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백의종군로(白衣從軍路)는 어디인가
산티아고 가는 길(Camino de Santiago)은 세계적인 순례길이다. 스페인의 이 길을 순례하는 사람 중에 한국 사람이 많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 그만한 순례길이 없단 말인가? 충무공 이순신의 백의종군로가 산티아고 가는 길 보다 훨씬 의미 있는 순례길이다. 이런 길이 있음을 알고 그 의미를 안다면 먼 나라에 가서 순례하기 전에 먼저 한국에서 순례를 할 것이다.
백의종군로는 충무공이 서울의 옥에서 나와 아산, 공주, 전주, 남원, 구례, 순천, 하동, 합천, 초계까지 간 600킬로미터 길이다. (지도 백의종군로와 수군재건로 참조)
정유년(1597) 2월말 경, 충무공은 긴급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공은 여러 차례 문초를 받고 사형선고를 받았다. 공의 죄목은 4가지인데 요점은 조정이 명한 것을 따르지 않고, 삼도수군통제사로서 일본이 바다를 건너오는 것을 막지 못하여, 결국 조정을 능멸했다는 것이다. 정탁은 신구차(伸救箚)라는 상소문을 올려 왕의 감정을 공감하면서도 “장수의 목을 베기는 쉬우나 엄중한 전시이므로 잠시 살려 두는 것이 이로울 수 있음”을 강조하여 겨우 사형을 면하게 했다. 공은 백의종군형을 언도 받고 4월1일 옥문을 나왔다. 백의종군은 엄한 형벌로서 장형(볼기 60 내지 100대)을 가한 후 계급을 박탈하고 3년간 군복무를 시키는 것이다. 백의종군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다.
죄인의 몸으로 옥에서 풀려난 이순신은 순천에 주둔 중인 권율 장군의 부대까지 가야 했다. 그런데 공이 가는 길은 비통의 길이었다. 공은 도중에 어머님의 시신을 붙들고 통곡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공의 모친은 순천에서 연전연승하는 아들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살고 계셨다. 그런데 갑자기 아들이 서울로 압송되는 기막힌 일을 당한 것이다. 공의 어머니는 그 아들을 조금이라도 가까이 하려고 배를 타고 아산을 향했다. 그러나 파도가 일고 역풍이 불면 잦아질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바람과 노의 힘으로 가는 16세기의 배란 것이 80 노구의 모친에게는 그야말로 험난한 뱃길이었다. 열흘 이상 시달린 공의 모친은 쇠잔한 생명을 유지하지 못하고 이틀만 더 가면 아산에 도달하는 안흥 바다에서 그만 세상을 떠났다. “내가 감옥에 갇히지만 안았더라면 어머님이 험난한 뱃길에 오르시지 않았을 것이고 이렇게 돌아가시지 않았을 것이다.” 공은 이런 생각을 하니 불효가 막심하여 목이 메고 하늘이 무너진 듯했다. 이 때의 일기를 보자:
4월 12일 맑다. 종 태문이 안흥량에서 돌아와 편지를 전하는데 ”초아흐레에 어머니와 위아래 모든 사람이 무사히 안흥량에 도착했다.”고 하였다.
