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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반기룡 문학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반소메
소설가 이문구(李文求.1941.4.12∼2003.2.25)
언론인ㆍ소설가. 본관 한산, 호 명천(鳴川). 충남 보령 생. 1963년 서라벌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다갈라불비망(不忘碑)>(1965), <백결(百結)>(1966)로 [현대문학] 추천으로 데뷔. [월간문학] 기자를 거쳐 [한국문학] 편잡장 역임. 경기대 대우교수.
그는 도시화와 산업화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을 다루었다. 그의 소설은 고향 잃은 사람들이 갈 곳 없음을 밝히면서 우리 사회 현실 속에서 개인이 겪는 갈등과 불안의 실마리를 제시하는 데 특징이 있다.
충청남도 보령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으며, 6ㆍ25전쟁으로 아버지와 형들을 잃고, 이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15세 때 가장이 되었다. 1959년 중학교 졸업 후 상경해 막노동과 행상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1961년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 입학해 김동리(金東里), 서정주(徐廷柱) 등에게 수학했다. 단편소설 <다갈라 불망비>(1963)와 <백결>(1966)이 김동리에 의해 [현대문학]에 추천되어 등단했다. 등단작품의 독특한 문장과 문체에 주목한 김동리는 추천사에서 '한국 문단은 가장 이채로운 스타일리스트'를 얻게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우리말 특유의 가락을 잘 살려낸 유장한 문장으로 작가 자신이 경험한 농촌과 농민의 문제를 작품화함으로써, 소설의 주제와 문체까지도 농민의 어투에 근접한 사실적인 작품세계를 펼쳐보여 농민소설의 새로운 장을 개척한 작가로 평가된다.
고향을 상실한 사람들의 애환과 그러한 상황을 초래한 시대적 모순을 충청도 특유의 토속어로 잘 포착해 형상화하고 있다. 농촌을 소재로 한 대표적인 연작소설 <관촌수필>은 1950∼1970년대 산업화시기의 농촌을 묘사함으로써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현재의 황폐한 삶에 대비시켜 강하게 환기시켜 주는 작품이고, 새마을운동 이후 변모된 농민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한 또다른 연작소설 <우리동네>는 산업화 과정에서 농민들이 겪는 소외와 갈등을 가감없이 보여줌으로써 일종의 농촌문제보고서와 같은 작품으로 평가된다. 나무이름을 제목으로 하는 단편모음집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는 1990년대 이후의 영악해진 농민과 삭막해진 농촌풍경을 각기 다른 양태를 지닌 나무에 비유해 정감 있는 토속어로 맛깔스럽게 그려낸 작품이다. 작가의 문학과 인생역정의 또다른 표현으로 평가되는 이 작품집으로 2000년 동인문학상을 수상했다.
작품활동 외에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간사(1974∼1984),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이사(1977∼1997),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1987∼1988), 한국소설가협회 상임이사(1995∼1997), 민족문학작가회의 부이사장(1998∼1999),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1999∼2001)을 역임하는 등 한국문학의 발전을 위해 사회활동에도 활발히 참여했다. 한국소설가협회 편집위원장, 김동리선생기념사업회 회장, 대산문화재단 자문위원, 한국문인협회 이사, 한국소설가협회 이사,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이사, 경기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대우교수 등을 지냈다.
【문학인생】
문장으로 치면 '북에 홍명희, 남에 이문구'라 할 만큼 아름다운 문장이요, 주제의식으로 치면 '산업화 과정에 노출된 사회문화적 황폐에 대한 가장 혼신적인 문학적 반응'이라 평할 만큼 진지하고 견결하다.
만연체와 구어체, 토속어와 서민들의 생활언어가 결합된 그의 독특한 문체는 한글이 얼마나 수려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문구 이름 석 자는 이 문체만으로도 우리 문학사에 영원히 기록될 만하다.
작가는 곧 말의 발견에서 출발한다고 믿는 이문구는 틈만 나면 '말(語) 사냥'을 나선다. 희귀한 토속어를 수집하러 다닌다기보다는 민중의 삶에서 우러나는 살아 있는 말들의 현장을 찾아다닌다. '우리네만의 체온과 체취와 체통이 스며 있고, 우리네의 줏대와 성품과 생각이 들어있는' 말을 찾아 다리품을 팔고 조탁하는 과정을 거쳐 나온 것이 그의 빛나는 언어들인 것이다. 그는 이 빛나는 언어들로 '옛 모습으로 남아난 것'에 대한 그리움을 목놓아 노래해 왔다.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애정은 그의 생활습관도 일치한다. 서울 시내에서 약속할 때면 인사동의 '사루비아 다방'을 애용하는데, 이 곳은 시내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남은 '70년대 풍' 다방이다. 이 곳을 즐겨 찾는 유일한 이유는 '변하지 않는 것이 좋아서'다. 그래서 이문구의 문학은 '복고의 극치'로도 일컬어진다.
그러나 어떤 평자들은 전통적 리얼리즘 소설에서 비켜서 있는 이문구 특유의 이야기체 소설과 그 문체의 반근대적 성격에서 근대화에 대한 진지한 반성을 요구하는 탈근대적, 미래지향적 문제의식을 발견한다. 그의 작품들은 문학적으로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대개 스테디셀러가 되어 독자들로부터도 사랑받아 왔다. 그러나 상업적 성공과는 거리가 있어, <매월당 김시습>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나서야 '작가가 된 지 27년만에 처음으로' 자기 방을 갖게 되었다.
