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 같은 아침시간이지만 일찌감치 떠 오른 해는
늘 발 담그던 강 언덕을 넘어 저만치 솟아올라있습니다.
벌써 모내기를 마친 논이 보입니다.
여린 모들이 물에 잠겨 조을고 있는 듯 하군요.
잠이 덜 깬 눈으로 초록물결의 오월 아침 문을 열고
그대에게 편지를 씁니다.
오월 그날이 오면 우리 가슴에 ~
아, 오월이라고..
인디언 달력의 5월입니다.
말이 털갈이 하는 달/수우 족
들꽃이 시드는 날/오사지 족
뽕나무의 달/크리크 족
오래 전에 죽은 자를 생각 하는 달/아라파호 족
섬진강 편지-0504
보낸날짜 2001년 05월 04일 금요일, 오전 09시 36분 17초 +0900
바람 속에 푸르른 강이여
작은 이파리 하나 그 위에 떨어져
바람과 함께 몸 부비고 싶어도
용납하지 않으면서 흐르지 않으면서
저 홀로 앞바다 문턱까지 새푸른 5월의 강이여
이시영 시집 <이슬 맺힌 노래>중에서 '강'
시란 '이 세상과의 인사법'이라는 시인을 만났습니다.
하루의 해가 저무는 시각을 '시간의 가루가 가장 부드러운 때'를 아는
시인을 만났습니다.
취했습니다. 사람에 취하는 일은
술에 취하는 일보다 더 취하는 것 같습니다.
시란 그 누구를 기쁘고 설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시인 자신을 울리고 설레게
해야 하느니...
마지막 마침표에 눈물자국이 남지 않는
아,, 부끄러운 나의 시여
섬진강 편지 -0505
보낸날짜 2001년 05월 05일 토요일, 오전 10시 05분 32초 +0900
라일락꽃 향기처럼
아름다운 추억이 늘 내 가슴속에
숨쉴 수 있기를
라일락꽃 향기처럼
아름다운 고통이 늘 내 가슴속에
빛날 수 있기를
해 저무는 날
새 한 마리
내 삶의 여울목에
뜨거운 노래 한 섬 부리고 갑니다.
곽재구 시집<참 맑은 물살>중 '새'
건너다 보이는 바다로 가는 길이 희뿌연 늦은 아침입니다.
풀들이 무성할
아버지 집에 다녀와야 겠습니다.
이틀동안의 연휴 즐겁게 보내시구요..
<섬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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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편지 -0507
보낸날짜 2001년 05월 07일 월요일, 오전 11시 35분 58초 +0900
이것은 누구의 입김일까
투명한 말들 끊임없이 솟구쳐 흐르는
그 깊은 어떤 가슴이 있어 속삭일까
햇살은 어른거리며 물 속으로 번져가고
눈 감으면 千年이 다 보일 듯 맑은 물결 흔들리는데
어떤 기다림이 이 투명함을 이루었을까
때때로 흙 속에 숯불처럼 묻힌 뼈를 스치고
이제 흙이 된 피와 살을 스치고
아직도 못 다 이룬 넋들의 꿈을 스치고
다 잊은 듯이
차마 잊진 못한 듯이 맑은 입김 솟아오르네
어떠한 불볕에도 마르지 않을 투명한 말들
다 잊은듯이 그대와 그대의 상처에
피에 깨어 있네.
<오월시동인작품2집> 중에서 김진경의
'피아골에서 마신 藥水 혹은 詩'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맞고 노고단에 올랐습니다.
어제는...
붉게 피어난 철쭉 꽃 앞에서 한참을 서성거렸습니다.
다 같은 꽃일진데
"이제 흙이 된 피와 살을 스치고
아직도 못 다 이룬 넋들의 꿈을 스치고
다 잊은 듯이"
지리산에서 만나는 꽃의 빛깔은, 모습은 이리 처연한지요.
오월이 깊어 갑니다.
월요일 바쁜 일로 늦은 아침편지를 띄우게 되었군요.
맑게 흐르는 하루 되시길..