4월13일 맑다. 종 순화가 배에서 와서 어머니의 부고를 전했다. 뛰쳐나가 가슴 치며 발을 동동 굴렀다. 하늘이 캄캄했다. 곧 게바위로 달려가니 배는 벌써 와 있었다. 애통함을 다 적을 수 없다(뒷날에 적다)
4월16일 궂은 비 오다. 배를 끌어 중방포로 옮겨대고 영구를 상여에 올려 싣고 집으로 돌아오며 마을을 바라보니 찢어지는 듯 아픈 마음이야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집에 와서 빈소를 차렸다. 비는 퍼붓고 남쪽으로 갈 날은 다가오니, 호곡하며 다만 어서 죽었으면 할 따름이다.(뒷날에 적다)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이 궂은 비 맞으며 모친의 상여를 뒤따라 간 길을 순례하지 않고 어디 다른 나라로 가서 순례길을 걷는단 말인가! 죄인의 몸으로 장례도 제대로 치루지 못하고 금부도사의 재촉을 받으며 공은 순천을 향해 내려갔다. 그러면 이후의 노정이 순탄했느냐 하면 그렇지 못했다. 힘들게 순천까지 갔으나 권율 장군은 작전 중이라 다른 곳으로 이동해 없었다. 이순신은 권율 장군을 찾아서 계속 가야 하는 죄인이다. 도중에 비바람에 옷이 젖고, 노비의 집에서 자야했다. 죄인은 양반집에서 잘 수 없는 것이 당시의 법이다. 공은 합천 초계에서 권율 장군의 막사를 겨우 찾았다. 그 이후의 종군은 더욱 순탄하지 못했다. 원균의 수군이 칠천량에서 대패했기 때문이다. 통제사 이순신은 영문도 모르면서 압송되면서도 막강 수군을 원균에게 인계했다. 그러나 원균은 한 번의 싸움에서 수백 척의 함대와 만여 명의 수군을 거의 소멸시키고 전사했다. 조선의 수군이 사라진 남해에서 일본은 수륙 양면 작전을 편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순신은 일본의 횡행을 저지해야 할 책임을 통절하게 느꼈다. 졸병으로 백의종군하는 주제에 무슨 수로 수군을 재건할 것인가?
2. 전라도를 유린하라: 풍신수길
정유년7월16일, 칠천량에서 원균의 조선 수군을 괴멸시킨 일본은 수륙 양면 작전을 마음 놓고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는 14만여 명의 일본군 전투서열을 재편성했다. 그들은 전주 함락을 목표로 7월말에 진격을 개시했다. 조선 땅에서 전라도는 임진년 이래 5년 동안 온전했다. 선조는 전라도로부터 항전의 에너지를 공급받았다. 히데요시는 전라도를 완전히 파괴하고 전멸시키라고 명했다. 이는 임진년의 명령과는 다른 잔혹한 명이었다. 히데요시는 전과를 확인하기 위해 죽은 자의 코를 베어 일본에 보내도록 했다. 군인의 코와 백성의 코를 가리지 않았다. 일본군 전투서열은 이러하다:
1. 좌군(사령관: 우키다 히데이에 宇喜多秀家) 장수: 코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소오 요시도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등 16명, 병력 49,000. 해로로 전라도에 상륙하여 전주 공격
2. 수군(사령관: 와키자카 야스하루 脇坂安治) 장수 4명, 병력 7,200. 남해로 진군하는 좌군을 지원
3. 우군(사령관 모리 히데모토 毛利秀元) 장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등 7명, 병력 64,000. 경상도와 전라도 내륙을 관통하여 전주 공격
4. 예비군단(총사령관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小早川秀秋) 직할 10,000, 지원병 10,000. 부산 북방 68킬로 밀양으로 진군하여 좌우양군의 전주공격 상황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대기
당시 조명 연합군의 대비는 아래와 같다:
조선군 경상도 10,000, 전라도 1,500, 명군 양원은 남원에 3,000, 진우충은 전주에 2,000, 오유충은 충주에 4,000, 마귀(麻貴)는 서울에 수백 명, 도합 명군 1만 명. 연합군 전체 2만여 명.