그로부터 한참 세월이 흐른 요즘, 그는 또다시 청빈행으로 돌아가 있다. 1998년의 작가 수입 조사에 의하면, 장성한 두 자녀를 둔 이문구의 월 평균 수입은 딱 118만원. 그나마도 구에서 운영하는 문화원에 고정강사로 뛰고, 잡문도 열심히 쓴 결과다. 이제는 '옛 모습을 지키고 있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고 할 정도로 변해 버린 고향 마을에서, 소년 시절의 이문구는 남로당 충남지역 간부였던 아버지의 죽음을 보았고, 가난했지만 또한 풍요로웠던 그 곳이 6ㆍ25라는 미증유의 비극으로 갈갈이 찢기는 모습을 또한 보았다.
그러나 이문구는 자기 가족사에 무거운 그림자를 드리운 분단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는 대신, 그로 인해 초래된 민초들의 고난한 삶을 생생한 그 모습 그대로 퍼올려 자기 문학에 담음으로써 오직 그만이 이뤄낼 수 있었던 독특한 미학의 경지에 도달하였다.
【경향】산업사회 속에서 사라져 가는 전통적인 삶에 따스한 애착을 개성적 문체 속에 담아 내고, 집요한 요설문체와 충청도 토속어의 대담한 도입으로 도시의 저변층과 농민 등 소외당한 인간들의 파탄을 구조적으로 분석하는 데 특징을 보인다.
【상훈】
한국일보문학상(한국일보사.1972), 한국문학작가상(한국문학사.1978), 요산문학상(요산문학상운영위원회.1990), 흙의 문예상(전국농업기술자협회.1991), 펜문학상(국제펜클럽 한국본부.1991), 농촌문화상(농협중앙회.1993), 만해문학상(만해문학상운영위원회.1993), 서라벌문학상(서라벌예대 동창회.1992), 대통령표창(대통령.1996) 동인문학상(2000)
【작품】<백결(百結)>(1966) <이삭>(1968) *<암소>(1970) <이 풍진 세상을>(1972.정음사) <추야장>(1972) <해벽>(1974.창작과 비평사) <백면서생>(1974) <우리동네>(1981.민음사) *<관촌수필>(1972~77.문학과지성사.연작단편소설) <우리 동네 김씨>(1977) <우리동네 최씨>(1978) <우리동네 유씨>(1979) <우리동네 장씨>(1980) <우리동네 조씨>(1981) <강동만필1>(1984) <강동만필2>(1985) *<장한몽>(1988.책세상) <개구쟁이 산복이>(1988) <산 너머 남촌>(1990.장편) <장곡리 고욤나무>(1991) <매월당김시습>(1992.장편.문이당) <유자소전>(1993.벽호) <더더대를 찾아서>(1994) <장척리 으름나무>(1994) <장동리 싸리나무>(1995) <장천리 소태나무>(1998) <줄반장 출신의 줄서기>(2000)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 왔다>(2000) <나는 남에게 누구인가> <몸으로 살러온 사내> <지금은 꽃이 아니어도 좋아라> <소리나는 쪽으로 돌아보다> <글밭을 일구는 사람들> <아픈 사랑이야기> <개구장이 산복이> <김탁보전> <토정 이지함>
【소설집】<이 풍진 세상을>(1972) <해벽>(1974) <엉겅퀴 잎새>(1977) <관촌수필>(1977) <으악새 우는 사연>(1978) <우리 동네>(1981) <다가오는 소리>(1991) <유자소전>(1993)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2000)
【산문집】<아들 사랑 이야기>(1977) <지금은 꽃이 아니어도 좋아라>(1979) <소리나는 쪽으로 돌아보다>(1993) <글밭을 일구는 사람들>(1994) <나는 남에게 누구인가>(1997) <줄반장 출신의 줄서기>(2000)
【꽁트집】<누구는 누구만 못해서 못허나>(1980) <몸으로 살러온 사내>(1987)
【동시집】<개구쟁이 산복이>(1988)
【전집】<이문구전집>(1996.솔)
【연보】
1941 충남 보령 출생
1963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1966 [현대문학]에 단편 <백결>이 추천되어 등단
1970 [창작과 비평]에 장편 <장한몽> 연재(∼1972)
1970 [월간문학] 편집장(∼1972)
1970 한국문인협회 [월간문학] 편집장(∼1973)
1972 제5회 한국창작문학상 수상
1973 월간 [한국문학] 편집장(∼1975)
1974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간사(∼1984)
1977 한진출판사 편집장(∼1984)
1977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이사(∼1997)
1978 제5회 한국문학작가상 수상
1982 제1회 신동엽 창작기금 받음
1984 계간 [실천문학] 대표(∼1989)
1987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1988)
1990 제7회 요산문학상 수상
1991 <장곡리 고욤나무>로 흙의 문예상 수상
1991 펜문학상 수상
1992 제2회 서라벌문학상 수상
1993 제8회 만해문학상 수상
1994 계간 [한국소설] 편집위원장
1995 소설가협회 상임이사(∼1997)
1996 문학의 해 조직위원회 출판홍보분과 위원장
1996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강사(∼1998)
1997 한국소설가협회 편집위원장
1998. 3 민족문학작가회의 부이사장(∼1999)
