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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시선 22 기별 인쇄 | 2018. 5. 3. 발행 | 2018. 5. 10.
지은이 | 서순우 펴낸이 | 정연휘|
펴낸곳 | 도서출판 해가 245-943 강원도 삼척시 오십천로 301-30. 101-1503 전화 033-573-4613 ․ 010-3341-3327 e-mail: haika@hanmail.net
출판등록 | 제99-10-3호 1999. 7. 7. 인쇄처 | 문왕사 033-648-3670
ISBN 978-89-93138-32-0 (03800)
값 9,000원
ⓒ2018 서순우 저자와의 협의에 의해 인지를 생략합니다. 잘못된 책은 바꾸어 드립니다. 날마다 좋은날 되십시오.
preface 머리말 오래도록 소름 돋는 그런 시
내가 쓴 시가 많이 부족하고 갈 길이 먼 것을 안다
그러나 시를 쓰는 동안은 오로지 나를 위한 시간이어서 좋았다 시 한 줄에서 얻는 변화가 좋았다
오래도록 소름 돋는 그런 시 쓰고 싶었는데 읽기 아까워 계속 머무르고 싶은 그런 시 쓰고 싶었는데
그러기도 전에 또 한 권의 시집이 만들어졌다
나를 위한 길 그 먼 길을 또 오래도록 가야 할 것 같다
2018년 5월 봄날에 서 순 우
Contents 기별 / 차례
시인의 말 | 11
1부 최고의 사랑 | 18 사주 | 19 기별 | 20 고향 | 21 시인 | 22 동백 | 23 맹방 | 24 눈물편지 | 25 장미공원 | 26 그렇게 살자 | 27 편지 | 28 세월 씨 | 29 아들아, 너는 | 30 은퇴 | 31 출렁다리 | 32 외풍 | 33 미륵바위 | 34 엄마 생각 | 36 기다림 | 37 틀니 | 38 봄눈 | 39 폭염주의보 | 40
2부 자작나무 숲에서 | 42 용서 | 43 소풍 | 44 낯선 즐거움 | 45 화장 하는 동안 | 46 일기장을 태우며 | 47 3월 | 48 빨갛게 웃으려 | 49 너의 시집 ‘엄마’를 읽으며 | 50 안개 길 | 52 남자라는 이름 | 53 무화과 | 54 전단지 | 55 낙타의 눈 | 56 잠은 안 오고 | 57 어느 주막에서 | 58 낮술 | 59 생쥐란 놈 | 60 기억 | 61 엽서 | 62 그러면 좋겠다 | 63 오늘처럼 | 64
3부 슈퍼 moon | 66 황태 | 67 살인의 추억 | 68 돋보기 | 69 정화 | 70 아침 | 71 기일忌日 | 72 폭설 | 73 가을이었다 | 74 벚꽃 필 적에 | 75 영채이야기1 | 76 영채이야기2 | 77 영채이야기3 | 78 영채이야기4 | 79 그리고 잊히는 거야 | 80 울 엄마1 | 81 울 엄마2 | 82 너처럼 | 83 길냥이 | 84 봄여름가을겨울 | 85 서당 개 | 86 그리움은 | 87
4부 詩집을 지으며 | 90 외박 | 91 92 | 유리라는 아이 | 92 93 | 여름밤 | 93 94 | 봄은 가겠네 | 94 95 | 가을은 | 95 96 | 새해는 | 96 97 | 때를 벗긴다 | 97 98 | 이맘때쯤 | 98 99 | 분꽃 | 99 100 | 야자타임 | 100 101 | 살구 | 101 102 | 시간 여행 | 102 103 | 벚나무 아래서 | 103 104 | 신발 한 켤레 | 104 105 | 부부싸움 | 105 106 | 나이 든 집 | 106 107 | 슬픈 오후 | 107 108 | 내 역사는 | 108
작가론·작품론 | 김진광⋅110 그리움의 파도가 부르는 몽돌의 노래
1부
최고의 사랑
좋아하던 윤정수랑 김숙이 이별했다 볼 때마다 진짜 결혼하면 좋겠다 싶었다 왜일까 목울대가 아프도록 울었다 이별의 마지막 표정을 견딜 수 없어서였을까 내 늙은 개가 몰아쉬던 세 번의 숨도 같은 이별이었다 가상이긴 했어도 최고의 사랑이었던 그들과 웃음만 주고 떠난 내 늙은 개의 이별도 그러했다 사랑은 이렇듯 슬퍼 눈물이 나고 이렇게 흘린 눈물로 날이 갈수록 내려앉는 눈꺼풀 내일은 또 얼마나 무거운 그 눈꺼풀로 살아가야 할지
사주
내 안에 화火가 없으니 물이 보이는 집은 맞지 않다고 그런데도 아파트분양 사무실에서 바다가 보인다는 꿈같은 말 귀가 아프도록 들었다 내 안에는 불이 없고 집에는 아파트가 싫다는 남편이 있고 온 마당에 방뇨 즐기는 늙은 개가 있으니 꿈같은 말 접어야하나 쇠붙이도 안 맞는다나 뭐라나 그럼 웬만한 반지나 목걸이도 다 물 건너간 게지 꿈같은 말 아니 꿈 하나씩 작아지고
나를 가두어 놓은 사주, 불이 없으니 그냥 영화나 자주 보라는데 호랑이나 한 마리 키우라는데
바다가 보인다는 아파트 자꾸 파도로 밀려오는데
기별
눈꺼풀에 바다를 눈썹 큰 산맥에는 숲을
어느 부처처럼 빨간 입술 칠하면 그대, 기별 올지도 몰라
산다는 건 때로 누구를 기다리는 것
그리하여 수로부인 철쭉 한 가지 슬쩍하면 혹여, 바다에서 기별 올지도 몰라
바닷속 용이 아니어도 소금기 가득한 남편이 올지도 몰라
고향
내가 사는 여기로 오고 싶다는 너의 말은 그리움이다
그리움은 어딘가 떠나 있는 사람들의 몫은 아니다 여기 그대로 남아 있는 내게도 그리움인 거다
남아 있는 나보다 떠난 너희들이 더 많아 여기는 텅 비었다
이제 우리는 중년 오고 싶다는 너의 말처럼 남은 그리움으로
여기, 빈 곳 채우며 살자
시인
“南시인 이 새꺄 요즘도 발가락으로 시 쓰냐?”
“나, 요즘 발가락으로도 시 못 써”
두 놈 다 끌고 술 마시러 앞장서 걷는 李시인
나도 명색이 시인 그 물음과 답 하늘 찌를 듯 부러운데
대낮 커피나무 문지방 걸치고 선 담배 문 소설가 그 웃음도 부러운데
나는 언제쯤 그 험한 농담 한 번 웃어넘길 수 있으랴
동백
꽃은 사랑해야 피거늘 차가운 별에도 가슴 떨며 붉은 채로 살아가던 일
산다는 건 꽃 피우는 일
사랑하는 동안 세상은 너처럼 붉은데
사랑한다는 말 이기지 못해 나를 안고 떨어지던 너
맹방
4월 맹방은 유채꽃으로 산다 유채바람이 든다 내 아버지 장지에 따라와 갈매기처럼 울던 영희
영희 엄마는 병들어 서울 딸네로 갔다 내 아버지와 똑같은 병을 가지고 억지로 서울로 갔다 항암을 해야 좋은지 영희가 물었지만 속 시원한 답을 줄 수 없다 아버지는 항암도 진통제도 필요 없다며 매일 자신 있어 했지만 나날이 몸은 유채꽃처럼 물들었다
아버지 곁에 엄마가 붙어 있던 것처럼 영희는 지금 엄마 곁에 맹방조가비처럼 붙어 있다
영희가 태어나 자란 푸른 사내 같은 파도가 사는 맹방 유채꽃 속에서 웃는 환한 영희가 보고 싶다
눈물편지
미술 역사 두툼한 책갈피 아버지 편지가 숨어 있었다
손자 대학 입학금 모으느라 자식들 쥐꼬리 용돈 아껴 천 원짜리 열장 모아 만 원 만들고 오천 원짜리 두 장 모아 만 원 만들고 근 십 년을 모아온 아버지 입학금 다 모으기도 전 병이 나버린 아버지 내 아버지 그 멀다는 저승길 앞에 두고도 부디 엄마 고생시키지 말고 누나 동생들이랑 오순도순 살라며 아들에게 쓴 눈물 편지가 오래된 책 속에 숨어 있었다
귀신도 잡는다는 해병대 아버지 팔에 새겨진 문신이 더 좋았던 브라보, 내 아버지 죽어서도 지켜주겠다며 꼭꼭 눌러쓴 눈물 자국
가슴 속 깊이 담겨있는 아버지 그리운 내 아버지
장미공원
여름에는 부쩍 사람도 많아 헐렁한 옷매무새에도 꽃잎 촘촘하다
더러는 해당화도 살아 마음 고와지고 어설픈 철길 아래로도 꽃잎 날리는
폐 안에 분진을 쌓으며 아버지 다녔던 시멘트회사 밤새 색등 곱게 밝히는 한때는 코스모스가 만발해 그 위로 바람 불고 큰물도 다녀가고
어린 내가 꽃이 되어 놀았던 오십천 몸짓
아직 떠나지 않은 연어 떼 오십천을 오른다 장미길을 걷는다
그렇게 살자 ― 맹인 부부
내내 흙 덮고 있던 풀처럼 살자 지렁이처럼 벌레처럼 끔틀거리며 그렇게 흙이 흩어지지 않도록 같이 살자 앞이 보이지 않아도 우리 다녀간 사람들 놓고 간 꽃냄새로 바깥은 온통 꽃인 걸 알자 오랜만에 아버지가 들려준 상주 얘기 어릴 적 살던 상주에도 빠져 보고 아버지 흉도 실컷 보며 살자 눌러댄 관절만큼 옹이진 손마디 그 손잡고 우리 시작했던 것처럼 나이 들자 앞이 보이지 않아도 눈 뜬 사람보다 더 환하게 살자 때로는 매미처럼 울며 살자 응어리진 세상 풀어주며 그렇게 살자
편지
내 젊음 같은 편지 편지 속 글씨는 내 그림 같은 꿈 네가 우표 붙이는 동안 나는 구름처럼 들떠 살았지
젊음 그 자체가 슬픔이었을 때로는 고통이었을
아니었어 편지 안에 쓰여진 희망 그리고 온통 행복들
아직 네가 보낸 편지는 젊은데 이제 우리 스스로 위로할 나이
그러나 아직 도착하지 않은 행운의 편지들
네 젊음 같은 편지들
세월 씨
세월 씨, 분꽃 피면 저녁 해 먹고 동네로 나가요 흘린 땀일랑 말라버리게 바람에게로 가요 이제 당신은 빨리 가려하지 말고 접시꽃 돌아 집으로 집으로 돌아오세요 종일 무슨 낙으로 사는지 물어도 꽃들은 대답 없고 해가 진 문밖은 벌써 풀벌레 울음으로 가득한데 하품은 오래도록 귀에 걸리네요
분꽃 지기 전에 잠들어야 해요 오늘밤은 당신도 나도 그리고 혼자 있을 그 누구도
아들아, 너는
봄이면 참꽃이다가 오월 바람 불면 아까시 하얀 향이다가
아들아, 지금은 여름의 시작 태양 같은 해바라기가 핀다 너를 닮은 붉은 태양이 핀다
참꽃처럼 아까시처럼 그렇게 핀다
아들아, 너는 분명 여름이다 활활 세상을 태우는 그런 여름이다
은퇴
단지 잎 떨구고 꽃 졌을 뿐인데 그냥 당신처럼 잠깐 쉬고 있을 뿐인데
매화가 산수유가 오가피가 잠시 쉬고 있는 그들을 댕강, 당신이 저버린 그날 바람은 몹시 불었다
다시 한 뼘 남은 그 위로 지금껏 비도 눈도 내리지 않았다 그냥 당신처럼 잠깐 쉬고 있는 그 위로 아무것도 내리지 않았다
출렁다리1)
그 후로도 오래 오십천은 흐르고 옛사랑도 다녀가고
그럴 동안 나도 자라 사랑을 하고 어른이 되었지
댓바람 숱한 날 못 다한 사랑으로 밤낮 떨리고 떨렸을 그 마음 나도 자라 다시 그 사랑으로 살지 그녀 죽선이 살던 그곳에 바람처럼 흔들리던 다리 하나 있었지
그 후로도 오래 오십천은 흐르고
이제는 마음에만 남은 옛 사랑 출렁다리 외풍 바삐 지은 저녁상 마주하고 아무 일 없는 듯 밥을 먹는다
서로 묻지 않아도
당신 몸에선 바다 냄새가 나고 내 눈은 어설픈 열정으로 붉은데
저 혼자 떠드는 텔레비전 앞에서 우리는 그냥 밥만 먹는다
우리만큼 나이 든 붉은 집 외풍이 심하다
------------------------------ 죽서루 누각 옆, 너럭바위에서 앞 동네 성남리를 연결하던 다리
미륵바위1)
소문이 났다 한 평에 일 원 한다는 미륵바위 물컹한 땅
언제부턴가 물은 보이지 않아 속으로 속으로 길이 나고 그 길 어쩌다 바깥을 엿보기도 했다고 있는 사람들 그 땅에 집 짓고 살 동안 미륵은 멀리 가지도 못했다고 난, 한참을 어려 일 원에 두 개 하던 풀빵 땅 대신 집 대신 겨우 사먹기도 하며 자랐는데 나도 멀리 가지 못하고 자식 낳고 살던 사대안길에 루사라는 큰 물 다녀갔는데 그제서야 사람들 고향 찾듯 강물도 옛길 찾았다고 끌끌 혀를 찼지
오랜만에 집채만한 미륵바위 그 미륵바위를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었다
------------------------------ 봉황산 아래 미륵바위를 안고 깊은 물이 흘렀다. 지금은 미륵불 3개를 얹고 터미널까지 가는 다리가 개통되었다.