남해안에 상륙한 일본 좌군은 8월16일 남원성의 군민 3,000명을 전멸시켰다. 명군 해생은 일본군 57,000을 보자 도주했다. 좌군은 8월20일 전주에 무혈입성했다. 명군 진우충은 싸우지 않고 도망했던 것이다. 다음날 내륙을 진군한 일본 우군도 전주에 입성했다. 열흘간 전주성과 주변 지역을 유린, 능욕, 약탈, 살육, 납치, 파괴한 좌우군은 서울을 목표로 진격했다. 패퇴한 조명연합군은 서울에 집결했는데 마귀 휘하에 8,800, 이원익 농민병 8,000이고, 평양에 명군 경리 양호가 소수의 병력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9월7일 직산에서 히데모토의 선봉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보병 3,000과 마귀(麻貴)의 선봉 해생(解生)의 기병 2,000이 충돌했다. 그 후 양군 주력이 합쳐져 전투를 했는데 명군은 전사 200, 왜군은 전사 29로 끝났다. 치열한 전투가 아니었다. 9월 중순에 양군은 휴전에 동의하여 직산-진천 선에서 대치했다.
3. 이순신 일가를 멸살시켜라: 명량 대패에 대한 적의 보복
한편 일본 수군은 도토 고코(藤堂高虎), 와키자카 야스하루, 구루시마 미치후사 등이 원균의 후임으로 다시 등장한 이순신 함대와 대치했다. 그 왜군은 9월16일, 명량에서 소규모 이순신 함대에 대패했다. 일본군은 이순신의 기세를 꺾고 명량 참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이순신 일가를 몰살 시키는 특공작전을 계획했다. 직산에서 조명연합군과 대치 중이던 일본군은 정예의 칼잡이 50명을 선발했다. 9월 하순, 아산 백암리에 잠입한 일본 특공대는 이순신의 집을 부수고 불을 질렀다. 근처의 마을도 모두 분탕했다. 특공대는 산으로 피신한 조선 백성을 발견했다. 조선 청년들이 가족을 깊은 곳으로 피신시키기 위해 특공대를 저지하면서 시간을 벌었다. 무기도 훈련도 없는 청년들은 살인 전문가에게 처절하게 당했다. 어머니와 어린 조카를 피신시킨 청년 면(21세)은 장가도 들기 전에 일본군에게 참살되었다. 이순신의 부인은 처참히 살해된 아들을 무릎 위에 안고 통곡하다 기절했다. 그 장면은 바로 마리아가 십자가에서 죽어 내려진 예수를 무릎에 안고 비통해 하는 피에타(Pieta)였다.
이순신의 막내아들 면은 이순신이 무과에 합격한 해(1576년)에 태어났다. 당시 32세의 이순신은 초임 장교로서 12월에 함경도 최전방으로 최초 발령을 받았다. 솜바지를 입은 이순신은 춥고 배고픈 몸으로 천리 길을 가면서 막내아들 면이 잘 자라기를 빌었다.
늦은 나이로 무과 4등으로 급제하여 엄동설한에 한성에서 함경도 삼수(三水) 동구비보(董仇非堡)까지 550km를 행군했다. 그의 벼슬은 권관(權管)인데, 이것은 양반 무관의 최말단 종9품이며 현대의 하사에 해당하는 계급이다. 구비(仇非)는 ‘강굽이, 산굽이’ 하는 '굽이'를 한자로 쓴 것이고 동(董)은 '아이'이므로 '아이굽이'였을 것이다. 보(堡)는 작은 요새이다. 성 쌓을 수 없는 곳에 진(鎭), 진 설치할 수 없는 곳에 보(堡)를 두었다. “삼수 갑산을 가도...”라는 말이 있다. 이는 “어떠한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를 뜻한다. 삼수는 그만큼 험한 산간벽지이다. 이순신은 이때부터 진중일기를 남겼다. 초서체로 쓴 이 일기는 아산 현충사에 ≪함경도일기≫라고 명명되어 원본이 보관되어 있다.
4. 1만 리(4,500km)를 행군한 이순신
이순신은 우리나라의 남쪽 땅 끝 해남에서 북쪽 땅 끝 경원까지 행군했다. 그것도 한차례 한 것이 아니라 여러 번 왕복했다. 그는 우리나라 최고의 오지인 삼수갑산에서 초임장교를 보낸 이후 22년의 무관 생애 동안 전국을 행군하면서 고달픈 복무를 했다.
