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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0장. 주 안에 있는 나에게
시편 119:54
370장 찬송은 미국 펜실베니아주 필라델피아 출신의 교사인 엘리자 에드먼드 히윗(E.E.Hewitt, 1851~1920)여사가 1898년에 가사를 만들었습니다. 히윗 여사는 학교에서 불량 청소년을 지도하다가 학생이 휘두른 흉기에 질려 오랜 동안 병상에서 지내야만 했습니다. 그녀는 원수를 은혜로 갚아야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마음속에는 분노와 원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병실을 청소하던 한 흑인 여자가 청소할 때마다 찬송을 흥얼거리자 히윗 여사는 “이봐요 청소부 주제에 뭐가 그리 좋아 찬양합니까?”며 역정을 내었습니다. 그때 청소부는 “어려운 형편과 처지를 찬송으로 바꿀 수 있는 힘을 주님께서 주셨으니 즐거울 수밖에요!”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전기에 감전된 듯 충격을 받고 이제까지 불평과 증오로 시간을 보낸 자신을 회개하였습니다. 이후부터 그녀의 투병 생활은 기쁨과 찬송의 연속이었습니다. 이제 가해자를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되었고, 건강을 회복한 그녀는 많은 찬송가 작시와 청소년 선도에 일생을 바쳤습니다. 작곡은 미국 펜실베니아 주 던커넌 태생으로 남북전쟁 때 군악대장으로, 전역이후에는 가구점을 운영하며 그레이스 감리교회성가대 지휘자로, 교회음악가로 활동하였는데, 1878년 부인이 사망한 것을 계기로 사업을 정리하고 찬양사역에만 전념하며 100여권에 달하는 복음성가집을 출판한 윌리암 제임스 커크패트릭(W.J.Kirkpatrick, 1838~1921)이 작곡하였습니다. 이제 370장 찬송을 한 절 씩 음미해 보겠습니다.
1절
주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주님만 따라가리
1절,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근심 걱정 무거운 짐을 다 풀었네.
요즈음 계속되는 경제위기로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또한 메르스와 가뭄 등으로 성도들도 극도의 불안상태에서 근심이 많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태복음 6:31~33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작시자인 히윗 여사도 1절에서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만이 나를 건지시는 자이시므로 믿음으로 염려를 극복하리는 것입니다. 역대기하 20:1~2에 여호사밧 왕이 모압과 암몬 사람들에게 침공을 받습니다. 여호사밧은 대적할 힘도 능력도 능력이 없었지만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고 고백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하나님의 군대를 보내어 대신 싸우게 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승리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위기 속에서 우리가 힘써 해야 할 일은 1절 가사처럼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푸는 일입니다.” 나의 가정, 나의 사업, 나의 직장, 나의 자녀, 취업과 결혼 등의 모든 문제를 주님 앞에 기도로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 주님은 우리를 지켜 주실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이사야서 43:2 말씀입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하나님을 바라 볼 때에 이와 같은 삶의 보장이 있게 됩니다.
누가 우리를 사망의 그늘, 죄의 올무, 경제 위기의 늪에서 건져주겠습니까? 오직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인하여 질고를 지고 십자가 지신 주님만이 우리를 건지실 것입니다. 이사야 43:1은 매우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자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주님이라는 말은 ‘큐리어스’라는 말입니다. 이 뜻은 ‘나의 생의 행복, 불행의 전체를 주관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전능자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참된 평안과 안식과 여유의 기쁨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 힘들고 어려운 위기의 상황 속에서도, 내 앞길 멀고 험해도 한 분 예수님을 붙들고 할렐루야 주님을 찬송하면서 믿음으로 나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 되기를 축원합니다.
2절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 되었고
전날의 한숨 변하여 내 노래되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주님만 따라가리
2절, 전날의 두려움과 근심이 내 기도 되었고 내 노래되었네.
고린도교회가 있는 고린도는 상업적으로 번창하여 아주 부유한 도시입니다. 이 도시에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했는데, 바울의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은 사람들은 도시의 부요 앞에 상대적인 좌절감을 안고 살아가던 서민들이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때문에 가정이나 직장으로부터 버림받게 되었습니다. 말할 수 없는 고난과 아픔으로 점철된 성도들이었습니다. 이런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바울은 고린도후서 1:3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바울은 환란 속에서도,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하며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첫째, 우리는 환란을 통해 하나님을 더 가까이서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고후 1:3~4).
