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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질성의 세상과 언어: 조리 그레이엄
양균원(시인, 대진대 교수)
그레이엄(Jorie Graham)의 시는 존재의 근거에 대한 탐색을 특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녀는 1991년의 시집 이질성의 지역 (Region of Unlikeness)을 통해 만물을 부정(否定)의 상태로 돌려놓고 있다. 그래서 그녀의 시는 전통적인 시학에 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요소들로 득실댄다. 도달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다양한 시도에서 그녀의 언어는 비정상적인 띄어쓰기와 밑줄 그은 공란 그리고 말줄임표와 돌연한 행 구분 등 침묵의 양상들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그녀의 자아는 세상과의 상호감응에서 사물에 개별적 관계를 맺어줌으로써 그 이질성을 창조하고 확산한다. 그녀에게 특징적인 언어가 구축하는 세상은 독자에게 동질성에 대한 열망 대신에 이질성에 대한 면역을 요구한다.
이 글은 영미문학교육 제16집 1호에 게재되었던 논문 「이질성의 확산: 조리 그레이엄의 시」 중에서 그레이엄의 시 언어의 특성을 읽을 수 있는 시 두 편에 관한 해설 및 비평 부분을 일반 독자를 위해 약간의 수정을 거쳐 다시 수록한 것이다. 그 두 편은 1987년의 시집 아름다움의 끝(The End of Beauty)에 실린 시 「난해성에 관해」(“On Difficulty”)와 이질성의 지역에 실린 표제시이다.
I
세상 어느 것이라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이 존재하는 방식은 복잡하고 불확실하다. 그레이엄은 사물을 정돈하여 한 자리에 잡아두지 않고 그 존재의 형성에 관여하는 모든 것을 온갖 가능성 속에서 살피려한다. 그녀의 언어는 대상을 섣불리 정의하려하기보다 그것을 관찰하는 데 더 관심을 기울인다. 그레이엄의 시 「난해성에 관해」는 그녀에게 특징적인 언어관을 함축한다.
돌아가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는, 늦은 4월
절반은 불타고 절반은 꽃핀
숲, 저 위에서 누군가 내려다볼 때
그들이 알고자 하는 것은 자신들이 누구의 것이냐, 라는 것
숲은 그들의 집이 아니랍니다.
꽃피는 곳은 그들의 집이 아니지요. 저 뒤쪽에 있는 것이 무엇이든
아니에요. 뭔가가 그들 주변 대기에 떠다니고 있어요.
그것은 마치 하루가 익사하는 곳, 예컨대 외침들이 사라지는 가장자리의 장소 같아요, 그 갈라진 틈이, 희미하게 빛나요.
It’s that they want to know whose they are,
seen from above in the half burnt-out half blossomed-out
woods, late April, unsure as to whether to
turn back.
The woods are not their home.
The blossoming is not their home. Whatever’s back there
is not. Something floats in the air all round them
as if it were the place
where the day drowns,
and the place at the edge of cries, for instance, that fissure, gleams. (End 9)
화자는 “그들”을 염려의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그들의 관심과 가능성을 여러모로 탐색한다. 그들이 누구인지 혹은 무엇인지 처음부터 분명하지 않은 채 시는 진행한다. 그들은 아직 숲속에 있으면서도 숲 밖에서 좀 더 정확히 말해 숲 위에서 누군가 자신들을 내려다보는 상태를 가정한다. 자리를 옮겨 자기를 살피는 것은 성찰의 시작을 알린다. 그들은 그렇게 스스로를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경험을 거쳐 예전의 자신들로 돌아가야 할지 확신을 갖지 못한다. 어떤 것이 자신의 모습인지 알지 못하는 탓일 것이다.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자기와 동일한 어떤 것이 아니라 자기와 다른 것들이다. 자기가 무엇인지는 말할 수 없지만 그 동일성에 값하지 못하는 것들은 알아볼 수 있다. “숲”은 그들의 집이 아니고 “꽃피는 곳” 또한 아니다. 화자는 그들이 숲이나 꽃피는 곳에 의해 소속이 한정될 수 없다고 단정한다. 그들은 자신의 소유주가 다시 말해 자신을 창조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주체가 누구인지 알고 싶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정체 또한 정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화자는 숲속 깊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이 그들의 소속의 근거를 제시해주지 못한다고 여긴다.
그렇다고 그들이 소유주의 전망 없이 완전한 방기 혹은 미아의 상태에 있는 것만은 아니다. 그들 주변의 대기에 “뭔가” 떠다니고 있다. 모호하게 드러나기 시작한 그 뭔가는 늦은 4월의 햇볕에 반쯤 타고 반쯤 꽃으로 뒤덮인 숲에서 하루가 익사하고 있는 곳이고 갈망이나 고통의 외침이 멀리 도달해 사라지는 변두리이며 갈라진 틈에서 희미한 빛이 새나오는 곳이다. “뭔가”가 사물이 아니라 “장소”로 표현되고 있다. 화자는 그들이 그곳에 소속해야 하리라고 여기는 것 같다. 하지만 독자로서는 그곳이 무엇인지 아직 알 길이 없다.
화자의 시선이 “그들”에서 “그”와 “그녀”에게로 전환한다. 불특정복수의 상황에서 보다 구체적인 남녀의 처지로 바뀐다.
이제 그가 손을 내밀고 있어요.
그녀의 형상을 띤 움푹 팬 곳이 있을까요?
그들의 사원에서는 내가-무슨-짓을-한-거지와 같은
두들겨대는 소리―하지만 아직 질문에는 이르지 못했어요, 실제로
공허의 표면에 소금기 밴 거품처럼 떠도는 목소리에서 벗어나
미끄러지듯 새나오는 소리까지는 아직 아니에요―
Now he’s holding his hand out.
Is there a hollow she’s the shape of?
