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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의 문화재)
1.풍남문
종 목 보물 제308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전북 전주시 완산구 전동 2가 83-4
시 대 조선시대
읍성은 지방행정의 중심지가 되는 고을을 둘러쌓았던 성을 말한다.
옛 전주읍성의 남쪽문으로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파괴된 것을 영조 10년(1734) 성곽과 성문을 다시 지으면서 명견루라 불렀다. ‘풍남문’이라는 이름은 영조 43년(1767) 화재로 불탄 것을 관찰사 홍낙인이 영조 44년(1768) 다시 지으면서 붙인 것이다. 순종 때 도시계획으로 성곽과 성문이 철거되면서 풍남문도 많은 손상을 입었는데 지금 있는 문은 1978년부터 시작된 3년간의 보수공사로 옛 모습을 되찾은 것이다.
규모는 1층이 앞면 3칸·옆면 3칸, 2층이 앞면 3칸·옆면 1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다. 평면상에서 볼 때 1층 건물 너비에 비해 2층 너비가 갑자기 줄어들어 좁아 보이는 것은 1층 안쪽에 있는 기둥을 그대로 2층까지 올려 모서리기둥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이 같은 수법은 우리나라 문루 건축에서는 보기 드문 방식이다.
부재에 사용된 조각 모양과 1층 가운데칸 기둥 위에 용머리를 조각해 놓은 점들은 장식과 기교를 많이 사용한 조선 후기 건축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옛 문루건축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는 문화재이다.
2.전주객사
종 목 보물 제583호
지 정 일 1975.03.31
소 재 지 전북 전주시 완산구 중앙동 3가1
시 대 조선시대
객사는 고려·조선시대에 각 고을에 설치하였던 것으로 관사 또는 객관이라고도 한다. 객사는 고려 전기부터 있었으며 외국 사신이 방문했을 때 객사에 묵으면서 연회도 가졌다. 조선시대에는 객사에 위패를 모시고,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향해 예를 올리기도 하였으며 사신의 숙소로도 이용하였다. 명나라와 통하는 지방에는 우리 사신을 비롯해 명나라에서 오는 사신도 묵었기 때문에 건물보수에도 큰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국가에 일이 생겼을 때에는 백성과 관아가 같이 의식을 행하였다.
전주객사는 전주서고를 지은 뒤 남은 재료로 조선 성종 2년(1471)에 서의헌을 고쳐 지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객사의 정문은 주관을 앞면으로 하여 내삼문·중삼문·외삼문이 있었으나 원래의 내삼문 안쪽으로 축소되었다.
신주를 모셔두는 방인 감실에는 궐(闕)자가 새겨진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국왕에 대하여 예를 행하기도 하였고(망궐례), 조정에서 사신이 오면 이곳에 묵으면서 임금의 명령을 전하기도 하였다. 전주객사는 중앙에 주관이 있고 좌우에 동·서 익헌, 맹청, 무신사 등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현재 주관과 서익헌, 수직사만 남아있다. 동익헌은 현재 초석만 남아 있으며, 서익헌과 규모가 같으나 도로확장으로 인해 1칸이 부족하다.
또한 주관 앞면에는 ‘풍패지관(豊沛之館)’이라는 액자가 걸려 있다. 이것은 전주객사를 일컫는 말로서, 전주가 조선왕조의 발원지라는 뜻을 담고 있다.
3.조선 태조 어진
종 목 보물 제931호
지 정 일 1987.12.26
소 재 지 전북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3가 102 경기전
시 대 조선시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로 가로 150㎝, 세로 218㎝이다. 태조의 초상화는 한 나라의 시조로서 국초부터 여러 곳에 특별하게 보관되어 총 26점이 있었으나 현재 전주 경기전에 있는 태조 초상화 1점만이 남아있다.
