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에게는 딸아이가 둘이 있습니다. 큰 아이는 6살로 다솜이, 둘째 딸은 3살로 다빈이입니다. 그래서 저는 한 방 쓰는 여자가 세 명이나 됩니다. 아내까지 말입니다. 이 자리에서는 둘째 딸 다빈이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같이 나누고자 합니다.
1998년도 3월 4일에 다빈이는 출생하였습니다. 태중에 있을 때부터 유난히 발길질을 하던 아이인지라 활달한 줄은 알았지만, 갓 태어난 아이가 이리 잘 웃고 시끄러울(?) 줄이야. 그래서 저는 '떡 두꺼비 같은 딸'이라고 명명(命名)하였습니다.
태어나서 두 달 남짓 될 때 코에서 흐르는 콧물은 단순히 어린 아이로서 거쳐야 할 과정, 내지는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며 병원에만 다녀왔습니다. 그러나 이내 그 새털가슴에서 그르렁거리는 소리는 기관지천식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기관지천식. 속에 가래가 끓고 기침과 해소에 고생한다는 병. 평생을 그렇게 살아갈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 부부는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아내는,
"여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더 내려 놔야 할 것이 있는가 봐. 자식이 저리 아플 때는 부모의 믿음을 점검해 봐야 하는 거 아냐?" 하고 말했지요. 저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부모님 댁에 온 가족들이 모여 앉아 담소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다빈이는 저의 무릎 위에 앉아 있다가 칭얼대기 시작하였습니다. 우유를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내는 곧 우유병에 우유를 가득 담아 입에 넣어주었습니다. 그런데 다빈이는 "으앙" 하고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런가 했더니 코가 말라 붙은 상태에서 우유병을 입에 무니 숨을 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 애처로운 모습을 보니 가슴이 터지는 것 같았습니다. 급기야 저는 달려들어 다빈이의 코를 빨기 시작했습니다. 가족들은 갑자기 일어난 저의 행동에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코를 빨았습니다. 빨고 뱉고 하기를 몇 차례... 다빈이는 힘들어하면서도 숨통이 트이는지 드디어 큰 숨을 내쉬고는 우유를 빨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생활이 계속되었습니다. 어느 날은 집에서 세숫대야를 가져다 놓고 코를 빨고 또 뱉고 저는 저절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습니다.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이 어린 것을 어찌 해야 하나. 그러면서도 정말 제가 하나님께 더 내려 놓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기도하는 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완전한 기독인. 완전한 생활속의 기독교사. 세상과의 절충이 아닌 하나님의 복음을 있는 곳에서 전파하며 사명을 감당하라는 주님의 명령. 양다리 신앙인이 아닌 완전한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기를 주님께서는 원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한사코 거부하였습니다. 대책없는 반항이었지요. 이 정도면 되지 않습니까? 더 이상 뭘 원하십니까? 세상 속에서 30년 넘게 살아온 그렇게 굳어진 삶을 하루 아침에 바꿀 수 있다는 것은 당연히 기적이겠지요. 저를 한사코 끄는 힘은 사단이었을 겁니다.
갈등이 계속되고 있던 5월의 어느 날, 근육병을 앓고 있던 현욱이가 119구급대에 실려 서울대 병원 응급실로 갔다는 연락을 받고 달려갔습니다. 고3을 그런대로 잘 견디고 있다 했는데 급기야 이런 사태가 발생한 것입니다. 저는 병원으로 달려갔고, 의식 없는 현욱이를 붙잡고 울며 기도했습니다.
'주님, 어쩌란 말입니까? 대체......'
그 때도 저는 전심으로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지 못했습니다. 저의 자존심, 알량한 자부심, 교만이 남아 있었던 것이지요. 그 다음 날이었습니다.