1998. 3 경기대학교 문예창작과 대우교수
1998.10 제2의건국범국민추진위원회 위원
1998.11 김동리선생기념사업회 회장
1999. 3 대산문화재단 자문위원
1999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2001)
2000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로 동인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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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과 깨달음의 문학세계-‘관촌수필’, ‘우리 동네’를 중심으로> - 김종철(金鍾澈)
이문구는 우리 나라의 현존 작가 중에서 농촌의 현실에 가장 밝은 사람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는 충남 보령군 대천읍 대천리 속칭 관촌 부락에서 태어나, 그 반농 반어(半農半語)의 고장에서 농어민의 생활을 유년기부터 보고 겪으면서 자랐고, 중학생의 몸으로 손수 농사를 짓기도 했다. 그는 어른이 되어 서울에서 작가로 활동하다가 77년 5월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행정리 (발안)에 삶의 터를 정하고 농민들과 어울려 여러 해 동안 생활했다. 이문구의 어린 시절과 발안 시절의 생생한 체험, 그리고 그가 서울에 사는 동안 가끔 찾아가곤 했던 고향 대천에서 보고 들은 일이 <관촌수필>과 <우리동네> 연작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
<관촌수필>은 77년부터 78년까지 연작 형식의 소설로 발표되었다. 연작의 편인 <일락서산>, <화무십일>, <행운유수>, <녹수청산>, <공사투월>은 작가의 유ㆍ소년기 추억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관산추정>은 어린 시절에 같이 놀다 탈향(脫鄕) 후 다시 만난 고향친구와의 이야기이다. <여요주서>와 <월곡후야>는 장성한 뒤에 귀향했다가 겪은 경험담이다.
<우리동네>연작은 이 문구가 발안에 들어간 뒤 최근까지 발표한 단편소설들인데, 이 책에 수록된 <김씨>, <이씨>, <최씨>, <정씨>, <강씨>, <유씨> 말고도 <장씨>, <조씨>,<황씨>(중편 <으악새 우는 사연>을 개제)가 있다.
<관촌수필> 연작에서 가장 강렬한 감동을 주면서 독자를 사로잡는 인물은 <공산토월>의 석공이다. 다음과 같은 대목에서 석공의 인간미는 여실히 드러난다.
……그는 자기 집 농사에만 부지런을 피운 것이 아니었다. 이웃 동네 크고 작은 일에도 부러 빠진 적이 없었다……추렴이나 비럭질로 마음의 곳집을 고친다거나 봇둑 보수가 있게 되면 으례 석공이 앞장서 나서야만 버그러지고 뒤틀림이 없었다……사변통에 어떻게 없어진지 모른 마을 상례 기구가 마련되기까지 상여계와 상포계(喪布契)를 일으켜 마무리지은 것도 석공 힘이었고, 里中契(이중계)가 해를 더해 갈수록 번창을 본 것도 순전 그의 적공이던 것이다. ……7월 삼복 땡볕 아래서 남의 무덤을 파고, 8월 장마 궂은 밤비 속에서는 갓난애 무덤을 꾸려 냈다. 특히 동네에서 죽은 어린애 관은 거의 석공 혼자서 지고 올라가서 매장하기 일쑤던 것이다. 들으나마나 한 공치사 몇 마디 외엔 아무런 보수도 없던 일들, 마치 그런 일에 봉사함만이 자기의 직분이며 도리인 것처럼.
석공은 마을 공동 관심사를 앞장서 해결하고 적빈(赤貧)에 시달리는 이웃의 일을 도맡아 처리한다. 그는 왕조 체제 아래서 억압적인 구조 속에 신음하면서도 상부상조하던 백성의 전형이다. 석공이야말로 우리가 어렸던 시절, 고향에 더러 남아있던 ‘구원(久遠)의 한국인상’이다. 옆집 사람이 죽건 말건, 길가에서 행인이 강도를 당하건 말건 아랑곳않는 매정한 도시인들 속에 섞여 살다가 석공과 같은 사람에 부딪치면 우리는 스스로 잃고 있는 게 무엇인가를 통렬하게 깨닫게 된다. 물질적인 부가 아무리 풍요해져 안락한 생활을 누릴 수 있는 세상이 온다해도 이런 인간이 없다면 그 세계는 얼마나 삭막할 것인가?
우리는 석공에게서 문자 그대로의 인도주의를 본다. 이 혼탁한 물질문명의 시대에 더없이 소중한, 석공처럼 감동적인 인간상을 그려내는 데 작가의 문구의 탁월함이 있다.
필자는 이문구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작자 개인의 진실성이 작품에 진하게 투영되어 있는 것을 느낀다. 흔히 작가와 작품을 하나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만, 필자는 이문구의 소설에서 작자의 사람됨이 독자를 강력하게 사로잡는 것을 볼 때마다, 역시 진실한 인간이 훌륭한 작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석공이 6ㆍ25 때 겪은 고초의 여파로 죽을병을 얻어 서울에 와 치료를 받는 장면에서 그것은 여실히 나타난다.
낮에는 누나가 가사를 전폐하고 병실을 돌보았고, 밤이면 밤마다 내가 불침범을 섰다…낮에는 온종일 서울 바닥을 쓸다시피 약국 뒤지기로 해를 저물리었다…제약회사, 제약공장을 찾아 안양, 시흥, 태릉, 의정부…서울 근접의 공장까지도 알 수 있는 곳이면 멀다 할 수가 없었다.