And in their temples a thrumming like
what-have-I-done?−but not yet a question, really, not
yet what slips free of the voice to float like a brackish foam
on emptiness− (End 9)
남자가 손을 내민다. 하지만 그의 손을 맞잡아줄 그녀는 “움푹 팬 곳”의 형상을 하고 있다. “움푹 팬 곳”은 다른 번역에서 “공허”로 대체될 수 있다. 결합의 전망은 어둡다. 화합에 이르지 못한 그들이 기도의 전당에서 후회를 한다. 목탁 두들기는 소리와 스스로를 책망하는 소리가 음절의 리듬에 맞춰 공명을 이룬다. 하지만 그들의 반성은 무엇이 문제인지에 관한 질문에는 이르지 못한다. 그들이 화합의 방식에서 갖추게 될 어떤 매끄러운 목소리도 아직 그들의 몫이 아니다.
이어지는 시행에서 화자는 두 연인에게 희망을 버리지 말라고 격려한다.
오 당신들은 그것에 도달할 거예요, 당신들 둘은 저 아래
넝쿨이 시작하는 곳에서, 그것에 도달할 거예요.
당신들의 추론이 지향하는 그것에, 떠다니는 의미들이
내려앉고
해안이
지탱하고 있는 그곳에
Oh you will come to it, you two down there
where the vines begin, you will come to it,
the thing towards which you reason, the place where the flotsam
of the meanings is put down
and the shore
holds. (End 9)
화자는 남자와 여자에 대해 관찰하는 자에서 그들에게 직접 말을 건네는 자로 바뀐다. 그들(“당신들”)의 처지를 익히 이해하고 동정하는 자의 목소리를 낸다. 그들은 아직 숲속에 있지만 물살에 둥둥 떠다니는 의미들이 가라앉고 해안이 스스로를 지탱할 수 있는 곳에 언젠가는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화자의 격려는 자신에게 보내는 것일 수 있다. 두 남녀와 화자 모두는 이성적 사유와 의미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공통의 처지에 있기 때문이다.
그레이엄의 시는 연의 구분 없이 어조와 목소리의 변화를 꾀하는 경우들이 많다. 시 「난해성에 관해」 또한 50행에 달하는 연속된 시행으로 구성되어 있다. 거의 의식의 흐름에 가까운 진행에서 호흡의 완급에 따라 숱한 쉼표와 대시가 삽입되면서 때로는 한쪽 지면의 폭을 다 채우는 시행이 때로는 한 단어로 된 시행이 이어지기도 한다.
잠깐의 동조 후에 화자는 다시 거리를 유지하는 전지자적 관찰자의 전달의 목소리를 낸다.
그들은 생각해요, 잠깐 잠들었던 게 분명해
바뀐 게 도대체 뭐지? 라고. 그들은 생각해요.
결국, 덤불숲이 저리도 낮았구나, 라고. 사람이 기다림 속에서
(결국) 발견하게 되는 선택들이 얼마나 유한한가, 라고.
백색의 파생에 더 가까운 것들은
항상 이 그림자 혹은 저 그림자에서 멈추고
권태를 깨뜨리다가 멈추고
흐름을 깨뜨려 마침내 형상으로 만들지만 그 후
멈추고−
They’re thinking we must have slept a while,
what is it has changed? They’re thinking
how low the bushes are, after all, how finite
the options one finds in the
waiting (after all). More like the branchings of whiteness
always stopping short into this shade or that,
breaking inertia then stopping,
breaking the current at last into shape but then
stopping− (End 9-10)
“그들”은 숲속에 있지 않고 숲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다. 그들은 높은 곳에 오고 보니 예전의 거처가 얼마나 낮았는가를 깨닫는다. 내가 속한 세상의 좁음은 더 넓은 세상에 나감으로써 확인된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리고 “사람” 일반에게 있어서) 자신을 옭아매는 삶의 조건을 벗어나려는 노력은 단속적이다. 빛의 백색이 아무리 뻗어나가려도 그림자에서 멈춘다. 중요한 것은 다시 시작하려는 의지일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의지에 따르는 인물들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고통은 반복된 “멈추고”의 단절에서 여실하게 전달된다.
화자는 관찰과 사색을 이어가던 후에 청자까지 끌어들여 그들의 가능성을 탐문한다. 여기서 관찰의 대상인 “그들”은 숲에 있고 청자와 화자는 숲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다. 앞선 시행들에서 “그들”이 스스로를 위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를 차지했던 것과 비교된다. 관점과 목소리의 예고 없는 변화가 시에 난해성을 더해준다. 이 화자의 목소리는 모든 것을 이해하는 자의 것이다.
만약 당신들이 그들에게 묻는다면, 그들이 서로의 몸의 모서리를 처음 발견한 게 언제였냐고, 어디에
행복이 거주하느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당신들이 그 사이로 내려다보고 있는
푸른 나무들의 갈라진 틈새로 올려다보고 있을 거예요.
If you asked them, where they first find the edges of each other’s bodies, where
happiness resides they’d look up through the gap
in the greenery you’re looking down through. (End 10)
거의 산문에 가까운 리듬으로 진행되는 시행들은 화자의 설명하고자 하는 욕구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푸른 나무들을 사이에 두고 두 부류의 사람들이 존재한다. 나무들 속에 있는 사람들은 위를 바라본다. 위에 있는 사람들은 아래 숲속을 바라본다. 가로막은 푸른 나무들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바라봄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갈라진 틈새”이다. 안과 밖 혹은 아래와 위 사이의 교통은 전면적이지 않다. 순간 벌어졌다 닫히는 어느 틈에서 이뤄진다. 어떤 의미에서 숲속 존재들 사이의 교류 또한 “틈새”에 의존한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틈새를 통해 하늘을 보고 그 하늘에서 숲속을 보는 경험을 거쳐 서로의 한계에 대한 인식과 교감의 전망을 부여받는다. 틈새가 없다면 “서로의 몸의 모서리”가 이어질 가능성이 없을 수도 있다. 그들이 간절하게 위를 바라보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화자는 성찰의 막바지에서 의미형성에 관여하는 여러 요소들에 대해 그리고 그것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 보다 직접적으로 접근한다. 유사한 구문의 반복을 통해 호흡을 빠르게 몰고 간다.
그들이 알고자 하는 것은―(왼쪽에는) 닫힌 교회 안 침묵의 성화(聖畵)들
(오른쪽에는) 침묵의 먼 전경―
그들 스스로를 건네는 방법이에요.
그것이 그들이 지금 위를 바라보는 이유에요.