학교 동료 선생님들과 회식이 있어 밤 10시쯤 들어갔더니 아내가 옷도 채 입지 않은 다빈이를 안고 이층 계단을 달리듯 내려 오며 "빨리 차, 빨리 차......"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다빈이는 사시나무 떨 듯 떨고 있었고, 눈동자도 이상했습니다. 저는 차를 끄집어 내어 비상등을 켜고 서울역 뒤 아동소화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웬 환자아이들이 그렇게 많은지 등록하고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마음을 졸이며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다빈이의 눈동자가 획 돌아가고 입도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열은 40도가 넘고 이미 눈동자는 없어졌습니다. 몸은 계속 떨고요. 옆에 있던 어떤 아주머니께서 빨리 들어가보라고 소리쳤습니다. 아내와 저는 이성을 잃다시피 응급실로 뛰쳐 들어갔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얘가 이상해요......"
의사 선생님과 세 명의 간호사들은 진료하던 아이를 그대로 둔 채 다빈이에게 달려와 옷을 홀랑 벗기고, 입에 재갈(?)을 물리고 닝겔을 꽂고 응급처치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눈물을 흘릴 여유(?)도 없었습니다. 그저 가슴이 찢어질 듯 했습니다.
다빈 5
- 병
아이가 질병(疾病)에
고통스러워 하는 것은
부모의 삶에
이상(異狀)이 있다는 것이다
어디가 아프다
표현하지 못하고
힘이 없어
울지도 못하고
축 늘어진 모습으로
열은 40도를 넘나들고
경기(驚氣) 일어
헐떡이는 강아지 마냥
사시나무처럼 떨며
자맥질이 거듭될 때
부모(父母)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흰눈자위가
눈동자를 덮고
입술이 비뚤어져
끙끙거릴 때에도
혈관 속 비집어
닝겔 주사 바늘
꽂을 때에
자지러지게 울 때도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사랑한다 아낀다
자신있게 말할 부모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저 침대 머리맡에서
눈물만 흘리는
어미 사슴일 뿐
초라한 모습의 부모임을
깨닫게 된다
무릎 꿇은 심정으로
순복(順服)할 수 밖에 없는
자식의 머리맡에서
얻은 깨우침은
아이가 아플 때에
돌아보아야 할 것은
부모의 믿음이요
사랑이라
잊고 있던
하나님 주신 사랑이라.
다빈이는 그 날 밤 바로 입원을 했습니다. 병실에서 발에 닝겔을 꽂고 겨우 잠든 아이를 앞에 두고 참 많이 울었습니다.
'이건 하나님의 시험이야. 하나님, 어제는 현욱이를, 오늘은 다빈이를...'
저는 퇴근 후 현욱이 병원으로 다빈이가 있는 병원으로 다니며 하나님께 밑바닥까지 내려 놓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완전히 내려 놓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이를 사랑한다던 저. 자신 만만했던 저. 도대체 앓고 있는 아이 앞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의식 없는 제자 앞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저 하나님께 매달리는 일 뿐이었습니다. 저의 교만을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깨우쳐주셨습니다.
'내 말대로 해라. 나는 너를 사랑하는데 너는 왜 나를 사랑하지 않니?'
음성으로 다가오신 하나님. 그저 따르겠습니다. 그저 순종하겠습니다.
현욱이는 열흘만에 의식을 찾고 퇴원을 했습니다. 다빈이도 다 나은 것은 아니지만 호전되어서 퇴원을 시켰습니다. 저는 이제 완전히 하나님께 붙잡힘을 당해 살아가리라 했습니다. 예배에 전심으로 참석하였고 기도도 더 열심히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중에도 다빈이는 전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아내는 하나님의 뜻을 도대체 알 수가 없다고까지 말하곤 하였습니다. 저는 더 내려놓아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하나 점검하고 회개하고 눈물로 결단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방학을 맞이했고 저는 1정 연수를 방학 내내 받게 되었습니다. 아내는 교회 중고등부를 맡아 사역하기 때문에 여름 수련회를 계획하느라 무척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저 또한 고3반사로서 함께 수련회에 참여해야 하는데 어쩔 수 없는 연수여서 불가불 아내가 모든 것을 준비해야만 했습니다. 더욱이 다솜이 다빈이를 데리고 수련회를 치루어야 하고 게다가 다빈이가 이틀이 멀다 하고 병원에 다니는 중이라 무척 힘들어하는 아내를 느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수련회 장소는 충북 옥천 어린이전도협회 수양관이었습니다.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갈 수가 없었습니다. 문석이와 현욱이도 고3이어서 참여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가며 강권적으로 이끌면 가능하겠지만 일단 제가 갈 수가 없었으니까요. 그렇다고 수련회를 취소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교회 중고등부 학생들은 처음으로 단독 수련회를 가는 것이었고, 영적으로도 이제 조금 눈을 뜨는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아내는 계속 진행하기로 하였습니다. 다빈이가 걱정되는 면이 있기도 했지만 약을 많이 받아서 2박 3일간의 수련회를 떠났습니다.