석공을 살리기 위해 하루 백리길을 걸어서 헤매는 ‘나’의 인간적인 행동은 석공의 인정과 어우러져 절실한 감동을 안겨 준다. 그것은 단순한 의리심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이기주의나 도시인 근성과는 거리가 먼 진실한 인간성에서 우러난다.
‘나’의 집에서 부엌살림을 하는 봉점이, 드난살이하는 아낙네의 아들 대복이, 한마을 친구 복산이, 그리고 ‘나’의 어머니 석공만큼은 강렬하지 못하지만 역시 흐뭇한 인정의 세계를 보여준다. ‘나’의 어머니가 <화무십일>에서 피난민 일가에게 보이는 ‘인심’은 전통 사회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던 인도주의의 한 단면이다.
그런데 <관촌수필> 연작에 그려진 ‘인정의 세계’ 이면에는 50년대 초까지 존속된 ‘반상적(班常的 질서’가 있다. 평론가 김종철(金鍾哲) 교수는 그 점을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관촌수필>에 등장하는 양반 가문인 이씨네 사람들은 어진 사람들이며 이 어진 마음을 중심으로 화목한 마을이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사회를 억압적인 사회라고는 물론 말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억압적인 사회의 잔재는 고스란히 남아 있으며 계층적 차별은 여전히 분명하다.”(<사화변화와 전통적 가치>: 문학과 지성 1978년 봄호 p.271)
‘나’에게 유년기부터 천자문을 가르치던 할아버지가 동네에는 ‘상것’들의 자식밖에 없다고 하여 외지에서 온 사람들의 아들들을 택해 함께 공부를 시키는 것이 그 단적인 예이다.
<관촌> 연작의 주조를 이루는 인정의 세계는 매우 감동적이지만, 이제는 우리의 의식이나 생활에서 청산되어 마땅한 ‘봉건적 질서’를 아쉬워하는 듯한 인상을 줌으로써 독자의 반감을 일으킬 수도 있다.
이문구의 소설들을 보면 도처에 ‘양반’과 ‘상것’ 이야기가 나온다. 물론 그가 일방적으로 양반의 전통을 찬양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왕조 체제 아래서 그 나름으로 저항하면서 선비의 기개를 지킨 양반들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그 체제 아래서보다도 지배와 피지배자의 갈등이 더욱 심한 현대에, ‘반상적 질서’에 대한 집착은 자칫하면 작가의 역사의식을 해칠 우려가 있다.
<관촌수필>이 염무웅 교수의 적절한 지적 그대로 ‘잃어진 육친과 쫓겨난 고향에 대해 바치는 최대의 문학적 獻辭(헌사)요 낳아 길러 준 땅에 되돌리는 가장 귀한 갚음’이다. (<도시-산업화시대의 문학>, 민중시대의 문학, p.330) 이런 성과와 동시에 이 작가는 ‘새로운 시대의 농촌 현실을 보다 전면적으로 형상화하는 다음 단계의 필연적인 과업’(같은 책,p330)을 안게 되었다. 이 필연적인 과업으로 나타나는 것이 <관촌수필> 편과 <우리동네> 연작이다.
<관촌수필>의 전기(前期) 작품들이 봉건 질서의 잔영 속에서, 갓잡아올린 생선처럼 팔딱이는 싱싱한 삶을 살아가는 전형적 한국인상을 그렸다면 <관촌수필>의 후기작과 <우리동네> 연작은 억압적인 체제 아래 근대화와 상업주의의 공세에 몰려 해체되어 가는 농촌 공동체를 묘사하고 있다.
전자에서도 이 작가의 날카로운 사회 의식이나 비판정신이 엿보이기는 하지만 후자에 이르면 그것이 도처에서 독자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준다. 전자는 우리에게 잃어버린 고향을 되돌려 주고 우리 곁에는 이미 없는 소중한 인간상을 보여 주는 ‘정서적인 감동’의 세계이다. 후자는 ‘인간다운 삶의 뿌리 자체가 괴물같은 권력에 의해 흔들리는 농촌에서 비판적인 안목으로 세태를 주시하면서 소박하게 항거하는 당대인들이 환기시키는 지적인 깨달음의 세계’이다. 이 ‘정서적인 감동’과 ‘지적인 깨달음’의 바탕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우선 그의 문체를 들지 않을 수 없다. 평자들은 흔히 그의 문체를 입담이라고 간단히 정의하거나 판소리의 가락 또는 사투리를 적절하게 구사하는 독특한 유형이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면만 있지는 않다. 그는 분위기나 정경 및 동물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 참으로 아름다운 문장으로 읽는 이를 흡인(吸引)한다.
모닥불은 계속 지펴지는데다 달빛은 또 그렇게 고와, 동네는 밤새껏 매양 황혼녘이었고, 뒷산 등성이 솔수펑 속에서는 어른들 코골음 같은 부엉이 울음이, 마루 밑에서 강아지 꿈꾸는 소리처럼 정겹게 들려오고 있었다. 쇗쇗쇗쇗……머리 위에서는 이따금 기러기떼 지나가는 소리가 유독 컸으며, 낄륵-하는 기러기 소리가 들릴 즈음이면, 마당 가장자리에는 기러기떼 그림자가 달빛을 한 옴큼씩 훔치며 달아나고 있었다.
