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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 이종률의 民族 ‘三反論’
김동기, 철학아카데미 3층 1강의실, 2019 08 24(토) 16:00-18:50 A4 14쪽.
- 김동기(1955-) 부산. 부산대, 일본에서 석,박사, 동양정치사상사 전공,
* 논자는 산수(山水) 이종률(李鍾律, 1902-1989)의 항쟁 또는 혁명 사상 안에서 삼반론(三反論)이 기초되어 있었다고 본다. 이 글은 1장에서 삼반론은 반외세 반봉건 반매판의 민족3반을 기반으로 하는 서민성 자본민주주의 민족혁명(약칭 민족혁명)이라 한다. 바꾸어 보면 자주, 자치, 평등이 기본 이념일 것이다. 2장에서 조선의 당쟁과 예송을 다루었고 3장에서 영남 또는 영남인이 봉건성에 안주하는데 기여했던 도산서원의 역할까지도 비판한다. 4장에서 민족의 봉기, 항쟁의 역사를 살려야 한다고 보면서 기미(己未) 독립운동으로부터 역사적 책무와 대종조직의 강화 그리고 전위정당으로서 사책당(史責黨)을 제시한다. 5장에서 삼반론에 기반한 민족혁명을 사책당 건설에 힘을 모아야 할 것이라 한다.
우선 반봉건[자치]에 관한한 조선조의 봉건성을 탈피하는 것인데, 선비들에 얽힌 사화(士禍)에 대해 설명하면서, 영남세력의 중심지로서 퇴계학통과 ‘영남’[경상], ‘영남인’[경상도인]에 대한 비판에서 반봉건을 찾아낸다. 그런데 이 글에서는 반정에 대한 관점은 표현되지 않았다. - 산수 이종률의 본문에는 두 호란 이후에 조선의 사대부들이 어떤 지배형식을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한 글이 있는지 모르지만 이 논문에서는 언급이 없다. 그리고 ‘중세의 종말’을 언급하는데, 조선조 후기 노론과 일제 부역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노론은 사장파에 속하는 기호(경기일대)의 학풍이며, 이들은 오랜 사대주의(대명주의와 소중화사상)에서 낮 일제 부역으로 넘어갔다. 정조 사망 이래 19세기의 민중 봉기, 새로운 민족 사상의 생성과 창시 등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고 나서 20세기 초의 기미(己未)년으로 이어갈 것이다.
반외세[자주]에 관해서, 기미(己未)년 독립운동에서부터 임시정부에 이르는 자발적인 민족 항쟁운동을 중요시 한다. 그리고 민족운동이 당시에 생성 중이던 공산주의 운동과 합작으로 신간회(新幹會) 운동을 설명한다. 1927년 신간회 창립에 그러고 나서 몽양 여운형을 중심으로 조선건국동맹으로 이어지는 자주운동에 또 한번 좌우합작을 할 수 있었던 기회를 찬탁 반탁으로 갈라지고, 몽양(1947, 7월), 장덕수(1947, 12월), 더하여 김구(1949, 6월)까지 피살당하는 사건으로 통일정부 수립이 어려워졌다
이 글에서 반 매판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산수 이종률은 헤겔 맑스로 이어지는 학문적 과정을 거쳤으며, 게다가 신간회 운동에 관여 과정에서 최익환과 이관용을 만났으며, 다른 글에서는 이관용의 스피노자 유물론에 대한 이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논자는 지면의 한계이겠지만, 산수 사상의 큰 줄기를 설명하다가 보니 반봉건 반외세에 그친 것으로 보인다.
논자는 논문 바깥의 이야기로 몇 가지를 곁들였다. 그에 의하면 선생님은 후기에는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고 한다. 소설을 직접 쓰기고 하였고, 음악과 영화에 대한 글들을 『산수 이종률선생 저작 자료집』1·2집(2001·2002)에서 볼 수 있다고 한다. 선생과 윤노빈은 가깝게 지냈으며 사진도 남아있다고 한다. 지나가는 이야기로 60년대 감옥에 있을 때 젊은 김대중과 함께 감방 생활을 했다고 한다.
