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겨울, 국내 최대 규모의 항일 비밀 조직 신민회는 해외 독립군 기지 건설을 계획한다. 노선은 대일(對日) 무장독립투쟁, 그 무대는 옛 고구려 만주벌의 서간도. 국내에서 자행되는 일본의 무자비한 탄압을 피해 해외로 눈을 돌린 전략적 선택이었다.
이후, 신민회 간부 중 한 사람인 이회영은 서간도를 둘러본 뒤 구체적인 망명계획을 세운다. 이항복의 후손인 이회영 집안은 대대손손 정승과 판서를 지낸 조선 최고의 명문가였다. 현 시가 600억(실제로는 2조여원)에 달하는 재사을 처분한 이회영을 비롯한 6형제는 부귀영화 대신 조국의 독립을 위해 압록강을 건너기로 합의한다. 하지만 이국땅에 이방인으로 자리를 잡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당시의 절박한 상황은 이회영의 아내 이은숙의 자필 수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비밀리에 전답과 가옥, 부동산을 방매하는데, 여러 집이 일시에 방매를 하느라 이 얼마나 극난하리요. 한 집안 부동산 가옥을 방매해도 소문이 자자하고 하속의 입을 막을 수 없는데다 (일제의) 조사는 심했다” 이은숙의 수기 <서간도 시종기>
지나 토착민들의 경계와 일본의 감시 속에 1911년 6월, 허름한 옥수수 창고에서 신흥무관학교가 문을 연다. 대외적인 공식 명칭은 ‘신흥강습소’. 일본의 눈을 피하기 위해 무관학교라는 명칭은 사용하지 않았다. 숨죽이고 있던 독립에 대한 열망이 끓어오르는 첫 시발점이었다.
교육과 훈련은 비밀리에 진행됐다. 사람 눈에 띄지 않는 산 속 연병장에서 철저한 군사 교육이 실시됐다.
“넓은 연병장에 김창환 교관의 구령 아래 주로 각개교련과 기초 훈련을 했고, 야외에서는 이 고지, 저 고지에서 가상의 적에게 공격전, 방어전 등 전쟁연습은 실전을 방불케 했다“-신흥무관학교 생도반장, 원병상의 수기
우여곡절 끝에 독립전쟁기지를 건설했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만주의 혹독한 추위와 부족한 식량이 문제였다. 그들에겐 학교생활 자체가 투쟁이었다. 훈련을 책임졌던 교관 김창환의 일화는 당시의 열악한 환경을 짐작케 한다.
“아버님에 관한 얘기 중에, 너무 흉년이 들어서 군량미가 없으니까 동냥을 해서 학생들이 손발톱이 다 빠졌대요. 아버님께서 그것들을 실로 꿰서 칠판에 걸고는, ‘내가 이만큼 해서 너희를 공부 시키니까 열심히 하라’고, ‘우리나라를 위해서 살자’고, ‘다같이 살자’고 하는 거니까…“ -황명수, 신흥무관학교 교관 김창환의 막내 며느리
1919년 5월, 3.1 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일본군 당국과 조선총독부를 충격에 빠뜨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일본군 장교 지청천과 김경천이 만주로 망명한 것이다. 국비로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유학한 이들은 조선인으로서는 밟기 힘든 엘리트 군인의 길을 걷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탄탄대로의 삶을 포기하고 독립운동에 가담할 것을 결심한다. 현역 군인 신분으로 목숨을 건 망명이었다. 일본군 헌병대는 지청천과 김경천에게 5만엔의 현상금을 내건다. 김경천의 수기에서 망명을 결심한 당시의 심경을 엿볼 수 있다.
“내 자신도 15년을 와신상담(臥薪嘗膽)하며 이날을 기다려 왔다”-김경천의 수기 <경천아일록>, 1919년 3월 1일 직후
혈서를 통하여 일제의 개와 말이 되겠다며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사에 입학하여 성실히 근무한 지식인 출신의 박정희와는 달리 생사를 건 탈출 끝에 합류한 두 엘리트 군인으로 인해 신흥무관학교는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독립의 열망에 일본의 최신 군사 교육법까지 더해져 전례 없이 강한 군사전문기관으로 거듭난 것이다. 이후 이들은 독립군 장교와 사병을 양성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독립운동을 활성화하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준다. 또한 많은 한인 청년들이 만주로 모여드는 도화선이 된다. 이 때문에 신흥무관학교는 본교를 길림성 유하현 고산자로 옮기고 두 개의 분교를 두는 등 점점 그 세력을 확장해 나간다.
만주 일대 무장독립군의 세력이 날로 확대돼가자 일제는 독립군 진압을 위해 대규모 정규군을 만주에 출병시키는 계획을 수립한다. 이에 김좌진이 이끌던 독립군 부대, 북로군정서는 당시 신흥무관학교 출신이 대다수 포진돼 있던 서로군정서에 도움을 요청한다. 러시아에서 사들인 체코제 무기를 다량 보유하고 있었지만 무장독립군으로 교육시킬 교관 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북로군정서는 독립군 양성소인 사관연성소를 마련하고 신흥무관학교 출신 교관들을 중심으로 실전과 같은 군사 교육을 실시한다. 그리고 이것이, 1920년 10월 독립군 전투사의 한 획을 그은 청산리 대첩의 기폭제가 되었다.
