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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마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오늘 본문을 직역하면 하늘의 신령한 복을 받은 자는 온유하다. 그는 땅을 기업으로 얻는다.입니다. 이게 감탄문이라고 그랬죠? 복 있는 자여! 로 시작되는 거예요. 복 있는 자여, 라고 이제 복 있는 자들이 선포가 되고 그들은 온유한 자다. 그리고 그들은 땅을 기업으로 얻는다. 이런 뜻이에요. 본문이 별로 어려워 보이지 않죠? 온유하면 복 받는다, 그리고 그 복의 구체적인 내용은 땅이다. 쉽습니다. 그죠? 근데 오늘 본문이 그런 뜻이겠습니까? 정말 온유하면 땅을 기업으로 받나요? 제가 알기로는 온유한 사람일수록 지지리도 가난하지 땅 같은 거 없더라고요. 땅을 얻으려면 온유해서는 안 돼요. 억척스러워야죠. 복 부인들이 온유해서 좋은 땅 차지할 수 있나요? 그건 말도 안 되는 이야깁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온유도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국어사전의 개념이 아니에요. 국어사전에서 온유라는 의미를 찾아보면 성격, 태도 따위가 온화하고 부드러움. 이라고 나와 있어요. 그거보고 온유라고 그러죠. 우리는 온유를 그렇게 이해하고 있어요. 그래서 부드럽고 따듯해지고 온화해지면 하나님의 백성이다. 그렇게 추측들을 하죠.
예수님께서 복 있는 자는 온유하다. 그는 땅을 기업으로 얻는다. 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온유가 그런 종류의 것일까? 제가 누누이 말씀드렸지만 이 산상수훈의 내용은 하나님의 복을 받은 성도에게서만 나타나는 현상이요, 특징이요 됨됨이요 지향성인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성령을 받지 않은 자, 복을 받지 않은 자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어야 되는데 제가 만난 온유한 사람들은 대부분 None Christian 이었어요. 여러분은 어떠세요? 여러분 주변에서 법 없이도 살 사람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은 사람들은 대부분 불교신자들이 많아요. 기독교인들 중에는 좀체 온유한 성품인 사람들을 찾아볼 수가 없어요.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온유의 대명사처럼 묘사가 되는 인물이 하나 나오죠? 모세입니다.
민 12: 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성경은 모세의 온유함이 이 땅에 사는 사람들 중에서 최고였다,라고 극찬을 해요. 그게 지면위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다는 뜻이에요. 정말 그랬습니까? 그런 사람이 성질 못 죽이고 욱하는 성질을 못 죽이고 자기민족을 때려죽인, 자기민족에게 해를 입힌 애굽 군사를 때려죽입니까? 그걸 온유라고 그러나요? 그리고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온유하기만 했어요? 여러분? 레위기, 민수기, 출애굽기 쭉 한 번 읽어보세요. 모세가 그렇게 온유했습니까? 그러면 저도 온유한 사람이죠. ㅎㅎ. 그게 온유한 거면. 수시로 경책하고 야단치고 화를 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 앞에서 반석을 두들겨 패기도 했고 첫 번째 십계명 돌 판을 받아서 시내 산 아래로 내려왔을 때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들어놓고 잔치를 벌이자 그 첫 번째 십계명 돌 판을 집어던져서 박살을 냈던 사람이에요. 그거 누가 맞았으면 어떡할 뻔 했어요? 근데 성경은 바로 그 모세가 이 땅에 사는 모든 인간들 중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었다, 라고 기술하고 있어요.
백 보 양보해서 우리가 성경에 기록된 표면적 모세의 모습만 보고 진짜 온유한 모세의 모습을 못 봤다고 쳐요. 그런데 왜 모세는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못 받았을까요?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면서요? 근데 세상에서 제일 온유한 사람이 왜 광야에서 죽냐고요? 이게 그런 이야기겠냔 말이에요. 성경이 말하는 온유는 그러한 성품이나 기질 같은 종류의 온유가 아니에요. 오늘 본문에서 온유라는 단어로 번역이 된 헬라서 ‘프라우스’란 단어는 가난한, 억압받는, 겸손한, 짓눌린, 낮은, 애통한. 이런 포괄적인 의미의 단어에요. 히브리어에서도 마찬가집니다. 구약성경에서 특히 시편과 이사야서에서 온유와 가난과 고통, 억압 이런 게 ‘아나브’ 그 한 단어로 혼용되어 쓰여요. 그러니까 히브리사람들에게 있어서 온유라는 건 부드럽고 다정한 성품을 가리키기 보다는 닥치는 상황에 대처하는 자세나 반응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게 온유에요. 프라우스. 제가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가리켜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그러셨죠? 그게 똑같은 단어에요. 마음이 온유한 자는 복이 있다,에서 그 온유와 나는 마음이 온유하다,에서 쓴 그 온유가 같은 단어란 말입니다.
마 11: 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여기에는 온유와 겸손이 다른 단어로 표기가 되어 있습니다만, 의미는 같아요. 온유는 오늘 본문의 그 온유와 같은 단어, 프라우스 겸손은 짓눌린, 천한 초라한, 굴욕감을 느끼는 애통한 등의 뜻으로 쓰이는 ‘하페이노스’에요. 같은 단어에요. 그러니까 이 온유라는 단어는 심령이 가난한 자, 에서의 그 가난과 애통한 자, 에서의 애통을 모두 품고 있는 단어에요. 심령이 가난한 자는 자신과 세상의 죄로 말미암아 애통하게 되어 있고 그들은 곧 온유의 상태가 된다는 거예요. 앞으로도 보시면 아시겠지만 산상수훈은 쭉 연결이 되어 있는 거지 각각 개별적 교훈을 주는 게 아닙니다. 마태복음 21장으로 가면 겸손이라는 단어가 온유, 프라우스로 쓰여요. 다시 한 번 보세요.
마 21: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내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마태복음 11장에서는 겸손이 하레이노스로 쓰였는데 여기서는 겸손이 프라우스, 온유한 자는, 의 그 단어와 똑같은 단어로 쓰인단 말에요)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그러니까 히브리사람들에게 있어서 온유라는 건 고난과 핍박과 억눌림과 낮은 자리, 이런 것과 관련이 있는 단어에요. 그게 온유에요. 겸손도 마찬가지고요. 원래 히브리사람들에게 있어서 겸손이란 개념은 많이 가지고 많이 배운 자가 그렇지 않은 것처럼 행세를 할 때 그를 칭송하는 그런 의미정도가 아니에요. 겸손은, 히브리사람들에게 있어서의 겸손은 하나님 앞에 서다, 란 뜻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선자의 마땅한 자세. 이게 겸손이거든요. 그 반대가 휘브리스, 교만이죠? 피조물이 자기의 자리를 떠나버린 거. 예수님께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시면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부르시죠? 온유, 온유를 이야기하시면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부르신단 말에요.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의 짐을 가볍고 쉽다, 라고 이야기를 해요.
예수님의 짐이 뭡니까? 십자가잖아요. 그게 가볍고 쉽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 십자가를 가볍고 쉬운 것이라고 말씀을 하세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과 쉽고 가벼운 내 짐 사이에 샌드위치 속처럼 들어가 있는 게 온유에요. 마음의 온유.
따라서 온유라는 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쉽고 가볍게 인식하게 해주는 어떤 힘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온유와 겸손과 멍에가 어디에서 인용이 된 거죠? 요게? 온유, 겸손, 멍에 이런 게? 스가랴서 9장에서 인용된 거잖아요?