한국철학회가 남북 철학자 대회를 하고 싶다고 타진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다. 철학 이외에 여러 곳에 이런 교류를 이야기 하는 모양이다. 역사계에서도 남북간의 공통과제를 다루고자하는 학문접근을 시도를 하는 모양이다. 만남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로, 1919년을 중심으로 남북이 학술대회를 하고자 이야기 차원에서 꺼냈다고 한다. 상해 임시정부을 이야기하니 만주의 무장투쟁을 이야기하고, 윌슨 자결주의를 이야기하니 레닌의 소수민족 해방을 이야기가 나온다고 하며, 공통점을 좁혀가는 데 시간이 걸릴 거라고들 한다. 철학에서는 실재론과 현상론, 유물론과 관념론, 인본주의자(humaniste) 대 인도주의자(humanitaire)로 차히를 드러낼까? 자연주의에서 시작하면 어떨까? (52TLD)
목차***
1. 생각의 단서
2. 조국사의 분렬과 통일의 주조[1971]의 검토
2-1 ‘사화와 당쟁’의 본질
3. 옳은 史學과 그 嶺南 및 그 祖國의 認識을 위하여의 검토
3-1. 직접적 문제 제기
3-2. ‘영남’과 관련한 저작의 검토
3-3. ‘영남인’에 대한 검토
3-4. 과학으로서의 사학과 겨레사. 6.
4. 기미[己未]를 알자의 검토(무림사간 1979)
4-1. 大己未民族抗爭 第1戰壘로서 2.8 독립선언
4-2. 대기미민족항쟁 제2전루로서 3.1 운동
4-3. 대기미민족항쟁 제3전루로서 4.10 민족 대표자회의와 임시정부
4-4. 1919년 3월 기미 항쟁의 반성점
4-5. 역사의 구출과 전진을 위한 구체적 인식과 그 실천 문제
5. 마무리
*내용 중에서 * * * *
1. 생각의 단서
< 이종률의 생애에서 민족혁명론의 구상과 그 실천방안에 대한 문제제기는 60년대 후반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종률은 민족혁명론의 구체적인 방안으로서 반제反帝, 반봉건反封建, 반매판反買辦이라는 ‘민족 삼반론’을 제시하였다. > (p.1)
2. 조국사의 분렬과 통일의 주조의 검토
<그 허위의 조작론이 무슨 하나의 과학론이나 되는 듯이(결국은 강요적으로) 세를 펴려하게 된다. 그러기 때문에 특권체제의 유지를 위한 성리학은 본질적으로 관념론 그 번쇄철학인 것이며 생명은 특권세력에 의하여 어느 시기까지나 지속되는 것이다. 32쪽> (p.2)
2-1 ‘사화와 당쟁’의 본질
3. 옳은 史學과 그 嶺南 및 그 祖國의 認識을 위하여의 검토
< “金誠一관, 柳成龍관, ‘南人’관, 嶺南관 등에 관한 교수 李佑成과 李載浩 등의 誤論을 반박하면서 그것과 아울러 옳은 과학적 사학의 방법론과 그 영남 지방관 및 조국관의 방법론을 역시 난고인 형태로나마 제소하고 거기서 움직이는 우리 조국사의 전부와 그 세계사의 전부를 옳게 인식케 하는데 약간이나마 도움을 주려고 한다.” > (p.4)
3-1. 직접적 문제 제기
3-2. ‘영남’과 관련한 저작의 검토
3-3. ‘영남인’에 대한 검토
3-4. 과학으로서의 사학과 겨레사. 6.
<더 축소시켜서 ‘李朝적 중세’가 종말되었다고도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일합병은 그 이조적 사실마저 특권세력은 특권권력으로서 피지배대중은 피지배대중으로서 모습과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재래와 변함없이 그냥 그대로 그 日帝적 세력을 지주로 한 한일합병 이후의 역사과정이 안으로 상속되어 넘어가게 된 것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145~146쪽> (p. 9)
4. 기미를 알자의 검토(무림사간 1979)
<1927년 가을 조선총독 齊藤實이 도산서원을 奉審하고 갔다. 이황 선생의 종손 이ㅇ호 같은 이들은 특권(양조장 경영, 도로 개설권 취득)을 얻어 양반이자 자본가 행세로 겨레를 못 견디게 했다. 이에 ‘풍산소작인회’의 이준태, ‘안동청년연맹’의 이지호, ‘일직청년회’의 남장환, 상해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이었던 석주 이상용 선생의 손자인 이대용 등은 도산서원 철폐운동을 일으켰다.> (p.9.)
4-1. 大己未民族抗爭 第1戰壘로서 2.8 독립선언
4-2. 대기미민족항쟁 제2전루로서 3.1 운동
4-3. 대기미민족항쟁 제3전루로서 4.10 민족 대표자회의와 임시정부
<< 1926년 임금 융희의 장사날인 6월 10일에 ‘일본제국주의 타도’, ‘조선민족독립만세’의 ‘6⦁10 민족독립만세 사건’이 민족진영과 공산세력의 합동 투쟁으로 일어났다. 이 기운을 이어받아 7월 애당 권동진 선생을 위원장으로 해서 력전 최익환 선생을 부위원장으로 한 가칭 ‘조선민흥회’가 발족되었다.
