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만회고택가의 독립운동과 정신은 물론 바래미와 맥을 함께하며 만인소의 대쪽 같은 선비정신이 내재된 것으로 보인다
바래미의 선인들은 개암의 만인소인 유소 성유와 여당 부자 천개여건 송암 선조들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시기임에도 위정척사를
위해서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나섬을 볼 수 있겠다
(죽음을 물사하고라도 지배계층 또는 노론의 핵심과 맞서면서 영남을 대변하고 선비의 지조를 굽히지 않는 바래미 디엔에이로 자리하며 이는 4세대의 지속적인 독립운동까지도 맥을 같이한다)
물론 충효를 기반으로 한 사상과 위민정신등과 배움을 벼슬길을통해서 구현하려했던 사상
이런 것들은 정조16년 영남만인소에서 절정을 이루게되는데 한동 희택 희성 희주등이 주도된 영남만인소의 정신과 단합된 힘
(당시 사도세자를 거론하는 것은 멸문지화를 당할 정도의 파괴력이 있었음)
이외에도 바래미 조영은 2차 위청척사운동의 소수 건영은 사도세자 신원회복 소두로 나서다가 독립운동에 참여한다
위정척사 운동이 의병활동으로 변모한다는 것은 김희곤의 안동 독립운동사등에서 나타나게되는데 이런 위정척사운동의 모태는
바로 정조 16년의 영남 만인소가 모태가 되는 것입니다
(정조16년의 만인소부터 이휘병의 만인소...을 위정만인소로 본다면 외세침략을 예견했던 이만손으로부터 시작된 만인소가 척사만인소)
영남만인소의 유생의 단함과 죽음을 불사한 선비정신
영남망인소와 정재유치명과 권대제의 추존상소와 정재문인의 안동의병 대거참여 가문의 단합 안동의병 참여자와 만인소 주도 참여자의 후손들의 활동사등을 연구하여 연결고리등을 파악하고 연구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사유입니다
해저는 일제 당시에도 의성김문은 단지 88가구 뿐인 이 적은 거인은 벼슬에도 상종가를 치면서 독립운동에서도 올인 함을 보게된다
2.만인소 주도 참여자의 흐름도
1)개암우굉( 문정왕후에 맞선 보우척살 만인소 소수 9회 창우의 파리장서 참여
2)한동(정조16년 영남만인소 주도 건영(사도세자 추존상소)파리장서 참여
3)희성(삼계서원장으로 영남에 통문) 생가기준 진림(의병내방장과 곽면우 유지호 김도화 권세연등과 원주 공격 통문)호림(심산의 부친으로 의병활동 격문과 활동을 독려) 심산 김 창숙(일이차 유림단 사건 주도) 교림(심산지원,인적 물적 지원) 창백(일이차 유림단지원 성주대한협회 창단 관여 홍기(일이차 유림단 지원 이치유림에서 가장 많은 자금모음) 창돈(이차유림단지원과 신간회 봉영청년동맹 민립대학 청년회....주도)봉영사회장 만기(제이유사건 신간회 참여 정진 태극단사건주도 학생독립운동
4)희택(만인소 유생대표) 조영(이차 위정척사소수) 창근(이차유림참여) 중열(독서회 참여)
5)희주(공사원) 기식 현식(이차유림단참여) 만식(확인 필요) 창신(독서회주도) 창엽(대학생 독립운동)
참고 (기타 추가 연구 필요함)
닭실 권모(랑간헌)관행당 만인소 상소문작성 참여 권세연(안동의병대장) 권경섭(파리장서참여)
무실 유회문 정재 유치명(사도세자 추존상소) 유지호 원산공격명령시 통문담당 권세연 추대 유연박(의병참모장 파리장서 참여)
유동시(만세사건)
******정제의 문화들은 대거 안동의병에 참여함
******만인소 후손들은 주로 학맥과 혈연등으로 엮어져 있었으며 만인소정신과 가문의 단합등을 연구가 필요한 부분은 유연박은 홍기의 장인 권세연의 모친은 희주의 후손으로 참판댁에서 출가하며 권세연은 조실부모하고 참판댁의 만수와 매수에게 배움.....
