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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B.C.)
약70만년전 구석기문화
6000 신석기문화
2333 단군, 아사달에 도읍,
고조선 건국 (삼국유사)
1122 8조금법(八條禁法) 제정
1000 청동기문화의 전개, 고조선의 발전
800년 고조선의 수도 : 왕검성
300 철기문화의 보급
194 위만, 고조선의 왕
108 고조선 멸망, 한(漢)사군 설치
59 해모수 북부여 건국
57 신라 혁거세 거서간 즉위
37 주몽 고구려 건국 (~A.D. 608)
28 고구려 부위염, 북옥저 병합
18 온조 하남위례성 백제 건국(~A.D. 660)
5 백제, 한산(漢山)으로 천도
기원후(A.D.)
3 고구려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천도
8 백제 마한 병합
42 김수로왕 금관가야 건국
194 고구려 진대법 실시
209 고구려 환도성(丸都城)으로 천도
260 백제 고이왕 16관등과 공복 제정
313 고구려 낙랑군 멸망시킴
372 고구려 불교전래, 태학설치
백제, 동진에 사절 파견
384 백제 불교 전래
427 고구려 평양 천도
494 부여 고구려에 복속
502 신라 우경 실시
503 신라 국호와 왕호 정함
512 신라 이사부 우산국 정벌
520 신라 율령 반포, 백관의 공복 제정
527 신라 불교를 공인, 이차돈 순교
532 금관가야, 신라에 항복하여 멸망
536 신라 연호 사용
538 백제 사비 천도
562 신라 대가야 멸함
576 신라 원화(源花)제도 시작
598 고구려 수문제 30만 대군 침공
612 고구려 을지문덕 살수대첩 (수나라)
645 고구려 안시성 싸움 승리 (당나라)
646 고구려 천리장성(千里長城) 완성
660 백제 멸망 황산벌전투
668 고구려 멸망 (나당연합군)
676 신라 삼국통일
685 9주 5소경 설치
698 대조영 발해의 건국
722 신라 정전 지급
723 혜초 왕오천축국전
788 독서 삼품과 설치
828 장보고 청해진 설치
900 견훤 후백제 건국
901 궁예 후고구려 건국
918 왕건 고려 건국(~1392)
926 발해 멸망
935 신라 멸망
936 고려 후삼국 통일
956 노비 안검법 실시
958 고려 과거제도 실시
976 전시과 실시
1009 강조의 정변
1019 귀주대첩
1033 고려, 천리장성 축조(~1044)
1076 전시과 개정, 관제개혁
1097 주전도감 설치
1107 윤관 여진정벌
1126 이자겸의 난
1135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
1170 무신정변
1196 최충헌의 집권
1198 만적의 난
1219 몽고와 통교
1231 몽고의 제1차 침입
1232 강화 천도
1270 개경으로 환도, 삼별초의 대몽항쟁
1274 여, 원 제1차 일본원정
1359 홍건적의 침입(~1361)
1376 최영 왜구정벌
1377 최무선 화통도감 설치
1388 위화도 회군
1389 박위 쓰시마 섬 정벌
1392 고려 멸망, 조선 건국
1394 한양 천도
1402 호패법 실시, 무과 설치
1403 주자소 설치
1411 한양에 5부 학당 설치
1418 세종대왕 즉위
1433 4군 설치
1437 6진 설치
1443 훈민정음 창제
1466 훈민정음 반포, 직전법 실시
1510 3포 왜란
1512 임신약조
1519 향약 실시
1554 비변사 설치
1555 을묘왜변
1592 임진왜란, 한산도대첩
1593 행주 대첩
1597 명량해전 승리
1608 경기도에 대동법 실시
1609 일본과 기유약조 체결
1623 인조 반정
1624 이괄의 난
1627 정묘호란
1628 벨테브레, 제주도 표착
1636 병자호란
1653 하멜, 제주도 표착
1678 상평통보의 주조
1696 안용복, 독도에서 일인 쫓아냄
1708 대동법 전국 실시
1712 백두산 정계비 건립
1725 탕평책 실시
1784 이승훈의 천주교 전도
1785 대전통편 완성
1786 서학을 금함
1801 신유박해
1811 홍경래의 난(~1812)
1839 기해박해
1860 최제우, 동학 창시
1862 임술민란
1863 고종즉위, 흥선대원군 집권
1866 병인박해, 병인양요
1871 신미양요
1875 운요 호 사건
1876 강화도 조약 체결
1881 신사유람단 및 영선사 파견,
별기군 창설
1882 임오군란,
미.영.독 등과 통상조약 체결
1883 전환국설치, 태극기 사용
1884 우정국 설치, 갑신정변
1885 거문도 사건, 배재학당 설립,
서울-인천 간 전신개통, 광혜원 설립
1886 이화학당 설립
1889 함경도에 방곡령 실시
1894 동학 농민운동, 갑오개혁 실시
1895 을미사변, 유길준 서유견문 지음
1896 독립협회 설립, 아관파천
1897 대한제국의 성립
1898 만민공동회 성립
1899 경인선 개통
1903 YMCA 발족
1904 한.일 의정서 맺음, 경부선 준공
1905 을사조약, 천도교 성립
1906 통감부 설치
1907 국채 보상운동, 헤이그 특사 파견,
고종황제 퇴위, 군대해산, 신민회 설립
1909 안중근 이토 사살, 나철 대종교 창시
1910 국권 피탈
1912 토지 조사사업 시작(~1918)
1914 대한 광복군 정부 수립
1919 3.1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대한 애국 부인회 조직
1920 김좌진 청산리대첩
1922 어린이날 제정
1926 6.10 만세운동
1927 신간회 조직
1929 광주학생 항일 운동
1932 이봉창, 윤봉길 의거
1934 진단학회 조직
1938 일제, 한글교육 금지
1940 한국 광복군 결성
1942 조선어 학회 사건
1945 8.15광복
1946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 개최
1948 5.10 총선거 실시
대한민국 정부수립
여수.순천 10.19 사건
1950 6.25 전쟁
1952 평화선 선언
1953 휴전협정 조인, 제1차 통화개혁 실시
1960 4.19혁명
1961 5.16군사정변
1962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66)
1963 박정희 정부수립
1965 한.일 협정 조인
1966 한.미 행정협정 조인
1967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71)
1970 새마을운동 시작, 경부고속도로 개통
1972 제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76)
7.4 남북 공동성명, 남북 적십자 회담,
10월 유신
1973 6.23 평화 통일 선언
1977 제4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81)
1979 10.26 사태
1980 5.18 광주 민주화 운동
1983 KAL기 피격참사, 아웅산 사건,
이산 가족찾기 TV 생방송
1986 제10회 아시안게임 서울개최
1987 6.29선언, 대통령 직선제 실시
1988 한글 맞춤법 고시,
제24회 서울올림픽 개최
1989 헝가리.폴랜드 등 동국권국가와 수교
1990 한,소 수교
1991 남.북한 동시 유엔가입,
지방자치제 부활
1992 한.중 수교
1993 대전 EXPO 개최,
소말리아 UN 활동 참여,
금융실명제 실시
1995 김일성 사망
2004 현재 참여정부 노무현 대통령 정부
우리나라의 왕,대통령
*환국 환인계표(BC 7198년 ~ BC 3898년)
1 안파견(安巴堅)
2 혁 서(赫胥)
3 고시리(古是利)
4 주우양(朱于襄)
5 석제임(釋提壬)
6 구을리(邱乙利)
7 지위리(智爲利)
* 배달국 환웅계표 (BC 3898 ∼ BC 2333)
1 거발환(居發桓)
2 거불리(居佛理)
3 우야고(右耶古)
4 모사라(慕士羅)
5 태우의(太虞儀)
6 다의발(多儀發)
7 거 련(居連)
8 안부련(安夫連)
9 양 운(養雲)
10 갈 고(葛古)
11 거야발(居耶發)
12 주무신(州武愼)
13 사와라(斯瓦羅)
14 자오지(慈烏支) - 일명 치우천황
15 치액특(蚩額特)
16 축다리(祝多利)
17 혁다세(赫多世)
18 거불단(居弗檀)
(3) 단군조선 단군계표(BC 2333 ∼ BC 238)
1 왕검(王儉) - 단군이시다.
2 부루(扶婁)
3 가륵(嘉勒)
4 오사구(烏斯丘)
5 구을(丘乙)
6 달문(達門)
7 한율(翰栗)
8 우서한(于西翰)
9 아술(阿述)
10 노을(魯乙)
11 도해(道奚)
12 아한(阿漢)
13 흘달(屹達)
14 고불(古弗)
15 대음(代音)
16 위나(尉那)
17 여을(余乙)
18 동엄(冬奄)
19 구모소(구牟蘇)
20 고홀(固忽)
21 소태(蘇台)
22 색불루(索弗婁)
23 아홀(阿忽)
24 연나(延那)
25 솔나(率那)
26 추로(鄒魯)
27 두밀(豆密)
28 해모(奚牟)
29 마휴(摩休)
30 내휴(奈休)
31 등올(登올)
32 추밀(鄒密)
33 감물(甘勿)
34 오루문(奧婁門)
35 사벌(沙伐)
36 매륵(買勒)
37 마물(麻勿)
38 다물(多勿)
39 두홀(豆忽)
40 달음(達音)
41 음차(音次)
42 을우지(乙于支)
43 물리(勿理)
44 구물(丘勿)
45 여루(余婁)
46 보을(普乙)
47 고열가(高列加)
*북부여(고구려) 왕계표 (BC 239∼BC 58)
1 해모수(解慕漱)
2 모수리(慕漱離)
3 고해사(高奚斯)
4 고우루(高于婁)
5 고두막(高豆莫)
6 고무서(高無胥)
7 고주몽(高朱蒙)
*가섭원부여 또는 동부여(BC86∼AD22)
1 해부루(解夫婁)
2 금와(金蛙)
3 대소(帶素) - 고구려 대무신왕에 의해 멸망
*고구려 왕(열제)계표(BC37∼서기668)
시조 동명성왕(BC 37-BC 19) 해모수와 유화 고주몽, 다물도
-> 2대 유리왕(BC 19-AD 18) 유리의 지혜, 황조가, 태자 해명과 황룡왕
-> 3대 대무신왕 (18-44) 부여 왕 대소의 죽음,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 4대 민중왕(44-48)
-> 5대 모본왕(48-53)
-> 6대 태조왕(53-146) 아우 수성과 백고, 수성의 반심
-> 7대 차대왕 (146-165) 재상 명림답부의 모반
-> 8대 신대왕(165-179) 신대왕의 선정, 명립답부의 승리
-> 9대 고국천왕(179-197) 어비류와 좌가려의 반란, 을파소 등용, 진대법 실시
-> 10대 산상왕 (197-227) 형제(발기, 연우, 계수)간의 왕위다툼
-> 11대 동천왕(227-248) 위나라 관구검의 침입, 밀우와 유유의 충성심
-> 12대 중천왕(248-270)
-> 13대 서천왕 (270-292) 동생 안국군 달고의 숙신족 정벌
-> 14대 봉상왕(292-300) 국상 창조리의 충언과 반역
-> 15대 미천왕(300-331) 미천왕 을불의 고행
-> 16대 고국원왕(331-371) 연나라 모용 황의 침략, 백제와의 전투에서 전사
-> 17대 소수림왕(371-384) 불교와 승려 순도, 태학 설립
-> 18대 고국양왕(384-391) 신라와 수교
-> 19대 광개토대왕(391-413) 영토확장
-> 20대 장수왕(413-491) 북연 풍홍 정벌, 백제 개로왕을 죽임
-> 21대 문자명왕 (491-519) 부여합병
-> 22대 안장왕(519-531)
-> 23대 안원왕 (531-545)
-> 24대 양원왕(545-559) 장안성 축조
-> 25대 평원왕(559-590) 장안성 천도,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
-> 26대 영양왕(590-618) 수양제의 침입,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우중문, 우문술의 패퇴)
-> 27대 영류왕(618-642) 천리장성 축조, 연개소문의 반역
-> 28대 보장왕(642-668) 당태종의 침입, 안시성 양만춘의 선전, 연개소문의 죽음과 그의 아들들의 다툼. 고구려 패망
*백제 왕(천황)계표(? ~ AD 660년)
시조 온조왕(BC 18-AD 28) 고주몽-온조-비류, 마한 정벌
-> 2대 다루왕(28-77) 말갈과의 전투
-> 3대 기루왕(77-128) 봄과 여름에 심한 가뭄
-> 4대 개루왕(128-166) 아찬 길선의 반란, 도미의 처
-> 5대 초고왕(166-214) 신라와의 전투
-> 6대 구수왕(214-234) 말갈과 신라와의 전투
-> 7대 사반왕 (234)
-> 8대 고이왕(234-286) 관구검의 고구려 침입시 낙랑과 전투
-> 9대 책계왕(286-298) 대방과 연합으로 고구려에 대항, 낙랑 침입시 전사
-> 10대 분서왕(298-304) 낙랑과 전투 및 낙랑의 자각에 암살당함
-> 11대 비류왕(304-344) 내신좌평 우복 북한성에서 반란
-> 12대 계왕(344-346)
-> 13대 근초고왕(346-375) 고구려왕을 전사시킴, 박사 고흥의 서기 편찬
-> 14대 근구수왕(375-384) 태자의 말발굽 자취
-> 15대 침류왕(384-385) 진나라 호승 마라난타가 백제에 불교전래
-> 16대 진사왕(385-392) 고구려 광개토왕 침입
-> 17대 아신왕(392-405) 왜국과 우호
-> 18대 전지왕(405-420)
-> 19대 구이신왕(420-427)
-> 20대 비유왕(427-455) 신라와 우호적인 관계형성
