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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숭산 수덕사와 수덕여관을 가다
- 매년 사월초파일 (석가탄신일)이 되면 몇 개의 사찰을 찾아가 명찰을 돌아 보고 불교행사와 불교문화의 진수가 무엇인가를 찾아 다녔다. 그러나 올해는 문화체육과 직무로 석가탄신일에 관내 사찰행사(종무행사)에 참여해야 되기 때문에 당일 다른 사찰을 찾아갈 여유가 없을 것 같아 4월 마지막 주일에 오랜 소원인 충남 예산 수덕사를 찾아가기로 아내와 미리 약속을 했다.
- 2003.4.26일 (토요일) 오전에 연희동 집에서 김밥을 싸고 간단히 행장을 꾸려, 카메라를 챙겨서 아내와 같이 집을 나서는데 카메라 셔터가 말을 안듣는다. 조사해보니 전지가 다 달아 작동이 안된다, 약간 당황하였으나 오전 12시에 그냥 집을나와 택시를 타고 홍제천철역으로 왔다. 택시비는 2,000원이다. 홍제천철역내에 카메라점이 있어 전지를 물어보았더니 마침 있어 사넣고 작동을 해보니 잘 작동된다. 일차는 안심이다.
- 고속 Bus 터미널에 내려 영동선 끝에 있는 매표소를 찾아가 온양행 고속버 스표 2장을 사 고속버스에 올랐다. 터미널에서 오후 2시에 출발하다.
동승하는 손님중 앞자리에 처녀가 애완견을 안고 탑승하자 티켓을 받는 안 내원이 고속버스에 애완견과 같이 탈수없다고 말하자 듣는둥 마는둥 끄떡도 없다. 아내가 한마디 거든다. 대중교통 수단에 개는 왠 개!
한국도로공사 서울영업소를 지나 경부고속도로에 들어가니 14:20분이다.
날씨는 화창하고 햇빛은 따사로웠으며 4월달에 몇번 온 비에 의해 하늘이 매우 쾌청하였다. 작년 이맘때는 황사가 몰려 오곤했는데 황사가 없는 날씨 로 여행중에는 자외선을 조심해야 할 것 같다.
〔간판은 세태를 말한다〕
- 무심히 차창에 비치는 간판을 본다. 덕구온천 (자연수분출)/골프전문 백화점 /애견분양센터/늘푸른오스카빌(과천행정타운)/Let.K.T(이동통신)/보해중앙 연구소/호텔SKY/녹십자/달팽이/청호청수기/뇌호흡․․․․․
문득 저 간판들에 세태를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이 시대가 골프가 대중화 로 들어가고 대화가 없는 현실은 사람들이 애완견을 가족으로 여기고 가장 중요한 명제는 건강을 지키는 것이고 최첨단산업은 이동통신이고 누구나 갖 고싶은 집은 전원의 아파트이고 의료산업과 주류산업은 돈을 많이 벌수있으 - 1 -
며 공해가 없는 물을 마시고 자연수에 목욕하여야 장수하며 좋은사람과 분 위기 좋은 호텔에서 저녁먹고 자식은 뇌호흡을 가르켜 천재로 만들고 싶은 것이 이 시대의 모든사람이 바라는 마음이 아닐까?
(나만의 헛된 생각일수도 있다.․․․․․
- 과천을 지난 산야에 수목의 빛은 아직 연한초록이지만 그 기운은 힘차다.
머지않아 저빛이 더욱더 짙어져 짖푸른 녹색으로 변하리라.
안성을 지나자 안성배나무밭의 나뭇잎이 넓게 퍼져 있다. 원래 배나무는 전 지는 속을 비우고 U자로 전지해야 한다. 차는 남으로 내려가고 있는데 그 사이에 업무로 핸드폰이 두 번이나 울렸다. 여행을 가는 몸이 쉽지는 않다. 오늘은 쉬는 토요일, 일단 머릿속을 비우고 눈, 코, 입 등 오감으로 느끼는 데로만 그냥 받아드리자.
〔 대학의 메카 안성과 ������충청도 핫바지 론������〕
- 안성톨케이트를 14:50분에 빠져나오자 사거리 간판에 평택 경문대학, 남서 울, 동원공대등 대학간판만 18개가 보인다. 안성이 어느새 대학의 도시로 변해버렸다. 조금 지나 큰 간판 2개가 마주 보인다.
맛좋은 안성한우/ 무쏘선접탑은 묘한 대조를 이룬다. 무쏘는 현대산업의 총아 레져용 차량이요 한우는 우리농촌의 대표하는 농산물 현대와 전통이 공존하는 안성이다.
- 평택대학교 켐퍼스앞을 지나는데 대학교 환경이 잘 정비되어 있다.
공군사관 생도가 정복을 하고 캠퍼스 정문에서 기다리자 여학생이 뛰어나온 다. 저들은 어떤 사이일까? 연인일까, 남매일까?
- 안성한복판을 지나는 하천은 구불구불한 전형적인 사행천이다. 그 사이에 보 이는 논들은 모내기 하기 좋게 물이 충분하고 경운기로 써래질을하여 모만 심으면 뒬 수 있도록 준비는 완료되었다.
- 고속도로를 지나 지방도로로 접어들어 충정도에 들어서면서 잘 포장된 도로 에 깜짝 놀랐다. 예전 충청도 그 중에도 충남은 도로와 공장, 항만등, 기반 시설이 매우 빈약하여 선거철만되면 충청도 핫바지론이 나오기도 했는데 요 즈음 서해안고속도로가 생긴이후 충청도의 발전상은 하루가 다르다.
아산방조제 인터체인지 잔디밭에는 민들레가 피어 바람에 날리기 직전이다. 인터체인지 설계는 사방이 연결되는 실용적인 설계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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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양 터미널에서 고속 BUS를 내리고 그옆시외버스터미널에서 예산행 BUS 를 갈아나고 온양시내를 빠져 나오는데 충무공탄신을 기념하는 축제가 열리 고 그중 마라톤 대회가 진행되고 있다. 우금치를 지나니 순천향대학이 있다. 예산쪽으로 가서 도고온천에 도착하다 BUS에서 내려 숙박지 토비스 콘도로 가 접수를 하고 여장을 풀다.