만인소를 보게되면 후손들이 독립운동가의 보고임이 나타남
만인소(萬人疏) - 영남 남인의 꿈, 삶, 그리고 좌절.mht
아래 자료는 영남만인소를 의병활동의 단초로 본시각을 드려낸 것으로
한국국사학연구소 인문강좌 제4강 2009년 11월4일자 필자 이욱입니다
영남만인소가 자신의 원칙과 소신을 위해서 어떤 고통도 두려워하지 않는 기걔가 국운이 기울자 의병활동의
단초가 된다라고 했습니다
3)안동의병
삼계서원 통문이 가장 빨라
1)안동소파록에 의거한 임원진 구성(새로 발견)
대장- 권세연(창의대장 닭실)
부장- 곽종석 미취임(춘양과 닭실과는 한 때 은둔으로 만산과 권상익등과 인연)
참모- 유연박(정재후손 무실), 이상기, 류선영(무실), 권병화
내방장 -김진림(바래미 심산 혈연), 김진좌
외방장 -강담(춘양), 류응목
좌익장- 이운호
우익장- 권용현
전봉장- 김익장
돌격장- 권진순
유격장- 김회락(내압), 권인술
석격장- 권재수
척후장- 김홍락(내압)
초모장- 권옥연(닭실)
도서기- 유정호(무실), 이건, 류필영, 강황(춘양), 이정좌
서기- 이운구, 김하림(바래미), 김진희, 류연즙(무실), 김한락(내압), 이종만, 이성구, 류회식(무실)
정재유사- 김주병, 김윤모, 이만구
종사관 - 김중삼, 김단락(내압) ,류창식
출령- 류현호, 김호락(내압)
중군- 류완
관량- 김종연
관재- 김항락(내압)
행부상 도총- 권돈영(닭실)
직일 -강봉원(춘양), 이수병
참여자 간부 총45분
닭실3분, 바래미2분, 춘양3분, 총8분
무실7분, 내압(5분) 22분,으로 절반을 찿이함
여기서 가장 밀접했던 닭실 춘양 무실임을 감안한다면 이들에 의해서 외방장 이상의 최고 간부진 9분중
최고 간부급에서는 대장 권세연, 참모 류연박 류선영, 내방장 진림, 외방장 강담, 5분 절반 이상이 현재 봉화지역에서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은 연고 출신들이 선출된 것으로 보여(안동의병은 가문의 지원을 받은 것으로 통상 지분을 나타내는 간부진에
혈연 유관성이 특히나 높았던 이 지역의 당시 위상을 반영한 듯
가문의 지원을 받았다는 점(만인소와 정재등 만인소의 정신과 기개 그리고 참여가문)
만인소 가문의 중간 통로역활을 했던 정재 문인
김흥락 이만도 문인들 또한 의병활동과 독립운동등에 나서
1)정재와 바래미의 연결은 해저가 길러 낸 남한조에게 사사 받아
2)정재부친 유회문은 바래미 필동의 사위
3)외에도 많은 혈연관계 약30건의 혼인이 이루어짐
4)현재 봉화지역인 닭실 바래미 춘양도 정재문인임을 감안할 경우
만인소에서 정재로 연결되며 다시 정재에게 사사 받은 문인들이 대거 독립운동에 나선 것으로 보임
삼계서원의 만인소 통문과
의병활동시의 가장 빨랐던 삼계통문
의병활동의 최고 간부진의 구성을 볼 때 당시 현재 봉화 지역의 위상은 상당한 수준으로 보여
바래미은 일제시대 당시 86가구로 내
내압에 규모로는 1/5 수준임이며 당시 500원을 냄
****안동의병의 만인소와의 연결고리는 유회문과 정재문인들의 대거참여 그리고 심산의 스승이었던 곽면우
바래미 진림 닭실 권세연,,,이며 안동의병의 모태였던 정재와 위정척사 인물과 사건들
하림과 호림(심산의 부친은 안동의병은 아님 진림등이 일세대 독립운동의 선구자이며 심산에게도 영향을 많이 준 듯하다
3.4세대 독립운동사
바래미 1세대 독립운동사(영자 림자시대 의사자와 선구자 6인 외
조선왕조 500년 이데오르기는 전통유학이었다.유학은 충효에 기반을 두었고 모든 국가운영과 생활규범은 주자학에 준거하였다.
하나 막상국치에 이르자 소수의 비주류 유학자출신 의병장을 제하고 조선의 주류파 유림은 친일매족에 앞장섰다. 매국의 주류는 노론계열이었고,이들은 병탄에 기여한 원조 친일파가 되었다. 일본은 왕실령 제14호로 조선 귀족령을 반포하고 매국노와 구한국고관76명에게 작위와 은사금을 지급하였다(4명 거부 및 반납),전국의 지도급 유생721명에게 회유책으로 30만엔을 살포하였다. 이를 거부한 유림은 거의 없었다. 500년 조선유림이 치욕이며,주류였던 부폐한 유림의 진면을 보여주었다
(파리장서의 재조명에서 전독립관장 김상웅의 글 참조)
당시의 시대상항일 것이며
그런 가운데 바래미 선조들은 은사금을 거절하며 꾸짓고 왜왕에게 예의없음을 꾸짓었다
*김호영(자;원직,호:일춘재)-경술국치 이후 일본이 恩賜金이라고 주니 받지 않고 꾸짖었다. 학행과 덕망이 높아 유고가 있다.
*김조영(자:영효,호:성환)-황준헌의 조선책략에 대한 영남만인소의 2차 소두로 상소하여 귀향 갔다 6년간의 많은 고통을 받았다. 그러나 도학은 일순도 놓은 일이 없었다. 유고가 있다.[후손들 만주로 이거]
*김난영(자:택형,호:농산)-학행과 덕망이 높았다. 경술국치 이후 유림의 대표들에게 회유책으로 일본 왕이 전하는 은사금이산 것을 받지 않고 크게 꾸짖다. 저서로는 유고가 있다.
*경암공유사 김흥락 문인 우리나라를 합병하여 종묘사직이 망함으로부터 비분 강개 의리를 지킴 의례준칙이란 것이 나오자 왜황에게 글을 보내 오랑케가 인륜이 없음을 꾸짖으니 이로써 누차 비방 당해 후손 독립운동가 덕기의 할아버지로 사례요식을 편찬
하였음
봉화향교지와 홍기유집참고
*진림(홍기의 할아버지의 2째 아들로 안동의병 내방장인 서열3위 역임 김도화 권세연 유지호 곽면우등과 활동하며 원산공격 명령시 통문담당 당시 국무대신이었던 이완용에게 보고됨
*호림은 심산부친으로 심산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며 호림은 23살에 동강주손으로 양자가며 효행이나 충절에서 철저한 바래미인이다
(심산의 부친이신 호림공의 양자에 얽힌 스토리)
칠봉 희삼의 2째와 4째아들들인 동강과 개암의 관계에서 시작된다(스토리)
동강의 손이 끊어지면서 양자를 구하기 위해서 전국을 떠돌던 중 같은 값이면 일가가 좋지 않는가?