-> 21대 개로왕(455-475) 고구려 장수왕에게 전사
-> 22대 문주왕(475-477) 탐라국의 조공, 병관좌평 해구에 의해 시해당함
-> 23대 삼근왕(477-479) 해구, 연신의 반란
-> 24대 동성왕(479-501) 신라와 혼인정책, 백가에게 시해당함
-> 25대 무령왕(501-523) 좌평 백가의 반란
-> 26대 성왕 (523-554) 고구려와 전투, 신라와의 화친과 전투(부상)
-> 27대 위덕왕(554-598) 신라, 고구려와 전투
-> 28대 혜왕(598-599)
-> 29대 법왕(599-600) 살생금지등 불교의 교리를 충실히 지킴
-> 30대 무왕(600-641) 신라 장군 무은과 귀산의 패배, 왕흥사 완성
-> 31대 의자왕(641-660) 윤충과 품석, 유신과 의직, 성충의 간언, 멸망의 징조, 방어에 대한 신하들의 의견이 분분, 계백의 황산벌전투, 나당연합군에 멸망
*신라 왕계표(? ~ AD 935년)
시조 혁거세(BC 57-AD 4) 거서간, 시조의 신화, 박혁거세와 알영
-> 2대 남해(4-24) 차차웅, 왜국과 낙랑과의 전투, 석탈해 등용
-> 3대 유리(24-57) 이사금
-> 4대 탈해(57-80) 탄생의 전설, 김알지와 계림
-> 5대 파사(80-112) 가야와 전투 및 영토확장
-> 6대 지마(112-134) 왜국과 화친
-> 7대 일성(134-154)
-> 8대 아달라(154-184) 아찬 길선의 반역, 연오랑 세오녀
-> 9대 벌휴(184-196)
-> 10대 나해(196-230) 포상팔국과 백제와의 전투
-> 11대 조분(230-247) 감문국, 골벌국 정벌
-> 12대 첨해(247-261) 백제의 침입
-> 13대 미추(262-284) 김알지의 후손
-> 14대 유례(284-298) 왜국의 침입
-> 15대 기림(298-310) 국호를 신라로 칭함
-> 16대 흘해(310-356) 왜국과 혼인 정책
-> 17대 내물(356-402) 복병으로 왜병격퇴, 백제장수 투항, 대고구려에 볼모정책
-> 18대 실성(402-417) 왜국에 미사흔을, 고구려에는 복호를 볼모보냄, 시해당함
-> 19대 눌지(417-458) 마립간, 자객과 눌지, 박제상의 노력으로 미사흔 복호 환국, 묵호자가 불교전래
-> 20대 자비(458->479) 왜국에 대승, 백제와 화친하여 고구려에 대응
-> 21대 소지(479-500) 백제, 가야와 연합전선, 왕과 날사군의 여자 벽화
-> 22대 지증왕(501-514) 순장금지, 왕호사용,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
-> 23대 법흥왕(514-540) 가야와 혼인, 이차돈의 순교, 살생금지, 가야항복
-> 24대 진흥왕(540-576) 백제와 화친, 거칠부 역사책 편찬, 우륵과 가야금, 황룡사 건축, 사다함의 전공, 원화와 화랑
-> 25대 진지왕(576-579) 백제와 전투
-> 26대 진평왕(579-632) 대세와 담수와 구칠, 원광법사와 걸사표, 수양제, 당고조와의 외교정책, 유신이 고구려에 대승
-> 27대 선덕여왕(632-647) 선덕여왕의 지혜, 백제의 침입과 김춘추의 대고구려 외교정책, 당태종과 연개소문, 김유신의 백제공격
-> 28대 진덕여왕(647-654) 백제의 침입과 김유신의 방어, 김춘추의 대당 외교
-> 29대 무열왕(654-661) 고구려의 침입, 백제와의 전투에서 반굴과 관창의 죽음,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 멸망, 백제 부흥군과 전투
-> 30대 문무왕(661-681) 백제의 저항군 진압, 탐라국 항복, 신라에 계림 대도독부 설치, 백제의 부여풍, 복신, 도침의 저항, 연정토의 항복, 고구려 보장왕의 항복, 삼국통일
-> 31대 신문왕(681-692) 대신들의 반란
-> 32대 효소왕(692-702)
-> 33대 성덕왕(702-737) 당 현종과 협력하여 발해를 침략했으나 실패
-> 34대 효성왕(737-742)
-> 35대 경덕왕(742-765)
-> 36대 혜공왕(765-780)
-> 37대 선덕왕(780-785) 김지정 주살하고 왕위에 오름
-> 38대 원성왕(785-798) 독서삼품과 시행, 김현감호
-> 39대 소성왕(798-800)
-> 40대 애장왕(800-809) 불사신축 금지
-> 41대 헌덕왕(809-826) 김헌창, 김범문의 반란
-> 42대 흥덕왕(826-836) 장보고 청해진대사
-> 43대 희강왕(836-838) 숙질간 왕위다툼
-> 44대 민애왕(838-839)
-> 45대 신무왕(839) 장보고의 도움으로 우징 왕이 되다.
-> 46대 문성왕(839-857) 장보고와 염장, 장보고의 난
-> 47대 헌안왕(857-861)
-> 48대 경문왕(861-875) 최치원이 당에서 등과
-> 49대 헌강왕(875-886) 왕건 탄생, 최치원 귀국
-> 50대 정강왕(886-887)
-> 51대 진성여왕(887-897) 향가집 삼대목 편찬, 궁예의 명주 습격과 장군호칭 사용, 견훤의 후백제 건국
-> 52대 효공왕(897-912) 궁예 송악(마진, 왕으로 칭함)에 도읍했다가 철원(태봉)으로 천도, 양길의 패배, 견훤의 대야성전투 실패
-> 53대 신덕왕(912-917) 견훤의 대야성공격 실패
-> 54대 경명왕(917-924) 궁예 파하고 왕건 추대, 고려와 수교, 견훤의 대야성공격 성공, 신라의 삼대보물
-> 55대 경애왕(924-927) 견훤과 왕건 화친실패, 견훤이 신라를 침공하여 왕을 죽이고 새 왕을 세움
-> 56대 경순왕(927-935) 신라의 항복, 견훤 왕건에 항복, 고려시대 사심관제도의 시초
*발해 왕계표(渤海, 서기 698 ~ 서기 926)
시조 고왕(698-719) -> 2대 무왕(719-737) -> 3대 문왕(737-793)
-> 4대 폐왕(793) -> 5대 성왕(793-794) -> 6대 강왕(794-809)
-> 7대 정왕(809-812) -> 8대 희왕(812-817) -> 9대 간왕(817-818)
-> 10대 선왕(818-830) -> 11대 왕(이진 831-857) -> 12대 왕(건황 857-871)
-> 13대 현석(871-894) -> 14대 위계(894-906) -> 15대 인선(906-926)
*고려 왕계표(918~1392)
시조 태조(918-943) 훈요십조
-> 2대 혜종(943-945) 왕규의 난
-> 3대 정종(945-949)
-> 4대 광종(949-975) 노비안검법, 과거제도
-> 5대 경종(975-981) 전시과 제정
-> 6대 성종(981-997) 관제개혁으로 중앙집권적 봉건제도 확립(사헌부, 중추원)
-> 7대 목종(997-1009) 강조의 정변
-> 8대 현종(1009-1031) 최질의 난(최초의 무신의 난), 강감찬의 귀주대첩, 대장경
-> 9대 덕종(1031-1034)
-> 10대 정종(1034-1046)
-> 11대 문종(1046-1083)
-> 12대 순종(1083)
-> 13대 선종(1083-1094)
-> 14대 헌종(1094-1095)
-> 15대 숙종(1095-1105)
-> 16대 예종(1105-1122)
-> 17대 인종(1122-1146)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 김부식 삼국사기 편찬
-> 18대 의종(1146-1170) 정중부의 난, 이의방의 난
-> 19대 명종(1170-1197) 김보당의 난, 조위총의 난, 명학소의 난, 최충헌
-> 20대 신종(1197-1204) 만적의 난
-> 21대 희종(1204-1211)
-> 22대 강종(1211-1213)
-> 23대 고종(1213-1259) 저고여 피살사건, 8만대장경을 조판
-> 24대 원종(1259-1274) 삼별초의 난
-> 25대 충렬왕(1274-1308)
-> 26대 충선왕(1308-1313)
-> 27대 충숙왕(1313-1330, 1332-1339)
-> 28대 충혜왕(1330-1332, 1339-1344)
-> 29대 충목왕(1344-1348)
-> 30대 충정왕(1348-1351)
-> 31대 공민왕(1351-1374) 쌍성총관부 폐지, 명사살해사건
-> 32대 우왕(1374-1388) 철령위 사건, 최영, 위화도회군
-> 33대 창왕(1388-1389)
-> 34대 공양왕(신종 1389-1392) 정몽주 피살
*조선 왕계표(서기 1398 ~ 1910)
시조 태조(1392-1398)
-> 2대 정종(1398-1400)
-> 3대 태종(1400-1418)
-> 4대 세종(1418-1450)
-> 5대 문종(1450-1452)
-> 6대 단종(1452-1455) 이징옥의 난
-> 7대 세조(1455-1468) 훈구파, 이시애의 난
-> 8대 예종(1468-1469)
-> 9대 성종(1469-1494)
-> 10대 연산군(1494-1506) 무오사화, 조의제문, 갑자사화, 중종반정
-> 11대 중종(1506-1544) 삼포왜란, 기묘사화
-> 12대 인종(1544-1545)
-> 13대 명종(1545-1567) 을묘왜변, 임꺽정의 난
-> 14대 선조(1567-1608) 정여립의 난, 임진왜란, 정유재란
-> 15대 광해군(1608-1623) 모문룡사건, 인조반정
-> 16대 인조(1623-1649)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
-> 17대 효종(1649-1659)
-> 18대 현종(1659-1674)
-> 19대 숙종(1674-1720)
-> 20대 경종(1720-1724)
-> 21대 영조(1724-1776) 이인좌의 난
-> 22대 정조(1776-1800) 조선 최초의 천주교 순교자 김범우
-> 23대 순조(1800-1834) 신유박해, 황사영 백서사건, 홍경래의 난
-> 24대 헌종(1834-1849)
-> 25대 철종(1849-1863) 진주민란
-> 26대 고종(1863-1907) 병인양요, 오페르트 도굴사건, 신미양요, 운요호 사건, 강화도 조약, 수신사, 신사유람단, 영선사 파견, 만인소 사건, 임오군란, 우정국 사건, 갑신정변, 거문도 사건, 교조 신원운동, 동학운동, 청일 전쟁, 을미사변, 아관파천, 만민공동회, 국채 보상운동, 헤이그 특사사건
-> 27대 순종(1907-1910)
* 대한민국 대통령 승계표
1-3대 이승만 : 1948-1960년 까지 역임
4대 윤보선 : 1960-1962년 까지 역임
5-9대 박정희 : 1963-1979년 까지 대통령 역임 -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피격, 서거
10대 최규하 : 1979-1980년 까지 대통령 역임
11-12대 전두환 : 1980-1988년 까지 대통령 역임
13대 노태우 : 1988-1993년 까지 대통령 역임
14대 김영삼 : 1993-1998년 까지 대통령 역임
15대 김대중 : 1998-2003년 까지 대통령 역임
16대 노무현 : 2003-2008년 까지 대통령 예정
우리나라의 전쟁연표
기원전 300년
고조선이 연나라의 진개(秦開)의 공격으로 서쪽 2천여 리의 땅을 상실하고 만번한(滿藩汗)을 경계로 함(진개의 고조선 침공)
*출전 : <<위략>>
기원전 109년
한나라 군대 5만여명이 조선을 공격하여 왕검성(王儉城)에서 패배함
*출전 : <<사기>>, <조선열전>
기원전 108년
한나라 군대에 왕검성(王儉城)이 함락되어 조선이 멸망함(고조선 멸망)
*출전 : <<사기>>, <조선열전>
기원전 16년
백제의 북부 국경을 침범한 말갈(靺鞨)을 온조왕(溫祚王)이 공격하여 격퇴시킴.
*출전 :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3년 9월
기원전 11년
말갈(靺鞨)의 군대 3천 명이 백제 위례성(慰禮城)을 포위하였으나 실패함. 철수하는 말갈 군대를 대부현(大斧峴)에서 격파함.
*출전 :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8년 2월
기원전 9년
고구려 유리왕(琉璃王)이 선비(鮮卑)를 쳐서 항복을 받고 복속시킴.
*출전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명왕 11년 4월
기원전 6년
부여왕 대소(帶素)가 군사 5만명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침범하였으나 실패하고 철수함.
*출전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명왕 14년 11월
기원전 2년
낙랑이 백제를 침공하여 위례성(慰禮城)을 불태움.
*출전 :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17년 봄.
4년 7월
낙랑의 군대가 신라를 침입하여 금성(金城)을 포위함.
*출전 : <<삼국사기>>, <신라본기> 남해 원년 7월
14년 8월
고구려가 양맥(梁貊)을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이어서 한나라의 고구려현(高句麗縣)을 공격하여 탈취함.
*출전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명왕 33년 8월
14년
왜(倭)의 병선 1백여 척이 신라의 해안을 공격함. 낙랑이 이를 틈타 신라의 금성(金城)을 습격함.