〔 나는 컨추리(시골) 출신이다 〕
- 싸가지고 온 김밥으로 점심겸 저녁을 먹고 카메라를 들로 탤런트(talent) 기질이 다분한 마나님을 모델로 사진을 여러컷 찍어주고 주변을 돌아보니 쑥이 많아 둘이서 쑥을 뜯기 시작하였다. 아줌마는 서울 연희동 출신으로 쑥 을 잘 못 뜯으면서 당신은 컨추리(시골) 출신이라 잘하는데 자기는 씨티출 신이라 잘 못한다고 시비를 건다. 한보따리를 뜯어서 숙소로 오다 그 사이 친구가 전화가 와서 도고온천에 있다니까 내려온다고 전화가 왔다. 또 모주 꾼하고 하루를 같이 지내야 하게 생겼다.
- 22:00시쯤 친구 부부가 내려왔다. 소주를 사다가 낮에 뜯어온 쑥을 데쳐서 고추장에 묻혀 술안주로 먹고 있으니 쑥향기가 입안가득 담기고 술 또한 취 하지 않아 3병을 거뜬이 비웠다. 이 친구 주기가 오르자 콘도내 맥주집으로 가자고 해서 부인둘을 방안에 모셔다 놓고 가서 전형적인 살살이인 주인 아 줌마와 맥주를 마시고 그간 밀린예기를 하다 보니 술병은 20개가 넘고 시간 은 새벽4시가 넘어 어 뜨거라하고 방에 돌아와 씻고 골아 떨어지다.
다음날 2003.4.28(일) 늦게 일어나 오전 10시에 행장을 차리고 해물탕에 속풀이를 하고 어제남은 쑥무침과 오이로 아침을 먹고 친구가 뻐기는 승용 차(다이너스티)를 타고 예산을 거쳐 수덕사로 향했다. 오가는 차도 드물고 농촌 풍경과 지역풍경은 한산하기만 하다. 또다른 온천지로 유명한 덕산을 거쳐 덕숭산으로 향하다 가는 도중에 뜨끈이집이란 간판이 보이자 동행하는 친구가 내려올 때 저 집에서 점심을 먹자고 약속하다. 수덕사 입구까지 차 를 몰고 가다가 입주문 옆으로 수덕여관앞에 차를 데다
고암 이응노 화백 고택 수덕여관
- 우리나라에 초가집으로 여관인곳은 아마 이곳 수덕여관 하나뿐일 것이다.
수덕여관은 예산출신으로 세계 화단에서 각광받았던 현대 한국화의 거장 고 암 이응노 화백이 머물렀던 곳이다. 지금은 그의 본부인 박귀희 할머니가 홀 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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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덕사 여승들이 거처하는 환희대 담장과 이웃하여 솔바람 소리에 묻혀 있 는데 □자형의 전형적인 초가집이다. 여관이라기 보다는 예전의 객주집 같은 분위기로 해방후부터 오늘날까지 문짝하나 고치지 않고 옛모습 그대로를 고 집해왔다. 이처럼 수덕여관이 한결같은 모습을 지켜온데는 다름아닌 한 여인 의 망부사 사연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 고암은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하는 양반집의 가풍 때문에 17세에 집을 뛰쳐 나가 상여집 칠쟁이로 전전하다가 해강 김규진 선생의 제자가 되어 그림을 배우고 그후에도 각처를 떠돌며 그림공부에 전념했다.
- 제10회 선전에서 〈소낙비가 쏟아지는날의 대밭〉이란 작품으로 특선한후 본격적인 그림공부를 위해 일본에가서 송림계월(松林桂月)에게 사사 받기도 했다. 해방후 귀향한 고암은 현재의 수뎍여관을 경영하면서 이곳에 잠시 머 무르다 곧바로 상경하여 중앙화단에서 명성을 날리며 미술대학 교수로 재직 하고 서울생활을 시작하면서 본부인을 버리고 이화여대 제자였던 박인경씨 와 새로운 사랑에 빠지게 된다.
- 그리고 1957년 국제무대에서 자신의 예술세계를 펼치기 위해 박인경씨와 함께 파리로 갔다. 이때부터 수덕여관 할머니는 이국땅의 남편을 그리워하며 살아온 것이다.
〔 동백림사건과 강가에 외로운 기러기〕
그 괴로운 시절에 한때 박귀희 할머니는 꿈같은 시절이 있었는데 그것은 이 응노 화백이 북한에 살고있는 양아들을 만난 것이 빌미가 되어 1968년 납 치되여 형무소에 수감된다 이른바 ������동백림사건������이다. 이때 남모르게 옥바 라지한 사람이 박할머니고, 고암은 출옥후 수덕여관의 할머니곁에 잠시 머물 렀다.
- 그때 고암은 수덕여관 뒤뜰 넓적바위에 문자 추상화를 새기고 ‘1969년 이응노 그리다’라는 사인을 남겨 놓았다. 이 그림속에 삼라만상 우주의 모든 이치가 들어 있다고 말했다 하니 당시 희한으로 꿈틀대는 자신의 마음을 그렇게 표현하였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죽기전에 꼭 한번반이라도 다시 볼 수 있을까 하는 희망은 고암이 1992년 귀국전시회를 앞두고 파리에서 눈을 감고 말았다. 장례식에도 참석할수 없는 할머니는 마지막 소원으로 그분의 유골이라도 돌려받아 자신이 죽으면 함께 묻히고 싶어했다. 그러한 심경을 프랑스에 있는 박인경씨와 가족에게 하소연해 보았으니 아미 그쪽 나름대로 기념사업을 벌이고 있어 불가능한 처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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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할머니는 고암선생이 프랑스로 떨날 때 그의 출세길에 지장이 되지 않 기 위해 이혼수속을 허락해 준 것이 그렇게 후회스럽다고 한다. 할머니방에 는 젊은시절 남편과 함께 찍은 사진과 고암이 남긴 갈대꽃이 핀 강가에 홀 로서있는 오리그림이 걸려있다. 고개를 길게 내밀고 어느곳인가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꼭 할머지의 처지처럼 느껴진다. 수덕여관 초가지붕 은 바로 이러한 할머니의 변치않는 마음의 표현인지 모른다. 집을 지은 목재 는 구불구불하여 더욱더 자연미가 돋보이며 누마루 위에는 많은 현판과 친 구들과 어울린사진 신문기사등이 보인다. 현판중 원담스님과 해강 김규진 선 생것이 눈에 뜨인다. 손님이 많아 누마루에 앉지 못하고 문간방에 앉아 더덕 구이 한접시에 칡주 한동이를 나누어 마시며 인생살이는 무엇이고 부부사이 는 어떤것인가,
시대상황이 갈라논 두 부부를 한편생 이렇게 애뜻하게 못잊는 것이 우리 어머니 세대의 정(情)인가 생각돼서 가슴이 답답하고 뻐근해져 옴은 나만 느끼는 감회가 아닐 것이다.