이 초상화는 임금이 쓰는 모자인 익선관과 곤룡포를 입고, 정면을 바라보며 의자에 앉아있는 전신상으로 명나라 태조 초상화와 유사하다. 곤룡포의 각진 윤곽선과 양다리쪽에 삐져나온 옷의 형태는 조선 전기 공신상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다. 또한 바닥에 깔린 것은 숙종 때까지 왕의 초상화에 사용된 것으로, 상당히 높게 올라간 것으로 보아 오래된 화법임을 알려준다. 의자에 새겨진 화려한 용무늬는 공민왕상에서도 보이는 것으로, 고려말에서 조선초까지 왕의 초상화에서 나타나고 있다. 익선관은 골진 부분에 색을 발하게 하여 입체감을 표현하였고, 정면상임에도 불구하고 음영법을 사용하여 얼굴을 표현하였다.
고종 9년(1872)에 낡은 원본을 그대로 새로 옮겨 그린 것인데, 전체적으로 원본에 충실하게 그려 초상화 중 가장 표현하기 어려운 정면상임에도 불구하고 훌륭하게 소화해 낸 작품으로 조선 전기 초상화 연구에 있어 귀중한 자료가 된다.
4.전 낙수정 출토 고려동종
종 목 보물 제1325호
지 정 일 2001.09.21
소 재 지 전북 전주시 완산구 효자동2가 900 국립전주박물관
시 대 고려시대
이 범종은 일본인 다까하라 히미꼬 여사가 선대로부터 물려받아 소장해 오던 중 1999년 11월 국립문화재연구소를 통해 기증·반환한 것으로, 종을 매다는 용뉴 부분의 훼손이 있기는 하나 거의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종의 윗면은 수평에 가까우며, 어깨부분인 상대와 맨아래 부분인 하대에는 띠를 돌리고 그 안쪽으로 반원무늬와 덩굴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상대와 연결된 사다리꼴 모양의 유곽 테두리에도 덩굴무늬를 얕게 조각하였으며, 유곽 안에는 작은 꽃받침을 갖춘 유두가 돌출되어 있다.
종의 약간 아래쪽 2곳에 배치되어 있는 당좌는 종을 치는 부분으로, 이중원의 테를 두르고 그 안에 덩굴무늬를 장식하였다. 당좌를 중심으로 대칭을 이루며 배치된 4개의 비천상은 구름 위에 꿇어앉고 두손을 모아 합장한 형태를 하고 있다. 이 비천상은 다른 문양들보다 도드라지게 조각되어 있다.
종에 새겨진 기록이 없어 종의 제작년대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 형태와 문양 및 성분비율 등을 살펴볼 때 통일신라시대 양식을 계승하여 고려 초에 제작된 범종으로 생각된다.
5.경기전 정전
종 목 보물 제1578호
지 정 일 2008.12.01
소 재 지 전북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 3가 102번지
시 대 조선시대
사적 제339호의 경기전 정전은 조선 왕조를 개국시킨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한 곳이다. 태조 어진을 모신 곳을 어용전, 태조진전 등으로 명명하던 것을 1442년(세종24년)에 경기전이라고 명명하였다. 1410년에 창건된 경기전은 1597년 정유재란 때 소실되고 1614년에 중건했다. 1872년 태조 어진을 새롭게 모사하여 봉안하면서(태조영정 보물 931호) 경기전의 전반적인 보수가 이루어졌다.
정전은 다포계 양식으로 외3출목, 내3출목이고, 5량 구조의 맞배, 겹처마 지붕이다. 살미의 쇠서가 발달되어 있고 내부에서는 초각 처리되어 안정된 조선 중기의 형식이 반영되어있다. 배례청은 이익공을 가진 익공계 양식으로 겹처마 맞배지붕이며 배례청의 박공면은 정전의 정면 모습이 된다. 정전과 배례청은 화강암 원형 초석 위에 민흘림의 원기둥을 세웠다. 내부의 5.8m나 되는 2개의 고주는 종보를 직접 받고 있으며, 양측면의 기둥도 대들보를 받는 고주로 되어 측부재 구조가 간결하고 견고하게 짜여있다. 포작의 내부 살미 조각과 보아지 및 종도리를 받는 파련 대공의 섬세한 조각과 우물천정 단청 등의 의장이 화려한 편으로 다른 유교 건축과 차별화된 권위성을 볼 수 있다. 구조 부재들의 이음과 맞춤이 정확하며 견고하고 조선 중기의 전통 건축 기법이 잘 전수된 안정된 구조와 부재의 조형 비례는 건축적 품위를 돋보여준다.
