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시
여기 맥맥히 흐르는 숭엄한 겨레의 숨결과 거룩한 호국의
발자취 살아 있어 경모의 정 뜨겁게 솟구치리
한핏줄 이어온 자존과 삶의 터전 지킨 영웅들 위훈으로
이 하늘 이 땅에 해와 달 고이 빛났어라
침략 물리친 선열의 얼 좇아 불뿝는 조국애 드넓게 떨치어
자랑스러운 민족사 영원토록 보전하리라
지은이 박경석
참고자료 : 전쟁기념관 명칭 확정 경위 및 '서시' 해설
전쟁기념관 명칭에 대하여 많은 논란이 있었다. 문학인을 비롯하여 각계의 전문가들이 반대 의견을 제기 한 것이다.
1993년 11월 30일. 나를 포함하여 8명의 토론자가 참여한 국방부 (전쟁기념사업회 ) 주관의 전쟁기념관 명칭 공청회에서 명칭 문제가 이슈로 대두되었다.반대론자들은 '기념이란 기린다는 뜻이지만 전쟁이란 있어서는 안될 지긋지긋한 것인데 전쟁을 기념할 수 없다' 는 주장이었다.' 기념은 결혼이나 독립 등 좋은 뜻을 갖는 데에만 사용해야 된다' 고 했다.
나는 즉각 반론을 제기했다.'기념이란 뜻은 오래도록 사적(史跡)을 전하여 잊지아니하게 함 이라는 사전적 의미가 있을뿐만 아니라 나쁜 것이라도 교훈으로 간직해야 한다는 명분이 있으면 기념해야 한다' 고 주장했다. 외국의 사례로 미국은 전사자를 추도하는 현충일을,'The memorial day',라고 하여 기념일로 부르고 있으며, 중국의 경우 남경대학살과 같은 치욕의 슬픈 대사건도 '난징대학살기념일' 이라고 한다.
우리는 국난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많은 전쟁을 치렀지만 때로는 승리도 하고 패배도 있었다. 오늘날 우리 국가가 존재한다는 것은 곧 외세를 물리쳐 승리했다는 증거이다.그러나 전쟁은 패배를 더 교훈으로 삼을 때 다시 되풀이 되지 않는다.
전쟁기념관은 그러한 취지에서 민족의 자존과 숨진 선열의 위훈(偉勳)을 기리기 위해 존재한다. 참고적으로 밝힐 것은 세계 선진국 여러 나라의 전쟁관련 시설물에는 전쟁기념관 (War memorial)이라는 명칭을 상용화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어떤 명칭 보다도 전쟁기념관은 건립 이념과 합치된다.
나의 제의에 따라 8명의 주제발표자가 투표한 결과 결국 찬성 6명 반대 2명으로 전쟁기념관 명칭이 정해졌다.
'전쟁기념관' 명칭에 대한 반대론자들이 제시한 대안은 '군사박물관','전쟁박물관'이었다. 이에 대한 나의 반론은 다음과 같다.
'박물관이란 사전적 의미는 고고학 자료와 미술품, 역사적 유물, 그 밖의 학술적 자료를 널리 수집 보존 진열하고 일반에 전시하는 시설이라고 하는데 전시품 가운데 고고학 자료와 역사적 유물 등은 거의 없고 모두 상징적 의미를 갖는 진열품이므로 박물관이 될수 없다' 고 주장하였다.
물론 선진국 여러나라에는 전쟁기념관 외에 전쟁박물관(War Museum)또는 군사박물관(Military Museum)이 있다.그러나 분명히 우리 전쟁기념관과 다른 것은 사전적 의미의 박물, 즉 역사적 유물을 비롯한 고대 병기 및 학술자료의 진열이 대부분이다.우리나라에서는 육군사관학교에 있는 군사박물관이 이에 적격일 것이다. 따라서 용산에 있는 전쟁 시설물은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 시설물이 대부분이므로 전쟁기념관이 맞다. 이런 복잡한 과정을 통해서 전쟁기념관이 탄생하였다.
그후 전쟁기념사업회에서는 당시 시단에서 활약하고 있는 중견 시인들을 선별, 서시 작시자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영광스럽게도 본인으로 확정되었다. 따라서 나는 전쟁기념사업회 이병형 회장으로부터 전쟁기념관 정문 중앙에 건립하게 되는 시비에 헌정하게 될 '서시' 창작을 위촉받았다.