근대선의 중웅지 덕숭산 수덕사 (德崇山 水德寺)
- 충남 예산옆을 수없이 지나면서도 근대선의 중웅지인 덕숭산 수덕사를 비켜 가게됨을 아직 인연이 안다서 인가 보다라고 생각하여 왔다.
올해는 아예 이곳 한곳만 들리리라 작심하고 찾아온 것은 오직 만공선사와 경허 선사의 주석처로 그분들의 흔적을 찾아 냄새라도 맡아보고자 해서이다.
【수덕사의 창건연대】
- 사적기에 의하면 백제말엽 숭제법사(崇濟法師)가 창견했고 제30대 무왕에 이르러 혜현법사(惠顯法師)가 이곳에서 법화경을 강론했다고 전하고 달리는 신라제26대 진평왕21년(599년)에 지명법사가 창건하고 원효대사가 중수 했다고 한다. 이러한 창건의 시비를 따질수는 없으나, 다만 주변의 불교전파 상황과 유적을 참고로 하여 수덕사의 창건연대는 대체로 서산마애불이 조성 되는 시기인 위덕왕대에 이루어진다고 보아야 하는데 그 이유는 태안읍을 기점으로 불교가 남북으로 확산되는 확산폭이 일치하리라는 생각과 함께 대 체로 이 시기가 되면 흥주(지금의 홍성)가 태안반도의 정치 중심지로 자리 를 굳혀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 김정호의 「대동지지」권5 충청도 홍주조에 보면 홍주는 백제시대 주류성 이라고 하였고 「삼국사기」권28 백제본기에 의자왕 20년조에 백제멸망후 부흥운동이 주류성에서 반란이 있었다는 것으로 주류성이 홍주인 것과 뒷날 고려에서 은주라한 것은 ������두루������라는 우리말을 의역한 것이 확실하다.
어쩨튼 주류성이 건설되자 이를 지켜줄만한 비보 사찰의 창건이 필수적고 그 합당한 장소가 바로 수덕사이다. 수덕사 산내 암자인 정혜사 마당에서 아 래를 내려보면 줄기쳐 가로막는 산봉우리 사이로 홍성읍이 마치 손바닥처럼 환히 들여야 보이며 다가선다. 어떻게 저런 수많은 산봉우리를 다 피하여 삽삽리밖의 홍성이 눈아래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지세의 오묘함이요, 수덕사가 홍주읍의 만년 비보사찰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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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사의 가람배치】
덕숭산(德崇山)을 배산(背山)으로 하여 그 남쪽에 위치한 경역(境域)은 자연경사를 따라 여러단의 축대를 이루며 배치된 건물은 대부분 근래에 지은 건물이고 견성암은 비구니 암자로서 잘 알려져 있다. 일주문은 고색창연한맛을 느낄수 없을 뿐만 아니라 너무 크다는 느낌이고 금강문, 사천왕문 또한 그 크기와 색채등은 썸짓할정도로 웅장하다. 그러나 꽉 찬듯한 느낌은 없고 어딘가 약간 허전한 듯한 생각이 든다. 또다시 세월이 한 100여년은 지나야 할 것 같다.
- 산문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2층 누각인 황하정루(黃河精樓)가 나온다. 이 건물은 성보박물관을 겸하고 있는 곳으로 가장먼저 눈에 띄는 것은 현란한 솜씨의 현판이다.
- 2층의 현판은 선지종찰 수덕사 (禪之宗刹 修德寺) 아래에는 덕숭총림(德崇 叢林)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는에 전부다 진성원답(眞性圓潭)스님의 작품이다. 원담스님은 글씨에 호를 매번 원(圓자를 ○(동그라미)로 쓰는 것이 독특하 다. 그래도 현존하는 스님중에는 이름이 난 명필이요, 또한 이 절의 방장스 님이기도 하다.
- 여기서 선지종찰이라 함은 조선조 중기이래 선맥이 끊어진 한국불교를 중흥 시킨 경허선사를 비롯하여 그 제자 만공, 수월(水月), 혜월(慧月)등을 배출 한 사찰임을 천명하는 것이요, 덕숭총림(德崇叢林)이라고 한 것은 수덕사가 강원(講院, 선원(禪院), 율원(律院)의 3개 교육기관을 모두 갖추고 스님을 교육시키는 대찰임을 말하는 것이다.
- 황하정루 아래를 통과하면 경내와 대웅전이 정면으로 보이며 맨앞의 3층 석 탑은 도지정문화재103호이다. 이 탑은 신라문무왕5년에 건립하고 원효대사 가 중수하였다고 전해지나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을 한 고려초기의 석탑이다. 체감율이 정연한 이 석탑은 전체적인 형태에서 안정감이 있다.
- 7층 석탑은 도지정문화재181호이다. 이 탑은 1930년 당시 수덕사 주지였 던 만공선사가 건립한 것으로 기단부없이 바로 탑신과 옥개석으로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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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덕사 쾌불(쾌佛)
- 쾌불이란 야외에서 법회를 할때 걸어놓고 예배를 하는 의식용 불화를 말한 다. 당간 지주는 지주사이에 당간을 설치하고 당간아래에 쾌불이나 깃발, 글 씨등을 걸었던 것이다.
- 문화재관리국 문화연구소에서 1992년에 편찬한 쾌불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수덕사 쾌불은 강희(康熙) 12년 (1673년) 계축(癸丑), 맹하(孟夏) 즉 현 종14년4월 덕숭산 수덕사에서 조성한 것이 분명하다.
- 가로 7.27m, 길이 10.59m의 마본(麻本)인데 현재 보물제1263호로 지 정되었으며 그 내용은 원만보신 노사나불, 독존을 제불보살과 제대아라한 및 제천등 권속들이 전후 좌우에서 옹위협시한 대회도(大會圖)이다.
이 쾌불은 보신(報身)노사나불이 법신(法身)인 비도자나불을 대신하여 석가 불의 화신(化身)으로 나타나 기타 성중(聖衆)들에게 설법하는 영축산의 모 입인 영산회상을 묘사한 것이다.
- 화원질(畫員秩)에는 응열(應悅), 옥준(玉俊), 학전(學全), 석능(釋能)비구등 의 이름이 기록되여 있는데 이들은 이보다 30년전인 인조27년(1644)에도 이미 계룡산 신원사(新元寺)에 같은 쾌불을 그린바 있다.
그래서 두 절의 쾌불양식기법은 동일하다.
