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에서 돌아온 지난주말인 7월 21~22일 1박2일로 당진팸투어를 다녀왔다. 20여년전 태안에서 근무할때 당진에 여러번 갔었지만 여행을 목적으로 한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서울역에서 아홉시에 출발한 버스는 행담도 휴게소에서 한번쉬고 두시간만에 송악면에 있는 필경사에 도착했다. 필경사는 소설가 심훈이 상록수란 농촌계몽소설을 쓴곳으로 잘알려져 있다. 그래서 필경사를 소개하려면 먼저 심훈이라는 소설가에 대해 알아보아야 한다.
시인 · 소설가 · 영화인. 서울 노량진 출생. 본명은 대섭(大燮). 본관은 청송(?松). 호는 해풍(海風). 아명으로 삼준 또는 삼보가 있고, 아버지 상정(相珽)의 3남 1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1915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고, 1917년 왕족인 이해영(李海暎)과 혼인하였다. 1919년 3 · 1운동에 가담하여 투옥, 퇴학당하였다. 1920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1921년 항저우(杭州) 치장대학(之江大學)에 입학하였다. 1923년 귀국하여 연극 · 영화 · 소설집필 등에 몰두 하였는데 처음에는 특히 영화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1924년 이해영과 이혼하였고 같은해 동아일보사에 입사하였다. 1925년 조일제(趙一薺) 번안의 〈장한몽(長恨夢)〉이 영화화될 때 이수일(李守一)역으로 출연하였고, 1926년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소설 〈탈춤〉을 《동아일보》에 연재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도일하여 본격적인 영화수업을 받은 뒤 귀국 하여 영화 〈먼동이 틀 때〉를 원작집필 · 각색 · 감독으로 제작하였으며, 이를 단성사에서 개봉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식민지 현실을 다루었던 이 영화는 〈어둠에서 어둠으로〉라는 제목이 말썽을 빚자 개작한 작품이며 영화제작은 이것 으로 마지막이었다. 그 뒤 1928년 조선일보사에 입사하였고, 1930년 안정옥(安貞玉)과 재혼하였다. 1931년 경성방송국 (京城放送局)으로 옮겼으나 사상문제로 곧 퇴직하였다. 1932년 고향인 충남 당진으로 낙향하여 집필에 전념하다가 이듬해 상경하여 조선중앙일보사에 입사하였으나 다시 낙향하였다. 1936년 장티푸스로 사망하였다. 애인(愛人)〉을 연재하다가 검열에 걸려 중단당하였고, 이어 같은 신문에 〈불사조(不死鳥)〉를 연재하다가 다시 중단 당하였다. 같은해 시 〈그날이 오면〉을 발표하였는데, 1932년 향리에서 시집 《그날이 오면》을 출간하려다 검열로 인하여 무산되었다(이는 1949년 유고집으로 출간되었다). 1933년 장편 〈영원(永遠)의 미소(微笑)〉를 《조선중앙일보 (朝鮮中央日報)》에 연재하였고 단편 〈황공(黃公)의 최후(最後)〉를 탈고하였다(발표는 1936년 1월 신동아). 1934년 장편 〈직녀성(織女星)〉을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였으며, 1935년 장편 〈상록수(常綠樹)〉가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기념 장편소설 특별공모에 당선, 연재되었다. 〈동방의 애인〉 · 〈불사조〉 등 두번에 걸친 연재 중단사건과 애국시 〈그날이 오면〉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작품에는 강한 민족의식이 담겨 있다. 〈영원의 미소〉에는 가난한 인텔리 의 계급적 저항의식, 식민지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비판정신, 그리고 귀농의지가 잘 그려져 있으며 대표작 〈상록수〉에서는 젊은이들의 희생적인 농촌사업을 통하여 강한 휴머니즘과 저항의식을 고취시킨다. 행동적이고 저항적인 지성인이었던 그의 작품들에는 민족주의와 계급적 저항의식 및 휴머니즘이 기본정신으로 관류하고 있다. 특히, 농민계몽문학에서 이후의 리얼 리즘에 입각한 본격적인 농민문학의 장을 여는 데 크게 공헌한 작가로서 의의를 가진다.
