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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랫동안 영화를 보지 못했다. 계속되는 시험과 뭐가 쫓기는 듯한 일상과 맘의 여유가 없었던 탓 때문인것 같다. 거의 한달에 3편 이상 보았던 나의 유일한 문화생활인 영화관람을 오늘 드디어 다시 시작했다. 이번 토요일은 다시 쌍화점을 보기로 약속이 되었으니 앞으로 나의 영화관람은 계속 될 것이다.
과속 삼대로 일컬어지는 이 세사람.
2집 한번 말아 먹고 그냥저냥 DJ로 먹고 사는 참 인기없는 연예인, 서른 여섯 남현수와 여섯살 아들을 앞세워 내가 당신 딸이오~라며 들이닥친 스물둘의 미혼모 황정남(황제인).
깔끔한 성격이 보이는 집안 풍경 못잖게 스캔들 기사 한번 없이 여자 관계도 깔끔하게(?) 흔적을 남기지 않는 남현수이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첫 여자관계만은 "딸"이라는 아주 큰 흔적(??)을 남겼다.
다섯살 연상의 옆집 누나와의 첫관계로 태어난 딸이라는 것도 충격인데.. 그 딸 마저도 '과속'으로 여섯살 아들, 손자까지 데리고 나타났으니, 엎친데 덮친격이 따로 없다.
영화의 자막이 올라갈 때 아, 다시 한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기자기 재미난 장면들이 꽤 많았기에 일일히 언급하지 못한다는게 입이 참 근질근질 하다.
내 딸이라면서 밀고 들어온 여자가 사실은 내 딸이 아니라더라는 식의 반전은 아예 생각도 못하게끔, 영화 시작 채 10분도 안되어 유전자 검사를 통해 일찌감치 친딸 맞소이다! 라고 쐐기를 박고 시작한다.
(동물병원에서 실시된 신빙성이 떨어지는 검사라 혹 이것이 나중에 친딸이 아니라더라고 뒤통수를 치려는 장치는 아닐까 살짝 의심도 들었지만)
게다가 이 영화, 굉장히 쿨하다.
당당하게 아버지 집에 밀고 들어오는 정남의 태도도 쿨하고, 미혼모라는 설정 등, 가족애 운운하며 감동 어쩌고 눈물 좀 흘려주세요 하는 씬들을 넣을 법도 하건만, 과하지 않게 적절한 수준으로 마무리 하는 극의 흐름도 참 쿨하다.
단순한 코미디에만 머물지 않고 미혼모라든지 하는 사회적인 메시지까지 전하겠다는 감독의 욕심이 개입했더라면, 이 영화 역시도 이전의 코미디 영화들과 같이 "웃기려다 만" 영화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과속스캔들은 말 그대로 쿨 하다.
특히 엔간한 코미디 영화였다면 진지하게 분위기 잡고 감동의 눈물씬으로 써먹었을 법한 후반의 기자회견 장면 까지도 정말 쿨하게! 제대로 웃겨 주신다.
웃기는 코미디를 표방하며 진행되온 흐름을 억지 눈물 감동 코드로 반전을 꾀하던 것이 이전 코미디 영화들의 '반전'이었다면,
코미디 영화의 그런 관례(?)를 깨고 감동코드로 써먹을 만한 기자회견 장면까지도 초심 그대로 확 깨게 웃겨주시는 그것이야말로 과속스캔들의 반전이라면 반전이고 제대로된 코미디 영화임을 입증하는 씬이 아니었나 싶다.
"엽기적인 그녀" 이미지의 차태현을 내세운 원맨쇼 영화였다면 이렇게 까지 괜찮은 영화가 아니었을지 모른다.
왕과나, 최강칠우의 조신한 아가씨 역할이었던 박보영의 쏘쿨 황정남이나 등장씬마다 웃겨주시는 귀염둥이 황기동,
이 세명의 어우러짐이 자연스러운 웃음을 유발한다.