슥 9:9-11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이게 온유에요)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10.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11.또 너로 말할진대 네 언약의 피를 인하여 내가 너의 갇힌 자들을 물 없는 구덩이에서 놓았나니
예수님께서 바로 이 대목을 인용하셔서 당신은 온유한 자라고 표현하신 거예요. 여기에 나귀가 나오잖아요? 그래서 다른 곳에서는 멍에 메는 나귀 그러죠? 멍에 메는 나귀를 탄다. 그러잖아요? 멍에, 나귀, 겸손, 온유가 여기에서 다 나온 거란 말입니다. 여기서 겸손하여서, 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아니’가 아나브와 같은 어근을 가진 거예요. 온유요. 그 단어는 말씀 드린 대로 온유, 겸손의 뜻도 가지고 있지만 비천, 억압, 낮아짐 고통, 굴욕의 뜻도 함께 가진 단어에요. 그러니까, 그러데 그 겸손한 왕이 멍에 메는 나귀를 타고 시온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멍에 메는 나귀라는 건 주인에게 붙들린 나귀란 뜻이에요. 하나님에게 붙들려서 사용되는 나귀란 뜻입니다. 뭘 하러 들어가는 거죠? 11절에 기술된 것처럼 피의 언약을 성취하기 위해 새끼나귀를 타고 들어가는 겁니다. 그 말은 새끼나귀가 되어서 들어간다는 뜻이에요. 피의 언약을 성취하기 위해서.
그러니까 온유라는 건 하나님의 언약 성취의 과정에서 자신의 뜻이 비워진 채로, 자기의 존재가 비워진 채로 하나님의 뜻과 능력에 밀려서 그 길이 비록 고통과 환란과 억압과 낮아짐과 굴욕의 길이라 할지라도 그 언약의 성취에 도구로 쓰임을 받는 상태, 그게 온유에요. 그거는 여러분들이 기질로 가지고 있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성품으로 쌓을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잘 들으세요.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이에요. 그런데 이 역사 속에 내려오셔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서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거나 자신을 증명하거나 자랑할 수 없었죠? 그게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에 그래요. 그분은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과 은혜를 드러내는 분이었기 때문에 자기의 존재성을 비우고 내려오시는 거예요. 발휘를 안 하시는 거예요.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확인한 자가 그 뜻이 성취되어지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도구로 쓰이는 자신의 신분을 자각하고 그 어떤 환란과 고통과 굴욕에도 담담해지는 상태. 확고한 자리에서 공고해지는 그 상태. 믿음이 공고해지는 그 상태를 온유라고 하는 거예요. 그건 성품의 문제도 아니고 기질의 문제도 아니에요. 언약 안에 들어있는 자들의 그 처음자리 인정. 아, 나는 이런 존재이고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쓰시는 것이지 내가 뭔가를 개척하고 개발해가는 게 아니구나,아는 거예요. 처음자리 인정. 그리고 어쩔 수 없음의 몸짓이고 속수무책의 고백. 이게 온유인 거예요.
나는 하나님이 그렇게 끌고 가신다면 이걸 감수할 수밖에 없네요. 여기에서 나오는 걸 온유라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은혜의 왕 노릇이 성도라는 하늘 백성들 안에서 만들어내는 선물. 그걸 온유라고 해요. 그러한 온유가 바로 성도가 기업으로 받는 땅이에요. 지금은 그게 무슨 소린가 하시겠지만 오늘 설교가 다 끝나면 이해가 가실 거예요. 어렵습니다. 쉽지 않아요. 그냥 단순히 착해져, 온화해져, 다정해져 그럼 복 받을 거야. 땅도 준대. 이런 얘기 아니란 말입니다. 아무튼 그러한 연유로 예수님께서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에게 그 짐을 가볍게 인식할 수 있는 비결을 가르쳐주시겠다고 하시면서 당신의 온유를 전제로 다시는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니, 그분의 삶 전체가 이 세상 적 관점에서 볼 때 결코 쉽고 가벼운 게 아니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뜻을 행하러 이 땅에 오신 분이에요. 우리가 스가랴서에서 확인한 것처럼 예수님은 피의 언약을 성취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나귀로, 멍에 멘 나귀가 되셔서 이 땅에 오신 거예요.
그 언약은 하나님의 언약이기 때문에 중도에 취소되거나 변개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의 그 멍에 멘 나귀의 삶, 하나님에 의해 끌려가는 멍에 멘 나귀의 삶, 십자가도 결코 취소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렇게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언약 성취의 과정에 참여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모든 자들의 삶을 성경이 온유라고 표현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온유는 하나님의 열심에서 격발되는 거지 인간이 열심을 부려서 생산해내고 발전시켜 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 거예요. 그러니까 왜 이렇게 예수를 믿고도 성질이 그렇게 안 변하냐고 너무 닦달하지 마세요. 그런 온유 아니에요. 생각해보십쇼.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온유는 그게 아무리 천성적 기질과 성품을 기반해서 나온다 할지라도 그 사람의 상황이나 감정에 따라서 조변석개가 불가피한 거예요. 아무리 부드럽고 온화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상황과 현실이 들이닥치게 되면 거친 반응을 쏟아내게 되어 있어요. 가끔 남편들이 깜짝 깜짝 놀라죠? 아니, 저런 순한 양 같은 와이프가 언제 저렇게? 그러죠? 보세요. 그 온유가 지속이 돼요? 일관성이 있습니까? 근데 예수님이 고작 그러한 온유를 우리에게 명령 하시는 거겠느냐, 는 말이에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미 확정된 묵시 속 현실을 자각한 자들에게서 나오는 자기부인의 삶이고 그로 말미암게 되는 타자와 세상을 향한 성도의 변화된 시각을 가리키는 거예요. 완료의 지점으로 회귀를 하고 있는 자신들의 그 역사 속 현실이 말씀 속에서 확인이 되면 될수록 사람을 대하는, 그리고 세상을 대하는 그리고 자신에게 닥쳐오는 그 고난의 현실을 대하는 성도의 시각은 여유와 포용과 용납과 넓음이 형태를 지향하게 돼요. 완성된다는 말 아니에요. 지향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은혜의 왕 노릇이 만들어내시는 작품이란 말이에요. 그건 자기부인의 삶을 회귀의 과정으로 살아내야 하는 성도의 삶 속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지향성이에요. 하나님 나라는, 완료된 하나님 나라에서의 성도는 완전한 자기부인이 되어 있는 자니까. 그렇게 끌려가는 과정에 있는 상태를 온유라고 한단 말입니다. 물론 정조의 차이는 있어요. 그러나 성도라면 누구나 온유라는 지향성을 발휘하게 되어 있는 거예요.