○ 영탑사금동산존불(影塔寺金銅三尊佛)
이 불상은 전형적인 고려시대의 것으로 본존과 협시 보살이 함께 조성되여 있으며 보존상태가 비교적 양호하다. 중앙의 본존불은 화엄경에서 설하는 법(진리)을 상징하는 비로자나불로 손모양(手印)은 오른손가락을 왼손으 로 감싼 지권인(指卷印)을 하고 있다. 얼굴은 양감이 풍부하나 불신은 어깨 와 무릎쪽이 비교적 좁은 편이다. 보물제409호로 지정되었다.
【대웅전의 석조기단】
- 이 사찰의 제일 윗단에 놓인 대웅전(大雄殿)의 전면 기단은 장방형의 화강 석을 바른층 쌓기로 6단을 쌓아 10척 높이를 이루었고 후면은 두벌대 쌓기 를 하여 구릉과 연결시키고 있다. 정면에는 계단을 설치하지 않아 양측 면을 통해 대웅전으로 오르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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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건물은 1937년 해체 수리공사때 장혀 하단에 지대원년 무신 사월 십칠 일입주(至大元年戊申四月十七日立柱)라는 명문이 나와 고려시대 건물중에서 정확한 건립연대(고려충렬왕34년:1308년)을 알 수 있는 건물이다.
기단위의 초석은 주로 자연석 초석을 사용하였고 일부 초석에는 주좌가 새 겨져 있는데 이러한 초석들은 고식(古式:옛날) 수법을 보여준다.
【목조건물의 백미 대웅전】
- 수덕사의 대웅전은 목조건축의 백미로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과 더불어 우 리나라 최고의 목조건물로 백제의 명장(名匠) 아버지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 다고 전하며 목조건물이 600년도 넘은 세월을 견딜만큼 견고하고 합리적으 로 지어져 해체공사시 건립연대의 명문이 나와 수리후에 국보제49호로 지 정되었다.
- 조선시대에 와서는 중수기에 의하면 중종23년(1528) 영조28년(1751)과 46년 (1770), 순조3년(1803)에 색채보수, 부연과 풍판의 개수등 4차례 보수한 기록이 있다. 1937년부터 1940년까지 만공선사가 대웅전을 해체 보수할 때 조선시대에 그려진 벽화의 안쪽에 발견된 고려벽화는 주악비천도 (奏樂飛天圖) 공양화도(供養花圖), 수화도(水華圖)등이 있었으며 조선시대에 그려진 오불도(五佛圖)등이 있어 해방후 국민학교 교과서에 실리는등 유 명해졌지만 현재는 유실되고 그 모사본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고 사진자료가 일부 전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 대웅전 건물 내부 대들보에 남아있는 금룡도(金龍圖)는 우아한 색채로 생동감 있는 필치의 걸작으로 고 려 불교미술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 한편 대웅전 건물은 정면3칸, 측면4칸의 특이한 구조를 가진 맛배 지붕인 데 정면에 보면 단순 소박한 주심포의 강한 배흘림기둥이 청순한 조화를 이 루고 평이한 빗살문 장식의 세쪽자리 분합문(分閤門)과도 조촐하게 잘 어울 려 길게 빠진 양족처마 끝과 함께 마치 나래를 편 한 마리의 학두루미를 연상케 한다.
- 측면의 아름다움은 세인의 눈을 괄목하게 한다. 우리나라 목조 건물의 진수 와 그 짜임새 구도의 조형미 등 실로 필설로 다 표현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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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학무식한 필자가 대충 더듬어 보면 9량집의 슬프도록 아름다운 모습(너무 황홀해서 눈물이 난다) 기둥과 들보가 서로 받고 받치면서 삼각형 4분할 5 등분의 정제된 규격미(서양건축의 황금분할은 상대가 안됨)를 자랑하면서 평주와 원주가 적절한 교차를 이루니 무심한 듯 세심하고 소박한 듯 화려하 여 그 세련된 안목은 감히 어느 누가 흉내낼 수 있는가 (서양의 최고 건축 가 가우디가 보면 아마 한동안 그 자리에서 눈을 못떼고 울고 말 것이다)
- 내부에 들어서면 마치 왕대밭에 들어선 듯 청량한 기운이 전내에 감돈다. 들 보와 연목 어느하나 주춤거림 없이 죽죽 벋어나 상쾌하게 서로를 교차하여 감싸 안고 있으며 (잘 조화됨) 일체의 장식과 기교가 배제되여 있는데도 극 도의 장중하고 수려한 세련미는 과연 무기교의 기교가 최상의 기교임을 실 감케 한다.
- 불단에 모신 삼존불은 법당의 크기에 비해 조금 왜소해 보이는데 이는 1938년 무인(戊寅)에 만공대선사가 전북 남원군 산동면 귀정사(歸政寺)에서 이안 (移安)해 온 석가, 약사 미타의 삼계여래이다.
- 대웅전이의 옆 모습을 보고 돌아서면 명부전과의 사이에 꽃밭이 조성되여 있는데 눈에 띄는 팻말이 있다. 수령 300년의 생강나무라고 표시된 아래에 1992년 바로셀로나올림픽 마라톤 몬주익 경기장에 태극기를 날린 황영조 메달리스트, 이의철 마라톤 국제심판, 이미 고인이된 정봉수 국가대표팀 감 독등 3인이 1996년7월15일 기념식수 팻말이 보인다.
고승의 수행정진과 마라톤 경기는 비슷한 점이 있는가, 없는가 ․․․․
【수덕사를 재건한 수각감시】
- 수덕사 재건에 얽힌 설화에 의하면 한때 사찰이 퇴락했는데 흉년이 들어서 재건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을 때 어느날 남루한 복색을한 아리따은 여 인이 사찰의 공양주를 자청해 왔다. 그 여인이 온지 얼마안돼 지방장관 이 이곳에 들렀다가 이 여인에게 반하여 수덕사 재건을 약속했다.
- 재건불사는 드디어 성공적으로 완성되고 장관은 약속대로 그 여인에게 함께 내려갈 것을 말하자 여인은 자기를 따라오라며 숲을 헤치고 산으로 올라갔 다. 그래서 여인을 따라나선 장관은 한발 앞서 걸어가는 여인을 도저히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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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을수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여인의 자취는 사라지고 신발만이 바위 위에 남겨진채 신비한 기운이 주위를 감쌋다.
- 그때야 장관은 그 여인이 불보살의 화신임을 알고 탐색에 눈이 어두웠던 자 신을 부끄럽게 여겨 거사가 되었다고 한다. 이름하여 수덕감시인 이 여인은 관음보살의 화신으로 수덕사를 중창한후 바위속에 들어가 버렸다고 전한다. 후에 이 바위를 관음바위라 불리웠다.