특히 아역 황기동은. 여느 영화들의 아역과는 달리 연기인 듯 아닌 듯 자연스러움이 가장 큰 매력이다.
너무 연기를 잘해서 오히려 아이의 순수한 매력은 떨어지는 듯한 이전의 아역들에 비해, 황기동은 정말 그냥 아이 같은 솔직한 연기가 돋보인다.
첫대면의 황기동의 하품 역시도 의도된 연출이 아니라고 한다. 차태현의 코멘트를 보자면, 남은 연기하고 있는데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하품하더라는 식으로 황기동의 연기는 연기인 듯 실제인 듯한 자연스러움이 큰 매력이고 그렇기에 어휴 귀여워~ 라는 탄성과 함께 저절로 웃음이 나는 것은 아닌가 싶다.
늘어지지 않은 깔끔한 편집도 가볍고 편안하게 영화를 보는데 한몫 했던 듯 하고, 중간중간 박보영의 노래들은 미녀는 괴로워 김아중의 노래실력을 능가하는 온몸 찌릿찌릿한 감동을 느끼게 한다.
황정남의 노래 실력과 황기동의 숨겨진 피아노 천재성 등이 "어린 나이에" "사고 쳐서" "애 낳은" 미혼부, 미혼모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걷어 치우고 그들을 그런 편견에 가두지 않고 특별한 존재로 업그레이드 시켜 지지를 얻어내려는 장치로 쓰여진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미혼부, 미혼모에 대한, 소위 말하는 그 부정적인 이미지들을 걷어 치우고 이 영화를 따뜻하게 볼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존재 가치를 높여주는(?) 그 특출난 재능 탓만은 아닌 듯 하다.
당신이 만들어준 눈, 코를 하고 나는 여기 서있다고 내가 여기있는데 어쩌라는 거냐는 황정남의 말에 남현수는 나는 원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원하지 않았던 딸과 손자의 침입이었지만, 그들과 함께 맞는 아침에 금세 길들여지고 오히려 예전처럼 혼자 있는 아침이 어색하고 우울했던 것처럼,
그래도 자식이라고, 손자라고, 남들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것에 욱하게 되고 옷차림 후질그레 하다고 왕따 당하는 손자를 보며 욱해서 백화점 싹쓸이 쇼핑을 해가며 이미지 변신 시켜주는 것처럼,
황정남이 노래에 재능이 있어서 황기동이 피아노 천재라서 남현수가 그들을 욕심내고 가까이 두고 싶어했던 것은 분명 아니다.
노래를 잘하든 못하든, 피아노를 잘치든 못치든 그냥 내사람이니까, 함께 있으면 좋은 내사람이니까.
영화에서는 노래 잘하는 황정남이나 피아노 천재 황기동을 신데렐라로 만들지 않는다. 그들은 여전히 평범한 스물둘, 평범한 여섯살일 뿐, 그저 노래를 잘하고 피아노를 잘치는 평범한 딸이자 어머니, 아들이자 손자일 뿐이다.
재능으로 인해 특별해지는 존재가 아닌, 그저 "존재" 자체만으로도 특별한 내 가족, 내 사람, 함께 있어 행복한 "우리"로서의 그들을 바라볼 수 있게 했던 것은 아닌가 싶다.
예능프로에 주연진이 출연한다든지 하는 영화 홍보도 크게 없었지만,
나 역시 입소문을 타고 이 영화를 보게 되었던 것처럼, 극장을 나서는 사람들이 너도 나도 재미있다며 소감을 나누고 즐겁게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던 것처럼 입소문을 통한 흥행 과속은 계속될 듯 하다.
웃기다 말고 중간에 꼭 어거지로 울리려는 코미디 영화에 질린 사람들이라면 그냥 끝까지 웃겨주기만 하는 코미디 영화를 바라던 사람들이라면
꼭 놓치지 않고 보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