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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엘리후의 등장, 하나님과의 만남을 준비시키는 지혜자
(욥기 32장 1절 ~ 37장 24절)
긴 논쟁의 끝에서 세 친구가 더 이상 욥에게 해 줄 말을 알지 못할 때에, 젊은 지혜자 엘리후가 홀연히 등장합
니다. 성경에서 이 엘리후에 관하여는 아무런 사전정보를 제공해 주지 않고 있습니다. 시작도 끝도 없이 어느
한 순간에 갑자기 등장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엘리후가 욥과 세 친구들의 논쟁의 처음과 끝을 묵
묵히 다 듣고, 또 지켜보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성경에서 시작도 끝도 없이 홀연히 등장한 사람은 엘리후 외에도 창세기에 한 명 더 나옵니다.(창 14장) 그는
곧 제사장 멜기세덱입니다. 조카 롯을 구출하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이 어느 순간 홀연히 나타난 제사장 멜기세
덱에게 탈취물의 십분의 일을 바칩니다. 이 멜기세덱의 기원은 아무 곳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이 멜기세덱에
관하여 유일하게 계시해 준 성경은 바로 신약의 히브리서입니다.(히브리서 7장) 히브리서에서 멜기세덱을 모
세(즉, 율법)보다 먼저 있는 왕이요 제사장으로서, 영원한 왕과 제사장으로 오시는 그리스도의 탁월한 모형으
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엘리후 등장 역시 멜기세덱의 등장과 아주 유사합니다. 엘리후는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사단
의 참소로 고통을 격고 있는 인생들에게 이해시키고 전달하는 선지자의 상징으로 등장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사명을 가진 자가 바로 선지자입니다. 그런 사명을 가진 자가 선지자이지만, 그 자신
도 역시 같은 사람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는 인생의 지혜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
들은 주로 젊은 나이에 부르심을 받고 하늘의 지혜를 받습니다. 엘리후의 지혜가 그 (엘리후) 보다 훨씬 연장자
인 욥과 세 친구들의 지혜보다 승(勝)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친히 주신 하늘의 지혜였기 때문입니
다. 그러므로 겸손한 지혜자 엘리후는 욥에게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말이 내 마음의 정직함을 나타내고, 내 입술이 아는 바를 진실히 말하리라. 하나님의 신이 나를 지
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 네가 할 수 있거든 일어서서 내게 대답하고 내 앞에 진
술하라. 나와 네가 하나님 앞에서 일반이니, 나도 흙으로 지으심을 입었은즉 내 위엄으로는 너를 두렵
게 하지 못하고 내 권세로는 너를 누르지 못하느니라.” (욥 33장 3절~7절)
이제부터 엘리후가 욥에게 권고해준 내용을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엘리후의 권고는 욥기서를 묵상하는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의 비밀하신 뜻을 깨닫게 해주는 열쇠가 되어 줍니다.
먼저, 엘리후가 생각하기에 욥이 자신을 하나님보다 더 의롭게 여기는 것 같았습니다.(욥 32장 2절) 엘리후는
그것이 몹시 화가 났습니다. 세 친구는 그런 욥을 깨우치기는커녕, 자신들도 잘 알지 못하는 말로서 욥을 정죄
할 뿐이었습니다. 결국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입을 열기 시작합니다. (욥 32장 18절~22절)
<엘리후의 지혜 1 : 욥기 33장>
욥기 33장에서 엘리후는 이르기를, 욥은 자신의 원망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침묵하신다고 불평하지만, 하나
님께서는 이미 인생으로 진리를 깨닫게 하시기 위하여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분의 뜻을 적극적으로 나타내 보
이신다고 증거합니다.
엘리후의 말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의 뜻을 인생에게 적극적으로 나타내 보이심으로써 인생이 죄
와 교만에서 구원받기를 원하고 계시지만 어리석은 인생은 그런 하나님의 뜻을 잘 깨닫지 못한다고 합니다.(욥
33장 13절~18절)
뿐만 아니라 엘리후가 이르기를, 하나님께서는 인생으로 자신의 연약함과 죄성을 깨닫고 참된 진리를 알게 하
기 위하여 “죽을만큼 위험한 질병이나 혹은 그에 상응하는 고통”을 허락하신다고 주장합니다.