다시 모세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모세는 그 이름이 말해주는 것처럼 이스라엘을 건져낼 자로 택함을 받은 사람이에요. 모세라는 이름 자체가 ‘건져낼 자’에요. 그러니까 그는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너는 내 백성을 홍해로부터, 애굽으로부터 건져낼 자다, 이렇게 택함을 받은 거예요. 선지자들이 자주 그런 말 하죠? 나는 모태 중에서 선지자로 택함 받았다. 그러잖아요? 그리고는 정확하게 이스라엘 백성과 예수의 삶을 모형으로 살게 돼요. 모세는. 태어나면서부터 자기 마음대로 된 게 하나도 없단 말입니다. 결국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의 자리에서 광야로 쫓겨나가서 40년을 지내면서 자신을 다 털리고,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40년 살았는데 40년 동안 처가댁에서 양치기로 더부살이를 했단 말에요. 그 모세가 죽은 거예요. 40년 간. 비워지는 거예요. 그리고 인생의 연수가 70이요 강건해야 80이라고 했던 그가, 시편 90편에서 그러죠?그가 이제 죽음을 기다려야할 나이인 여든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서 광야에서 죽도록 고생합니다. 그리고는 마치 광야에서 폐기처분 되듯 토사구팽 당합니다. 그 와중에 모세가 역정도 내고 격한 언사도 쏟아내면서 이러저러한 모양으로 인간의 한계를 보이죠? 그러나 그의 삶이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었기에 그를 온유한 자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스라엘의 삶 자체를 모세가 모형하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지면, 이스라엘 중에 가장 온유한 자라고 하는 거예요. 이가 바로 너희의 삶을 모형하고 있다. 그의 삶이 바로 예수의 삶을 모형하고 있었던 거죠? 하나님의 뜻에 의해 그렇게 산거예요. 그걸 온유라고 해요. 그렇게 끌려가며 사는 그 삶을 온유라고 한단 말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칭찬을 받는 곳에 어떤 이야기가 함께 나옵니까?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한 자다. 그의 온유함은 지면에서 승하다. 이 말이 어디에 붙어 있어요? 모세가 구스여인을 취해서 아내로 삼은 그 에페소드에 붙어 있는 거란 말에요. 이디오피아 여인입니다. 흑인이에요. 나오미 캠벨 같은 모델 같이 생겼었을 까요? 구스여인이? 그래서 그냥 광야에서 덥석 후처로 삼은 다음에 누이 미리임한테 욕먹은 거예요? 여러분 그 때 당시에 구스여인이 왜 이스라엘 진중에 있죠? 그 여인은 애굽에 포로로 노예로 끌려온 여자예요. 이스라엘의 출애굽 때 엉겁결에 같이 끌려 나온 여잔데 그런 여자는 이스라엘 진중에서 가장 낮고 비천한 여자예요. 거기다가 구스여인이에요. 시커먼 여자. 흑인이란 말입니다. 근데 왜 모세가 굳이 그 여자를 아내로 삼느냐면 바로 이스라엘의 구원이 이러한 것이다, 를 하나님이 보여주게 하신 거예요. 모세가 삼백만 여인 중에 하필 그 여자를 골라서 왜 욕을 바가지로 먹냐고요? 취향도 특이한 거예요?
이게 구원이다, 를 보여주는데 미리암이 바리새인의 역할을 하는 거예요. 너는 왜 하필 그 여자를 택해서 우리 가문의 얼굴에 먹칠을 해? 이렇게 나오는 거죠. 그때 하나님이 미리암을 탓하고 들어오시면서 문둥병에 걸리게 하세요. 니가 누구를 탓하니? 그러한 선악구조로 남을 판단하는 네가 문둥병자가, 이년아! 그러고 문둥병을 걸리게 만들어버리시는 거예요. ㅎ. 나쁜 얘기하는데 그럼 분이라고 해요? 년이라고 해야지. 그 얘기예요. 거기에 모세가 이 세상에서 가장 온유하다, 가 붙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온유가 뭐예요? 하나님의 뜻에 붙들려서 하나님의 뜻을 삶으로 살아내는 그 자. 그리고 이게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셔서 나를 이끄는 삶이라면 내가 어떻게 저항할 수 없는 것이구나,를 알고 그렇게 항복하고 포기되어지는 자. 그걸 온유라고 하는 거예요. 다정다감하고 따듯하고 그런 거 아니에요. 남편들에게 그런 것 좀 워하지 마세요. 특히 목사에게 그런 거 원하지 마세요. ㅎㅎ. 전 온유한 자예요. 국어사전의 온유를 저에게 요구하지 마세요.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이에요.
예수님도 마찬가지죠.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셔서 돈 바꾸는 자들, 장사하는 자들의 좌판을 죄 엎어버리죠. 그리고 바리새인들에게는 수시로 독사의 새끼, 마귀의 자식들이라는 욕을 거침없이 해대셨습니다. 여러분 그걸 온유라 그래요? 우리가 국어사전의 온유를 예수님에게 기대하려면 그런 곳에서도 참으셨어야죠. 따듯하게 다정다감하게 말씀해주셨어야 되는데 채찍으로 때려 부셨다니까요. 그리고 그때 당시에 가장 쌍욕이 독사의 새끼였어요. 근데 하나님이 그런 욕을 하세요. 저보고 뭐라 그러지 마세요.ㅎㅎㅎㅎ.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이 그랬다 그러더라구요. 설교를 하다가 욕을 좀 했더니 교인들이 파르르 떨며 어떻게 목사가 경건한 예배시간에 비속어를 쓰냐고? 그 목사님이 그러셨대요. 당신들은 여기에서 내가 쓴 단어 하나 갖고 이렇게 부르르 떨면서 왜 당신들의 삶 속에 있는 악이나 세상의 악을 보면서는 그렇게 떨지 않냐? 그 말을 제가 하고 싶더라구요.
온유는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복 받은 하늘 백성에게서 보여 져야 하는 성품과 기질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끌려가는 자들에게서 나오는 항복의 삶을 가리키는 거예요. 그 항복은 힘이 없어서 억지로 당하는 굴욕이 아니에요. 이미 완료된 것에 대한 신뢰요 확신이에요. 그래서 오히려 안전하다, 라는 그런 안심의 항복 그걸 온유라고 해요. 베드로가 그 온유한 마음을 이렇게 설명해줍니다.
벧전 3: 1-4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2.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3.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4.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마음에 숨은 사람이란 단어가 속마음이란 뜻이에요. 이상하게 번역을 해가지고. 속마음이 온유하고 안정적인 거. 그게 하나님의 백성의 마음이란 뜻이죠. 그 안정이란 단어 ‘해쉬퀴오스’란 단어가 고요한, 방해되지 않는 이런 뜻이에요. 안정적인 이런 뜻이에요. 이미 결정된 것이라서 움직일 수 없고 변할 수 없고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방해될 수 없는 거. 그게 해쉬퀴오스예요. 그게 온유에요. 그걸 안정이란 단어와 같이 써서 설명, 부연설명해주는 거예요. 그래서 베드로 사도가 아내들의 남편에 대한 순종을 예로 들어서 온유를 설명하고 있는 거예요. 온유는 신랑이신 남편에 의해 끌려가는 신부의 상태. 근데 우리가 순종하고 싶어서 순종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왕 노릇에 의해 순종되어져 가는 거거든요. 항복되어져 가는 거잖아요? 그래서 그걸 온유라고 하는 거예요. 속마음의 온유. 사도바울도 온유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예로 들어서 성도들에게 온유를 이해시켜요.
빌 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속마음이에요. 속마음, 안정적이고 방해받을 수 없는 그것)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온유한 예수의 마음이에요. 그 마음이 뭔지 보세요)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게 온유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이 마음을 품으라, 그러죠? 조금 아까는 속마음을 온유와 안정으로 채우라 그러잖아요? 요 마음이란 말에요. 그게. 이게 천국백성들의 존재양식이에요. 우리는 점차로 나에 대한 신뢰와 가치부여의 행사가 허망한 것임을 인식하게 되어서 결국 텅 비어진 ‘나’ 속에 하나님으로 가득 채워지는 그 상태로 완성이 되는 거예요. 물론 그건 묵시 속에서 되어 질 일입니다. 그걸 온유라고 해요. 그 어떤 욕망이나 외적 환경의 변화에 의해서도 흔들리지 않게 되는 성도의 삶의 양태. 그게 온유에요.