이것은 <공산토월>의 일절이다. 필자는 석공이 장가가는 날 밤을 묘사한 이 대목이 우리나라 현대문학에 등장하는 가장 아름다운 묘사에 든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유려하고도 정감 넘치는 묘사는 이문구의 소설 도처에서 보인다. 그는 이런 종류의 묘사와 앞에 말한 입담을 통해 독자를 감동의 세계로 이끌어간다.
다음으로, 그의 작품에서 활력소로 작용하는 것은 생황의 제반사와 자연에 대한 정밀한 지식이다. 그의 소설에는 살림살이에 대한 추상적인 서술이 없으며 ‘이름 모를 새’ 따위의 표현도 없다. 농촌의 연장, 어촌의 漁具(어구), 생선이름, 나무와 풀 이름, 목수와 연장, 꽃상여의 부분 명칭 등등, 그의 비틈없는 지식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외래어로 디테일이라고하는 이 세부 지식은 그의 작품을 튼튼한 기초 위에 세워 준다. 우리는 이문구의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가 발딛고 사는 이 세상과 자연에 대해 너무나 무지함을 절감하게 된다.
이 세부 지식은 그의 작품을 튼튼한 기초 위에 세워 준다. 우리는 이 문구의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가 발딛고 사는 이세상과 자연에 대해 너무나 무지함을 절감하게 된다.
이문구가 발안 생활에 들어가 농촌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관찰하고 체험하면서 써낸 <우리 동네>연작의 전초적인 지표가 되는 작품이 <관촌수필> <관산추정>, <여요주서>, <월곡후야>이다.
<관산추정>의 후반은 옛날의 그 포근하던 한내(大川)가 도시에서 밀려온 소비 문화와 퇴폐의 하수구가 된 실상을 그리고 있다. 뚝에 지천으로 버려진 콘돔이 돼지 먹이 풀에 섞여 돼지가 횡사하는 일이 빈번할 정도로 이 반농반어의 생활 터전은 더렵혀진 것이다.
<여요주서>는 어느 소년이 아버지의 병구완을 위해 잡은 꿩을 팔아 주려던 ‘나’의 선량한 중학 동창이 자연 보존에 역행했다는 이유로 공권력의 횡포에 시달리는 이야기로서, 인간을 배제하는 사이비 자연 보호와 권력의 남용을 날카롭게 파헤치고 있다.
한내에서 떨어진 곳에 있는 벽촌에서 중년남자가 소녀를 겁탈한 사건을 둘러싸고 동네 청년들이 범인에게 사적인 제재를 가하는 <월곡후야>에서 작가는 파렴치범의 죄악보다도, ‘지역사회 발전과 근대화를 위해 발벗고 나섰다’고 자랑하면서 그를 단죄하는 청년들의 불성실한 태도에 초점을 맞추어 ‘정치적인 구호’의 허구를 폭로한다.
<관촌수필>후기작들이 체험과 관찰을 밑거름으로 해서 독자에게 주는 지적인 깨달음은 「우리동네」연작에서 일단의 비약을 한다. 이 깨달음은 작가가 농촌에 살면서 애정과 비판의 눈길로 관찰한 사실을 문학적으로 승화시킨 데서 비롯된다.
<우리동네> 연작에서 이문구의 제재( 題材)는 한결 폭이 넓어진다. 이 연작 가운데서 가장 긴 ‘황씨’는 농촌의 안방에 침투한 텔레비전, 선풍기. 농약 공해로 자취가 드물어진 곤충, 농촌의 고리채, 부재 지주의 증가, 농민 위에 군림하는 관료, 농협을 악용하는 모리배, 고추에 농약을 마구 뿌리는 악덕 농민, 이리저리 수탈당하는 농민의 실상을 절실하게 그리고 있다.
…내 말이 저기헌 것이, 요새 텔레비전 한가지만 여겨 보라구. 활동사진이구 굿이구간에 여편네들이 저기할 게 있다? 자식들이 한 가지나 배울 게 있다? 공해가 벨게 아닌겨, 사람 사는디 이롭잖은 건 죄 공해거든… 신문을 보자면 열통이 터지구, 무슨 들어볼 만한 소식이나 �R으까 하구 워쩌다가 틀어보면 예미-사람이 얼마나 죽구 얼마를 도적질혔다는 얘기뿐이지… 경향간에 공해버텀 평준화 돼가지구설랑.
이처럼 순박하면서도 날카로운 비판은 <우리동네> 연작의 도처에서 발견된다. 민방위 교육을 풍자한 김씨, 농촌의 아이들에게까지 전염병처럼 번진 망년회, 부녀들의 관광여행, 고고춤, 농협의 변칙운영, 조미료 중독, 도박풍조를 그린 이씨, 도시인들이 사냥 공해와 농민의 자녀가 관련된 노사문제를 다룬 최씨, 모내기에 동원되어 주민을 골탕먹이려고 데모를 하는 고등학생과 통대(統代) 사기꾼의 행각을 묘사한 정씨,농민이 소외되는 농촌 근대화의 허구와 수매의 비리를 파헤친 강씨는 바로 70년대 이후 농촌의 축도라고 할 수 있다.