이순신의 자세한 근무지역과 연한은 아래와 같다: 1차 함경도 3년2개월: 동구비보 권관 종9품(1576.12-1579.2). 2차 충청도 8개월: 한성 훈련원 봉사 종8품(1579.2-10), 충청병사 군관(1579.10-1580.7). 3차 전라도 4년: 발포 만호 종4품(1580.7-1583.7). 4차 함경도 5년: 함경도병마절도사 이용의 군관(1583.7-10). 경원군 건원보 군관 (1583.10-1586.1), 경흥군 조산보 만호(1586.1-1588.6). 5차 충청도 8개월: 귀향(1588.윤6-1589.2). 6차 전라도 10개월: 전라순찰사 이광의 군관(1589.2-1589.12). 정읍현감 종6품(1589.12-1591.12). 전라좌수사 정3품(1591.12 -1597.3.). 7차 한성 1개월: 죄인. 서린방(1597.3-1597.4). 8차 경상도 5개월: 백의종군. 초계(1597.4 -1597.8). 9차 전라도 1년3개월: 삼도수군통제사. 장흥, 여수, 해남(1597.8 -1598.11). (지도 이순신 장군의 근무지와 종군로 참조)
상기 근무 지역을 보면 함경도 다음에 충청도, 충청도 다음에 전라도로 순환 보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순신의 종군거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한성-함경도 삼수 1회 왕복 1,100km. 한성-함경도 경흥 1회 왕복 1,500km. 한성-충청도 천안 1회 왕복 200km.
한성-전라도 순천 2회 왕복 1,440km. 전라도 순천-경상도 합천 1회 왕복 240km. 전라도 순천-전라도 해남 1회 편도 100km.
이상의 종군거리를 합하면 4,580km로서 1만 100리가 넘는다. 이를 22년 무관 근무기간으로 나누면 매년 평균 208km, 500리씩 행군한 것이다. 현대의 군대에 복무하는 장병도 자동차를 타고서도 이렇게 많은 행군을 하지는 않을 것 같다. 하물며 말 타거나 걸으면서 추위와 더위를 그대로 견디면서 걷는 다는 것이 얼마나 고난의 길이었는지 상상하기 어렵다.
5. 막내를 잃은 이순신은 복수를 맹세하다
1597년 9월16일, 명량에서 크게 이긴 이순신은 아직도 수군의 형세가 외로워 진을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9월17일 당사도(무안군 암태도 동편), 어의도(목포 서편), 19일 법성포(영광군), 20일 위도(영광군), 21일 고군산도(옥구군 미면 선유도)로 옮겼다. 이순신은 10월1일 선유도에서 “아산 고향이 적에게 불타 버렸다”는 공문을 받았다. 마음이 불안하고 잠을 이루지 못한 이순신은 다음날 일찍 아들 회를 배에 태워 고향으로 보내 소식을 알아오게 했다. 보름 후, 소식이 왔다. 당시의 일기를 보자:
<<10월14일 맑다. (전략) 저녁에 어떤 사람이 천안에서 와서 집안 편지를 전했다. 봉한 것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정신이 아찔하여 어지러웠다. 대충 겉봉을 뜯고 열(둘째 아들)의 편지를 보니, 겉에 ‘통곡’ 두 글자가 씌어 있어 면의 전사했음을 알았다. 어느새 간담이 떨어져 목 놓아 통곡,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인자하지 못한고!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가 마땅하거늘,(중략)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를 갔느냐. 남달리 영특하여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 두지 않은 것이냐.(후략)>>
사흘이 되었는데 슬픔은 더해갔다. 영내에서는 마음 놓고 통곡할 곳도 없었다. 몸속 깊은 곳에서 치 솟는 울음을 이를 악물어 참았다. 그는 멀리 떨어져 있는 강막지의 집으로 갔다. 당번 군관을 물리치고 낡은 소금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가마니 위에 엎드려 목 놓아 울었다.