그것이 그들이 이제 서로를 만지려는 이유에요 (당신들의
바라봄을 위해), 그것이 그들이 이 일로 당신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자 원하는 이유에요, 당신들이 볼 수 있도록
그럼으로써 볼 수 있도록, 올려다보면서, 서로에게 다가가면서, 긴잠
유사성의 긴 잠이 시작되면서
영원이 시작되게, 당신들을 위해 서로 더 만지면서, 그곳에서, 당신들 틈에서
풀잎의 짧은 내뻗음들이 그들을 받치도록, 그럼으로써 당신들이 셀 수 있도록
그럼으로써 장면을 믿을 수 있는 것으로 채색할 수 있도록
수천 송이 꽃들을 쌓아올려
(그녀를 더 만지면서) 그들에 대한 당신들의 바라봄을 거의 방해하면서―
당신들이 시선을 돌린다면
그들은 누가 될 것인가 경애하는 신이면서 무엇인 존재여.
What they want to know−the icons silent in the shut church (to the left),
the distance silent in the view (to the right)−
is how to give themselves away,
which is why they look up now,
which is why they’ll touch each other now (for your
looking), which is why they want to know what this
reminds you of
looking up, reaching each other for you to see, for you to see by, the long
sleep
beginning, the long sleep of resemblance,
touching each other further for you that Eternity begin, there, between you,
letting the short jabs of grass hold them up for you to count by,
to color the scene into the believable by,
letting the thousands of individual blossoms add up
and almost (touching her further) block your view of them−
When you look away
who will they be dear god and what? (End 10)
교회 안 성화나 먼 풍경은 말이 없다. 사물성의 잠속에 빠져있다. 아직 의미를 일구지 않은 황무지로 있다. 그 와중에서 그들은 “스스로를 건네는 방법”을 배우고자 한다. 사물의 의미는 의식의 주체자를 포함하는 다른 것들과의 관계설정에 의해 형성될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횡적으로는 서로에게 그리고 종적으로는 보다 높이 있는 어떤 것에게 스스로를 줄 수 있어야 한다. 의미형성을 위한 관계의 망 속에 들어가기 위해 그들은 서로를 만지고 위에 있는 당신들의 눈길을 받을 필요가 있다. 특히 그들은 위에 있는 “당신들”이 아래에 있는 자신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어 한다. 좀 더 높은 위치는 좀 더 넓은 관계의 망을 확보한다. 보다 넓어진 전체의 배경에서 한 부분의 의미는 보다 복잡해지고 보다 공동체적으로 확장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이 정반합의 결론을 향한 발전의 양상을 띠지는 않는다. 관계의 망이 켜켜이 겹치는 중에도 의미는 궁극적 형상을 드러내지 않는다. 동일성의 전망은 멀고 오직 “유사성의 긴 잠”이 그 자리를 대체한다. 관계는 근본적으로 열려있는 것이므로 끊임없이 생성되고 확장하는 특성을 갖는다. 여기서 의미형성은 끝없이 지연되는 고통을 겪는다.
수풀 사이에 위치한 그들은 서로에게 접근하고 있다. 그들 중의 남자는 “그녀를 더 만지면서” 관계를 쌓아올린다. 숲은 관계의 그물이 촘촘해지면서 이제 위에 있는 당신들이 셀 수 있는 대상이 되고 채색을 갖춘 장면을 이룸으로써 믿을 만한 것이 된다.
하지만 사물은 관계의 씨줄 날줄이 두텁게 겹치면서 오히려 의미가 감춰질 수도 있다. 숲속의 그들은 수천송이의 꽃을 쌓아올림으로써 서로의 접촉을 강화했지만 그럼으로써 오히려 위에 있는 당신들의 바라봄을 방해할 수 있다. 당신들은 의미형성에 보다 넓고 높은 관점을 제시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당신들은 의미의 문제를 연구하고 이해하는 자로서 화자나 시인의 능력에 값하고 고급 독자의 능력에 등가적인 사유의 힘을 갖췄을 것이다. 그래서 당신들은 “경애하는 신이면서 무엇인 존재”로 불린다. 그 존재는 신에 유사한 무엇이지 신 그 자체는 아니다. 그 무엇이 누구(무엇)인지 누군들 알겠는가? 그렇지만 화자는 마지막 두 행에서 그 존재가 세상의 의미구현에 필수적이라고 여기고 있다.
의미는 관계가 없이는 형성되지 않지만 있다고 해서 최종적으로 이뤄지는 것도 아니다. 숲속에 있는 “그들”은 의미의 구현을 위해 우선 서로에게 다가가야 한다. 또한 위에 있는 “당신들”의 바라봄을 기다려야 한다. 그 당신들은 “갈라진 틈”으로나 확인할 수 있는 존재이다. 이렇게 맺어진 관계에서도 의미는 형성의 양상을 지속적으로 보여줄 뿐 궁극의 실체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유사성의 긴 잠”이 “영원”히 계속될 따름이다.
그레이엄의 「난해성에 관해」는 시적 언어의 어려움을 설파한 시라고 볼 수 있다. 시인의 임무는 언어화된 세상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녀의 세상에 대한 인식의 방식에서 세상은 관념화되기 이전의 상태를 회복함으로써 의미에 앞서는 그 사물다움으로써 다가온다. 그것은 정의하기 어려운 원시적 실체이다. 그녀는 표현할 대상의 정체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고 다만 그것에 대한 지향을 시도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래서 그녀의 언어는 정의하려하기보다는 전략적으로 시인과 세상 사이의 부단한 관계의 양상을 연출하는 데 집중하는 것으로 보인다. 전달과 교훈의 언어에 익숙해 있는 독자에게 그녀의 시가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II
시 「이질성의 지역」(“The Region of Unlikeness”)은 우리가 살아가는 장소에 대한 현실적 진단이면서 그에 상응하는 새 정신의 활로에 대한 모색으로 보인다. 이 시의 주인공은 현재의 일상과 과거의 경험을 뒤섞는 가운데 의미의 부재와 의미의 출현 가능성 사이에서 목소리를 낸다. 시의 목소리는 전체적으로 전지자적 1인칭 화자의 것이지만, 시의 청자 “당신”이 현재와 과거 사이의 어느 시기에 처하느냐에 따라서 그리고 그 청자가 주어진 순간의 현실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정도에 따라서, 그 어조가 여러 가지로 바뀐다. 시의 화자는 청자의 이런 저런 상태에 대해 이야기하는 전달자의 자세를 취하지만 경우에 따라 청자의 처지에 동화되어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여기서 화자는 청자인 자기 자신을 여러모로 살피면서 제 행적에서 어떤 의미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위치에 있다. 화자의 목소리는 기억과 청자의 내면 그리고 현실 사이를 헤집고 다니면서 복잡한 이질성의 현장을 구현한다.