하나님의 백성들도 세상에서 고난이나 환란, 질병을 경험합니다. 그것이 죄 때문이든지, 아니면 연단을 목적으로 하든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영적인 시험에 드신 분, 마음이 아파서 괴로워하시는 분, 육체적인 고통이 있는 분, 누구에게 얘기할 수 없는 어려움, 깨어져 가는 여러 관계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러나 그것을 치료하는 하나님의 위로, 그것을 쓰다듬는 하나님의 사랑은 그 환난보다도 많고, 그 고난보다도 더 크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고린도후서 1:3~7의 짧은 본문에 보면 ‘환란’은 4번, ‘고난’은 3번 합해서 7번 나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환란과 고난이란 단어를 압도하는 "위로"라는 단어가 10번이나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고난이 크고 아프고 힘들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위로는 더 크다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실패가 많지만 우리를 회복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승리의 노래는 더 엄청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가 마무리 무겁다고 할지라도 우리를 용서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더 크다 하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고난의 밤에 진정한 찬송을 부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2절).
성도는 고난의 밤중에도 노래합니다. 영혼은 고난 중에 오히려 깨끗해지고 빛나게 되어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 감옥에서 매를 맞고 그 고통가운데 있는 환경 속에서도 찬송할 때에 옥터에 지진이 나서 옥문이 열리고 착고가 풀어지고 간수와 그의 가족이 예수 믿는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저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으세요!”라고 증거하며 다니고 있지만 진정으로 어두운 밤에 주님으로 인해 찬양을 해본 자만이 참된 예수, 참된 복음을 증거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진정성과 순수성은 가시밭에 백합화처럼 고난 중에 더 아름답고 향기롭게 꽃이 핍니다. 고난은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게 만들고 위로를 받게 하고, 그 위로를 생각할 때 찬송하게 하십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8~10에서 ㅇ이렇게 간증합니다.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건지시고 또 건지시는 주님으로 인하여 찬송하리로다.” 깊은 밤과 찬송! 이 얼마나 역설적입니까? 이처럼 어울릴 수 없는 양극단의 조화 속에서 우리는 신앙의 참맛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3절
내 주는 자비하셔서 늘 함께 계시고
내 궁핍함을 아시고 늘 채워주시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주님만 따라가리
3절, 자비하신 주님이 늘 함께 하사 내 궁핍함을 늘 채워주시네.
하나님은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수아 1:5와 9절입니다.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또한 하나님은 범죄하고 도망치는 야곱에게도 창세기 28:15에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떠한 자와 함께 하십니까? 많이 배운 자입니까? 재력이 있는 자입니까? 장래가 촉망되는 사람입니까? 선한 일을 많이 하는 자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말씀의 약속을 믿고 그대로 순종하는가? 아니하는가? 를 보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말씀대로 믿고 순종의 길을 가심으로 “세상 끝날 까지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마 28:20) 여러분의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와 어떻게 함께 하십니까?
첫째, 하나님은 매일의 삶 속에서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높고 높은 보좌에 앉아 계시다가 우리가 어떤 어려움에 처하여 소리를 지르며 간구할 때에만 오셔서 도와주시는 분이 아니라, 양떼들을 돌보는 선한 목자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셔서 이리 같은 맹수로부터 또는 벼랑의 위기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주시며 나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여주십니다(시 23:2).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매일의 삶 속에서 함께 계시면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길을 갈 때에 낮에는 시원한 구름기둥, 밤에는 따스한 불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매일 같이 만나와 생수, 메추라기를 공급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하기를 광야 생활 40동안이나 계속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처음에는 감격하더니, 어느 날부터는 구름기둥과 불기둥, 만나와 메추라기가 자연적으로 임하는 것처럼 착각하고,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려움에 처하여 고통을 받을 때에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만날 때에만 하나님의 임재를 새삼 느끼고는 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무감각함을 우리는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도 그럴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낮에는 태양을, 밤에는 달을, 공기와 물, 때를 따라 비와 땅의 열매, 더 나가서는 건강과 자유를 주십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의식하든 하지 않던, 약속을 믿고 순종하는 자들과 매일 함께 계십니다.