조선왕조를 개국한 태조 어진이 봉안된 정전 기능과 품위에 기준한 내신문 내의 신로 및 향로의 엄격한 격식, 그리고 정전과 배례청 평면 조합 및 어방구조 등이 보물로서의 문화재 가치가 인정된다.
6.남고산성
종 목 사적 제294호
지 정 일 1981.12.10
소 재 지 전북 전주시 완산구 동서학동 산228
시 대 백제
전주 남쪽에 있는 고덕산과 천경대, 만경대, 억경대로 불리는 봉우리를 둘러 쌓은 산성이다. 남동쪽으로는 남원·고창으로 통하는 교통상의 중요한 곳을 지키고, 북쪽으로는 전주를 내려다 보는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후백제를 세운 견훤이 이곳에 고덕산성을 쌓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며, 조선 순조 13년(1813)에 성을 고쳐 쌓고 남고산성이라 했다. 이 성은 유래가 매우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세종실록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에도 기록이 보인다.
순조 13년에 보수공사가 있을 때 성 안에는 4군데의 연못과 25개의 우물이 있었으며, 민가 100여 채가 있었다고 한다. 성문은 동·서에 있었으며 각기 3칸, 6칸 규모의 누각형 문이 있었다. 서쪽에 비밀문이 하나 있었으며 동·서·남·북에 각각 하나씩 포루가 설치되어 있고, 관청, 창고, 화약고, 무기고를 비롯한 각종 건물이 즐비하게 있었다. 지휘소인 장대는 남·북에 각각 설치되었으며, ‘남고사’란 절이 있다. 현재 성의 둘레는 약 5.3㎞이다.
지금은 성벽이 많이 허물어졌고 ‘남고진사적비’가 산성의 내력을 말해주고 있다.
7.경기전
종 목 사적 제339호
지 정 일 1991.01.09
소 재 지 전북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3가 102
시 대 조선시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모신 곳이다.
태종은 1410년 전주·경주·평양에 태조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를 모시고 어용전이라 하였다. 그 후 태종 12년(1412)에 태조 진전이라 부르다가 세종 24년(1442)에 와서 전주는 경기전, 경주는 집경전, 평양은 영흥전으로 달리 이름을 지었다. 경기전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광해군 6년(1614)에 다시 고쳐 지었다.
건물의 구성은 본전·헌·익랑 들로 이루어져 있고 이를 내삼문과 외삼문으로 둘렀다.
8.전주향교 일원
종 목 사적 제379호
지 정 일 1992.12.23
소 재 지 전북 전주시 완산구 교동 26-3외
시 대 고려시대
향교는 유학교육과 인재양성을 위해 지방에 설립한 교육기관이다. 이 향교는 고려시대에 세웠다고 하는데 정확한 기록은 없다.
당시에는 조선 태조의 영정을 모신 경기전(사적 제339호) 근처에 있었으나, 향교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시끄럽다하여 전주성 서쪽 황화대 아래도 옮겼다 한다. 지금 위치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은 뒤, 관찰사 장만이 옮긴 것이다.
현재 이 향교에는 여러 훌륭한 분들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7호)을 비롯해 동무·서무, 계성사, 학생들을 가르치던 곳인 명륜당 등의 여러 건물이 있다. 대성전은 효종 4년(1653)이 고쳐 세웠는데, 이기발이 중건기를 남겼다. 이후 융희 원년(1907)에 군수 이중익이 다시 고쳤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다. 명륜당은 광무 8년(1904)에 군수 권직상이 고쳤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의 규모이다.
우리의 옛 교육시설을 둘러 볼 수 있는 이곳은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기능은 없어졌다. 그러나 봄·가을에 공자께 제사를 지내고 초하루·보름에는 향을 피우고 있다.
9.전주향교 대성전
종 목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7호
지 정 일 1971.12.02
소 재 지 전북 전주시 완산구 교동 26-3번지
시 대 조선시대
향교란 공자를 비롯한 여러 성현께 제사지내고, 지방 백성들의 교육과 교화를 담당했던 국립교육기관을 가리킨다.