시의 첫 부분에서 화자는 잠에서 깨어나는 청자를 묘사한다.
당신은 잠에서 깨어나 당신 옆에 숨 쉬고 있는 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다가 (세상이란 눈에 보이는 것과는
다른 곳이지요)
그러다가 알게 되요.
창문은 열려 있고, 비가 내리고 있어요, 그러다 방금
그쳤어요. 친구여, 시의 목표란 무엇인가요?
그런데 당신은, 당신은 그 소녀들 중의 한명인가요?
이제 당신의 발등에 느껴지는 방바닥 냉기는
그런저런 개별적 사례들을 가로질러 온 몸통을 뚫고 당신의 마음속으로
곧장 올라오는 탓에 그만큼 더 생생해지는 것인가요?
다섯 번, 여섯 번 찬 기운을 받아들이면서, 걸음, 걸음, 가로질러 드디어
창문까지
그때 당신의 길을 빠르게 토막 내어 던져 올리는 새소리
천 년 전에 조율되었어도 여전히 팽팽한 어느 현(弦)의 울림 …
그가 잠자다가 몸을 뒤척이네요.
당신은 여기서 빠져나가고 싶어요.
이제 시장터가 된 아래 길가에 뻗어있는 가게들.
일어나지 마세요. 이 장면을 흑백으로 유지하세요.
You wake up and you don’t know who it is there breathing
beside you (the world is a different place from what it seems)
and then you do.
The window is open, it is raining, then it has just
ceased. What is the purpose of poetry, friend?
And you, are you one of those girls?
The floor which is cold touching your instep now,
is it more alive for those separate instances it crosses
up through your whole stalk into your mind?
Five, six times it gets let in, step, step, across to the window.
Then the birdcall tossing quick cuts your way,
a string, strung a thousand years ago still taut. . . .
He turns in his sleep.
You want to get out of here.
The stalls going up in the street below now for market.
Don’t wak up. Keep this in black and white. (Dream 115)
청자가 위태롭다. 화자는 청자가 잠에서 깨어나 창가로 다가가는 장면을 가정하고 있다. 청자는 잠자리를 함께한 사람의 정체를 순간 알아채지 못한다. 청자는 화자가 “친구”라고 부르고 시의 목표를 묻고 있다는 점에서 시인의 길을 가는 사람이다. “그 소녀들”은 시를 통해 인생의 의미를 찾는 여성들일 것이다. 그들은 남성에 대해 또한 잠들어 있는 상태에 대해 대비되는 위치에 있다. 청자는 무엇엔가 이끌려 잠 밖으로 나와 창가로 다가간다. 이 과정의 걸음걸이에 대한 묘사는 청자가 겪는 내면의 혼동과 긴장에 대한 등가물을 이룬다. 청자의 의식은 괄호의 사용과 의도적인 행 구분 그리고 문장의 구문보다 단어들 자체에 의존하는 전개에서 그 호흡과 맥박이 효과적으로 살아나고 있다. 방바닥을 내딛는 걸음 하나하나가 “개별적 사례들”을 이루면서 그때마다 냉기가 온몸을 지나 머릿속까지 파고들듯이 청자는 어떤 동떨어진 기억들을 하나씩 실감하면서 무엇인가에게로 나아가고 있다. 청자는 창가에 이르러 밖의 길을 내다본다. 그 순간 그녀는 자신이 걸어갈 혹은 이미 걸어온 어느 길이 새소리에 의해 칼질당하는 것을 경험한다. 그 새소리는 청자의 현재와 과거 모든 것을 한꺼번에 깨워내는 어떤 것이다. 그 울림이 일으키는 긴장은 한 순간에 대한 것이 아니라 청자의 생애보다 훨씬 더 긴 세월에 대한 것이다. 청자는 그 긴 세월 내내 팽팽하게 조율되어 유지된 어느 소리에서 현실의 공간을 벗어나야할 긴박감을 느낀다. 이 긴급한 요구는 청자의 시에 대한 욕구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이 느낌의 유지를 위해 일상의 현실과 잠시 거리를 두고 싶어 한다. 일상이 총천연색이라면 지금 그녀가 맞이하고 있는 세상은 흑백이다.
역설적이게도 청자는 일상의 잠에서 깨어나 다른 종류의 잠속으로 들어가는 듯하다. 그녀가 찾아가는 곳은 일상과 경계를 이루면서 바로 그 너머에서 들려오는 새소리의 세계이다. 이 세계는 현실의 잠에서 깨어나 대하는 것이면서도 일상의 경계 너머에 있다는 점에서 다른 종류의 “흑백”의 잠일 수 있다. 화자는 청자에게 이 잠에서 아직 깨어나지 말라고 충고한다. 이 잠은 시공의 제약에서 자유로운 기억의 활동을 고무한다.
장소는
로마예요. 그 사내의 이름이 … 뭐더라? 말하는 사람은
열세 살인데. 헐벗은 벽들. 빛이 지저분한 수건 같아요.
그 이름은 클로디오군요. 얼마 전에 누군가 내게 말했지요, 그가 서른
살이 되기 전에 약물 과다 복용자가 될 거라고.
아래 술집에서는 대 테러 경찰들이
(그들 중 셋이 담당하는 곳은 여기 인근) (옛 빈민가 지역인데)
커피를 마셔요. 그들이 웃는 소리가 들릴 거예요.
몸을 밖으로 기울이면
문간에서 기관총
개머리판이 흔들리는 게 보일 거예요.
당신은 무엇에서 깨어나는가요? 그곳에 가본 적이 있는 건가요?
존재라고 불리는 이 순환의 무엇이 사물의
종말을 두들기고 있는 건가요?
당신이 상체를 밖으로 굽혀 덧문을 밀치자, 그게 삐걱거려요.
