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허(鏡虛, 1846-1912년) 년보, 계보, 연구자, 소설가 ..
경허: 술에 취해 꽃밭에 누운 선승(2012)(일지, 一指 高在旭, 민족사)에 의하면(157-158쪽)에는 계보는 이러한다. .
태고보우(太古普遇 1301-1382년) – 환암혼수(幻庵混修) – 구곡각운(龜谷覺雲) – 벽계 정심(碧溪 淨心) – 벽송 지엄(碧松 智嚴) – 부용 영관(芙蓉 靈觀) – 청허 휴정(淸虛 休靜, 1520-1904) – 편양 언기(鞭羊彦機, 1581-1644) – 풍담 의심(楓潭 義諶,1592-1655) – 월담 설제(月潭 雪霽) – 환성 지안(喚惺志安, 1666-1729) – 호암 제정(12조 虎巖體淨) – 청봉 거안(13조 靑峰巨岸) – 율봉 청고(栗峰靑杲: 14조 1738-1823) – 금허 법첨(錦虛法沾: 15조, 1723-1783) – 용암혜언(龍岩慧彦, 1783-1841) – 경허 성우(鏡虛惺牛, 1846-1912). (157-158) [「11. 주장자를 꺾어 내던지다」(154)]
다른 이는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68조 호암체정 (12조 虎巖體淨)
69조 청봉거안 (13조 靑峰巨岸)
70조 율봉(栗峰) 청고(靑杲) 14조(1738-1823)
71조 금허(錦虛) 법첨(法沾) 15조(1723~1783)
72조 용암혜언 (16조 龍巖慧言(1783-1841).) ...
제73조 영월봉율(永月奉律).
제74조 만화보선(萬化普善)
제75조 경허성우(鏡虛惺牛) (1846-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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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6년 전라북도 전주 자동리 출생. 부친 송두옥(宋斗玉)과 모친 밀양박씨 차남으로 출생.
1854(아홉), 경기도 의왕시 청계산에 있는 청계사에서 계허(桂虛) 대사를 은사로 출가(9세)
1859(열넷), 철종 10년 글을 배우기 위해 계룡산 만화보선(萬化普善)에게 가다.
1860(열다섯) 계룡산 동학사 강원에서 경전 수업. 한용운(韓龍雲)의 <경허약보>는 “내외전을 두루 섭렵하여 이름을 떨쳤다”고 적고 있다.
1862(열일곱) 진주 민중봉기, 삼남각지에 저항과 봉기가 발생함
1866(스물하나) 병인양요(丙寅洋擾) 발발
1868(스물셋) 동학사 강원의 강사로 추대되어 1879년(서른넷)까지 역임.
1876(서른하나) 고종13년 강화도 조약 체결
1879(서른넷) 6월 환속한 스승 계허 스님을 만나러 여행 중 콜레라 창궐 봄. ‘이 생애가 다하도록 차라리 바보가 되어 지낼지언정 문자에 매이지 않고 조사의 도를 닦아 삼계를 벗어나리라(此生永爲痴呆漢 不爲文字所拘繫 參尋祖道 超出三界. 차생영위치태한 불위문자소구계 삼심조도 초출삼계)’고 다짐하고 강의를 폐지함
11월 15일, 이 처사의 '소가 되더라도 콧구멍 없는 소가 되어야지(牛無鼻孔處, 우무비공처).' 한마디를 전해 듣고 깨달음(31세) / 법호는 경허(鏡虛), 법명은 성우(惺牛)이다.
1880(서른다섯) 지금의 서산시 고북면 천장암에서 오후(悟後) 보임(保任). 개당설법(開堂說法)을 행하다.
1882(서른일곱) - 1898년(쉰셋)이후 20여년 간 천장암, 서산의 개심사, 부석사, 수덕사 등에서 에서 선풍(禪風)을 진작하다. 만공월면, 수월, 혜월, 침운 등의 제자들을 지도함.
[1886년, 6년 동안의 보임(保任)을 마치고 무애행 시작(37세)]
1884(서른아홉) 10월 초순 동학사에서 제자 도암(道岩 훗날 滿空)을 처음 만남.