백 낙청 교수의 표현대로 ‘여기 그려진 농촌은 왕년의 농촌 작가들이 흔히 다루던 절대적 빈곤과 정체의 세계가 이미 아니며 많은 도시인들이 향수에 젖어 몽상하는 목가적 풍경과도 물론 거리가 멀다.’(서평 <사회 비평 이상의 것>,창작과 비평 1979년 봄호,P.347)
70년대 이후의 농촌이 물질적으로 이전보다 어느 정도 풍요해졌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풍요의 본질은 무엇인가. 농민이 절대적 빈곤에서 벗어나긴 했으나 그들은 흘린 땀의 대가치고는 원통하기 짝이 없는 상대적 빈곤에 허덕이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웃이 이웃을 사랑하고 상부상조하던 전통적인 공동체가, 텔레비전을 전위로 한 상업주의 매스컴의 영향과 독점 자본의 소비문화 조장 때문에 붕괴되었다는 사실이다.
농촌 공동체 파괴, 농촌의 물질적. 정신적 황폐화는 노동문제와 더불어 우리 시대에 가장 심각한 상처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런데 도시에서 안락한 생활을 하면서 어쩌다가 고속버스를 타고 길가에 전시용으로 지어진 양옥들만을 보는 사람들은 우리의 뿌리인 농촌의 진정한 모습을 알 수가 없다. 그들은 이제 농촌도 잘살게 되었다는 매스컴의 상투적 선전에 마취되어 있는 것이다.
역사를 오늘 속에 되살리고 오늘의 삶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는 것은 작가의 중대한 채무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 나라의 작가들 가운데서 현실의 중요한 일부인 농촌과 농민에 눈길을 돌리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더러 있다고 해도, 농민의 모습을 참되게 전달하는 작가는 찾기가 힘들다. 이런 까닭에 이문구는 대단히 소중한 작가이다. 그는 이 땅에서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 그 중에서도 특히 농민을 애정어린 눈으로, 때로는 날카로운 안목으로 바라본다. 필자는 앞으로 그가 과거의 역사와 현재의 삶을 감동적으로 접맥시키는 작품을 생산할 수 있는 역량을 지닌 작가라고 믿지만, 지금 농촌 소설로써 거둔 문학적 성과만으로 이미 문학사에 오래 남을 기념비를 세웠다고 생각한다.
<이문구씨 동인문학상 수상> - [동아닷캄](2000. 10. 6)
이문구(李文求ㆍ소설가)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이 6일 제31회 동인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수상작은 농촌의 전원사회를 배경으로 서민들의 질박한 삶에 깃든 진실을 그려낸 연작소설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문학동네). 상금은 5000만원.
<작가 이문구씨 타계> - [동아닷컴](2003. 2. 26)
유장하고 해학적인 문체로 우리말의 토속성을 살려 온 작가 이문구(李文求)씨가 25일 밤 10시40분 서울 중구 인제대 백병원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62세. 빈소는 서울대병원에 마련됐다.
고인은 1941년 충남 보령에서 출생,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한 뒤 1966년 「현대문학」에 단편 <백결>이 추천돼 등단했다. 이후 피폐한 농촌상을 풍자적으로 그린 <우리 동네> 연작을 비롯해 <관촌수필> <장한몽> <매월당 김시습> 등의 작품을 발표, ‘신산고초 속의 민생의 일상이 깊이 어우러진’ 독특한 문학세계를 가꿔왔다.
만해문학상(1993), 동인문학상(2000) 등을 수상했으며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과 경기대 교수를 지냈다. 유족으로는 부인 임경애씨와 아들 산복, 딸 자숙씨가 있다. 장례는 문인장으로 치러진다.
<이문구씨 타계 - ‘농촌 최후의 이야기꾼’> - [동아닷컴](2003. 2. 26)
25일 밤 세상을 떠난 <관촌수필>의 작가 이문구는 토속적인 아름다움을 담은 해학적인 문체로 한국문학에서 독특한 경지를 일궈 왔다. 대중적 인기를 크게 누리지는 않았지만 그의 문체는 한국 문단에서 독보적인 것이었다. 걸걸한 입담에 충청도 방언이 지닌 고유의 의미와 미감을 실은 그의 문체에 대해 작가 송기숙은 ‘시골 밭둑의 싱싱한 수풀 같다’고 평했다.
2년 전 위암으로 자리에 눕기 전까지 그는 문단 행사나 문인 초상 등에서 일 맡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어울림’을 아는 사람이었다. 친구 많기로, 선후배 챙기기로는 첫손가락에 꼽히는 문인이었다.
좌익에 가담했던 부친을 6ㆍ25전쟁 때 잃은 그는 두 형마저 ‘빨갱이 자식’이라는 이유로 대천해수욕장 바닷물에 산 채로 수장되는 뼈아픈 고난을 겪게 된다. 아들과 손자를 먼저 보낸 조부와 어머니도 그 뒤를 이어 세상을 떠났다. 가족을 모두 잃은 그는 고향 대천에서 중학교까지 마친 뒤 1959년 상경해 서울 신촌시장에서 좌판을 벌이거나 떠돌이 행상, 막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서라벌예대에 응시했고 면접을 봤던 김동리는 ‘특이한 문장’이라며 그를 ‘을류 장학생’으로 뽑아줬다. 동급생으로는 조세희 한승원 이건청 등이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이름을 날렸던 ‘선수’들 중에서 ‘노가다’ 문장으로 주눅들어 있던 이문구. 그의 스승인 김동리는 그를 “한국 문단에서 희귀한 스타일리스트가 될 것”이라고 아낌없이 독려해 줬으며 그의 습작을 논하라는 시험문제를 내기도 했다. 대학시절 이후 이문구는 김동리를 아버지처럼 섬겼다. 김동리의 추천으로 이문구는 등단했고 「월간문학」 「한국문학」 등 문예지의 편집장을 맡기도 했다.