위쪽에 보이던 세 소년이 좁은 길을 따라 빠르게
웃어대면서 지나가요.
검은 개가 짖어요.
It’s
Rome. The man’s name . . . ? The speaker
thirteen. Walls bare. Light like a dirty towel.
It’s Claudio. He will overdose before the age of
thirty someone told me time
ago. In the bar below, the counterterrorist police
(three of them for this neighborhood) (the Old Ghetto)
take coffee. You hear them laugh.
When you lean out you see the butts
of the machineguns shake
in the doorway.
You wake up from what? have you been there?
What of this loop called being beating against the ends
of things?
The shutters, as you lean out to push them, creak.
Three boys seen from above run fast down the narrows,
laughing.
A black dog barks. (Dream 115-16)
화자가 목격하는 청자의 세계는 로마의 뒷골목이다. 열세 살의 소녀가 이름도 바로 떠오르지 않는 약물중독 사내와 하룻밤을 보내고 새벽에 깨어나고 있다. 그곳은 “헐벗은 벽”에 지저분한 수건 같은 빛이 반사되는 방으로서 아래에 술집이 있다. 기억의 환기에서 화자가 경험하는 세계는 과거의 것이면서도 생생한 현실을 이룬다. 화자는 청자에게 그녀의 깨어나려는 노력이 기억으로부터의 탈출을 위한 것인지를 묻는다. 이 물음은 수사적인 것으로서 청자에게 깨어나려는 목적을 보다 분명하게 의식하게 한다. 화자는 청자가 기억을 보다 생생하게 살려내게 독려함으로써 그녀가 무엇에서 깨어나야 하는지를 자각하도록 돕고 있다.
청자가 침상에서 일어나는 일과 그녀의 과거의 기억들이 화자의 의식에서 뒤섞이고 있다. 이 뒤섞임에서 현실은 일상성에 덧붙여 꿈의 속성을 띠기도 한다. 그래서 청자가 그것으로부터 깨어나려 하는 대상은 우선 일상이다. 그냥 지속되는 일과의 흐름에서 벗어나고자 할 때, 청자는 과거에로, 혹은 과거 속에 잠겨 있는 어떤 의미의 순간에로 깨어나고자 시도하고 있다. 화자가 청자의 이러한 자각을 부추기는 행위는 무엇에론가 새롭게 나아가야할 화자 스스로의 긴박성을 반영한다. 청자의 방안에서는 잠자리를 같이 한 낯선 사내가 있고 밖에는 그녀의 의식 속에 갇혀 있던 것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현실로 살아난 기억에는 “기관총”과 약물 복용자가 살고 있다. 여기서 청자의 의식은 꿈과 현실 그리고 과거와 현재가 뒤섞여 있다. 이러한 방식의 삶에 대한 이해에서 “존재”는 “순환”의 고리에 의해 모든 것이 얽혀 있다. 화자는 청자에게 이 순환의 어느 위치에서 “사물의 종말”에 대해 탐색하고 있느냐고 묻고 있다. 청자는 화자의 기대에 맞춰 기억의 되새김질을 통해 과거가 순환의 현실성을 획득하는 순간에로 나아가려 한다.
벤들러는 이 시에 대해 13세 소녀가 첫 성 경험 후 깨어나 놀라 갈피를 못 잡는 채로 새벽에 집으로 달려가는 “실제 삶”의 단면을 담고 있다고 해석한다(“Mapping” 213, 232). 그레이엄은 “당대 세상에 대한 묘사가 예술가의 일차적 책무다”(“Mapping” 212-13)고 여기고 있다. 이 실제적 사건은 다른 시간들과 엉키면서 중의적 차원에서 재구성된다. 그레이엄의 시에는 여러 긴장들이 나타나는데 그중 “존재와 죽음” 사이의 긴장이 “거대한 형이상적 주제”를 이루고 여기에 덧붙여 “개방성 대 형상, 연속과 종결, 불확정과 개괄, 존재와 일시성, 혹은 경험과 예술” 사이의 긴장들이 다뤄진다(“Mapping” 223). “자서전, 역사, 신화, 그리고 철학적 해석, 이러한 것들이 평행의 중층을 형성하는 이면에는 … 시의 ‘줄거리’가 직선적이지 않고 … 하나의 ‘회오리’라는 믿음이 자리하고 있다”(231). 벤들러는 그레이엄이 네 번째 시집에서 행한 “예술가의 업무”가 “상이한 영역의 기억이 소용돌이로 이어지는 것을 해석하는 것, 이질성의 지역에서 유사성을 발견하는 것 (혹은 창조하는 것)”이었다고 평하고 있다(“Mapping” 231).
청자는 창밖의 세상을 찾아 나선다. 청자는 이제 잠에서 깨어나 있다. 그런데 그녀는 하룻밤의 잠에서 깨어난 것이 아니다. 그녀는 오랜 세월의 잠에서 깨어난다. 그녀가 깨어나 찾아가는 현실에서 이제 그녀는 세상을 대하고 그것에서 시를 지어내려 분투하는 어린 소녀이다. 하나의 기억에서 깨어나 또 하나의 기억에로 뛰어들고 있다.
하룻밤
이상이었어? 별 탈 없었던 거니? 부모님은
어디 계시지? 옷 입고 문으로 가거라. (내 말 따라해).
이제 그녀의 몸이 차가운 문 가장자리를 가로질러
그 몸이 자라게 될 현장 속으로 들어가요. 이제 그
연철(鍊鐵)로 된 난간―세 층에 달하는 그것―이제 그 딸깍
딸깍 하고 돌바닥에 부딪치는 그녀의 샌들소리들―
각각의 소리가 새로운 심기(植裁)여서―그 밖의 모든 것들과는 다른 것이어서―
각각이 확고하게, 그곳에, 그 토양 속에 심어졌고
길가 육중한 문에서 새어나온 얇은 띠의 빛
그리고 그녀 자신이 빠져나간 후의 다른 하나의 빛
나중에 그녀는 길을 따라 걸으면서 그것들에게 이름을 부여할 거예요, 하나
하나씩―사라사 무늬 옷을 입고 빵을 들고 가는 소녀의 등
문득 올려다보다 목격한 늙은 여인.