엄마 생각
마른 매화나무 새들이 분주하다
밤새 뒤척이던 별들 다 어디 가고
아무도 없는 빈 아침
우리 집 강아지 폴도 엄마생각으로 운다
기다림
무지개처럼 바다로 간 남편
늙은 개와 나는 배가 고프고 파도소리 멀다
고기 잡아오면 구워 먹자고 달래보는데
자꾸만 배고프다 조르다가 땀에 절은 내 맨살 핥아먹는 늙은 폴 틀니 딸년들 보고 싶어 엄마가 청국장 끓여 불렀던 점심 슬픈 날이었다
틀니가 참 어울리지 않은 쪼글쪼글한 엄마 입이 많이 슬픈 날이었다
나이보다 더 늙어버린 울 엄마 입
입 안 가득 슬픈 그 와중에도 치과에서 빌려왔다는 책 밤새 떠듬떠듬 읽었을 그 책 진작 읽었으면 내 자식들 더 잘 키울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울 엄마
이제 아무렇지 않다며 틀니 가득 푸성귀로 채우던 울 엄마
이빨이 제일 예뻤던 울 엄마
봄눈
폴이 봄눈을 먹는다 칠십 넘은 개가 눈을 먹는다 매화 동백도 따라 눈을 먹는다
어느새 엄마 따라 살 찐 폴이 아들 같은 폴이 밥 달라 커피 달라 조른다
그래서 나도 따라 눈을 먹는다 봄눈을 맛있게 나눠 먹는다
폭염주의보
아직은 꿈속, 인력시장 줄이 길다 낮은 일당 긴 줄도 줄어들고 몇 푼 더 받겠다고 용을 쓰던 남은 꾼들 좀처럼 자리를 뜨지 못한다
사랑은 국경이 없고 바야흐로 일거리도 국경을 넘어서는데 정작, 우리네 사람들 일자리가 없다
세상은 온통 폭염주의보
시멘트가루가 반인 늙은 여자가 국밥을 먹는다 폭염 속 떠도는 몇 점의 고기와 배춧잎을 건져먹는다 나도 숨어 한 끼 밥을 먹는다
남은 꾼들 자리에 해가 뜬 지도 오래 늙은 여자가 밥풀을 달고 폭염 속으로 나간다
하루가 지나가는 자리 아직 일자리 찾지 못한 사람들 폭염이 날파리처럼 앵앵 달려들고 있다
2부
자작나무 숲에서
친구는 지중해 에메랄드빛 따라 가고 나는 원대리 자작숲으로 왔다 매화 필 무렵 찾아온 여기 아직 녹지 않은 눈 속에 모두가 발 시린 뿌리로 내리는 여기
하얗게 처절하게 추워 잎마저 잃은 자작에게로 나도 잃으려 왔다고 잃는 다는 건 다시 시작 되는 거라고 너는 말한다 여기서 한참을 하얗게 뿌리 내리자고
나는 너처럼 너는 나처럼 다시 살자 한다 하얀 눈길 걸어 이 겨울 건너가자 한다
용서
엄마! 장미 꽃말이 뭔 줄 알아?
글쎄, 사랑! 열정!
아니, 용서야 엄마
어제 아빠가 사온 장미 한 다발
엄마가 받았잖아
장미향, 그게 아빠 맘이야
소풍 ― 거제사 터
단풍처럼 나이든 아내랑 소풍가자 했다 오늘은 늘 다니던 길일랑 접어두고 좁고 가파른 길 가자했다 땀 위로 낙엽 지고 간혹은 바위에 그려진 이끼 지나고 아내는 반석 위에 늦은 점심상을 차렸다
누가 쌓은 돌탑일까 하루 몇 개나 등짐에 실렸을까 불심에 빠진 그 몸 성한 구석도 없이 시간은 또 얼마나 흘렀던 걸까
아내의 조용한 말도 빨갛게 물들어가던 오후
산중턱 돌탑 거제사 터라고 남편이 말했다 아내는 밥 한 덩이 입에 넣으며 그저 허허 웃는 돌탑이 된 남편을 무심히 바라볼 뿐이었다
낯선 즐거움
감기라도 올 것 같은 날 나는 머리에다 풀냄새 나는 염색을 하고 남편은 낚시 채널에서 고기를 잡는다
어제는 그토록 바라던 출퇴근 없는 그 바다에서 망상어 몇 마리에 좋아라 기가 살았던 남편
물고기들 다 돌아간 저녁 낚싯대 꽂고 앉아 더러는 바다와 만나는 오십천을 더러는 지나온 젊음도 낚아보는 것일까
바다에서 놀다 소금기 하얀 몸으로 돌아오는 아직은 낯선 하루
비라도 내리는 오늘 같은 날 남편은 낚시 채널에서 망상을 낚는다
낯선 즐거움은 또 이렇듯 시작 되는 것을
화장 하는 동안
푸석한 얼굴엔 분꽃 분을 호박꽃 노란 꽃술로 손톱 칠 하고 낮은 코에 접시꽃 올리는 동안
마당에는 벌 한 쌍 꽃마다 날아 연애하느라 바쁘다
어느새 내 마음 나리꽃으로 부끄럽게 피었나니
일기장을 태우며
밤새 음악 듣다가 책에 빠지다가 엄마는 아버지 기다리다가 전세 값 백만 원이 없어 고민고민 하다가 사랑이 어쩌고 고독이 어쩌고 슬프다가 다짐하다가 또 다짐하다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밤새 인생 말하다가 그러다 술도 마시다가 마음에 죄를 씌우고 고백성사도 봤다가 기쁨보다 슬픈 일기장을 태운다
내 청춘이여, 안녕.
3월
어쩌면 흙이랑 물이 만나 내 남편을 낳았는지도 몰라 밤낮 사랑하다가 아프다가 또 누구는 죽었는지도 몰라 아버지처럼
올케는 아버지가 사랑한 손자를 낳고 좋은 대학을 보내고
자랑할 것 없는 자식들 시도 때도 없이 기 살려주던 친구 같던 그 아버지를 보러 산으로 가는 길 산도 눈을 털고 개구리도 잠에서 깨어나는데 아버지는 아직 삼월 속에 누워만 계신다
빨갛게 웃으려
연지곤지 찍고 시작한 새날
살다보면 기쁨보다 슬픔 더 많아
봄부터 그렇게 살았을 민들레 한 송이 북풍에도 아직 노란데 오늘은 빨갛게 웃으려 부처님 찾아 갔다
너의 시집 ‘엄마’를 읽으며 ― 김은숙 시인님
오십이 고스란히 스며있구나
詩를 싫어하던 퇴근시간만 기다리던 내 남편
그래, 갱년기 느낄 새 없이 오십과 칠십 사이 그렇게 긴 강으로 흘렀구나, 나는
詩 하나의 그리움 詩 하나의 아픔 쟁여둔 골짜기 같은 길었던 내 강
다시 돌아본 오십 폭발하는 심장으로 내 살았음을 고백하나니
시인아, 내가 꽃피워 보낸 작은 간석 위에 아리고 어여쁜
詩 하나 얹었으면 좋겠구나 詩 둘 얹었으면 좋겠구나
안개 길
안개가 안개인 줄 모르고 길 하나만으로도 외롭지 않았던 대관령은 멀미에 안개 속이다
그때 아버지는 시멘트회사 삼교대에 익숙했고 젊은 감잎처럼 우리 곁에 있었다
대관령은 여전히 안개 길이고 앞이 보이지 않아도 길이길 원한다
지금쯤 서울 어느 쪽방에 담겨 편히 밥을 넘기지 못하는 아들과 군대 가는 또 하나의 아들이 지나는 대관령 안개 길
그 안개가 슬픈 길임을 안다 잘 보이지 않아도 꿈꾸는 길 슬며시 눈물 감춰주는 걸 안다
남자라는 이름
마음에 치마 두르지 않아도 종일 낯 씻지 않아도 아름다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남자라는 이름 한집에 오래도록 같이 살아도 좋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남자와 사는 여자
여자는 매일 화장해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남자가 될 수 없다는 걸 미리부터 알았느니
남자여, 그대는 여자의 남편이거나 여자의 아들이거나 여자의 아버지로 살아가는 아름다운 사람이나니
무화과
수많은 잎사귀로 부끄럼 다 가릴 순 없어도 안으로, 안으로 꽃 하나 피울 수는 있어
전단지
아직 괜찮아
오늘처럼 바람에 날리고 어제처럼 비에 젖어도 한 번 찾아와 줄 내 희망이 혹시 너의 희망이 될지도 몰라 너의 절망으로 내가 또 일어나고 다시 우리가 되는 풀꽃 같은
밤새 다짐이 되었던 종이 한 장
낙타의 눈
혜순 아버지 사우디에서 왔을 때 식구들 떼거지로 몰래 숨었다 낡은 집하나 남겨둔 채 내 아버지 밤낮 벌어도 안 될 큰 돈 가지고 어디 먼 데로 숨어버렸다
함께 못할 강이 있어 피붙이 남김없이 저리 떠날 수 있을까 자식 하나에 미운 정 하나 자식 보따리 참 많기도 했는데 돌아보니 혜순 아버지 내 아버지랑 다르긴 했다
그 후로도, 낡은 집에 어울리는 여자 여럿 살다가 가고 그렇게 젖은 눈으로 살다 혜순 아버지 마음의 병 한 보따리 지고 떠났다
아버지들 하나둘 이승 떠나가는 동안 모래바람 부는 사막의 길 아직 멀기만 한데
잠은 안 오고
간밤에도 잠은 오지 않아 폴이랑 베개 반씩 나눠 배고
너도 아프니 나도 아프다 아프다 했지
오늘도 저 달은 하늘에서 외롭다 하고 속 모르는 밤꽃 냄새만 밤 다 가도록 가득한데, 폴이 종일 지린 오줌 섞인 늙디 늙은 상추 그 상추쌈을 입 터지게 먹어봐도
잠은 안 오고 여전히 잠은 안 오고
별들도 총총 잠 못 들고
어느 주막에서
내일 따윈 없는 거야 그래 마셔 밥벌이로 지친 하루쯤 아무 일 아닌 양 장군의 함성 그칠 줄 모른다 열심히 싸웠던 그 장군 술 취한 말 위로 억센 마누라 힘껏 던지고 간 열쇠다발 거 참, 어쩌라고, 그래서, 말이 꼬이다가 말을 달리다가