만일 이 때 다행이도 천사의 도움으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된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위하여 대속물을 준비하
사 그 죄와 교만으로 멸망치 않게 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욥 33장 19절~28절)
여기서 대속물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해 주는 핵심어가 됩니다. 엘리후는 구약의 시대, 뛰어난 의를 가진
욥이라 하더라도 장차 일어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사건이 없으면 구원받지 못할 것을 강하게 예표하는 “대속
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던 것입니다. (욥 33장 24절)
33장의 결론으로,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들 (즉 여러가지 적극적인 방법으로 그 분의 뜻을 인생에게 알려 주시
고, 혹 깨닫지 못하면 죽음에까지 이를만한 고통을 허락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더듬어 찾게 해 주시는 일들) 을
인생에게 여러 번 행하시는 이유는, 그 영혼을 구덩이에서 끌어 올리시고 생명의 빛으로 그에게 비취려 하심이
라고 결론 짖습니다. (욥 33장 29, 30절)
다시 말하면, 참된 진리를 찾아 나오게 하기 위하여, 어두운 무지에서 밝은 진리로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리 행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엘리후의 지혜 2 : 욥기 34장>
34장에서 엘리후는 욥에게, 욥이 자신의 고난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어떻게 판단하고 생각하든지간에 여전
히 하나님께서는 변함없이 공의로우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역설합니다.
세상을 능히 판단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므로,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고난에 대하여
이렇게 혹은 저렇게 갚으셔야 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난을 인해서 욥이 하나님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욥을 판단하시도록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한 마디로 욥에게 묻
습니다.
“누가 하나님께 아뢰기를 ‘내가 징계를 받았사오니, 다시는 범 죄치 아니하겠나이다. 나의 깨닫지 못
하는 것을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악을 행하였으면 다시는 아니하겠나이다.’ 한 자가 있느냐?” (욥 34
장 31, 32절)
다시 말해서, 욥이 당한 문제의 핵심이라는 것이, 고난을 당하는 욥이 의로우냐 의롭지 않으냐, 혹은 죄가 있느
냐 없느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뒤집어 말해서 욥에게 고난을 허락하신 하나님이 옳으시냐 그르시냐를 따지
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참으로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욥을 죄인이라고 말씀하실 때에 그것을 순순히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항복할 수 있느냐의 물음에 답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엘리후의 지혜 3 : 욥기서 35장>
35장에서 엘리후는 욥이 가진 의가 아무리 대단하다 하여도 그것은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대단한 것일 뿐이
요, 하나님의 안목으로 볼 때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욥의 의가 아무리 높다한들, 그
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그 어떤 작은 감동도 주지 못합니다.
또한 만약 욥에게 죄가 있다하여도 하나님께서는 그 죄를 인해서 손해 보시거나 마음에 두실 필요가 전혀 없다
고 말합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는 욥이 의롭든지 악하든지 욥이 자랑하는 자기의 의(自己義) 혹은 자아
(自我)를 전혀 수(數)에 치실 이유와 필요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엘리후는 욥에게, 인생(人生)에는 원래 악인의 흉포와 학대를 인하여 부르짖으며 괴로워해야 할 일들이
많이 일어나지만, 정작 그 속에서 하나님을 찾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아니 한 사람도 없다고 충고하고 있
습니다. 35장 9,10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학대가 많으므로 부르짖으며 세력 있는 자의 팔에 눌리므로 도움을 부르짖으나, 나를 지으신
하나님 곧 사람으로 밤중에 노래하게 하시며, 우리를 교육하시기를 땅의 짐승에게 하심보다 더하게 하
시며, 우리에게 지혜 주시기를 공중의 새에게 주심보다 더하시는 이가 어디 계신가? 말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구나!”
어느 누군가가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 나름대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기도할지는 몰라도, 그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고난이 빨리 지나기만을 바라며 헛되이 부르짖고 있을 뿐이라는 의미입니다.