“이 원수를 갚으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 이순신은 주먹을 으스러지게 쥐었다. “호부대설국욕(好赴大雪國辱), 잘 (준비하여) 나아가 나라의 치욕을 끄게 씻어라.” 6개월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순신은 밖으로 뛰어나와 영으로 달려갔다. 옥에 갇혀 있던 왜적 13명을 베었다. 왜적에 부역한 송언봉도 베었다. 상복을 입고 7일이 지났건만 비통한 마음은 가시지 않았다. 적에게 붙었던 윤해, 김언경을 베었다. 보름이 지나도 마음의 고통은 가시지 않았다. “이 원수를 갚으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 뇌리를 떠나지 않는 생각에 괴로웠다. 저녁나절에 적에게 붙었던 정은부, 김신웅을 베었다. 선비집 처녀를 강간한 김애남도 목 베었다. 열아홉을 베어도 나라의 치욕은 조금도 씻기지 않았다.
6.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라: 모친의 당부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라.” 이순신은 오직 이 일념으로 나날을 수군 재건에 힘썼다. 치욕과 통한의 정유년이 저물었다. 선조는 이순신을 격려했다. “이번 선전관 편에 들으니 ‘통제사 이순신이 아직도 상제라 하여 방편을 따르지 않아 여러 장수들이 민망히 여긴다’고 했다. 사정이야 비록 간절하지만 나라 일이 한창 바쁘다. 옛사람의 말에도 ‘전쟁에 나아가 용맹이 없으면 효가 아니다’고 했다. 예기에도 ‘원칙과 방편’이 있으니 꼭 원칙대로만 지킬 수는 없는 것이다. 경은 내 뜻을 짐작하여 소찬에 더하여 방편을 좇도록 하라.”
선조는 고기반찬을 하사했다.
무술년(1598)이 되었다. 명군은 전투하지 않고 시간을 끌고 있었다. 적은 남도를 분탕하며 6개월간 흉년 든 조선을 약탈했으나 그들도 점점 헐벗고 굶는 날이 많아졌다. 명군도 분탕질을 했다. 그들도 먹을 것이 없었다. 조선 백성은 죽은 자의 살을 베어갔다.
2월18일, 이순신은 진을 목포 앞 보화도(무안군 이로면 고하도)에서 고금도(완도군 고금면 덕동리)로 옮겼다. 적은 울산에서 순천까지 해안선에 30여개의 견고한 성을 쌓고 누각이 높은 건물을 세우며 장기전에 대비했다. 내륙의 일본군은 조선 의병의 보급로 차단으로 굶어 죽게 되었다. 총사령관 히데이에, 히데모토, 요시나가 등의 장수가 병력을 데리고 철군했다. 조선에는 64,700명의 일본군이 남았다.
7. 조명연합군의 반격
6월에 명이 대군을 증파했다. 쌍방의 병력이 비슷한 수준이 되었다. 수군 도독 진린도 수 백 척의 전선으로 19,000의 병력을 싣고 고금도의 이순신 진에 왔다. 조명연합군의 반격이 시작된 것이다.
8월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었다. 그의 죽음을 알리지 않았지만 조선의 일본군 장수들도 곧 알게 되었다. 9월20일 남해안까지 진격한 조명연합군은 왜성에서 항거하는 일본군을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화해를 시도했다. 진린은 동의하고 이순신을 설득했다.
“적이 물러난다니 우리가 피를 흘릴 필요가 없지 않소? 그냥 가게 놓아둡시다.”
‘이자를 베어버릴까?’ 이순신은 침을 삼키고 분을 참았다. 이순신은 수륙양면작전 계획을 수립하여 유정(劉綎)에게 보내 제의했다.