전주향교는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고려시대에 처음 지었다고 전하며, 원래 지금의 경기전이 있던 자리에 있었지만 조선 태종 10년(1410) 화산동으로 옮겼다고 한다. 그 뒤 선조 36년(1603)에 순찰사 장만과 유림들이 힘을 합쳐 현 위치로 옮겼으며, 지금 남아있는 건물들은 이때에 세운 것으로 추정한다.
그중 대성전은 선조 때 지은 건물로 순종 융희 1년(1907)에 당시 군수 이중익이 수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성전에는 서울 성균관과 같이 공자를 중심으로 4성인과 10철학자, 송나라의 6현인을 모시고 있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앞면 3칸 모두 널문을 달았으며 기둥은 원기둥을 사용하였다.
갑오개혁(1894) 이후로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 2차례에 걸쳐 제사만 지내고 있다.
10.한벽당
종 목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5호
지 정 일 1971.12.02
소 재 지 전북 전주시 완산구 교동 1가 15번지
시 대 조선시대
승암산 기슭의 절벽을 깎아 세운 누각으로, 옛 사람들은 한벽청연이라 하여 전주 8경의 하나로 꼽았다.
조선의 개국을 도운 공신이며 집현전 직제학을 지낸 월당 최담 선생이 태조 8년(1404)에 별장으로 세운 건물이다. 월당 선생 유허비에는 ‘월당루’라 기록된 것으로 보아 시간이 지나며 ‘한벽당’이라고 명칭이 바뀐 것으로 보인다. ‘한벽’이란 이름은 이곳이 옥처럼 항상 맑은 물이 흘러 바윗돌에 부딪쳐 흩어지는 광경이 마치 벽옥한류같다하여 붙인 것이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11.조경단
종 목 전라북도 기념물 제3호
지 정 일 1973.06.23
소 재 지 전북 전주시 덕진구 덕진동 1가 산28
시 대 조선시대
전주 이씨 시조인 이한을 모신 무덤이다.
이한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21대 할아버지로 신라시대 사공이란 벼슬을 지냈다고 하는데 정확한 생몰 연대와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이성계가 새 왕조를 세운 뒤 그의 조상들을 모신 건치산 묘역을 각별히 수호하였고 그 뒤 역대 왕들도 정성을 다해 보호하였다. 동학농민운동 때 태조의 영정과 조상들의 위패를 옮기기도 하였으나, 광무 3년(1899) 지관의 도움을 받아 지금 있는 자리에 단을 쌓고 비석을 세워 묘역을 새로 정비하였다.
경내 주변에는 돌담을 쌓고 동서남북으로 문을 두었다. 조경단 남쪽에 있는 문에서 20m 떨어진 곳에 비각을 세우고 그 안에 대리석으로 비석을 만들어 세웠다. 비각의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고, 비 앞면에는 고종황제가 직접 쓴 ‘대한조경단’이란 글씨가 있다.
12.지행당
종 목 전라북도 기념물 제7호
지 정 일 1973.06.23
소 재 지 전북 전주시 덕진구 호성동 1가 481번지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중기 문신인 강서린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건물이다.
조선 영조 8년(1732) 당시 학덕이 높고 효행이 지극했던 그를 기리기 위해 관청에서 세웠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당시 공조판서였던 이익회가 쓴 ‘지행당’이란 현판이 남아 있다.
13.오목대 이목대
종 목 전라남도 기념물 제16호
지 정 일 1974.09.24
소 재 지 전북 전주시 완산구 교동 산1-3번지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 왕실과 관련된 유적지이다.
이목대는 태조의 5대조인 목조 이안사의 출생지로 알려진 곳으로, 고종이 직접 쓴 비문을 통해, 조선 왕조의 시조인 이안사가 이곳에 살았었음을 알게 되었다.
오목대는 후에 조선을 세운 이성계 장군이 당시 군사를 이끌고 잠시 쉬어가던 장소이다. 고종이 직접 쓴 “태조고황제주필유지”라는 비문을 새겨 놓은 비는 광무 4년(1900)에 세운 것이다.
조선시대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들 유적지는 조선 왕조의 뿌리를 찾을 수 있는 가치 있는 문화재라 할 수 있다.