달랑 탁자 두 개 주인이랑 셋이 든 술잔 서슬 푸르게 넘치던 술잔
어디서 한 잔 또 한 잔 술이 되어가는 또 다른 장군들 함성 들리다가 먹먹하다가
내일이면 쓰린 속 움켜잡고 해장국집 문 들어설 그 장군들
낮술
난생 처음 56도짜리 술을 마셨다
멋모르고 한 모금 혹시나 싶어 한 모금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사막 어디쯤에서 그대로 타 죽을 것만 같은 낙타의 슬픈 울음 같은
그래, 언제 한 번 56도 같은 삶을 살아는 보았더냐
캬,
생쥐란 놈
그땐 그랬다 천장에서 자기 집처럼 놀다 가끔은 방을 침입해 오던 긴 꼬리 힘 가졌던 놈 똥 싸고 오줌 싸고 천장은 늘 얼룩져 있었는데 함부로 내려온 녀석을 아버지는 아무렇지 않게 손으로 평정하곤 했다
다시 돌아왔다 잠들지 못하던 밤 물어물어 다시 찾아왔는지 엄마랑 살던 놈인지 나처럼 남편이랑 몇 날 같이 자고 같이 일어나는지
밥벌이 나가는 늦은 아침 다시 조용하다 곧 추워질 텐데 내 보내야 하나 어찌해야 하나
얄미운 생쥐란 놈
기억
생각나지 않았다 불빛 아래 떨어지던 땡감 어슬렁거리던 그림자
생각나지 않았다 낮일 리 없던 달빛일 리 없던
생각날 때까지 낮일 리 없던 땡감이랑 누군가, 어슬렁거렸다
갓 아래 불을 달고 집까지 바래다주던 환하게 웃어주던 그것 그것이 도대체 뭐냐고
가로등이라고 남편이 말했다
지금은 생각나지 않는 그 사람 이름처럼
엽서
포도넝쿨 아래서 너는 엽서를 쓰고
스물셋, 버스에 실어 떠나자며 또 엽서를 쓰고 소백산 철쭉에 눈멀어보자며 너는 또 엽서를 썼지
돈벌이 하던 스물 대학은 꼭 가야하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여고시절 군대처럼 떠들며 시간은 가고 있었지
1983년, 그때 그때가 그립구나
그러면 좋겠다
앵두꽃국에 괭이밥이면 좋겠다
마저 눕는 동백 모란 곁이면 좋겠다 돌나물 한 입에 여무는 매실 소리면 좋겠다
사월 따라 가는 봄이면 좋겠다
그러면 좋겠다 나도 좋겠다
오늘처럼
오늘처럼 우울한 날에는 방 한 칸, 바위가 반이었던 젊은 엄마 부엌을 생각한다
오늘처럼 눈물 고이는 날에는 산 속에 찬 흙 깔고 누운 내 친구 같은 아버지를 생각한다
오늘처럼 내가 싫어지는 날에는 내 나이 적 엄마와 내 나이 적 아버지를 생각한다
오늘처럼 감히 우울하고 슬픈 날에는 아버지 18번 곡 울고 넘는 박달재를 부른다
3부
슈퍼 moon
엄마 열 살 같은 달이 뜨고 엄마 칠십 여덟 같은 달이 뜨고 엄마는 자식들 위해 기도하고 다시 또 기도하고
나는 먼저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자식들 위해 기도하고 아니 제일 끝자락에 엄마를 넣었지 나는
황태
거기 눈 내리고 바람 부는 곳 언 몸 녹이며 멋지게 살아내는
여기 꽃에 지치기도 간혹, 잔소리에 지쳐 사는 아니 살아내는
거기는 황태가 살고 여기는 내가 남편이랑 갱년기 앞세워 살고
우리, 얼었다 녹았다 황태처럼 폼나게 살자
살인의 추억
때마침 시인이라면 어쩌겠다는 노랫말만 난무했고 누구 하나 없어져도 죄가 되지 않는 그 노랫말 곁에 내가 시인처럼 누워 있었다
쥐도 새도 모를 작디작은 아이 자궁 안에서 최고로 자유로웠을 아들처럼 잘 생겼을 또 한 아이를 위해 의사와 간호사, 내가 고작 하는 일이란 노래 속에서 작당을 꾸미는 일이었다
그냥 돌아갈까 하다가도 너무 멀었던 용기
그 아이 보내고 내가 남는 이상한 날을 남은 내게 링거가 매달렸던 이상한 날을 살인의 추억이라며 결국 만들고 말았는데 그 후로도 오래 날 떠나지 않았던 온갖 핑계와 이유로 살을 불리며 다시는 그 추억조차 꿈꾸지 못할 나이만큼 살았으니
그 보다 더 큰 죄 살며 없었을 터 살며 없을 터
돋보기
안경 한 번 써 보는 게 소원이었네 그러다 결혼했네 안경 쓴 남편을 얻고 안경 쓴 아들도 얻고 결국 나도 돋보기까지 얻어 소원 한꺼번에 이루어졌는데 텔레비전에서 맨 눈으로 신문 보던 운 좋은 100세 노인 부럽다며 건강한 몸이 부럽다며 보낸 문자
그 몸 자가 놈으로 그만 돋보기 없이 카톡 카톡 날아가 버렸네
황당했던 그 놈 새벽바람에 수국 한 다발씩이나 보내 왔네
괜찮다, 괜찮다며 화면 가득 웃음 보내 왔네
정화
책 천 권 읽겠다던 정화 끼 많던 정화가 늦은 나이에 결혼 했다네 의사랑 만나 아들 하나 낳았다네 속 썩이는 아들과 깐깐한 시어머니 그 둘 사이에서 정화는 점점 우울해져갔다네 그 많던 끼를 점점 잃어가고 있었다네 대학 시절 하늘 높은 줄 몰랐던 젊은 시절 잊고 살았던 그 친구들은 어찌 지내는지 영희는 시어머니 모시고 살고 경미는 이혼 했다고 다들 팔자대로 살아간다고 순이가 말했다네 어제 오후 이제 우리 뭉치자며 오랜만에 큰 소리 쳐보는 정화였다네
아침
김 시인처럼 될 수 없다는 걸 아는 아침
고 시인처럼 될 수 있겠다는 걸 아는 아침
멍하니 앉아 있는 내 詩들,
나팔꽃처럼 입 닫은 내 詩들,
기일忌日
나는 아버지를 잃고 점점 가난해져갔다 손 때 묻은 문 열면 미처 떠나지 않은 아버지 냄새 엄마는 그래 달포씩이나 아버지 위해 음식을 장만했다
아버지는 빈 가지들 사이 황토에 누워 또 겨울 나고 꿈에 만나는 건강한 아버지 잘 생긴 내 아버지
오늘은 아버지 오는 날 창문마다 산 자의 입김으로 달아오른 하루
눈물로 꽃 피웠던 봄 지나 여름 그 뒤 엄마랑 밤이나 실컷 줍자던 아버지 목소리 서럽도록 가깝다
폭설
비밀 하나까지도 묻는 날이었어 그 많던 문자 전화도 끝내 묻히는 날이었어 이별 사랑도 침묵하는 날이었어 종일 낯도 씻지 않고 저물도록 깊은 山만 그리워하는 날이었어
눈 위로 석양지는 소리
그리고 눈 속 깊은 어디쯤 누군가 잃어버린 길 위로 또 누군가 묻혀가고 있는 소리
가을이었다
복도 지나는 청년 붙잡아 모니터 빨간 불을 살렸다 내 빨개진 얼굴 보며 이별한 여자 친구 때문에 울적하다 했다 5개월 만에 까만 보호대랑 제대한 청년 오래도록 슬프게 앉아있었다 정말이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노라며 한사코 거부했던 공무원
새벽에는 알바를 오후에는 도서관에서 결국 공무원시험 공부한다며 여자 친구에게 복수하는 길이라며 낙엽이 무수히도 쌓여가는 가을이었다
벚꽃 필 적에
설거지 하다 창가에 훅 하고 떨어진 누군가의 입김 같은 아, 눈雪인가 싶었지 봄볕에도 녹지 않는 그런 눈雪인가 싶었지 저녁밥 안치고 찌개 끓는 사이 그렇게 하얀 바람 불었으면 싶었지 어디라도 눈꽃 몇 잎 들었으면 싶었지
기별인 듯 언약인 듯
행복은 벚꽃 피듯 짧아 이별조차 아름다운 것일까
영채이야기 1
난 여전히 배나들에 자주 가지 못하고 거리에 사는 너의 고양이만 만난다 네가 놓고 간 사료는 이제 새들도 앉아 배를 불리고 차동차 아래를 떠도는 고양이는 여전히 춥다
민박 들락이던 파도 민박 들락이던 사람들
다시 겨울 가고 봄 여름 오는 것처럼 살고 있는데
그러는 동안 너는 다시 한밤중 세상 떠난 고양이 언 땅 파고 묻고 다닌다는 뜨거운 소문으로 무성하구나
영채이야기 2
영채 따라 한 시간여 고양이들 밥 주러 다녔다 난 그냥 차 안에서 애가 마르고 총알이 예쁜이 영채가 지어준 이름으로 밥 기다리던 아이들
밤 열시 교동 택지 배 불린 사람들로 가득하고 그 사람들 사이로 영채 밥상 차리느라 바쁘다
호시탐탐 그만 두어야지 했던 죄인 같은 칠 년이 지나고 영채도 이제는 중년
오늘밤 기어이 길 잃은 갓난쟁이 또 가슴에 품은 영채
나를 떼어놓고 또 아이들 밥 주러 떠나던 영채
영채이야기 3
기어이 가슴에 품었던 그 어린 것이 이틀만 살다 갔다고 깜빡이는 차 옆에서 슬프게 말했다
젖은 사료 치우며 “그래도 십 년은 채워야지” 영채 눈이 별처럼 빛났다
전염병 남기고 떠난 어린 것 묻고 종일 소독하느라 축이 나버린 영채
영채는 늦은 밤 달이 되어갔다
영채이야기 4
배나들 작은 바닷가 고양이 여럿이랑 한솥밥 먹고 사는 여자
고양이에 미쳐 시도 못 쓰고 고양이에 미쳐 병도 나고 딸내미 장학금으로 고양이 수술해 주는 여자
가슴 아파하며 행복해 하며 더러는 자기도 잊은 채 고양이 엄마로 살고 있는 여자
그래도 고양이로 태어나는 건 싫다는 여자 영채.