[1894, 동학농민 항쟁]
1898(쉰셋) 광무2년. 서산 도비산 부석사에 주석. 범어사에서 경허를 초대함
1899(쉰넷) 대한 광무3년. 가야산 해인사로 주석처를 옮김. 합천 해인사의 법주가 되어 팔만대장경 불사와 수선사(修禪社)를 설치하다.
1900(쉰다섯) 4월 <범어사 총섭방함록서> 작성
1901(쉰여섯) 해인사에서 몇 편의 영찬을 작성.
1902(쉰일곱) 가을 동래 마하사의 나한개분 불사 대 증명.
1903(쉰여덟) 늦은 봄 범어사
그해 가을 범어사를 떠나 해인사에 들러 천장암으로 돌아옴. / 천장사: 충남 서산시 고북면 천장사길 100 (지번) 고북면 장요리 1
1904(쉰아홉) 7월 15일 전장암에 들러 제자 월면을 인가하고 전법게를 수여함. - 만공문도회가 펴낸 “만공어록”은 당시의 정황을 기록하고 있다.
1905(예순) 11월 을사늑약. 가을 광릉 봉선사에 나타나 월초 거연을 만남. 오대산 월정사에 머물며 3개월간 “화엄경”강의. 이후 금강산을 관람.
1906(예순하나) 봄 안변 석왕사 나한개분불사의 증명.
이후 장발(長髮)유복(儒服)으로 함경도, 평안도로 잠적. 가명 박난주(朴蘭洲)로 하고 훈장을 지내며 세간의 풍진(風塵) 속에 지냄
1910(예순다섯) 융희4년, 8월 29일 국권피탈
1912년 4월 25일, 갑산 웅이방(熊耳坊) 도하동에서 지병없이 입적하다.
1913 7월 25일 경허 입적 소식을 전해들은 만공과 혜월은 갑산 난덕산으로 가서 시신을 운구하여 다비에 붙임 <<위 연표는 일지 고재욱의 연보를 참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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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허 다음의 계보는 이렇게 말한다. '북송담 남진제'라고. 이 두 큰스님의 경우에, 송담(松潭, 1927-)스님은 경허(75대)-만공(76대)-전강(77대)-송담(78대)의 계보이고, 진제(眞際, 1934-)스님은 경허(75대)-혜월(76대)-운봉(77대)-향곡(78대)-진제(79대)의 계보이다. [진제: 팔공총림 / 송담: 용화선원 – 현 조계종 종정은 진제이다. ]
1931 한암 스님의 육필본 《경허집》. 한암 스님 나이 56세 때인 1931년 오대산 상원사에서 만든 것이다.
1942 임오년 6월 오성월, 송만공, 장석상, 강도봉, 김경산, 설석우, 김구하, 방한암, 김경봉, 이효봉 등 당시 한국선문을 대표하는 41인의 선사들이 《경허집》을 발간하기로 결정. 각 선원은 5원. 개인은 50전 이상의 연조금(捐助金)을 모아 그해 9월 출간. 경허선사의 입적 30년 지남.
1942/3 오늘날 활자본으로 전해지고 있는 《경허집》은 1943년 중앙선원(선학원)에서 간행된 것이다. 이 책은 경허 스님이 남긴 법어와 시ㆍ가송(歌頌)ㆍ기문(記文)ㆍ서간문(書簡文)ㆍ영찬(影讚)ㆍ서문(序文)ㆍ행장(行狀) 등을 묶은 문집 겸 법어집이다. 수덕사 만공 스님의 청으로 만해 한용운이 편집을 맡아 간행한 것이다.
1980 최인호(1945-2013), 길없는 길 1989년부터 『중앙일보』에 3년간 연재된 후 샘터사에서 1993년에 단행본 출간, 2002년 여백미디어에서 전4권으로 완간된 장편소설. 발간 10년 만에 100만부가 팔린 불교소설이다. 주인공은 경허이다.