<섬진강, 김인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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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편지 -0508
보낸날짜 2001년 05월 08일 화요일, 오전 09시 35분 56초 +0900
슬픔이 있는
너의 모습이 좋아라
눈물 흐르는
너의 향기가 아파라
호젓한 아카시아 길
홀로 걸으며
주렁주렁 늘어진
나의 슬픔들
온 산을 덮으며 타오르는데
잠시 바람에도 흐느끼는 향기
내 마음 그 어디를 찾아 흐르나
슬픔이 있는
너의 모습이 좋아라
눈물 감추는
너의 향기가 아파라
서정윤 <홀로서기3집> 중에서
'아카시아 길'
비 개인 아침
하얀 구름들은 산을 넘어
바다로 가고
무논에는 산그리메 푸릅니다.
산기슭 하얗게 피어나는
아카시아 꽃을 바라보니
벌 치러 벌통메고 산으로 간
친구가 생각나는 아침입니다.
섬진강 편지 -0509
보낸날짜 2001년 05월 09일 수요일, 오전 09시 35분 01초 +0900
머-ㄹ다
종다리 새 삶을 즐겨하는 곳-
내 바라보는 곳
처녀의 젖꼭지처럼 파묻혀서
여러 봄을 어둡게 지낸 마음..그러나
자라는 보리밭고랑을 밟고 서서
다사로히 흙냄새를 보듬은 이 순간
마음은 종달의 환희에 지지 않고
깨끗이 커가는 오월을 깊이 감각할 때
계집스런 우울은 암소의 울음처럼 사라지고
저 - 지평과 지평을 넘쳐흐르는 녹색을
오로지 소유할 수 있는 나!
나는 오월의 수염없는 입술을
여인의 기약보다도 더 살뜰히 간직해주려니
오월은 내 품에 영원하여라
이용악 시집 <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중에서
'오월'
'낡은집' '전라도 가시내'의 시인
월북시인으로 한 때 먼발치로만 이름을 듣던
시인의 '오월'을 향한 마음을 들여다 봅니다
'처녀의 젖꼭지처럼 파묻혀서
여러 봄을 어둡게 지낸 마음'에
이 오월은
'계집스런 우울은 암소의 울음처럼 사라지고'
'오월의 수염없는 입술'
보드라움과 환희를 주었던가..
'저 -지평과 지평에 넘쳐 흐르는 녹색을
오로지 소유할 수 있는 나!'의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렵니다.
윗녘에 비가 내린다는데
햇살 환한 섬진강변입니다.
<섬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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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편지- 0510
보낸날짜 2001년 05월 10일 목요일, 오전 09시 37분 11초 +0900
바닷가에 왔드니
바다와 같이 당신이 생각만 나는구려
바다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고만 싶구려
구붓하고 모랫톱을 오르면
당신이 앞선 것만 같구려
당신이 뒷선 것만 같구려
그리고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
당신이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구려
당신이 이야기를 끊은 것만 같구려
*지중지중 : 곧장 나아가자 아니하고
한자리에서 지체하는 모습
*개지꽃 : 강아지풀, 혹은 메꽃
*쇠리쇠리 : 눈부시다. 눈이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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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로 가는 '쇠리쇠리'한 물살을 바라보며
아침강을 건너 와
이용악시인과 마찬가지로 분단 40년만에 복원된
백석시인의 시를 읽어봅니다.
환한 날 보내시구요.
- 이번 주 섬진강을 찾아오실 '섬진강 편지'
가족들 맞을 준비로 마음 설레는 <섬진강>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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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편지-0511
보낸날짜 2001년 05월 11일 금요일, 오전 09시 35분 00초 +0900
천년 전에 하던 장난을
바람은 아직도 하고 있다.
소나무 가지에 쉴새 없이 와서는
간지러움을 주고 있는 걸 보아라
아, 보아라 보아라
아직도 천 년전의 되풀이다.
그러므로 지치지 말 일이다.
사람아 사람아
이상한 것에까지 눈을 돌리고
탐을 내는 사람아.
박재삼시선<천년의 바람>중 '천년의 바람'
쉼없이 스스로를 맑고 푸르게 하여
흐르는 강에 서면 또한 그러하다.
말없이 쌓아가는 저 눈부신 모래의 언덕은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그러므로 지치지 말 일이다.
사람아 사람아
이상한 것에까지 눈을 돌리고
탐을 내는 사람아.'
그대,
푸른 하루 만들어 가시길..