이를 발판으로 해서 1927년 2월 15일에 민족혁명론단체인 ‘新幹會’를 창립했다. 회장에 월남 이상재, 부회장 권동진, 서기장 백민 황상규, 조직부 총무간사 벽초 홍명희, 재정부총무간사 이승복, 조사연구총무간사 민세 안재홍, 민족물산부(민족경제부)총무간사 유석 조병옥, 학생부총무간사 한별 이관용, 노동농민부총무간사 최익환, 정치문화부총무간사 신석우 등으로 구성하였고, 지역 조직에는 경성지회위원장에 처음엔 소석 김한규, 다음엔 만해 한용운, 평양지회위원장 고당 조만식, 대구지회위원장 월강 김모씨(한의사), 동경지회위원장 처음엔 박양근, 다음엔 조헌영 등으로 조직을 구성하였다. 사회주의 세력도 용납하는 ‘민족주체 대동단결전선’이라는 것이 조건으로 되어 있다.>> (p.11)
< 집회금지령이 내려져 있는 상황에서 뜻밖에도 1931년 5월 16일 서울 종로 중앙기독교청년회 강당에서 신간회 전체대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서 홍은지회 대의원 한홍정의 신간회 해체를 위한 ‘해소결의안’이 제출되고 재청을 받아 표결에 부쳐져 근소한 표차로 가결되고 말았다. 그뒤 민족진영을 중심으로 ‘신간동맹’등의 단체를 조직하려고 하였으나 일제는 일체의 집회를 금지시키고 조직 구성을 할 수 없었다. > (p. 11)
4-4. 1919년 3월 기미 항쟁의 반성점
<1945년 8월 16일 조선학술원의 발족과 임원 투표에서 ‘위원장으로 백남운이냐 홍명희냐’라는 안이 제시되었을 때, 이종률은 “일제의 퇴각은 완전 퇴각이 아니라 일단 퇴각이다. 후진성 지역인 우리의 역사 사실은 계속하여 민족혁명론 방향이기 때문에 민족협동전선단체 신간회의 중심 영도자였던 홍명희 선생이 적게 평가될 바가 아니다”라고 하며 홍명희 선생 안을 지지하였다. > (p. 12)
4-5. 역사의 구출과 전진을 위한 구체적 인식과 그 실천 문제
<이 사책당과 호조 관계가 있는 대중조직들이 세력화 되지 않고서 역사사태를 구출시킨다고 하면 모두 거짓말인 것이다. 이 사책당은 반드시 철칙적으로 구체적인 역사 실정의 바탕 위에서 성립하는 정치노선을 생명적으로 인식해야 한다. >(p. 13)
5. 마무리 13
<산수 이종률의 조선(이조)사회에 대한 분석은 이론적으로는 마르크시즘 사론에 입각해 있고 그렇기 때문에 조선의 역사는 계급적 시각과 정치학적 시각이 맞물린 민족혁명의 관점에서 분석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p. 13)(52TLD)
#참조 ****
* 반정(反正) 즉 쿠데타: 조선시대 네 번이나 있었다. 조선 시대의 성공한 반정
무인정사(1398년), 이방원이 세자를 살해한 1차 왕자의 난, 이성계 상왕으로 물러남
계유정난(1453년), 단종이 유배되고 세조가 왕위에 오르다.
중종반정(1506년), 연산군의 폭정에 반대하여 진성대군 옹립
인조반정(1623년), 광해군
*사화(士禍)는 선비들이 정치적 반대파에게 화를 입는 일을 가리키며, 한국사에서는 특히 조선 중기에 사림 세력이 화를 당한 연산군 때부터 명종 즉위년까지 발생한 4차례의 옥사를 말한다
사화 발생 연도 발생 원인 / 가해자 / 피해자
무오사화(1498년), 김종직의〈조의제문〉사건 / 유자광, 연산군 / 김종직, 김일손, 김굉필, 권경우, 이목, 허반, 임희재(임사홍 아들), 표연말, 정여창 [홍귀달]
갑자사화(1504년), 폐비 윤씨 사건, 연산군 왕권 강화 계획 / 연산군 / 윤필상, 이극균, 김굉필, 이세좌, 한명회, 귀인 정씨, 엄귀인, 인수대비, 정찬손, 심회, 정안지, 한치형, 이극균, 성준, 조지서, 정성근, 정인인, 이승건, 홍한, 김천령
기묘사화(1519년), 조광조의 개혁 정치 반발 / 남곤, 심정, 홍경주, 중종 / 조광조와 그의 추종자들
을사사화(1545년), 소윤과 대윤의 권력 싸움 / 소윤 / 윤임, 유관, 유인숙, 계림군, 봉성군, 이덕응, 정희, 정욱, 나식.
