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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 대학의 기원은 나가사키 요양소(1861년 설립, 그 후 나가사키 정득관으로 개칭)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1868년 (게이오 4년) 정득관의 물리화학 부분을 오사카로 옮겨 「화학국」으로 교명을 바꾸었다. 1870년 서양학문교와 합병하여 제3고등중학교라 개칭한다. 1889년 8월 1일에 교토 시 사쿄 구 요시다혼마치(吉田本町)로 이전하였고 1894년 고등학교령이 공포되자 제3고등학교가 되었다.
제국 대학령이 제정된 후 간사이 지방에도 제국 대학을 설치해달라는 요구가 커졌지만, 재정난으로 인해 계속 보류되고 있었다. 1895년에 청일 전쟁에서의 배상금이 나오자 제3고등학교를 이전시킨 후 그 토지와 건물을 대학이 이용하자는 사이온지 긴모치의 제안이 수용되어 1897년 6월 18일에 교토 제국 대학이 발족한다.
이러한 경위로 인해 창립년은 제3 고등학교의 전신인 화학국이 설치된 1869년, 설립년은 교토 제국대학이 탄생한 1897년으로 하고 있다.
초대 총장으로는 문부성 학무 국장을 지낸 기노시타 히로지, 사무국장에 해당하는 「서기관」에는 나카가와 고주로가 취임했다. 창설시 계획에서는 법대를 먼저 설치할 예정이었으나, 공과 지망자의 급증으로 1897년 이과 대학으로 출발하였다. 그 후 10년에 걸쳐 법대 및 의대(1899년), 문과대(1906년) 등의 분과 대학 설립을 완성하였다.
「연구·교수·수학의 자유를 존중하는 독일식」을 채용하자는 총장의 의견을 받아들여 독일의 대학 시스템을 모방하였다. 다카네 요시토가 주도한 이 방침은 현재의 「자유로운 학풍」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1919년에는 과별 학제가 학부제로 바뀌고 경제학부가 법학부에서 독립하였다. 1923년에는 교토 대학의 상징이 된 시계탑을 포함한 대학 본관 건물이 완성되고 농학부 등의 학부 추가 증설이 있었다. 1926년에는 교토 대학 최초의 부설 연구소인 화학 연구소가 설치되었다.
쇼와 시대에는 사상의 억압이 강화되었던 당시 세태를 반영하듯 교토 대학에서도 사상관련 사건이 잇따른다. 1928년 마르크스 경제학자인 가와카미 하지메 교수를 사직시키라는 문부성의 요구를 교수회가 수용, 가와카미 교수가 대학을 떠났다. 또한 1933년에는 하토야마 이치로 문부대신이 법학부 다키카와 유키토키 교수의 형법 이론이 「붉은 사상」이라고 하여 휴직 처분을 내린 일로 법학부 교직원과 총장이 사표를 제출하였지만 문부성의 압력으로 다키가와를 포함한 교직원 7명이 대학을 떠난 이른바 「다키가와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전시체제의 강화에 수반해 일본 정신사(문학부), 동아 경제정책 원론(경제학부), 항공학·연료 화학(공학부)등의 국책에 따른 강좌가 설치되었고, 태평양 전쟁의 개전 이후 학교를 군대풍으로 개편할 목적으로 「교토 제국대학 보국대」가 결성된다.
1943년에는 문과 학생의 징병 유예가 정지되어 학생이 잇달아 전장으로 가게 되었다. 교토 대학의 학도 출진 장행회에서는 총장이 앞장서서 헤이안 신궁에 참배하고 필승을 기원했다고 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종결 후, 공직 추방에 의해서 면직되는 교수가 나오는 한편, 다키가와 사건으로 대학을 떠나있었던 다키가와 유키토키 등이 대학에 복귀했다. 창립 50주년에 즈음한 1947년에는 대학명에서 「제국」이 사라지고 교토 대학이라고 개칭하였다. 제3고등학교를 통합한 1949년에는 이학부의 교수인 유카와 히데키가 일본인 최초로 노벨상을 수상하여 이름을 빛낸 것을 기념하여 유카와 기념관을 설치하였다. 그 이후 유카와 기념관은 기초 물리학 연구소로 개편되었다.
1968년 청년의사연합 교토대 지부가 주도한 의대 대학원 입시 거부에 참여하지 않은 수험생이 청의련 멤버에게 폭행당한 이른바 「청의련사건」을 빌미로 교양학부가 무기한 파업에 들어가 학생회가 타격을 받았다. 도쿄 대학과 같은 입시 중지의 사태는 면했지만, 종전 이후 처음으로 졸업식이 중지되어 그 다음해 9월까지 일부 건물이 폐쇄되는 조치를 받았다.
1992년 종합 인간학부가 설치되고 다음 해에는 교양학부가 폐지되는 동시에 대학원과 대학의 이전도 행해져 현재 형태로 대학 조직이 개편되었다. 1997년에 창립 100주년을 맞이하였으며, 2004년에는 국립 대학 법인으로 개편되었다.
창립 이래 「자유로운 학풍」을 건학 정신으로 하고 있다. 국립 대학 법인이 된 뒤에 제정된 교토 대학의 기본이념에서도 이는 고수되었다.
학부 및 대학원 외에 연구소 13개, 연구센터 17개로 2006년 3월 현재 일본의 대학 중 가장 많은 연구 기관을 거느리고 있다. 그 중 9개의 연구소와 연구 센터는 다른 대학이나 연구기관에 연구 설비를 제공하는 「전국 공동 이용 연구소」·「전국 공동 이용 연구 센터」이다. 이 「전국 공동 이용 연구소」의 구조를 처음으로 채용한 것은 교토 대학의 기초 물리학 연구소이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교토 대학의 관계자는 "폭넓은 분야에 있어 일본을 대표하는 학술 연구 거점이 되어 온 쿄토 대학의 사회적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라고 견해를 드러내었다.
모든 일을 학생의 자주성에 맡긴다는 「자유로운 학풍」을 표방하고 있다. 그러나 대학의 개축 등으로 인해 옛 모습이 사라지면서 학풍 역시 희미해지고 있다는 걱정도 일부 대학 관계자 속에서 나오고 있다. 한 때는 전차비가 없어서 걸어다니고 학도병으로 동원된 경험을 가진 세대의 교수들이 대다수 사망하고 학생 운동을 경험한 쇼와 시대의 그림자 역시 희미해지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는 반항아나 고학생이 많다는 이미지가 강했지만 치열한 수험 전쟁을 거쳐 들어온 현 세대의 교수와 학생은 모두 유복한 가정 출신들이 많다.
6명의 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와 2명의 필즈메달 수상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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