*출전 : <<삼국사기>>, <신라본기> 남해 11년
22년 2월
고구려가 부여를 공격하여 국왕 대소(帶素)를 죽임
*출전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5년 2월
26년 10월
고구려 대무신왕(大武神王)이 개마국(蓋馬國)을 정벌하여 그 지역에 군현(郡縣)을 설치함
*출전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9년 10월
28년 7월
한나라의 요동(遼東) 태수(遼東太守)가 고구려를 공격하여 위나암성(尉那巖城)을 포위함
*출전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11년 7월
34년 9월
말갈이 마수성(馬首城)을 침공하여 함락시키고 10월에 병산책(甁山柵)을 습격함.
*출전 : <<삼국사기>>, <백제본기> 다루왕 7년 9월
36년 8월
낙랑의 군대가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타산성(朶山城)을 함락시킴.
*출전 : <<삼국사기>>, <신라본기> 유리 13년 8월
49년
봄에 고구려가 한나라의 북평(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 등을 공격함.
*출전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모본왕 2년
77년 8월
신라의 아찬(阿湌) 길문(吉門)이 황산진(黃山津)에서 가야군을 격파함.
*출전 : <<삼국사기>>, <신라본기> 탈해 21년 8월
102년 8월
신라가 음즙벌국(音汁伐國), 실직국(悉直國), 압독국(押督國)을 공격하여 병합함.
*출전 : <<삼국사기>>, <신라본기> 파사 23년 8월
108년 5월
신라가 비지국(比只國), 다벌국(多伐國), 초팔국(草八國)을 정벌하여 병합함
*출전 : <<삼국사기>>, <신라본기> 파사 29년 5월
111년
부여왕 시(始)가 기병과 보병 7-8천 명을 거느리고 낙랑(樂浪)을 공격함
*출전 : <<후한서>>, <동이열전> 부여
115년 2월
가야가 신라의 남쪽 변경을 침략하자, 7월 신라왕이 가야를 공격하다가 황산하(黃山河)에서 가야의 복병에게 패함
*출전 : <<삼국사기>>, <신라본기> 지마 4년 2월
116년 8월
신라가 가야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함
*출전 : <<삼국사기>>, <신라본기> 지마 5년 8월
121년 4월
고구려가 선비(鮮卑)의 군대와 함께 요대현(遼隊縣)을 공격하고, 요동(遼東)태수 채풍(蔡諷)을 신창(新昌)에서 살해함
*출전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왕 69년 4월
121년 12월
고구려 태조왕이 마한(馬韓)과 예맥(濊貊)의 기병 1만여 명을 거느리고 현토성(玄菟城)을 공격하자 부여가 한나라가 합세하여 크게 패함
*출전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왕 69년 12월
125년 7월
신라가 말갈의 침입을 받아 백제에 구원을 청하자 백제 기루왕(己樓王)이 장군 5명을 보내 구원함
*출전 : <<삼국사기>>, <백제본기> 기루왕 49년 7월
146년 8월
고구려 태조왕이 한나라 요동(遼東)군 서안평현(西安平縣)을 습격하여 대방령(帶方令)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잡아옴
*출전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왕 94년 8월
167년 7월
백제가 신라의 서쪽 두 성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주민 1천여 명을 사로잡음
*출전 : <<삼국사기>>, <신라본기> 아달라 14년 7월
185년 2월
신라의 파진찬 구도(仇道)와 일길찬 구수혜(仇須兮)가 좌우의 군주(軍主)가 되어 소문국(召文國)을 정벌함.
*출전 : <<삼국사기>>, <신라본기> 벌휴 2년 2월
212년
보라국(保羅國)과 고자국(古自國), 사물국(史勿國) 등 여덟 나라가 힘을 합하여 신라의 변경을 침입하자 태자 날음(捺音) 등이 격퇴함
*출전 : <<삼국유사>>권5, <피은>
214년 7월
백제가 신라의 요거성(腰車城)을 공격하여 성주 설부(薛夫)를 죽임. 이에 신라의 이벌찬 이음(利音)이 정병 6천명을 거느리고 백제의 사현성(沙峴城)을 격파함.
*출전 : <<삼국사기>>, <신라본기> 내해 19년 7월
216년 8월
말갈이 적현성(赤峴城)을 포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퇴각함. 퇴각하는 말갈을 사도성(沙道城) 밖에서 격파함.
*출전 : <<삼국사기>>, <백제본기> 구수왕 3년 8월
231년 7월
이찬 우로(于老)를 대장군으로 삼아 감문국(甘文國)을 정벌하고 군현을 설치함
*출전 : <<삼국사기>>, <신라본기> 조분 2년 7월
242년
고구려가 요동(遼東)의 서안평(西安平)을 공격함
*출전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천왕 16년
246년 8월
위나라의 관구검(毌丘儉)이 고구려를 침입하여 10월에 환도성(丸都城)이 점령됨(관구검의 고구려 침공)
*출전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천왕 20년 8월
285년
선비의 모용외(慕容廆)가 부여를 공격하여 국왕 의려(依慮)가 자결하고 그 자제들은 옥저(沃沮)로 달아남
*출전 : <<진서>>, <동이열전> 부여
296년 5월
선비의 모용외(慕容廆)가 고구려를 공격하여 고국원(故國原)에 진출함.
*출전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봉상왕 5년 8월
302년 9월
고구려 미천왕(美川王)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현토군(玄菟郡)을 공격하여 8천명을 사로잡음
*출전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미천왕 3년 9월
311년 8월
고구려가 요동(遼東)의 서안평(西安平)을 습격하여 빼앗음.
*출전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미천왕 12년 8월
313년 10월
고구려가 낙랑군(樂浪郡)을 침공하여 남녀 2천여 명을 사로잡음(고구려의 낙랑, 대방군 축출)
*출전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미천왕 14년 10월
314년 9월
고구려가 대방군(帶方郡)을 침공함.
*출전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미천왕 15년 9월
320년 12월
고구려가 군사를 보내어 요동(遼東)을 침공하였으나 모용인(慕容仁)이 대항하였으므로 패함
*출전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미천왕 21년 12월
339년 9월
연나라 국왕 모용황(慕容皝)이 고구려를 침입하여 신성(新城)에 도달함. 화의가 성립되어 철수함
*출전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고국원왕 9년 8월
342년 11월
연나라 군대 4만 명이 고구려를 침입하여 환도성(丸都城)이 함락됨(연나라의 고구려 침입)
*출전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고국원왕 12년 11월
345년 10월
연나라의 모용각(慕容恪)이 고구려의 남소(南蘇)를 공격하여 함락시킴
*출전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고국원왕 15년 10월
371년 10월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이 군사 3만을 거느리고 평양성(平壤城)을 공격하여 고구려 고국원왕이 전사함.
*출전 :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 26년 10월
377년 10월
백제가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평양성(平壤城)을 공격함.
*출전 :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구수왕 3년 10월
385년 6월
고구려 고국양왕(故國壤王)이 후연(後燕)의 요동(遼東)과 현토(玄菟)를 함락시키고 남녀 1만 명을 사로잡음
*출전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고국양왕 2년 6월
392년 7월
고구려 광개토왕(廣開土王)이 군사 4만을 거느리고 백제 북쪽 변경을 공격하여 석현성(石峴城) 등 19여 성을 함락시킴(광개토왕의 정복사업)
*출전 : <<삼국사기>>, <백제본기> 진사왕 8년 7월
394년 8월
광개토왕(廣開土王)이 패수(浿水)에서 백제군 8천여 명을 격파함.
*출전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광개토왕 4년 8월
400년
광개토왕(廣開土王)이 군사 5만 명을 보내어 왜(倭)의 침입을 받은 신라를 구원함
*출전 : <<광개토대왕비>>
404년
대방(帶方) 지역을 침입한 왜의 군대를 고구려 군이 격파함.
*출전 : <<광개토대왕비>>
410년
고구려가 동부여(東扶餘)를 공격하여 64개 성을 점령함.
*출전 : <<광개토대왕비>>
468년 2월
고구려 장수왕이 말갈의 군사 1만을 동원하여 신라의 실직주성(悉直州城)을 점령함
*출전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장수왕 56년 2월
475년 9월
장수왕이 군사 3만을 거느리고 백제의 수도인 한성(漢城)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백제 개로왕(蓋鹵王)을 죽임(고구려의 한강 유역 점령)
*출전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장수왕 63년 9월
494년 7월
신라의 장군 실죽(實竹)이 고구려군과 살수(薩水)의 들판에서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견아성(犬牙城)에서 포위됨. 백제군의 지원으로 포위를 품
*출전 : <<삼국사기>>, <신라본기> 소지왕 16년 7월
501년 11월
백제 달솔 우영(優永)이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수곡성(水谷城)을 습격함
*출전 :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령왕 원년 11월
507년 10월
고구려군이 말갈군과 함께 백제의 한성(漢城)을 공격하였으나 백제군의 반격으로 퇴각함
*출전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문자명왕 16년 10월
512년 6월
신라가 이사부(異斯夫)를 보내어 우산국(于山國)을 정복함
*출전 : <<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왕 21년 5월
529년 10월
고구려 안장왕(安臧王)이 백제 북쪽 변경의 혈성(穴城)을 함락시킴
*출전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안장왕 11년 10월
551년 3월
신라 거칠부(居柒夫)가 고구려를 공격하여 10개 군을 함락시킴
*출전 :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12년 3월
551년 9월
돌궐(突厥)이 고구려의 신성(新城)을 포위하고 백암성(白巖城)을 침공하였으나 패배함
*출전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양원왕 7년 9월
553년 7월
신라가 백제의 동북 변경을 점령하여 신주(新州)를 설치함. 이후 나제동맹 파기됨(신라의 한경유역 점령)
*출전 :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14년 7월
554년 7월
백제 성왕(聖王)이 신라의 관산성(管山城)을 공격하다가 전사함
*출전 : <<삼국사기>>, <백제본기> 성왕 32년 7월
562년 9월
신라의 이사부(異斯夫)가 대가야(大伽倻)를 정벌함
*출전 :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23년 9월
598년 2월
고구려가 말갈병 1만 명으로 요서(遼西) 지방의 영주(營州)를 공격함
*출전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영양왕 9년 2월
598년 6월
수나라 문제(文帝)가 30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나 패배함(수나라의 1차 고구려 침공)
*출전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영양왕 9년 6월
603년 8월
고구려의 장군 고승(高勝)이 신라의 북한산성(北漢山城)을 공격하였으나 신라군의 반격으로 실패함
*출전 :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평왕 25년 8월
612년 1월
수나라의 양제(煬帝)가 113만 군사를 동원하여 고구려 침공을 개시함
*출전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영양왕 23년 1월
612년 7월
수나라 우문술(宇文述)이 지휘하는 별동부대 30만 명이 평양성(平壤城)에서 철수하던 중 살수(薩水)에서 고구려 군의 반격으로 전멸함(살수대첩)
*출전 : <<삼국사기>>, <열전> 을지문덕
613년 4월
수나라 왕인공(王仁恭) 부대가 고구려의 신성(新城)을 포위 공격함
*출전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영양왕 24년 4월
629년 8월
신라가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을 공격하여 점령함
*출전 : <<삼국사기>>, <신라본기> 왕 년 월
631년 2월
고구려가 당나라의 침공에 대비하여 부여성(扶餘城)에서 비사성(比斯城)에 이르는 천리장성(千里長城) 축조에 착수함
*출전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영유왕 14년 2월
638년 10월
고구려가 신라의 칠중성(七重城)을 공격하였으나 11월에 알천(閼川)의 신라군에 패함
*출전 : <<삼국사기>>, <신라본기> 선덕여왕 7년 10월
642년 7월
백제의 의자왕(義慈王)이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침공하여 40여 성을 점령함
*출전 :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2년 7월
642년 8월
백제의 장군 윤충(允忠)이 군사 1만을 거느리고 신라의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성주인 도독 품석(品釋)을 죽임
*출전 :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2년 8월
644년 7월
당나라 태종(太宗)이 영주도독 장검(張儉)을 보내어 유주(幽州), 영주(營州)의 군사와 거란, 해(奚), 말갈군을 거느리고 요동(遼東)을 공격하게 함
*출전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3년 7월
645년 4월
당나라 대군이 요수(遼水)를 건너 고구려를 침입하여 신성(新城)을 포위하고 개모성(盖牟城)을 함락함
*출전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4년 4월
645년 5월
당나라 군이 요동성(遼東城)을 공격하여 점령함. 고구려 군사 1만여 명과 주민 4만여 명이 포로가 됨.