나는 '서시' 를 쓰기전에 약 보름동안 기도하는 마음으로 현충사를 비롯한 선열의 유적지를 답사했다.특히 '서시' 는 전쟁기념관의 현판격인 정문 중앙에 설치되는 것이므로 최대한 절제된 시문으로 해달라는 것이 국방부의 요청이었다. 참선하는 마음에서 온 정성을 다하여 쓴 '서시' 가 바로 다음 글이다.
'서시' 제1연~ 여기 맥맥히 흐르는 겨레의 숨결과 거룩한 호국의 발자취 살아있어 경모의 정 뜨겁게 솟구치리.
'서시' 제2연~ 한핏줄 이어온 자존과 삶의 터전 지킨 영웅들 위훈으로 이 땅에 해와 달 고이 빛났어라.
'서시' 제3연~ 침략 물리친 선열의 얼 좇아 불뿜는 조국애 드넓게 떨치어 자랑스러운 민족사 영원토록 보전하리라.
각 연의 의미는 따로 해설할 필요 없이 총론적인 의미로 함축 설명 하겠다. 역사를 이어온 선열에 대한 외경과 조국을 위해 숨져간 호국의 열사에게 경외의 뜻으로 '서시' 의 첫 부분을 열고 다음으로 국난을 극복하여 민족의 맥을 이은 영웅들의 공훈을 찬양 하면서 오늘날의 풍요와 행복이 선열 때문임을 강조했다. 끝으로 선열의 위훈을 기리며 그 거룩한 뜻에 따르겠다는 우리들의 각오를 천명했다.
즉 전쟁기념관은 선열의 얼을 기린다는 측면과 그로부터 위훈을 이어받아 조국을 위해 헌신 하겠다는 맹세로 끝을 마무리했다. 따라서 전쟁기념관은 현재의 국가보위와 앞으로의 조국수호를 다짐하는 거룩한 성전이라는 것을 국민에게 주지시키기 위한 교육장이다. 전쟁을 잊고 있을 때 위기가 닥쳐온다. 항상 전쟁에 대비할 때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서울 한복판에 있는 용산 전쟁기념관은 우리 국민 모두에게 '유비무환' 의 진리를 일깨워 줄 것이다.
이 글 끝에서 한가지 밝힐 것이 있다. 전쟁기념관 정문 중앙에 서있는 시비 '서시' 에 관한 것이다.이 시비에는 그동안 기이하게도 시 제목과 시인의 이름이 없었다. 김영삼 정부 초기에 전쟁기념관이 준공되었지만 그무렵까지 정치군인의 입김이 통할 때 였으므로 나에 대한 거부감이 작용했다.즉 전쟁기념관에 먼저 세워진 시비 '조국' 도 박경석인데 또 시비 '서시' 에까지 박경석 이름을 조각할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무려 10여 년간 시 제목과 작시자 이름없는 유일한 시비가 되어 있었다.
이 사실을 확인한 2004년 당시의 전쟁기념관장 김석원 장군은 이사회를 소집 심의케 하여 합의를 도출한 다음 제목 , '서시 ' 와 ' 지은이 '박경석 ' 을 시비에 조각케 했다.
더 첨부 한다면 원래 정문 중앙에 설치토록 게획되었으나 그간 구석에 쳐박혀 있던 것도 김석원 관장이 원래 위치인 정문 중앙에 옮겨 세웠다. 내 걸어온 험난했던 발자취처럼 이 시비도 험난한 길을 걸어온 셈이다. 정치군인들은 이와 같이 끊임없이 나의 진로를 가로막아 왔다. 나는 그럴수록 힘이 더 솟구쳤다. 더 의욕이 샘솟았다. 내가 지치지 않고 창작을 계속 하고 있는 것도 이들의 견제를 헤쳐나가야 되겠다는 의지와 도전정신 때문이었다.
지금 용산 삼각지 전쟁기념관 정문 안쪽에 있는 시비가 바로 그 시비이다. 서시의 주제인 시비 바깥쪽 '전쟁기념관' 글씨는 건축공사 당시 대통령이었던 노태우가 썼다.
2016년 1월 2일. 다시 찾은 용산 전쟁기념관 시비 [서시] 앞에서. 뒤 건물은 국방부 본관.
[서시] 제목과 [지은이 박경석]이 빠진 초창기(1994년 8월 16일)의 박경석 시비
뒷 이야기
이 시비의 뒷면에는 당시 대통령인 노태우의 '전쟁기념관'현판 글씨가 조각돼있다. 노태우는 군 재직시절 나를 좋아했다.