*정묘호란(丁卯胡亂, 1627) 후금이 침입해 일어난 전쟁. 인조 즉위 후 집권한 서인의 친명(親明) 정책과 후금 태종의 조선에 대한 주전(主戰) 정책의 충돌에 기인한 싸움이며, 이로 말미암아 후금은 명나라와는 불가능하였던 교역의 타개책을 조선에서 얻게 되었다.
*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1637): 조선과 청 제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 병자노란(丙子虜亂), 병정노란(丙丁虜亂), 만주의 조선 침공(Manchu invasion of Korea), 청의 조선 침공(Qing invasion of Joseon)이라고도 부른다
1876 김구(金九, 1876년 8월 29일-1949년 6월 26일), 12시 36분, 김구는 서울의 자택인 경교장에서 육군포병 소위 안두희에게 총격당하였다.
1886 여운형(呂運亨, 1886년 5월 25일 ~ 1947년 7월 19일)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1945년 8월에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을, 9월부터 1946년 2월까지 조선인민공화국의 부주석을 지내기도 했다.
1888 홍명희(洪命憙, 1888-1968) 충북 괴산, 벽초(碧初) 작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가. 1948년 9월부터 1962년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내각 부수상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의 초대, 제3대 부위원장(1948년 9월 - 1957년, 1958년 10월 - 1968년)을 역임하였다.
1891 최익환(崔益煥, 1891-1959) (號)力田 崔錫勳] (고려공산동맹원, 신간회 간사) 충남 홍성, 어려서 동학에 입교했다. 1905년 광무일어학교에 입학하여 2년 동안 수학했다. 1926년 서울파와 화요파의 합동을 주장하여 ‘통일 조선공산당’이 성립할 수 있는 여론을 조성했다. 1927년 2월 신간회 창립총회에서 규칙심사위원 및 간사로 선임되었다.
1894 이관용(李灌鎔, 1894-1933)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언론인, 교육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위원부의 부위원장으로 김규식 등과 함께 파리강화회의의 한국인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여했고, 한국사회당 대표로 국제사회주의자회의에도 참여했으며 구미위원부 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1921년 스위스 취리히 대학교에서 한국인 최초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인물이기도 하다. 다른 이름은 이관용(李灌溶, 李瓘鎔, 李鑵鎔, 李冠鎔, 李灌龍) 등의 이름을 사용했다.
1894 백남운(白南雲, 1894-1979) 전북 고창, 도쿄상과대학(현재의 히토쓰바시 대학)을 졸업, 여기서 맑시즘 공부. 연희전문학교의 경제학 교수와 조선공산당의 경제이론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초대 문교상과 이후 최고인민회의 의장.
1894 장덕수(張德秀, 1894년 12월 10일 ~ 1947년 12월 2일) 한국의 정치인, 교육자, 학자, 언론인.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 자택에서 종로경찰서 소속 현직 경찰관 박광옥, 한독당 당원인 교사 배희범 등의 총에 맞고 절명했다.
1906 현준혁(玄俊赫, 1906년 5월 13일 ~ 1945년 9월 3일)은 조선의 공산주의계열 독립운동가. 8·15 해방 전후 평안남도 지역의 대표적인 공산주의자. 평양에서 대동단 단원 백관옥에게 암살되었다.
1920 이재호(李載浩, 1920-2016) 역사학자, 교육자. 부산대학교 사학과 교수 역임(-1985) 국역 서애전서(西厓全書)(2001년, 서애선생기념사업회) (전7권)
1925 이우성(李佑成, 1925-2017) 경남 밀양, 성균관대 한학자. 동아대교수, 성균관대 교수 역임. 1961년 4.19 직후에는 학원민주화운동에 적극 가담한 이유로 동아대학교 교수직에서 물러나야 했으며, 1980년에는 군부독재에 맞서 ‘361 교수성명’을 주도하고 이어 지식인선언에 참여한 이유로 구속 수감되고 성균관대학교 교수직을 4년간 박탈당했다.
조선민흥회(朝鮮民興會): 1926년 7월 8일 서울에서 고려공산당(서울 콤)의 사상운동단체인 전진회(前進會)[서울청년회]와 조선물산장려회가 중심이 되어 발기한 민족협동전선 ... 위원은 권태석(權泰錫), 최익환(崔益煥), 김정기·김동철·명제세(明濟世), 송내호(宋乃浩), 서세충·신현익·유청이었다. [서울청년회: 송내호, 이경호, 권태석, 최익환, 물산장려회계 명제세, 김종협, 오화영, 정춘수 등 29명 준비위원회.]
신간회(新幹會): 1927년 2월 15일에 사회주의, 민족주의 세력들이 결집해서 창립한 항일단체로, 1931년 5월까지 지속한 한국의 좌우합작 독립운동단체이다.
<新幹會支會의 해소운동과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조직, 國史館論叢 第40輯, 李均永* pp. 131-184.