유정은 10월초에 작전을 승인했다. 이순신은 전선 150척, 협선 200척에 삼도 수군 13,000을 태우고 출항했다. 진린도 전선 100여 척으로 이순신 함대의 뒤를 따랐다. 수군은 광양만을 봉쇄했다. 그리고 유정의 지상군이 일본군을 바다로 몰아내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유정은 오지 않았다. 순천의 고니시 유키나가가 유정의 출전을 지연시키는 계략을 펴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정은 고니시가 연이어 상납하는 전리품을 챙기고 있었다. 그는 10월10일 철수했다. 고니시는 유정의 압박을 피해 시간을 벌었지만 바다를 통해 나갈 수가 없다. 이순신 함대가 앞을 가로 막고 있는 것이다.
8. 고니시의 계략
고니시 유키나가는 진린을 이용하기로 계략을 꾸몄다. 진린에게 철군 협상 명목으로 사절을 보내어 온갖 잡다한 사항을 협의하면서 시간을 버는 것이다. 그 사이에 몰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의 함대를 조금씩 바다 밖으로 내보내 이순신 함대를 뒤에서 공격하는 척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순신 함대를 외해로 유인하고 그 틈에 유키나가의 본대가 노량해협을 빠져나가겠다는 작전이다. 왜선은 왜구(倭寇)의 ‘빼앗고 튀는 전술’에 적합하게 건조했으므로 조선 배 보다 가볍고 빠르다. 이순신은 일본 수군이 끝내 대응을 아니 하자 전과 없이 물러났다. 좌수영을 거쳐 10월 12일 나로도에 이르고, 고금도까지 물러났다. 수군은 계속 바다 위에 있을 수 없다. 격군이 쉬어야 하고 보급도 받아야 한다.
11월 8일 이순신은 도독부에 가서 진린을 만났다. ‘11월10일부터 일본군이 철수를 시작한다’는 첩보를 들었다. 진린은 이순신에게 적의 퇴로를 차단하라고 작전을 합의했다. 연합함대는 11월 9일 고금도를 출항하여 나로도를 거쳐 11월 10일 여수 전라좌수영에 도착했다. 고니시는 광양만에서 육군을 배에 태워 노량으로 빠져나갈 계획이다.
“아들의 원수를 살려서 보낼 수 없다.”
이순신은 최후의 결전이 다가왔음을 직감했다. 11월14일 고니시는 돼지 두 마리, 술 두통을 진린에게 바쳤다. 11월16일, 고니시는 말, 창, 칼을 또 바쳤다.
9. 하늘에 빌고 칼에 새긴 소망을 이루다
11월18일 18시, 경상도 쪽에서 수많은 전선이 남해도와 노량의 해협을 통과하려고 밀려온다는 첩보가 도착했다. 순천 광양만 예교 앞바다를 봉쇄하고 있던 이순신은 22시에 격군을 재촉해 함대를 동진시켰다. 노량을 막는 것이 더 급했기 때문이다. 24시, 이순신은 손을 씻고 갑판 위에서 무릎을 꿇었다.
“이 원수를 무찌른다면 지금 죽어도 유한이 없겠습니다. 차수약제 사즉무감(此讐若除 死則無憾)”하고 하늘에 빌었다.
진린은 이순신 함대의 뒤를 따랐다. 진린이 늑장을 부렸다기보다는 이순신이 서둘러 앞장을 섰다. 11월19일 02시, 이순신은 노량 해협에 이르렀다. 격군들은 8시간의 항해로 피로했다.
관음포 북쪽에 전선을 배치한 이순신은 노량해협을 빠져나오는 일본 전선을 공격했다. 양군은 격렬한 접전을 전개했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관음포 쪽으로 선단을 이끌었다. 그는 그쪽이 외해로 가는 길인 줄 착각했다. 막다른 포구에 갇힌 일본 수군은 뱃머리를 돌리어 이판사판으로 달려들었다. 일본 수군은 무작정 이순신 함대로 달려 들어갔다. 왜냐하면 그쪽으로 나가야 외해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기서 전투를 잘하는 것보다는 빨리 귀국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그들을 살려 보낼 수 없었다. 철저히 격멸해야 한다. 양군이 온 밤을 격렬히 싸웠다. 이순신은 적선 500여척과 밤새워 싸우고 아침이 될 때까지 1대5의 비율로 계속 싸웠다. 어둠 속에 피아가 뒤섞였다. 이순신의 주위는 모두 적선이고 적선의 주위에는 고립된 조선 수군이 있었다.