하나님이 여러분을 목적지까지 끌고 가시기 전까지는 여러분 마음대로 살게 안 놔둔단 말에요. 그게 온유에요.
그렇게 이 역사 속에서의 자신의 인생이 하나님의 언약 속에서 완료의 자리를 향해 정해진 대로 흘러가는 것임을 아는 자들이 자신들에게 닥친 고난이나 역경 혹은 경사나 조사 등을 점차 어떻게 바라보게 되겠어요? 거기에 너무 휩싸여서 일희일비하지 않게 되겠죠?하나님이 지금 끌고 가시는 그 여정 속에서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일이라면 여기에서 이렇게 일희일비하면 안 되는 것이구나 성도는 그걸 알게 된다니까요. 실제로 여러분의 삶이 그렇게 변해가고 있음을 여러분도 느끼실 거예요. 뭐 눈에 띠게 대단하게 변화되는 것 같지는 않아도 복음을 올바로 이해하기 전보다는 품이 많이 넓어지고 이해의 폭도 커졌다는 걸 종종 느끼시죠? 어떻게 그런 변화가 오게 된 거예요? 철이 들어서 그런 건가요? 그렇지 않아요. 예수를 올바로 알게 되면서 나라는 존재에 대한 신뢰와 가치부여가 부질없고 어리석은 것으로 인식이 되면서 그렇게 손발 벌벌 떨면서 나의 체면과 위신 챙기기에 올인하지 않을 수 있게 변해가는 거예요. 그래서 다른 사람의 모자라고 추한 모습을 봐도 좀 더 넓게 이해를 할 수 있게 되는 거예요. 어떻게 저럴 수 있어? 가 아니라. 그게 온유에요.
성도는 그렇게 하나님을 배워가면서 자기 인생의 많은 부분을 하나님께 의탁할 수 있게 되고 그분의 신실하심을 신뢰하게 되므로해서 온유의 삶을 살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복 있는 자야, 너는 온유하게 될 것이다, 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내가 그렇게 만들거라는 거죠.복 줬으니까. 복과 함께 온유가 같이 오거든요. 베드로전서 2장 23절에 보면
벧전 2:23-24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24.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누가? 예수님이. 누구에게 부탁했다 그래요? 하나님께 부탁했대요. 뭐를? 욕을 한 자, 고난을 준 자, 위협을 한 자. 이런 자들을 스스로 응대하지 않고 하나님께 부탁했다, 그래요. 왜? 하나님이 나에게 이 길 가라고 한 거니까 나는 벌할 수 없어요. 나는 응대를 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 부탁하는 거예요. 그게 온유란 말에요.)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예수님의 삶을 먼저 모형으로 살다간 다윗의 삶 속에서도 그런 모습이 가끔 보였어요. 다윗이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서 도망갈 때 시므이라는 사람이 다윗을 저주하면서 욕하며 쫓아오죠? 그 때 다윗이 어떡하죠? 가서 죽일까요? 그러니까 놔둬라. 하나님이 저렇게 나에게 보낸 사람이야. 만약에 네가 가서 죽여도 또 다른 시므이들이 분명 나에게 올 거야. 그러니까 놔둬. 요걸 온유라 그래요.
삼하 16:9-13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왕께 여짜오되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컨대 나로 건너가서 저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10.왕이 가로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11.또 아비새와 모든 신복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
12.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주시리라 하고
13.다윗과 그 종자들이 길을 갈 때에 시므이는 산비탈로 따라가면서 저주하고 저를 향하여 돌을 던지며 티끌을 날리더라
다윗이 그냥 하나님께 맡겨버리죠? 그게 온유에요.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그 작정, 하나님의 이끄심 속에서 그냥 하나님께 맞습니다. 하나님 저는 이렇게 하나님께 끌려가는 게 맞아요. 하고 맡겨버려요. 그건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여러분을 그렇게 지금 끌고 가고 계시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걸 온유라 그래요. 거기에서 터져 나오는 여러 가지 증상들이 있을 수 있죠? 부드러움 온화함 포용력. 왜? 내가 점점 나에 대한 신뢰를 잃어가고 또 나라는 존재의 삶을 하나님께 의탁함으로 말미암아 나만을 위해서 사느라고 밖으로 터트리던 그런 표독스러움이나 강함이나 이런 것들이 점차, 점차 수그러들잖아요? 그러니까 그러한 어떤 성품으로 나올 수도 있지만 그러한 증상들의 그 근원, 그 뿌리가 뭔지 아셔야 된단 말에요. 그게 온유란 말이에요. 하나님의 열심에 의한 온유.
예수님께서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 라는 이 말씀을 인용하신 곳이 시편 37편이에요. 예수님은 구약을 인용하셔서 말씀을 하세요. 그곳으로 가면 오늘 본문의 내용이 조금 더 쉽게 이해가 가실겁니다. 다 읽지 않고 한 절만 찾아 읽죠.
시 37:11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요 말이 산상수훈에서 그래도 인용되어 쓰인 거예요. 시편 37편의 이 말씀이. 다윗은 이 시편 37편에서 땅을 차지하게 될 자들의 온유를 잘 설명 하는데요 3절에서는 온유를 여호와를 의뢰하는 것이라고 하고 4절에서는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라고 해요. 그리고 5절에서는 자신의 길을 여호와에게 맡기는 것이라고 하고 7절에서는 여호와 앞에서 잠잠하고 기다리는 것이라고 해요.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게 다 들어가 있죠? 시편 37편에? 9절에서는 여호와를 기대하는 것이라고 해요. 그리고 10절에서 악인들은 다 멸망하게 될 것이다, 라는 걸 고지한 후에 11절에서 온유한 자는 땅을 얻을 것이다, 라는 말을 하고 있어요. 다윗이 하나님에게서 끊어질 그 악인과 땅을 기업으로 받을 온유한 자를 대조시키고 있는 거예요. 지금. 그러니까 여기에서 온유라는 건 멸망당할 악인의 대척점에 있는 구원받은 성도들의 그 모습을 총칭하는 단어로 쓰인 거예요. 여기서는요. 이걸 예수님이 끌어다가 산상수훈에서 쓰는 거란 말입니다. 그들이 땅을 차지한다는 거예요. 시편 37편에는 그렇게 복 받은 자에게 허락될 땅에 대한 이야기가 아주 많이 나와요. 37편 9절 보세요.
시 37:9, 22, 29
9-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22-복을 받은 자는 땅을 차지하고 주의 저주를 받은 자는 끊어지리로다
29-의인이 땅을 차지함이여 거기 영영히 거하리로다
그 땅은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들이 기업으로 받을 땅 인데요 그 땅에는 주의 복을 받은 의인만이 살 수 있는 곳이고 온유한 자만 살 수 있는 곳이라고 해요. 그러면 이 역사 속에 오가는 수많은 아담들 중에 그 땅에 살 수 있는 이는 있다, 없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그랬잖아요. 그러면 도대체 이 땅은 무슨 땅이냔 말에요. 의인만 들어가서 살 수 있는 이 땅을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지금 시편 37편을 인용하여 이 땅을 이야기하시는 거란 말에요. ‘이 땅’이 무슨 땅이냔 말에요? 의인만 들어가서 살 수 있는 땅.
전 7:20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
전혀 없다는 거예요. No body. 아주 없느니라.
