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秋泰鎬
근래 이우성 교수가 청주대학 재직시 범입본 이라는 사람의 서문이 실린『신간교정대자명심보감(新刊校正大字明心寶鑑)』을 발견한 사실이 있는데 이를 기화로 명심보감의 편저자가 중국 명나라의 범입본(范立本)임이 밝혀졌다고 하는가 하면 최근 발간되는 일부 명심보감 책자의 머리말을 보면 상당수가 편저자를 중국의 범입본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도대체가 어느 나라 사람들인지 실로 개탄스러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물론 명심보감의 어록들은 중국의 온갖 전적에서 뽑은 것이지만 이 책이 지난날 우리 선조들의 서당교육에서 주요한 교재의 하나였으며, 그것은 오랜 세월에 걸쳐 한국인에게 사랑을 받고 숭상을 받아 오면서 도덕의 지침서로서 한국인의 사고방식에 침투했고 생활 태도를 제어하여 왔다는 점에서 그것은 실상 완전한 우리의 것이라 할 것이다.
그러함에도 확실한 고증도 없이 국내 통행본 명심보감을 중국 범입본 원본 명심보감의 초략본(抄略本)이라 하며 노당(露堂)추적(秋適)선생을‘초략자로 보아진다’하기도 하고,‘범입본의 798조의 방대한 분량을 고려 충렬왕때의 학자 노당 추적 선생이 247조 초략본으로 엮으면서 우리가 사용하는 유행본이 된 것이다’라고 소개 하는가 하면 ,
어떤이는‘이제까지 편저자는 고려때의 문신인 노당 추적 편저가 통설 이었으나 편저자가 중국 명나라의 범입본임이 밝혀지고 종전의 것은 원본이 아닌 초략본임도 아울러 밝혀졌으니 이는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수 없다’라 하는등 실로 어처구니없고 한심한 작태들을 연출하고 있다.
명심보감이 그토록 널리 유포되고 읽혀졌으면서도 편저자 논란이 제기되는 것은 비록 명심보감 뿐만 아니고 동양에는 저작자 불명의 책 또는 글이 많이 전해 오는데 이것은 옛사람들이 지나친 겸손 때문에 자기가 지은 책에 자신의 이름을 분명히 밝히기를 꺼렸던 점과 옛 시대에는 저서의 간행과 보급을 지은이의 제자나 후손들이 기획 실현하였기 때문에 그 일을 담당 또는 감당할 만한 사람이 나오지 않을 때에는 저자 불명의 책으로 남았을 가능성이 많았던 점에서 연유한다 하겠다.
노당 추적 편저 국내 통행본 명심보감과 중국 명나라 범입본의 서문이 있다는 청주본 신간교정대자명심보감을 비교 검토 분석하여 명심보감 원본 편저자 논란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먼저 저작년대에 있어 노당 추적 편저의 국내 통행본 명심보감은 고려 충렬왕 31년 서기 1305년으로 추정되며 범입본 편저의 명심보감은 중국 명나라 홍무 26년 계유 서기로 환산하면 1393년이다.
편저작 경위를 살펴볼 때 노당 추적본의 편저작 경위는 노당 추적이 시랑겸 국학교수 재임전에 인천보감이라는 것이 발간되어 있었는데 이책은 송나라 담수스님이 지은 것을 고려에서 1290년 유·불·도 3교의 선덕과 가언선행 중에서 100여단을 모아서 만든 것이라 하는데, 노당선생이 평소 친분이 많았던 인조스님을 통하여 이 책을 알게 된 후 이 책의 구성과 제목을 자세히 보고 유교. 도교에 관한 250여 단구의 명구를 한데 모아 조그마한 책을 만들게 되었는데 그 이름을 마음을 밝게 하는 보배로운 거울이라는 뜻으로 『명심보감』이라 하였다.
반면에 범입본의 명심보감 서(序)에 의하면 선언(善言) 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선한 마음을 일으키고 악언(惡言) 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나태한 생각을 경계시킬 수 있는 것이기에 이미 세상에 알려진 선배들의 여러 책에서 중요한 말씀과 예전 부모된 자들이 가르친 좋은 말씀을 골라서 한 책을 만들고 명심보감이라고 이름하는 바이니 보아주기 바란다 하였다.
