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한국에서 대중교통 수단인 시내버스나 혹은 택시를 이용할 때, 기도하는 손이나 사무엘이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그림을 작은 액자로 만들어서 차 앞에 걸어놓은 것을 쉽게 볼 수 있는 때가 있었습니다. 운전을 직업으로 하다보면 언제든지 한 번은 사고 날 수 있다는 심리적 불안감 때문에 막연히 하나님께 안전을 구하는 그림을 차 앞에 붙혀둠으로써 그런 불안감을 떨쳐 버리려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런 버스나 택시의 승객의 입장으로 바라볼 때, 그런 불안감에 대한 막연한 마음의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안전을 느끼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기도는 진정한 믿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실상, 교회에 다니는 성도들 중에는 심리적 안정을 위해서 막연함 마음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루 세끼 식사할 때 드리는 습관적 기도 외에는 전혀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 혹은 주일 날 예배에서 모든 성도들이 함께 기도하는 시간이나 그 밖의 모임에서 순서에 따라 행해지는 기도 시간 외에는 전혀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의 기도가 바로 그런 기도입니다. 아무런 간절함도 없고 내용도 없는 기도를 형식적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기도는 진정한 의미에서 기도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어떤 성도들은 나름대로 스스로 기도를 드립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기도를 드리기도 하고,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 드리는 것ㅇ르 빼놓지 않습니다. 진정한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가려면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구역모임이나 수요기도회와 같은 기도 모임에 참석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기도를 하고나서 그것으로 끝입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고백한 것처럼 기도하는 것을 멈추는 죄 (삼상 12:23)에서 벗어나는 것만해도 대단한 성과처럼 여기는 것 같습니다. 기도에 대한 응답을 기다리지도 않으며, 기도할 때부터 이미 기도를 통해서 일어날 기적이나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서 전혀 기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기적이나 기도에 대한 즉각적인 응답은 특별한 사람들의 이야기일 뿐, 자신과는 별로 상관 없는 것으로 여기는 태도입니다. 그들에게 기도는 성도에게 주어진 무거운 짐일 뿐입니다. 기도가 살아계신 하나님께 드리는 사랑이나 감사의 고백, 혹은 존귀한 분에게 올려드리는 찬미의 노래, 혹은 가장 가까운 대상을 향하여 자신의 내밀한 것을 나누는 친밀한 대화인 것을 믿는다면, 당연히 기도는 성도에게 특권이 되어야 하고, 드려진 기도에 대한 응답을 기대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현재 장소 문제로 인해서 새벽기도회를 진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교회를 위해서 다른 어떤 때보다 더 많이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새벽에 함께 모일 장소가 없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아도 크게 꺼리낄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기도하는 음성을 듣기 원하시며, 그 기도를 통하여 응답하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영혼에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기도의 응답이 주어질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며, 늘 지켜보고 계실 뿐 아니라, 우리가 말하는 것을 듣고 계시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기도하는 것은 결코 막연한 대상에게 정성을 바치는 것도 아니고, 무거운 의무를 때우는 행위도 아니며, 일방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줄줄이 토해내는 한풀이 행위도 아닙니다. 기도는 다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그분과 대화하는 것입니다. 그 친밀한 대화 속에 고백이나 요구를 담아서 올리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앞으로 시작될 새벽기도회를 기다리며 현재 진행되고 있는 수요기도회에 참석해서 열심을 다해 기도하는 제자촌 교우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