나중에 그녀는 길을 따라 걸으면서, 매 순간에
한 단어씩, 심어놓은 것들 위에 그것들을 탁 내려놓아서
그것들을 조용하게 유지할 거예요.
하지만 지금은 지나가는 차들에서 쉿 하는 소리가 나는데
Was it more than
one night? Was it all right? Where are
the parents? Dress and get to the door. (Repeat after me).
Now the cold edge of the door crosses her body
into the field where it will grow. Now the
wrought-iron banister―three floors of it―now the clack
clack of her sandals on stone―
each a new planting―different from all the others―
each planted fast, there, into theat soil,
and the thin strip of light from the heavy street-door,
and the other light after her self has slipped through.
Later she will walk along and name them, one by
one―the back of the girl in the print dress carrying bred,
the old woman seen by looking up suddenly.
Later she will walk along, a word in
each moment, to slap them down onto the plantings,
to keep them still.
But now it’s the hissing of cars passing. (Dream 116)
화자는 이제 이 시의 주인공을 “친구”로서 다루지 않는다. 화자는 주인공을 삼인칭 “그녀”로 호칭하기까지 한다. 화자는 자신을 청자 “당신”으로 객관화하여 대화상대로 삼았던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린 시절의 자신을 “그녀”로 취급한다. 화자는 청자인 어린 소녀에게 어서 옷을 입고 문밖으로 나가라고 독려한다. “내 말 따라해”라는 말 속에는 인생 선배의 후배에 대한 강한 요청이 담겨 있다. 화자는 이렇게 하는 것이 소녀에게 필요하고 유익한 것이라는 믿음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화자가 자신의 한 부분을 이루는 어린 시절을 되살려내고 그것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노력일 수 있다. 소녀가 삼층에서 거리로 내려와 대하는 모든 것들은 하나하나가 경험의 직접성에서 생생하게 다뤄져야 할 것들이다. 각각의 경험은 “확고하게, 그곳에, 그 토양 속에” 심어졌으므로 소녀는 나중에 시인이 될 때 이것들에게 이름을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소녀는 매 순간의 경험에 충실하다. 그녀가 몸으로 받아들이는 경험은 한 순간에 한 단어만 허용하는 방식으로 이뤄지면서 현장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심기(植栽)의 행위는 구체적 현장성을 보장한다. 화자는 의도적으로 소녀의 경험이 관념이나 일반화에 물들지 않은 종류의 것임을 강조한다. 하나의 경험은 다른 하나의 경험에 영향을 주지 않을 정도로 그 자체로서 추구된다. 그러면서도 화자는 소녀가 자신이 경험하는 것들을 “심어놓은 것들 위에 … 탁 내려놓아서” 그것들에게 시적 안정성을 찾아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이 방식에서 여러 경험들은 각자의 것으로 추구되고 또한 동시에 서로 겹쳐짐으로써 시를 형성하게 된다. 하지만 소녀는 아직 시인이 아니다. 화자는 소녀에게 심어놓은 것들이 나중에 시인이 된 후 그녀에게 얼마나 중요하게 기여할 지를 익히 의식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나중의 일이고 당장에 들려오는 소리는 차량의 소음이다.
화자는 소녀 시절의 기억을 통해 시 창작 방식에 대한 사유를 이어간다. 이제 화자의 목소리는 시인의 목소리에 가까워진다. 이 시의 화자는 친구를 걱정하던 목소리에서 어린 소녀의 감수성에로 되돌아가는 목소리를 거쳐 이제 시에 대한 탐색의 열정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왼쪽으로 돌아서 캄포 데이 피오리 안으로―
그것은 경애하는 신의 불길을 통해
명확성을 통해
미세한 것들이 안에서 딸깍거리고 있는 사물의 공허를 통해
어떤 저항도 없이 곧장 그것을 통해 일어나야 하지만
이제 좀 달려가려는데, 주변을 온통 메우고 있는 가게들
문간마다 앉아있는 고양이들
아티초크 풀로 그것을 시작하는 아낙네
―이 가격 저 가격 불러대는데―
그것을 통해 곧장, 그것은 타오름이 아니고, 추락이 아니고
꿰찌르는 소리가 아니고―
다만 열려 있음, 그것을 관통해 나가는 하루, 관통해 나가는 모든 이야기일 뿐인데.
당신은 그녀가 이제 집으로 돌아가길 원하나요? 학교에 늦기를 바라나요?
여기가 그녀의 빈 방이에요.
흰 침대보 위에 빛이 떨리는 목소리를 내요. 이것이 바로
정확하게도
그것이 느리게 움직이는 방식이지요.
이제 여자들이 모두 가게에 나와 있어요.
꽃 시렁 뒤에 있는 사람이 울다가
―나중을 위해 그 일은 현장에 놓아두세요―
사로잡혀요―
and Left into Campo dei Fiori―
And though it should be through flames dear god,
it’s through clarity,
through the empty thing with minutes clicking in it,
right through it no resistance,
running a bit now, the stalls filling all round,
cats in the doorways,
the woman with artichokes starting it up
―this price then that price―
right through it, it not burning, not falling, no
piercing sound―
jus the open, day pushing through it, any story pushing through.
Do you want her to go home now? do you want her late for school?
Here is her empty room.
a trill of light on the white bedspread. This is
exactly
how slow it moves.
The women are all in the stalls now.