관음바위를 지나면 거대한 관음석불이 고요한 주위의 산세를 다스리고 서있 고 그 위에 만공스님이 주석했던 정혜사(定慧寺)와 만공탑이 모습을 나타난 다. (만공탑을 오르는 길은 계단이 1천20개나 되는 계단으로 덕숭산을 오 를 수 있게 해 놓았다.
【수덕사의 부속암자】
대웅전 뒤로 덕숭산으로 나있는 계단을 따라오르면 좌측에 시원한 냇물이 흐르고 산길은 호젖해진다. 만공스님의 사리탑을 보고자 일념으로 오르면 기암괴석과 원시림이 우거져있다.
- 산 정상의 한봉우리에 정혜사(定慧寺)가 있다. 이곳은 돌담으로 둘려처져 있 고 덕숭산 아래가 환하게 보인다. 지금은 보수공사가 한참 진행중이다. 능인 선원 현판은 만공선사의 서예 스승인 성당 김돈희(惺當 金敦熙 1871~ 1936)의 글씨도 예서체인 ������능인선원������과 만공선사 69세 글씨로 예기있는 행서체의 ‘쌍수루(雙修樓) 현판이 해강 김규진의 정해체(正楷體 ’졍혜사
(定慧寺)’ 현판의 좌우에 걸려있어 이곳이 과연 정해쌍수(定慧雙修)로 능인 (能仁) 즉 불도를 성취할 수 있는 곳이란 생각이 든다.
지금은 해제철로 보수중이라 스님들은 간대가 없다 다시 보수가 안료되고 눈푸른 남자들이 구름같이 모여 견성성불을 위해 뼈를 갂는 수행자로 변할 날을 기대해 본다.
- 만공선사의 최초 주석처는 금선대(金仙臺)다. 지금은 겅허, 만공, 해월 선사 의 영탱을 모시는 영각(影閣)으로 쓰이고 있으며 금선대 행서현판은 성당 김돈희 선생의 작품으로 유난히 글씨가 호방장쾌하다. 뜰아래 만공선사의 좌 선대인 만공대를 둘러보고 사립문을 나서 천연암석이 만들어 놓은 금강문을 지나 만공사리탑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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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최초의 현대식 사리탑 〕
- 만공스님의 사리탑 모형은 구형(球刑)의 원상(圓相)을 팔각기둥셋이 떠받치 고 그 아래 팔각기단을 둘러 만공월면(滿空月面)과 삼보(三寶) 및 팔정도 (八正道)를 상징한 이 현대식 사리탑은 동경미술학교 출신 제자인 박중은 (朴重隱)선사의 설계에 의해서 1947년에 이룩되었다. 이는 우리나라 사리 탑의 신기원을 이룩한 것이요, 당대에 최신 현대감각을 수용한 수덕사 스님 의 선구적 혜안은 대단한 것이다. 더구나 탑명을 한글로 새기다니 대단한 선 각이다 만공탑의 글귀를 하나소개하면 ������사람이 만물가운데 가장 귀하나니 뜻은 나를 찾아 얻는데 있나니라․․․․������
- 만공탑을 돌아 한단을 내려오면 탑아래 절벽을 1924년 만공선사가 설계하 여 자연 암벽을 깎아 조성한 용출관음석불입상(湧出觀音石佛立像)이 나온다. 머리는 이중 보관에 간결한 몸통, 손은 시무인 간결한 법의등 고려불상을 연 상시키는 통돌로 만든 부처이다. 간결한 듯 장중한 자세로 덕숭산 아래를 바 라보는 부처의 얼굴은 잔잔한 미소가 이는 듯하다.
〔 산중의 멋진 초가 : 소림초당(少林草堂) 〕
- 덕숭산 주맥이 암봉을 이루며 힘차게 뭉쳐 우뚝솟은 벼랑바위 위에 날렵한 제비처럼 지어진 초당은 방 두칸, 부엌 한칸의 초가 삼칸이다. 문을 열면 덕 숭산의 맑은기운이 방안으로 몰려들고 달뜨면 달빛이 밤새 비쳐든다는 명당 중의 명당이다. 천야만야 벼랑 아래로 물떨어지는 소리가 시원하다. 이름 하여 삼청(三淸)동이다 물과 바람 달빛이 맑으니 그 가운데 있는 인간(人 間)은 저절로 맑아 질 수 밖에 ․․․․
- 그 겉모습을 말하면 숲속에 싸여있는 초가지붕은 언제나 포근한 어머니 가 슴같은 덕숭산의 젖꼭지같고 구불구불한 연목은 숲속의 나뭇가지와 구분할 수 없으며 수줍은듯한 현판의 크기와 글씨는 단아한 모습이 선녀가 하강한 듯하다. 초당옆 바위는 집을 감싸는 듯하며, 그 곳에 서면 일방무재요 앉으 면 천연의 선원(禪院)이다. 난생처음으로 초가로 이처럼 아름답고 깔끔한 집 은 처음본다. 이 터에 이 초가는 화룡점정(畵龍點睛)이다. 한점이라도 더 보태면 군더더기가 되고 한점이라도 더 빼면 그 형체가 빛을 일어버릴듯한 모습은 정말 초가집의 백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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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덕여관이 수더분한 우리네 어머니같은 여인이라면 소림초당은 하늘에서 하강한 선녀같다. 덕숭산은 목조와 초가의 심미안을 우리에게 유감없이 보여 준다. 덧붙치면 조선후기의 대감식안이었던 육교 이조묵(六橋 李祖黙 1792~ 1840)이 공민왕금(恭愍王琴)이라는 금명(琴銘)을 새겨놓고 고금(古琴)을 타며 풍류를 즐겼을 만공선사의 모습을 상상하니 달마대사와는 사뭇 대조적 인 느낌이 듣다고 말하였다.
- 다시 경내로 돌아오니 이상한 형상이 눈에 뜨인다. 각전각마다 목거북이 벽 에 붙어서 기어올라가는 형상이 수십게가 보인다.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전 각의 문을 열어놓고 거북의 형상을 돌려놓아 문이 닫치지 않도록 하는 장치 더라, 이것이 눈에 거슬린다 정말 이렇게 눈에 확 띄지않는 장치를 만들수도 있는데 목조건물의 진수가 있는 수덕사에서 선조 목공에 대한 실례가 아닐까
【비구니 거처 환희대(歡喜臺)와 선원 견성암(見性庵)】
- 견성암은 일찍이 비구니 스님을 교육시키기 위해서 만든 암자이고 환희대는 ������청춘을 불사르고������로 유명한 비구니 스님인 김일엽 스님이 계시던 곳이다. 200평이 넘은 규모와 깔끔한 전각 그리고 주변에는 꽃나무가 수도없이 화 단을 이루고 있다. 비구니 스님도 여자라서 꽃을 좋아하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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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선의 중웅지 덕숭총림(德崇叢林)
- 덕숭산 수덕사 덕숭총림은 조선중기이후 법맥이 흐려질 때 그 끈을 잇기 위 해 대선사들이 온몸으로 부딪쳐 나갔다. 일제의 강점기에 조선불교를 뿌리채 뽑아 버리려는 조성총독부에 맞서 속으로 옹골찬 법맥을 재건하고자 많은 후학을 배출하고 특히 비구니 교육에 정성을 다 하였다.