그리고 잊히는 거야
하루의 반 하늘을 날아 동생네는 북유럽에 갔다 난 아직 외국여행 한 번 못 가보고 서운한 맘 알았는지 내 늙은 개는 십 년을 훨씬 넘어 살다 하늘나라로 갔다 내 품에 안겨 이틀을 보채다가 진짜 하늘로 갔다 이제는 외국에도 가고 여행도 하라면서
폴이 앉았던 자리에서 나는 물을 마시고 밥을 먹고 아무렇지도 않게 또 며칠을 살아낸다
죽음을 보여주고 떠난 별이 된 폴이 말했다 엄마, 죽음은 세상 누구에게나 다 오는 거야 지금 나처럼 그리고 잊히는 거야 이름 없는 별이 되어 반짝이는 거야
울 엄마 1
딸 친구가 봉사상 받았다는 현수막 보고 새벽바람에 전화 건 울 엄마 그 친구 봉사 얼마나 했냐며 따져 묻는다 얼마 전 포항 갔더니 아침부터 시의원들 거리 쓰레기 줍더라고 내가 사는 여기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노령연금 받아먹고 거리 쓰레기 줍고 그럼 또 돈 주더라며 뭔 놈의 돈이 그렇게 많아 이리저리 다 퍼다 나르냐며 내 몸 쉬었다 가는 곳도 모자라 돈이 줄줄 샌다며
정작 가난한 사람들 먹고 사는 일 바빠 점심 한 끼 못 먹는다며 엄마는 오늘도 자투리땅 찾아 먹거리 심느라 바쁘다
울 엄마 2
기르던 달팽이가 죽었다 엄마는 목욕시켜 산에 묻어주었다
산에 묻으며 자식들 건강하게 해달라고 막내 사위 막 시작한 대상포진 빨리 낫게 해달라고 그 여린 흙무덤 연신 끌어안았다
달팽이 하늘나라 가고 다시 혼자 된 울 엄마
저녁 내내 엄마는 말이 없었다 아버지 보낸 그날처럼
너처럼
너처럼 나이 들고 싶어 너처럼 물들고 싶어
너처럼 계절 내내 푸르게 한 철 나고 싶어
물러서야 할 때 이별해야 할 때 그렇게 내려놓은 너의 아름다운 모습
이 모든 것 쉽지 않은 일
너처럼 나이 들면 너처럼 물들면 너처럼 살 수 있다는 것을 나, 지금에야 조금 알겠느니 나무야, 너처럼
길냥이
겨울 다 가도록 눈도 비도 내리지 않았다 밭을 두고 마을 마다 급수가 시작되었다 내린다는 것 젖는 다는 것은 소망 같은 것이었다 덩달아 노랑이 밥이랑 노랑이가 젖지 않았다 제때 오지 않는 밥을 기다리다 남의 문밖을 남의 차 밑을 눈 이나 비처럼 기다렸을 노랑이,기다림은 그리움도 아닌 아픈 그 무엇, 찬 하늘 이고 술기운으로 돌아와 늦은 상을 차렸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국그릇은 빙판 밥그릇은 벌판이다 도둑 질 할 곳도 없는 메마른 거리, 도둑이라는 누명은 언제 벗어 내려는지
봄여름가을겨울
아까시 하얗게 따 먹던 봄 벌은 혹여, 입맞춤에 놀라 잠 못 들었을지도 몰라
거랑에 치맛단 띄우던 여름 물고기는 혹여 늘어난 팬티라도 봤을지 몰라
그 가을 감꽃 목에 걸어주던 남자 아이, 홍시 같은 내 얼굴 눈치 챘을지 몰라
발자국에 담기던 겨울 눈송이들 누군가 그 속에 사랑, 사르르 녹는 사랑 불러들였을지도 몰라
서당 개 ― 시집 ‘엄마’
십여 년 떠돌던 詩들 엄마라는 가호 달고 집하나 지었다
저마다 조팝꽃처럼 살다 누군가 불러주기를 간혹은 작약 닮은 냄새라도 피워주길 문 여는 소리 여삼추만 같은데
서당 개 한 마리 바람처럼 떠돌다 뭐라 詩를 나무라네
이런들 저런들, 살다보면 또 십여 년 떠돌 詩들인데
서당 개, 그 일생 또한 환대하나니
그리움은
그리움은 어제처럼 해로 뜨다가 저물다가 잎사귀 하나로 또 힘들다가
혼자서도 외롭지 않은 여름이다가 가을이다가
잎조차 아프지 않은 어디쯤의 마음이다가
그리움은 보지말다가 만지지 말다가 그냥 가고 싶은 곳에 가 있다가 혼자 음악 듣다가 혼자 매달려 있다가
그리움은 우리 절대 헤어지지 말자는 말言이다가 아니, 그만 헤어지자는 말言이었다가
4부
詩집을 지으며
詩집 마당에 당신 부르며 접시꽃 피었고요 석양 부르며 분꽃도 피었고요 덩달아 잠도 오지 않았고요 그럴 동안 태풍 두어 개 다녀갔다지요
누구든 詩집 하나씩 지어질 동안 이렇듯 마당에는 꽃이 피고 잠도 오지 않았을까요 어쩌다 詩집 문밖 서성거리던 사람
떠날 수 없어요 정말 떠날 수 없어요 詩집 문 열고 차마 떠날 수 없어요 이 소리 꿈에서라도 들으면 편한 잠 들 수 있을까요
새 詩집 지을 그 언제는 정말이지 돌아올 수 있을까요 詩집 문밖 서성거리던 사람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외박
풀들도 가고 나면 아직 남은 여름 안에서 나 외박 하리. 새와 벌레들 울음방에서 하루를 보낸 어느 달의 그 외박처럼 어느 시인처럼 나 외박 하리. 열을 앓는 강변, 그 강변, 팔월에서 외박할 동안 어느 별자리에서 쏟아진다는 별똥별 찾아 오십천에서 나 외박 하리. 내 늦은 소원 찾아 외박 하리. 그리하여 별똥별 세 개나 내 가슴으로 와 외박했느니
새와 벌레 그 울음방에서 풀도 가고 없는 텅 빈 방에서 나 다시 외박해보리
어느 달처럼 어느 시인처럼 그 강변처럼
유리라는 아이
긴 머리 작은 키 까무스름한 아이
언어로 세상 바꾸고 싶어 쓰고 읽고 봉사하고 바쁘게 산다는 2학년 여고생의 토요일 아침 유리라는 시골 아이 낯선 독학 밥 먹듯 하는 아이 그리하여 스스로 과분해진 아이 가진 것 많아진 아이
부끄러워 가슴 뛰는 날
내게도 같은 토요일 아침이었다
여름밤
풀벌레 울기 시작했네
내일 모레면 입추
땡볕에 놀던 사람들 돌아가야 할 시간 매미도 성난 울음 그쳐야할 시간
풀벌레 울며 가는 길은 가을일 터 간혹은 내가 울며 가는 길일 터
한 줄기 바람이라도 좋아 다 열어 두었던 밤
별 보러 나가자며 꿈에서도 조르던 밤
여름밤
봄은 가겠네
눈도 비도 한동안 깜깜 무소식이네 마침내 꽃눈 내리니 초록으로 일어서는 마늘들, 덩달아 바쁜 늙은 개 걸음 따라 어머님이 준 생일 돈으로 로마인이야기나 사야지 아버지가 두고 떠난 돋보기, 내가 대신 쓰고 아득한 그 로마 속으로 떠나봐야지 책 한 질 다 읽을 때까지 부디 봄 안에 머무르고 싶은데 벌써 목련은 꽃잎 피우고 벚꽃은 눈이 붉네 봄은 꽃 피우느라 바쁠 테고 내가 로마 어디라도 기웃거릴 동안 봄 은 또 저만큼 가겠네 아버지처럼 가겠네
가을은
국화 하나 벌 하나 벌 하나 국화 하나 가을은 풍성하게 소리 내 울고 있었다 거미는 한여름 같은 모기를 들이고 간혹은 국화에서 나온 벌도 들이면서 국화 지나 매화에서 앵두로 다시 앵두에서 금잔화로 줄을 치고 있었다 바람 불면 벚꽃보다 화사한 잎사귀가 오색으로 춤추는 가을은 그런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달이랑 단 둘이 오래도록 걷다 돌아와도 좋은 가을은 그런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밤새 달빛 그리워 줄을 치듯 울음 우는 가을은 그런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새해는
떠오르는 해를 어제 같은 내가 눈부시게 바라보는 일은 사치다
밤새 밀려왔던 福문자 내 것인 양 열어 보는 것도 사치다
서슴없이 다짐했던 지난 목표들로 곱게 늙어가는 이 또한 사치다
새해는 아주 작은 거 하나만 이루라는 지인의 문자 그 문자만은 사치가 아니길 오로지 내 것이길
그리하여 떠오르는 해를 사치스럽지 않게 오늘처럼 바라보게 되기를
때를 벗긴다
때를 벗긴다
남편 없는 그 여자가 남편 있는 몸뚱이 때를
여자의 기구한 히스토리를 들으며 간혹은 잠이 오다가 간혹은 미안하다가
기구한 여자의 손에 맡겨진 부끄러운 내 몸 내 몸뚱이에서 벗겨져 나가는 여자의 기구한 이야기
때가 벗긴다
이맘때쯤
이맘때쯤 서둘러 봉황산에 들어 뿌리 깊은 나무 속내와 오십천 한참 바라보다 바다처럼 살아 봐야지 산 아래 배 하나 매어놓고 몰래 꺾어 넣은 벚나무 가지 돼지목살에 푹 삶아 배를 불려봐야지
그러다 마음에는 몰래 꽃 하나 피워봐야지
분꽃
집에 들이지 않아도 거두지 않아도 매년 혼자 다시 살기를 반복하던 그 사람
늙어 씨만 남기고 떠났다 내년에도 먼 후일에도 또 다시 그렇게 살아갈 분이라는 사람
그 사람
야자타임
야! 이놈아 너 그 자리 낙하산으로 앉았잖아
쥐뿔도 모르면서 일하는 꼬락서니 하고는
술 취한 그 사람
그 후론 볼 수 없었다
살구
해를 놓지 못하는 저녁이면 바람 불고
그러면 제 몸 가누지 못하고 너는 태어나고 꽃처럼 주렁주렁 태어나고 너의 시디 신 그리움 입 안 가득 담고 싶어 만개한
내 사랑
시간 여행
충분히 나 혼자였을 때가 언제였던가 결혼 전, 스물다섯 근처라고 해두자 좋아하는 것에 빠져보는 것도 몰랐던, 더 멋진 나를 위해 뭔가를 해보지도 않았던, 그냥 그랬던, 열등감이 반이었던 그때로 돌아가 하늘 높은 줄 모르게 다시 나를 올려놓는다면 처절하도록 하루를 살아가게 한번 다그쳐 보자 그 후로 삼십 년이 흐르고 다시 삼십 년 후 처음처럼 후회하지 않도록 내 나이 시작하자 다시 스물다섯, 나 혼자여도 충분했던 그 시간으로 여행하는 것은 살아 있다는 기적
아직 돌아갈 때가 이른 불타는 청춘들이여,
나의 그때와 청춘들이 만나는 지금은 가장 소중할 때이나니 아직이라고 말하지 말자
벚나무 아래서 ― 버찌들의 반란
아, 꽃이 얼마나 꽃다워야 했길래 이렇듯 붉고 검은 채로 하늘 막고 섰느냐 꽃이기 전에 시작 되었을 최악의 몸부림 알겠다 나는 알겠다 상처로 인해 마음은 또 어디까지 아파해야 했었는지를 그리하여 낙하하는 지금은 절정 절정을 위해 누군들 감히 너를 밟고 함부로 가려 하겠는가
너처럼 나도 검고 붉은 채로 아파해야 하거늘 절정을 위해 낙하해야 하거늘
신발 한 켤레 ― 이산가족 상봉
접시꽃 피면 돌아오겠다던 당신 당신은 주름 가득 돌아오고
눈물도 흘리기 아까운 우리 주름 같은 이 시간
꽃은 부부라는 이름으로 피어나고 다시 피어나고
이제야 나이든 당신 이별할 당신에게 전하는
신발 한 켤레
부부싸움 ― 벚꽃 지면
“어디 나가는 거야?”
“나가 죽으라면서!”