<섬진강에서 김인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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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편지 -0514
보낸날짜 2001년 05월 14일 월요일, 오전 10시 06분 03초 +0900 (KST)
아가
새아가
강 건너 저 밭을 봐라
저게 저렇게 하찮게 생겼어도
저게 나다
저 밭이 내 평생이니라
저 밭에
내 피와 땀과 눈물과 한숨과
곡식 무성함의 기쁨과 설레임과
내 손톱 발톱이 범벅되어 있느니라
김용택 시 '밭'
하룻밤 이틀의 섬진강 길
함께 어울린
이학성님 부부 김길봉님 부부
박정순선생님과 섬진강에 살고 싶다던
자운영(김윤영),신경숙님과 꼬마친구
풀꽃님,물새님, 구절초님,
김해화시인, 조호진기자..
참 꿈길 같은 길이었습니다.
돌아와 하룻밤 자고 나니
꿈 길이 었는지, 어제였는지..
장구목 가든 지나 요강바위 길
다시 한번 찬찬히 찾아가렵니다.
이번에 함께 하지 못하신
섬진강 편지 가족님들..
다음에는 꼭 같이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몸은 아직 피곤하지만
참 즐거웠던 생각으로 가득한
마음입니다.
넉넉한 마음의 한 주 되시길 바라며..
<섬진강에서 김인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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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편지 -0515
보낸날짜 2001년 05월 15일 화요일, 오전 10시 06분 52초 +0900
주차장 옆 민들레에게
사랑한다고 말해버립니다
고향 길 동구밖 감나무에게
사랑한다고 말해버립니다
비오는 저녁 캄캄한 하늘
깃 들으러 환하게 날아가는 흰 새들에게
밤길 달리다가 우뚝 마주쳐
차 안을 빤히 들여다보는 눈 말금한 암노루에게
사랑한다고 말해버립니다
밤늦어 혼자 찾아간 포장마차
마주앉아 술 마셔주는 따뜻한 사람에게
삶에 지쳐 몸 기대오는 외로운 여자에게
비틀비틀 사랑한다고 말해버립니다.
나는 사랑이 참 헤퍼서
길 가다 마주치는 모두에게
사랑한다고 쉽게 말해버립니다
그러나 어쩝니까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이는
이렇게 먼 길을 함께가는
당신 뿐
<사람의 깊이> 4집 중에서 김해화의
'길 위의 사랑'
. . . . . . . . . . . . . . . . . . .
감꽃 하얀 꽃눈이 세상을 향해 손을
내미는 날
환한 햇살에게도, 바람에게도
되비쳐는 강물의 푸른 물빛에게도
사랑한다고 말해보는
그렇게 모든 이에게 사랑한다고 말 해버리는
하루 만들어 보시길..
< 섬진강에서 김인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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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편지 -0516
보낸날짜 2001년 05월 16일 수요일, 오전 10시 05분 44초 +0900
그대 위의 푸른 나뭇가지들
그 위로 밤,
그 위로 하늘, 갈라터진 별들
마음의 갈기가 잔잔히 흔들리고
잊혀진 곳에서 水門 열리는 소리
그대가 헤매는 거리를 다 헤매고
마침내 그대 자신을 헤맬 때
기다리라,기다리라
奇蹟처럼 떠오를 푸른 잎사귀 하나
이성복 시집 <남해금산>중에서
'그대 위의 푸른 나무가지들'
붉은 장미가 피어있더군요
제철소 긴 철조망을 타고 넘는
오월의 장미
붉디붉게 피어있었지만
눈 뜨고도 보지 못했지요.
오월을 노래하지 못하는 마음이여
아, 눈 뜨지 못한 마음의 눈이여
水門 활짝 열려 메마른 들판을
넉넉히 적시는 소리
못 듣는 이 마음이여
그대는 그 소리 듣습니까..
<섬진강에서 김인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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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편지-0517
보낸날짜 2001년 05월 17일 목요일, 오전 11시 08분 50초 +0900
황사 탓일까요.
내일이 5.18이어서일까요.
잔뜩 가라앉은 마음입니다.