하나회 멤버이기 때문에 내가 그를 멀리 한 것은 어쩔수 없는 내 성격 탓이다. 파월 제1진 맹호사단 초대 在求大隊長인 내 뒤를 이어 3대 在求大隊長을 노태우중령이 역임했다. 그 인연 때문인지 일부 정치군인들이 내 전쟁기념관 시비 헌시를 반대했지만 그는 웃으며 내 시를 받아드렸다. 서시 제목과 내 이름이 초기에는 빠져 있었으나 하나회 숙청 후 내 이름과 서시 제목이 뒤늦게 조각되었다. 나는 다른 곳의 시비 보다 전쟁기념관 시비에 각별한 정감이 가고 내 시문학 역정 가운데 가장 의미 깊게 생각한다.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은 육군본부를 계룡시로 이전시키고 그자리에 건립되었다.이전은 전두환이 하고 전쟁기념관 건립 구상과 건립은 노태우가 했다.건립 공사 말에 대통령이 바뀌어 김영삼이 준공 테이프를 끊었다.
김영삼 정부 일각에서 전쟁기념관 준공 직전의 건물을 딴 용도로 쓰고자 획책하였으나 결국 관철되지 못했다.군사문화를 왜곡하고 있었던 김영삼의 의중도 작용했었다고 본다.나는 전쟁기념관 보존 운동에도 참여, 결국 성사 시켰다.
99% 전쟁기념관이 완성되었는데 딴 용도로 바꾼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쿠데타,군란 등의 주역인 정치군인은 미워하더라도 국군과 正道의 군사문화는 존중되어야 한다.
김영삼 정부 초기, 완성 단계에 있던 전쟁기념관 건물을 다른 용도로 바꾸기 위한 계획은 경복궁 경내의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와 관련이 있었다.
즉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를 앞두고 그 건물 안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을 준공 직전의 전쟁기념관 건물로 이전 시키고자 획책했던 것이다.
나는 이 계획을 무산시키기 위해 분연히 일어섰다. 내 주장에 공감하는 학계를 비롯한 당시 군부의 뜻 또한 일치하였다. 결국 김영삼 정부는 그 계획을 포기했다.
오늘날의 용산 전쟁기념관이 있기까지 험난한 과정을 되새겨 보자. 김영삼 정부에서 경복궁내 옛조선총독부 건물을 헐고 광화문을 복원하기 위한 사업을 진행하면서 조선총독부 건물을 빌려 쓰고있는 종앙박물관을 준공 직전의 전쟁기념관으로 이전을 시도했었다. 당시 전쟁기넙사업회장으로 전쟁기녑관 공사를 책인지고 있던 이병형 예비역 중장이 대노하면서 정부에 철회를 강력히 요구했다. 당시 나는 김영삼 대통령의 육군담당 자문역으로 있을 때여서 이병형 장군을 도와 철회 웅동의 선봉에 섰다. 당시 육군은 물론 군내에서 존경을 받고 있던 이병형 장군의 후광으로 정부 당국도 철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대신 내가 김영삼 대통령의 '호국의 전당...'인가 하는 김영삼 대통령의 휘호를 받으면서 동판으로 주조 전쟁기녑관내에 영구 게시 하겠다고 건의 마침내 대통령의 고집을 추스리는데 일조했다. 근래 확인은 안했지만 김영삼 대통령의 동판 주조된 휘호가 중앙 홀 입구에 걸려 있을 것으로 믿는다.
전쟁기념관 건설 당시 하나회 정치군인 가운데 노태우는 나에게 동정적인 전우애를 보여준 유일한 경우였다. 특별한 인연도 있었다. 노태우 중령은 월남전 파병 제1진 맹호사단 초대 在求大隊長인 내 뒤를 이은 3대 在求大隊長을 역임했다. 그는 在求大隊長 시절을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으며 제1진 在求大隊의 빛나는 공훈을 늘 입에 올리며 나를 옹호했다.
특히 노태우 대통령은 전쟁기념관에 올릴 헌시 선정에 즈음하여 '박경석 시인의 詩 외는 전쟁긴념관의 의미를 후세에 전할 헌시에 별 의미가 없다' 고 직접 내 시 창작을 당시 건설중인 전쟁기념관 관장 이병형 장군에게 추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