*출전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4년 5월
645년 8월
당나라 군이 안시성(安市城)을 60여일 간 포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철수함. (안시성전투)
*출전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4년 8월
647년 7월
당나라의 우진달(牛進達)이 거느린 수로군(水路軍)이 고구려의 석성(石城)을 공격하여 점령함
*출전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6년 7월
647년 10월
백제군이 신라의 무산(茂山), 감물(甘勿), 동잠(桐岑)의 세 성을 공격하였으나 김유신(金庾信)의 반격으로 실패함
*출전 :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덕여왕 원년 10월
648년 9월
장군 설만철(薛萬徹)이 이끈 당나라군이 압록강 어귀의 박작성(泊灼城)을 포위 공격하였으나 실패함
*출전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7년 9월
655년 1월
고구려가 백제와 말갈의 군사와 연합하여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입하여 33개의 성을 빼앗음
*출전 : <<삼국사기>>, <신라본기> 대종무열왕 2년 1월
660년 7월
나당연합군이 황산(黃山)과 웅진(熊津)에서 백제군을 물리치고 사비성을 점령함. 18일 웅진성(熊津城)으로 피난한 의자왕이 항복함으로써 백제멸망
*출전 :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20년 6월
661년 1월
복신(福信), 도침(道琛), 흑치상지(黑齒常之) 등이 일본에 있던 왕자 부여풍(扶餘豊)을 맞이하여 주류성(周留城)을 거점으로 백제 부흥군을 일으킴
*출전 :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20년 6월
661년 2월
백제 부흥군이 사비성(泗沘城)을 공격함. 신라 무열왕이 이찬 품일(品日)을 보내어 구원하게 함
*출전 : <<삼국사기>>, <신라본기> 태종무열왕 8년 2월
661년 8월
당나라 소정방(蘇定方)이 패강(浿江)에서 고구려 군을 격파하고 평양성(平壤城)을 포위함
*출전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방왕 20년 8월
663년 5월
나당연합군이 백제 부흥군의 주 근거지의 하나인 주류성(周留城)을 함락시킴(백제부흥운동)
*출전 :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3년 5월
664년 3월
백제 유민이 사비성(泗沘城)을 근거로 부흥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웅주도독(熊州都督)의 군사에 패배함
*출전 :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4년 2월
667년 9월
이적(李勣)이 이끈 당나라 군이 고구려의 신성(新城)을 점령하고 이어서 16개 성을 점령함
*출전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26년 9월
668년 2월
이적(李勣)이 이끈 당나라군이 고구려 부여성(扶餘城)을 함락하고 주변의 40여 성을 항복받음. 고구려군 5만 명이 부여성을 구원하고자 출동하였으나 당나라군에 패하고 물러남
*출전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27년 2월
668년 9월
나당연합군이 평양성(平壤城)을 포위하자 보장왕이 항복함. (고구려 멸망)
*출전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27년 9월
670년 4월 4일
신라의 사찬 설오유(薛烏儒)와 고구려의 고연무(高延武)가 각각 1만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당나라 말갈 군사를 격파함
*출전 :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10년 4월
670년 7월
신라군이 당나라의 웅진도독부 관할하의 백제 지역을 공격하여 80여 성을 점령함
*출전 :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10년 7월
673년 9월
신라군이 신라의 북쪽 경계를 침범한 당나라, 거란, 말갈군과 9차례 전투를 벌여 승리함. 그해 겨울에 당나라 군이 고구려 부흥군의 근거지인 우잠성(牛岑城) 등을 점령함
*출전 :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13년 9월
675년 9월
당나라군이 아달성(阿達城), 칠중성(七重城), 석현성(石峴城)을 공격함. 신라군이 18회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6천여 명의 당나라군을 죽임
*출전 :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15년 9월
675년 9월 29일
신라군이 매초성(買肖城)에 주둔한 이근행(李謹行)의 20만 당나라군을 대파함(매초성전투)
*출전 :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15년 9월
676년 11월
사찬 시득(施得)이 거느린 신라 수군이 금강하구 기벌포(伎伐浦)에서 설인귀(薛仁貴)의 당나라군을 격파함(기벌포전투)
*출전 : <<삼국사기>>, <신라본기> 왕 년 월
696년
고구려 유민 대조영(大祚榮)이 천문령(天門嶺)에서 이해고(李楷固)의 당나라군을 격파함. (천문령 전투)
*출전 : <<신당서>>, <북적열전> 발해
731년 4월
일본의 병선 3백 척이 신라의 동쪽 변경을 침입하였으므로 이를 격파함
*출전 : <<삼국사기>>, <신라본기> 성덕왕 30년 4월
732년
발해 무왕이 장문휴(張文休)가 이끈 수군을 보내어 당나라의 등주(登州)를 공격하여 자사 위준(韋俊)을 죽임(등주 공격)
*출전 : <<구당서>>, <북적열전> 발해말갈
733년 7월
당나라의 요청으로 발해 공격을 위해 김사란(金思蘭)이 이끈 신라군이 출동하였으나 눈이 많이 와서 철수함.
*출전 : <<삼국사기>>, <신라본기> 성덕왕 32년 7월
768년 7월
일길찬 대공(大恭)과 아찬 대렴(大廉)이 반란을 일으켜 33일간 왕궁을 포위하였으나 평정됨.
*출전 : <<삼국사기>>, <신라본기> 혜공왕 4년 7월
822년 3월
웅천주 도독 김헌창(金憲昌)이 반란을 일으켜 국호를 장안(長安), 연호를 경운(慶雲)이라 함 (김헌창의 난)
*출전 : <<삼국사기>>, <신라본기> 헌덕왕 14년 3월
828년 4월
장보고(張保皐)가 군사 1만명을 받고 완도 청해진(淸海鎭)의 대사로 임명됨.
*출전 : <<삼국사기>>, <신라본기> 흥덕왕 3년 4월
838년 2월
김양(金陽)이 청해진 대사 장보고(張保皐)와 함께 김우징(金祐徵)을 받들어 반란을 일으킴(신무왕)
*출전 : <<삼국사기>>, <신라본기> 민애왕 원년 2월
839년 윤1월 19일
김양(金陽)이 이끈 군사가 달구벌(達丘伐)에서 김흔(金昕)이 이끈 관군을 격파하고, 도망한 국왕을 죽임
*출전 : <<삼국사기>>, <열전> 김양
889년
국내의 여러 주군에서 반란이 일어남. 원종(元宗)과 애노(哀奴)가 사벌주(沙伐州)에서 반란을 일으킴.
*출전 :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성여왕 3년
891년 10월
북원(北原)의 양길(梁吉)이 부하 궁예(弓裔)를 보내어 주변 10여 군현을 습격하게 함
*출전 :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성여왕 5년 10월
892년
완산(完山)의 견훤(甄萱)이 반란을 일으켜 후백제를 세우니 무주(武州) 주변 군현들이 항복함.
*출전 :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성여왕 6년
895년
궁예(弓裔)가 저족(猪足), 성천(狌川), 부약(夫若), 금성(金城), 철원(鐵圓) 등 10여 군현을 격파하고 임금을 자칭함.
*출전 : <<삼국사기>>, <열전> 궁예
898년 7월
궁예(弓裔)가 패서도(浿西道)와 한산주(漢山州) 관내 30여 성을 빼앗고 송악군(松岳郡)에 도읍을 정함.
*출전 : <<삼국사기>>, <신라본기> 효공왕 2년 7월
899년
궁예(弓裔)가 왕건(王建)에게 명하여 광주(廣州), 충주(忠州), 당성(唐城), 청주(淸州), 괴양(槐壤) 등을 공격하여 평정하게 함.
*출전 : <<삼국사기>>, <열전> 궁예
904년 7월
궁예(弓裔)가 상주(尙州) 등 30여 주현을 공격하여 빼앗음.
*출전 : <<삼국사기>>, <열전> 궁예
907년
견훤(甄萱)이 신라의 일선군(一善郡) 이남 10여 성을 빼앗음
*출전 : <<삼국사기>>, <신라본기> 효공왕 11년
919년 1월
6위(六衛)를 설치함. (2군6위(二軍六衛))
*출전 : <<고려사>>, <병지1>, 병제
920년 10월
견훤(甄萱)이 대야성(大耶城)을 함락시키고 진례성(進禮城)으로 진격함.
*출전 :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명왕 4년 10월
925년 10월
태조와 견훤(甄萱)이 조물성(曹物城)에서 대전함.
*출전 : <<삼국사기>>, <열전> 견훤
927년 9월
견훤(甄萱)이 신라의 경주를 공격하여 경애왕(景哀王)을 죽임.
*출전 :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애왕 4년 10월
930년 1월
태조가 고창군(古昌郡) 병산(甁山)에서 견훤(甄萱)과 싸워 크게 승리하고 견훤(甄萱) 지배하의 30여 군현을 항복받음.
*출전 :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순왕 4년 1월
936년 9월
태조가 일리천(一善)에서 후백제 신검(神劍)의 군사를 격파하고 후삼국을 통일함(일리천 전투)
*출전 : <<삼국사기>>, <열전> 견훤
*연표>주제 : 전쟁연표>전투
945년 9월
왕규(王規)가 반란을 일으키자 서경(西京)의 대광(大匡) 왕식렴(王式廉)이 이를 진압함
*출전 : <<고려사절요>> 권2
993년 윤10월
제1차 거란 침입. 서희(徐熙)가 거란 장수 소손녕(蕭孫寧)과 담판하여 화약(和約) 체결.
*출전 : <<고려사>>, <세가3>
994년
서희(徐熙)가 여진족을 축출하고 장흥진(長興鎭), 흥화진(興化鎭), 곽주(郭州), 구주(龜州)에 축성함.
*출전 : <<고려사절요>> 권2
1010년 11월
거란 왕이 군사 40만을 이끌고 고려 침입. 제2차 거란 침입. 강조(康兆)가 패배하고 죽임을 당함.
*출전 : <<고려사>>, <세가>, 현종 원년 11월
1012년 5월
동여진이 청하현(淸河縣), 영일현(迎日縣), 장기현(長鬐縣)에 침입하여 강민첨(姜民瞻) 등이 격퇴함
*출전 : <<고려사>>, <세가>, 현종 3년 5월
1014년 10월
거란군이 통주(通州)와 흥화진(興化鎭)을 침입하여 장군 정신용(鄭神勇) 등이 격퇴함.
*출전 : <<고려사>>, <세가>, 현종 5년 10월
1018년 12월
거란의 소손녕(蕭遜寧)이 군사 10만으로 고려 침입. 제3차 거란 침입. 강감찬(姜邯贊)을 상원수로, 강민첨(姜民瞻)을 부원수로 임명하여 막게 함.
*출전 : <<고려사>>, <세가>, 현종 9년 12월
1019년 2월
강감찬(姜邯贊)이 거란군을 귀주(龜州)에서 대파함. (귀주대첩)
*출전 : <<고려사>>, <세가>, 현종 10년 2월
1033년 8월
북쪽 국경 일대에 천리장성(千里長城) 축조를 시작함
*출전 : <<고려사>>, <병지2>, 성지
1080년 12월
동번(東蕃)이 난을 일으켰으므로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정주(定州)로 보내어 토벌함.
*출전 : <<고려사절요>>권5, 문종 34년 12월
1104년 12월
윤관(尹瓘)의 건의로 신기군(神騎軍), 신보군(神步軍), 항마군(降魔軍)으로 편성된 별무반(別武班)을 창설함.
*출전 : <<고려사>>, <병지1>, 병제
1107년 12월
윤관(尹瓘)이 지휘하는 17만 여진 정벌군이 135개 촌락을 격파하고 적병 3,740명을 참살함.
*출전 : <<고려사절요>>권7, 예종 2년 12월
1108년 3월
윤관(尹瓘)이 여진을 평정한 지역에 9개소의 성을 축성함
*출전 : <<고려사절요>>권7, 예종 3년 3월
1109년 7월
여진족의 간청으로 9성을 여진족에게 돌려줌
*출전 : <<고려사절요>>권7, 예종 4년 7월
1135년 1월 4일
묘청(妙淸) 등이 서경(西京)에서 반란을 일으킴. 국호를 대위(大爲), 연호를 천개(天開)로 정함 김부식(金富軾)을 원수로 삼아 토벌하게 함. (묘청의 난)
*출전 : <<고려사절요>> 권10, 인종 13년 1월
1149년 8월
군제를 개편하여 5군을 3군으로 고침.
*출전 : <<고려사>>, <병지1>, 병제
1174년 9월 25일
조위총(趙位寵)이 서경(西京)에서 반란을 일으켜 절령(岊嶺) 이북 40여 성이 호응함
*출전 : <<고려사절요>>권12, 명종 4년 9월
1216년 8월
수만 명의 거란 유민들이 고려에 침입하여 영주(寧州), 삭주(朔州) 등을 공격함. 김취려(金就礪) 등을 보내어 거란을 막게 함.
*출전 : <<고려사절요>>권14, 고종 3년 8월
1219년 1월
고려, 몽고, 동진 연합군이 강동성(江東城)을 함락시키고 농성 중인 거란 유민을 섬멸함. (강동성 전투)
*출전 : <<고려사절요>>권15, 고종 6년 1월
1231년 8월 10일
몽고 원수 살리타이(撒禮塔)이 고려에 침입하여 함신진(咸新鎭)을 공격함. 다음날 함신진의 고려군 항복. 몽고 1차 침입
*출전 : <<고려사>>, <세가>, 고종 18년 8월
1231년 9월 3일
몽고군이 귀주성(龜州城)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에 실패함. 이듬해 1월까지 수 차례 공격하였으나 실패함. (귀주성 전투)
*출전 : 국방군사연구소, <<한민족전쟁통사2>>, 1993, 212-221쪽.
1232년 12월 16일
처인성(處仁城)에서 승장(僧將) 김윤후(金允候)가 지휘하는 고려군이 몽고군을 공격하여 몽고 원수 살리타이(撒禮塔)를 사살함.
*출전 : <<고려사>>권103, <열전>, 김윤후
1235년 윤7월
몽고 원수 탕꾸(唐古)가 지휘하는 몽고군이 고려를 침입함. 몽고 2차 침입
*출전 : 국방군사연구소, <<한민족전쟁통사2>>, 1993, 248쪽.
1253년 7월
예꾸(也窟)이 지휘하는 몽고군이 고려 침입. 주민들을 산성과 섬으로 대피시킴.
*출전 : <<고려사>>권24, <세가> 고종 24년 7월
1253년 10월
방호별감(防護別監) 김윤후(金允候)가 지휘하는 고려군이 충주성(忠州城)을 공격한 몽고군을 12월 중순까지 70여일 동안 방어함.