일본 전선 200여척이 격파되고 수천 명이 고기밥으로 되었다. 혼전은 이순신이 가장 피하고 싶은 전투다. 총탄이 날아오는 방향도 없다. 모든 곳에서 날아오고 모든 곳으로 날아갔다. 이순신은 원수를 보았고 원수도 이순신을 보았다. 송희립이 이순신을 방패로 가로 막은 것은 이순신이 더 이상 활을 들어 쏠 수 없게 된 다음이었다. 원수들의 시체가 피로 물든 바다를 덮었다. 일휘소탕 혈염산하(一揮掃蕩 血染山河), 이순신이 칼에 새긴 소망이 이루어졌다.
시마즈 요시히로의 수군이 어쩔 수 없이 힘든 싸움을 하는 사이에 코니시 유키나가의 지상군을 태운 함대는 예교성을 빠져나와 외해로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이 전투에서 통제사 이순신외에 가리포첨사 이영남, 낙안군수 방덕룡 등 조선 수군장수 10여명, 명 수군장수 등자룡, 도명재 2명이 전사했다. 노량 해전은 이순신이 완전한 복수를 위해 앞장서서 사력을 다해 싸운 복수의 전투였다.
“이 원수를 갚으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 차수약제 사즉무감(此讐若除 死則無憾) 입니다라고 하늘에 빈대로
“잘 (준비해) 나아가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라.” 호부대설국욕(好赴大雪國辱) 하라는 노모의 타이름대로
“한칼 휘둘러 소탕하여 (원수의) 피로 산과 바다를 물들이겠다.” 일휘소탕 혈염산하(一揮掃蕩 血染山河)라고 칼에 새긴 대로
이순신은 소망을 이루고 차가운 노량의 겨울 바다에서 순절했다.
10. 백의종군로를 순례합시다
지금도 저 세상에서 이 나라를 걱정하며 잠들어 계신 충무공의 묘소를 참배하고 공이 백의종군한 길을 걸읍시다. 처참한 모습으로 전사한 막내아들을 가슴에 안고 비탄으로 혼절한 장군의 부인을 묵상하며 순례합시다. 충무공과 함께 싸운 명나라 제독은 공을 칭송하면서 ‘천지를 다스릴 수 있는 재주가 있고 국가를 어려움에서 구한 공’ (有經天緯地之才 補天浴日之功)이라 높이 평가하였고, 영국 해전사 전문가 발라드(Ballard G. A)제독은 영국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공을 넬슨(Nelson)제독과 어깨를 견준 군인이라 했다. 러시아 발틱 함대에게 대승하여 일본사람들로부터 신(神)처럼 추앙 받은 도고헤치로 제독은 사람들이 자신을 공과 비교하는 것에 대하여, ‘나를 영국의 넬슨과 비교한다면 모를까 이순신과 비교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라고 공과 비견되는 것을 극구 사양하였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공을 알아보듯이 우리도 공의 연전연승을 잘 알고 존경하지만 공이 겪은 고통을 얼마나 느끼고 있는가? 충무공이 백의종군한 길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묵상하게 하는 길이다.
<선조실록>을 기록하는 사관(史官)은 공의 순절을 안타까이 여겨 ‘공의 단충(丹忠)은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쳤고, 의를 위하여 목숨을 끊었네. 비록 옛날의 양장(良將)이라한들 이에 더할 수 있겠는가? 애석하도다! 조정이 사람을 쓰는 것에서 그 마땅함을 모르고, 공으로 하여금 재주를 다 펼치지 못하게 하였구나. 통제사를 바꾸지 않았던들 어찌 한산도의 패몰을 초래하여 호남지방이 적의 소굴로 되었겠는가. 그 애석함을 한탄할 뿐이다!’라고 적었다.