“벚꽃 지면 잎도 지겠지”
“나도 지겠지”
나이 든 집
양철 지붕은 밤새 빗소리에 울다가 웃다가
한동안 새댁이었던 여자, 화장기 없는 얼굴로 해풍 속에서 아이 낳았다는데 남편은 군에 입대해 버렸다는데 아이는 엄마 등에서 매일 조금씩 자라나 남자가 되어갔다고 이집 저집 여물 날라다 집 불리던 여자, 먼 바다 저 멀리 변변치 않게 딴 살림 차리기도 했던 남편, 집은 아들 키 만큼 자라나고 여자도 칠십 넘어가고 있었는데 이제는 나이든 집 떠나도 된다며 아니 집 허문다는 통보가 날아들었다고
양철지붕에 내리던 빗소리처럼 엄마는 울다가 웃다가 세월 가면 그렇게 사라져가는 것들
슬픈 오후
수줍은 듯 입은 한복 곁에 군복으로 서 있던 상 남자 둘은 그렇게 한 장의 사진을 남기고 나이 들어갔는데 작은 방안에서 지지고 볶았어도 같이 산다는 건 같이 늙어간다는 것인데 같이 늙어간다는 건 삶의 끈과도 같은 것인데
그 끈 하나 잃어버리고 엄마는 혼자가 되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마지막 책장 넘기며 더 가슴 아픈 슬픈 오후
영정사진 찍겠다며 한복 입을까, 양장 입을까 엄마가 전화한 슬픈 오후
내 역사는
동해 푸른 바다 야자수 같은 배 띄우고 아끼던 책 하나 읽다가 그냥 파도랑 멀어지는 꿈
종일 차를 마시고 시집 한 권쯤 곁에 두어도 심심하지 않을 오후 그 어디 추장도 아닌 그 추장의 아내도 아닌 작은 반도 작은 마을에서 아들 둘 낳고 작게 살다 간 여자
부지런히 살아갈 궁리로 차츰 나이도 잊어가던 그런 이야기 하나쯤이면 그런 입소문이면 좋겠다 작가론·작품론
그리움의 파도가 부르는 몽돌의 노래 ― 작은 모래가 모여 바다를 안는다
김 진 광 시인, 문학평론가
1. 서순우의 삶, 자선 대표작품, 제1시집 들여다보기
서순우 시인, 오랫동안 같은 길을 함께 걸어온 동지 같은 느낌이 든다. 필자가 삼척문인협회 회장을 맡았을 때 사무국장을 맡아줄 마땅한 사람이 없었다. 당시 그는 아들 둘의 교육 뒷바라지와 두타문학 사무국장을 맡아 매달 시첩을 편집하고 시낭송 준비에 바쁘게 살았지만, 기꺼이 삼척문협 사무국장을 겸임해 도와주었다. 그래서 그의 모교인 필자가 근무하는 삼척여고 교장실을 자주 찾아와 각종 행사와 동인지 편집 등의 일을 함께 준비하고 실행한 문학 동지이다. 그는 그 후 두타문학회 회장, 삼척문협 부회장, 그 외 글샾동아리 회장, 독서회 회장, 모교 동문회 사무국장, 삼척교육문화관 ‘상주작가실’ 운영 등의 일을 요란하지 않고 말없이 잘 맡아 한 줄 안다. 서 시인은 1961년 11월 18일 강원도 삼척군 삼척읍 사직리에서 아버지 서재옥과 어머니 이옥순 사이에 1남 3녀 맏이로 태어났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겪으며 삼척여고를 졸업하고 대학 진학보다는 농협에 취직을 선택한다. 같은 직장에 있는 남편을 만나 결혼 후 퇴직하여 두 아들을 키우며, 부모님을 자주 찾아뵙는 효녀로 남매들과도 늘 우애 있게 산다. 이러한 환경과 생활이 문학활동과 사회활동 그리고 문학작품에 미친 영향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장녀로서, 며느리로서,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직장인으로서의 생활이 그에게 묵묵히 일하는 리더로, 자기 나름대로 둥글게 사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의 자태나 화장법이나 몸치장은 늘 수수하여 사람들의 눈길을 끌지 않는다. 행동이나 성격도 모나지 않고 바다의 몽돌처럼 둥글다. 그가 빚어내는 작품도 사회 참여나 비판적인 면이 적다. 사물과 사회를 바라보는 눈빛도, 예리하기 보다는 따뜻하고, 모나기 보다는 둥글고 긍정적이다. 말이나 행동에서 그 사람의 성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이, 예술 작품에서도 자기의 성격이나 사상이 드러나며, 그 둘이 잘 맞았을 때 개성 있고 창의적인 좋은 예술작품이 탄생할 수 있겠다. 서 시인이 즐겨 다루는 시의 소재는 엄마와 아버지와 남편과 아들의 가족이야기, 갱년기를 이겨내는 이야기, 가족과 같은 강아지 이야기, 길고양이를 키우는 영채 이야기, 친구 이야기, 동창회 이야기, 시 이야기, 술 이야기, 지역 이야기 등 소소한 작은 이야기가 있는 시를 즐겨 쓴다. 그의 시는 과거의 이야기가 현재와 오버랩overlap되어 밀려오는 ‘그리움’을 받아 적는 몽돌의 노래이다. 돌은 더 부셔져 모래가 된다. 모래가 모여 모래밭이 되고, 그 위에 세상의 모든 강을 받아주는 큰 바다를 안는다. 그의 시들이 대체로 그렇다. ‘그리움’을 테마로 한 서 시인의 시적 에스프리esprit와 가족과 이웃과 동물과 지역 사랑의 변치 않는 동일성identity 시도는 과거에서 현재로 미래로도 오래 지속될 것 같다. 서 시인이 두타문학 동인으로 발을 들여놓은 해는, 『문학과 세상��에 시인으로 등단한 2002년이었다. 늘 실과 바늘처럼 붙어 다니는 정순란 시인과 함께 봄의 여신인 백목련으로 두타문학회에 환하게 불을 밝혔다. 그해 『두타문학�� 26집에 실린 서 시인의 시는, 기획 특집에 태풍루사가 세상을 쓸고 간 아픔에 시적자아의 가벼운 입술에 대한 반성과 빨간 석류를 보며 자연의 섭리를 노래한 ‘더 이상 아름다울 수 없는/ 들녘이 슬프고/ 일상만 탓하던/ 내 가벼운 입술도 부끄럽다// 하룻밤 사이// 마음 한 구석 허욕더미/ 같이 보내기로 한 날/ 키를 넘는 석류만이 빨갛다.’(「태풍루사」 일부)가 게재되었고, 태풍루사 직전에 열렸던 ‘삼척 세계 동굴 박람회’ 관련 작품도 게재되어 있다. 필자는 『삼척문학통사��(2011, 해가)에서 서순우 시인 자신이 선정한 그의 대표작 10편을 <현실 속에서 꿈 찾기>란 주제로 살펴보았다. 대표작 10편의 특징을 찾아보면 단시가 별로 없고, 모두 호흡이 긴 이야기가 있는, 연 구분이 없는 서사시 구조이다. 시 「고흐 당신에게」는 고흐의 자화상 그림 작품을 보면서 시적자아가 주인공에게 자신의 심정을 대화체의 편지글 형식으로 쓴 작품이다. ‘~싶었소 / ~소’의 어미로 문장의 끝을 마치는데, 이것은 각운을 맞추어 리듬의 반복과 다정함과 자신의 꿈을 이루고 싶은 소망을 성취하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끝부분에는 <부디, 당신을 닮은 한 폭의 자화상처럼 / 나도 그리 살다가 가고 싶소>에서는 고흐처럼 예술세계를 걸어가고 싶은 작가의 의지가 나타난다. 앞의 시와 유사한 내용의 시로 종교가요 시인인 한용운을 떠올려 시적자아의 꿈을 노래한 「용대리에서」가 있다. 「무소유」도 역시 법정스님을 보내고 시적자아가 이루고 싶은 꿈을 당신(법정스님)에게 쓴 여성적인 대화체 편지글의 시로 무소유에 대한 시적자아의 탐구이기도 하다. 「사직동 이야기」는 그립고 정겨운 어린 날 풍경화를 시청각적으로 잘 나타낸 작품이다. 「엄마」에서 <나는 엄마보다 더 빨리 나이를 먹어가며 / 내 안에 다시 반으로 채워질 / 엄마라는 이름이 되고 싶다>와 「문득 내 역사는」에서 <어느 작은 마을에서 / 아들 둘 낳고 예쁘게 살다가 갔던 여자로 / 기억 되다가>에서 시적자아는 여인의 평범하고 소박한 꿈을 소망하고 있다. 그리고 「내 나이 오십」 에서는 ‘장맛비, 남루해진 내 살점, 여자에게 좋다는 붉은 자두나무 곁을 자꾸 서성이었다, 슬픈 유행가, 잠들 수 없었던 내 나이 오십’ 등의 어휘나 문장을 통하여 나이 먹으면서 변해가는 몸을 보면서 슬퍼지는 생각을 절실하게 시로 형상화했다. 이러한 서 시인의 특징을 살려 더욱 정진한다면 이야기가 담긴 서사구조의 시로 크게 성공할 가능성이 보인다고 평을 한 바 있다. 그가 낸 첫 시집 『엄마��(2015, 해가)에는 76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등단하고도 13년 동안 써온 시를 묶어내었으니 시 소재와 내용이 다양하였다. 앞에서 서 시인 스스로 선정한 10편의 대표작을 살펴보았다. 여기서는 지역 사랑을 노래한 로컬리티locality 소재의 작품을 더 살펴보기로 한다. 욕망 비우기를 공감각적 이미지로 형상화한 ‘혹여,/ 소쩍새 소리에 깨어나/ 해우소라도 갈 수 있다면/ 초승달이라도 차고 앉아/ 시 한 편 암송하겠네 (「영은사에서」 끝부분), 광진산 새벽길에서 본 고라니는 새벽 풀꽃처럼 싱싱하고 똥에서조차 풀숲 냄새가 나는 수묵화 첩첩산에 시인의 꿈도 피어나는 이슬처럼 맑은 시로’풀이 깨어나던 길/ 고라니의 뒤태를 보았다/ 이슬을 달고 뛰던 몸에서/ 초록물이 떨어졌다/ 까맣게 윤이 나던 똥에서/ 푸른 숲 냄새가 났다(「광진 산에서」 앞 부분), 10월이 며칠 남은 가을날 친구를 불러, 늙은 회화나무와 느티나무 위의 새, 죽서루 아래 흐르는 오십천, 너럭바위, 왕대나무 숲을 만나고 그들처럼 오래 누워 오가는 숱한 사랑 노래 몰래 들어 보아도 좋겠다는 관동팔경 제1루를 노래한 「죽서루에서」, 그 외에도 「한재에서」, 「두타산」, 「도경역」, 「활기리의 밤」, 「미로」 등에서 지역을 사랑하는 향토성이 돋보이는 작품을 만날 수 있었다. 제1시집에서 「해무」와 함께 가장 시적표현이 돋보이며 의미성에서 성공한 그의 대표작의 하나인 「건지골을 지나며」를 살펴보자.
강바람이 되는 길// 어둠 속에서/ 사내는 도심의 귀퉁이를 잡고/ 새벽인 양 흔들린다// 저 멀리 물안개 오르는 소리/ 내 몸도 이제/ 강바람에 철저히 섞여야 하는 시간// 나지막한 오십천 갈증이/ 올려다보는 철교/ 철교를 건너는 사람들의 발에서/ 쇳소리가 난다// 소쩍새 숨어든 지금/ 수은등 창백하고/ 오십천은 一月처럼 떨며 흐르는데/ 나는 건지골 어디쯤에서/ 이렇게 헤매는지 ― 「건지골을 지나며」 전문
2. 가족과 고향, 그 따뜻한 이름
(1) 가족, 최고의 사랑을 필자는 서순우 시인의 제2시집의 해설을 쓰면서 조금 욕심을 내어 되도록이면 시 이론은 절제하고 지금까지 쓴 여러 시를 통하여 그의 작가론을 겸한 작품론을 시 해설을 하며 정리해 보고자 한다. 작품의 진정한 해석은 작가론이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 시인이 자선한 삼척문학통사에 실은 10편의 대표작품은 먼저 발간되었지만, 대부분 첫 시집에 실렸기에 다시 언급해 보았다. 그리고 덧붙여 의미 있는 지역 사랑의 로컬리티 소재 작품을 간략히 정리해 보았다. 그럼 함께 즐겁고 설레는 마음으로 서순우 제2시집 여행을 떠나자. 서순우 시인은 가족 사랑이 각별하다. 가족 관련 작품이 반 가까이 차지 할 정도이다. 특히 첫 시집에 이어서 엄마,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남 다르다. 이번에는 남편과 두 아들이 관련된 작품이 여러 편 보인다. 십여 년 함께 가족처럼 살다가 얼마 전에 사별한 강아지 ‘폴’도 가족이다. 혼자 외로울 때, 누군가 그리울 때, 남편은 직장과 퇴근 후 술집에서 공휴일은 낚시로, 아들은 이미 부모의 품속을 떠나 가슴이 허전한 갱년기에 ‘폴’은 유일하게 대화의 대상이며 곁에 함께 있어주는 동물 이상의 가족이다.