*출전 : <<고려사>>권103, <열전> 김윤후
1259년 4월
고려 태자의 입조(入朝)를 조건으로 몽고와 강화 성립. 몽고군 철수
*출전 : <<고려사>>권24, <세가> 고종 46년 4월
1270년 6월 1일
장군 배중손(裵仲孫), 노영희(盧永禧) 등이 강화(江華)에서 삼별초(三別抄)를 이끌고 봉기함. 승화후(承化侯) 왕온(王溫)을 왕을 삼음. (삼별초의 항쟁)
*출전 : <<고려사절요>>권18, 원종 11년 6월
1270년 8월
삼별초(三別抄) 군이 진도(珍島)로 들어가 근거지로 삼음.
*출전 : <<고려사절요>>권18, 원종 11년 8월
1270년 11월
삼별초(三別抄) 군이 탐라(耽羅)를 공격하여 함락시킴.
*출전 : <<고려사절요>>권18, 원종 11년 11월
1271년 5월 15일
고려와 몽고 연합군이 삼별초(三別抄) 군의 근거지인 진도(珍島) 용장성(龍藏城)를 함락시킴. 배중손(裵仲孫), 노영희(盧永禧) 등 전사.
*출전 : <<고려사절요>>권18, 원종 12년 5월
1273년 4월
김방경(金方慶) 등이 이끄는 고려와 몽고 연합군이 삼별초(三別抄) 최후의 근거지인 탐라성(耽羅城)를 함락함. 대장 김통정(金通精) 자결
*출전 : <<고려사절요>>권19, 원종 14년 4월
1274년 10월
고려와 몽고 연합군 3만 여명이 일본 원정. 일기도(一岐島)에 상륙하였으나 폭풍으로 실패함.
*출전 : <<고려사절요>>권19, 원종 15년 10월
1281년 5월
김방경(金方慶), 흔도(忻都), 홍다구(洪茶丘) 등이 일본 정벌 출발
*출전 : <<고려사절요>>권19, 충렬왕 6년 5월
1281년 6월
고려, 몽고군이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태풍으로 큰 피해를 입음
*출전 : <<고려사절요>>권19, 충렬왕 6년 6월
1290년 5월
원나라의 반란군인 합단(哈丹)의 군사가 해양(海陽)에 침입. (합단의 침입)
*출전 : <<고려사절요>>권21, 충렬왕 16년 5월
1354년 7월
원나라의 요청으로 한족(漢族) 부흥 세력인 장사성(張士誠) 토벌을 위해 유탁(柳濯) 등 장수 40명과 군사 2000여명을 파병함.
*출전 : <<고려사절요>>권26, 공민왕 3년 7월
1356년 7월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함락하여 함주(咸州) 이북의 영토를 99년만에 수복함.
*출전 : <<고려사절요>>권26, 공민왕 5년 7월
1359년 12월
홍두적(紅頭賊) 4만명이 고려를 침공하여 의주(義州), 서경(西京) 등을 점령함. (제1차 홍건적의 침입)
*출전 : <<고려사절요>>권27, 공민왕 8년 12월
1361년 10월
반성(潘誠), 사유(沙劉) 등이 지휘하는 홍두적(紅頭賊) 10만여 명이 고려를 침공. (제2차 홍건적의 침입)
*출전 : <<고려사절요>>권27, 공민왕 10년 10월
1361년 11월
홍두적(紅頭賊)이 절령(岊嶺)의 책문(柵門)에서 고려군을 격파하고 개경(開京)을 점령함. 국왕은 복주(福州)로 피난함(12월)
*출전 : <<고려사절요>>권27, 공민왕 10년 11월
1362년 1월 18일
정세운(鄭世雲)이 지휘하는 20만 고려군이 개경(開京)을 탈환함. 10만 명의 홍두적이 사살되고 잔존 군사들은 요동(遼東)으로 완전히 퇴각함.
*출전 : <<고려사절요>>권27, 공민왕 11년 01월
1364년 1월
여진족인 삼선(三善)과 삼개(三介) 등이 여진족을 이끌고 함주(咸州)를 점렴함. 이성계(李成桂)의 반격으로 격퇴
*출전 : <<고려사절요>>권28, 공민왕 13년 1월
1370년 11월
지용수(池龍壽), 이성계(李成桂) 등이 만주의 동녕부(東寧府)를 점령함. (동녕부 정벌)
*출전 : <<고려사절요>>권29, 공민왕 19년 11월
1374년 8월
최영(崔塋)이 제주(濟州)의 목호(牧胡)들이 일으킨 난을 평정함. (목호(牧胡)의 난)
*출전 : <<고려사절요>>권29, 공민왕 23년 8월
1376년 7월
최영(崔塋)이 홍산(鴻山)에서 왜구를 대파함. (홍산대첩)
*출전 : <<고려사절요>>권30, 신우 2년 7월
1380년 8월
나세(羅世), 최무선(崔茂宣) 등이 이끈 고려 수군이 진포(鎭浦)에서 화약 무기를 사용하여 왜구의 전선 500척을 격파함.
*출전 : <<고려사절요>>권31, 신우 6년 8월
1380년 9월
이성계(李成桂)가 이끈 고려군이 황산(荒山)에서 왜구를 대파함. (황산대첩)
*출전 : <<고려사절요>>권31, 신우 6년 9월
1383년 5월
남해현(南海縣)에 침입한 왜구 선단을 정지(鄭地)가 관음포(觀音浦)에서 화포 공격으로 격파함. 관음포 전투
*출전 : <<고려사절요>>권32, 신우 9년 5월
1383년 8월
여진족인 호발도(胡拔都)가 단주(端州)를 침입하자 이성계(李成桂)가 격퇴함.
*출전 : <<고려사절요>>권32, 신우 9년 8월
1388년 4월 18일
이성계(李成桂), 조민수(曹敏修)가 지휘하는 요동(遼東) 정벌군이 출정함. (요동정벌)
*출전 : <<고려사절요>>권33, 신우 14년 4월
1389년 2월
경상도원수(慶尙道元帥) 박위(朴葳)가 대마도(對馬島)에 있는 왜구 근거지를 정벌함.
*출전 : <<고려사>>권137, <세가> 공양왕 원년 2월
1396년 12월 3일
김사형(金士衡)을 오도병마도통처치사(五道兵馬都統處置使)로 삼아 일기도(一歧島)와 대마도(對馬島)를 정벌함
*출전 : <<조선왕조실록>>
1419년 6월 17일
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 이종무(李從茂)가 이끄는 병선 227척, 조선군 17,000여명이 대마도 정벌을 위해 거제도 출항. (대마도정벌)
*출전 : <<조선왕조실록>>
1433년 5월 7일
평안도 도절제사 최윤덕(崔潤德)이 평안도와 황해도 군사를 이끌고 파저강(婆猪江) 일대의 여진족 이만주(李滿住)를 토벌함.
*출전 : <<조선왕조실록>>
1460년 1월 28일
여진족 아비거(阿比車)가 1,500명을 이끌고 회령(會寧)에 침입하였다가 함길도 도절제사 양정(楊汀)의 반격으로 패주함.
*출전 : <<조선왕조실록>>
1467년 5월 16일
전 회령절제사 이시애(李施愛)가 길주(吉州)에서 절도사 강효문(康孝文) 등을 죽이고 난을 일으켜 함길도 전역으로 확산됨. (이시애의 난)
*출전 : <<조선왕조실록>>
1510년 4월
삼포(三浦)에 거주하던 왜인들이 난을 일으켜 부산포(釜山浦)와 제포(薺浦)를 점령함. (삼포왜란)
*출전 : <<중종실록>>권11, 중종 5년 4월 8일
1554년 4월 12일
고성(固城) 사량진(蛇梁鎭)에 왜구가 침입하여 성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물러감. (사량진왜변)
*출전 : <<조선왕조실록>>
1555년 5월 11일
왜구 선단 60여 척이 달량성(達梁城)을 공격하여 함락함. 이후 영암(靈巖) 등을 공격함. (을묘왜변(乙卯倭變))
*출전 : <<조선왕조실록>>
1592년 4월 13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일본군 제1군이 절영도(絶影島)에 상륙. 임진왜란 시작.
*출전 : 이이화, <<조선과 일본의 7년 전쟁>>, 한길사, 1999, 124쪽
1592년 4월 14일
일본군이 부산진성을 공격하여 첨사 정발(鄭撥)이 전사하고 방어군 천여 명 전사함.
*출전 : <<임진왜란사>>,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87, 33쪽
1592년 4월 15일
동래성이 함락되고 부사 송상현(宋象賢), 양산 군수 조영규(趙英珪) 등이 전사
*출전 : <<임진왜란사>>,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87, 35-38쪽
1592년 4월 25일
상주(尙州)에서 순변사 이일(李鎰)이 패배하여 충주(忠州)로 철수.
*출전 : <<임진왜란사>>,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87, 45-47쪽
1592년 4월 28일
충주(忠州) 탄금대에서 삼도순변사 신립(申砬)이 이끄는 부대가 패배하고 신립, 종사관 김여물(金汝岉)등 전사(탄금대전투)
*출전 : 이이화, <<조선과 일본의 7년 전쟁>>, 한길사, 1999, 137-141쪽
1592년 5월
부원수 신각(申恪)이 양주의 해유령(蟹踰嶺)에서 일본군을 격파하고 60여명의 목을 벰.
*출전 : <<장바록>>
1592년 5월 7일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 함대가 옥포(玉浦) 앞바다에서 일본 함선 26척을 격파하고, 이어서 합포(合浦)의 일본 함선 5척을 격파함.
*출전 : <<임진왜란사>>,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87, 121-122쪽
1592년 5월 8일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 함대가 적진포(赤珍浦)에 정박 중인 일본 함선 11척을 격파함
*출전 : <<임진왜란사>>,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87, 122-123쪽
1592년 5월 17일
임진강 방어선의 붕괴. 조방장 유극량(劉克亮) 전사.
*출전 : <<임진왜란사>>,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87, 60~63쪽
1592년 5월 25일
의병장 곽재우(郭再祐)의 의병 부대가 정암진(鼎岩津)을 도하하는 안코쿠지 에케이(安國寺惠瓊) 휘하의 일본군을 공격하여 함안 방면으로 격퇴시킴.
*출전 : <<임진왜란사>>,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87, 98-99쪽
1592년 5월 29일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 함대가 사천(泗川) 앞바다에서 일본 함대 13척을 격파함. 새로 건조한 장갑선인 거북선(龜船)이 최초로 실전에서 사용됨. 일본군의 총탄에 이순신 부상.
*출전 : <<임진왜란사>>,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87, 125-126쪽
1592년 6월 2일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 함대가 미륵도(彌勒島)의 당포(唐浦)에 정박 중인 일본 함대를 공격하여 21척 모두를 격파함
*출전 : <<임진왜란사>>,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87, 126-128쪽
1592년 6월 5일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3도 관찰사가 거느린 근왕병이 용인(龍仁) 문소산(文小山)에서 와키사카 사헤이(脇坂左兵衛)의 일본군에게 패배. 선봉장 백광언(白光彦), 이시지(李時之) 전사.
*출전 : 이이화, <<조선과 일본의 7년 전쟁>>, 한길사, 1999, 202-204쪽
1592년 6월 5일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이 지휘하는 연합 함대가 고성(固城) 당항포(唐項浦)에서 일본 함대 26척을 격침시킴.
*출전 : <<임진왜란사>>,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87, 128-129쪽
1592년 6월 5일
고령(高靈) 의병장 정인홍(鄭仁弘) 부대가 낙동강변의 무계(茂溪)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밤에 기습함
*출전 : <<임진왜란사>>,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87, 101-102쪽
1592년 6월 15일
평양성(平壤城) 함락. 선조 의주(義州)로 피난
*출전 : <<임진왜란사>>,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87, 65-68쪽
1592년 7월 7일
진안의 웅치(熊峙)에서 나주 판관 이복남(李福男)이 전주(全州)로 침입하려는 안코쿠지 에케이(安國寺惠瓊)의 일본군을 맞아 방어하였으나 실패하고 김제 군수 정담(鄭湛) 전사.
*출전 : 이이화, <<조선과 일본의 7년 전쟁>>, 한길사, 1999, 207-209쪽
1592년 7월 8일
이치(梨峙)에서 광주 목사 권율(權栗)이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의 일본군을 맞아 격퇴함. 이치 전투로 일본군의 전라도 석권을 저지함.
*출전 : 이이화, <<조선과 일본의 7년 전쟁>>, 한길사, 1999, 209-211쪽
1592년 7월 8일
이순신(李舜臣), 이억기(李億祺), 원균(元均)의 조선 함대 72척이 한산도 견내량(見乃梁)에서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가 이끄는 일본 함대 66척을 격침시킴.
*출전 : 이이화, <<조선과 일본의 7년 전쟁>>, 한길사, 1999, 211-213쪽
1592년 10월 5일
진주 목사 김시민(金時敏)이 6일 동안 진주성을 공격하는 일본군을 방어하여 격퇴하고 전사. 이 전투는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
*출전 : 이이화, <<조선과 일본의 7년 전쟁>>, 한길사, 1999, 255-258쪽
1593년 1월 6일
이여송(李如松)의 명나라 군과 김명원(金明元) 휘하의 조선군 연합군이 평양성(平壤城)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일본군을 공격하여 평양 탈환.
*출전 : <<임진왜란사>>,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87, 148-151쪽
1593년 2월 12일
전라 감사 권율(權慄)이 거느린 2,300명이 행주산성(幸州山城)에서 3만 여명의 일본군을 대파함. 이 전투에서 변이중(邊以仲)이 제작한 화차(火車)가 큰 역할을 함.
