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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암공
1565년 경상도 유생을 대표하1565년 경상도 유생을 대표하여 여덟 차례에 걸쳐 중 보우(普雨)의 주살을 상소하였다. 여 여덟 차례에 걸쳐 중 보우(普雨)의 주살을 상소하였다.
輓요승 보우 논한 상소 귀신조차 놀래었네 - 영남(嶺南)의 사림(士林)들이 상소를 올려 보우(普雨)에 대해 논할 적에 공이 소두(疏頭)가 되었다. - / 疏詆妖髡鬼砉驚詞[鄭愚伏經世]
[주1]보우(普雨) : 명종(明宗) 때의 중으로, 명종의 모후(母后)인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섭정(攝政)할 때 문정왕후의 총애를 받아 승과(僧科)를 부흥하고 도첩(度牒)을 주어 불교를 부흥시켰다. 문정왕후가 죽은 뒤 유신(儒臣)들에 의해 귀양 갔다가 피살되었다.
[주2]안탑(雁塔)에 …… 날이었고 : 40세에 과거에 급제하였다는 뜻이다. 안탑은 서안(西安)의 자은사(慈恩寺)에 있는 7층 탑인데, 당(唐)나라 때 과거에 입격하여 진사(進士)가 된 사람들이 곡강(曲江)에서 잔치를 한 뒤에 이 탑에 제명(題名)하였으므로, 과거에 입격하였다는 뜻으로 쓰인다. 강사일(强仕日)은 《예기(禮記)》에서 ‘마흔 살에 처음으로 벼슬길에 나간다.〔四十曰强而仕〕’ 한 데서 온 말로, 40세를
가르킨다
筵席에서 임금에게 도량이 넓지 못하다는 충고까지.
李珥의 잘못을 彈劾하다 오히려 光州牧使로 밀려나
공은 1589년(선조 22년) 박근원(朴謹元) 송응개(宋應漑) 허봉(許封)과 함께 이이(李珥)와 박순(朴淳)을 탄핵 했다가 오히려 광주목사(光州牧使)로 밀려 났다.
그러자 호남유생 정암수(丁巖壽)등 50여명이 상소를 올려 공을 헐뜯었다. 이소에 「호남에 종이 주인을 죽인 일이 있었는데 감사 유영립(柳永立)과 추관 김우굉이 모두 뇌물을 받고 놓아 주었다 합니다. 이것은 지위에 있는 자가 악을 미워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강상이 실추된 것입니다.」라 했다. 이 같은 소를 접한 임금은 오히려 상소한 자들의 허황된 고변에 크게 노했다. 허무맹랑한 일을 꾸며 상소를 올린 우두머리 열 명을 잡아들여 국문하도록 명했다.
병주 맡자 노약자들 앞다투어 환영했네 - 공은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있었다. - / 分竹幷州稚弱迎
한제께선 강직했던 백마생을 용납했네 - 공은 간관(諫官)의 직임을 맡았었다. - / 漢帝能容白馬生
소소는 옥당의 성대함에 합당했네 - 공은 경연관(經筵官)으로 있었다. - / 小蘇端合玉堂盛
휘장 걷자 기 땅 경내 탐오한 자 사라졌고 - 공은 호서 관찰사(湖西觀察使)로 있었다. - / 搴帷冀境貪汚屛
병주 맡자 노약자들 앞다투어 환영했네 - 공은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있었다. - / 分竹幷州稚弱迎
柱峯逸稿
김득가(金得可) 1547년(명종2)~1591년(선조24)
자는 대중(大中). 호는 주봉(柱峰).
부제학 개암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남양홍씨로 찰방 윤최의 따님이다.
명종(明宗) 19년(1564) 18세로 진사(進士)에 입격하여 여러 번 문과에 급제하지 못하자 소재 상공(노수신)이 심히 가석하게 여겼다. 1759년(선조12) 천거로 귀후서(歸厚署: 민덕귀후라는 말로 장례도감)의 별좌가 되고, 다음해(1760)에 의금부 도사가 되고, 1582년(선조15년)에 한성부 참군이 제수되고, 1583년(선조16)에 군기감 주부가 되었다가 그해 사헌부 감찰이 되었다. 1584년(선조17) 가을에 창녕현감으로 나가 1589년(선조22)에 임기가 차서(瓜滿) 돌아오니 백성들이 공의 공덕을 잊지 못하여 청덕비(淸德碑)를 세워 추모하였다.
팔오헌
또한 “백성이 잘 살면 임금은 누구와 더불어 못 살것이며 백성이 못살면 임금은 누구와 더불어 잘 살것입니까?”하고 “王政은 어디까지나 백성을 생각하고 백성을 위한 정사(政事)를 베풀어야 할 것입니다.”라는 상소문을 올렸다.
이 충간(忠諫)은 선인들에 의하여 중간에서 왜곡되어 오히려 정의(㫌義:제주도) 현감으로 좌천(左遷)되었다. 2년 후인 辛酉年(1681)에 임기를 마치고 귀가(歸家)하였는데 정의 현민들이 선정(善政)을 잊지 못하여 거사비(去思碑)를 세우고 오래 오래 칭송하였다.
남천록의 탄생 비밀
※聲裕-汝錂 父子 만인소
퇴계선생의 문인인 艮齋 李德弘과 天山齋 李咸亨이 『心經』을 공부한 것을 각자 기록해 두었는데, 天山齋가 이를 모아 『心經質疑』 1책을 만들어, 퇴계선생에게 바로 잡아 줄 것을 청하자, 선생은 『心經』은 가볍게 헤아릴 것이 못 만들었는데, 그 중 四七論은 모두 栗谷의 학설을 이어받자, 영남의 선배들이 대궐에 나아가 호소하기로 하고, 聲裕(숙종때)을 疏首로 삼아 궁궐 문을 두드려 마침내 성총으로 板本을 폐기해 버렸다. 성품이 仁厚하고 孝友가 지극하여 伯兄(聲厚), 仲兄(聲久)과 수십년을 같이 살아도 사람들이 이간하는 말이 없었다.
책읽기를 좋아하였으나 言行과 遺文은 누차 화재를 당하여 사라진 것이 많았다. 개암공이 요승 보우(普雨)에 대해 만인소의 소두(疏頭)이후 송시열을 비판한 聲裕, 김장생을 비판한 汝錂 父子가 만인소의 소두를 하다.
송암 김 경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