백의종군로를 애써 순례함으로써 순례자는 충무공이 겪은 육체적 고통을 조금이나마 체험하고, 공이 느낀 정신적 고통을 헤아려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도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로 옛길은 대부분 신작로, 지방도, 국도, 고속도로가 되어버렸다. 순례자는 차도 옆의 인도나 차도의 갓길을 걸어야 한다. 충무공의 고통을 묵상하며 걷는 순례의 길이므로 관광목적의 둘레길이나 올레길과 같이 아름답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차도 옆에 있는 시끄럽고 위험한 길은 순례자들을 부를 수 없다. 순례자 없는 길은 순례길이 아니다. 아무리 의미 있는 길이라도 걷기에 안전하고 조용해야 한다.
경상남도에 속하는 백의종군로는 비교적 큰 도로가 없는 지역에 해당한다. 경남 당국은 수년간의 고증연구와 투자로 백의종군로를 적극 개발하여 공개했다. 전라남도도 2012년 초에 백의종군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최소한의 예산으로 걷기 좋은 길을 추천했다. 경기도는 삼남길이라 하여 수원에서 오산 구간의 걷기 좋은 길을 발견하거나 개발하여 2012년 10월에 개통했다. 충무공이 실제로 걸은 길과 약간 다를 수 있지만 충분히 대체로의 역할을 할 수 있다. 하루 속히 충천남도와 전라북도가 백의종군로 개발이나 대체로 발견에 참여하기를 바란다. 경기도와 서울도 백의종군로의 의미를 주민들에게 널리 알리는 사업을 전개할 것을 제언한다. 당국은 옛길이 없어지고 자동차 도로로 된 구간에 대해서는 대체로를 발견해서 순례자들에게 안내해야 한다.
국토 순례는 학업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좋은 영향을 준다. 순례한 학생들은 전 과목에서 성적이 향상되고 생활 태도가 건전하게 변한다. 아울러 국토의 아름다움을 느끼면서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자라고, 타 지역의 문화를 접하면서 지역감정도 해소된다. 이러한 효과를 인식하여 19세기 유럽에서는 젊은이들에게 국토순례를 시켰다. 시골길을 걷게 하고 시골의 학교 교실에서 재웠다. 이것이 전 세계로 퍼진 유스호스텔 운동의 시작이다. 백의종군로에 가까운 육해공군부대가 순례자들에게 군부대 체험을 겸하는 1박의 잠자리를 제공하는 것도 좋은 방안이다.
젊은이들이 교실에서 흥미 잃은 과목시간에 잠자는 것으로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게 해서는 안 된다. 국가의 예산으로 급여를 주는 값비싼 교사가 듣지도 않는 학생을 앞에 두고 강의하는 예산낭비를 방지해야 한다. 학업이 힘든 학생이 경험 많은 멘토와 함께 국토를 걷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모습이다. 백의종군로 순례는 은퇴한 어른들이 소중한 재능을 후손들에게 기부하는 기회이다. 이렇게 좋은 의미를 가진 백의종군로를 해군이 앞장서서 행군하고,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기로 결정한 것은 해군의 위상 향상은 물론이요 국가발전에 크게 이바지하는 역사적 사건임에 틀림없다. ⓒ임진년12월28일 임용철
첫댓글 대학생문화재지킴이 담당자 서지원입니다.
대학생문화재 지킴이 봉사캠프(7/29~8/2)기간 동안 백의종군로를 걷기가 예정되어있습니다.
관련 자료집에 이 글의 일부를 실어도 될런지요~
학생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것 같네요^^*
좋습니다. 보람된 캠프 활동을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