어제 가재를 잡으러 계곡에 갔던 아이의 친구가
잡아와서 한 마리 얻어왔다는 새끼 새
밤 내 베란다에서 들려오던 그 여린 울음소리
아직 혼자 먹이를 먹을 수도 없으니
잡았던 자리에 놓아주면 어미 새가 찾아와 데려 갈 것이라고
학교 갔다와서는 꼭 잡았던 친구와 같이 가서 돌려놓고 오라는 말에
덥석 얻어오기는 했지만 먹이도 먹지 않고 웅크린 채 떨고 있는
새끼 새의 모습에 전전긍긍하던 아이도 그러면 되겠다고 좋아합니다.
바라만 보아도 좋을 것들을, 제 자리에 있어야 할 것들을
그냥 바라만 보지 않는, 제 자리에 놓아두지 않는 마음을 돌아보는 늦은 아침
어린 왕자님이 보내주신 시 띄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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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빛 1
마종기님
내가 죽어서 물이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가끔 쓸쓸해집니다. 산골짝 도랑물에 섞여
흘러내릴 때, 그 작은 물소리를 들으면서
누가 내 목소리를 알아 들을까요. 냇물에
섞인 나는 물이 되었다고 해도 처음에는
깨끗하지 않겠지요. 흐르면서 또 흐르면서,
생전에 지은 죄를 조금씩 씻어내고, 생전에
맺혀 있던 여한도 씻어내고,외로웠던 저녁,
슬펐던 앙금들을 한 개씩 씻어내다 보면,
결국에는 욕심 다 벗은 깨끗한 물이 될까
요. 정말 깨끗한 물이 될 수 있다면 그때는
내가 당신을 부르겠습니다. 당신은 그 물
속에 당신을 비춰 보여주세요. 내 목소리를
귀담아 들어주세요. 나는 허황스러운 몸짓
을 털어버리고 웃으면서, 당신과 오래 같이
살고 싶었다고 고백하겠습니다. 당신은 그
제서야 처음으로 내 온몸과 마음을 함께
가지게 될 것입니다. 누가 누구를 송두리째
가진다는 뜻을 알 것 같습니까. 부디 당신은
그 물을 떠서 손도 씻고 목도 축이세요. 당
신의 피곤했던 한 세월의 목마름도 조금은
가셔지겠지요. 그러면 나는 당신의 몸 안에
서 당신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죽어서 물이 된 것이 전연 쓸쓸한 일이 아
닌 것을 비로소 알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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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편지 -0518
보낸날짜 2001년 05월 18일 금요일, 오전 10시 06분 40초 +0900
너의 편지는 오월에 끊겼다
햇살 좋은 날을 골라 노란 달걀 얹혀진
자장면을 사주라 하던 너의 푸른 소식은
오월에 끊겼다 길가에는 가로수들
말없이 하늘 쪽으로 향하고
나는 내가 가는 길만을 생각했다
가끔씩 발치에 걸리는 돌부리처럼
멀리서 온 너의 소식이 가슴을 후려칠 때면
나는 술에 취한 하늘 몇 쪽을 불러들여
생마늘 씹듯 깨물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일이다
왜 너는 내 속에서
비니루처럼 썩지 않는가, 밤늦은 귀가길
어김없이 뒤따르는 그림자가 되는가
오늘도 나는 네게서 배달되어 온
반성의 엄지손톱 아들아들 깨물며
밤길을 걸어 집으로 간다
박관서 시인의 '편지'
광주로 똑바로 갈 수 없었던 날들
길들은 한참을 돌고 돌다
어두워서나 겨우 돌고개를 넘던,
광주를 광주라 말하지 못했던 날들
'거기'라고 '거시기'라고 말해야 했던 날들
지하 콘크리트 어둠에 갇혀
폭도가 되어 친구를 고발해야 했던 날들
아, 광주, 오월
썩지 않는 비니루, 까만 비니루처럼
내 안에 떠다니는 광주를 떠올리며
강을 건너는 아침
강기슭 찔레꽃
하얀 무덤처럼 피어나는 날입니다.
<섬진강에서 김인호 띄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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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편지-0519
보낸날짜 2001년 05월 19일 토요일, 오전 10시 06분 04초 +0900
출근길 남해고속도로
앞서가는 화물차 뒤에
삐툴게 써있는 경고문
"뽀짝 다가오지마! 다쳐"
그래도 나는
'그대에게 뽀짝 다가서고 싶은 마음인걸'
하는 생각을 하며
강을 건넜습니다.