*출전 : <<임진왜란사>>,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87, 161-165쪽
1597년 7월 8일
일본군의 침공군 주력이 6백여 척의 선단에 의하여 경상도 남해안 일대에 상륙. 정유재란 발발
*출전 : <<임진왜란사>>,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87, 218쪽
1597년 7월 15일
삼도수군통제사 원균(元均)이 거느린 조선 수군이 칠천량(漆川梁)에서 일본 수군의 기습으로 패배하고 원균, 이억기(李億祺) 등 전사. (칠천량 해전)
*출전 : <<임진왜란사>>,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87, 237-239쪽
1597년 9월 7일
경기도 직산(稷山)에서 부총병 해생(解生)이 지휘하는 명나라군이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의 일본군 우군을 격파함. 일본군의 북상 좌절. (직산 전투)
*출전 : <<임진왜란사>>,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87, 233쪽
1597년 9월 16일
명량(鳴梁) 수로에서 이순신(李舜臣) 함대 12척이 일본 함대 130여 척을 격파. 전라도 해안의 제해권 회복.
*출전 : <<임진왜란사>>,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87, 241-243쪽
1598년 11월 19일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의 조선 수군과 진린(陳璘)의 명나라 수군 연합 함대가 노량(露梁) 앞 바다에서 일본군 선단을 공격하여 2백여 척을 격파함. 이순신은 일본군의 유탄에 전사.
*출전 : <<임진왜란사>>,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87, 263-267쪽
1624년 1월 22일
평안 병사 겸 부원수인 이괄(李适)이 안주(安州)에서 반란을 일으킴. (이괄의 난)
*출전 : <<조선왕조실록>>
1627년 1월 13일
후금군 3만 명이 압록강을 도하하여 의주(義州)성 포위. 정묘호란(丁卯胡亂) 발발. 14일 의주성 함락.
*출전 : <<조선왕조실록>>
1636년 12월 8일
청나라 선봉군이 압록강을 도하하여 의주(義州) 점령. 병자호란 발발.
*출전 : <<조선왕조실록>>
1654년 7월 2일
변급(邊岌)이 지휘하는 조선군이 흑룡강에서 러시아군을 격파하고 귀국. (제1차 나선정벌(羅禪征伐))
*출전 : <<조선왕조실록>>
1658년 6월 10일
경상북도 병마우후 신유가 지휘하는 조선군이 청군과 흑룡강 어귀에서 러시아군 격파. (제2차 나선정벌)
*출전 : 박태근, 〈조선군의 흑룡강출병〉, <<한국사론>>9, 국사편찬위원회, 1981, 250쪽
1811년 12월 18일
홍경래(洪景來)가 평안도에서 반란을 일으켜 가산(嘉山), 정주(定州) 등 여러 군현을 점령함. (홍경래의 난)
*출전 : <<조선왕조실록>>
1866년 7월 18일
중군(中軍) 이현익(李玄益) 등이 제너럴 셔먼호 선원들을 추격하다 납치됨(19일 석방)
*출전 :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병인신미양요사>>, 108쪽
1866년 8월 12일
로즈(P. G. Roze) 제독의 프랑스 동양함대 경기도 남양 앞바다에 도착(병인양요의 배경)
*출전 : 국사편찬위원회, <<고종시대사>>1, 1967,
1866년 10월 2일
양헌수(梁憲洙)의 조선군 정족산성(鼎足山城)에서 프랑스군 150명과 교전, 30여명의 사상자를 내게 하고 격퇴(양헌수와 정족산성전투)
*출전 : 국사편찬위원회,<<고종시대사1>>,1969 289~290쪽 ; 국방군사연구소, <<한민족전쟁통사4>>, 1997, 73쪽
1871년 3월 27일
주청미국공사 로우(Low)와 로저스(Rodgers)사령관 휘하의 미국함대, 나가사키에서 조선으로 출발(신미양요의 배경)
*출전 :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병인신미양요사>> 205쪽 ; 이광린, <<한국사강좌>>5, 일조각, 1991, 51쪽 ; 김원모, <<근대한미관계사>>, 철학과 현실사, 1992, 397쪽
1871년 4월 24일
어재연(魚在淵)의 조선군, 광성보(廣城堡)에서 미군과 교전하여 부상자 20여명 외 전원 전사(광성보 전투)
*출전 : 김원모, <<근대한미관계사>>, 철학과 현실사, 1992, 468-472쪽, 504-507쪽 ;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병인신미양요사>> 226~231쪽, 13 560쪽
1875년 8월 20일
강화도(江華島) 수비대, 초지진(草芝鎭) 앞바다에 나타난 일본군함 운요오(雲揚)호와 포격전(운요오호 사건)
*출전 : <<고종실록>> 12년 8월 25일 ; 국사편찬위원회, <<고종시대사1>>,1969 799쪽
1882년 6월 5일
무위영과 장어영 군인들이 급료 체불과 지급 급료의 부정에 격분, 임오군란을 일으킴
*출전 : <<고종실록>> 고종 19년 6월 9일
1884년 10월 17일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등 개화파, 우정국(郵政局) 낙성식을 이용 쿠데타를 일으킴(갑신정변)
*출전 : 국사편찬위원회,<<고종시대사2>>,1969 675-676쪽
1885년 3월 1일
영국 주청(駐淸)함대가 거문도를 불법 점령(1887년 2월 7일 물러남)
*출전 : 국사편찬위원회,<<고종시대사2>>,1969 732쪽 ; 이광린, <<한국사강좌>>5, 일조각, 1994, 197쪽
1894년 3월 20일
전봉준(全奉準)의 동학농민군 3,000여명 전라도 무장(茂長)에서 봉기함. 이른바 무장기포(茂長起包)
*출전 : 김인걸, <1894년 농민전쟁의 1차봉기>, <<1894년 농민전쟁연구>>, 1995, 역사비평사, 85쪽
1894년 6월 23일
일본군, 풍도(楓島) 앞바다의 청국군함을 격침시킴으로써 청일전쟁 시작됨
*출전 : 피터 두우스 저, 김용덕 역 <일본근대사>, ,지식산업사, 1989, 138쪽
1894년 11월 8일
동학농민군, 11월 11일까지의 우금치 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패배하고 남쪽으로 퇴각
*출전 : 한국역사연구회, 1995, <<1894년 농민전쟁연구>>4, 역사비평사 141-166쪽
1895년 8월 20일
일본 군인과 낭인들 경복궁에 난입하여 훈련연대장 홍계훈(洪啓薰)전사하고 명성황후가 시해됨(을미사변)
*출전 : 국사편찬위원회, <<고종시대사>>3, 1969, 989쪽
1904년 2월 8일
일본연합함대, 뤼순(旅順)항 밖에서 러시아 군함 공격. 러일전쟁 시작됨
*출전 : 후지와라 아키라 저, 엄수현 역, <일본군사사>, 시사일본어사, 1994, 119-139쪽
1905년 5월 27일
5월 28일까지의 동해해전에서 일본군 연합함대가 러시아 발틱함대를 격파
*출전 : 후지와라 아키라 저, 엄수현 역, 〈일본군사사〉, 시사일본어사, 1994, 119-139쪽
1907년 8월 9일
수원진위대(鎭衛隊) 강화분견대가 봉기하여 일본군과 전투. 군대해산을 계기로 다수의 해산군인들이 의병합류(의병전쟁의 전개2(전면적인 민족전쟁 1907. 8-1909))
*출전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43, 1999, 416쪽
1908년 1월 29일
13도창의군 선발대, 서울 진공 작전을 개시하여 동대문 밖 30리 지점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으나 후퇴(서울진공)
*출전 : 국방군사연구소, <<한민족전쟁통사4>>, 1997, 279
1920년 6월 7일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부대가 길림성 봉오동(鳳梧洞)에서 일본군을 공격, 150명의 사상자를 내게함
*출전 : 이재 외, <<한민족전쟁사총론>>, 1988, 교학연구사, 304쪽
1920년 10월 21일
김좌진, 이범석의 북로군정서 부대가 길림성 청산리 전역에서 일본군 5,000여명을 섬멸시킴
*출전 : 이재 외, <<한민족전쟁사총론>>, 1988, 교학연구사, 304쪽
1930년 1월 29일
이청천의 한국독립군 유격독립여단과 중국구국군 연합부대 서란현 전투에서 승리
*출전 : 이재 외, <<한민족전쟁사총론>>, 1988, 교학연구사, 315쪽
1933년 7월 20일
이청천 등의 독립군부대와 중국군 연합부대인 한중연합토일군(韓中聯合討日軍), 대전자(大甸子)전투에서 승리
*출전 : 이재 외, <<한민족전쟁사총론>>, 1988, 교학연구사, 322
1941년 12월 9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일선전포고
*출전 : 국사편찬위원회, <<일제침략하 한국36년사>> 12, 855~856쪽
1948년 10월 19일
여수 주둔 14연대, 지창수 상사 등이 주도하여 제주도 출동 명령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킴(14연대 반란(여순반란)사건의 발발)
*출전 : 황남준, <전남지방장치와 여순사건>, <<해방전후사의 인식3>>, 한길사, 1995, 446-447쪽
1948년 10월 20일
14연대 반란군 미명에 여수읍 장악, 오후에는 경찰대를 격파, 순천 점령하고 보성과 곡성, 구례로 진출
*출전 : 황남준, <전남지방장치와 여순사건>, <<해방전후사의 인식3>>, 한길사, 447-449쪽
1948년 10월 22일
국군 12연대, 4연대, 2연대 등 진압군이 반란군의 저항을 분쇄하고 23일 오전 11시 순천 탈환
*출전 : 황남준, <전남지방장치와 여순사건> <<해방전후사의 인식3>>, 한길사, 1995, 452쪽
1948년 10월 27일
오후까지 국군 진압부대 여수 시내를 완전히 점령하고 소탕전을 완료(14연대 반란(여순반란)의 진압과 영향)
*출전 : 황남준, <전남지방장치와 여순사건>, <<해방전후사의 인식3>>, 한길사, 1995, 455쪽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부터 인민군, 남한에 대한 전면공격 개시(한국전쟁의 원인과 성격)
*출전 : 와다 하루키, <<한국전쟁>> ,창작과 비평, 1999, 70쪽
1950년 6월 25일
09시 30분까지 인민군 6사단 개성을 점령, 국군 1사단 임진강 대안의 방어선으로 후퇴(옹진, 개성 지역 전투)
*출전 : 국방군사연구소, <<한국전쟁(상)>> ,1995, 117쪽
1950년 6월 25일
국군 6사단, 인민군 2사단과 12사단의 공격으로부터 6월 28일까지 춘천 사수(춘천-홍천전투)
*출전 : 국방군사연구소, <<한국전쟁(상)>>,1995, 130-141쪽
1950년 6월 26일
13시경 인민군 의정부 점령, 국군은 창동으로 퇴각(의정부 전투)
*출전 : 국방군사연구소, <<한국전쟁(상)>>,1995, 126쪽
1950년 6월 28일
미아리의 국군 방어선 붕괴, 오전 11시 30분경 인민군 서울 중심부 진입. 저녁까지 시내 전역을 장악(서울의 함락)
*출전 : 국방군사연구소, <<한국전쟁(상)>>, 1995, 164쪽
1950년 7월 5일
스미스 부대, 오산에서 인민군 4사단 선두 전차대와 교전하였으나 큰 피해를 입고 후퇴(오산전투)
*출전 : 국방군사연구소, <<한국전쟁(상)>>,1995, 211쪽
1950년 7월 20일
미제 24사단의 대전방어선이 무너지고 사단장 딘 소장 고립되어 포로가 됨(대전전투)
*출전 :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한국전쟁 요약>>, 1986, 224쪽
1950년 7월 26일
7월 25일 미군지시에 따라 충청북도 영동군 주민 500여명, 황간읍 노근리 경부선 철로와 터널에서 미군의 공습과 기총사격으로 학살당함(노근리 양민학살)
*출전 : 서중석, <<조봉암과 1950년대 (하)-피해대중과 학살의 정치학>>, 1999, 역사비평사, 610-613쪽
1950년 8월 3일
인민군 제13사단 왜관 북방에서 낙동강 도하 개시, 8월 공세 시작
*출전 : 국방군사연구소, <<한국전쟁(상)>>, 1995, 309쪽
1950년 8월 10일
인민군 5사단에 의해 국군 3사단이 영덕에 고립되고, 8월 11일 인민군 포항 점령(포항-영덕전투)
*출전 : 국방군사연구소, <<한국전쟁(상)>>, 1995, 336쪽
1950년 8월 13일
국군 1사단과 6사단, 방어선을 축소하여 다부동과 군위를 잇는 선으로 이동. 인민군 3사단, 13사단, 15사단이 공격해옴으로써 다부동전투 시작.
*출전 : 국방군사연구소, <<한국전쟁(상)>>, 1995, 313쪽
1950년 8월 31일
인민군 제1군단이 낙동강 서부지역에서 일제히 총공세를 감행, 9월 공세 시작.