- 대선승 경허는 그이 문하에 근대 한국불교선문(禪門)을 빛낸 만공, 혜월 (慧月) 수월(水月)등이 있다.
- 경허의 제자 만공은 그의 문하에 보월, 용흠, 고봉, 금봉, 서경, 해암, 전강, 금호, 춘성, 벽초, 원담등의 비구승과 법회, 만성, 일엽등 당대 뛰어난 비구 니 스님들을 배출하였다.
【덕숭총림의 대선사들】
○ 경허성우(鏡虛惺牛 : 1849~1912)
- 경허성우 선사는 조선조 말기 1849년 전주 자동리에서 출생하였으며 속명 은 동욱(東旭) 법명은 성우 법호는 겅허다. 본관과 성은 여산송씨부친 송두 옥과 모친 밀양박씨의 차남으로 태어나 9세에 경기도 과천 청계사로 출가하 여 계허 스님의 제자가 되어 절에서 사서삼경을 배우고 기초적인 불교 교리 를 익혔다. 이후 당시 불교계의 태두인 동학사의 만화(萬化) 강백에게 천거 되어 불교강론을 배우니 불교뿐만 아니라, 유교와 노.장(老子. 莊子)등의 유.불.선을 고루 섭렵하여 23세에 스승인 만화 강백의 뒤를이어 동학사 강 백으로 추대되어 후학을 양성하였다.
- 어느날 스승 계허를 만나기 위해 서울로 가던중 천안지방 어느마을에 전 염병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이제까지 전심전 력한 경전공부가 생노병사를 극복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함을 깨닫고 길을 뒤돌아와 강원을 폐쇄하고 방에 들어앉아 참선에 몰두하게 되었다.
그때의 화두는 영운(嶺雲)선사의 ������나귀일이 끝나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닥 쳐 왔다(馬盧事末去, 馬事致來)였는데 정진중 ������소가 되어도 고삐뚫을 구멍 이 없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라는 한 사미의 질문에 모든 이치를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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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후 천장암(天藏菴)에서 1년간 보임(保任)후 활연대오하며 생사에 걸림이 없게 되었다. 이후 전국에 선원과 선실을 개설하여 불교계에 새로운 선 수행 풍토를 조성 선풍을 일으켰다. 56세에 제자 만공(滿空)에게 전법계를 전한후 비승비속의 생활로 보냈던 스님은 1912년4월25일 함경도 갑산, 옹 이방 도하동에서 입적했다. 세수64세, 법랍은 56세였다.
- 또한 선사는 조선말기에 서구문명 서세동점하여 기계문명을 앞세워 밀려들 어 올 것을 예견하고 일체의 전통적 관행과 속박으로부터 탈피하여 가치관 의 폭을 무한대로 늘려 놓는 것이 그 반대의 문화충격을 감내하여 전통문화 를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이런 확고한 신념이 돈오점수의 맹렬한 수행 과정을 거치게하는 암시적 기행을 일삼았다.
조선말기 외척 세도가인 안동김씨의 실력자들을 감화시켜 그들의 시주로 천 장암을 중수하고 사세를 확장하고 있었으니 연암산 청장암 중수기에 의하면 공조판서 김온손이 종을 시주하고 그조카 참봉 준근은 사찰림 18정보를, 당질 능주목사 도근은 불량답을 시주하였다.
【겅허선사 일화 한 토막】
- 경허가 해인사 조실로 있을대 어느 겨울날 찬바람이 무섭게 눈발이 날리는 저녁 무렵 경허는 눈덮인 산길을 오르다 얼굴을 보자기로 감싼 초라한 행색 의 여인이 눈속에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얼어 죽어가는 여인을 업고 산길을 올라 조실방으로 갔다. 조실방에서 경허의 극진한 보살핌으로 정신이 든 여인은 자기가 좋아서 경허스님이 예뻐해주는 줄로 알고 가지도 않고 숙 식을 같이 했다. 경허는 만공을 불러 자기 허락없이는 방안에 아무도 들어오 지 못하게 하고 공양도 겸상을 차려 문밖에 갖다놓고 가도록 했다.
그렇게 열흘이 될 무렵 더 이상 안되겠다고 조실방문을 두드리며 스승을 불 렀으나 대답이 없어 방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경허는 자신의 한 팔을 여인 에게 팔베개를 시켜주고 자신은 그 여인에게 다리를 걸친체 코를 골면서 잠 을자고 있었다.
- 그때 만공이 그 여인의 잠든 모습을 보는 순간 놀라 비명을 지를뻔했다.
그 여인은 나병환자로 코는 문드러지고 살은 썩어 짓무르며 손가락도 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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져 나가고 없으며 옷은 피고름과 오줌에 절어 있으며 살 썩는 냄새에 코를 들을수 없었다. 만공은 조실방을 도망치듯 물러나와 어떻게 그렇게 할수 있 는가 깊히 생각한후 저녁 공양후 승낙을 얻은후 방에들어가 그 여인을 내보 내도록 간곡히 진언을 드려 경허스님도 동의하여 이튿날 새벽 예불후 만공 이 그 여인을 산 문밖까지 바래다 주었다. 한편 조실경허는 같이 지내는 동 안 그 여인에게 손수 밥을 먹여주고 피고름을 닦아주고 잠자리를 보살피기 를 정성을 다 하였다고 하니 남을 나와 같이 한몸으로 생각하는 대 자비행 을 베푼 것이다.
○ 만공월면(滿公月面 : 1871~1946)
- 만공월면 선사는 1871년 전라북도 태안에서 부친 송신통(宋新通)과 모친 김씨사이에서 태어났다. 1883년 그가 13세 되던해에 김제 금산사에서 불 상을 처음본후 크게 감동하여 공주 동학사로 출가하여 진암(眞巖) 문하에서 행자생활을 하다가 이듬해 경허를 따라 서산 천장사(天藏寺)로 와서 태허 (泰虛)를 은사로 경허를 계사로 사미계를 받고 법명을 월면이라 했다.