참조 <주221) 이기하, 《한국공산주의 운동사》 (영진문화사 영인본, 1976) p. 1068.> - 한홍정에 관하여 “함흥지회가 관념적 해소론을 배척하는 결의문을 작성하여 발표하기도 하고 그 결의문 작성위원으로 선정한 네 사람 중 두 사람은 장회건과 방치규이며 나머지는 한홍정과 윤주인데 한홍정 역시 제 2차 범태평양노동조합조직에 가담한 인물이었다.221) 따라서 함흥지회의 해소반대 결의문은, 프로핀테른대회에 참여하여 6명의 〈9월테제〉 작성위원 중 한 사람으로 활동했던 장회건과, 장회건이 가지고 들어온 프로핀테른 활동지침에 따라 그와 함께 적색노동조합운동에서 활동하다 검거되는 방치규, 역시 그들 활동의 연장선상에 위치하는 적색노동조합에 관여한 한홍정 등에 의하여 작성되는 것이다. (178)”
(6:03, 52TLD)
논1955김동기19이종률
논1955김동기19이종률논문
이훈(2019), “이관용과 이종률” 六思工(미발표문)
**참조** "환인1902이종률1989산수ma"
# 산수(山水) 이종률(李鍾律, 1902-1989) - 부산대학 정치학과 교수
1902년 경북 포항시 죽장면에서 출생. [아래와 비교]
1902년 경북 영덕 출생(6월6일) 집안이 그리 넉넉하지 않았던 유반(儒班)의 자제였던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서 한학을 배웠다. 부친 이규환(1860-1925)
1918 그의 가족은 1918년에 의성으로 [전염병을 피해] 이주했는데, 이종률은 이곳에서 점곡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민족주의 교육기관인 동명학교에 진학했다.
1920년 중앙고보 학생 박명진이 결성한 소년운동조직 호경체육회에 참여하여 민족문제에 눈을 뜨기 시작.
1921 4월 점곡공립보통학교를 2학년 편입
1924년에는 서울의 배재중학교로 2학년 편입학하였다.
1925년 5월 최초의 사회주의 학생단체인 공학회(共學會, 북풍회 계열) 대표로 활동하다가 퇴학당했다.
1926년 봄에 경신학교(儆新學校) 4학년에 편입하였으나, 일련의 사건으로 7월에 다시 퇴학당하였다. / 6·10만세운동을 준비하던 중 체포돼 투옥, 유치장에서 한용운을 만났다.
1927년 일본 와세다대 입학. 5월 신간회 도쿄지회 결성 참여. 재일본 조선청년총동맹 위원. / 이 해 여름방학 때 의열단비밀단원 박시목의 주선으로 밀양에서 신간회 본부 서기장 황상규를 만나 황포군관학교에 입교할 것을 권유 받음.
1928년 신간회 도쿄지회 간사. 5월. 이현철 박야민 등과 조선의 교육상황을 보도하기 위해 동경에서 조선교육신문사 설립.
7월 ‘우리말연구회 사건’으로 와세다대에서 출학 당함. 11월 조선학생맹휴동맹사건으로 서대문 형무소 수감(징역 10년)
1929 “헤겔과 그의 철학”, “유물론 지평의 근거” <조선일보>: 헤겔의 지양(aufheben) 강조, 현대의 창발론(Emergentism).
11 성진회(醒進會)를 통해 광주민족항쟁을 배후에서 지원.
1930년 4월 14일 사회실정조사소를 창립
1931년 4월 형평사운동에 참여하기 시작.
7월 ‘사회실정조사소’ 기관지 『이러타』[이렇다]의 창간(1936년 1월 56호로 종간)
[1932년 4월 미야케 시카노스케[三宅鹿之助 삼택 녹지조, 1899-1982)]가 경성제대에서 맑스를 가르치는데 영향을 받음]
1932 남철(=山水) “입장의 문제와 이데올로기” <비판>(1932.5, 6); 카를 만하임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Ideologie und Utopie 1929)
[1932. 11. 이관용 “스피노사와 그의 사상” <중앙일보> “스피노사는 변증법적 유물론의 선구자이다.” - 이종률은 이관용과 관계 있다.]
12월 충남 예산농업학교 독서회 사건 배후 지도로 투옥.
1933년. 7월 ‘형평청년전위동맹사건’과 관련하여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광주형무소에서 3년 6개월간 복역.
1938년 출판법 및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공주형무소 투옥(이후 해방 때까지 보호관찰대상)
1939년. 출옥 이후 일제 말기까지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에 의한 보호관찰 대상으로 일제의 감시를 받음.
1940년 경기도 가평에서 숯구이[카르보나리] 생활을 시작하다.
1944년. 건국동맹과 연계하여 정보 수집 활동을 하면서 일제 패망을 대비.