내압에서 구하지 못하고 해저로 들어와 해저는 그당시 영정조 이후로도 막강한 세를 과시하든 곳으로
명월루에서 귀거하면서 동네를 살피던 중
마침 차림은 허술하고 지게를 지고 오는(그 당시 가세가 허술함)우림을 보고 차림은 허술하나 눈이 빛났다함
양자를 달라하니 우림의 부친들이 택도 없는 소리말라며 한양으로 올라감
조상의 맥을 잊지 못하는데 살아서 무엇하는가라며 단식투쟁 (명월루에서 무릅 꿁고 빌었다고도 함)
마을 회의가 열리면서 산송장 치루게 생겼으니 한양에 간분들을 불려내려서 설득시키면서 양자로 보내게된것임
(이 얘기는 부친이신 정자 진자 께서 심산의 병실을 한달간 지키면서 들은 얘기임)
그외에도 동강의 인품을 짐작할 수 있는 남명조식과 장군의 딸인 부인과 읽힌 스토리을 함께 하였으나 그당시 녹화를 해두지 않았 아쉬움을 남긴다
심산의 바래미 살던 곳 밝히자면 현재 만회고택 터 옆에 밭으로 된부분인데 지금도 대지로 되어있으나 집을 헐고 밭으로 사용함
선군자 하강부군(김 호림) 소개(바래미 만회고택터는 생가기준으로 호림과 심산 경능 창맥 내방장 진림 홍기와 정진을 생가고향이다)
1842년 4월14일 안동부 해저리에서 탄생했으며 개암 팔오헌 후손으로 통덕랑을 지낸 지영과 어머니 함창 김 참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만회고택과 호림의 집안은 일지와 공과 재인을 조상으로 두고 있다 일지와공은 만인소의 소수로 추대되어 활동했던 집안과 혈맹이다 당연히 몸을 사리지 않는 정신을 가졌던 분이며 바래미는 전체가 만인소의 중심에 있었다 호림의 고조부는 바로 만인소를 삼계서원장으로서 의병활동의 단초가 된 만인소를 영남에 통문으로 띄운 분이며 목숨건 만인소의 선비정신은 의병활동의 단초가 됨은 물론이다
이의 중심에 바래미가 있었다
23살에 성주 동강주손으로 양자감 (23살이면 이미 사고와 인격이 완성된 후 였으므로 사고나 행동거지에서 철저히 바래미의 인으로 봐도 무방함)
선군자 하강부군 호림(1842년 바래미에서 출생)
심산을 낳은 것은 하강부군이 38살 때임
23살인 1865년 동강종가로 양자감(바래미인으로 바래미 디엔에이가 형성됨)
1)효성이 뛰어났으며 양쪽 부모들에 대한 효성이 뛰어남 생가부모의 연이은 상을 당하여 300리길을 달리면서 울부짖어 여러번 기절했다 깨어남
1870년(호림나이 28덟)1883년(호림나이41살)연이은 부모상 4년간 300리길을 바쁘게 쫓아다니며...
호림나이14살에는 이휘병의 만인소가 1880년부터는 위정척사 만인소가 이어지던 시기(바래미는 중심지)
23살까지 바래미인 그 후로도 상당부분 바래미 생활 (철저한 바래미인으로 인격이 완성된 후임)
2)일상 언어와 행동사이 체험하면서 공부함(실천의 중요성)
3)농민의 어려움도 깨우쳐줌(평등사상의 소유자)
4)1895년 섬나라 도적이 시끄럽게하고 우리왕비를 시해하고 단발령을 내리자..........
부군은 탄식하면서 오랑케를 없애지 못하면 이마에 먹칠하리라하며.고을사람들을 인도하고 거느리며 의병활동을 꾀하고 격문을 원근에 돌렸다(만인소 정신)고을원과 관찰사가 겁박함에 주인은 될지라도 주인없는 집은 되지 않겠다함
(희성은 삼계서원장(호림의 고조부)을 역임하면서 만인소 통문을 영남에 띄워 바래미의 의병참여시작)
심산나이 17곱살 이를 보면 아버지의 영향이 아닌가?