14.문학대
종 목 전라남도 기념물 제24호
지 정 일 1976.04.03
소 재 지 전북 전주시 완산구 효자동 3가 334-1번지
시 대 고려시대
고려 공민왕 6년(1357)에 세원진 문학대는 황강 이문정이 고향에 내려와 지내면서 여생을 보낸 곳이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버려 집터만 남아 있던 것을 순조 24년(1824)에 후손들이 다시 세웠다. 이문정은 무분별한 불교의 숭상으로 인해 윤리와 기강이 문란해지고 여러 가지 폐단이 생기자, 이를 상소하여 바로 잡은 공적이 있다. 그 후 관직에서 물러나 이곳에 내려와 지내면서, 성리학을 가르치고 많은 후학과 인재를 길러내며 생을 마쳤다.
15.동고산성
종 목 전라남도 기념물 제44호
지 정 일 1981.04.01
소 재 지 전북 전주시 완산구 대성동 산25번지
시 대 후백제
전라북도 전주시 교동 승암산에 있는 산성으로, 성 안에 계곡을 끼고 산꼭대기를 둘러 성벽을 쌓았다.
이 곳은 후백제 견훤의 왕성으로 전해지고 있다. 승암산의 절벽에 의지하여 서북쪽으로 수구(水口)를 뚫었으며, 남북으로는 날개모양의 익성을 설치한 독특한 형식이다.
성 전체의 둘레는 1588.3m이고, 북쪽 익성의 길이는 112m, 남쪽 익성의 길이는 123m이다. 동서축의 길이는 314m, 남북축의 길이는 256m이고 성벽의 높이는 약 4m이다. 현재 동·서·남문터와 배수구문, 건물터, 우물터 시설이 성 내부에 남아있으며, ‘중방(中方)’, ‘관(官)’자를 새긴 암키와 조각이 발견되었다.
전주가 후백제의 수도였음은 여러 문헌에서 나타나 있다. 이 산성을 왕궁터라고 하는 것은 지금도 성 안에 남아있는 성황사의 중창기록에 잘 표현되어 있으며, 1980년 성 내부를 조사할 때 건물터에서 ‘전주성’이라는 글씨가 쓰여진 연꽃무늬 와당이 발견되어, 후백제의 왕궁터라는 견해와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16.숲정이 <천주교 순교지>
종 목 전라북도 기념물 제71호
지 정 일 1984.09.20
소 재 지 전북 전주시 덕진구 진북1동 1034-1
시 대 조선시대
예로부터 처형지로 사용해왔던 곳으로 많은 카톨릭 교도들이 순교한 장소이다. 숲정이라는 명칭은 숲이 칙칙하게 우거져 있는 인적이 드문 곳을 말한다.
우리나라 카톨릭 역사를 보면 정조 15년(1791)에 일어난 신해박해, 순조 1년(1801)의 신유박해, 순조 27년(1827)의 정해박해, 헌종 5년(1839)의 기해박해, 고종 3년(1866) 병인박해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전주지방은 순교장소가 되었지만 전주·김제 등에도 교세가 확장되었다.
1866년 병인박해에는 전주에서만 22명이 순교하고, 그중 조화서 이명서 등과 이름을 알 수 없는 사람까지 모두 13명에 이르는 사람이 숲정이에서 처형되었다. 이상이 숲정이에서 순교한 사람들이고 보면 병인박해는 대규모의 박해였음을 알 수 있다.
천주교 신자들은 1935년 자그마한 순교십자비를 세웠으며 해방 후 숲정이 치명탑을 다시 크게 세웠다.
17.남고사지
종 목 전라남도 기념물 제72호
지 정 일 1985.08.16
소 재 지 전북 전주시 완산구 동서학동 2가 24번지
시 대 신라
현 남고사 대웅전의 서쪽 건물이 있는 자리가 옛 남고사터이다.
남고사는 신라 문무왕 때 명덕화상이 지은 절로 원래는 남고연국사라 하였으나, 후일에 남고사라 했는데 언제부터 칭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문헌상으로는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에 의하면 18세기후반 이후인 것으로 추정된다.
남고사는 고려시대까지는 교종계통의 사찰로 내려오다가 조선 세종 때 모든 종파의 불교가 교·선 양종으로 통합되어 48개의 사찰만 공인하게 되었을 때 탈락되어 사세가 크게 위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의 남고사 대웅전은 약 100년 전에 고쳐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약사여래불을 함께 모시고 있다.