The one behind the rack of flowers is crying
―put that in the field for later―into
captivity― (Dream 116-17)
“그것”은 소녀의 감수성이 삶의 세부와 직접적 만남을 성취하는 순간들에서 일어난다. 그 만남은 당위적으로는 신성한 불길에 의해 이뤄져야 하지만 설령 그러한 신성이 주어지지 않더라도 “명확성”을 통해, 그리고 사물이 미세한 것에까지 제 떨림을 유지하는 한에서 그 사물에 어떤 관념도 주어지지 않은 채로 이뤄진다. 사물에 관념이 제거된 공허의 상태는 소녀와 사물이 직접적으로 곧장 만나게 하는 전제조건이 된다. 소녀가 어떤 저항도 겪지 않고 곧장 관통하는 방식으로 만나는 것들은 어떤 대단한 진리의 신비가 아니다. 그것은 열려 있는 채로 다가오는 주변의 모든 사물들 및 사건들이다. 그래서 그렇게 이뤄지는 소녀와 세상의 접점은 “타오름”이나 “추락” 혹은 “꿰찌르는 소리”와 같은 이변적인 것이 아니고 또한 열망이나 좌절 혹은 분노와 같은 어른 세계의 것으로도 이뤄지지 않는다. 세상과의 대면은 앞으로 소녀에게 많은 기대와 실망을 가져다 줄 것이다. 이 걱정에서 화자는 갑자기 어른 청자로서의 “당신”을 끌어들인다. 어른 청자인 “당신”에게 소녀를 돌보라고 당부한다. 화자는 소녀가 거리에서 집으로 그리고 세상에서 학교로 돌아가야 하리라고 여긴다. 그렇지만 화자는 그러는 가운데서도 소녀가 완전히 일상의 세계로 돌아가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제 새벽이 가고 아침이 오면서 그녀의 빈 방에 빛이 들어온다. 흰 침대보 위에서 빛이 떨고 있다. 이 떨림이 만들어내는 목소리는 너무 미세하고 너무 느리게 움직인다. 소녀가 세상과의 접촉에서 이루는 것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서서히 그리고 미세하게 움직일 따름이다. 그것은 날카롭고 강력하며 기민한 어떤 것에 아직 이르지 못하고 있다.
날이 새자 가게에 여인들이 들어찬다. 세상의 일과가 시작되면서 그 안의 고통 또한 시작한다. 화자는 소녀가 “나중을 위해” 그러니까 시인의 길을 갈 때를 대비해 이 고통의 원인을 “현장에 놓아두”고 그 안에 갇혀 “사로잡”히라고 충고한다. 화자가 체험의 축적과 관련하여 소녀에게 가르치려는 것은 세상과의 만남이 현장을 떠나서 이뤄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화자의 목소리는 이미 시인의 길을 걷는 자의 입장에서 이제 갓 시작하려는 초보자에게 뭔가를 가르쳐 주고자 하는 자의 것이다. 화자는 일인칭 화자 “나”의 생각을 직접적으로 표현한다. 화자는 이제까지 등장시킨 여러 페르소나의 가면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육성으로 시에 관해 언급한다.
내가 책임질 게 있다면 무엇에 대해선가요? 결국
현장에 대해선가요? 다채색 꽃들 틈에 울고 있는 여자에 대해선가요?
색채의 정확한 음영들에 대해선가요? 지난밤의 행위들에 대해선가요?
뚫고 나갈 방법이 있나요? 그래서 그것을 충분히
딱딱하게―가시가 많게, 기
억 나게 할 수 있나요? 밀고나가세요. 마지막 연골 조각
물푸레나무에 이르기까지, 기억 속에 소생된 이 소녀와 밀고나가세요.
이제 강을 따라 달리고, 다음은 다리로, 다음은 재빠르게
집으로.
If I am responsible, it is for what? the field at the
end? the woman weeping in the row of colors? the exact
shades of color? the actions of the night before?
Is there a way to move through which makes it hard
enough―thorny, re-
membered? Push. Push through with this girl
recalled down to the last bit of cartilage, ash, running along the
river now, then down to the bridge, then quick,
home. (Dream 117)
화자는 소녀가 목격했던 꽃가게 여자의 울음에 대해 시인의 방식으로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를 고려한다. 화자는 소녀와 다르게 어른의 처지에 있다. 지나간 과거의 경험들은 소녀의 직접성에서가 아니라 기억의 방식에서 다뤄져야 한다. 이때 화자의 기억은 현장의 직접성을 잃지 않고 “뚫고 나갈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이러한 종류의 기억은 “그것”을, 다시 말해 현장에서 맺은 사물과의 관계를 “가시가 많게” “충분히 / 딱딱하게” 되살려낼 수 있어야 한다. 화자는 과거의 체험을 감상과 관념이 배제된 채로 “딱딱하게” 기억해 내는 일이 시인의 책임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화자는 이제 어른 청자이며 “친구”인 “당신”에게, 다시 말해 자기 자신에게, 소녀와 함께 밀고 나가라고 요구한다. 청자가 해야 할 일은 소녀의 기억을 현장의 방식으로 생생하게 되살리는 가운데 그녀를 안전하게 집으로 데려오는 일이다. 소녀는 생생한 고통의 현장을 거쳐 화자와 청자의 격려 속에서 서둘러 집으로 향하고 있다.
집 창가에 서있는 어른 청자에게 소녀가 돌아와 하나가 되는 순간은 20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는다.
20년 후
시간은 9시 15분, 나는 산책을 나서요, 나비들이 부화하고 있군요.
(그 순간이 왔어요)
그녀는 여전히 산토 스피리토를 따라 달리고 있고, 나는 더 빨리
더 빨리 가라고 그녀를 떠밀지만, 귀여운 아이, 바보, 그녀를 떠밀고 있지만 나는
타이 사이딩 근처 현장에 있어요, 새로 부화한 유생(幼生)들이
도처에서―풀밭에서 몸을 말리고 있어요―그들이 날개를 펼쳐
날아드는 곳은
지상풍―너무나 많아―
나는 그들을 부드러운 발길질로 내쫓아서 빈 공간을 만들게 하려는데―
걸음을 뗄 때마다 날아오르는 무리들―
아래에선 기대선 여자들이 가격을 외쳐대요, 과일을
하나씩 다루면서 흙을 털어내요. 오, 깨어나라, 깨어나라
지금 대기 속을 뚫고 나가는 무언가여
땅속에서
기다리고 있는 무엇이여.