1981 이흥우 《공성(空性)의 피안 길》(동화출판공사, 1981년);
1999 한중광 《경허, 길 위의 큰 스님》(한길사, 1999년);
2002 일지(고재욱一指 高在旭, 1957-2002)) 《삼수갑산으로 떠난 부처》 2판은 《경허》(민족사, 2002년) 등이 있다.
2002 무심: 경허스님의 마음의 큰 법어(2002, 고요아침), 번역 석 명정(1943-2019)[영축총림 통도사 경봉 시자]
2012 일지(一指 高在旭, 1957-2002)경허: 술에 취해 꽃밭에 누운 선승(2012, 민족사),
2013 우봉규(1960-, 경북 상주), 경허와 그 제자들(2013, 살림)(115쪽),
2013 '만화고승열전' 시리즈 다섯 번째 책, 한국불교의 중흥조, 경허스님, 정수일(1959, 전남 청산도)저 그림, 운주사, 2013년 03월 20일, 196쪽.
2014 경허의 얼굴: 근대 한국 선 불교의 개조, 김호성(1960-), 불교시대사, 2014년 05월 10일, 272쪽.
(3:03, 52ULF) (3:13, 52ULI)
승1846경허1912성우.hwp
책불1957일지2012경허.hwp
참조** 경허: 술에 취해 꽃밭에 누운 선승(2012)
일지 고제욱(一指 高在旭), 민족사, P.349.
* 내용 중에서
현대 한국 선문(禪門)의 달마, 경허는 20세기 한국불교사의 사각지대(死角地帶)에 홀로 서 있는 유령같은 존재이다. 그리고 그의 문하에서 수학하거나 그를 사숙한 선승들이현대 불교를 대표하는 세기의 고승으로 추앙받을 때에도 그는 항상 홀로 서 있는 고독한 인물이었다.
경허, 그는 누구인가? 바로 구한말 풍운의 조선땅에 홀연히 나타나 투철한 깨달음으로 꺼져가는 선의 등불을 밝히고, 1912년 4월 비승비속의 운수객(雲水客)으로 한만(韓滿) 국경 북방의 고원(高原)을 행각하다가 초라한 촌로로 숨을 거둔 경허성우(鏡虛惺牛, 1846-1912)선사이다.
그 누가 뭐라고 사족을 붙이든 경허는 현대 한국불교사의 도화선에 불을 당신 프로메테우스(Prometheus)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는 마치 불결한 피가 흐르는 한 선조의 존재를 감추려는 후손들처럼 쉬쉬하며 경허의 삶과 선(禪)을 시간의 모래 속에 묻어버리기를 원했다. 그러나 경허의 존재는 그렇게 쉬쉬하며 묻어버리기에는 너무 거대하며 꺼지지 않는 뜨거운 안광(眼光)을 현대 한국 선문에 던지고 있어서 사람들은 결코 그의 존재를 잊어버릴 수가 없다. (5-6)
[「경허의 신화와 진실」(5쪽, 첫 세 문단)] - [운수객(雲水客), 즉 구름 나그네, 들뢰즈가 노마드를 산보자 또는 여행객이라 표현한다. 그 노마드가 고원(高原)을 추구하는가. (52ULH)]
첫댓글 만공(滿空 月面 1871-1946)은 스승 경허의 입적 소식을 듣고
<경허법사께서 세상을 떠나셨다는 소식을 듣고(聞鏡虛法師遷化吟)라는 시를 읊고 있다.
善惡過虎佛(선악과호불) 선함과 악함이 부처와 호랑이보다 더 하신분
是鏡虛禪師(시경허선사) 바로 경허선사이시다.
遷化向甚處(천화향심처) 돌아가셨으니 어느 곳을 향해 떠나셨는가
酒醉花面臥(주취화면와) 술에 취해 꽃밭 속에 누우셨도다.
- 경허: 술에 취해 꽃밭에 누운 선승(2012), 334쪽
마실에서 천이틀밤이야기 : {춘성} (무애도인 삶의 이야기) 2009.09.15. 참조. 그런데 열리지 않는구나.... 사이월드가 더이상 지원하지 않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