편저자에 대하여 살펴보면 노당 추적선생의 자는 관중 호는 노당이며 시호는 문헌공이다. 1246년 출생 15세에 문과 급제하여 안동서기·좌사간·시랑 겸 국학교수·민부상서· 예문관대제학·평장사·좌복야·도첨의시중(문하시중)을 역임하였으며 안향과 함께 해동이학의 종사로 추앙 받는 인물이다. 고려사·역옹패설·동국사략·무릉잡고등 행적 기록 문헌이 100여권에 이르고 있으나,
명나라 범입본은 그의 명심보감의 서문에서‘사람이 중국에 태어나서 살아가는 것을 감사해야 한다’하면서‘명나라 홍무 26년 계유 2월 16일에 무림후학 범입본이 서한다’라고 마무리하였으나 중국 명나라 역사에는 전혀 알려지지 아니한 미명의 인물이며 행적 또한 알 수 없다하였다.
전파경위를 살펴 볼 때에도 노당 추적의 명심보감은 선생의 손자이자 명나라 개국공신인 추유(秋濡)공이 고려에서 1363년 중국으로 건너가 전파한 후 월남 등지로 전파된 것으로 추정되며 또한 노당의 2자 추뇌(문과급제,사간첨정)공이 1318년 일본사신으로 갔다는 기록과 현재 일본 추씨의 시조라는 설과 연계하여 일본으로도 명심보감 전파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반면에 범입본의 명심보감은 중국에서 조선으로의 유입된 경위는 알 수 없다.
내용면을 살펴보면 노당 추적의 명심보감은 총247조로 공자의 어록등 논어의 내용과 오늘날 고증해보기는 어려운 경행록, 익지서나 태공의 말과 도가서 등이 많이 채택되어 있음을 알 수 있으며,
범입본의 명심보감은 노당 추적의 명심보감 보다 논어등 경서의 비중이 높으며, 노당 추적의 명심보감 내용이 거의 포함되어 있다.
율곡선생이 섰다는 명심보감의 발문에 의하면“지난겨울(서기1459년)에 가친께서 영남에서 돌아 오실 적에 명심보감 한권을 손수 가져 오셨는데 그 가운데 기재된 수 백여언은 모두 권선징악의 설이다. 내가 재삼 펴 읽고 팔을 치며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라 섰으며 , 서산대사도 여러번 읽은 후에 『유교귀감』에 옮겨 섰다 하였다.
중국에서도 범입본 이외에 왕형·장문계·여낙천 등도 자기들이 지은 것처럼 기록한 시기도 있었다 하였으며 조선의 통행본도 미명의 학자들이 증보판을 계속 늘여 오고 있는 점 등을 볼 때,
명나라 범입본 또한 노당 추적 편저 250단을 800여단으로 변조하여 만든후 자기가 처음의 편저인 것처럼 서문을 서 하였다는 추씨문중의 주장에는 상당한 이유가 있다 할 것이다.
반면에 범입본 원본 편저 주장은 저작 년대에 있어서 추적 편저 추정시기인 1305년 또는 1315년보다 무려 88년 내지 78년 이후인 1393년의 일이며, 추적의 손자 추유가 중국으로 건너가 전파하였다는 시점인 1363년으로 볼 때에도 30년 후인 점을 감안한다면,
그 동안에 범입본이 능히 노당 추적의 편저 명심보감을 입수하여 증편·변조가 가능하다는 주장에 설득력이 있다 할 것이다.
또한 노당 추적의 편저본인 247조 보다 무려 551조가 많은 798조 범입본의 편저본은 대부분 경행록· 익지서· 태공· 도가서 등의 어록인 추적 편저본을 기본으로 하여 논어 등 구하기 쉽고 널리 알려진 경서 어록을 추가하였다는 점의 논리 주장에도 충분한 이유가 있다 할 것인바,
오히려 그 진위를 왜곡하여 798조를 초략(抄略)하여 247조로 하였다는 식(式)만의 논리는 중대한 과오를 범할 수 있는 실로 위험한 발상이라 할 것이다.
이른바 범입본이라는 인물이 중국 명조에서 그 행적이 나타나지 아니한 미명의 인물이라는 점등이 명심보감을 나름대로 증보하여 자신의 편저인양 서문을 기록할 개연성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반면 1977년 독서신문의 기고를 보면 “노당 추적은 고려 이학의 종사로 일컫는 추황의 아들이며 그에 대하여는 고려사, 역옹패설 그 밖의 많은 문적에도 자세하거니와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에서 간행한 김종국 교수의 역본말에 있는 해설에도 자세하게 소개 되어있어 익히 알고 있다.
