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원자력연구원 「원우」 (2014. 9-10월호)
조선예학(朝鮮禮學)의 향기를 찾아
수필가, 전 한국원자력연구소 책임기술원 채동선
조선의 통치이념은 성리학(性理學)이다. 성리학은 공자(孔子)에 의해 창시된 유학의 한 파로 송나라 때 주희(朱熹)가 집대성하였고 고려 말에 안향에 의해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되었다. 이후 성리학은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많은 유학자를 배출하였는데 그 중심에 우리 고장 출신인 동춘당 송준길(1606~1672)과 우암 송시열(1607~1689)이 있다.
송준길과 송시열은 조선 예학의 태두라 불리는 사계 김장생(1548~1631)으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이들은 율곡 이이를 정점으로 이어져 온 기호학파의 좌장이 되어 퇴계 이황을 추종하는 영남학파와 학문적으로 쌍벽을 이루면서 사색당파란 엄청난 소용돌이의 한 축에 서서 치열하게 정치활동을 했다. 또 이들은 글씨에도 일가를 이뤄 한석봉 이후 조선 최고의 명필로 꼽히고 있으며 강건하고 호방한 이들의 서법을 두고 사람들은 양송체(兩宋體)라 부른다.
동춘당과 우암은 어려서부터 동문수학을 했고 또 인척간이었기에 배움에 대한 경쟁심도 서로의 우정도 남달랐을 것이다. 이들은 정치적 학문적으로는 늘 같은 길을 걸었으나 그 깊이에서만은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예(禮)를 벗어나면 동춘당이 꾸짖었고 불의(不義)를 보면 우암이 참지를 못했는데, 아마 이들의 이런 성정이 선비의 고장임을 자처하는 오늘날의 충청도 기질과 맥을 같이 하는 게 아닌가 한다.
아파트가 빽빽이 들어선 대전시 송촌동 한복판에 동춘당공원이 있다. 2만여 평에 이르는 드넓은 땅엔 아름드리 고목들이 즐비하고 잘 가꾸어진 조경으로 인해 지역민들이 밤낮으로 드나들며 여가를 즐긴다.
이곳은 송준길이 말년에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후학들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냈던 곳으로 별당인 ‘동춘당’을 중심으로 해서 선생의 고택과 사당 그리고 선생의 증손부로 당대의 유명 여류시인인 호연재 김씨가 거처했던 가옥(소대헌)이 수백 년의 풍상을 견뎌내고 흐트러짐 없이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살아 움직이는 봄과 같다.’
라는 뜻으로 이름 지어진 ‘동춘당’은 조선 별당건축의 정수라 일컬어질 정도로 그 보존적 가치를 인정받아 보물 제209호로 지정되어 있다. 특히 봄철에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흐드러지게 핀 영산홍을 볼라치면 그 이름처럼 살아 움직이는 봄을 만끽한다.
대전시 동구 가양동, 솔숲이 우거진 야산 기슭에 남간정사가 있다. 남간정사는 우암 송시열 선생이 낙향해 지은 서당으로 제자들을 가르치고 학문을 하던 유서 깊은 곳이다. 우암은 조선왕조실록에 3000번 이상이나 이름이 오를 정도로 학문적 정치적으로 큰 자취를 남긴 분인데, 후세인들이 학문만큼은 능히 선생을 따를 자가 조선 천지에는 없다 하여 그를 중국의 ‘공자’나 ‘주자’에 빗대어 ‘송자’라 부르기도 한다.
대전시에선 남간정사가 들어선 땅을 확장해 장판각, 전시관, 서원 등 여러 건물을 복원해서 우암사적공원으로 재탄생시켰다. 이곳엔 남간정사 외에도 건축미가 뛰어난 기국정, 송시열 문집인 송자대전판 등 역사적으로 중요한 문화재가 보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풍광마저 수려해 시민들의 쉼터로도 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비 오는 날 짙은 운무가 얕게 깔린 공원에 올라 보면 잘 그린 한 폭의 수채화를 보는 듯한 신비스러움을 느낄 수 있다.
동춘당과 남간정사는 직선거리로 십리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시내버스를 이용해도 한나절이면 모두 돌아볼 수가 있다.
대전 도심 한복판에서 조선 유학의 거목인 양송(兩宋)의 흔적을 찾아 그들이 뿌린 예학의 향기를 듬뿍 맡아보면 어떨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