5)옳바른 선비사상구현(임금에게 상소과정)***********이는 심산유고 하강부군편을 참조(비리와 전혀 타협하지 않는 성격으로
옳바른 말을 즐거하고 타협을 모르던 바래미 선조의 행장을 보시면 될 것임 야당으로서 귀양도 많이감)
**하림 언동의병시 서기로 참여하며 추후 중군장으로서 활동하게된다 이로 인해서 핍박으로 바래미에서 다른 곳으로 은거해 다니면서(후손들은 중국으로 이주도함)
부유했던 집안은 풍지 박살나며 중국으로 이주후 다시 바래미로 옮겨옮
희주의 후손들(단절된 역사)
홍기의 만사
(취송족조 덕영(해저)만사 :우리 유림이 겁계에 걸려 초수의 슬픔 있었는데 옛 모습 보전했네 남쪽감옥은 멀리멀고 북망산은 깍아 지른듯 삼형제가 응당 풀릴 날이 있을 것이나 구원에서 어찌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삼형제라함
이부분도 단절된 역사라 의병창의 대장 권세연의 모친이 참판댁에서 출가했으며 모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후손의 증언과 이삼형제들은 의병대장 권세연의 외사촌들이며 덕영의 서거이전인 1908년이전에 일들로 감옥에 갖힌 듯)
***옛모습을 보전했네란 것은 단발을 하지 않음을 뜻함
삼형제라함은 덕영의 아들들인 만식 헌식 기식을 의미하며 헌식은 이차유림에도 참여 기식을 통해 자금전달함
일세대의 행태들은 마을의 유학의 근본인 충효에 충실하고 국가를 위하는 마음으로 진정한 선비정신의 면모를 보인 것이 아닌가함
(이런 분위기와 행동들이 심산을 탄생케하고 일이차 유림에서 적극 투신하는 면모를 보이게 됨은 물론이다
2세대 독립운동사(창자시대)바래미11인 이상 참여와 활동 창자시대 2-3세대
창근창순 한식 헌식 뇌식 홍기 경능창백 심산 교림 창우 건영 순영 창도 교림..11인 이상(파리장서 일분담 자금 서명 받는 일 좌도고무외...)
치국과 효행등 충효를 근간으로 하던 바래미 마을은 이조후기 약200년간 적은 가구수에도 불구하고 안동도호부 소속으로(행정구역은 일제시대에 봉화현으로 변경됨)희삼기준으로는 문과 21장 사마시73장을 관찰사3분 참판1분 유문집80권을 배출하며 동시대 기록으로는 영남제일임은 물론 전국적으로도 유래를 찿기힘든 기록을 만들어낸다( 팔오헌 기준으로는 대과 17장 사마시63장 안동좌수12분 유문집60권을 기록)
위정과 선정등에서 영남유림의 요람이었으며 안동유림에서도 중심에 있었던 바래미 마을(의성 김가88가구)은 1910년 한일합방이되자 유림의 본당인 명월루에 모여서 절이를 지키기로 결의하면서 시작된다
물론 일본의 유화책에 맞서 전래의 유교사상을 굳건히 지키며 2세교육은 학록서당에서 시킴으로서 반일의사를 표시했다
(매일신문1986년8월16일자)
2세대 독립운동사는 항상 바래미마을을 생가고향으로 생각해왔던 심산 김창숙의 방문으로 시작된다 물론 아버지의 생가 고향마을로서 여러차례 방문과 교분으로 바래미와 친숙함은 물론이다
( 바래미와 사전교감을 나타내는 심산의 글)
생각난다, 일찍이 순우를 찾은 날, / 憶曾訪順遇
그곳은 바다 위 정든 고향마을 / 海上桑梓里
자네는 그때 바삐 나와 맞았지 / 君時忙出迎
서로가 맞잡은 그 기쁨 어떠했나 / 相握歡何似
날이면 날마다 닭 잡고 밥지어 / 日日具鷄黍
여러 일가들 성대하게 만났었지 / 大會諸族氏
의분이 북바치어 고금을 논하고 / 慷慨論古今
횡설수설 모두가 이치에 합당했네 / 橫竪俱當理
뛰어난 행실 재와 늪 풍미하니 / 卓行風嶺藪
뉘 아니 칭찬하리 강직한 선비 / 孰不稱介士
돌아보면 자취는 하마 묵은 옛날 / 轉頭跡已陳
부적 당도하면 자네를 따르리라 / 符到願從子
1). 심산의 합방당시의 처신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승희와 함께 상경하여 〈청참오적소 請斬五賊疏〉를 올리고 이완용(李完用)을 비롯한 매국오적을 성토하였다. 일진회가 한일합병론을 제창할 때는 동지를 규합하여 중추원에 그들을 토역(討逆)하는 글을 보내는 한편, 대한협회 성주지부를 조직하여 계급타파를 부르짖고(경능창백도 관여함), 단연회(斷煙會)의 기금으로 1909년 사립 성명학교(星明學校)를 창립, 신교육을 시도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고 음주로 세월을 보내다가 어머니의 교훈에 따라 유학에 정진하였다. 유학적 소양과 한학의 조예는 주로 이 시기에 기반이 닦여졌다.
3·1운동이 일어나자 늦게 당도한 심산은 3.1운동에 서명하지 못했고 유림에 나라에서 유림이 빠진데 한탄하면서 전국의 유림을 규합하여 130여명의 연명으로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유림단의 진정서를 작성하여 중국 상해로 망명한 뒤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우편으로 제출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제1차유림단사건’이다.
2).일차파리장서를 성공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좌도를 움직이는 것과 자금수혈이다 심산이 경북북부지방을 방문한 목적이기도하다 당시 심산의 사도실마을의 반응은 확인되지 않았다 이는 가까운 친척들이 대부분 해저에 있는 것과 달리 문정공파13대손으로 입양된 호림과 창숙의 정착기간이 잛았던 점과 연관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봉화 바래미마을이 김창숙을 환대하고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한 것과는 상반된 모습이었다 바래미는 맹목적에 가까울정도로 환대했다)
심산유고에서 심산의 동선을 보면 성주자택에서 3월14일 영주로가서 이교인과 권상주를 만나고 영주유림과의 연락방법을 협의하였으며 영주시 순흥으로가서 김교림(순흥최고갑부 김자인댁이자 만회고택계 택동후손)을 만나 파리장서 계획에 협조한다는 약속을 받았다
(제자들에게도 협조지시하며 가장 큰 돈을 내놓은 것으로 전해진다)
다음으로 김동진장을 만나서 협조를 구하고
3월 17일 해저 바래미마을에 다다라 김홍기의 집에서(만회고택) 김창백등 여러사람과 밤이 늦도록 독립운동에 대해서 의논하였다.