좋아하던 윤정수랑 김숙이 이별했다 볼 때마다 진짜 결혼하면 좋겠다 싶었다 왜일까/ 목울대가 아프도록 울었다 이별의 마지막 표정을 견딜 수 없어서였을까 내 늙은 개가 몰아쉬던 세 번의 숨도/ 같은 이별이었다 가상이긴 했어도/ 최고의 사랑이었던 그들과 웃음만 주고 떠난/ 내 늙은 개의 이별도/ 그러했다/ 사랑은 이렇듯 슬퍼 눈물이 나고
이렇게 흘린 눈물로/ 날이 갈수록 내려앉는 눈꺼풀 내일은 또 얼마나/ 무거운 그 눈꺼풀로 살아가야 할지 ― 「최고의 사랑」 전문
소개한 「최고의 사랑」은 두타문학 홈피 2017년 10월 ‘두타시 낭송 작품’에서 많은 사람들이 열어본 독자의 공감이 큰 시이며, 필자가 논설위원으로 있는 ‘삼척동해신문 시 초대석’에 소개한 그의 대표작품의 하나이다. JTBC TV 방송 프로그램에 오랫동안 인기 프로로 방영된 <윤정수와 김숙>의 가상 커플이 재미있고 잘 어울린다며 진짜 결혼하기를 많은 시청자들이 기원했다. 방영이 끝나고 이별을 하자 서 시인 또한 ‘목울대가 아프도록 울었다/ 이별의 마지막 표정을 견딜 수 없어서였을까’하고 슬픔에 빠진다. 그 이별의 광경 속에 파도처럼 겹쳐서 사랑하던 강아지 <폴의 죽음>이 오버랩 된다. ‘내 늙은 개가 몰아쉬던 세 번의 숨도/ 같은 이별이었다’ 이별을 노래한 시와 소설, 영화가 많다. 그리고 애완동물 또한 우리들의 가족으로 인식하고 있는 시대이다. 이 시가 사람들이 공감하는 좋은 시가 된 것은 요즘 인기리에 TV에 방영된 내용을 시의 소재로 한 점, 그 내용에 애완견과의 이별을 비유적 이미지로 표현한 점, 매정한 시대에 눈물의 의미를 담았기 때문이리라. 그 외에도 ‘폴’이 등장하는 시는 많다. 아들 같은 폴이 눈을 먹자, 서 시인도, 매화와 동백꽃도 다 함께 나누어 먹는 「봄눈」얘기, 개와 함께 시적자아의 아픔을 나누는 시 ‘간밤에도 잠은 오지 않아/ 폴이랑 베개 반씩 나눠 배고// 너도 아프니 나도 아프다/ 아프다 했지/ (중략) 별들도/ 총총 잠 못 들고(「잠은 안 오고」일부), 폴의 죽음을 통해 죽음의 의미를 깨닫는 시 ’폴이 앉았던 자리에서/ 나는 물을 마시고 밥을 먹고/ 아무렇지도 않게 또 며칠을/ 살아낸다// 죽음을 보여주고 떠난/ 별이 된 폴이 말했다/ 죽음은 세상 누구에게나 다 오는 거야/ 지금 나처럼// 그리고 잊히는 거야/ 이름 없는 별이 되어 반짝이는 거야 (「그리고 잊히는 거야」 일부)
단지 잎 떨구고/ 꽃 졌을 뿐인데// 그냥 당신처럼/ 잠깐 쉬고 있을 뿐인데// 매화가 산수유가 오가피가/ 잠시 쉬고 있는 그들을/ 댕강,/ 당신이 저버린 그날/ 바람은 몹시 불었다 ― 「은퇴」 일부
어제는/ 그토록 바라던/ 퇴근 없는 그 바다에서/ 망상어 몇 마리에/ 좋아라 기가 살았던 남편(중략)/ 비라도 내리는 오늘 같은 날/ 남편은 낚시 채널에서 망상을 낚는다// 낯선 즐거움은/ 또 이렇듯 시작 되는 것을 ― 「낯선 즐거움」 일부
눈꺼풀에 바다를/ 눈썹 큰 산맥에는 숲을// 어느 부처처럼/ 빨간 입술 칠하면// 그대, 기별 올지도 몰라// 산다는 건/ 때로 누구를 기다리는 것// 그리하여/ 수로부인 철쭉 한 가지 슬쩍하면/ 혹여,/바다에서 기별 올지도 몰라// 바닷속 용이 아니어도/ 소금기 가득한/ 남편이 올지도 몰라 ― 「기별」 일부
위에 소개한 3편의 시는 남편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시 「은퇴」는 남편이 꽃과 잎 떨어뜨리고 잠깐 쉬고 있는 꽃나무 가지를 커팅 하는 걸 보며, 당신과 같은 입장의 나무를 자르는 아픈 마음을 표현한 시적 비유가 뛰어난 시이다. ‘댕강’ 당신이 저버린 퇴임한 그날 바람이 몹시 불었고, 잘린 꽃나무 위로 비도 눈도 내리지 않았다는 아내의 걱정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취미가 낚시인 남편은 퇴임 후 여가를 낚시로 보낸다. 비 많이 오는 날이나 밤이면 낚시 채널을 고정하고 지나온 젊음이나 어떤 ‘망상’을 낚아 올린다. 이것이 아내에게는 「낯선 즐거움」으로 보인다. 낮에 낚아 올린 ‘망상어’와 낚시 채널로 낚아올리는 ‘망상’의 동음이의어가 묘한 재미를 준다. 시 「기별」은 ‘소식을 전함, 또는 소식을 적은 종이‘란 뜻의 말로, 이 시집의 제목이기도 하다. 이 시집에 실린 시는 주로 첫 시집 『엄마��(2015)이후에 나온 시들로 남편이 퇴직 전후 서 시인은 갱년기의 터널을 빠져나가고 있을 50대 중반에 쓴 작품들이다. 남편과 깨소금 쏟아지는 사랑의 시는 바라기 힘든 때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시적자아는 입술에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남편의 기별을 기다린다. 시 속에 신라시대 경주에서 강릉 부사로 부임하기 위해 길을 가며, 절세미인이라서 바다 용 같은 신물神物들의 눈길을 받은 아름다운 수로부인 얘기를 삽입하여 시의 격을 높인 작품이다. 시인은 삼국유사 이야기에 나오는 바다용이 아니라도, 낚시를 하느라 소금끼 가득한 남편을 기다리며 사랑의 화로의 불씨를 보듬고 있다. 다음의 「세월 씨」도 같은 맥락의 시이다. ‘접시꽃 돌아/ 집으로 집으로 돌아오세요/ 종일 무슨 낙으로 사는지/ 물어도 꽃들은 대답 없고/ 해가 진 문밖은 벌써/ 풀벌레 울음으로 가득한데/ 하품은 오래도록 귀에 걸리네요// 분꽃 지기 전에/ 잠들어야 해요 /오늘 밤은 당신도 나도/ 그리고 혼자 있을 그 누구도(일부)’
마른 매화나무 새들이 분주하다
밤새 뒤척이던 별들 다 어디 가고
아무도 없는 빈 아침
우리 집 강아지 폴도 엄마 생각으로 운다 ― 「엄마 생각」 전문
딸년들 보고 싶어 엄마가 청국장 끓여 불렀던 점심 슬픈 날이었다 틀니가 참 어울리지 않은 쪼글쪼글한 엄마 입이 많이 슬픈 날이었다/ (중략) /
치과에서 빌려왔다는 책 밤새 떠듬떠듬 읽었을 그 책 진작 읽었으면 내 자식들 더 잘 키울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울 엄마
이제 아무렇지 않다며 틀니 가득 푸성귀로 채우던 울 엄마
이빨이 제일 예뻤던 울 엄마 ― 「틀니」 일부
영정 사진 찍겠다며 한복 입을까, 양장 입을까 엄마가 전화한 슬픈 오후 ― 「슬픈 오후」 끝 부분
위에 소개한 3편의 시는 엄마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시 「엄마 생각」에서 ‘마른 매화나무’는 엄마, ‘새들’은 자식들, ‘별’은 자식을 상징할 수 있다. 그런데 꿈꾸던 자식은 다 부모 곁을 떠나고, 텅 빈 아침에 강아지 ‘폴’이 엄마 생각하며 대신 운다. 시적자아의 감정이입이 된 상징성의 시각과 청각의 이미지가 있는 간결한 좋은 시이다. 「틀니」는 엄마가 딸이 보고 싶어 청국장을 끓여 놓고 초대를 했는데, 음식을 씹는 쪼글쪼글한 틀니 한 입을 보며, 엄마의 빌려온 책을 보며 한 말에 울컥한 심정을 시로 형상화 했다. 마지막 연에 ‘이빨이 제일 예뻤던 울 엄마’를 회상하며 역설적으로 맺음 한다. 딸은 슬픔이 북받쳐도 엄마는 아무렇지도 않다. 「슬픈 오후」에서도 엄마는 영정 사진을 찍으면서도 슬프기보다도 어떤 옷을 입고 찍어야 사후에 사람들에게 예쁘게 보일까를 생각한다. 맏딸인 서 시인이 엄마의 죽음을 생각하며 슬퍼하는 엄마 사랑이 담긴 시이다.
손자 대학 입학금 모으느라 자식들 쥐꼬리 용돈 아껴 천 원짜리 열장 모아 만 원 만들고 오천 원짜리 두 장 모아 만 원 만들고 근 십 년을 모아온 아버지 입학금 다 모으기도 전 병이 나버린 아버지/ 내 아버지 그 멀다는 저승길 앞에 두고도 부디 엄마 고생시키지 말고 누나 동생들이랑 오순도순 살라며 아들에게 쓴 눈물 편지가 오래된 책속에 숨어 있었다
귀신도 잡는다는 해병대 아버지 팔에 새겨진 문신이 더 좋았던 브라보, 내 아버지 죽어서도 지켜주겠다며 꼭꼭 눌러쓴 눈물 자국 ― 「눈물 편지」 일부
올케는 아버지가 사랑한 손자를 낳고/ 좋은 대학을 보내고// 자랑할 것 없는 자식들/ 시도 때도 없이 기 살려주던 친구 같던/ 그 아버지를 보러/ 산으로 가는 길// 산도 눈을 털고/ 개구리도 잠에서 깨어나는데 아버지는 아직/ 삼월 속에 누워만 계신다 ― 「3월」 일부
앞에서 소개한 3편의 시는 아버지를 소재로 하여 쓴 시이다. 대부분의 자식들이 자신을 낳아 젖 물려 키워준 자상한 어머니를 좋아하고 작품 소재로 한다. 그런데 서 시인은 자식들을 키우느라 고생한 엄마를 불쌍한 눈으로, 슬픔의 눈으로 바라보지만, 진작 해병대 출신의 의리의 사나이 상남자 아버지를 친구처럼 좋아한다. 아버지가 사는 지역 사람들은 아버지에게 한 번이라고 혼이 안 난 사람이 없었단다. 그런 아버지가 암에 걸린 모습을 가까이 보며, 항암도 진통제도 필요 없다던 아버지를 사별 후에도 오래 잊지 못한다. 돌아가시기 전에 써서 책갈피에 넣어둔, 죽어서도 가족을 지켜주겠다고 쓴 눈물 편지는 그의 시쓰기 방식처럼 쉬운 언어로 풀어 썼지만 감동적이다. 상남자 아버지 속마음은 자상하다. 용돈을 모아 손주 대학 입학금을 준비하고, 자랑할 것도 없는 자식들 기를 살려준다.
(2) 로컬리티, 고향에 살아도 고향이 그립다 서 시인의 첫 시집에서도 지역 사랑을 대부분 성공적으로 다룬 로컬리티locality 소재의 작품으로, 영은사에서, 광진 산에서, 두타산, 도경역, 활기리의 밤, 미로, 건지골을 지나며 등이 있었다. 이번 시집에도 몇 편의 지역 소재의 작품이 보인다. 「출렁다리」는 죽서루 누각 옆 너럭바위에서 오십천 건너 편 성남리를 연결하던 다리를 소재로 한 시로, ‘그녀,/ 죽선이 살던 그곳에/ 바람처럼 흔들리던/ 다리 하나 있었지// 그 후로도 오래/ 오십천은 흐르고// 이제는 마음에만 남은/ 옛 사랑 출렁다리’라고 읊으며 철거된 다리를 추억하고 있다. 「미륵바위」는 오십천이 봉황산에 부딪혀 큰 물소를 이루던 산자락에 전설의 미륵 3불 아래 땅이 수로가 변경되어 집들이 들어섰는데, 태풍 루사가 왔을 때 옛 물길을 찼더라는 내용의 향토성이 짙은 시이다.
