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2장
1:15절에 아름다운 소식을 알리고 화평을 전하는 자가 있다고 했습니다.
아름다운 소식이 무엇이며 화평의 소식이 뭡니까?
그것이 13절에 유다 백성들이 지고 있는 멍에를 꺾고..그들을 옭가메고 이는 결박을 끈는 것입니다.
이것을 13절에 네게 지운 그의 멍에를 내가 깨뜨리고 네 결박을 끊으리라 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유다의 멍에가 무엇이며..결박이 무엇이냐? 그것이 앗수르입니다.
이것이 언제 끊어지느냐...왕으로 보면 히스기야 왕 때에 끊어집니다.
히스기야가 어떤 왕이냐...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며..
오직 여호와만 의지하는 왕이었다는 겁니다.
무엇을 말씀합니까? 유다 백성들에게 가장 아름다운 소식..화평함의 시간은
아무 때나 얻어지는게 아니라...오직 하나님 보시기 정직히 행하고..
나아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할 때에...
우리의 삶속에 아름다움이 있고...나아가 화평함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에게는 외적으로는 믿음으로 사는 아름다움이 흘러 나와야 하고요
내적으로는 내게 어떤 환란 풍파가 몰아쳐 올지라도
내 내면에는 말할 수 없는 평안 평화 화평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찬양할 수 있어야 합니다.
평화 평화로다...하늘 위에서 내려 오네....
현실적으로는 문제와 고난의 시간이 나를 덮칠지라도...
내면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 평안 화평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오늘부터 2장으로 넘어 왔습니다.
2장의 제목은....니느웨의 철저한 심판.....이라고 정해 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하나님이 앗수르를 들어서 북 이스라엘을 심판하십니다.
북 이스라엘이 망하자...이번에는 앗수르가 남유다를 멸망시키려 유다를 침범합니다.
그러나 유다를 침범함이 화근이 되어서 결국은 앗수르가 쇠약함의 길을 가게 되고요
북이스라엘이 멸망한지 80년 후...앗수르가 바벨론에 의하여 망하게 됩니다.
바벨론은 유다를 멸망시키지만....바벨론도...바사에 의하여 무너지게 되고...
바사 왕 고레스 시대에...유다민족이 다시 믿음을 회복하여...
다시 돌아오게 됨이 성경 역사의 흐름입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이런 기본 상식을 가지고...성경을 보셔야 성경이 이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단락을 나눈다면...
1단락 / 1-5 / 침략자의 모습
2단락 / 6-9 / 니느웨의 참상
3단락 / 10-13/ 폐허가 된 니느웨.....에 대해서 말씀을 주욱 기록하고 있습니다.
1.파괴하는 자가 너를 치러 올라왔나니 너는 산성을 지키며 길을 파수하며
네 허리를 견고히 묶고 네 힘을 크게 굳게 할지어다
시작이 파괴하는 자가 너를 치러 올라 왔다...라고 시작합니다.
여기에 너가 누구냐? 앗수르요 니느웨입니다.
앗수르가 어떤 나라냐...1:12절에 보시면 그들이 강하고 많다고 합니다....
무엇이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강한 나라요...
군사의 숫자도 많고 경제적으로도 아주 높은 경제 수치를 가진 부강한 나라였다는 겁니다.
이런 나라에 쳐들어 오게 되는 나라가 누구냐...바벨론입니다.
이때의 왕이 느부갓네살 왕의 부친인...나보폴라살 왕이었다는 겁니다.
이 나보폴라살도 느부갓네살과 마찬가지로...전쟁에 능한 왕이었고...전쟁을 즐기는 왕이었습니다.
이런 왕이기에...오늘 성경은...나보폴라살 왕을 표현하기를... 파괴하는 자...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앗수르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산성을 지키며 길을 파수하며 네 허리를 견고히 묶고 네 힘을 크게 굳게 할지어다
하반절에...네 허리를 견고히 묶고...네 힘을 크게 굳게할지어다...
무슨 뜻입니까? 허리를 묶는다...힘을 크게 한다...굳게한다...
다 전쟁을 치르기에 완벽한 준비태세를 갖추고 있다가...
파괴하는 자가 올라오거든....뭐해보라...너는 너의 성을 지키고...길을 지켜 보라...
성을 지키고 길을 지킨다는 것은 너희 나라를 지켜 보라는 겁니다.
한마디로...이게 무슨 말입니까? 앗수르는 자기 힘으로 안되는 게 없다고 생각한 나라입니다.
그러한 나라에...하나님이 그래 네가 싸울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해서 싸워봐라...이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신앙생활 중에 가장 조심해야 하는 것이 형통할 때 입니다.
아사왕도 형통한 시대 동안에...기도하는 법을 잊어 버리고요
히스기야도 형통한 시대 동안에...오직 하나님만 의지했던 믿음이 식어져 버린 겁니다.