1945년. 8월 16일 창립된 조선학술원(위원장 백남운)에서 서기국 위원.
1946년 1월 5일. 박진 집에서 김창숙, 이시영, 안경근, 조윤제, 문한영 등과 함께 민족혁명 전위당 건설을 위한 사전조직으로 민족건양회회(民族建揚會: 의장 김창숙) 결성하고 이론 제시.
삼상회의에 대한 의견서 건으로 체포됨
3월 14일. 조선문화단체총연맹 주최 맑스 서거 63주년추모강연회 강연.
<민주일보> 창간 주도.
1946 <인기학 소론(人紀學 素論)> , 人紀 : 人性 + 人能
1947년 이극로, 정이형 등과 함께 ‘李鈞’이라는 이름으로 민주주의독립전선을 결성하여 단정수립반대투쟁.
<민주일보> 편집국장과 주필 역임.
1949 <혁명 정전개(正展開) 캄파>
가을에 용공분자 명목으로 투옥되었다가 모진 고문을 당한 후 풀려남.
1951 경남 함양군 안의 중학교 교감, / 부산대와 동아대에서 정치학 강의.
1952년 봄 최익환, 박진목 등의 정전평화운동에 참여, 부산으로 이주.
1952년 제2대 대통령선거에서 이시영 후보 선거운동을 통해 평화통일운동 전개.
부산대 정치학과 교수로 부임(-1961) -
1954년. 부산대, 동아대의 제자들과 민족문화협회를 결성하여 반외세 민족자주사상을 고취시키는 활동.
1956년 제3대 대통령선거 때 평화통일론 방향의 신익희 후보진영에 참여하여 후보단일화운동 전개
“Keynes卿의 認識을 위한 一 試論” 논문 부산대 개교 10주년 기념 논문집에 발표.
1958년 자신을 찾아온 간첩(김창주) 불고지죄로 투옥. <국제신보> 편집고문, <부산일보> 논설위원 역임. 이해 말 <국제신보>에 ‘백만 독자의 정치학’ 연재(41회)
1960년 7.29 총선에서 혁신계 후보들이 거의 낙선한 다음(이종률도 참의원 후보로 나섰으나 낙선했다), 혁신계 세력은 그해 9월에 새로운 형태의 통일전선 조직인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을 결성했다. [7월 29일 실시된 제5대 총선거에서 참의원 의원 58명이 선출되었고, 8월 8일부터 임기가 시작되었다]
10월 30일 “민족통일대강연회”를 시작으로 자주적 통일운동 전개.
민주민족청년동맹[민민청] 결성(박진(朴震), 박래원(朴來源), 문한영(文漢榮) 동지들과) <소설가 김정한, 이주홍, 무용평론가 강이문도 참여한다. 민민청은 서울, 대구로 지부를 넓히며, 한국 사회운동의 구심점이 된다.> [부산: 김상찬(金相賛), 대구: 서도원(徐道源), 도예종(都禮鍾), 서울: 이수병(李銖秉), 김금수(金錦守)]
1961년 2월 조용수와 함께 <민족일보> 창간 주도
2월 25일.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결성을 주도, 통일방안심의위원회 위원으로 남북협상론 주장.
1961 5.16 쿠데타.
1962년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 결성 주도로 인해 군사혁명 특별재판소에서 사형 구형, 10년형 선고 – 안양 교도소 수감. 수감 중 많은 난고 집필.
1965년 12월 형 면제로 석방
1966년 경남 양산 개운중학교 교장으로 일하며 민족교육사업 전개
1969년 개운 중학교 인수. ‘민족사와 인간사의 대도에 입각한 생산자적 인지용(仁智勇) 영재의 육성’을 목적으로 한 민족교육사업을 전개하였다.
1971년 『祖國史의 分裂과 統一의 主潮ꡕ(조국사의 분열과 통일의 주조. 1971)
1973년에는 이의 연장 집필물로써 최종 교정과 조판까지 마친『옳은 史學과 그 嶺南 및 그 祖國의 認識을 위하여』발표 하였으나 인쇄 직전 수사기관에 압수 당함.
1974년 경남 의령의 독립운동가 백산(白山) 안희제(安熙濟)의 사적을 조사하고 [인혁당 관련 사건으로 사형 당한 같은 마을의 이수병(李銖秉, 1937-1975) 본가를 방문하고] 돌아오던 중 뇌졸중으로 쓰러진다. / 이후 15년간의 투병 기간 후학을 양성하고 민족혁명운동에 대한 방대한 구술 유고를 작성하였으며 그 가운데 일부를 간행.
