栢陰 卞景福
기러기 형상 중 머리에 해당되는 비상리 백촌마을은 비중리의 안정 나씨와 함께 충과 효의 가문으로 쌍벽을 이룬 초계변씨의 세거지다.
초계변씨 문중이 비상리에 터를 잡은 것은 1,500년경 변충남[13세 1495~1546.1.2 (52세)]이 이거로 시작되었는데, 구전에 의하면 당시 돌림병을 피해 비상리로 이거한 것이 인연이 되었다고 한다. 인근의 안정 나씨와 파평 윤씨와의 혼인 관계를 맺으며 지역의 씨족세력으로 위상을 정립하였다.
경남 합천 초계가 본관으로 초계변씨의 성씨 유래는 중국 주나라 문왕(文王)의 여섯 째 아들이 노나라의 변읍(卞邑)에 봉해지자 성을 卞이라 했다고 한다. 그의 후손 변원이 당나라에서 벼슬을 하고 예부상서에 오른 뒤 8학사의 한 사람으로 "효경" 한질을 가지고 오자, 경덕왕이 그의 학식에 감동해 왕자의 스승으로 삼아 정착하여 살았다. 그 뒤 고려 성종 때 문하시중을 지내고, 팔계군에 봉해진 문열공 변정실을 시조로 하여 대를 잇고 있다. 팔계는 초계의 옛 지명이며, 초계변씨는 변정실을 본관 시조로 섬기고 있다. 밀양변씨는 고려 때 국자진사가 되고 밀양에서 대대로 살아온 변고적을 1세 조상으로 하지만, 초계변씨와 대종회를 같이하고 있다.
청원군 구녀산 북서쪽에 위치한 비상리 백촌마을 입구에는 오랜 느티나무가 문중 유적과 함께 오랜 세월을 품고 서 있다.
우선 백촌이란 마을 지명에서 백(栢)은 초계변씨와 깊은 관련이 있다.
입향 시조 변충남은 이곳에 터를 잡고 잣나무를 심어 가꾸었다고 한다.
이러한 잣나무와의 인연으로 잣나무 백(栢)자를 사용했는데, 후손들의 호에도 백음변경복[14세 1538~1593.3.13 (52세)], 백은변시석 [16세 1603~1664.3.11 (61세)] 등 백자를 넣어 지은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백촌도 잣나무와 관련되어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마을에는 선조의 행적과 관련된 유적으로 1991년에 조성된 백음 변공 유적지가 남아있으며, 이곳에는 변경복의 효자각과 효행사적비, 그리고 효자 변경복 지려, 변익하 효자각 등이 있다.
변경복 효자각은 극진한 어머니를 모신 그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선조 35년(1602년)에 세운 것으로 여지도서 청주목 효자조에도 기록되어 있다.
그에 이어 손가락을 잘라 병환의 부모를 살린 변익하가 시묘살이로 병을 얻어 3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뜨자 그의 효행을 기리는 효자각이 정조 11년(1787년)에 세워졌고,
1997년에는 극진한 어머니 간호와 빈소를 지킨 변종필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유허비각이 만들어졌다.
이렇게 500여년 동안 뿌리내리며 이어온 문중의 역사에서 孝 정신이야말로 문중의 정신적 지지대 역할을 물론, 문중의 기반을 다지며 계기가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비상리외에도 가덕면과 우산리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변씨는 거창, 경주, 공주, 광산, 남원, 달성, 문화, 밀양, 백음, 보령, 부용, 비안, 영천, 원주, 장성, 진주, 창녕, 청주, 초계, 팔계 등 20개 본관에 인구는 2000년에 78,685주,다. 밀양변씨는 16,911명, 초계변씨는 49,506명이다.
첫댓글 경남 밀양 초계면이 아니고 합천이었나요?
경상남도 합천군 초계면입니다.
비상리에서 덕암으로 이전하여 사시게된 동기와 살게된 시기가 궁금해요~~
현진이구나
요즘 잘 지내지?
어디에 살아?
그러닌깐 네 5대조 할아버지때부터
시듬물(풍정리,덕암리)에 정착한 것으로
알고 있어.
막내 할아버지 마져 돌아가셔서
더이상 알수가 없구나.
어디 기록이라도 있는지 확인하여 알려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