김한식 김상식 김창순 김홍기등7-8인에게 여기에 온 뜻을 전하니 모두가 오히려 먼저 나서지 못함을 서운해하며 크게 동의하여 각자 일을 분담하여 돕기로 하였다(심산유고에서)
바래미 마을의 만회 김건수고택에서 김창숙은 파리장서 계획을 설명하고 참여를 약속 받았다
(일이란 좌도를 움직이는 것과 서명받는 일 파리장서 계획을 설명하는 일등일 것임)
3월17일경 창백.두사람과 선새이 문중에 어른을 찿아 뵙고 거사에 관해서 말씀드린후
3월18일 창도집(팔오헌 종택)에서 일가30명이 회식 일경이 방문하여 한시간 반동안 취조 홍기군이 해혹하여 넘기며 술자리는 해산시키고 돌아갔다
3월18일 뜻맞는 몇사람과 홍기군(만회고택)으로가서
다음날 권상원장을 맞이하여(닭실마을 또한 해저와는 가장 혈연적으로 가까운 곳임)권상원장이 지금은 형색이 좋지 않으니 안동 예안 봉화 영주 일대의 연락과 서명 받는 일들은 본인들에게 맏겨달라함
***김창숙이 봉화를 방문한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지방 유림의 불확실한 예측 속에 경성에서 돌아온 김창숙이 고향이나 다름없는 봉화에서 운동의 동력을 얻음으로써 이후 좀 더 자신있는 행보를 보일수 있음을 의미한다
경북일대의 연락을 담당할 사람과 방대한 사업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함으로서 이 진상학맥의 본산인 성주나 곽종석이 거주하는 거창의 막대한 지원이 없더라도 운동의 진행에 필요한 최소의 동력을 확보했던 것이다
다음날 닭실 권상원장(유곡 충절3인)을 맞이하여(닭실 또한 수없이 혼인으로 얽혀져 혈연으로 봐도 무방)
***파리장서 약사에서는 심산이 할동에 필요한 대부분의 자금이 여기서 나왔다 라고하며 심산은 혈맹인 비래미를 통해서 정신적인 지주와 가장 필요했던 자금이란 부분을 해결한 것으로 보인다
바래미 교림과 해저의 자금과 인력 수혈 닭실가가 든든한 지원세력을 확보함은 물론이다
***파리장서 약사와 파리장서 운동의 숨은 협력자들
해저는 거문적인 지원과 해저7-8인(한식 뇌식 창순 창도 건영 순영 창우외) 경능창백 뇌식 홍기 창근 교림과 제자 창돈등 13인 이상이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창순에 대한 업급이 많은데 옥천 거주시 김구와 심산은 옥천에서 석창 집에 방문한 것으로 되어있으며 환기의 간찰도 옥천이 나온 것으로 보아 혈연으로서 자주 이용한 듯하다
또 한가지는 심산은 파리장서에 서명을 너무 많이 하지 못하게 말리며 대표적인 나이드신 분들만 서명하고 젊은 분들은 주로 장래를 대비하거나 파리장서 서명 받는 일 확산시키는 일등에 힘쓴 듯하다
안동 바래미 마을에서 족형 창근 창순 한식 뇌식 족질 홍기를 만나서 좌도 각 지방인사와 연락을 부탁하니 모두 쾌히 응했다(성균관대학 발행 김창숙문종 276참고)
일차 유림단 사건인 파리장서에서 바래미인들은 11인 이상이 대거 참여하고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파리장서에 서명한
건영(고종시 사도세자 추존 만인소소수)과 순영(김한동후손)창우(개암공후손)3분이 공식 독립운동가로 추서됨
***권세연의 아들인 채산 권상규가 쓴 김 홍기의 행장과 보훈처 서훈록을 보면 파리장서에서 유림대표를 심방하고 대의를 강론하고 서명 받는 일을 하다라고 나오는 부분과 일치한다
**60대 노인 많은 분들이 끌려가 모진고문 당햤다함(매일신문등 참고)
심산은 교림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내 그대를 만나기 위해 400리길 산하를 몇 번이나 넘었던가로 여러번 만남을 표시하며 만사로도 합방전 일본 헌병에게 살해된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 효능찹봉에 제수된 교림의 효행을 칭찬함(심산유고 참고)
심산에 협조하고 초군청을 설립한 교림가를 일본이 고의로 파산시킨 것으로 봄
홍기의 간찰에도 규당공과 함께 갖히었다로 나와 서명하지 않아서 빨리 풀린 듯
***파리장서에서 가장 검거인이 많았던 성주와 봉화에서는 기마 헌병대가 출동하였다(파리장서 약사29 참고)
3.삼세대 독립운동(이차유림단사건과 후학양성 국민 정체성 유지)창자 기자시대3-4세대
*****이차유림단부분
1924년 만주와 몽고 접경지대에 황무지를 조차(租借)개간하여 새로운 독립운동기지 건설계획을 추진하였다. 그곳에 군정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자금조달문제로 국내에 잠입하여 모금운동을 전개하다가 탄로 나자, 거듭 출국하는 이른바 ‘제2차유림단사건’을 일으켰다.
