행자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위 인용문에서도 언급하였지만, 대혜는 선어록 공부에 전념할 수 없는 재가자들이나, 수행법을 모르는 수행자들을 위하여, 수행을 돕기 위한 방법을 찾다가 간화선을 개발하였다. 선을 지도하는 입장에서 공안을 참구하는 간화선법을 제시하면서 좌선만으로는 깨달음을 얻기 어렵다는 것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묵조선 비판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다. 그렇다면 과연 묵조선과 사다리선인 간화선은 어느 방법이 더 좋은가?
이러한 입장을 견지할 때 제기될 수 있는 질문은 ‘어떤 종류의 수행이 불성을 소유한 사람에게 가장 적절한가?’이다. 조동종과 임제종 두 종파는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끊임없이 논쟁을 벌여왔다. 그들이 논쟁을 벌인 것은『육조단경』과 돈수(頓修)의 해석에 그 근원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돈수는 두 가지 형태로 이미 나뉘어졌는데 그 중 하나는 우리에게 내재되어 있는 불성의 근원적인 깨달음을 완전히 체험해야 하는 필요성에 초점을 맞춘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재된 불성의 자연스런 표현과 일상적 수용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제임스 랍슨 James Robson, Harvard University,「大死大悟의 선: 종교유형으로서의 간화선에 대한 고찰 Born-Again Zen Again: Reflections on Kanhua Chan as a Religious Style」(2010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Day 1 <간화선, 세계를 비추다>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pp. 359~360. 참고로 금수산 영하산방에서 하는 화두 점검 의 경계로 보면, 우리에게 내재되어 있는 불성의 근원적인 깨달음을 완전히 체험해야 하는 필요성에 초점을 맞춘 것은 ‘즉심’의 경계라고 할 수 있고, 내재된 불성의 자연스런 표현과 일상적 수용에 초점을 맞춘 것은 ‘즉여’의 경계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수행에 관련해서는 두 종파가 차이점 보다는 공통점이 많아 우열을 가리기는 쉽지 않다. 그들이 논쟁 자체가 어느 한 면에 치우친 감이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어느 한 면이 강조되었을 뿐 실재 수행에 있어서는 둘을 병행하게 되거나 혹은 어느 하나를 배우고 다음 나머지 하나를 터득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우위가 있다기보다는 개인의 선호 차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측면도 있다. 현대에 들어 그 융합이 공식적으로 이루어지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데, 깨달음을 향하고 있다는 태생적 업보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간화선과 묵조선을 구별 짓지 않는 경지에 오를 때 이 둘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다.
1. 저술로는 대혜시적 후 60권 광록이 존재했다고 하나 현존하지 않고, 이것을 정리해서 1171과 1172년에 대장경에 입장된 것이 30권본『대혜보각선사어록』이다. 이것은 동시대인의 입장入藏으로서는 최초여서 대혜의 영향력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30권본『대혜보각선사어록』의 권25~30에 해당하는『대혜서大慧書 (일명 서장)』는 한국선종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 4권본『대혜보각선사보설』은 한국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일본에 소장되어 있는데, 주장이 명확하여 참고할 만한 내용이 많다. 이외에도 일종의 설화집인『종문무고』와『잡독해』, 공안집인『정법안장』 등이 있다. (정영식, 부산대 강사,「‘간화선’ 확립…‘공안 참구’ 수행법 정착」불교신문.)
2. 대혜는 묵조선을 ‘묵조사선默照死禪’이라고 비난하였고, 굉지는『묵조명默照銘』을 지어 이에 대응하였다. 묵조선이란 명칭도『묵조명』에서 유래한다. 묵조선과 간화선의 대립은 굉지정각 선사가 대혜종고 선사를 도와주는 사건이후 화해로 끝이 나고, 서로를 인정하게 되었다고 하기도 하고 (『천강에 비친 달』(숭산행원선사 법어집, 불교통신교육원佛敎通信敎育院 1987), 정성본 스님의『선의 역사와 사상』에 따르면, 대혜종고 선사의『서장』내용을 보고 추측하는 것일 뿐, 대혜종고 선사가 특별히 조동종을 비난하지는 않았다고도 한다. 2011년에 개최된 제 2회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간화선, 그 원리와 구조>에서 일본에서 유학한 한 스님이 <묵조선>이란 말은 근대들어 일본에서 처음 쓰기 시작하였다는 의견을 내 놓았는데, 그전까지는 대혜 선사가 칭한 ‘묵조사선’이란 말만 통용되었다는 것이다. 간화선, 묵조선이라는 말은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정황들을 볼 때 대혜가 묵조선을 비판 한 것이 아니고 묵조선을 빙자한 묵조사선을 비판한 것으로 해석해 볼 수 있는데, 그러면 앞에서 논한 의문들이 풀린다.
3. 이 책은 지금으로부터 천여 년 전『능가경』을 소의경전으로 하여 형성된 초기 선종의 사자師資 전승의 계보를 밝히고 그들의 전기와 어록을 수록한 책이다. 저자는 정각(淨覺, 683~750)으로 당대(唐代) 초중반에 활동한 선승이다.
4. 영평도원(永平道元, 1200. 1. 19 교토[京都]~ 1253. 9. 22 교토) 선사는 일본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 1192-1333)의 유명한 승려다. 조요 대사[승양대사承陽大師], 기겐 도겐[희현도원希玄道元]이라고도 한다. 선禪을 조동종曹洞宗의 형식으로 일본에 소개했다. 창조적인 개성의 소유자로서 좌선과 철학적 사색을 결합시켰다. 황실 귀족 출신으로 7세에 고아가 되었고 13세에 출가하여 천태종의 중심지인 히에이 산[比叡山]에서 불경을 공부했으나 그의 영적 갈망을 채우기에는 불충분했다. 1223~1227년에는 중국에서 선을 공부했고 선승 여정如淨 밑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일본으로 돌아온 뒤에는 여러 사찰을 전전하면서 좌선을 전파했으며, 나고야[名古屋] 북서쪽에 에이헤이 사(永平寺)를 짓고 거기에서 말년을 보냈다. 그는 첫 저작인『보권좌선의普勸坐禪儀(후칸자젠기, 1927)』에서 좌선을 소개하였으며, 그밖에 지침서도 많이 썼다. 대표작인『정법안장正法眼藏(쇼보겐조, 1231~1253)』은 총 95장으로 20년 이상 걸려 집필한 것인데, 불교 원리를 자세히 설명한 책이다. 그는 지관타좌只管打坐, 곧 좌선전수坐禪專修를 열심히 할 것을 가르쳤으며 수행과 깨달음의 합일을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