언덕에 자주빛 엉겅퀴 쭈그려앉아
모내기로 바쁜 들판을 바라다 보는
아침입니다.
주말..잘 보내시구요
<섬진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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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편지 -0521
보낸날짜 2001년 05월 21일 월요일, 오전 09시 35분 59초 +0900
장성 백양사 산문 앞에
서 있는 돌 하나
거기에
이 뭐꼬?
"父母未生前 本來面目是甚磨"
글자 속에 얼굴 파묻고 있는
날 내려다보며
비자나무 가지 위에 다람쥐 한마리
말 건넨다
니는 뭐꼬?
이종암 시집 <물이 살다 간 자리>중에서
'니는 눠꼬?'
죽순이 땅을 가문 땅을 비집고
올라오는 날입니다.
비가 내리면 쑥쑥 자랄텐데,
시골집 대밭에 몇 개 죽순을 캐와
껍질을 벗기니 연두빛 속살이
참 곱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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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편지 -0522
보낸날짜 2001년 05월 22일 화요일, 오전 09시 05분 35초 +0900
보낸이 "Daum 칼럼 칼럼니스트"
받는이 "Daum 칼럼 회원"
맑은 물소리에 황토빛
은은히 탄다
실핏줄 두근거리며 떠는
이 겸허한 생명
꽃에도 겸손이 있다면
나는 죽어 이땅의 동자꽃 되겠다.
송수권시집<들꽃세상>중 '동자꽃'
비, 달디단, 금쪽같은 비가 온다.
찔레꽃, 엉겅퀴꽃, 층층나무꽃, 감자꽃도
깨밭 손보던 할머니도 뜬모하던 아제도
재첩잡던 아짐도
둠벙물 끌어 올리던 양수기도
일제히 소리를 지른다
비, 단비다, 금비다, 비가 온다고
아무도 우산을 쓰지 않은 채 젖어 간다
나도 강둑에 서서
그렇게 한참을 비에 젖어 가고
그대가 오지 않으면
메말라 쩍쩍 금이 가는,
모 한포기 꽂을 수 없는 가슴
나는 천수답입니다.
<섬진강에서, 김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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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편지-0523
보낸날짜 2001년 05월 23일 수요일, 오전 09시 35분 00초 +0900
보낸이 "Daum 칼럼 칼럼니스트"
받는이 "Daum 칼럼 회원"
난 참으로 행복한 놈이다
남을 억누르며 못살게 구는
남의 눈에 피눈물 나게 하는
그러한 힘을,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으니
난 참으로 행복한 놈이다
그 무엇보다도
내 육신이 언제나 남에게 얻어터질 수 있는
아주 작은 몸뚱아리라는 것이
그리하여, 남을 하나도 때려 눕힐 수 없다는 것이
정세훈 시인의 '행복'
비가 그치고 난 뒤
구름에 가려
쉬 깨어나지 못한
아침 햇살처럼
덜 깨어난 몸을 가누며
강을 건너온 아침입니다.
'성은에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이 한 목숨 다바쳐 충성을' 맹서하는
신임 법무부장관의 취임사 문건이
지리산 골골을 흘러와
나의 아침을 어지럽힙니다.
이 나라는 누구의 나라입니까.
나는 그대에게
이 한목숨 다바쳐 사랑을 맹서하는
문건이라도 하나 써야겠습니다 그려.
<섬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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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편지-0524
보낸날짜 2001년 05월 24일 목요일, 오전 09시 35분 32초 +0900
보낸이 "Daum 칼럼 칼럼니스트"
받는이 "Daum 칼럼 회원"
봄부터 소금꽃 핀 얼굴로
아버지가 앉아 쉬던 논두렁
흰 억새꽃이 피고 있네
작은 꽃잎 하나 입에 물면
짠맛이 날 것 같네
아버지 몸 냄새
구수하게 날 것 같네
저녁 된장국에
억새꽃 따서 넣으면
이자때문에 식욕이 없는
아버지 입맛이 돌아올지 모르겠네
빈 들판에 뿌려지는
작은 흰꽃들은
봄의 싱싱한 꿈을
상하지 않게 하는
소금꽃인지도 모르겠네
정춘근 시인의 '소금꽃'
손 하나가 아쉬운 계절
할아버지가 굽은 허리로
쇠스랑을 지팡이 삼아
논두렁길 몇걸음 가다 쉽니다.