*출전 : 국방군사연구소, <<한국전쟁(상)>>, 1995, 341쪽, 357-362쪽
1950년 9월 15일
미제10군단 병력. 해병대를 선두로 인천에 상륙작전 개시(인천상륙작전)
*출전 : 국방군사연구소, <<한국전쟁(상)>>, 1995, 406쪽
1950년 9월 28일
국군과 유엔군, 서울시 전역을 완전히 장악 (29일 환도식)(서울탈환작전)
*출전 : 국방군사연구소, <<한국전쟁(상)>>, 1995, 423쪽
1950년 10월 19일
중국인민해방군 13병단 소속 4개 군, 최초의 중국인민지원군으로 압록강을 넘어옴(중국군의 참전)
*출전 : 洪學智 저, 홍인표 역, <<중국이 본 한국전쟁>>, 1993, 47쪽
1950년 10월 25일
중국군 40군 118사단이 국군 6사단 2연대를 매복 기습하고 온정리를 점령(중국군과 유엔군 간 최초의 교전)
*출전 : 洪學智 저, 홍인표 역, <<중국이 본 한국전쟁>>, 1993, 75 ; 와다 하루키, <<한국전쟁>>, 창작과 비평사, 1999, 200쪽 ; 자위대 육전사연구보급회 저, 이원복 역, <<한국전쟁(4)>>, 명성출판사, 1991, 340쪽
1950년 11월
1950년 11월 중순부터 2월 8일까지 전남 함평군 월야면, 해보면, 나산면 일원에서 다수의 민간인들이 빨치산으로 몰려 학살당함(함평양민학살)
*출전 : 서중석, <<조봉암과 1950년대 (하)-피해대중과 학살의 정치학>>, 1999, 역사비평사, 620-625
1950년 11월 1일
중국군 한국전쟁에서 최초의 공세를 시작, 39군 운산에서 미제1기병사단 격파(운산전투)
*출전 : 洪學智 저, 홍인표 역, <<중국이 본 한국전쟁>>, 1993, 84-88쪽
1950년 11월 24일
미 제8군 서부전선에 전쟁 종식을 위한 크리스마스 공세 돌입
*출전 : 자위대 육전사연구보급회 저, 이원복 역, <<한국전쟁(4)>>, 명성출판사, 1991, 281쪽
1950년 11월 25일
중국군, 덕천과 영변의 국군 7, 8사단을 목표로 역습. 총공세 시작(중국군의 2차 공세)
*출전 : 洪學智 저, 홍인표 역, <<중국이 본 한국전쟁>>, 1993, 117 ; 자위대 육전사연구보급회 저, 이원복 역, <<한국전쟁(4)>>, 명성출판사, 1991, 286-288쪽
1950년 11월 27일
중국의 심양(瀋陽)에서 소련 제64전투항공군단 창설, 극비리에 한국전에 참전하기 시작(소련군의 참전)
*출전 : 기광서, <소련의 한국전쟁관과 개입과정> <<한국역사연구회 한국전쟁50주년 학술심포지움 발표문>> 68쪽
1950년 11월 27일
중국군 9병단 동부전선에서 공세 개시. 장진호에서 미해병1사단을 포위(장진호 전투)
*출전 : 洪學智 저, 홍인표 역, <<중국이 본 한국전쟁>>, 1993, 141-144쪽
1950년 11월 29일
중국군 38군과 42군, 군우리-순천 간 협곡지대에서 12월 1일까지 전투를 통해 미 제2사 단을 포위 섬멸함(군우리 전투)
*출전 : 洪學智 저, 홍인표 역, <<중국이 본 한국전쟁>>, 1993, 128-135쪽 ; 자위대 육전사연구보급회 저, 이원복 역, <<한국전쟁(4)>>, 명성출판사, 1991, 305-320쪽 ; 국방군사연구소, <<한국전쟁(중)>>, 1995, 217~227쪽
1950년 12월 14일
미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 흥남에서 철수 시작(24일 철수 완료)(흥남철수작전)
*출전 :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한국전쟁 요약>>, 1986 243-244쪽
1951년 1월 4일
유엔군, 서울에서 전면 철수하여 북위 37도선으로 후퇴(1.4후퇴)
*출전 : 군사문제연구소, <<한국전쟁일지>>,1991, 182쪽 ; 국방군사연구소, <<한국전쟁(중)>>, 1996, 308-318쪽
1951년 2월 10일
경남 거창군 신원면에서 2월 9일부터 11일까지 11사단 9연대 3대대에 의해 수백명의 양민이 학살당함(거창양민학살)
*출전 : 서중석, <<조봉암과 1950년대 (하)-피해대중과 학살의 정치학>>, 1999, 역사비평사, 625
1951년 2월 11일
중국군 13병단의 40, 42, 66군 및 39군 117사단, 제4차 전역(2월 공세)개시(중국군의 제4차전역(2월공세))
*출전 : 국방군사연구소, <<중공군의 한국전쟁>>, 1994,(원제 : <<抗美援朝戰爭簡史>>), 31쪽 ;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한국전쟁 요약>>, 1986, 245쪽
1951년 3월 16일
유엔군, 서울을 재탈환
*출전 : 국방군사연구소, <<한국전쟁 (중)>>, 1997, 436쪽
1951년 4월 29일
국군 1사단, 미제1기병사단, 미제 25사단 등 미제1군단이 한강 하구-구파발-쌍문동을 잇는 선에서 중국군의 4월공세를 최종 격퇴함(4월 공세 종료)
*출전 : 국방군사연구소, <<한국전쟁 (중)>>, 1997, 536-538쪽 ; 국방군사연구소, <<중공군의 한국전쟁>>, 1994,(원제 : <<抗美援朝戰爭簡史>>), 36쪽
1951년 5월 16일
중국군과 인민군, 제5차전역 2단계작전(5월 공세)을 개시하여 동부전선을 집중 공격하기 시작(중국지원군과 인민군의 제5차 전역2(5월공세))
*출전 : 국방군사연구소, <<한국전쟁 (중)>>, 1997, 550쪽 ; 국방군사연구소, <<중공군의 한국전쟁>>, 1994,(원제 : <<抗美援朝戰爭簡史>>), 37쪽
1952년 7월 11일
미 공군 평양지역에 집중적인 공습을 감행하여 1,400톤의 폭탄과 23,000갤런의 네이팜탄 투하(미군의 폭격)
*출전 : 이신철, <전쟁피해와 북조선사회의 변화>, <<역사문제연구소 심포지움 발표문 : 한국전쟁은 민중에게 무엇이었나>>, 50쪽
1952년 8월 1일
미 제2사단, 중국군 106사단의 2주일에 걸친 공격을 격퇴하고 불모(Old Baldy)고지 확보
*출전 : 국방군사연구소, <<한국전쟁 (중)>>, 1997, 379-382쪽
1952년 9월 18일
조중연합사령부, 추계공세를 개시, 10월 31일까지 60개 진지에 77차례 공격(중국군과 인민군의 1952년 추계공세)
1952년 10월 15일
국군 9사단, 10월 6일부터 공격해온 중국군 38군을 12차례의 전투 끝에 격퇴하고 백마고지를 확보(백마고지 전투)
*출전 : 국방군사연구소, <<한국전쟁 하>>, 1997, 389-395쪽
1953년 6월 10일
중국군, 최후공세의 제2단계(6월 공세) 본격적으로 개시하여 금성돌출부 공격 시작(중국군과 인민군의 최후공세)
*출전 : 국방군사연구소, <<한국전쟁 하>>, 1997, 530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휴전협정 조인(휴전협정의 체결)
*출전 : 국방군사연구소, <<한국전쟁 하>>, 1997, 583 쪽
1961년 11월 14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백악관을 방문하여 베트남 파병의사를 밝힘
*출전 : 홍규덕, <베트남 참전 결정과정과 그 영향>, <<1960년대의 대외관계와 남북문제>>, 1999, 백산서당, 56쪽
1964년 5월 21일
정부, 국가안전보장회의 심의를 거쳐 베트남파병을 결정
*출전 : 국방군사연구소, <<국방정책변천사>>, 1995, 149쪽
1964년 9월 11일
제1차 베트남파병부대 출국, 9월 22일 베트남 도착
*출전 : 국방군사연구소, <<국방정책변천사>>, 1995, 151쪽 ; 국방군사연구소, <<건군50년사>>,1998, 205쪽
1965년 10월 3일
수도사단(맹호부대)과 해병2여단(청룡부대)의 3차 파월부대 중 해병대, 부산항에서 베트남으로 출발(11월 2일까지 파병 완료)(한국군의 월남참전)
*출전 : 국방군사연구소, <<국방정책변천사>>, 1995, 155쪽
1966년 8월 9일
수도사단 3대대 9중대, 1개 대대 규모의 북베트남군 공격을 격퇴(둑코 전투)
*출전 :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주월한국군전사2>>, 1968, 129-135쪽
1968년 1월 21일
북한의 특수부대 남파, 청와대 기습 시도(1.21사건)
*출전 : 나종삼,<<월남파병과 국가발전>>,국방군사연구소, 1996, 254쪽
1968년 1월 31일
북베트남과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남베트남 전역의 도시와 촌락에 대한 기습 감행(구정공세)
*출전 : 나종삼, <<월남파병과 국가발전>>, 1996, 국방군사연구소, 62쪽
1968년 2월 12일
베트남 쿠앙남성 디엔반현 퐁니촌에서 한국군에 의한 마을 주민 50여명 집단 학살됨.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는 2000년 9월 현재 약 80여건의 의혹이 제기됨.
*출전 : 고경태, <진실을 말해 준 사람들-참전군인들의 증언을 통해 본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베트남전쟁과 한국군 파병에 관한 심포지움 발표문>>, 2000
1972년 4월 11일
수도사단 기갑연대, 북베트남군 3사단 12연대가 차단한 19번 국도를 개통하기 위한 안케 패스 전투 시작
*출전 : 나종삼, <<월남파병과 국가발전>>, 1996, 국방군사연구소, 75쪽
1972년 8월 11일
미군, 마지막 전투 부대가 베트남에서 철수하고 소수의 정리요원만 남김
*출전 : 나종삼, <<월남파병과 국가발전>>, 1996, 국방군사연구소, 79쪽
1973년 1월 27일
미국과 북베트남, 파리 휴전협정 체결
*출전 : 이영희, <<베트남전쟁>>, 두레, 88쪽
1973년 1월 30일
국군 9사단 베트남에서 철수 시작, 3월 23일까지 베트남 파병 국군 완전 철수 완료
*출전 : 나종삼,<<월남파병과 국가발전>>,국방군사연구소, 1996, 218쪽
1973년 3월 29일
미국의 철군 정리 부대가 떠남으로써 월남에서 완전히 철수
*출전 : 나종삼, <<월남파병과 국가발전>>, 1996, 국방군사연구소, 82쪽
우리나라의 문화재 10
1.석굴암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24호로 지정되었다. 정식 문화재 명칭은 석굴암석굴이다.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進峴洞) 891번지에 있다. 한국의 국보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문화재의 하나이다.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석굴암은 8세기 중엽인 통일신라 751년(경덕왕 10)에 대상(大相) 김대성(金大城)이 불국사(佛國寺)를 중창(重 )할 때, 왕명에 의하여 착공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그는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세우는 한편, 전세(前世)의 부모를 위해서는 석굴암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는 불교의 인과응보(因果應報) 설화를 기반으로 한 요소가 엿보이는 전설적인 유래이지만, 대상 김문량(金文亮)의 집에 환생(還生)하였다는 김대성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나타나듯이 경덕왕대에 중시(中侍)로 있었던 김문량이 실존인물임에 비추어, 그의 아들인 김대정(金大正)이 신라의 기명(記名) 방식에 의해 대성과 동일인물인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따라서 김대성은 왕명을 받들어 토함산의 정상을 사이에 두고 동서로 전개하여 불국사와 석굴암이라는 김씨 왕족(金氏王族)을 위한 2대 사찰의 건립에 마지막 생애를 다 바쳤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석굴암은 김대성 생전에 완공을 보지 못하여 그 조영사업은 국가가 마침내 완성시켰다고 한다. 이 점은 분명히 석굴암의 창건이 김대성이라는 개인의 원력(願力)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기보다는, 왕실을 비롯한 당시 신라인 모두가 염원한 거족적인 일대 불사(佛事)였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특히 석굴암의 방위(方位)가 김씨 왕족의 공동묘역(共同墓域)인 신라의 동해구(東海口)와 일치하고 있음을 보아도 더욱 뚜렷해진다. 동해구란, 삼국통일의 영주(英主)인 문무왕(文武王)의 해중릉(海中陵), 즉 대왕암(大王巖)이 자리잡고 있는 곳을 말한다. 문무왕은 욕진왜병(欲鎭倭兵)하고자 동해의 호국대룡(護國大龍)이 되어 이승에서까지 국가수호의 집념을 잃지 않겠다는 군왕이었다. 이 같은 호국사상은 동해구의 유적인 해중릉을 비롯하여 감은사(感恩寺)나 이견대(利見臺), 그리고 석굴암과 동해구와의 관계 등에서 같은 맥락으로 파악될 수 있다. 이 점은 석굴암의 창건주인 경덕왕의 선왕(先王), 즉 효성왕(孝成王) 역시 화장 후 산골(散骨)된 곳이 이 동해구여서, 석굴암 대불의 시각(視角)이 동남동 방향으로 동해구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과 연관성이 있다.
그것은 곧 신라인의 믿음과 호국정신의 요람으로서 국찰(國刹)도 같았던 석굴암의 존재를 뚜렷이 부각시켜 주는 예라고 하겠다. 이로써 석굴암이 지니고 있는 신앙적인 측면은 물론, 조형적인 면까지 신라미술의 최고 절정을 이룬 민족 최대의 석조미술품으로 꼽아 결코 손색이 없는 위치를 굳히게 되었다. 1995년 유네스코에 의해 고려대장경(팔만대장경), 종묘와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1. 구조와 특징
석굴암의 구조적 특색은 무엇보다 화강암(花崗岩)의 자연석을 다듬어 인공적으로 축조한 석굴사찰이라는 점이다. 즉, 인도·중국 등의 경우와 같이 천연의 암벽을 뚫고 조성한 천연석굴이 아니다. 이 같은 토목기술을 바탕으로 이룩된 석굴의 기본적인 평면구조는 전방후원(前方後圓)의 형태를 취하면서 네모진 공간의 전실(前室)과 원형의 주실(主室)로 나뉘어져 있다. 주실에는 단독의 원각(圓刻) 본존상(本尊像)을 비롯하여 보살과 제자상 등이 있으며, 전실에는 인왕상(仁王像)과 사천왕상(四天王像) 등을 부조(浮彫)하여 배치하였다. 이 전실의 기능은 곧 예배와 공양을 위한 장소이다.