내가 사는 여기로 오고 싶다는 너의 말은 그리움이다
그리움은 어딘가 떠나 있는 사람들의 몫은 아니다 여기 그대로 남아 있는 내게도 그리움인 거다 (중략)
이제 우리는 중년 오고 싶다는 너의 말처럼 남은 그리움으로
여기,/ 빈 곳 채우며 살자 ― 「고향」 일부
4월 맹방은 유채꽃으로 산다 유채바람이 든다 내 아버지 장지에 따라와 갈매기처럼 울던 영희// 영희 엄마는 병들어(중략) 항암을 해야 좋은지 영희가 물었지만 속 시원한 답을 줄 수 없다// (중략) // 영희가 태어나 자란 푸른 사내 같은 파도가 사는 맹방 유채꽃 속에서 웃는 환한 영희가 보고 싶다 ― 「맹방」 일부
여름에는 부쩍 사람도 많아 헐렁한 옷매무새에도 꽃잎 촘촘하다
더러는 해당화도 살아 마음 고와지고 어설픈 철길 아래로도/ 꽃잎 날리는
폐 안에 분진을 쌓으며 아버지 다녔던 시멘트회사 밤새 색등 곱게 밝히는 한때는 코스모스가 만발해 그 위로 바람 불고/ 큰물도 다녀가고
어린 내가/ 꽃이 되어 놀았던 오십천 몸짓
아직 떠나지 않은 연어 떼 오십천을 오른다 / 장미길을 걷는다 ― 「장미공원」 전문
서 시인 제2집에서도 역시 시를 관통하는 가장 큰 테마theme는 ‘그리움’이다. 시 「고향」에서 첫 연 ‘내가 사는 여기로 오고 싶다는/ 너의 말은 그리움이다’라는 메타포metaphor가 이 시의 테마가 된다. 2연을 다른 말로 비유하면, 그대 곁에 있어도 그대가 보고 싶다. 즉 고향에 살아도 고향이 그립다는 뜻이 아닐까? 우리는 이제 중년, 여기 고향 빈 곳을 사랑하며 살자는 고향(지역) 사랑의 간결한 시이다. 맹방은 십리 모래밭에 해송이 우거진 바닷가 마을로, 얼마 전부터 유채꽃 축제로 유명해졌다. 「맹방」은 그 곳이 고향인 영희와 서 시인의 아버지처럼 암에 걸린 영희 어머니의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아픔을 담은 시이다. 친구 어머니의 병이 완쾌되어 유채꽃처럼 환한 영희를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을 시로 형상화하였다. 장미공원이 위치한 곳은 죽서루와 오분리항이 있는 중간 지역이다. 천만 송이 아름다운 장미들이 봄부터 이른 가을까지 피어서 많은 사람들이 찾고 각종 행사도 열린다. 시 「장미공원」에서 시인은 옛날 꽃이 되어 놀던 철길과 해당화, 분진을 마시며 아버지가 다니던 시멘트 회사, 그리고 어린 시절을 연어처럼 강을 거슬러 오르며 떠올린다. 지역을 좀 넓힌 「거제사 터」(동해), 「자작나무 숲에서」(원대리) 등의 시들도 있다. 그는 삼척에서 태어나서, 삼척에서 결혼하여. 삼척을 지키며, 삼척 사랑을 시로 쓰고 있는 향토 시인이다.
3. 자화상, 갱년기와 우울의 터널 속 탈출
(1) 자화상, 시 속에서 상상해 보기 서순우, 그가 쓴 시에는 아직 ‘자화상’이란 시가 없다. 우리나라에는 자신을 성찰한 시를 쓴 윤동주와 서정주의 자화상이 잘 알려져 있지만, 대부분의 시인들은 자화상을 즐겨 쓰지 않는 것 같다. 서양의 이름 난 화가 반고흐, 모네, 렘블란트(100여장) 등 대부분 자신을 모델로 자화상을 많이 그린다. 서 시인은 갱년기를 겪고 지나면서 ‘나는 누구인가?’를 찾고 있다. 다음의 시 「무화과」, 「전단지」, 「새해는」 등의 시에서 서 시인의 자화상을 상상할 수 있지 않을까?
수많은 잎사귀로 부끄럼/ 다 가릴 순 없어도 안으로, 안으로 꽃 하나/ 피울 수는 있어 ― 「무화과」 전문
아직 괜찮아// 오늘처럼 바람에 날리고 어제처럼 비에 젖어도// 한 번 찾아와 줄/ 내 희망이 혹시 너의 희망이 될지도 몰라// 너의 절망으로/ 내가 또 일어나고 다시 우리가 되는/ 풀꽃 같은// 밤새 다짐이 되었던/ 종이 한 장 ― 「전단지」 전문
떠오르는 해를/ 어제 같은 내가/ 눈부시게 바라보는 일은 사치다
밤새 밀려왔던 福문자/ 내 것인 양 열어 보는 것도 사치다
서슴없이 다짐했던/ 지난 목표들로 곱게 늙어가는/ 이 또한 사치다
새해는/ 아주 작은 거 하나만 이루라는/ 지인의 문자/ 그 문자만은 사치가 아니길 / 오로지 내 것이길
그리하여/ 떠오르는 해를/ 사치스럽지 않게/ 오늘처럼 바라보게 되기를 ― 「새해는」 전문
「무화과」는 시인의 마음을 객관적 상관물인 무화과에 담아낸 간결한 시로, 겉으로 화려한 꽃보다 안으로 피우는 꽃 하나 되고 싶은 시인의 마음이 담겨 있는 lyric(서정시)이다. 「전단지」는 텔레비전이나 신문이나 잡지 속에 광고가 못되는 가난한 전단지를 의인화 하여 쓴 시로, 바람에 날리고 비에 젖어도 희망을 버리지 않는 전단지에 자신을 투사하고 있는, 나지막하게 살아도 풀꽃 같은 생명을 가지고 살려는 시인의 의지를 담은 특이한 소재로 쓴 성공한 시라고 할 수 있겠다. 시 「새해는」이란 작품은 2018년 1월 두타시낭송 작품으로 발표한 시이다. ‘새해에 떠오르는 해’를 어제 같은 내가 바라보는 일은, 새해를 맞아 밤새 온 ‘福문자’를 내 것인 양 열어보는 것도, ‘서슴없이 다짐했던/ 지난 목표들로 곱게 늙어가는’ 것도 사치라고 시인은 말한다. ‘새해는/ 아주 작은 거 하나만 이루라는/ 지인의 문자/ 그 문자만은 사치가 아니길 / 오로지 내 것이길’ 시인은 욕심 없는 작은 소망을 기원한다. 위의 3편의 시를 통하여 시인은 ‘무화과’처럼 안으로 조용히 꽃 피우고, ‘새해는’처럼 욕심을 부리지 않고 아주 작은 거 하나만 이루고 싶어 한다. 그러나 ‘전단지’처럼 바람에 날리고 비에 젖어도 희망을 버리지 않는 풀꽃이기를 바라는 강한 삶의 의지가 담긴 한 폭의 자화상이 그려지리라.
(2) 갱년기와 우울의 터널 속 탈출 임신을 하고 입덧을 심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듯, 서순우 시인은 유난히도 갱년기를 깊고 오래 하는 것 같다. 먼저 사주, 외풍, 돋보기, 살인의 추억 등의 작품을 통하여 갱년기와 우울한 시적자아의 긴 터널 속을 들여다 보자. 서 시인은 요즘 장시간 책을 보면 눈 부리가 아파온다고 한다. 시 「돋보기」는 ‘안경 쓴 남편을 얻고/ 안경 쓴 아들도 얻고/ 결국 나도 돋보기까지 얻어/소원 한꺼번에 이루어’졌다는 나이 먹는 슬픔, 반어적 현상이 전개된 시이다. 그러다가 ‘텔레비전에서 맨 눈으로 신문 보던/ 운 좋은 100세 노인 부럽다며/ 건강한 몸이 부럽다며 보낸 문자‘의 ‘몸’자를 ‘놈’자로 써서 보낸 문자 편지를 받은 사람이 ‘괜찮다, 괜찮다며/ 화면 가득 웃음 보내 왔네’ 격려의 꽃다발을 보내왔다. 그는 갱년기 터널 속에서 눈이 나빠져 돋보기까지 쓰는 우울한 날을 보내게 되었다. 바라던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다 행복한 건 아니라는, 자신의 실수가 웃음을 줄 수 있는 아이러니와 재미성에서 성공한, 어처구니가 없어 저도 모르게 웃음이 툭 터져 나오는 실소失笑의 시이다.
내 안에 화火가 없으니/ 물이 보이는 집은 맞지 않다고/ 그런데도 아파트분양 사무실에서/ 바다가 보인다는/ 꿈같은 말 귀가 아프도록 들었다/ 내 안에는 불이 없고/ 집에는 아파트가 싫다는 남편이 있고/ 온 마당에 방뇨 즐기는 늙은 개가 있으니/ 꿈같은 말 접어야하나/ 쇠붙이도 안 맞는다나 뭐라나/ 그럼 웬만한 반지나 목걸이도/ 다 물 건너간 게지//
꿈같은 말/ 아니 꿈 하나씩 작아지고// 나를 가두어 놓은 사주,/ 불이 없으니/ 그냥 영화나 자주 보라는데 / 호랑이나 한 마리 키우라는데// 바다가 보인다는 아파트/ 자꾸 파도로 밀려오는데 ― 「사주」 전문 바삐 지은 저녁상/ 마주하고/ 아무 일 없는 듯/ 밥을 먹는다// 서로/ 묻지 않아도// 당신 몸에선/ 바다 냄새가 나고/ 내 눈은/ 어설픈 열정으로 붉은데// 저 혼자 떠드는/ 텔레비전 앞에서/ 우리는 그냥 밥만 먹는다// 우리만큼 나이 든/ 붉은 집/ 외풍이 심하다 ― 「외풍」 전문
때마침 시인이라면 어쩌겠다는 노랫말만 난무했고 누구 하나 없어져도 죄가 되지 않는 그 노랫말 곁에 내가 시인처럼 누워 있었다
쥐도 새도 모를 작디작은 아이 자궁 안에서 최고로 자유로웠을 아들처럼 잘 생겼을 또 한 아이를 위해 의사와 간호사, 내가 고작 하는 일이란 노래 속에서 작당을 꾸미는 일이었다
그냥 돌아갈까 하다가도 너무 멀었던 용기 / (중략) / 그 보다 더 큰 죄/ 살며 없었을 터/ 살며 없을 터 ― 「살인의 추억」 일부
소개한 시 「사주」에서는 서 시인은 불火이 아니라서 바다水가 보이는 아파트는 맞지 않고, 남편은 아파트를 싫어하고, 부를 상징하는 반지나 목걸이 같은 쇠붙이도 맞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꿈같은 말/ 아니 꿈 하나씩 작아지고// 나를 가두어 놓은 사주,/ 불이 없으니/ 그냥 영화나 자주 보라는데’ 호랑(남편 혹은 강아지)이나 한 마리 키우라는데, 그에게는 바다가 보인다는 아파트가 자꾸 꿈이 되어 파도로 밀려와 갱년기 삶이 더 우울해 진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그러하듯, 남편은 직장 일에 바쁘고, 퇴근 길 어울려 술을 좋아하고, 휴일에는 바다를 낚으러 간다. 그래서 더 갱년기 터널이 어둡고 길어지지 않았을까? 낚시는 퇴근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다. 시 「외풍」에서, ‘바삐 지은 저녁상/ 마주하고/ 아무 일 없는 듯/ 밥을 먹는다’ 바다로 간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의 마음은 아직 꽃이 되어 붉은데, 하루 종일 기다렸다는 말 표현 못하고, 텔레비전이 대신 떠들고, ‘우리만큼 나이 든/ 붉은 집/ 외풍이 심하다’며 시인은 낡은 자신의 집에다가 부부의 마음을 투사透寫한다. 「살인의 추억」이란 제목을 보고, 섬뜩한 느낌이 들기도 하고, 영화의 제목인가 하고 생각을 했다. 그런데, 남자가 아닌 여자들은 자신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임신 중인 아이를 본의 아니게 낙태를 결심해야할 때가 있다. 본인이 이런 시를 쓴 작품은 처음 보는 보기 드문 소재이다. 때는 이현섭 작곡 한경애 노래 ‘옛 시인의 노래’가 한창 유행했던 때인 것 같다. 그 분위기에다가 작당을 꾸민, ‘그 보다 더 큰 죄/ 살며 없었을 터/ 살며 없을 터’ 시인은 우울한 터널 속에서 가슴 아파하며 태어나지 못한 아이에게 지은 죄를 빌고 있는 어머니의 마음을 표현한 감동적인 시이다.