1979년 구술 대필로『己未를 알자(1979)』남김
1989년 1989년 3월 13일 민족혁명과 인간혁명 방향의 역사발전 노선이라는 “민족건양사로(民族建揚史路)”와 이의 실천을 위한 전위당인 “사책당(史責黨)“이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부산 동래 명륜동 수곡의 자택 수일원(秀一苑)에서 향년 87세의 일기로 운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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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 『민족혁명론』(1989)
2000. 3월에 선생의 학문과 삶의 정신을 계승․발전시키기 위한 「산수이종률선생기념사업회」가 창립총회를 거쳐 출범하여 활동하고 있음.
2001년 3월 1일. 유고집 《산수이종률저작자료집》제1집 발간.
2002 『산수 이종률선생 저작 자료집』1·2집(2001·2002)으로 출간하였다.
2004.08.20 ‘산수 1905’(http://cafe.daum.net/sansoo1905)
2005년 6월 3일~4일 산수 이종률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 행사
- 심포지움『산수이종률 민족혁명론의 역사적 재조명』개최
- 기념식, 기념 나무 지정식 개최
2006 『산수 이종률 민족혁명론의 역사적 재조명』출간
2005년 5월 「산수 이종률 민족혁명론의 역사적 재조명」이라는 대주제로 탄생 100주년기념 학술심포지엄.
2008년 『이종률의 민족운동과 정치사상』 박사학위 논문(김선미, 부산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출간.
2009년『산수 이종률 민족혁명을 향한 道程』(김선미 저) 출간.
2013년 10월 서울고등법원 ‘민족일보 사건’ 무죄 판결. 서울중앙지법 ‘민족일보 사건’무죄 판결로 유족에게 배상하라는 판결(2015.6.)
2014년 10월 국사편찬위원회의 사업으로 『항일운동·통일운동가 산수 이종률 근현대 자료조사 수집 최종보서』 작성 제출.
2015년 11월 독립유공자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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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수(山水) 이종률(李鍾律, 1902-1989) 연관 인물들****************
1885 안희제(安熙濟, 1885-1943) 백산(白山), 독립 운동가. 경남 의령 출신, 1914년 부산에 백산상회를 설립. 1930년대 들어 만주로 망명, 1931년 대종교에 입교, 1942년 11월 일제가 윤세복 등 대종교 지도자들을 한꺼번에 검거한 임오교변(壬午敎變)으로 체포, 여러 차례 고문 끝에 1943년 8월 3일 병보석으로 풀려났다가 몇 시간 뒤에 사망했다. 대종교 순국십현(殉國十賢)의 한 사람.
1891 최익환(崔益煥, 1891-1959) (號)力田 崔錫勳] (고려공산동맹원, 신간회 간사) 충남 홍성, 어려서 동학에 입교했다. 1905년 광무일어학교에 입학하여 2년 동안 수학했다. 1926년 서울파와 화요파의 합동을 주장하여 ‘통일 조선공산당’이 성립할 수 있는 여론을 조성했다. 1927년 2월 신간회 창립총회에서 규칙심사위원 및 간사로 선임되었다.
1894 이관용(李灌鎔, 1891/4-1933) 서울, 1913년 영국으로 유학하여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1916년에는 스위스의 취리히대학교에서 한국인 최초로 철학박사 학위 받았다. 1932. 11. “스피노사와 그의 사상” <중앙일보>,
1894 백남운(白南雲, 1894-1979) 경성제대 출신, 경제학자, 교육자. 연희전문학교의 경제학 교수와 조선공산당의 경제이론가였고, 이순탁과 함께 일제 강점기 당시 사회주의 경제학자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조선사회경제사》
1899 미야케 시카노스케(三宅鹿之助 삼택 녹지조, 1899-1982) 1927년 4월 경성제대(経済学・マルクス経済史) 교수. 1929년부터 2년간 독일 유학중 독일 공산당가입. 1931년 4월 경성제대 강의(수강자 중: 정태식(鄭泰植), 최용달(崔容達), 박문규(朴文圭), 이강국(李康國)). 1933년 조수 정태식으로 부터 이재유(李載裕) 권영태(權榮台) 접촉. 1934년 서대문 경찰서를 탈출한 이재유에게 자신의 관사를 은신처로(37일간). <ja.Wiki에 항목 없음>
1917 고태국(高泰國 1917-1977) 55년도 부산사범대학 음악과에 재직. 59년 7월 초 일요일 수일원에서 민민청 모임이 있었다. 천하정(天下停) 바로 아래 감나무 밑 풀밭에서 약 스무명 남짓 모여 먼저 마치 식전 애국가를 부르듯이 '민민청 노래'(이종룰 작사 고태국 작곡)를 합창하였다. / <민족문화인의 밤> 행사에서 부산교대합창단이 부르는 이 <민민청 노래>를 불렀다.
1918 박진목(朴進穆, 1918-2010) 동주(東洲)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언론인, 통일운동가. 경북 의성 출신.