하늘을 봅니다.
아버지, 당신도 모내기 한창인 들판이
그리워 지상을 내려다보고 계신지요.
비 지나간 뒤 맑은 하늘
봄이 가고 여름이 다가오는 날
아버지 하고 불러보는 아침입니다.
개구리 울음 요란스런 날들
다가서면 뚝 그쳤다가 저만치 멀어지면
다시 요란스럽게 개구리 울어쌌는
논두렁길을 걸어 어둔 들판에
서보고 싶어집니다.
맑은 날 만드시구요..
<섬진강에서 김인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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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편지-0525
보낸날짜 2001년 05월 25일 금요일, 오전 10시 06분 31초 +0900
보낸이 "Daum 칼럼 칼럼니스트"
받는이 "Daum 칼럼 회원"
그대 이름 목젖에 아프게 걸린 날은
물 한 잔에도 어질머리 실리고
술 한 잔에도 토악질했다
먼 산 향하여, 으악으악
밤 깊도록 토악질 했다
고정희 시집 <아름다운 사람 하나>중에서 '전보'
오월이 가고 유월이면
시인의 작고 10주기입니다.
지난 봄,
마늘밭 푸르던
시인의 고향 해남에서
담아온 푸른바람 한줄기
오늘 아침 문득 가슴에 일렁입니다.
아직 오월인데,
아직 유월이 오지않았는데,
유월에는 해남에 다녀와야겠습니다.
시인이 그토록 사랑했던
지리산에 다녀와야겠습니다.
옅은 안개가 낀 아침강을 건너다
문득 스무살적 나를 본 것은
한 장의 편지때문입니다.
당신의 짧은 편지가
굳은 얼굴에 작은 미소를 심어주는 아침입니다.
<섬진강, 김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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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편지-0528
보낸날짜 2001년 05월 28일 월요일, 오전 09시 37분 52초 +0900
보낸이 "Daum 칼럼 칼럼니스트"
받는이 "Daum 칼럼 회원"
오뉴월 수수꽃다리꽃이
바람에 우수수거릴 때마다
그 청량한 향기가
보이지 않는 사방의
별을 생생히 닦아내는데요.
수수꽃다리꽃을
정혼자에게 보내선
파혼을 통고했다는 한 여인은
저 꽃을 일러
젊은 날의 추억이라 했다지요.
그런 서럽고 서느러운
그늘이 드리워져
수수꽃다리꽃도 우리네 사랑도
연자주빛으로
웅숭 깊어지는 건 아닐런지요.
고재종 시집 <그때 휘파람새가 울었다>중에서
'연자주빛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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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요일 죽순 잘랐냈던 대밭에
이번 일요일 다시 가보았더니
머리 잘려버린 채 대나무로 자라고 있었습니다.
아, 하늘을 향해 뻗어나야 할 꿈
머리 잘려버린 채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 곁에 서서 나도
나의 꿈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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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편지 -0529
보낸날짜 2001년 05월 29일 화요일, 오전 09시 37분 11초 +0900
보낸이 "Daum 칼럼 칼럼니스트"
받는이 "Daum 칼럼 회원"
비 온 뒤
세상 초졸한 것들이
잎새마다 빗방울 하나씩 달고
눈부셔 하고 있다
길모서리,혹은
돌 틈새에서 자란
세상 보잘것없는 것들이
흔하디 흔한 빗방울 하나에
온 몸을 반짝이고 있다
혼자서는 쥐뿔도 빛날 게 없어
서로 서로 눈부셔 하고 있다.
안준철 시집<세상 초촐한 것들이>중에서
'세상 조촐한 것들이'
아침 출근길
어제 받은 안준철 시인의 시집을 읽다가
섬진강을 건너면서 습관대로 백운산,지리산을
올려다봅니다.
참 환한 날입니다.
백운산도 지리산도 가만히 돌아다보아줍니다.