부르짖는 자, 억울해 하는 자, 심지어 기도하는 자, 혹은 적어도 겉으로는 하나님을 찾는 것 같이 보이는 자가
많아 보여도 정작 참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어디 계시는지, 무엇을 원하시는 지를 간절히 구하고 찾는
자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같은 장 12,1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악인의 교만을 인하여 거기서 부르짖으나 응락하는 자가 없음은, 헛된 부르짖음은 하나님이
결코 듣지 아니하시며 전능자가 돌아보지 아니하심이라.”
결국 사람이 극심한 고통을 원망하고 통탄스럽게 여기며, 심지어 마음에 분노를 품고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모
든 헛된 부르짖음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이유는 없는 것이라는 뜻 입니다.
<엘리후의 지혜 4 : 욥기서 36장, 37장>
엘리후의 마지막 권고가 나오는 36장, 37장은 엘리후 권고의 최고 절정에 다다르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
서 엘리후는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참된 의인은 과연 어떤 종류의 사람이냐고... 이 부분을 이해
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말씀을 주목하고 묵상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 눈을 의인에게서 돌이키지 않으시고, 그를 왕과 함께 영원히 위에 앉히사 존귀하게 하시며, 혹시
그들(의인)이 누설(縲絏-죄인을 묶는 끈)에 매이거나 환난의 줄에 얽혔으면 그들의 소행과 허물을 보
이사 그 교만한 행위를 알게 하시고 그들의 귀를 열어 교훈을 듣게 하시며, 명하여 죄악에서 돌아오게
하시나니, 만일 그들이 청종하여 섬기면 형통히 날을 보내며 즐거이 해를 지낼 것이요, 만일 그들이
청종치 아니하면 칼에 망하며 지식 없이 죽으리라." (욥 36장 7절~12절)
엘리후는 아무리 의인이라 하더라도, 그래서 자신은 완전히 결백하다 하더라도, 환란의 때를 만나게 되었을
때, 억울한 누명과 죄인의 사슬이 자신을 두르고 있다면 그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겸손히 응할
줄 알아야 비로소 참된 의인으로서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아니,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참된
의인이라는 칭호는 하나님께 사람의 능력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
는" 주권적인 은혜 앞에서 완전히 겸손하게 되었을 때 받을 수 있는 것이라는 메시지입니다.
의인이 그냥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환란의 때에 즉 억울함을 받는 그 순간에 겸손히 하나님의 위대하신 주
권을 인정하고 자신을 낮출 때, 비로소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의인으로 칭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18절 말씀을 보면,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
요?”라는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의인이라도 의인으로서 통과해야할 대가를 치르게 될 때야 비로소 진정한 의
인이 될 수 있더라는 말씀입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은 억울한 일을 당할 때, 그 억울함을 잘 넘길 줄 압니다. 그리고 그 억울함 속에서 오히려 깊
은 교훈과 진리를 캐어냅니다. 의인은 인생의 쓴 물을 마셔봄으로 인하여, 억울함의 장막에 내동댕이침을 당하
게 됨으로 인하여 자신의 죄와 죄성을 거리낌 없이 직시할 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자기 의와 자랑에 얽매이는 사람은 억울한 상황을 넘겨낼 줄 모릅니다.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리고
자신에게 둘러진 누명을 벗겨내고야 직성이 풀립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하면 할수록 자신의 교만과 죄성
을 더욱 확연하게 드러내는 것 밖에는 되지 못합니다.
마지막으로 엘리후는 인생들이 도저히 따라 잡을 수 없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지식과 주권적 능력을 37장에서
소개합니다.
첫댓글 참된 의인의 기준을 확실하게 깨닫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의인에게 고난은 하나님의 섭리안에서 참된 진리를 깨닫고 얻게된 소중한 경험임을 알기에 감사의 고백을 하게 됩니다.
지혜자는 쓴 것이 몸에 좋고 단 것이 몸에 나쁘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저도 그런 지혜자이고 싶습니다. 인생의 쓴 경험을 그냥 지나치지 말고 그것을 통해서 값진 진리를 배우기 원합니다. 그래서 인생을 관통하며 지나가시며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엘리후처럼 잘 알게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