떠나는 날 아침에 비는 부슬부슬 오고 있었고, 연수장에서의 소식은 다빈익 좀 아프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복도에 선 채로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지켜 주소서. 다빈이를... 그리고 우리 중고등부 아이들 영적으로 소생시켜 주소서..."
눈물은 하염없이 흘렀습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났습니다. 전화를 수시로 했지만 통화를 하지 못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차를 몰고 연수장으로 가는 길에 통화를 할 수 있었습니다. 아내는 다급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보, 아무래도 다빈이가... 안되겠어. 지난 번 그 증상(열경기)이 다시 나와서 어젯밤 대전에 있는 병원에 갔다왔어. 서울 큰 병원으로 당장 올라가라는 데... 뭐하냐구... 야단치더라구...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다고 말야. 그러니까 집에 가서 일단 의료보험증을 가지고 당신이 차를 가지고 내려 와야 되겠어 "
아내의 눈물이 보이는 듯 했습니다. 저는 알았다고 했고 연수담당자에게 이야기를 하고 차를 몰고 집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가 아침 9시가 좀 넘은 듯 싶습니다. 가슴은 미어질 듯 했고, 결국 이렇게 되는가 그럼 수련회 간 아이들은 어찌하나. 어젯밤 그렇게 뜨거웠다는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에 울리는 전화 벨 소리. 아내였습니다.
"여보 올 필요 없어. 선생님들하고 함께 기도했는데 이건 아이들의 수련회를 방해하기 위한 마귀의 공격이라고 깨달았어. 정말 우리 아이들이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만나는 밤이 오늘이라고 기대하는데, 다빈이를 통해서 그 계획을 무산시키려는 마귀의 계략이라구... 여보, 그러니까 그냥 기도하며 행사 그대로 진행해야겠어. 어떻게 생각해..."
'그럼, 다빈이는......' 생각할 때
"여보, 설령 다빈이가 잘못 된다 하더라도 난 이 중고등부 아이들을 포기할 수가 없어. 그게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러면서 흐느껴 우는 것이었습니다. 어느덧 저의 눈에도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 내렸습니다. 결국 우리 다빈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수련회를 강행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말했습니다.
"당신...... 믿음대로 해"
세상에 자식을 내맡기고 수련회를 해야 하는 엄마. 그것을 허락하는 아빠. 마치 하나님의 시험에 의해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했던 아브라함의 모습처럼 다빈이의 아빠와 엄마는 그런 모습으로 다빈이를 드리려 했습니다. 나중에 다빈이가 컸을 때 무엇이라고 할는지요.
저는 아내의 말대로 따르기로 했습니다. 의료보험증도 필요 없고 내려올 필요도 없다고 했으니 어쩌면 좋을까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때 근육병을 가지고 있는 문석이와 현욱이가 떠올랐습니다. 원래 함께 수련회에 참여할 예정이었으나 고3이고 그보다 제가 가지 못해서 이 아이들도 함께 하지 못했었습니다. 저는 먼저 현욱이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준비하고 있으라 하고 다시 문석이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동생 인선이도 있었습니다. 차를 돌려 현욱이를 태우고 문석이와 인선이도 태우고 수련회 장소로 달렸습니다. 결국은 하나님께서 이런 모양으로 수련회에 참석하도록 하시는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가는 길은 험했습니다. 장마 때인지라 엄청난 폭우가 쏟아지고 고속도로 앞 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빈이도 염려스러웠고, 또 이렇게 수련회에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다빈이를 찾았더니 방에 누워 있었습니다. 생각보다는 덜한 듯 싶었으나 열은 매우 높았습니다. 다빈이는 저를 보더니 환한 웃음을 띠었고 그를 본 저는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다빈이를 붙잡고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집회에 아이들과 함께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어쨌든 아이들은 문석이 현욱이 인선이가 와서 20명이 채워졌고(그것이 예상인원 목표였다 합니다) 둘째 날 밤의 집회는 매우 뜨거웠습니다. 새벽 3시쯤 저는 연수에 참여해야 했기 때문에 이 세 명을 다시 태우고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아침 연수원으로 나가며 아내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다빈이 안부를 물었더니 괜찮다고 합니다. 중고등부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은혜를 받았다고 하구요.