여호와가 주시는 땅은 의인만 살 수 있는 땅이에요. 그리고 그 땅을 온유한 자들이 받아요. 삼단논법이에요. 여러분. 그렇다면 마음이 온유한 자는 의인이란 말인데 성경은 이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그랬어요. 이 세상에 온유한 자도 하나도 없다는 뜻이죠?그러니까 타 종교인들 중에 착하고 따듯하고 온화하다고 그래서 함부로 온유하다, 이런 말 쓰지 마세요. 그렇게 스스로 온유한 자가 있을 수 없고 스스로 의인인 자가 있을 수 없어요. 그럼에도 성경에는 온유한 자나 의인으로 칭해지는 이들이 많이 나온단 말이에요. 그들은 어떻게 그렇게 된 걸까요? 우리는 알죠. 성경을 아니까. 이 세상의 오직 유일한 의인 예수! 이 세상에 오직 나는 마음이 온유한 자다, 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그분, 누구? 예수! 오직 의인이시고 오직 마음이 온유하신 예수, 그 안에 연합되어 구원받은 성도를 의인, 온유한 자라고 칭해주는 거예요. 여겨주는 거예요. 성품과 기질의 문제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가 행한 어떤 일을 근거로 의인 되는 거 아니라니까요.
그러니까 땅은,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아서 온유한 자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의인만 살 수 있는 그 땅을 기업으로 받아 온유한 자가 된다. 그러니까 땅은 상으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 성도로 하여금 복 받은 자로 하여금 온유한 자가 되는데 쓰이는 도구예요. 조금만 잘 들어보세요. 그렇게 온유하시고 의로우신 단 한 분, 예수에 의해서 우리가 온유한 자가 되어서 땅을 기업으로 받는 거라면 당연히 복 받은 성도가 받게 될 땅은 예수가 기업으로 받은 땅이어야 되겠죠? 우리가 온유한 예수 의인 예수 안에서 땅을 받게 된다면 진짜 온유한 분, 진짜 의인인 그분이 받은 그 땅을 함께 받게 되는 거 아니에요? 그 땅이 뭐예요? 예수님이 거처로 받게 된 그 땅. 예수님께서 처소를 마련하게 가겠다, 라는 그 이야기는 기억나세요? 그 처소가 뭐예요?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거할 땅이죠? 거기가 처솝니다. 그게 어디죠? 교회에요. 교회. 천국에 만들어지는 맨션 그런 거 아니에요. 속지 마세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기업으로 받으신 땅은 교회, 즉 우리 성도에요. 그것도 조금 이따가 확인이 되실 거예요. 하나님께서 창세전 신령한 복으로 복을 주신 성도는 교회를 기업으로 받아서 온유한 자가 된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적확한 해석인 거예요. 그 땅 이야기 역시 우리가 심령이 가난한 자와 애통한 자에 대해서 공부할 때 찾아본 이사야서 61장에 똑같이 등장해요. 성경은 전부다 연결이 되어 있어요.
사61:1-3, 7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2.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3.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7-너희가 수치 대신에 배나 얻으며 능욕 대신에 분깃을 인하여 즐거워할 것이라 그리하여 고토에서 (이게 땅이에요. 고토라고 번역이 되어 있어서 뭐 어려운 거 같지만 그냥 땅이에요. 땅에서)배나 얻고 영영한 기쁨이 있으리라
이 땅이 하나님이 주실 땅이에요.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실 땅. 메시아에 의해서 건짐을 받은 자들에게 땅이 주어지는데 거기에서 갑절의 상속이 주어진다는 거예요. 갑절의 상속은 상상 할 수도 없는 보상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두 배가 아니라. 그렇다면 메시아에 의해서 거저 주어지게 되는 그 땅의 정체는 무얼까?
겔 36: 24-28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들어가서 (이게 땅이에요. 내가 너희에게 줄 땅. 근데 이 때 이미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받았을 때란 말이에요. 근데 또 다른 땅을 이야기한단 말입니다. 고토에, 땅에 데리고 들어가겠다, 라고 이야기를 한단 말이에요. 에스겔서잖아요. 이게요.)
25.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26.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찌라
28.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그 고토를 지금 28절에서 뭐라 그러느냐 하면 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이라 그래요. 근데 열조에게 준 땅은 어느 땅이에요? 원래가? 가나안 땅이잖아요. 근데 그들이 지금 가나안 땅을 살고 있는데 또 다른 땅을 이야기하면서 너희 열조에게 준 땅을 이야기한단 말에요.그러면 열조에게 준 땅도 사실은 그 가나안 땅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 열조가 하나도 그 가나안 땅을 취하지 못하고 전부 무덤 한 평에서 가는 거예요. 그 땅 아니라 는 거예요. 그걸로 모형 된 어떤 땅, 그걸 ( ?)해서 고토라고 하고 그걸 물로 씻겠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창 12: 2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실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 지라
아브라함에게, 복의 근원인 아브라함에게 땅이 주어지고 있어요. 13장으로 가면 좀 더 구체적으로 그 땅이 나타나요.
창 13:14-17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15.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16.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찐대 네 자손도 세리라
17.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너의 자손을 땅의 티끌처럼 주겠대요. 그러니까 땅의 티끌과 자손, 땅과 자손이 지금 하나로 동일시되어 주어지고 있는데 내가 너희들에게 허락할 그 땅에서 나는 그 땅의 티끌처럼 내 자손, 하나님의 백성들을 너에게 주겠다, 라는 이런 뜻이에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죽을 때까지 자식 하나 밖에 안 낳았습니다. 그럼 이 약속들이 뭐냔 말에요. 이것이?
창17:7-8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8.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여기서 땅과 후손이 언약으로 주어짐과 동시에 왕이 함께 주어지죠? 내가 너의 하나님이 되겠다고 그러잖아요? 다스리겠다, 라고. 그죠? 왕과 땅과 백성이 언약 속에서 주어지죠? 이게 뭐의 삼 요소에요? 국가! 하나님 나라 이야기하는 거예요. 네? 하나님 나라. 바로 여러분이 하나님 나라잖아요? 교회가 하나님 나라란 말입니다. 고게 지금 주어지고 있는 거란 말에요. 근데 이 땅 이야기가 어디로부터 연결이 되는지 아세요? 창세기 12장이 어디서부터 연결돼요? 11장에서. 11장에 무슨 이야기 나와요? 바벨탑. 바벨성 이야기가 나오죠? 거기서 탑이라고 번역된 그 단어가 성이란 단어에요. 바벨성. 성과 대를 쌓자 그러잖아요. 바벨성. 바벨성은 인간들의 땅이에요. 인간들이 인간들의 힘과 지혜로 하늘에 올라가겠다고 하는 인본주의의 땅. 이걸 바벨성이라고 그래요. 바벨 땅. 그 땅을 하나님이 저주하여 흩어버린 다음에 그 땅 아니고 내가 준비한 내 땅 줄 거야. 누구에게? 내가 택한 자에게. 이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세상의 땅과 하나님이 준비하시는 땅이 지금 대조되는 거예요. 세상의 땅 바벨탑이 뭐예요? 인간들의 가능성과 인간들의 능력을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인본주의의 관점에서 하나님께 도달하려고 하는 것. 그러한 타락한 아담. 선악과 따먹은 아담이 바벨탑이죠? 세상의 땅. 그것과 하나님이 아브라함 같은 엉터리, 우상 만들어 팔던 그런 자들을 찾아가서 하나님이 은혜로 준비한 그 땅으로 끌고 가는 바로 그 은혜의 땅. 요게 대조되는 거예요. 은혜로 말미암은 새 하나님의 백성과 선악과 따먹은 아담 군상들이 대조되는 거란 말입니다. 이게 옛 땅, 새 땅인 거예요. 새 하늘 새 땅. 그 이야기하는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11장과 12장에서 옛 땅, 바벨탑과 새로운 땅, 아브라함에게 주어지는 그 땅이 출발을 하는 거란 말에요. 열조 중의 하나님 이삭에게도 땅이 언약으로 주어지죠?