이어서 필경사에 대한 설명이다. 이 집은 항일시인이자 계몽문학의 선구자인 심훈 선생(1901∼1936)이 농촌계몽 소설 <상록수>를 쓰고 나서 1934년 이곳으로 낙향하여 직접 설계하여 짓고 ‘필경사(筆耕舍)’라는 당호를 붙여 두었다. 동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는 이 집은 앞으로 넓은 들이 펼쳐지고 북동쪽으로 서해 바다가 바라다 보인다. 주변에 몇 채의 민가와 함께 자리잡고 있는 이 집은 대문이나 부속채 없이 ‘ㅡ자형 단독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집 뒤로 대나무 숲이 우거져 있고 앞쪽에는 최근 상록수문화관을 건립해 두었다. 필경사의 평면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초가집이어서 외관으로 보면 전통적인 초가집 모양을 하고 있으나 내부 평면은 1930년대 도시주택의 기능에 맞추어 생활에 편리하도록 만들었다. 전면을 바라보고 우측에서 2번째 칸을 현관으로 하고 현관을 들어서면 우측에 전후 2칸을 터서 큰 방을 만들고 이 방을 집필실로 사용하였다. 현관을 들어서면서 좌측으로는 횡으로 2칸 반을 터서 마루방을 두었다. 마루방 뒤편 한쪽은 안방이고 다른 한쪽은 현관 뒤쪽 한 칸과 합쳐 부엌으로 사용하도록 했다. 2칸의 부엌 중 한 칸은 상부에 다락을 두고 안방에서 출입할 수 있도록 하였다. 주택의 서측에는 앞뒤로 길게 반칸을 나누어 두 개의 화장실과 하나의 욕실을 배치하였는데 전면의 화장실은 외부에서 사용하도록 하고, 내부의 화장실과 욕실은 안방을 통해 사용하도록 하였다. 욕실에는 커다란 가마솥을 걸고 밑에서 불을 지필 수 있도록 만들 었다. 이렇게 주택 내부에 화장실과 욕실을 둔 평면구조는 일본식 주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라 하겠다. 화강석을 대충 다듬은 사괴석과 자연석을 혼용하여 한 단 높이로 기단을 만들고 초석 역시 사괴석을 사용하였다. 기둥은 방형 기둥을 쓰고 기둥머리는 보와 도리를 기둥에 ‘+’자로 끼우는 사개맞춤으로 짜올렸다. 민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조이다. 우진각 지붕이어서 서까래는 부채살 모양의 선자서까래로 배열하였다. 다만 모서리의 추녀가 위로 살짝 치켜 올라가 있다. 전면과 측면에는 유리창을 달아 전통적인 세살창을 단 것보다 내부를 밝게 처리하였다. 밖에서 안으로 통하는 문을 각 방면에 두고 있는데 현관을 비롯하여 부엌, 안방, 그리고 사랑방에 각각 문을 두었다.
이 주택은 상록수의 작가 심훈 선생이 직접 설계하였다는 것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 설계는 당시 도시주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면형태 중에서 화장실과 욕실을 실내에 설치해 두는 형식을 채용하고 있다. 또한 유리창을 달아 내부를 밝게 처리함으로써 전통주거의 실내와는 다르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마루방과 사랑방 외부에 작은 베란다를 설치하여 화분을 놓도록 배려한 것은 설계자의 섬세한 마음을 엿보 는 듯하다. 그러면서도 전체적인 모습은 농촌마을 경관에 어울리게 한국의 전통적인 외관을 유지하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필경사 전경중 심훈문학관 심훈선생이 직접 설계하고 거주 하였던 필경사 심훈문학관. 내부에 심훈선생에 관한 각종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그날이 오면 이란 비비.
심훈선생에 관 한 각종자료들
상록수를 모티브로 만든 철로된 소나무
천재 시인이자 소설가인 심훈선생은 장티프스에 걸려 36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길지 않은 생애에 멋진 작품을 많이 남기셨는데 좀 더 오래 사셨다면 더 멋진 작품들이 많이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크다. 그런데 지금 보기에는 하찮은 장티프스로 36세에 요절 하셨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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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유담의 등산과 야생화 원문보기 글쓴이: 柔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