감사하신 하나님, 결국은 이토록 축복하시는군요. 감사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다빈이는 수련회 이후에도 계속 아팠습니다. 2, 3일이 멀다하고 병원을 찾았으며 그때마다 우리 부부는 더욱 기도에 힘썼습니다. 수련회 이전의 불안했던 마음도 없어졌습니다. 이미 다빈이를 하나님께 바쳤던 수련회인지라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집에는 에블라이저라든가 등을 치는 기구라든가 병원에서 천식 환자에게 사용하는 기구들이 즐비했습니다. 그러면서 여름은 지나고 있었습니다.
다빈 12
-감사하며
그릉그릉 큭큭 그릉그릉 큭큭
하루에도 몇 번씩 거듭되는
다빈이의 가슴앓이 목기침
그를 보는 내 가슴 불처럼 일렁이고
눈물 방울 맺히는데
천연덕스런 다빈이는
콧물과 가래침이 범벅된 얼굴로
'씩' 개구지게 웃으며 '아빠'를 부른다
자식을 위해 부모는 무엇을 해야 하나
두 손 모아 기도할 때마다
하염없는 눈물 흐르는 것은
주님 향한 원망이 아니라
이제
감사인 것을
기도하게 하시니 얼마나 감사한지
쉬지 않고 기도하게 하시니
얼마나 감사한지
오늘도 다빈이의 울음 섞인 토악질
귀에 쟁쟁 가슴에 두근두근하지만
우리 부부 머리 숙여
감사 기도 드린다네
쉬지 않고 드린다네.
장모님께서 금식기도원에 들어가신다고 합니다. 목사님이 기도원에 가신다는게 뭐 그리 특이한 일인가마는 40일 작정 금식기도원에 가신다고 합니다. 저는 대뜸 40일 금식기도면 40일간이나 굶는다는 것 아니가 하는 생각이 들어, 아내에게 119 준비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반 농담으로 말했지만, 참 대단하신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참 대단하신 하나님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결심을 하게 하시는지. 장모님이 40일을 마치시고 돌아오신 날, 처가에 갔습니다. 앉아 계시던 장모님을 본 순간 저는 아무 말도 없이 그분을 끌어안았습니다. 어머님도 그리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사위 기도를 하는데 어찌 그리 눈물이 나던지 몰랐어..."
"저두요, 어머니..."
그렇게 한동안을 있었습니다.
다음 날, 어머니께서 가족들을 한 사람씩 안수 기도를 해 주셨습니다. 저부터 다빈이까지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틀이 또 지났습니다.
아내는 다빈이를 데리고 병원엘 갔습니다. 다빈이에 익숙한 의사 선생님께서 진찰을 하시던 중, 깜짝 놀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아니, 이게 웬 일입니까? 아이의 가슴에 가래가 하나도 없어요. 어떻게 이런 일이..."
아내도 놀라서 정말이냐구 재차 물어봤지만 그렇다는 대답이었습니다.
"이건 기적입니다. 일부분 없어진 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싹 사라졌어요..."
결국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자식을 내놓으면서까지 하나님을 쫓으려 했던 아내. 40일 금식기도로 순종했던 어머니. 그리고 다른 많은 분들의 정성.
다빈이는 건강해졌습니다. 열도 내렸고, 정상 아이들처럼 그렇게 지금껏 잘 지내고 있습니다. 아니 그 아이들보다 더 건강하고 더 활발하게 '떡두꺼비 같은 딸'의 면모를 지키며 세 살을 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이 놀라운 기적 그리고 인간이 할 수 없는 작품. 문석이와 현욱이 그리고 다빈이를 통해 또 한 번 역사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