18.회안대군 묘
종 목 전라북도 기념물 제123호
지 정 일 2005.12.16
소 재 지 전북 전주시 덕진구 금상동 59-5
시 대 조선시대
회안대군(1364년 ~ 1421년)은 조선 태조의 넷째 아들로 이름 방간. 시호 양희. 호 망우당, 어머니는 신의왕후 한씨이다. 부인은 증 문하 찬성사 민선의 딸 여흥 민씨이다.
1392년(태조 1년) 음력 8월 7일 조선 개국 이후 여러 왕자들을 군으로 봉할 때에 회안군에 봉작되었다.
1400년(정종 2년)제2차 왕자의 난 때 동생인 이방원과 세자 자리를 두고 싸우다 패하여 토산에 유배 되었다.
1421년(세종 3년) 홍주에서 병사하였다.
19.학인당
종 목 전라남도 민속자료 제8호
지 정 일 1976.04.02
소 재 지 전북 전주시 완산구 교동 105-4번지
시 대 조선시대
조선 고종 때 승훈랑 영릉참봉에 임명된 인재 백낙중의 옛 집이다. 백낙중은 효자로 이름난 분으로 돌아가신 뒤에 이를 기리기 위해 대문에 ‘백낙중지려(白樂中之閭)’라고 쓴 현판을 걸었다. 집 이름은 호인 인재에서 인(忍)자를 따 ‘학인당(學忍堂)’이라고 지었다 한다.
당시 일류 건축가들이 지은 한식기와집으로 지붕 처리가 흥미로운데 지붕 끝부분의 둘레를 동판(銅板)으로 싸 비바람을 막게 하였다. 궁중 건축양식이 민간 주택에 도입된 전형적인 예가 되고 있으며 전주 한옥보존지역에 있는 대표적 건물 중 하나로 주목받고 있다.
20.예종대왕 태실 및 비
종 목 전라남도 민속자료 제26호
지 정 일 1986.09.08
소 재 지 전북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3가 102
시 대 조선시대
태실은 왕이나 왕실의 자손이 태어났을 때 그 탯줄을 모셔두는 곳을 이르는 것으로, 그 형태는 승려의 사리탑과 비슷하다.
경기전 경내에 자리하고 있는 이 태실은 예종대왕의 태를 묻은 곳으로, 옆에 태실비가 함께 놓여 있다. 비는 거북이 모양의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용무늬를 둔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 비몸 앞면에는 “예종대왕태실”이라 새겨 그 주인공을 밝히고 있다.
비석 뒷면의 기록에는 조선 선조 11년(1578)에 처음 비를 세운 후, 156년이 지난 영조 10년(1734)에 다시 세워두었다고 적고 있다.
21.동고사
종 목 문화재자료 제2호
지 정 일 1984.04.01
소 재 지 전북 전주시 완산구 교동1가 산10
시 대 조선시대
기린봉 기슭에 있는 절로 지은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신라 경문왕 때 도선국사가 세웠다고 전한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조선 헌종 10년(1844)에 허주대선사가 지금 있는 자리에 다시 세운 것이다.
경내에는 사찰의 중심 건물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여러 부속 건물과 스님들이 생활하는 요사채가 있다. 절 뒤편에는 스님이 수도하고 있는 모습을 띤 자연석이 있다.
22.학소암
종 목 문화재자료 제3호
지 정 일 1984.04.01
소 재 지 전북 전주시 완산구 평화동 2가 산 51번지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정조 10년(1786)에 광혜화상이 세운 절로 춘곡화상과 이만선 씨가 고쳐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자음전은 절의 중심 건물로 앞면 3칸·옆면 1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건물 바깥쪽 기둥을 약간 안으로 기울게 세웠는데, 이는 건물에 안정감을 주기 위한 옛 건축 양식 중 하나이다.
규모는 작으나 견실하게 지었으며 꾸밈도 간결하여 소박한 느낌을 준다.