졸업 후 이문구는 생계를 위해 노량진에서 동작동까지 도로확장공사도 했고 연희동 외국인학교 터에 있던 공동묘지 3000기를 옮기는 일도 했다. 그러면서 노동의 현장에서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법을 배웠다.
1970년대 유신시절, 보수와 순수문학을 대표하는 김동리와 진보 진영, 참여문학의 선두에 선 이문구, 스승과 제자의 문학적 경향은 상극이었다. 그럼에도 사제지간의 정은 조금도 변치 않았다. 1988년 서울에서 국제펜클럽대회가 열렸을 때 참여문학을 대표하던 민족문학작가회의와 김동리가 대립 양상을 보이자 그는 스승에게 돌을 던질 수 없다는 이유로 스스로 작가회의를 떠나기도 했다. 스승이 타계한 뒤 1995년 이문구는 김동리기념사업회를 만들고 첫 사업으로 김동리문학상을 제정했으며 떠날 때까지 사업회의 회장직을 맡았다.
2000년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으로 취임한 뒤 그는 김지하 등 작가회의와 소원했던 인물들을 끌어안는 작업을 시작으로 문인 복지에 목소리를 높였다. 작가회의나 문인협회도 군사독재의 시대적 산물이라 여겼던 그는 이런저런 정치적 현안으로 성명을 내야 하는 일에 괴로워했다. 작가는 서재로 돌아가 글을 써야 한다고 주장했던 그다.
문학평론가 유종호는 그를 ‘농촌 최후의 시인’이라고 했다. 기세가 담긴 전통사회의 농촌 언어로 빚어온 그의 작품들에는 늘어지고 휘감기는 문장, 풍요로운 토박이말과 사투리를 비롯해 판소리 사설 같은 구수함이 깃들여 있다. 조상으로부터 이어받은 선비 기질과 직접 경험한 밑바닥 삶, 6ㆍ25전쟁에 대한 기억이 이문구 문학의 바탕을 이룬다.
‘이름 앞에 어떠한 수식도 붙여지길 원치 않는다’는 작가 이문구. 그는 ‘죽을 때까지 현역작가라는 말을 듣고 싶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마지막 길을 떠나며 이문구는 동시집 <산에는 산새 물에는물새>(창작과비평사)를 남겼다.
<토속소설가 이문구, ‘역사에 오래 남을 작가’> - [동아닷컴](2003. 2. 26)
이문구의 외우(畏友)이자 ‘난해소설’ 작가로 후배 문인들의 숭배를 받고 있는 소설가 박상륭은 캐나다에 머물고 있던 지난 금요일 저녁(현지 시간) [문학동네] 강태형 대표로부터 난데없는 비보를 전해 들었다. 서라벌예술대 61학번 동기, 40년 지기 이문구가 아주 위중하다는 소식이었다.
부랴부랴 비행기표를 끊어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허공에서 17시간을 보낸 뒤 24일 오후 5시(한국 시간) 인천공항에 도착, 바로 친구가 입원해 있는 서울 중구 인제대 백병원을 찾았다. 그러나 이미 친구는 의식이 없었고 다음날 밤 영결(永訣)하고 말았다.
"이 선생은 내가 올 거라는 것을 알았나봐요. 보고 싶은 사람을 손꼽아 이야기하면서 '박상륭 지금 날아오고 있다'고 하더랍니다. 조금 더 일찍 알았더라면 가기 전에 몇 마디라도 할 수 있었을 것을…."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으셨나요."
"캐나다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뭘 했는지 들려주고 싶었어요. …이보게, 내가 이번에 장편 하나 써 왔네…."
그는 2000년 동인문학상 수상작인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를 보고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유언 같은 제목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쉬고 싶다는. 무의식의 발현이었나 봅니다."
30여년에 걸친 박상륭의 외국 생활로 시시콜콜한 일상을 나누지는 못했지만, 다르면서도 같은 이 두 사람은 편지로, 또 이문구가 다달이 캐나다로 부쳐오는 문예지로 마음을 전하곤 했다.
"우리는 성격이 아주 달라요. 외모도 그렇고. 이 선생은 덩치 좋고 잘 생기고 곧잘 뒷전에 앉았어요. 나는 작고 못 생기고 앞에 앉고. 나는 늘 싸움을 걸고, 이 선생은 말리고. 젊은 시절에는 만나면 한국 문학판을 안주 삼아서 막걸리를 함께 들이붓기 일쑤였지요."
동료 작가이자 독자로서 박상륭은 이문구의 작품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이 선생의 주제는 대지와 흙입니다. 인류가 가진 큰 원형적인 주제를 추구한 작가입니다. ‘땅’이라는 유토피아를 구현하고자 했던 작가지요. 농촌 또는 농민 소설가, 토속적 유머라고 규정을 지으면 이 작가가 가진 장점이 제한됩니다."