난생 처음/ 56도짜리 술을 마셨다// 멋모르고 한 모금/ 혹시나 싶어 한 모금//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사막 어디쯤에서 그대로 타 죽을 것만 같은/ 낙타의 슬픈 울음 같은// 그래,/ 언제 한 번/ 56도 같은 삶을// 살아는 보았더냐// 캬, ― 「낮술」 전문 오늘처럼/ 우울한 날에는 방 한 칸, 바위가 반이었던 젊은 엄마 부엌을 생각한다// 오늘처럼/ 눈물 고이는 날에는 산 속에 찬 흙 깔고 누운 내 친구 같은 아버지를 생각한다// 오늘처럼/ 감히 우울하고 슬픈 날에는 아버지 18번곡/울고 넘는 박달재를 부른다 ― 「오늘처럼」 일부
제때 오지 않는 밥을 기다리다 남의 문밖을 남의 차/ 밑을 눈이나 비처럼 기다렸을 노랑이, 기다림은 그리움도 아닌 / 아픈 그 무엇, 찬 하늘 이고 술기운으로 돌아와 늦은 상을/ 차렸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국그릇은 빙판 밥그릇은 벌판이다/ 도둑질 할 곳도 없는 메마른 거리, 도둑이라는 누명은/언제 벗어내려나 ― 「길냥이」 일부
거기/ 눈 내리고 바람 부는 곳/ 언 몸 녹이며/ 멋지게 // 여기/ 꽃에 지치기도/ 간혹, 잔소리에 지쳐 사는/ 아니 살아내는// 거기는/ 황태가 살고/ 여기는/ 내가 남편이랑/ 갱년기 앞세워 살고// 우리,/ 얼었다/ 녹았다/ 황태처럼 폼나게 살자 ― 「황태」 전문
앞에서 사주, 외풍, 돋보기, 살인의 추억 등의 작품을 통하여 갱년기와 우울한 시적자아의 긴 터널 속을 들여다보았다. 이번에는 낮술, 오늘처럼, 길냥이, 황태 등을 통하여 서순우 시인의 ‘갱년기, 우울의 터널 속 탈출’의 시를 살펴보고자 한다. 위의 시 「낮술」에서, ‘낮술에 취하면 자기 애비도 몰라본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여자인 서 시인이 그것도 56도 술을 마셨다. 그 느낌을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사막 어디쯤에서 / 그대로 타 죽을 것만 같은/ 낙타의 슬픈 울음’ 같다고 표현했다. 그리고는 다시, ‘그래,/ 언제 한 번/ 56도 같은 삶을//살아는 보았더냐// 캬’하고 독한 술에 의탁하여 속에 쌓인 말 못하는 어둠을, 우울을 독한 술로 쏟아내고 있다. 갱년기와 우울의 터널을 탈출하기 위해 시인은, 「오늘처럼」 우울한 날은 엄마의 어려운 살림살이를 생각하고, 눈물 나는 날에는 산 속 찬 흙 깔고 누운 친구 같은 아버지를 생각하고, 우울하고 슬픈 날에는 ‘아버지 18번 곡 울고 넘는 박달재’를 부른다. 위의 시 「길냥이」는 갱년기에 곁에서 함께 해준 강아지 ‘폴’이 사망한 후 시인이 마음을 붙인 길고양이란 생각이 든다. 서 시인 집에서 골목을 나오면 삼척고 옆 빈 터에 늘 오는 녀석이다. 얼마 전에도 서 시인이 요즘 출근하고 있는 삼척교육문화관 ‘상주 작가’실에서 작품집에 게재할 시를 함께 살펴보다가, “어머! 길냥이 밥줄 시간이야!”하며 가려 했다. “남편 밥은?” 하자, “남편은 해놓은 밥을 차려 먹겠지요.” 했다. “길냥이가 남편보다 더 대접을 받네!”하고 둘이 웃었다. 이번 시집에 실린 ‘영채 이야기 1~4’도 삼척해수욕장 옆 작은 후진에서 민박과 커피숍을 하며 별명이 ‘길고양이 엄마’인 김영채 시인의 길고양이 사랑 이야기를 시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이렇게 서 시인은 강아지 ‘폴’과 길고양이 ‘길냥이’를 통해서 갱년기와 우울의 터널 탈출을 시도하고 있다. 시 「황태」에서 시인은 황태를 향해 ‘거기/ 눈 내리고 바람 부는 곳/ 언 몸 녹이며/ 멋지게’, 자신을 향해 ‘여기/ 꽃에 지치기도/ 간혹, 잔소리에 지쳐 사는/ 아니 살아내는’ 파이팅을 외친다. 남편이랑 갱년기 앞세워 사는 나와 황태야, ‘우리,/ 얼었다/ 녹았다/ 폼나게 살자’고 다짐한다. 이렇게 시인은 갱년기와 우울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고 있다. 시를 통해 내가 누구인가(자화상) 확인하고, 갱년기와 우울을 경험하고, 이겨내고, 시의 텃밭을 갈아 작은 소망의 씨앗, 뿌리고 가꾸어 가리라. 그것이 지역적이고 작지만, 어찌 보석이 작다고 가치가 없겠는가? 문학이란, 그늘지고 보잘 것 없고 나지막하고 작은 것에서 얼마든지 삶의 진리를 캐내는 성과를 거두지 않았는가?
4. 나가면서
‘그리움의 파도가 부르는 몽돌의 노래’란 테마로 삼척문학통사에서 자선한 대표시 10편, 첫 시집, 제2시집을 형식을 구분하지 않고 작가론을 겸하여 작품을 살펴보았다. 그의 시는 자신의 삶에서 체험하거나 바라본 가족, 친구, 이웃, 개나 길고양이, 주변의 사물 등 작고 사소한 것들을 소재하여 언제인가 ‘사랑’을 잉태할 ‘그리움’을 노래한다. 그리움의 파도가 밀려오는 둥근 몽돌의 노래를 받아 적는다. 그는 동해바다 푸른 파도에서 노래하는 둥근 몽돌의 이미지다. 몽돌이 작게 부셔지면 모래가 된다. 모래가 모여 모래밭을 이루고, 모래밭은 이 세상의 모든 강들이 모여드는 커다란 바다를 안는다. ‘그리움’을 테마로 한 서 시인의 시적 에스프리esprit와 가족과 이웃과 동물과 지역 사랑의 변치 않는 동일성identity 시도는 아마도 첫 시집과 제2시집에 이어 보석을 캐내듯 광맥을 찾아 더 깊숙이 파 들어가리라 예상해본다. 그의 시 스케일은 좀 작지만 결코 작은 시는 아니다. 그는 복잡한 표현으로 비틀지 않고 쉬운 언어로, 독자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는 시를 즐겨 쓴다. 주변의 작은 우리들의 이야기로 쉽게 읽히면서도 잔잔한 감동으로 공감을 준다. 다만, 체험한 이야기를 버릴 것과 둘 것을 구분하고, 다른 사물이나 격언이나 경전 같은 사건에 비유하고, 얼마나 재미있게 구성하는가에 따라 시가 철광이냐 보석이냐 가려질 것이다. 다른 시인들도 응당 해당되지만, 앞으로 그가 지향해서 더 연구하며 발전시켜 나가야 할 과제라는 생각을 해 본다. 이번 시집에 게재된 작품 중에 몇 편 안 보였지만, 이웃의 이야기를 사회로 의미를 확장한 이야기가 있는 시 한 편을 감상해보자.
혜순이 아버지 사우디에서 왔을 때/ 식구들 떼거지로 몰래 숨었다/ 내 아버지 밤낮 벌어도 안 될/ 큰 돈 가지고/ 달랑 낡은 집하나 남겨두고/ 어디 먼 데로 숨어버렸다// 함께 못할 강이 있어/ 피붙이 남김없이 저리 떠날 수 있을까// 그 후로도,/ 낡은 집에 어울리는/ 여자 여럿 살다가 가고/ 그렇게 젖은 눈으로 살다/혜순 아버지/ 마음의 병 한 보따리 지고 떠났다// 아버지들 하나둘 이승 떠나가는 동안/ 모래바람 부는 사막의 길/아직 멀기만 하다
위의 시 「낙타의 눈」은 사우디에서 불볕더위와 모래 바람과 싸우며 건설 노동자로 일하던 혜순이 아버지가 고국으로 돌아왔을 때, 무슨 까닭인지 혜순이 어머니는 자식들을 데리고 도망을 가서 꼭꼭 숨어버렸다. 우리나라가 경제 발전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던 사람들 ‒ 중동 건설 노동자들, 독일 광부들과 간호사들, 목숨을 담보로 월남전에 참가한 장병들 ‒ 뒤에 얽힌 이웃집에 살던 혜순이네 슬픈 이야기를 사회와 국가로 확장한 이야기이다. 이러한 이웃의 작은 이야기를 사회로 의미를 확장한 시는 맹인 부부의 삶을 다룬 「그렇게 살자」, 우리나라 최하층 노동자들의 골목길 인력 시장의 광경을 객관적으로 그린 「폭염 주의보」 등이 있다. 첫 시집은 시를 쓰고 시집 준비 기간이 길었으나, 이번 시집은 사정상 갑자기 시집을 묶어 내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생각만큼 좋은 시집이 못 된다며 많이 아쉬워했다. ‘내 시가 많이 부족함을 안다// 그러나/ 시를 쓸 동안/ 시간은/ 온전히 나를 떠나지 않았다// 소름 돋는,/ 아까워 차마 넘길 수 없는,/ 그런 시 한 줄 쓰고 싶었는데// 그러기도 전/ 벌써,/ 시집이 만들어지고 말았다// 먼 길/ 또 하나의 꿈같은/ 그 길을/ 오래도록 가야할 것 같다’고 시집 ‘서문’에서 밝혔다. 이번 시집의 아쉬움을 다음 시집에서는 좀 더 힘을 내어, ‘소름 돋는,/ 아까워 차마 넘길 수 없는,/ 그런 시’를 많이 쓰길 응원한다. 첫 시집 『엄마��에서는 서 시인의 존재와 같은 엄마와 친구 같은 아버지의 그리움과 사랑을 주제로 한 시들이 많았는데, 제2시집에서의 변화 중 하나는 퇴직을 전후한 남편의 이야기가 여러 편 보태진 점이다. 살아온 길 못지않게 오래 함께 새 삶을 살아갈 직장에서 퇴직한 남편과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며, 시를 통해 인생의 의미를 더 확장해 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는다.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서순우 시인은 부모를 사랑하며, 화려하지 않고 수수하며, 모나지 않고 둥글며, 남의 일을 잘 도와주며, 말없이 요란하지 않게 일을 잘 처리하며, 큰 욕심 없이 작은 행복과 작은 소망을 바라며 살아가며, 그러한 체험을 소재로 시를 쓰고 있다. ‘바다에 야자수 같은 배 띄우고 아끼던 책 읽다가 파도랑 멀어지는 꿈, 시집 곁에 두고 종일 차를 마시며, 작은 반도에서 아들 둘 낳고 작게 살다 간 여자. 부지런히 살아갈 궁리하다 차츰 나이도 잊어간, 그런 입소문이면 좋겠다’는 소박한 시인의 꿈을 소망하는 시인, 끝으로 이번 시집의 맨 끝에 실린 개인 역사를 소망한 시 「내 역사는」를 함께 감상하며, 서순우 시인의 작품집 시 여행을 마친다.
동해 푸른 바다 야자수 같은 배 띄우고 아끼던 책 하나 읽다가 그냥 파도랑 멀어지는 꿈
종일 차를 마시고 시집 한 권쯤 곁에 두어도 심심하지 않을 오후 그 어디 추장도 아닌 그 추장의 아내도 아닌 작은 반도 작은 마을에서 아들 둘 낳고 작게 살다 간 여자
부지런히 살아갈 궁리로 차츰 나이도 잊어가던 그런 이야기 하나쯤이면 그런 입소문이면 좋겠다 |
첫댓글 또 한 권의 시집이 만들어졌다.. 나를 위한 길 / 그 길을 늘 시심이 함께 하ㅓ시길요 *^^*
서순우 시인의 제 2시집 <<기>>발간을 다시 한번 ^^드립니다. 늘 좋은 작품, 늘 겁고 행복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