창26: 2-4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하라
3.이 땅에 유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비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4.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을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땅이 약속 되죠? 열조에게 주었던 땅. 이 땅 이야기하는 거예요. 지금. 열조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니까. 야곱에게 어떤 언약이 주어졌는지 보세요.
창 28: 13-15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14.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 찌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15.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원래 그가 있던 땅. 하나님 아버지가 아브라함에게 줬던 땅에서 그가 장자 권을 취득하자마자 쫓아내죠? 그리고 다시 그리로 불러들이는 거예요. 여러분은 완료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데 완료된 하나님 나라의 땅이에요. 하나님이 여러분과 같이 거하시니까. 여러분 안에 하나님 계시잖아요? 그게 하나님의 땅이에요. 교회란 말입니다. 그걸 크게 그려놓은 그 교회란 말에요. 그 땅이 이 땅에 내려와서 부정한 땅, 패역한 땅의 그 현실을 경험하고 다시 하나님의 거룩한 땅으로 회귀되어 올라가는 거. 그 이야기가 역사인 거예요. 다른 거 없어요.
물리적으로 봤을 때 그 땅은 당연히 약속의 땅 가나안이에요. 열조에게 주어진 땅은. 그런데 정말 그 땅이 열조에게 주어졌나요? 아브라함이 얻은 가나안 땅은 막벨라굴 무덤 한 평이에요. 이삭은? 거기 묻혔어요. 야곱은? 그나마 거기도 못 묻히고 애굽으로 쫓겨 가서 거기서 죽었어요. 그러면 그 열조들의 후예인 이스라엘에게는 어떠한 약속이 주어졌는지 한 번 보세요.
출 6: 7-8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줄 너희가 알찌라 (보세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8.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하셨다 하라
여기서도 하나님이 기업으로서의 땅을 당신의 백성들에게 약속 하시죠? 이 이스라엘은 누구의 모형이에요? 우리요. 교회. 성도의 모형이잖아요. 그들에게 땅이 또 약속 된단 말에요.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주겠다고 했던 그 땅이 똑같이 약속 되고 있잖아요. 그죠? 그러나 이스라엘도 그 땅을 차지하지 못하고 수시로 쫓겨나거나 다른 민족들에게 뺏기고 식민지 생활을 해요. 심지어 그 약속을 받은 당사자 이스라엘 일 세대는 광야에서 다 죽어요. 못 들어간단 말에요. 그럼 그 약속은 무슨 약속이냔 말에요. 그럼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과 성도의 죽음, 성도의 무덤이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게 자명해졌죠? 땅을 약속 받은 자들은 다 죽어요. 정작 이 땅에서의 물리적인 그 땅은 못 밟는다니까요. 나는 마음이 온유하다, 라고 하신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죽으셨어요. 온유한 그분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그분이 죽었다니까요. 그럼으로 해서 예수님의 처소인 교회가 탄생된 거죠? 왜 땅을 기업으로 받을 모세가 광야에서 왜 죽어야 돼요? 가나안이 눈앞에 있는데 왜 굳이 하나님이 거기서 죽이냐고요.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땅은 바로 이 옛 땅, 이 원래 새 땅이었던, 거룩한 땅이었던 하나님의 처소였던 그들이 이 땅에 내려와 부정한 땅, 육신을 입고 있죠? 하나님이 못 들어갈 땅.
그게 역사 속에서 죽어 하나님이 거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땅 새 창조의 그 땅으로 다시 새롭게 창조되는 그것이 ‘땅을 주는‘ 거예요. 히브리서로 가면 그 열조들을 포함한 믿음의 선조들이 어떤 땅을 소망으로 바라보며 살았는지가 명확하게 기술이 되어 있어요.
히11:8-10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 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9.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 신기하죠? 하나님이 주신다고 했던 그 땅에 거했는데 어떤 마음으로 거했느냐면 외방에 사는 것처럼 살았대요. 그 땅을. 뭘로? 믿음으로. 무슨 말이에요? 이 땅은 그 땅 아니구나,를 믿음으로 알았다는 뜻입니다.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보세요. 땅과 성을 요렇게 같은 것으로 이야기를 하죠? 바벨성. 요걸 여러분이 꼭 염두에 두셔야 돼요. 성경전체는 다 그 이야기에요. 이제 우리에게 주어질 그 도성. 새 예루살렘.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고거 바라본 거예요. 다른 거 본 게 아니라. 다른 이들은 어땠는지 한번 보세요.
히 11:13-16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14.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15.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야곱이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갔을 때 가나안이 자기가 돌아갈 본향인 걸 알았으면 애굽에서 돌아갔겠어요? 안 돌아갔겠어요? 돌아갔겠죠? 안 돌아갔단 뜻이에요. 근데. 왜? 그 땅 아니란 걸 알았단 뜻이에요. 그게)
16.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 또 땅과 성이 대조되고 있어요)
신명기 11장으로 가면 그 땅의 특징이 구체적으로 그려져 있어요.
신 11:10-12
네가 들어가 얻으려 하는 땅은 네가 나온 애굽 땅과 같지 아니하니 거기서는 너희가 파종한 후에 발로 물 대기를 채소밭에 댐과 같이 하였거니와
11.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12.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권고하시는 땅이라 세초부터 세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항상 그 위에 있는 땅이다)있느니라
천수답 농사짓는 곳, 하나님이 주시면 먹고 안 주시면 안 먹는 그 땅. 은혜의 땅. 그게 가나안이다, 라는 뜻이에요. 근데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역시 자기들의 힘을 의지했죠. 그리고 이 세상의 왕을 원했잖아요. 하늘의 왕을 왕 취급하지 않고. 그러니까 이 땅은, 신명기에서 말하는 이 땅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이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새롭게 창조가 될,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새롭게 창조가 될 교회, 하나님의 도성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여러분을 이야기하는 거란 말에요. 그 땅이 여러분에게 반드시 기업으로 주어질 것이기 때문에 여러분은 역사 속에서 온유로 밀려내려 가는 거예요. 온유한 성품, 온유한 기질 그런 거 아니란 말에요. 성경을 그런 도덕책으로 보지 마세요. 성품 개조의 책 이런 거 아니에요. 아무리 봐봐야 변하지도 않아요. 이사야서로 가면 그 땅의 실체가 명확하게 드러나죠?
사 65:17-19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드디어 나오죠. 실체가?)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18.너희는 나의 창조하는 것을 인하여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즐거움을 창조하며 그 백성으로 기쁨을 삼고 (예루살렘, 백성 막 나오는데 계시록으로가면 이 예루살렘이 백성이에요)
19.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이 도성, 이 예루살렘이라는 새 도성 이거 바라보고 가나안 땅조차도 이건 아냐, 라고 했다는 거예요. 그 사람들이요.