그 외에 우리가 수요일 저녁에 배우는 남북 왕들을 통해서 받는 교훈이
언제 성도에게 위기냐?...형통할 때에...왜 형통할 때가 위기냐? 교만해지기 때문입니다..
잠언서의 특징이 성도가 어떤 길로 가야 하는가를 대조함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크게 보면...음녀와 지혜.....교만과 겸손...
무엇이 교만이고...무엇이 겸손입니까?
교만은 지혜를 무시함이 교만이요...겸손은 지혜를 모셔 들임이 겸손입니다.
잠18:12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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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회복하시되 이스라엘의 영광 같게 하시나니
이는 약탈자들이 약탈하였고 또 그들의 포도나무 가지를 없이 하였음이라
2절에 우리가 먼저 이해해야 하는 말씀이 야곱의 영광 이스라엘의 영광입니다.
이 야곱의 영광과 이스라엘의 영광이 각각 다른 말이냐? 다른 말이 아닙니다.
야곱의 다른 이름이 이스라엘이요...이스라엘의 본 이름이 야곱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적으로 본다면 이스라엘이 언제 가장 영광스러운 시간이었을까요?
그 영광의 시간은 애굽에 10가지 재앙중 마지막 10번째 재앙 때에 가장 영광스러웠습니다.
10번째 재앙이 뭡니까? 장자의 죽음입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문 좌우설주에 양의 피를 바르고...그 안에 있을 때
죽음의 사자가 애굽 전역을 휩쓸고 지나갑니다.
그때 문 좌우설주에 피가 있는 집은 넘어가고...피가 없는 집에는 장자는 물론이요
가축의 처름 난 초태생까지 다 죽었던 것입니다.
애굽 역사상 전에도 없었고...후에도 그와 같은 일이 없는 대 사건이 일어난 겁니다.
전국의 초상집이요...전국에 통곡이 거치지 않는
그때에...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생명의 구원을 받는 놀라운 은혜를 받았고요
또 한편으로는 영광스러운 민족이 되었던 것입니다.
즉 한 쪽에서는 죽음과 통곡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감사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영광...그 감격 그 감사를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언제 그렇데 된다는 겁니까?
1:15절 아름다운 소식이 전해지는 때...화평의 소식이 임하는 그때에...
이스라엘이 영광을 다시 회복되게 하신다는 겁니다.
뭔가 동일하지 않습니까? 지금 2장에서 야곱의 영광을 회복하시되 이스라엘의 영광 같게 하시나니
언제 이런 역사가 일어난다고 했습니까? 앗수로가 멸망할 때에...이런 역사가 일어난다는 겁니다.
앗수르가 무너 질 때에...그 소식이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좋은 소식이요, 화평의 소식입니다.
또한 앗수르가 무너진다는 것은 앗수르의 입장에서는 심판이고 멸망이지만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영광을 회복하게 되는 아름다운 소식인 것입니다.
노아 홍수도 망하는 자들에게는 심판으로 작용했지만
구원을 얻은 노아 가족에게는 말할 수 없는 영광의 시간이었다는 겁니다.
이는 신약성경에서도 극명하게 나타납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는 그 때에 어떤 역사가 있느냐 하면
두 사람이 밭에 있다가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하고
두 사람이 잠을 자다가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합니다.
즉 한 사람에게는 심판이지만...데려감을 당한 한 사람에게 말할 수 없는 영광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마25장의 말씀입니다.
열처녀 비유...달란트 비유...양과 염소 비유...입니다.
이 세 비유는 한쪽은 심판이요...한쪽은 영광의 자리에 앉는 것입니다.
3비유가...교회 밖의 사람과 교회 안의 사람 비유입니까? 아닙니다.
똑 같이 교회 안의 사람비유입니다.
교회 안에 한쪽은 심판의 자리에 들어가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다른 쪽에서는 영광의 자리에 들어가는 사람이 있음을 잊어서 안됩니다.
성도는 세상에 살면서 영광이 어떤 건지를 잘 압니다.
특히나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등 국제적 스포츠가 열릴 때 마다
입상을 한 선수와 그렇지 못한 선수들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입상을 하지 못한 선수들은 마음으로 피눈물을 흘린다고 합니다.
그러나 입상을 한 선수들은 영광스러운 시상대에 오르게 됩니다.
믿음의 결국은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믿어...구원 받고....구원 받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벧전1:7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2.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회복하시되 이스라엘의 영광 같게 하시나니
이는 약탈자들이 약탈하였고 또 그들의 포도나무 가지를 없이 하였음이라
2절에 우리가 먼저 이해해야 하는 말씀이 야곱의 영광 이스라엘의 영광입니다.
이 야곱의 영광과 이스라엘의 영광이 각각 다른 말이냐? 다른 말이 아닙니다.