그 기간 동안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그 내부의 파쟁조정에도 힘썼다. 자신의 유교적 교양을 바탕으로 손문(孫文)을 비롯한 중국 국민당의 인사들과 교류하였고, 그들로 하여금 한국독립후원회와 한중호조회(韓中互助會)를 결성하게 하는 데 공헌하였다.
또,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조직하여 군사선전위원장으로 활약하였으며, 1925년 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1927년 상해 공공조계(公共租界)의 영국인 병원에서 일본영사관원에게 붙잡혀 본국으로 압송되어, 그 뒤 14년의 형을 선고받아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옥중투쟁과 일본경찰의 고문에 의한 두 다리 마비로 형집행정지를 받아 출옥하였다. 출옥한 뒤에도 창씨개명에 반대하는 등 항일의 자세를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1945년 일제 말기의 비밀결사인 조선건국동맹의 남한책임자로 추대되었다가 광복 직전에 발각되어 구속, 왜관경찰서에서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 이후 곧 상경하여 민주의원(民主議院)의 의원에 선출되었으나, 정당의 난립과 신탁통치의 찬반, 미소공동위원회 참가여부의 문제 등으로 일반 정치인들과 의견이 맞지 않아 정치에 깊이 관여하지 않고 육영사업에 힘썼다.
1946년 봄 전국유림대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자 유도회(儒道會)총본부위원장으로 선출되고, 성균관장을 겸임하였다. 이어 유교이념에 입각한 교육을 실시하고자 성균관대학기성회를 결성하였다.
일차장서에 이어 이차유림단사건은 상기처럼 장래에 대함민국의 독립을 위해서 황무지 개간 사업에 필요한 자금마련을 목적으로 시작되었으며 곽종석의 출판기념일을 택하여 국내로 잠입하면서 시작되는데 이차유림단에서는 중점적인 활약상은 마찬가지로 해저 바래미에서 이루어진다
1)심산은 마을대표이자 심산가의 대표인 홍기(만회고택)에게 정수기를 통해서 지령서를 전달했다 심산의 연락책인 정수기는1925년음력10월 초순경 봉화군 내성면 해저리 김 홍기방에 도착하여 동인에게 김창숙의 서면을 전하며 해서면에 기재한바와 같이 김동진과 협력하여 동리 거주의 부호 김뇌식과 봉화군 춘양면 선양리 강필에대하여 자금제공을 의뢰하고 또 가지고간 김동진 앞 자금모집 의뢰장과 김뇌식전 자금제공 요구장을 각각 해인에게 교부하기를 의뢰하고 그리고 김홍기를 시켜김 뇌식에게 서장을 교부케 하고는 김창숙의 종제 김창국 방에서 김뇌식을 만나 자금제공을 약속하고
(강필은 홍기의 외숙일 뿐 아니라 망미대를 쌓아놓고 곽면우와 울분을 달래던 만산 강용의 아들)
김창국방에서 정수기가 김 뇌식에게 자금제공을 요청하고 1개월내에 대구 남산정 김창기의 방으로 가져 올일을 재약한다
(대구 남산정의 김창기는 뇌식의 아들로 당시 교남학원졸업하였음 당시 창희에 이어 창기의 근거지 또한 이런 곳으로 활용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임)
김홍기는 심산 김창숙의 지령을 받고 각지방에 사람을 보내 김지사의 뜻을 알리고 상기사항들을 실천였으며 바래미대표로서 또한 심산생가 상징적 대표로서 대부분의 창구역활을 수행함
여기서 김뇌식과 김홍기는 선대부터도 절친이며 또한 강필은 김홍기이 외숙으로 물론 절친임
또한 김창국은 진림의 아들로 홍기가 안동의병내방장을 역임했던 백부의 진림의
집을(작은집)을 남의 시선 때문에 만회고택 대신 활용한 것임
김헌식(갈천김희주의 후손)권상경(권상경은 헌식의 딸의 시집임)에게 총을 갖다대며 위협하며 500원을 받아서 동생인 기식을 통해서대구에 정수기에게 전달함(심산3차 공판기록)심산활동 행동대원인 김화식 또한 김헌식이 포섭함(보훈처 서훈록)
경능창백 심산의 혈연4촌으로 성주 대한협회 창설에 간여하고 주로 심산의 연락책으로 활동함 또한 영주 김동진을 포섭함
(진림의 가계(홍기의 백부)는 상당히 좋았으나 만회고택보다 좋았다하는데 이로인해서 파산지경에 이르름)
보훈처 기록을 보면 홍기가 심산의 지령을 받고 김뇌식을 설득하여 2000원을 희사 받고 자금모집을 함께 하기로하고 함께 외숙인 강필을 방문해 2000원을 희사 받았으며 동래에 은거해있던 심산에게 전달했다라고 나온다
(시기와 양측 자료가 일관되게 부합함)
김뇌식은 전재산을 저당잡고 2000원을 희사하며 창희와 창기등의 아들들이 전달등 연루된다
창돈(심산의 이차유림에서 연락책과 중국에서 심산과 신채호를 도와로 나오는데 좀 더 조사가 필요하며 창돈에 대해서는 이후에 재기술함
三從兄 심산 김창숙에 의해
제2차 유림단사건의 연락책을 맡았고, 1925년 봉영청년동맹을 창립하여 민족해방 및 청년사상운동과, 대성학원(고령으로 초등학교를 못 다닌 학생의 중학진학을 위한 속성학교)의 존속유지운동등을 하였다.