둘째, 하나님은 큰 환난 중에도 함께 하십니다.
작사자 히윗 여사가 불량학생들을 지도하다가 학생으로부터 폭력을 당하고 오랜 기간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학생에 대한 원망과 분노, 내가 이런 선생 직업을 계속해야 하느냐? 는 갈등과 고민으로 하나님께 대한 감사함을 잊어버린 채 살아간 것은 평안 중에도 환난 중에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서는 병실을 청소하는 여인을 통하여 자신의 어리석음을 발견케 해 주시고 진정한 감사와 찬양을 할 수 있는 영적 눈을 열어주셨습니다. 그 이후로 불평과 증오로 가득 찬 나날을 보낸 자신의 모습을 애통해하며 회개의 눈물을 쏟아 놓았으며, 할렐루야! 할렐루야! 주님을 늘 찬송하면서 감사함속에 지낼 때에 자신의 병도 완쾌되어지고 또 놀라운 찬송시도 완성하고, 더 나아가 청소년들의 선도에 자신의 일생을 바칠 수 있는 헌신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들어갈 때는 너무나 두렵고 무섭지만, 그 환난의 밤에 주님의 손길은 더 분명하고 강하게 만날 수 있는 유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궁핍과 환난은 은혜의 지름길로 가는 축복이 되기 때문에 환난 중에도 감사해야 합니다.
4절
내 주와 맺은 언약은 영 불변하시니
그 나라 가기까지는 늘 보호하시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주님만 따라가리
4절, 언약하신 말씀대로 그 나라 가기까지 늘 보호해주시네.
하나님의 사랑이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미리 준비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집트에서 노예로 고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아픔을 하나님은 아시고 해방이라는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예비해 두었습니다. 비록 이집트의 바로가 강하다고 해도, 가나안 땅의 원주민들이 막강한 무기로 기다리고 있어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시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이 골리앗과도 같은 거대한 장애물이기 때문입니다. 정상적인 판단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노예들이 거대한 이집트와 싸워 이길 수 있습니까? 홍해 바다를 어떻게 건널 수가 있습니까? 먹을 양식, 마실 물이 없는 사막에서 어떻게 40년을 200만 명이 버틸 수가 있습니까? 막강한 여리고 성을 어떻게 무너뜨리겠습니까? 인간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능합니다. 이보다 더 큰 것도 할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내일을 예비해 두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오늘 주님에 대한 신앙입니다. 내일에 대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오늘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우리가 염려하는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나안을 40일간 정탐했던 12명이 왜 똑같은 상황을 경험했으면서도 10명은 "우리가 들어가기는 불가능하다고 했습니까?" 그들에게는 예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러 번 설교를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불러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라고 했으며, 하나님의 능력이 바로를 굴복시켰으며 홍해를 갈랐다는 사실을 들었고 또 그들은 실제로 경험했지만, 현실의 거대한 장벽 앞에서는 그만 하나님의 손길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은 열 명의 정탐꾼과는 다르게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민 14:9)고 말할 수 있었을까요? 가나안 원주민들을 쳐부수는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을 보았던 것입니다. 이미 가나안 땅에 와 계시는 하나님을 보았던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믿음이라고 합니다. 히브리서 11:1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못 본다는 것은 곧 삶의 실패를 의미합니다.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놓치고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약속보다 현실이 더 크게 보입니까? 우리의 시선을 현실 너머에 있는 하나님께로 고정시키시기를 원합니다. 베드로가 주님만 바라보고 나아갔을 때에는 물위로 걸어갔지만 넘실거리는 파도를 보았을 때에는 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실패의 근원은 주님을 놓쳤기 때문입니다. 가정과 사업, 직장과 이웃관계의 실패도 주님과의 관계설정이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많은 것들이 필요합니다.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에서 즐기는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것들이 필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있어야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을 가진 자만이 하나님의 선물을 볼 수 있습니다. “영 불변 하시는 하나님께서 그 나라 가기까지 저와 여러분을 늘 보호하심을”(4절) 믿고 “내 앞길 멀고 험해도” 푯대 되시는 예수님만 바라보고 담대하게 나가는 주님의 백성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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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귀한 자료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