고인은 문단의 대소사와 온갖 궂은일에 헌신했다. 그러면서도 생색을 내거나 살뜰히 내 몫을 챙기지도 않았다. 이런 그를 박상륭은 '군자며 대인'이라고 했다.
"그는 자기 개인의 영달보다는 집단의 선에 기여하고 싶어했습니다. 도량이 큰 사람이에요. 유교적 사고에 바탕을 둔 청빈주의 선비주의와 의리, 이런 것들이 이 친구를 평생 동안 꿋꿋하게 살아오게 했을 거예요. '외유내강(外柔內剛)', 말 그대롭니다."
영겁(永劫)으로 사라진 친구의 빈소 앞에서 박상륭은 어느 한 곳 자리잡지 못하고 서성이고 있다. 시시때때로 간절하게 담배 생각이 난다고 했다.
"떠나 보내는 마음은 슬프지만, 남아 있는 사람들 얘기지요. 그 친구는 일상적 삶 속에서 빠져나가 역사 속에서 자유로운 상태를 누리게 됐습니다. 자리를 옮긴 것뿐이에요. 역사 속에 오래 남을 작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문구처럼 말예요."
▼이문구 선생님 영전에 ▼
선생님.
한밤중에 지인으로부터 선생님께서 운명하셨다는 말을 전해듣고 한동안 책상에 앉아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친구들이 와서 길게 놀다간 직후, 그들의 흔적을 둘러보고 있던 차였습니다. 기어이 가시는구나, 마음이 먹먹해서 그만 책상에서 일어나 방안을 왔다갔다했습니다. 그저께 캐나다에서 막 도착한 박상륭 선생과 함께 뵈었을 때 어쩌면 마음속으로는 이런 이별을 예감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박 선생님조차도 겨우 알아보시던 선생님. 그 며칠 전에 뵈었을 땐 흔연하게 웃으시며 반겨주시고, 김동리문학상 걱정도 하시고, 저에게 언제나처럼 예쁘다고 농담도 하셨는데 그저께는 단 한 말씀도 못하셨어요. 그때 이미 세상을 향해 열려 있던 선생님의 육체가 서서히 문을 닫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끝간 데 없는 슬픔처럼 더는 마르실 데가 없을 것 같았는데도 사흘만에 다시 뵌 선생님은 더 깊이 패어 계셨어요. 그래서 그야말로 본질만 남아 계시던 선생님. 병상에 계시면서도, 더는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눈짓으로 오가는 사람 마실 것을 챙기시던 선생님. 문득 선생님 손을 보았지요. 까칠하게 야윈 채로 형형하게 빛이 나던 선생님의 큰 손. 이 손으로 그 많은 일들을 해내셨구나, 한동안 선생님 손을 가만히 잡고 있었습니다. 속절없이 조금만 더 살아 계세요, 선생님, 한 십년만요, 간절하게 바랐습니다.
선생님이 이렇게 일찍 가실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아프시다는데도 어쩐지 선생님은 병마를 꿋꿋이 이겨내시고 큰바위 얼굴처럼 언제나 그 자리에서 우리들을 지켜보시겠지, 여겼습니다.
아시는지요. 제가 스물세 살에 선생님의 심사를 받고 문단에 나온 뒤 마흔이 된 지금까지 지난 17년 동안 내내 저는 선생님의 심사를 받았다는 것이 늘 자랑스러웠습니다. 자주 뵙지 못해도 선생님께서는 언제나 늘 변함없이 그 자리에 계실 것 같았습니다. ‘만연체 문장의 독보적 개척자’이신 선생님께서 탄생시킨 강인하고 싱싱하고 왁살스러운 소설 속 인물들에게 저는 늘 혼이 나는 기분이었는데도 그러하였습니다.
어찌 저만 그렇겠는지요. 선생님을 흠모하는 후배들이 선생님을 바라보는 마음은 밤 기차를 타고 가다가 어둠 속 산자락 밑에서 반짝이는 먼 불빛을 보는 마음이었을 겁니다. 죄다 잘못을 탓해도 어째서인지 선생님께서는 흠을 덮어주시리라는 믿음은 곧 선생님 인격에서 흘러나온 것이겠지요.
며칠 전에 선생님이 그러셨지요. 이제 살날이 얼마 안 남았다고 담담히 말씀하시다가 시대가 자유롭지 못했던 시절에 앞장서서 데모하는 일이 사실은 굉장히 무서웠다고 하셨지요. 입술에 거즈를 댄 채였지만 그 말씀을 하실 적만 해도 저는 선생님을 이렇게 쉽게 떠나보내게 될 줄은 정녕 몰랐습니다. 늘 산맥처럼 믿음직스럽고 앞뒤 살펴보지 않고 그저 따르고 싶은 분이셨기에 사실은 무서웠노라고 말씀하시는 게 낯설기조차 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날이면 선생님은 맨 먼저 나가 맨 앞줄에 앉아 계시곤 하셨다지요. 무서우셨다면서 왜 그러셨어요? 묻자 선생님께서 희미하게 웃으시며 약속을 했으니까, 하셨습니다. 어떡해야, 약속을 했으니 지켜야지, 그러셨지요. 제게는 그 말씀이 선생님의 유언처럼 들립니다.
선생님 떠나신 빈자리가 너무 큽니다. 부디 영면하소서.
후배 소설가 신경숙 바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