그가 민부상서, 예문관대제학으로 치사하였다는 점과 그가 회헌 안유선생이 태학을 창건 하였을 때 그를 경사교수(經史敎授)로 천거하여 가르치게 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능히 명심보감과 같은 소편이지만 명편작을 편찬 할 수 있었을 가능성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하였다.
결론적으로 위 종합적인 고찰의 정황으로 보아 명나라 범입본은 고려 노당 추적의 명심보감을 90여년이 지난 후에 공자의 언행을 기록한 논어를 비롯한 다수의 경서에서 추가 어록을 취하여 이를 증보한 후 원 편저가 편저자 서문이 없음을 기화로 증보판의 서문에서 자신이 원편저자인 것처럼 ‘명심보감이라 이름한다’하여 진위를 혼란 시켰다 할 것이다.
우리의 것을 우리의 것으로 지키지 못하고 면밀한 고증의 노력도 없이 의문투성이 행적불명의 편저자 추정의 서문이 발견 되었다하여 이제까지 한국인의 정신적 양식의 공급원 구실을 하여온 책자 명심보감을 중국의 것으로 간주하여 발표하는가 하면 ,
이에 부화뇌동하여 동 책자를 국역 해석 발간함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인물연대고찰도 없이 명색이 책을 내는 학자라는 사람들이 책임감 없이 고려의 노당 추적이 90년후의 인물인 명나라 범입본의 원본을 초략하였다는 어불성설격의 내용을 서슴없이 서문 또는 발문에 서술하여 국민에게 혼란을 가중케한 사실은 실로 유감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수백여년 동안 추씨문중에서 면면히 지켜 내려져온 명심보감은 조선후기 1800년대에 후손들이 이를 재목각본(再木刻本)하여 전국에 더 널리 보급 확산 시켰고,
그 유일 목각판이 지방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추씨문중에서 보존하고 있는 사실 외에도 전국적으로 많은 추씨문중에서 명심보감을 강론발행한 발자취가 있으며 무엇보다도 전후 명확한 논리가 『노당 추적 원편저』임을 확신케하는 뒷바침의 논거라 할 것이다.
바램이 있다면 좀더 명확한 고증자료를 확보하여 변조 사실을 분명히 거증시키는 애국 애족적인 연구에 박차를 가 했으면 하는 것이다.부연하여 1994년 2월 24일 경상북도 달성군 문화공보실에서 발간한『달성문화유적요람』의 명심보감 판본에 대한 설명을 살펴본다.
「인흥서원에 소장되어 있는 이 판본은 추계 추씨 노당 추적(고려 고종 32년 1246년∼충숙왕4년 1317년)이 편저 하였다. 노당 추적은 원종 2년 1261년에 문과에 올라 민부상서, 예문관대제학을 지냈다, 명심보감은 공자 등 제자백가의 경서와 저술·시부 가운데 쉬우면서 생활의 기본이 되는 내용만을 골라 엮은 것으로 천자문에 버금가는 교육의 기본도서로서 유전되어 왔지만 추적이 당초 편할 때는 국학제생에게 심성수양의 재로 삼기 위함이었으나 현존하는 것은 고종 6년 추세문이 출판한 인흥재사본이 전수되어 국역 출판 됨으로서 가정,학교에서 교육용으로 널리 쓰여 왔고 국내 뿐만 아니라 중국·일본에도 보급되고 있고 영문으로도 번역되어 한국학 연구의 자료로 사용되기도 한다. 명심보감의 판본은 총 31매의 목판으로 본 인흥서원의 판본이 유일본 이다. 1985년 경상북도 지정문화재로 지정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달성군 달성문화유적요람 134쪽에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 인흥서원 입구에 위치하고 있는 노당 추적의 신도비는 조선 고종 1년 1864년에 세운 것으로서 전액은 춘추관 편수관인 유초환이 하였고 홍문관 제학인 동양 신석우가 찬하고 규장각 직각인 영가 김덕근이 글을 섰는데, 높이 2.1m 폭 82cm 두께 56 cm 이며 이 비각의 내용에도 노당 추적이 명심보감을 편저 하였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라 하였으며,
인흥서원은 화원읍 본리리에 소재하고 있는 추계추씨의 시조이며 고려 충렬왕 때의 문신인 노당 추적을 봉안한 서원이다. 조선 순조 25년(1825년) 10월에 팔도유림과 20대손인 추세문에 의해 창건 되었는데 대원군의 서원 정리 당시에 화를 면하여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총면적 3861㎡의 경내에는 정면 5칸 측면 2칸 팔작지붕의 서원을 비롯하여 정면 3칸 측면 2칸 맞배지붕의 사당 승봉문 3칸등 5동의 건물이 있고 신도비가 있으며 그가 저작한 명심보감 목판 2백매가 보관되어 있다고 적고 있는바, 서원 창건연대등 다소의 오류 부분이 있다.