Twenty years later
it’s 9:15, I go for a walk, the butterflies are hatching,
(that minute has come),
a and she is still running down the Santo Spirito, and I push her
to go faster, faster, little one, fool, push her, but I’m
in the field near Tie Siding, the new hatchlings
everywhere―they’re drying in the grasses―they lift their wings up
into the
groundwind―so many―
I kick them gently to make them make room―
clusters lift with each step―
and below the women leaning, calling the price out, handling
each fruit, shaking the dirt off. Oh wake up, wake up,
something moving through the air now, something in the ground that waits. (Dream 117-18)
화자는 소녀의 기억에서 힘을 얻는다. 화자는 지금 이곳에 있지만 20년 전의 소녀와 함께 현장을 달리고 있다. 화자는 현장의 감수성의 회복을 통해 시인으로서의 자신감을 되찾고 있다. 화자는 이 가능성에서 부화한 나비들이 사방으로 날아다니는 아름다운 전망을 허용 받는다. 그렇지만 화자는 이 아름다움의 전망과 함께 장사하는 아낙네들의 거친 현실을 가까이에서 듣고 보는 입장에 있다. 20년 전의 소녀와 함께 하는 산책은 현재 시제로 사실적으로 다뤄진다. 하지만 그것은 가격을 외쳐대는 과일가게 아낙네들의 장면에 곧바로 연결된다. 화자는 아낙네들이 장사를 하는 건물의 3층에 살고 있다. 화자의 분신들은 소녀의 걸음으로 그리고 시인의 걸음으로 문밖으로 나가 현장을 거닐지만 정작 화자 자신은 여전히 창가에 서있는지 모른다. 이 시의 목소리는 그만큼 다양한 내면에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벗어나 자유롭게 발화된다. 다소의 애매성 가운데 화자가 생명의 기운을 북돋우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화자가 이제껏 보여준 모든 상념들은 현장의 감수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시인의 의식과 근본적으로 연결된다. 시인으로서의 화자는 시의 길을 가는 데 무엇이 필요한가를 확인하고 있는 셈이다. 화자의 인식에서 시의 가능성은 세상보다 시인 자신에게 달려있다. 화자가 시의 이념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는 않는다. 화자는 시에서 사물이 그 자체로서 현장에 놓인 상태로 다뤄야 한다고 여긴다. 이 방식은 소녀의 감수성이 성장함으로써 보다 확실해질 수 있다. 이 시의 마지막에서 화자는 아직 땅 속에 잠들어 있는 어떤 것이 소녀의 감수성에서 깨어나기를 기대한다.
이 시는 어느 중심 이미지나 주된 개념에 의해서가 아니라 목소리의 전개과정 그 자체가 시의 의미를 이룬다. 이 시의 경험이 제시하는 것은 어떤 결론이 아니라, 시의 시작에서 끝에 이르는 과정의 긴장과 떨림 그리고 불안한 기대와 잠깐의 전망, 이러한 것들이 화자의 의식의 흐름에 따라 형성하는 다양한 변주 그 자체이다. 화자의 목소리는 시인의 복잡한 속내를 반영한다.
화자의 의식은 시의 제목이 암시하듯이 “이질성”을 드러낸다. 시인 그레이엄에게 무질서에서 창조되는 질서를 기대하는 것은 그녀를 곡해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녀는 당대의 여러 시인들과 마찬가지로 예언가로서의 시인의 지위를 박탈당하거나 거부한 입장에 있다. 그녀는 이 시에서 최소한 어떤 전체의 체계를 추구하지 않는다. 그녀는 아직 세상의 관념에 물들기 전의 소녀가 세상의 사물을 매 걸음마다 하나씩 새롭게 대할 것을 기대하고 있다. 이 방식에서 드러나는 사물은 각자가 전부이고 매순간이 영원인 것으로 접근됨으로써 그 자체의 사물다움을 드러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것들 그리고 전체와의 관계가 끊어져 있는 한, 언어화할 수 없는 것이 돼버릴 수 있다. 그것은 문장이 아니라 따로 떨어진 단어로 존재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레이엄은 사물의 개별성을 요구함과 동시에 현장성을 요구하고 있기도 하다. 하나의 사물은 진공 속에 있지 않고 현장에 처해 있다. 그녀의 사물은 구체적 시간과 장소에 사로잡혀 있는 어떤 것이다. 이 방식에서 사물은 완전한 객체성이나 추상성에서가 아니라 직접적 관계의 양상으로 취급된다. 그레이엄은 신성한 진리에 의존하는 종류의 시인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녀가 추구하는 진리는 인간의 정신에 주로 의존하지만 그렇다고 그 위대성을 확신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녀가 발견하는 아름다운 나비들이 불안과 확신 사이의 경계에서 부화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녀가 우리에게 주는 마지막 전망은 과정에서 발생하는 여러 떨림과 주저를 거쳐서야 의미를 지닐 수 있다.
III
그레이엄은 1993년의 물질주의(Materialism)를 포함하는 기존의 다섯 권의 시집들에서 작품들을 가려내 1995년에 시선집 통합장(場)의 꿈(The Dream of the Unified Field)을 펴낸다. 여기서 그녀가 보여주는 “통합장”의 가능성에 대한 탐색은 “이질성의 지역”에 대한 문제의식에 근거하고 있다. 각자가 따로 있으면서 어떤 방식으로 서로 연결될 수 있느냐라는 것은 근대 이후의 여러 시인들에게 중요한 문제였다. 그것은 전체의 바탕 혹은 절대적 기준이 사라진 세상에서 개인으로서 어떻게 존재하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레이엄이 이 문제에 대한 해결을 보여주는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그 문제 자체를 깊이 있게 끌고 가는 방식에서 그녀의 시는 비상한 지적 긴장을 유지하고 있다. 그녀의 시는 좌절에서 희망으로의 진행보다 그 둘 사이에서 양쪽에 동시에 처할 때 그 특유의 목소리를 낸다. 그녀의 시는 언어의 지시성과 그것의 불가능성 혹은 침묵 사이를 오간다. 그녀는 의식적으로 침묵과 여백의 언어를 지시의 언어와 뒤섞는다. 그녀는 세상에 대하여 해석을 완료하지 않지만 그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하지도 않는다. 이러한 종류의 긴장이 그녀의 시집 이질성의 지역을 관통하고 있다.
인용문헌
Graham, Jorie. Region of Unlikeness. New York: Ecco P, 1991.
_______. The Dream of the Unified Field: Selected Poems 1974-1994. HarperCollins P, 1995
_______. The End of Beauty. New York: Ecco P, 1987.
Vendler, Helen. “Mapping the Air: Adrienne Rich and Jorie Graham.” Soul Says: On Recent Poetry. Cambridge: Harvard UP, 1995. 212-34.
문학청춘 2014 여름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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