1923 서도원(徐道源, 1923-1975) 경남 창녕, 민주민족청년동맹위원장. 대구매일신문 논설위원. 인혁당 사건 희생자. 2007년 1월 23일 32년 만에 무죄 선고.
1924 도예종(都禮鍾, 1924-1975) 대구, 교육자, 정치인, 기업인이다. 상주고교 교사, 대구대학 경제학과 강사, 민주민족청년동맹[민민청]경북간사장 삼화토건 회장, 2차 인혁당 사건, 사형(향년 50세)
김현종
1930 조용수(趙鏞壽, 1930-1961) 언론인. 민족일보 창간 발행인. 박정희의 5·16 군사정변 세력에 의해 교수형에 처해졌고, 2008년 1월 16일에 법원 재심 결과 무죄와 국가 배상 판결을 받아 명예를 회복했다.
1931 김상찬(金相贊, 1931-) 부산 동아중학교, 민주민족청년동맹(민민청).
1934 하상연(河相演. 1934-2000) 경남 하동, 부산대 정치학과, ‘민족문화협회’ 업무주관, 민주민족청년동맹(민민청) 결성,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 도예종과 청년모임을 같이함, 『자주 통일』의 편집장. 동생: 하일민
1937 이수병(李銖秉, 1937-1975) 경남 의령, 1953 부산사범학교 입학, 1956 부산대학교 교육학과 입학 민족청년동맹(민민청) 합류, 1971 경락연구회. 2차 인혁당 사건, 사형.
1940 하일민(河一民, 1940-) 경북대학교대학원 철학 박사, 부산대 철학과 대학교수, 부산대학교 명예교수
1941 윤노빈(尹老彬, 1941-) 강원도 원주 신림면,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철학과, 독일 프랑크프르트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 부산대 교수, 김지하와 함께 장일순 아래서 헤겔 현상학을 읽다. '신생철학 1974'. 1982년 가족과 함께 월북했다. 참조: 나의 스승 윤노빈에 대한 기억-이병길님 홈피에서
1948 채희완(蔡熙完, 1948-) 서울대, 문화예술영상 부산대교수 <1997, 서울대석사>
1951 박만준(1951-) 경남 창원, 1969년 마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8년 부산대학교 문리과대학 철학과를 졸업.
1953 박준건(朴俊建, 1953-) 부산대 교수, <?-?, 1988, 부산대, ?> 헤겔 맑스: 철학적 인간학.
1953 이훈(1953-) “이관용과 이종률”(이훈, 2019, 04, 27. 발표예정: 무기 연기).
1955 김동기(1955-) “산수 이종률의 民族 ‘三反論’”(김동기, 철학아카데미 3층 1강의실, 16:00-18:50)
1955 이행봉(李行奉, 1955-) 부산대 정치외교과 교수 <박사, 1989, 부산대, ??>
1955 이호섭(李豪燮, 1955-) 마산, 창원대 물리학과 교수.
1958 장동표(張東杓, 1958-) 밀양대학교 교양과정부 교수, 부산대학교 <19세기 지방재정 운영의 실태에 관한 연구 -포흠의 전개와 민고운영을 중심으로-, 1993, 부산대, 박용숙> 『산수 이종률 민족혁명론의 역사적 재조명』(공저, 2006),
1962 김선미(金善美, 1962-) 부산대 사학과 강사. <이종률의 민족운동과 정치사상, 2008, 부산대, 최원규>
(3:35, 52TLC) (6:04, 52TLE)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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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종률은 한국전쟁이 벌어질 무렵 서울에 거주하면서 대구 소재 청구대학에서 강의를 하였고, 1⋅4후퇴 때는 대구에 와서 하기락(전 계명대 철학과 교수. 아나키스트 운동가)을 만나 교류하였으며, 그의 권유로 경남 함양군 안의중학교에 재직한 경력이 있다.
- [1951(마흔아홉) 경남 함양군 안의 중학교 교감지냄, - 하기락(1912-1997)[서른여덟]과 연결. ]
또한 1956년에는 대구의 대표적인 야당지인 영남일보의 논설위원과 편집국장을 역임하였기 때문에 대구지역 혁신세력과의 인적교류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 [126) 영남일보, 『영남일보 50년사』(1996), p.757.]
(70-71) <1960-1975년 ‘대구인혁그룹’ 연구, 윤정원, 경북대, 2020. 08, 304쪽>
1912 하기락(河岐洛, 1912-1997) 경남 함양, 철학자, 언론인, 아나키스트.
1935년 일본에 유학하여 이후 입학한 와세다 대학 철학부에서 공부하며 아나키즘 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1940년 하이데거 연구로 졸업논문을 완성하고 귀국하였다.
1947년 대구대 교수 경북대, 동아대, 계명대 교수. [이종률 보다 열 살 어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