사 66:2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을 것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이렇게 바벨성과 대조되어서 하나님의 은혜로 건설이 되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새 하늘과 새 땅이요 하나님의 땅인 거예요. 여러분인 거예요. 그 땅이 성도에게 약속이 되고 있는 거죠.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내가 같이 거하는 이 땅. 나, 교회란 말에요. 성령 안이라는 그 땅. 그리스도 안이라는 그 땅. 율법주의 유대주의에 의한 인간들의 가능성이 무너지고 하나님의 은혜의 도성이 완성되는 그 구원의 현실이 옛 땅의 부정이요 새 땅의 도리인 거예요. 근데 구약에는 이러저러한 것들 지켜야 그 땅이 주어진다고 조건이 붙어 있죠? 근데 오늘 본문에는 복 있는 자여 너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 라고 선언이 되어 있단 말에요. 창세전에 모든 신령한 복으로 복을 받은 자들이 있는데 그들에게는 땅이 주어진다. 라고 약속 되는 거예요. 뭘 지켜! 라고 조건이 붙지 않아요. 그 사이에 뭐가 있었던 거예요?십자가가 있었던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이렇게 우리에게 거저 주시겠다고 하신 그 은혜의 땅의 실체가 요한계시록에 잘 나오죠?
계 21: 1-4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누구요? 신부? 교회죠? 어린 양 혼인잔치의 신부. 교회. 하나님의 백성을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라 그러고 그걸 새 하늘과 새 땅 이라고 그러잖아요)
3.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다 성취가 되죠? 이제요? 땅과 왕과 백성. 이게 창세기에서부터 쭉 약속이 되어졌던 게 계시록 21장에서 완료가 되는 거 아닙니까?)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이게 다 뭐예요? 산상수훈에 나오는 애통, 가난, 사망. 이거잖아요? 이게 싹 없어진단 뜻이에요. 역사 속에서는 근데 여러분이 그걸 경험하시는 거예요. 요한계시록 전체가 멸망 받을 바벨론과 새 하늘과 새 땅의 대조라는 건 여러분이 잘 아시죠? 창세기에서도 바벨성과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이 대조가 되요. 그러니까 유대주의와 인본주의 그리고 은혜가 끊임없이 전쟁을 치르면서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가는 거예요. 그리고 그게 역사라니까요. 알아들으시는 거예요?
네, 온유한 자,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 이거 중요한 거예요. 다시 에스겔서 36장으로 가보세요.
겔 36:24-25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들어가서
25.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땅에 들어가서 너희들을 물로 씻어서, 부정한 너희들을 물로 씻어서 정결케 할 거라고 그래요. 왠줄 아세요? 땅이 부정해지면 안 돼요. 하나님이 함께 거하실 땅이기 때문에. 그래서 거기에 선행되는 게 뭐냐면 부정한 자를 물로 씻어버리는 거거든요. 그게 정결예신이에요. 물로 씻는 거. 그래서 성전에도 물두멍이 있죠? 집집마다 정결예식 항아리가 있었던 거예요. 물로 씻어야 돼요. 부정한 거를. 하나님의 땅은 부정한 것들이 들어갈 수 없는 곳이라서 이렇게 물로 씻어서 하나님의 땅을 완성하시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 새 언약은요 레위기의 유출병에 관한 규례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는 거예요. 거기서 물로 씻어라, 물로 씻어라, 반복하여 나와요. 볼까요?
레 15:1-8
1.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2.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몸에 유출병이 있으면 그 유출병을 인하여 부정한 자라
3.그 유출병으로 말미암아 부정함이 이러하니 곧 몸에서 흘러나오든지 그것이 엉겼든지 부정한즉
4.유출병 있는 자의 눕는 상은 다 부정하고 그의 앉았던 자리도 다 부정하니
5.그 침상에 접촉하는 자는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6.유출병 있는 자의 앉았던 자리에 앉는 자는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7.유출병 있는 자의 몸에 접촉하는 자는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8.유출병 있는 자가 정한 자에게 침을 뱉으면 정한 자는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여인이 월경을 하거나 지속적으로 유출병, 하혈을 할 때 율법이 그걸 부정한 것이라고 규정을 하고 그것 자체가 부정한 게 아니에요. 거기에 의미가 있는 거예요. 그러한 자들과 닿기만 해도 모두 부정한 것이 된다, 그래요. 닿기만 해요. 그런 부정함을 어떻게 깨끗하게 하라 그래요? 물로 씻어서. 요 똑같은 단어가 새 언약에 나오는 거예요. 물로 씻어서, 고토에 들어가, 물로 씻어서 새 언약으로 주어지고 있는데 그렇다면 왜 율법은 여인들이 하혈하는 걸 부정하다고 말하는 거죠? 민수기에 그 의미가 나와요.
민 35:33-34
너희는 거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피는 땅을 더럽히나니 피 흘림을 받은 땅은 이를 흘리게한 자의 피가 아니면 속할 수 없느니라
34.너희는 너희 거하는 땅 곧 나의 거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 여호와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함이니라
어떤 이의 피가 더러운 자들의 피로 말미암아 더럽혀진 그 땅을 속해서 깨끗하게 하는 어떤 역사를 지금 설명하는 거예요. 이걸로. 그래서 월경이니 하혈이니 이런 게 나오는 거예요. 그것 자체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땅에 타락한 인간의 피가 닿으면 땅이 부정해진다, 그래요. 왜? 그 속에 들어있는 게 다 더러운 거기 때문에.
렘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 마는
사람 안에 들어 있는 것이 이 세상에서 제일 더러워요. 근데 그게 피로 쏟아져서 땅을 부정하게 만들어버리기 때문에 절대 땅에 피를 흘리면 안 된다, 이게 율법에 규정되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살인도 안 된다는 거예요. 사람 죽이는 거 그게 나쁜 것이다, 이걸 가르치는 것보다 땅 더러워지면 안 된다. 왜? 하나님이 함께 살 땅이니까. 약속의 땅이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부정한 자들을 물로 씻으라고 하신 거고 새 언약에서는 내가 고토에 들어가서 내 땅에 들어가서 너희를 물로 씻어 깨끗하게 할 것이다, 라고 하신 거예요. 그래야 내가 거할 수 있거든요. 그건 우리를 닦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땅이 완성된다는 뜻이에요. 그게 새 언약이에요. 그래서 고토에 들어가 물로 씻는다, 그러는 거예요. 나중에 보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 그러죠? 세례 이야기하잖아요. 그 이야기가 나중에 새 언약 밑에 가면 너의 마음을 잘라낸다 그러죠? 요게 할례거든요. 그러니까 세례가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거예요, 그래서. 씻는 거예요. 깨끗이 씻는 거예요. 여러분을 죽여 버리는 거예요. 아예. 그게 땅을 선물로, 기업으로 받은 자의 운명이었잖아요. 역사 속에서 죽는 거. 광야에서 죽는 거.
그러니까 하나님은 땅을 깨끗하게 하시기 위해서 부정한 피를 씻어내는 거예요. 땅은 그토록 소중한 거예요. 그 땅은 하나님의 신부인 교횝니다. 신약에 그러한 유출병이 어떻게 구원으로 연결이 되는지가 잘 나와 있는데 거기가 마태복음 9장이죠?
마 9:20-22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지금 어떻게 되는 거예요? 율법에 의하면? 혈루병 앓는 여자가, 유출병 앓는 여자가 예수님 만졌으니까? 부정하게 된 거죠? 예수님이? 그죠? 그랬는데 이 여자가 어떻게 돼요?)
21.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22.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가라사대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시로 구원을 받으니라
그 시에 그 여자가 구원 받았다, 라고 성경이 굳이 기록하고 있어요. 만지자마자. 예수님이 그녀의 부정을 가져가신 거예요. 사망을 가져가신 거예요.