23.화산서원비
종 목 문화재자료 제4호
지 정 일 1984.04.01
소 재 지 전북 전주시 완산구 중화산동 산 33-2번지
시 대 조선시대
화산서원이 있었던 터에 남아 있는 비로, 서원의 흔적을 전하고자 세운 것이다.
전북지방에서 가장 오래되었던 이 서원은 조선 선조 13년(1580) 이 지역 사람들에 의해 건립되었다. 영조 때와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던 시기에 많은 서원들이 철폐되면서 함께 폐지되어, 이후 향교가 들어섰다가 다른 곳으로 향교를 옮겼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려둔 모습이다. 납작하게 표현된 거북은 독특하게도 옆을 향하고 있으며, 머릿돌에는 구름속을 거니는 용의 무늬가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다. 비몸에 새긴 비문은 송시열이 지은 것이다.
24.관성묘
종 목 문화재자료 제5호
지 정 일 1984.04.01
소 재 지 전북 전주시 완산구 동서학동 2가 613번지
시 대 조선시대
삼국지에 나오는 관운장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으로 주왕묘 혹은 관제묘라고도 부른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장군이었던 진인이 부상을 입고 지금의 서울에 있는 남묘에서 치료를 받을 때, 관우의 신령이 나타나 군사들을 지켜준다고 믿어 이곳에 묘를 세우고 상을 모셨다. 이것이 관우신앙의 원조가 되었고 그 후 무신으로서 그를 모시는 신당이 널리 전파되게 되었다.
전주에 있는 이 관성묘는 고종 32년(1895) 당시 전라도 관찰사였던 김성근과 이신문이 발기하여 세운 것이다. 건물은 장엄하고 짜임새가 있으며 내부의 양쪽 벽면에는 조선 후기 화가인 소정산이 그린 ‘삼국지연의’ 그림이 있고, 기둥에는 유려한 필체로 쓴 법훈이 걸려 있다.
25.추천대
종 목 문화재자료 제8호
지 정 일 1984.04.01
소 재 지 전북 전주시 덕진구 팔복동3가 26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성종 때 여러 벼슬을 지낸 추탄 이경동이 고향으로 돌아와 추천에 낚시를 드리우고 말년을 보냈는데, 이곳에 후손 이정호가 누정을 세우고 추천대라 하였다.
광무 3년(1899)에 지은 건물로 1947년 후손들이 그 자리에 정자를 세웠다.
앞면·옆면 2칸 규모이며,지붕을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추천이 흐르는 경치 좋은 곳에 자리잡은 정자로, 앞면에 ‘추천대(楸川臺)’라 쓴 현판이 걸려 있다. 건물 앞쪽 낮은 터에는 비석이 서 있다.
26. 서서학동 석불입상
종 목 문화재자료 제9호
지 정 일 1984.04.01
소 재 지 전북 전주시 완산구 서서학동 345번지
시 대 고려시대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서학동 미륵암에 모셔져 있는 높이 2.6m의 여래입상이다.
머리 위에는 낮은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있고 목에는 3줄의 삼도가 표현되었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데 옷주름이 어깨에서 가슴과 양 팔에 곡선을 그리며 흘러내리고 있다. 옷소매는 길게 드리워져 있고, 양 다리에도 옷주름이 새겨져 있다. 손은 나중에 끼운 것으로, 현재 오른손은 아래로 내리고 왼손은 굽히고 있는 모습이다.
불상은 연꽃무늬가 새겨진 타원형의 대좌 위에 놓여 있는데, 대좌 윗면에 1단의 괴임이 있지만 그 이하는 땅에 묻혀 있어서 알 수 없다.
27.인후동 석불입상
종 목 문화재자료 제10호
지 정 일 1984.04.01
소 재 지 전북 전주시 덕진구 인후동1가 146-1(용화사)
시 대 고려시대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인후동 용화사에 보존되어 있는 높이 2.7m의 석불입상으로 몸 아랫부분은 땅 속에 묻혀 있다. 오른쪽 귀가 훼손되어 있는데 임진왜란 때 가등청정이 칼로 쳤다는 전설이 있다.