1914년,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은 백두산 깊은 산속에 정예부대 양성을 위한 특별 군영을 마련했다. 실질적인 항일무장투쟁 준비를 위해 ‘백서농장’ 이라는 독립군 비밀기지를 세운 것이다. 사방 200리의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산속에 위치한 백서농장에서는 신흥무관학교 졸업생 385명이 입영, 대일 무장투쟁이 대비한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 극한 상황에서의 경험은 이후 항일 독립전쟁의 밑거름이 되었다.
신흥무관학교 출신들, 무장 항일투쟁의 선봉에 서다!
1919년 봄, 3.1운동이 일어났다. 민족의 함성은 국경 너머 만주벌까지 전해졌다. 그리고 이듬해인 1920년 12월, 밀양 경찰서에 폭탄이 투척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국내외 무장 항일 투쟁의 열기가 최고조에 이른 시기였다. 조선총독부 파괴와 요인 암살, 일제의 심장부를 강타한 이들은 바로 ‘의열단’이었다. 의열단은 신흥무관학교 출신인 김원봉이 단장으로 추대되어 ‘5파괴 7가살’ 이라는 행동목표 아래 암살과 일제 기관을 직접 타격하여 민중의 힘을 이끌어 내겠다는 명확한 이념과 목표를 가진 독립운동단체였다.
▲ 1920년 10월 청산리 전투 승전 기념 사진
독립군 부대 첫 승전보를 울리다! 봉오동 전투
1920년 6월, 항일 무장 투쟁의 첫 승전보를 타진한 봉오동 전투. 당시 독립군 부대는 대패한 일본군 지휘관인 야스카와 소좌가 기록으로 남길 만큼 상당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다.
"적(독립군)은 상당히 훈련되어 700~800m 거리에서도 사격을 했고 지형을 이용한 방어가 상당하고 전투에 용감히 임함."야스카와 소좌는 독립군이 사격술과 지형지물에 능하고 전투 의지 또한 상당히 강했다고 평가했다.
상해 임시정부에 보고한 전투상황 보고서를 보면 신흥무관학교 학생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사령관 김좌진 사령관 부관 박영희 / 대한제국 육군 부위 출신, 신흥무관학교 교관 역임 연성대장 이범석 / 중국 운남성 육군강무학교 기병과 졸업, 신흥무관학교 교관 역임 종군장교 김훈, 이민화, 백종열, 한권원 / 신흥무관학교 졸업 제1중대장 강화린 / 신흥무관학교 졸업 제4중대장 오상세 / 신흥무관학교 졸업, 교관 역임
대한민국 임시정부 조사기록에 따르면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은 1,200여 명의 전사자와 2,100여 명의 부상자를 냈다.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최전선에서 온 몸으로 전투를 치른 결과였다. 신흥무관학교에서 훈련된 대한제국의 청년들은 청산리 대첩을 승리로 이끈 주역이었다.
이들 신흥무관학교 출신의 항일무장광복군들이 8.15이후에는 남한의 국군으로 편입되었고, 북한에서는 인민군으로 편입되었다. 한국전쟁은 광복군들끼리의 전쟁이라는 점에서도 동족상잔의 비극이였던 것이다.남북한 군대가 6.15민족합의이행을 통하여 실현되야 할 통일한국의 군대로 통합되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조국광복위해 싸우다 이름없이 죽어간 수 많은 항일무장 광복군들의 염원을 실현해야..
나라를 상실한 분노와 울분을 삼키며 조국을 찾겠다던 항일무장광복군들이 갈망했던 나라는 어떠한 나라였을까? 바로 자주국방이 튼튼한 나라! 자주주권의 나라! 백성들이 배 굶지 않는 복지나라! 세계가 존경하는 인류중심 국가! 민족사와 민족정신이 바로 서는 나라였을 것이 아닌가?
그러나, 오늘날 이 나라는 친일분단세력들이 보수우익으로 포장을 하여 식민지를 정당화하고, 독도에 해군을 배치하자는대도 일본의 눈치를 보고, 부자들에게는 세금을 깎아 주면서 국민의 세금으로 아이들에게 밥 먹이자는 것은 의무급식도 딴지를 걸고, 흑자가 창출되어도 부당 해고로 노동자들의 생존을 짓밟고 있다. 이 모두 헌법119조에 의거하여 경제성장에 따른 분배를 실현하지 못한데서 기인한다.복지의 조건으로 조세정의가 실현되야만 한다.
8.15이후 소련과 지나국에 정치.군사.경제적으로 의존해 온 북한 또한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로 자체 개혁을 하지 않고 60년 김일성 일가의 장기군사독재로 인하여 평양시민들만 제외하고 많은 북한의 동포들이 병과 배고픔에 허덕이고 인권유린을 당하고 있다. 만주지역의 조선족은 해체되어 가고 있다. 조국을 찾겠다며 이름없이 싸우다 죽어간 항일무장광복군들의 영령들이 통탄할 일인 것이다. 민족의 미래를 결정짓는 중대한 2012년 대선에서 대한민국 국민이 현명한 판단으로 가장 적합한 인물을 대통령으로 선출해야 하는 이유다.
미.소 합의와 더불어 미.소 대리자 김일성과 이승만의 분단권력이 낳은 한반도의 분단냉전대립을 확실히 종식시키고 한반도와 동아시아가 화해교류협력으로 공동체가 되는 시대을 열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하는 이유다. 독점과 분열주의로 국민과 민족을 고통스럽게 하는 친일분단.우리가남이가 영남독점세력이 자생하도록 숙주가 되는 것이 아니라 민족적 대의와 공동체를 위하여 확실히 궤멸시킬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