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시편 4편 1~8절
[서론] 어둠이 몰려오는 밤, 인간은 무엇을 의지하는가
삶의 불이 꺼지고 억울함과 불확실성의 밤이 찾아올 때, 인간은 극심한 실존적 불안을 겪습니다. 아들 압살롬의 반역과 권력자들의 모함 속에서 밤을 맞이한 다윗의 상황이 그러했습니다. 대적들은 정치적 지략과 곡식, 새 포도주라는 소유의 힘으로 다윗을 무너뜨리려 했습니다.
19세기 실존주의 철학자 쇠렌 키에르케고르(S. Kierkegaard)는 그의 저서 『불안의 개념』에서 인간이 느끼는 근본적 불안을 가리켜 “절망에 이르는 병”이라 칭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이라는 영원한 고정점을 잃어버리고 유한한 세상(소유, 인정, 권력)에 자신을 매달 때 존재론적 불안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앞선 3장의 아침의 환경이 전혀 바뀌지 않은 도망자의 밤을 맞아 뜻밖의 선언을 합니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8절).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신 앞에 선 단독자'로서, 다윗은 어떻게 불안의 밤을 승리와 안식의 밤으로 바꾸었습니까?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 신약에 드러난 그리스도의 은혜를 발견하고 이 시대 성도와 교회가 살아내야 할 신앙을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대적의 모함 앞에 정체성을 기억하라
다윗은 대적들이 자신의 영광을 수치로 바꾸려 할 때 담대히 선포합니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3절). 여기서 '경건한 자'로 번역된 히브리어 '하시드(חָסִיד)'는 도덕적 완벽함을 뜻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변함없는 언약적 사랑인 '헤세드(חֶסֶד)'를 입고, 그 사랑 안에 거하는 자를 뜻합니다.
세상은 우리의 성과와 소유로 우리의 가치를 매깁니다. 그러나 신약의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평가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 맺은 새 언약의 '하시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모든 수치와 모함을 대신 받으심으로, 우리는 결코 빼앗길 수 없는 하나님 자녀라는 신적 정체성을 입었습니다.
이는 장폴 사르트르식의 '존재가 본질에 앞선다'는 무신론적 자아도취가 아닙니다. 내 존재의 본질이 오직 나를 택하신 초월자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결정된다는 상관계적 존재론입니다.
성도는 세상의 비난이나 삶의 모순 앞에서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의 영광은 교인의 수나 건물의 크기에 있지 않고, 하나님이 택하신 '하시드'라는 거룩한 정체성에 있습니다. 억울한 모함 속에서도 주님이 나를 택하셨음을 기억하며 정체성을 지키십시오.
둘째, 분노의 폭주를 멈추고 침묵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라
시인은 대적들과 분노하는 백성들을 향해 권면합니다. "너희는 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 (4절). '잠잠할지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담맘(דָּמַם)'은 단순한 입 다물기가 아니라, 격동하는 감정을 하나님 앞에서 정지시키고 내면을 가라앉히는 '거룩한 정적과 자아 성찰'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장 26절에서 이 구절을 인용하여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라고 가르칩니다. 인간적 분노를 사적 보복으로 연결하지 않고, 해가 지는 밤에 하나님께 짐을 맡겨버리는 신약적 절제와 용서의 윤리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위에서 자기를 모욕하는 자들을 향해 침묵하시며 그 원수를 하나님께 위탁하셨습니다.
고대 스토아철학의 '아파테이아(Apatheia,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 평정심)'가 인간의 의지와 마인드 컨트롤로 불안을 제어하려 했다면, 성경의 '담맘'은 내 의지를 내려놓고 공정한 재판관이신 하나님께 주권을 이양하는 깊은 신뢰의 행위입니다.
분노와 혐오, 사적 보복이 판치는 세상 속에서 성도는 세상의 방식대로 맞서 싸우지 않아야 합니다. 밤에 자리에 누워 마음을 정돈하듯, 감정의 폭주를 멈추고 '담맘'의 침묵으로 하나님 앞에 머무르는 기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셋째, 세상의 소유가 아닌, 주님의 얼굴빛에서 참된 기쁨과 평안을 누리라
대적들은 곡식과 새 포도주라는 물질적 풍요에서 안식을 찾으려 했으나,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세마하)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내가 평안히(샬롬) 눕고 자기도 하리니" (7~8절). 환경이 주는 기쁨이 아닌 하나님이 내 마음에 부어주시는 내면적 환희 '세마하(שִׂמְחָה)', 그리고 세상의 그 무엇도 깨뜨릴 수 없는 전인적 안식인 '샬롬(שָׁלוֹם)'이 도망자의 침상 위에 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27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세상의 '곡식과 포도주'는 결코 진정한 샬롬을 주지 못합니다. 오직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성령 안의 의와 평강과 희락(로마서 14:17)만이 어두운 밤에도 노래하게 만듭니다.
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e)는 그의『고백록』첫머리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님, 주님 안에서 안식할 때까지 우리 마음에는 평안이 없나이다." 인간의 유한한 욕망은 가시적인 소유(Having)로 채워질 수 없으며, 오직 무한하신 하나님이라는 존재(Being)를 만날 때 비로소 영혼의 안식에 도달한다는 가치론적 진리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물질적 풍요와 경제적 안정을 구하며 달려가지만, 정작 영혼의 기근과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성도와 교회는 세상의 소유를 자랑하는 집단이 아니라,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나님의 얼굴 빛'에서 오는 기쁨과 평안을 증언하는 신앙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결론] 당신의 밤을 '샬롬의 침상'으로 바꾸라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밤'은 어떤 모습입니까? 억울한 오해, 경제적 결핍, 미래에 대한 불안, 혹은 나를 둘러싼 원수 같은 환경입니까? 세상은 우리에게 곡식과 포도주를 더 많이 모으라고, 혹은 힘을 키워 맞서 싸우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다른 길을 제시합니다.
ㆍ세상의 비난 속에서도 나를 언약으로 택하신 경건한자 '(하시드, חָסִיד)'라는 신분으로 일어서십시오.
ㆍ분노와 억울함이 치밀어 올라도 보복의 칼을 뽑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의 거룩한 침묵인 '(담맘, דָּמַם)'으로 마음을 가라앉히십시오.
ㆍ소유의 풍요보다 비교할 수 없이 크신 주님의 얼굴 빛 아래서 진정한 기쁨 '(세마하, שִׂמְחָה)'과 평안(샬롬, שָׁלוֹם)'을 누리십시오.
그리스도 안에서 이 진리를 붙드는 성도는 어두운 도망자의 밤에도 다윗처럼 고백하며 단잠을 자게 될 것입니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시 4:8)
이 위대한 샬롬의 기적이 오늘 밤 여러분의 가정과 삶의 모든 영역에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