- 경허의 법을 이은 만공은 덕숭산에 와서 금선대(金仙臺)를 짓고 수년동안 정진하면서 전국에서 모여든 납자들을 제접(提接)하며, 수덕사, 정혜사, 견 선암을 중창하고 많은 사부대중을 거느리며 선풍을 날렸다.
만공은 일제강점기에 선학원(禪學院)의 설립과 선승들의 경제적 자립을 위 해 선우공제회운동(禪友共濟會運動)에 지도자로 참여했다. 말년에는 덕숭산 정상 가까이에 전월사(轉月舍)라는 초가를 짓고 지내다가 1946년10월20일 입적했다. 그의 나이 75세, 법랍62세였다.
- 또한 만공원면 선사는 스승인 경허스님이 도모하고자 하는 속내를 누구보다 잘 알아서 스승의 가르침에 충실히 계승하여 실천궁행에 전심전력을 기우리 고 스승이 자신을 인가하고 갑산으로 떠나자 장차 만주에서 도모할일에 큰 뜻을 두고 민족정기의 최후 비장처를 수덕사에 주석할 것을 결심하고 을사 조약이 체결되는 1905년 봄 정혜사 밑에 금선대(金仙臺)라는 초가 암자를 지어 살면서 제자를 길러내기 시작하고 인근의 충의자사를 운유로 격동시켜 항일구국의 전열에 서게하여 갈미 김문의 김좌진(金佐鎭 : 1889~ 1930)
장군을 비롯하여 시량의 윤봉길(尹奉吉 : 1908~1932)등 많은 독립지사 의 배출은 우연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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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부근 결성(結城)출신 만해 한용운 (1879~1944) 선사와 손잡고 한국불교가 완전히 일본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이를 획책한 본산주지 회의 석상에서 일본총독 남차랑(南次郞)이 사찰령이니 사법등을 제정하여 조선 승려를 대처(帶妻), 식육(食肉), 음주(飮酒)로 파계시키니 이를 제정한 전총독 사내정의(寺內正毅)는 무간지옥에 떨어질 것이며, 조선불교를 진흥시키려 면 조선불교를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자후를 토하기도 했다.
-그리고 정혜사의 능인선원에서는 수많은 제자를 길려 장차 광복후 일제화 된 대처종단을 몰아내고 비구종단을 세울것에 대비하고 견성암을 짓고 최초 의 비구니 선원을 개설하여 여성활동시대에 대비한 인재양성에 골몰하였으 니 여기서 길러진 인재들이 현재 한국불교의 간성이 되고 있다.
○ 수월(水月) 음관 선사
- 속성은 전씨 (田氏), 법호수월(水月) : 충남 홍성출생, 젊어서는 머슴살 이를 하다가 1884년(고종21년) 서산군 천장사(天藏寺)로 출가하여 성원 (性圓)의 제자가 되었다. 원래 글을 모르는 수월은 배움에 대한 열성이 모자 라 5년여동안 부목(負木)으로 있었다.
- 그러던 어느날 공양을 지어 법당으로 갔는데 마침 천수대지주(天手大悲呪) 를 염불하는 소리를 듣고 이를 암기한뒤 그 염송(念頌)에 몰두하는데, 밥이 타는줄도 모르고 있었다 이를 본 스승이 방을 내주어 정진하게 되었는데 7 일동안 밤낮없이 염송하다가 7일째 되는날 ������잠을 쫓았다������고 하면서 문을 박차고 나왔다.
- 그는 이렇게 하여 천수삼매(天手三昧)를 깨달은후 놀랍게도 글을 몰라 경전 을 읽거나 축원문을 쓰지는 못하지만 어떤 경전에 대한 물음도 막힘이 없고 한번들은 축원자의 이름은 빠뜨리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후에 오대산 상원사의 방한암(漢巖) 스님과 함께 정진하다가 간도 지방으로 건너가서 (경허와 연관이 있음) 화엄사(華嚴寺)를 짓고 8년여를 머물다 입 적하였다. 문자를 모르기 때문에 기록을 남기지 못하였으며 그의 사상을 살 필수는 없으나 천수삼매를 얻은후 평생을 잠을자지 않고 정진한 진정한 도인(道人)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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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진불 혜월 혜명(慧月 慧明 : 1861~1937)
- 동진출가(童眞出家)한 혜월선사는 절집 안팎에서 천진불(天眞佛)로 불렀듯 이 늘 어린아이의 심성을 잃지 않았다.10세를 전후하여 일찍 불문에 귀의하 는 것을 동진출가라고 한다. 동진은 어린아이의 천진한 심성을 일컫는다. 그래서 천진이 곧 부처이고 불성이라는 옛 조사들의 가르침이 나왔다.
혜월은 어쩌다 뭔가 생기더라도 귀천과 친소를 가리지 않고 나누어 주웠다. 모든 고통은 탐욕과 집착에서 비롯된다. 한 순간 욕망을 일으키면 그 욕망에 속박당하게 마련이다. 욕망은 끝을 모른다. 욕망의 늪에는 늘 고통의 씨앗이 자리잡고 있다. 아무것도 지니지 않고 구하는 것이 없다면 욕망은 감히 고개 를 치켜들지 못한다.
- 혜월은 서산 천장암에서 수행할 당시 해미의 한 주막에서 주모아 동거하여 한철을 보낸다. 자신에 대한 시험이요, 믿음에 대한 수행이다. 헤월은 주모 와 헤어지면서 아쉬움을 남기지도 않았으며 상처도 주지 안았다. 그후 여자 로부 터 자유로워질수 있었으며 욕망과 집착의 쇠사슬을 끊은 혜월의 진면 목을 알 수 있는 일화이다.
혜월도 경허의 품에서 지혜의 꽃을 피웠다. 깨달음의 꽃망울은 수심결(修心 訣)을 통해 맺어졌다. 참선과 마음 닦는 법을 가르친 수심결은 고려 보조국 사(普照國師 1158~1210)의 저술인데 제자의 근기를 파악한 스승이 수행 의 방편으로 점지해준 것이다. 경허는 제자를 인가하면서 미진함이 있음을 일러주었다.
������혜월아, 도는 알고 모르는 그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니라.������ 혜월은 갑자기 몽동이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이 들었다. 이어 곧바로 일어나 춤을 추웠 다. 그리고 절을 올렸다. ������그래 그래 좋다.������ 경허도 제자의 춤에 맞장구를 치며 신명을 냈다. 반야의 문고리를 잡은지 12년만의 일이었다.