신체에 비해 머리 부분은 큰 편이며 볼과 턱은 두텁게 표현되어 있다. 귀는 어깨까지 길게 표현되었고 목에는 3줄의 삼도가 새겨져 있다. 왼쪽 어깨로부터 흐르는 옷주름은 왼쪽 팔에서 아래로 늘어져 있으며, 하반신에는 대나무 마디 모양의 옷주름이 새겨져 있다. 팔꿈치를 굽힌 오른손은 가슴 앞에서 손등을 보이고 있고, 같은 높이의 왼손은 손바닥을 밖으로 하고 있다.
전체적인 양식으로 볼 때 고려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28.반곡서원
종 목 문화재자료 제11호
지 정 일 1984.04.01
소 재 지 전북 전주시 완산구 동서학동 2가 210번지
시 대 조선시대
팔송 윤황을 중심으로 시습제 이영선, 육곡 서필원의 위패를 모시는 서원이다. 윤황(1571∼1639)은 병자호란 당시 척화를 주장한 사람이고 이영선은 문원공 김사계에게서 배웠으며, 서필원은 벼슬이 판서에까지 이르러 당시 제현들과 함께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다고 한다.
서원을 지은 시기를 알 수 없으나 조선 고종 5년(1868)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고종 15년(1878)에 다시 지었다. 경내에는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과 강당이 있다.
29.황강서원
종 목 문화재자료 제12호
지 정 일 1984.04.01
소 재 지 전북 전주시 완산구 효자동 3가 295-3번지
시 대 조선시대
황강 이문연을 중심으로 이백유·이경동·이목·이덕린·유인홍·강해우 등을 추모하기 위한 서원이다. 원래 곤지산 아래에 있었는데, 조선 선조 때 임진왜란으로 불타고 고종 6년(1869)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 그 뒤 광무 2년(1898)에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다시 지었다.
강당은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30. 천고사 석불좌상
종 목 문화재자료 제145호
지 정 일 1999.07.19
소 재 지 전북 전주시 덕진구 만성동 822
시 대 조선시대
고려 전기에 원광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천고사의 미륵전 안에 모셔진 불상으로 전체 높이는 255㎝이다. 광배의 윗부분이 잘려나가고 얼굴이 마모되었으나 전체적으로 보존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불상의 얼굴은 둥글고 귀가 유별나게 긴 편이며, 어깨가 다른 신체 부분보다 너무 작게 표현되어 약간 움츠러든 모습이다. 옷은 왼쪽 어깨에만 걸치고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있으며, 손발은 평평하게 표현하여 부피감이 없다. 손은 오른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손가락이 아래를 향하고 있는 항마촉지인이다.
전체적으로 형식화된 표현수법을 고려할 때 만들어진 연대는 고려 후기로 추정되며, 당시 지방화된 불상양식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으로 생각된다.
31.극락암 목조여래좌상
종 목 문화재자료 제151호
지 정 일 2000.03.31
소 재 지 전북 전주시 덕진구 우아동 1가 산3
시 대 조선시대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우아동에 있는 목조여래좌상으로, 몸 속에 복장기를 넣고 있었으나 도난당하여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고개를 약간 숙이고 앉아 있는 불상은 단정한 신체와 안정된 자세 등에서 조선 후기 불상의 양식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완주 송광사 지장보살좌상 및 정수사 삼존불좌상 등 인근 지역의 17세기 불상들과 동시에 만든 목조불상으로 연구 가치가 높다.
32.충신 이흥발지려
종 목 문화재자료 제168호
지 정 일 2000.11.17
소 재 지 전북 전주시 완산구 삼천3동 산64-3
시 대 조선시대
이 정려각은 조선 중기의 충신 이흥발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조선 영조 29년(1753)에 나라에서 건립한 것이다.
이 건물은 원형 초석 위에 두리기둥을 세워 한 칸의 홑처마 팔작집을 구성하였다. 정려각 위에는 이흥발의 묘소가 있고 아래에는 근래 건립한 종중 재실이 있다.
이흥발은 정묘호란 이전 해인 조선 인조 4년(1626)에 상소를 올려 청나라 사신을 목벨 것을 요청했으며, 병자호란에서 청나라에 패하자 관직을 버렸다.
이 정려각은 현존하는 정려의 대부분이 효자와 열녀에 관한 것인데 비해 충신의 정려라는 점에서 주목되며, 전형적인 정려각 건축 형식을 그대로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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