16)p113순도 창순 형이 찿아와 함께 읊다 의리가 산과 같아 험난하고 어려운 세상길 함께 다 밟고 다녔지 조금만 기다리면 죽지만 않는다면 시대의 편안함을 들으리)
***마을주민 8명이 주도하여(홍기 뇌식 창근 우림 헌식 한식 창희 창백)마을주민100가구(실제 의성김문은 88가구임)가 어려운 가운데서도 황소50마리값인 5,000원을 전달함(대구매일신분참조) 이부분에 대한 기록을 찿기 어려워(물론 드러난 것 외에 밝히지 않은 부분들로 보이는데 심산이 이차유림으로 약3만원정도를 모금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드러나지 않는 것들이 있을 듯(추가적이며 지속적인 발굴노력)
정수기와 제휴(창택 창희(뇌식의 아들)김찬식(보림의 아들)김한식 정수기와 제휴하다라고 나와 봉화문화원226봉화의 독립운동사1997년발행
그러면 당시의 시대상항은 이러하였다
기호지방과 관서지방을 포기 영남 최후 일전 결행
11일 대구행 족숙 김헌식 매부 이영로 및 이기주 이동흠 이종흠 (다량의 서신 이동흠은 받은 서신만80통 홍기의 사돈)형제들 찿아와(이동흠은 향산 이만도의 손자 이중업의 아들이자 김락의 다들이며 이종흠은 동생이며 김홍기의 사돈임)
12월 헌식(바래미)종제창백 생가 4촌) 수기 종흠 동흠(홍기 사돈들) 화식(봉화 의성 헌식이)포섭)홍묵 영로 제인들을 안동 예안 영주 봉화 상주 서산 영양 영천 경주 양산 울산 청도 밀양 성주 고령 창령 합천 진주 의령 함안 마산 부산등 지령서와 편지를 써서 보내(지령서를 보낸
이길호로 부터 창백이 와서 감시가 심함을 알려(생가 혈연들과 서로 연락됨)
중국으로 다시 돌아감
금액이 턱없이 모자라 황무지 개간이 어려워져
53 백성의 기운이 죽어 냉담하게 거절 겁나서 불응 응하는 자가 있더라도 몇 사람의 노자정도
방향을 선회하여 국민에게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서 의열단자금(나석주와 김지섭등)으로 투입하게된다
바래미 해저는 어려운 시기에도 다시 거문적으로 심산과 함께하며 올인하며 옳 곧은 유림의 요람으로서 추호도 망설임 없이
국가에 충성하는 유림의 정도를 가게된다
해저만 같은 활동에 동참했더라도 이차유림단 사건은 성공했을 것으로 사료되는 점이다
이차유림단의 사건이 발각되고도 많은 바래미인들은 물론 인근 안동 영주지방의 가까운 인척들도 매타작에 시달렷다
이로인해 감시와 탄압은 날로 심해졌으나 누구하나 창씨개명에도,심사참배에도 나서지 않아 단발은 물론임 홍기의 수백통의 간찰에도 창시한 흔적은 하나도 없다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이 보다 중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일을 다짐하는 명월루에는 매일 고등계 형사들이 배치되었다
해방후 홍기는 이제 국법으로 머리를 깍으라면 깍겠다함
심산이 아버지의 고향인 해저를 늘상 생가고향으로 생각하고 의지해오며 정신적이며 물질적인 버팀목 역활을 한 것은
아래에서도 잘나타난다
김창숙의 회고기에는 사도실문중의 협조에 대한 언급은 전혀없다 이런 상항은1925-6년도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할 군자금을 모집할때나 1940년 총독부의 창씨정책에 반대할 때도 종손인 김창숙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80% 이상이 창씨를 하였다 독립운동기지건설에 참여와 유죄를 받은 인물들은 대부분 바래미에 연고를 둔 인물들이었다
(서동일의 성주 사도실마을의 창씨실태와 유림 김창숙의 반대 논리 참고)
또한 심산이 중국에 있을때 심산에게 일본으로 전향할 것을 집요하게 권유하여 심산의 분노케한 행위들이 있어서 심산은 사월리종중을 신뢰하지 못한 것으로 판단된다
생)339족형 윤겸창조께 사월리 종중에 믿을 사람이 없다....병든 아내와 어린자식을 부탁할 곳 없고.사당의 신주를 받들고서 해저로 옮겨 가족들에 당부해두어
353 1928년 이미 식구들에게 고향인 봉화 해저땅으로 사당을 받들어 옮기라고 당부해두었습니다
****계몽운동과 단체활동외
다)신간회, 민립대학, 봉화청년회, 봉영청년동맹, 영남위인전편찬
**창돈[만인소 희성후손으로 심산계열, 봉영청년동맹설립, 신간회 ,봉화민립대학설립, 봉화청년회 주도] (1927.5.28/5.30/8.20자 시대일보 참조)
고문 후유증으로 인한 사망시 봉화영주 청년 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러졌으며, 2차유림에도 연락책으로 참여한 것으로 전해지며 심산과 신채호를 도운 듯(조사해야함), 고문후유증으로 33세 요절, 아들28세 요절, 2분은 행방불명됨.