일체법을 통달해 깨달으면 了知一體法(요지일체법)
자성에도 소유가 없나니 自性無所有(자성무소유)
이와같이 법의 성품을 알면 如是解法性(여시해법성)
곧 비로자나불을 보리라 卽見盧舍那(즉견노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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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2년 늦은봄 혜월이 경허선사에게서 받은 전법게(傳法偈)다.
제자의 성품을 잘 드러내고 있다. 비로자나불을 만날 것 이라는 스승의 예연 대로 혜월은 철저히 무소유와 중생제도의 지팡이로 삼았다.
- ‘용성스님이 있는 곳엔 불경편찬이 있고 만공스님이 있는 곳엔 중창불사 가 있고 혜월스님이 있는곳엔 사전(寺田)개간이 있다‘ 는 말처럼 해월은 나이가 들어서도 일을 손에서 놓칠 않았다. 부산 안양암에서 만년을 보내던 혜월은 솔방울 줍기 위해 늘 하던대로 뒷산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솔방울을 반자루쯤 채울 즈음에 이승과 이별을 감지했다. 그리고 자루를 짊어진 자세 로 일의일발(一衣一鉢)의 삶을 마감했다.
○ 비구니 김일엽 스님
본명 원주(元周) 평안남도 용강 출생 진남포의 삼숭여학교(三崇女學校)와 이화학당(梨花學堂)에서 수학하고 일본에 유학하였다. 1920년에 잡지 신여자(新女子)를 창간하여 여성해방을 부르짖으며 자유연애를 구가하는 한편 ������단장(斷腸)������, 애욕(愛慾)을 피하여������등의 단편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찍이 결혼에 실패하고, 자유연애에 환멸을 느껴 중년에 수덕사(修德寺)에 입산 여승으로서 생애를 마쳤다.
만년에 다시 붓을 들어 자신의 심정을 고백한 수필집 ������청춘을 부사르고������를 간행하고 그후 ������어느 수도인의 회상������,������ 행복과 불행의 갈피에서������ 등의 수필집을 발간하였다.
- 김일엽 스님은 이화학당을 나오고 일본에 유학을 다녀온 신여성이요 여류문 인 이었다. 항간에는 춘원 이광수 선생과 뜨거운 연애를 하였다는 설이 있고 출가전에는 아들이 하나 있는 어머니이었다. 어느날 양장으로 최신패션과 온 갖 멎을 부리고 수덕사에 놀러간 것을 만공스님이 한나절만에 머리를 깎아 주고 비구니로 만들었다고 한다.
만공스님은 법기만 보면 틈을 주지 않고 큰 그릇으로 만들기위해 칼을 휘둘 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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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산의 명물 뜨끈이집】
- 수덕사와 수덕여관을 2시간동안 배관을 하고 두루살펴 일주문에 내려오니 오후2시가 넘었다. 오던길을 다시돌아 덕산으로 와서 갈 때 약속한 해장국 집에 늦은 점심을 먹기위해 들렀다.
- 자리를 정하고 앉아서 음식점을 둘러보니 현판, 동양화 등이 눈에 띄는데 예 사솜씨가 아니다. 객실현판 전각된 작품의 내용을 소개하면 ������하루 선한 일 을 행하면, 복이 바로 나타나지 않으나, 화는 절로 멀어지고, 하루 악한일을 행하면 화는 바로 나타나지 않으나 복은 저절로 멀어진다.
- 음식점안에 산수화 한폭은 멀리 산을 배경으로 초목을 그린 그림인데 이 그 림 또한 그 기법이 흔치 않는 점묘법수법이다(나무의 잎파리 등,산수화 내용 을 작은 점을 찍드시 해서 그리는 것인데 보통 그림보다 공력이 몇배는 더 든다)
화제의 글씨 역시 흔치 않는 수준이다. 작자는 무정(無情)이라는 스님같은데 수덕사가 이곳 덕산의 음식점 그림 수준까지 올려놓은 것인가․․․․
안주인 칠순잔치에 관내 시인이 평한 글 왈 ������뜨끈이집 어언간 사십년 노덕 분은 여기에 인생(人生)을 걸었다. 찾아오는 손님은 모두가 내식구처럼 돌보 고 돈보다 맛으로 봉사하는 인생을 살기로 결샘했다는 글이 계산대 앞에 걸 려있다. 역시 유명한 음식점은 사람이 남는다는 말이 맞는가보다
- 뜨끈이탕이 무엇인가 했던이 해장국이더라, 그런데 이집주인은 정말 프로다 운 면모가 뜨끈이집이란 상호를 상표등록 하였을 뿐만 아니라 예산군 모범 음식점으로 선정된 돌부침 2층집의 음식맛은 그대로 향토적이고 충청도에서 이렇게 맛있는 해장국을 먹기는 난생처음이다.
가격도 저렴해 해장국 4,000원, 곰탕 6,000원, 양곰탕 7,000원 기타 도 가니탕, 우족탕, 도가니수육 등을 팔고 있는데 예산군청 홈페이지에 올 라있다.
- 배불리 점심을 먹고 격양가를 부르며 숙소에 오니 오후5시더라 유명한 온천 지에서 마음먹고 온천욕을 2시간하고 갈치조림에 저녁을 먹으면서 소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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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주 한잔을 걸치니 세상에 부러울것이 없다. 이번 여행을 서서히 마감하고 세벽에 서울로 귀향하다. 여행의 3대원칙인 레져, 문화탐방, 향토먹거리 등 3가지를 만족한 여행이었고 무었보다 근대 한국불교 선맥의 한가지를 더듬 은 듯해 약간은 시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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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수덕여관의 주인 이응로 화백은 프랑스에서 세상을 떠나고
그 집을 지키며 노년을 외롭게 보내는 이응로 화백의 옛 부인 박할머니,
그의 삶이 참으로 애절하게 다가 옵니다.
저도 그리 생각 합니다.
생에 삶이란 환희와 애절함이 쌍곡선인가 봅니다.
지금은 그 수덕여관을 에산군청 에서 매입 보수하여 관리하는데 옛날 조촐하고
소박한 맛은 찿아보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한국불교가 누란의 위기에 처한때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에게 지옥에 떨어질악귀 라고 소리지른 만공은 경허의 법을 이은
제쟈로 경허란 거목은 충청도에 구국의 햇불을 들고 한국불교의 확고한 한국선종의 계승으로 오늘날 불교가 다시 일어날 기반을 마련 수덕사가 한국 선불교의 중흥처가 된것이다.
그리고 수덕사의 최고명당은 소림초당이다. 의심나는 사람은 소림초당 문앞의 바위에서 하루밤을 세워보라,왜 그곳에 이초가가 있으며 이곳이 수덕사 지세 전체에 왜 화룡점정 인가를 알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