1995년 성균관에서 발행한『명심보감』에 의하면 비교적 상세한 명심보감 관련자료들을 접할 수 있다. ‘1959년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번역 출간본 이후 40년만에 예손 추경석(전 건설교통부장관)의 정성과 윤무학 박사 및 성균관출판부의 노고로 새로운 판의 상재(上梓)를 보게 되었다’라는 최근덕 성균관장의 머리말과 단기 4292년 성균관대학교 이선근 총장의 서문 그리고 부록으로 ‘명심보감 책이름의 의미’해설 및 편저자에 대하여도 고찰하였다.
그리고 추세문을 비롯하여 후손 학구·기풍·은영이 『기사대구인흥재사본(己巳大邱仁興齋舍本)』을 발간할 때의 경위와 명심보감에 대한 이율곡을 비롯한 제가(諸家)들의 비평과 관련 서문, 발문을 범례와 함께 실었다.
제가의 비평 서문 및 발문자를 보면 서문및 비평에 율곡 이이·성재 허전(1797∼1886 조선 순조때 성리학자, 통정대부 행 김해도호부사)·응와 이원조(1792∼1871 조선 순조때 성리학자)·가림 조기승(통정대부 행 돈령도정)·계당 류주목(통훈대부 행 공청도도사,류후조 좌의정의 아들)등이며,
비평으로는 손진수(추계추씨파보書)·임재 서찬(1825∼1905 조선 헌종때 성리학자), 그리고 발문에는 율곡 이이·영천 신좌모(가선대부 전행병조참판 겸 동지경연춘추관, 의금부사, 오위도총부부총관)·운산 이휘(1795∼1875 조선 철종때의 성리학자, 통정대부 전행 호조참의)·추세문(노당의 20대손)등이다.
또한 명심보감의 노당저 명시문헌으로는 이책이 노당의 저작으로 천명된 것이 그의 후손 추세문등이 가승과 함께 이책의 원본을 발견하고 고종 6년 기사(己巳)에 ‘대구인흥재사본’을 발간한 전후가 아닌가 추정하고 있으며, 명심보감 노당 저자 명시문헌은 거의 근세의 것 또는 과거의 것이라도 근세에 증본된 것이다『회헌실기(晦軒實記)』권 5 秋適 字 慣中 秋溪人 號 露堂 諡 文憲 官 尙書 先生(安文成) 創建太學 薦公爲 經史敎授 所著 明心寶鑑 行 于世,『동현호록(東賢號錄)』권1 露堂 秋適 字 慣中 秋溪人 麗朝 侍中 性豁達不爲檢束 安晦軒裕門人 與先生 葺 國學修庠序 所著 有 明心寶鑑 諡 文憲享仁興書院,『조선역대명신록(朝鮮歷代名臣錄)』『김석규노당행장기(金錫奎 露堂 行狀記)』秋適 文憲公 字 慣中 秋溪人 號 露堂 事 元宗 忠烈 忠宣 登甲第一人 官至門下侍中 封密城伯 公生於高宗丙午 豁達無檢束素性然也 文章夙就踐履篤厚...........中略.....所著 篇帙遺失殆盡 獨 明心寶鑑一篇行于世........中略.....此豈余阿好之言? 周愼齋 所備述而欽慕者也등이 대표적인 것이다.
노당 추적을 죽계문인 이라 하거나 회헌 안향의 문제(門弟)로 표시한 단기 4292년 국역 명심보감의 서문(성균관대학총장 이선근)을 서기 1995년 최근덕 성균관장은‘안향선생의 지우(知友:나의 인격·학식을 알아서 남이 후히 대우함)를 얻었다’라고 수정 하였다.
또한 최근덕 관장은‘『명심보감』곧 마음을 밝히는 보배로운 거울이라는 책명은 초등교재에 능히 붙일수 있는 것으로 혹 중토(中土)에 이런 이름의 책이 있다손 치더라도 우리나라 노당선생의 편저와는 관계가 없을 것이다 의혹하는 분이 있을까 밝혀두는 바이다’라하면서 범입본 편저 논란을 일축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