야곱의 다른 이름이 이스라엘이요...이스라엘의 본 이름이 야곱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적으로 본다면 이스라엘이 언제 가장 영광스러운 시간이었을까요?
그 영광은 애굽에 10가지 재앙 중 마지막 장자의 재앙 때에 가장 영광스러웠습니다.
왜 그때가 가장 영광스러운 시간이냐?
애굽의 장자는 다 죽었지만...이스라엘 백성들의 장자는 다 살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애굽에서는 죽음과 통곡의 자리라고 하면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감사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영광...그 감격 그 감사를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실제로 적용되는 시간이...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이라고 헀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한다고 했습니다.
그 비유가 마25장에 열처녀 비유...달란트 비유...양과 염소 비유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오시는 날에 한 쪽에는 원망과 통곡이 있는가하면..
다른 한 쪽에서는 감사와 큰 기쁨과 영광의 시간이 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그의 용사들의 방패는 붉고 그의 무사들의 옷도 붉으며
그 항오를 벌이는 날에 병거의 쇠가 번쩍이고 노송나무 창이 요동하는도다
3절은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 자에게 임하는 심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의 용사들의...라고 시작합니다.
여기 그의 용사들이 누구의 용사들입니까? 하나님이 보낸 용사들입니다.
앗수르 나라에...니느웨를 심판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보낸 용사들은 누구입니까? 바벨론용사들입니다.
그들의 방패는 붉고..그의 무사들의 옷도 붉으며...붉고 붉다고 합니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고 있을까요?
하나님이 니느웨에 보낸 용사들과 무사들은 붉은 방패와 붉은 옷을 입었다는 것은
이들은 많고 많은 전장에서 이기고 이긴 승리자들이라는 겁니다.
얼마나 많은 전쟁에서 승리를 했으면...방패가 핏빛으로 물들었고...옷도 핏빛으로 물들었을까요?
이들은 어쩌다 한번 전쟁에서 승리한 승리가 아니라..이기고 또 이긴 자들이라는 겁니다.
그만큼 전쟁에 능한 자요...당시에 바벨론은 천하를 통일하다 시피한 나라였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3절 중반절 이하에...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항오를 벌이는 날에 병거의 쇠가 번쩍이고 노송나무 창이 요동하는도다
항오를 벌인다는 것이 뭡니까? 병사들이 전쟁대열로 선 것이쟎아요
그렇게 병사들이 전쟁대열로 도열해 있는데...
병거의 쇠가 번적이고 노송나무 창이 요동하는도다..라고 합니다.
병거와 창이 빛을 발한다는 것입니다....드디어 전쟁이 시작됨을 말씀합니다.
이렇게 전쟁에 능한 용사들...전쟁에 연전연승한 용사들이 붉은 방패..붉은 옷을 입었습니다.
이들의 창이 요동을 하고 그들이 탄 병거가 번쩍입니다.
이런 이들을 니느웨 사람들이 이길 수 있느냐...없음을 간접적으로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거기서 끝나는게 아니라...이 병거와 병사들이
어느 정도로 전쟁에 능한 용사들인가를 4절이 다시 말씀하는데 보시기 바랍니다.
4.그 병거는 미친 듯이 거리를 달리며 대로에서 이리저리 빨리 달리니
그 모양이 횃불 같고 빠르기가 번개 같도다
하나님이 보낸 병거와 용사들이 어떻게 전쟁에 임하는가?
미친 듯이 거리를 달린다...빨리 달리니...빠르기가 번개 같도다...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들어서 쓸 때에는 이방 용사라도...번개같이 쓴다는 겁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쓰임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쓰임을 받되 악한 일에 쓰임을 받는 자가 아니라...선한 일에 쓰임을 받아야 합니다.
교회 일을 하다가 보면...이상하게 악인의 역할을 자처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정말 안타깝고 안됐을 때가 많습니다...왜 많고 많은 일들중에 저런 일들에 쓰임을 받느냐
왜 선한 일에 쓰임을 받아야 하쟎아요...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듯이..사람을 살리는 일...사람을 고치는 일...
그리고 사람을 키우는 일에 쓰임을 받는다면 얼마나 멋진 인생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이상하게 교회안에서 사람을 죽이는 일...그렇다고 육체적으로 살인했다는 거 아닙니다.
영적으로 다른 사람을 죽게하는 일에 쓰임을 받고요
다른 사람을 고치는게 아니라 병들게 하는 일에 쓰임을 받고요
다른 사람을 키우는게 아니라...도리어 억눌러 자라지 못하는게 하는 일에
그런 잘못된 일에 쓰임을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의 문제가 뭔지 아십니까? 자신이 그런 일에 잘못된 일에...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일에 쓰임을 받는지...
아니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쓰임을 이것 조차도 구분을 못하시는 분들이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정말 안타까운거 아니고 무엇이 목회자로서 안타깝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