**창희(비밀경찰요사와 심산유고에서 2차유림단에 참여한 창희는 신간회, 민립대학, 봉화청년회등에서 간부로 지속활동함.) 심산의 자금모집활동가 정수기와 제휴한 것으로도 나와(봉화문화원226페이지 봉화독립운동사 봉화문화원발간.
**김 만기- 경능 창백의 아들로 신간회와 노동운동으로 징역형을 받음. (많은 활동)
외에도 마을에서는 우림(봉화청년회회장), 김보림(민립대 위인전편찬), 김창근(민립대 집행위원장),
창욱(심산4촌 절손)?
김창은 신간회 교육부원(봉화독립운동사)
삼신요원인 정수기를 통한 참여2분
김창식 보림의 아들로 봉영청년동맹 참여 정수기와 제휴
김우림 봉화청년회회장(김희곤교수의 봉화독립운동사 참고)
三從兄 심산 김창숙에 의해
제2차 유림단사건의 연락책을 맡았고, 1925년 봉영청년동맹을 창립하여 민족해방 및 청년사상운동과, 대성학원(고령으로 초등학교를 못 다닌 학생의 중학진학을 위한 속성학교)의 존속유지운동등을 하였다.
1926년 1월 12일 봉영청년동맹으로 인하여 구금당하였다. 여러번 구속
(부산 시대일보 참조) 당했으며, 33세에 고문으로 인하여 젊은 나이에 사망하였으며 봉영청년사회장으로 치뤘다.
또한 신간회, 봉화민립대학[집행위원장:일초 김창근]도 실질적으로 창돈이 주도하였다.
김창돈33세 사망1928년사망(고문 휴유증)
중현28세사망1939년 사망(김창돈아들)
중호행방불명1914년 탄생(김창돈아들)
중구 행방불명1929년 탄생(김창돈아들)
봉영운동자 동맹 김창돈 발의 해방운동의 통일(영주봉화)운영자 동맹
봉화 청년회 김창돈씨구속
1927.5.30. 봉화청년 정총김 창돈
물야 청년기념야유회 김창돈
27.8.20 물야 청년 야유회
아래는 김희곤 교수의 봉화독립운동사 218
민립대 (상무위원 김창돈, 실질적으로는 김창돈이 설립주도함)
권중철(부위원장), 창근(집행위원장), 집행위원[김보림<바래미,학포 우수아들→윤영(이만손사위)아들→김보림아들→창식]
해저 위인천편찬도 주도함.
강교원(춘양),권태영,김사민(두월), 김창희(김뢰식의 아들),강준(교류) ,강필(춘양 만산고택)
봉화 청년회간 정기총회 제6회
1923년 김우림이 회장(바래미),권중환 부회장,김창돈 총무,김창희(바래미, 김뢰식의 아들) 문화교화부장, 이종명 서기로 선임 강교원은담역[민립대학 설립건나옴]
-봉화청년회 대성학원 운영
-봉화청년동맹결성과 대중운동
의연금보집 제2조 김창희 ,김창식(해저,윤영의 손자 김보림의 아들,조사연구부원)
봉화지부신간회 간사 김창돈 ,김창근(봉화지부회장),김창희, 김창돈(정치문화부장), 김만기(바래미,昌百의 아들),김성기(조직선전부)선임
1927년12월10일 조직정비 김창돈 의장
본부파견 5명선물 서무부 총무간사, 간사 김창돈 ,김창희 ,김태섭(오록종손, 학사종택)
본부파견 대표위원 김창돈, 신언직(서신교류)
신간회기금모금 신언직, 김창돈
7월 대성학원 폐쇄조치당함
신언직 회장1928 ,김창희 상무간사, 김창돈 간사
서무부장 김위식, 재무부 부원 김창희, 교육부원 김창은(서신)
봉화향교철폐운동
현재까지의 행적입니다. 지속 수집해야함.
김창희 또한 지속활동함을 보여,
김 만기(경능 창백의 아들),신간회 활동에 이어 이재유 그룹의 조공재건운동
이효정과 김만기, 김만기는 재2경성재건그룹당시 활동했던 인물
이재유그룹은 1933년부터1936년가지 경성 트로이카 경성재건그룹
조선공산당재건 경성준비그룹 상당한 성과
1906=19771925년3월 보통학교졸업 1930년4월 일본으로 건너가 오오사까 노동자생활(경능창맥의 아들임을 감안해야)
932년 귀국 함남 자유노동
서울세탁소운영
1934년 이재유그룹산하 산업별적색 노동조합 결성 노력
1935년 용산 경찰서 체포 1936년7월 경성지법 징역1년6개월
김창백의 독립운동으로 사실 전체가 핍박 받은 택동가호림과 심산가는 요절, 행방불명 가세가 기울고 집이 허물어지고,뿔뿔이 흩어지며 어렵게들 노동종사등
공산당이긴하나 마찬가지로 신간회등에 간여하고 나라 찾기에 나선 것이 공산당이었을 뿐으로 보여 이후 김만기는 정재철그룹이 복원되면서 다시 활동
1934년7월 반전 격문 살포등으로 많은 택동가의 후손들은 특히 절손과 행불, 조기사망을 잘보셔야
떠돌이 몰락
만창 홍기는 유집에서 젊은 원혼이 하늘을 찌른다고 했음
30명이 매타작에 시달린다고도 했음
의병활동으로 파산한 집들, 고문으로 사망하신 분들, 절손된분들, 떠돌이 생활하신분들,
이제라도 밝혀야 하지 않을까
4)희주가 참판댁5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