수묵화의 그 아련한 눈빛
그 숱한 질곡을 감싸안은 어머니의 품같은 점점의 산들
그 산의 품을 살짝 빠져나와 반짝이는
푸른 강물은
산을 떠받치는 아름다운 노래입니다.
그렇게 산과 강이 서로를 호명하며
"혼자서는 쥐뿔도 빛날 게 없어
서로 서로 눈부셔 하고" 있습니다.
<섬진강에서 김인호>
* 원치않는 분들께도 보내져 메일용량만
초과시키는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따로 원하시는 분들께만 보내고
'전체독자에게 메일보내기'는 오늘까지만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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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편지 가족들께
보낸날짜 2001년 05월 29일 화요일, 낮 3시 35분 04초 +0900
보낸이 "Daum 칼럼 칼럼니스트"
받는이 "Daum 칼럼 회원"
이침편지 말미에 쓴 글이
제 마음을 적절히 표현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섬진강 편지 독자의 한마디'에 올리고
개인 메일로도 보내져서 쓸데없이
중복된 글을 원치 않는 분께
보내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는데
안쓰는 걸로 오해하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많은 분들이 걱정하는 메일을 주셨기에
예전처럼 그대로 메일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쓸데없는 글로 소란스럽게 한 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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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편지-0530
보낸날짜 2001년 05월 30일 수요일, 오전 09시 35분 49초 +0900
보낸이 "Daum 칼럼 칼럼니스트"
받는이 "Daum 칼럼 회원"
지리산 바래봉 꽃숲 속으로
도인처럼 의젖하게 기어가는 달팽이
청록색 연봉마다 타는 붉은 꽃
꽃무더기 사이사이 아슬한 산길
한 생을 다하도록 걷고 또 걸어
얻은 것은 풀잎 이슬뿐이었네
행여 밟힐까 천지간에 조심스레
온 몸을 말아올려 스쳐가는 철쭉 꽃구름
지나온 길 또다시 되돌아 보면
잠시 소풍나와 즐기던 세상살이
느릿느릿 그러나 전신으로 열심히
바래봉 붉은 꽃숲으로 사라지는 달팽이.
김재균시집<달빛아래 찔레꽃>중에서
'꽃숲 속으로'
안개비가 내리는 아침
강은 재첩잡이 배 두척 띄워놓고
흘러가는 우리를 바라봅니다.
강물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너무 바빠 강물을 앞질러
흘러가버리는 날들입니다.
염소들 연한 풀을 찾아
느릿느릿 걸어가는 강둑 위로
이쪽 강변 밤꽃들 깨어나
저쪽 강변 밤꽃들 깨우는 소리 들리는
안개비 내리는 아침입니다.
'느릿느릿 그러나 전신으로 열심히'
길 가는 달팽이 걸음으로 걷는
하루였으면 합니다.
<섬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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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편지-0531
보낸날짜 2001년 05월 31일 목요일, 오전 09시 35분 35초 +0900
보낸이 "Daum 칼럼 칼럼니스트"
받는이 "Daum 칼럼 회원"
"옛말에 '작물들은 농부의 발소리를 들으며 자란다'고 하는 말을
강대인 선생은 그 말 그대로 믿으며 농사를 짓는다.
벼도 하나의 독립된 생명체이기 때문에 자신을 키워주는 주인을
정확히 알아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침마다 논을 둘러볼 때는 둑을 따라 모든 벼들에게
박수를 치며 하루를 시작한다.
박수가 논에게 하는 인사인 것이다.
.....................
저는 논에 나가면 벼들에게 박수를 치든, 말로 하든 다 인사를 합니다.
반드시 모든 벼들을 둘러보며 인사를 해야 합니다.
그럼 벼들이 좋아라 해요.
그건 체험과 직관으로 아는 겁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제가 자주 들른 곳의 벼는 잘 되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벼가 농부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조상님들의 말을 깨닫게 된 겁니다"
<새 한입. 벌레 한입.사람 한입>중에서
' 하늘의 기운으로 농사 짓는 생명의 농사꾼' 강대인 선생의 이야기입니다.
햇살에 몸을 뒤척이는 강물의 눈빛이 반짝이는
아침 강을 건너온 오월의 마지막 날
주위의 꽃들에게, 풀들에게, 나무들과 인사를 나누고
말을 걸어보는 시간을 만들어 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