마 8:1-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이거죠. 그죠? 예수님이 여인의 유출병, 부정함을 가지고 가서 부정한 자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이 피를 흘려야 되잖아요. 그 피가 어디서 쏟아졌어요? 십자가에서 쏟아졌잖아요. 그러니까 십자가의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창세기부터 땅 이야기는, 온유함에 대한 이야기는 십자가 이야기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게 레위기의 유출병과 연결이 되어서 또 예레미야 31장과 에스겔서 36장의 새 언약과 연결이 되어서 땅과 연결이 되고 결국 십자가에서 결론이 지어지는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 그 자리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저주받은 자로 죽어야 할 자로, 부정한 자로 선고받아 죽어야 할 자가 여러분과 저였잖아요. 거기에서 예수님이 피를 철철 흘리는 거예요. 그런데 그 피가 우리를 씻으시는 거죠. 그래서 교회가 탄생되는 거예요. 깨끗이 씻겨져서 하나님이 거하시는 땅이 되는 그 시점에 예수님의 피와 함께 물이 쏟아지는 거예요. 씻겨지는 거죠. 그걸 이 세상에서 생명창조로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거예요.
새 생명의 창조는 피를 흘려 죽어야하는 자들의 피를 쏟음으로 말미암아 새 언약의 현실, 물로 그들을 하나님의 땅으로 깨끗이 씻겨내는, 씻어내는 그 새 창조의 현실로 완성이 되는 거다,를 보여주는 게 여인이 애 낳는 거예요. 그래서 애 낳을 때 물과 피가 그렇게 쏟아지는 거예요.
요 2:6
거기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두 세 통 드는 돌 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이거 가나의 혼인잔치 이야기죠? 돌 항아리 여섯 개가 있어요. 근데 무슨 항아리라 그래요? 결례를 따라 두 세 통 드는 돌 항아리. 물 담는, 정결예식 행하는 물 담는 항아리 여섯 개죠? 그런데 물이 없었어요. 율법주의 유대주의, 인본주의의 실체를 고발하는 거죠. 겉으로는 번드르르하게 율법 지킨다고 그랬는데 열어보니까 물이 하나도 없어. 씻었다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들의 정결함에 관심이 있었다는 거예요? 없었다는 거예요? 없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물, 그걸로 지금 유출병 있는 자들을 막 박박 닦아야 되는 물이거든요, 그게, 새 언약에 나오는 물? 그걸 잔치가 끝난 그 집. 이제 이 집은 잔치 아니다! 여기는 멸망 받아 죽을 지옥이야! 선언되는 거예요. 그게. 포도주가 떨어진 게.
그런데 그 곳에 그 물 대신에 예수님의 피가, 포도주가 여섯 개로 채워지고 일곱 번째 항아리로 예수가 섬으로 말미암아 다시 잔치가 벌어지는 거예요. 그게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요. 요한계시록에서의. 그러니까 그 물은 내가 물로 너희들을 내 땅에 데리고 들어가서 씻겠다, 라는 건 뭐예요? 뭐였어요? 예수의 십자가의 피로 너희들을 씻어 내가 거하는 너희와 함께 거하는 내 나라, 교회, 너희들을 반드시 창조해내고 말거야, 이 새 창조, 새 언약의 이야기예요. 이게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 그 안에 담겨 있는 엄청난 내용인 거예요. 이게 바로 새 언약 하에서의 새 창조의 메카니즘인 거예요. 여러분은 그렇게 땅을 하나님이 거하시는, 여러분과 함께 거하시는 땅을 이미 기업으로 받은 거예요. 그랬더니 그들이 눈에 보이는 땅을 초개처럼 여기고 텐트치고 살다 가더라,가 그렇게 기록이 되어 있는 거예요. 진짜 땅이 뭔지 아니까. 나예요. 나. 어쭙잖은 천국 같은 거 그려내지 마세요. 여러분이 그리는 천국, 제가 개런티 해드리는데 그런 천국 없어요.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여러분 안에서 이게 정말 좋은 거구나 에헤라 디야~. 5월 21일 날 뭐 휴거가 일어난다메요? 지금 CNN 헤드라인으로 올라와가지고 아까 복음방송에서 인터뷰해달라고 해서 인터뷰했어요. 개소리 하지 말라구. ㅎㅎㅎㅎ. 휴거 안 된 사람은 그날 내 콘서트 보러 오라고요. 휴거 된 사람은 가고. 그랬더니 사회자가 그렇군요? 그 날이 콘서트군요? 이렇게 또 광고를 했네요. ㅎㅎㅎㅎ. 아니 휴거되면 진짜 에헤라디아죠.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 안에서 이미 천국을 살고 계신 분이에요. 그런 사람은 이미 종말과 심판을 당겨서 사는 사람이거든요. 아이 그런 사람이 종말이 5월 21일 이든 22일 이든 뭔 상관이에요? 왜 그걸 두려워하십니까? 그리고 종말이 오면 뭐하실 건데요?
재림이라는 단어 자체가 ‘파루지아’, 나타나다. 예요. 멀리서, 우주에서 숨어 있다가 내려오다, 가 아니라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 있다메요? 그리스도는 여기 있는데 어떤 예수 또 기다리는 거예요? 안 믿는 거죠? 예수 안 믿는 인간들이 교회안에 전부 앉아가지고 예수 믿는다고 그러니까 그런 이단들이 뭐 조금만 이야기를 해도 다 넘어가는 거예요. 이렇게. 내 안에 예수 있다메요? 이게 나타나는 걸 재림이라고 한다니까. ‘파루지아’. 근데 뭐, 뭐, 무슨 재림을 기다리는 건데요?
참 이렇게 답답해요. 무슨 기독교가 있어요? 이 시대에? 여러분은 여러분 안에 이미 땅을 받으셨어요. 천국.
예수님이 그랬잖아요. 하나님 나라 이 땅에 왔다. 그랬죠? 예수가 천국이었어요. 왜? 그 안에 하나님 계셨고 예수님은 그 하나님의 뜻을 받아 자기를 다 비워냈거든요. 이게 하나님 나라거든요. 여러분이 하나님 나라에요. 베드로서에 나오잖아요. 우리는 거룩한 나라. 왕 같은 제사장. 그 나라가 뭐예요? 천국이잖아요. 땅. 내가 땅이라니까요. 그 자들은 이 땅에서 자기 거 못 챙기게 돼있어요. 왜? 복 있는 자여 너희는 온유하게 될 거니까. 절대 너희들 마음대로 못 살아. 그러는 거예요.
히9; 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끄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 하겠느뇨
요 이야기하는 거예요. 물로 깨끗이 씻는다. 그 물이 뭐예요? 피라잖아요. 피. 피. 그 예수의 피로 거듭난 자. 그대들이여 복 받은 자들이다. 그리고 그대들은 온유한 자이며 그대들은 땅을 기업으로 받은 자다. 그 말인 거예요.
그러한 구원의 현실을 아는 이들이 하나님의 일 하심 앞에서 요동치 않고 언약만 바라보며 가는 거. 다른 거 아니에요. 살아있는 거. 어떡하겠어? 살아야지. 살아있는 거. 그게 (?)인 거예요. 어떡하겠어요? 살아있어야지.
시 46:1-3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오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2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3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통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왜? 세상 땅은 이렇게 요동하고 흔들려도 왜 두려워하지 않아요? 내 안에 요동치 않는 땅이 있으니까. 이게 온유며 안정이며 겸손인 거예요. 기도 하겠습니다.
(K목사님 산상수훈4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