천장은 궁륭형(穹 形)의 둥근 양식이며, 그 위에 연화문(蓮花紋)의 원판을 두어 천개(天蓋)로 삼고 있다. 조각상의 배치는 전실부터 시작하여 팔부신중(八部神衆) 8구, 인왕(仁王) 2구, 사천왕 4구, 천부(天部) 2구, 보살(菩薩) 3구, 나한(羅漢) 10구, 감불(龕佛) 8구와 본존여래좌상 1구가 있다. 이들 불상의 배치에 있어 두드러진 특징은 무엇보다 좌우가 대칭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고대 조형미술의 기본원칙과 같은 것이기도 하여서 석굴의 안정감을 한층 강조하는 구실도 하고 있다.
조각상 가운데 가장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본존여래좌상이다. 이 석굴 자체가 본존상을 봉안하기 위하여 조영되었던 만큼 그 의미가 매우 큰 불상이다. 예배의 주대상이 곧 이 본존상임은 물론, 중앙에 자리잡아 석굴의 내부공간을 구획한 신라 조각미술의 결정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뛰어난 작품이다. 본존상은 연화문이 새겨진 대좌(臺座) 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하고 있다. 광배(光背)는 석굴 후벽의 천장 밑에 둥근 연화판석(蓮花瓣石) 1매로 조성하였다. 이는 전실의 법당에서 본존상에 예배할 때, 동일시각 위에 놓여지는 치밀한 계산에 따라 처음부터 마련된 것이다.
본존상의 양식적 특징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 7세기 후반부터 유행하여 고려 전기에 이르기까지 계속된 여래좌상의 기본양식이다. 법의(法衣)는 오른쪽 어깨를 벗고 왼쪽 어깨에 가사(袈裟)를 걸친 우견편단(右肩遍袒) 양식을 보이고 있다. 또한 수인(手印)은 악마의 유혹을 물리친다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결(結)하고 있다. 머리 위에는 육계(肉 )를 표시했으며 머리는 나발(螺髮)이다. 상호(相好)는 원만한 모습에 자비(慈悲)를 지니고 있다.
신부(身部)는 매우 당당할 정도의 거구로서 장부의 상을 보이고 있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있으며 오른손은 무릎에 올려놓고 두 번째 손가락을 다음 손가락 위에 겹쳐 운동감을 주고 있다. 왼손은 두 발 위에 놓아 편안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 어떻든 본존상의 신앙적인 의미와 조형적인 가치가 훌륭히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부드러운 자태와 인자한 표정에서 고도의 조각술을 살필 수 있는데, 이는 궁극적으로 불교의 구원상(久遠像)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2. 불상의 명호
석굴암 본존상에서 중요한 부분은 명호이다. 지금까지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그것은 석가여래로 통칭되어 왔으나 이는 뚜렷한 오류임이 구명되었다. 즉, 19세기 말엽 중수 당시의 현판(懸板)에 미타굴(彌陀窟)이라는 기록이 있었다는 점과, 오늘날까지 전래되고 있는 편액(扁額)에도 수광전(壽光殿)이라는 표기를 볼 수 있는데, 이는 분명히 '무량수(無量壽)·무량광(無量光)'을 뜻하는 수광(壽光)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자료는 본존상의 명호가 석가여래 아닌 아미타불(阿彌陀佛)임을 말해주는 중요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또한 신라시대에 보편적이던 우견편단과 항마촉지인은 곧 아미타불이었다는 점도, 본존상의 명호를 밝히는 데 중요한 뒷받침이 된다. 이는 영주(榮州) 부석사(浮石寺)의 무량수전(無量壽殿)에 안치된 본존상이나 군위(軍威) 팔공산(八公山)의 석존 본존상 등 같은 양식의 불상에서도 분명히 입증되고 있다. 이와 같은 신라 불상의 양식계보로 비추어 볼 때 석굴암 본존불상의 명호는 7∼8세기 신라에서 유행했던 아미타불임이 분명한 것이다. 또한 김대성이 현세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세우고 전세 부모를 위해 석굴암을 세웠다는 창건 유래 역시 미타정토(彌陀淨土)를 표현한 것으로, 동해구의 유적과도 연관되고 있다.
이상의 여러 관점에서 석굴암 본존상의 명호는 마땅히 신라인의 정토신앙을 기반으로 한 아미타불이며, 왕족의 발원에 의해 이루어진 거국적인 불사(佛事)이었음을 확인케 한다.
2.불국사
대한불교조계종 11교구본사(敎區本寺)의 하나로 그 경내(境內)는 사적 및 명승 제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995년 세계문화유산목록에 등록되었다. 경내면적은 11만 7541평이다.
불국사 창건에 대하여는 두 가지 설이 전한다. 그 중 하나는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로, 여기에 보면 528년(신라 법흥왕 15)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부인(迎帝夫人)의 발원(發願)으로 불국사를 창건하여 574년 진흥왕(眞興王)의 어머니인 지소부인(只召夫人)이 절을 크게 중건하면서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과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주조하게 하여 봉안하였고, 670년(문무왕 10)에는 무설전(無說殿)을 새로 지어 《화엄경(華嚴經)》을 강설(講說)하였고, 그 후 751년(경덕왕 10)에 김대성(金大城)에 의하여 크게 개수되면서 탑과 석교 등도 만들었다고 하였다.
한편, 《불국사 사적(事蹟)》에서는 이보다 연대가 앞선 눌지왕(訥祗王) 때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하였고 경덕왕 때 재상(宰相) 김대성에 의하여 크게 3창()되었다고 하였다. 이상으로 미루어 처음에는 소규모로 창립되었던 불국사가 경덕왕 때의 재상 김대성에 의하여 대대적으로 확장된 것이 확실하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5 <대성효 2세부모(大城孝二世父母)>조에는 경덕왕 10년 김대성이 전세(前世)의 부모를 위하여 석굴암을,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창건하였다고 하였으며, 김대성이 이 공사를 착공하여 완공을 하지 못하고 사망하자 국가에 의하여 완성을 보았으니 30여 년의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 당시의 건물들은 대웅전 25칸, 다보탑 ·석가탑 ·청운교(靑雲橋) ·백운교(白雲橋), 극락전 12칸, 무설전(無說殿) 32칸, 비로전(毘盧殿) 18칸 등을 비롯하여 무려 80여 종의 건물(약 2,000칸)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불국사고금창기》에 있는 이 기록을 보면, 글씨도 일정하지 않고 크기도 달라 후대에 첨가된 것으로 추측되므로 여기에 나열된 건물들이 당시 한꺼번에 창건되었다고는 보기 힘들며 오히려 임진왜란 때까지 조금씩 건립된 것으로 추정함이 옳을 것 같다. 1593년 5월 임진왜란의 병화로 2,000여 칸의 대가람이 불에 타버리자 1604년(선조 37)경부터 복구와 중건이 시작되어 1805년(순조 5)까지 40여 차례에 걸쳐 국가적으로 또는 승려들에 의하여 부분적인 중수(重修)가 이루어졌으며 1805년 비로전 중수를 끝으로 그 이상의 기록은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조선 후기 국운(國運)의 쇠퇴와 더불어 사운(寺運)도 쇠퇴하여 많은 건물이 파손되고 도난당하는 비운을 겪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24년 대규모의 개수공사를 실시하여 다보탑의 해체보수, 법당의 중수 등을 실시하였는데 이때 다보탑 속에 있던 사리장치(舍利藏置)가 행방불명되었고 공사에 대한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8 ·15광복 후인 1966년 석가탑의 해체복원 등 부분적 보수가 있었다가 1969년 불국사 복원위원회가 구성되고 1970년 2월 공사에 착수, 1973년 6월 대역사(大役事)를 끝마쳤다. 이 공사로 유지(遣址)만 남아 있던 무설전 ·관음전 ·비로전 ·경루(經樓) ·회랑(廻廊) 등이 복원되었고, 대웅전 ·극락전 ·범영루(泛影樓) ·자하문(紫霞門) 등이 새롭게 단장되었다.
1. 사상적 배경
모든 사찰이 그러하듯이 여기에 다듬어진 돌들, 나무들, 그리고 적절히 꾸며진 공간(空間)들은 모두 사람의 정성이 깃든 곳이며, 그 정성은 우선 연약한 인간의 비원(悲願)에서 비롯된다. 자신의 구원(救援), 부모의 명복(冥福), 국가와 민족의 안녕, 부처의 가호(加護), 그 모든 것을 비는 절실한 염원(念願)이 이곳 돌 하나하나에 담겨 있다 하겠으며 이러한 정성으로 이룩된 불국사는 신라인이 그린 불국(佛國), 즉 이상적 피안(彼岸)의 세계 그 자체라 하겠다. 이 불국을 향한 염원은 대개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으니, 하나는 《법화경(法華經)》에 근거한 석가여래의 사바세계(娑婆世界) 불국이요, 다른 하나는 《무량수경》 또는 《아미타경》에 근거한 아마타불의 극락세계 불국이요, 또 하나는 《화엄경》에 근거한 비로자나불의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 불국이다. 이 셋은 각각 대웅전을 중심으로 하는 일곽(一廓)과 극락전을 중심으로 하는 일곽, 비로전으로 종합되는 전체의 구성을 통하여 그 특징적인 표현을 이루어 놓았다.
이곳에 정성을 바친 승려와 선현(先賢)들을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으나 주요한 인물만을 열거하면 불국사를 창건하였다고 하는 영제부인(법명 法流), 절을 중건한 지소부인, 헌강왕비(憲康王妃) 권씨(법명 秀圓), 의상의 제자 표훈(表訓), 불국사의 개조로 불리는 김대성, 탑을 조성한 백제의 예술가 아사달(阿斯達), 그에 대한 애정을 자비(慈悲)로 승화시킨 아내 아사녀(阿斯女), 지금은 불타 없어졌지만 광학장강실(光學藏講室) 벽에 석가상을 수놓았던 경문왕(景文王)의 공주로서 비구니가 되었던 원해(圓海) 등은 모두 이 절에 염원을 건 사람들이다. 고려시대에는 지율(持律)이 엄하기로 이름난 유가학승(瑜伽學僧) 해원(海圓)이 이곳에 살았으며, 조선시대에는 효령(孝寧) ·안평(安平) ·영응(永膺) 등의 대군(大君)과 세종 ·노산군(魯山君), 왕실의 대비(大妃) ·상궁(尙宮) 등의 지성(至誠)이 끊임없이 불국사로 쏠렸다.
2. 문화재
불국사 경내에는 다보탑(多寶塔, 국보 20), 3층석탑(국보 21), 연화교 ·칠보교(蓮華橋 ·七寶橋, 국보 22), 청운교 ·백운교(靑雲橋 ·白雲橋, 국보 23), 금동비로자나불좌상(金銅毘盧遮那佛坐像, 국보 26), 금동아미타여래좌상(金銅阿彌陀如來坐像, 국보 27), 사리탑(舍利塔, 보물 61) 기타 많은 문화재가 잔존한다.
3.팔만대장경
이 거대한 역사(役事)는 불교를 흥왕(興旺)시키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문화국으로서의 위력을 이웃나라에 선양하고, 불력(佛力)으로 국난을 타개함으로써 호국(護國)하겠다는 대발원(大發願)에서 이룩된 것이다.
이의 조조(雕造)는 오랜 시일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시행되었다. 제일 처음 조조된 것은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 또는 《초판고본대장경(初板古本大藏經)》이라고 하는데, 1011년(현종 2) 거란(契丹)의 내침을 계기로 시작되어 1087년(선종 4)까지 77년에 걸쳐 완성되었다. 이 초장경(약칭)은 대구 부인사(符仁寺)에 도감(都監)을 두고 송(宋)의 개보판(開寶板) ·거란본(契丹本)과 종래부터 전해 내려오던 국내본(國內本) 등을 저본(底本)으로 하여 《대반야경(大般若經)》(600권) 《화엄경(華嚴經)》 《금광명경(金光明經)》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등 6,000여 권의 경판(經板)을 만들었다.
그 후 문종(文宗)의 제4왕자인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이 송나라에서 각종 장소 3,000여 권을 모아 가지고 돌아와, 1073년(문종 27)부터 1090년(선종 7)까지 이 교장(敎藏)과 불서(佛書) 모은 것을 엮어 이를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이라 하고 이 목록에 의하여 차례대로 인간(印刊)한 것을 《속장경(續藏經)》이라고 한다. 그 후로도 흩어져 있는 불서를 모아 간행하였는데, 그 일은 그가 죽기 2년 전인 1099년(숙종 4)까지 계속되어, 모두 1,010부 4,740여 권이 인간되었다.
제1차로 완성된 이 정장(正藏)은 그 경판이 부인사에 이관, 소장되어 있었으나, 1232년(고종 19) 몽골군의 침입으로 소실되었으며, 《초조대장경》은 일본 교토[京都]의 난젠사[南禪寺]에 1,715권이 남아 있고 《속대장경》은 순천 송광사(松廣寺)와 고려대학교 도서관 및 일본 나라[奈良]의 도다이사[東大寺], 나고야[名古屋]의 신후쿠사[眞福寺] 등에 각각 흩어져서 겨우 47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몽골군의 침입으로 서울을 강화도로 옮긴 고려는, 호국(護國)을 위한 부인사의 《대장경》이 소실되자, 이 외침을 물리치기 위하여 다시 대장경을 조조하여 불력의 가호를 빌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대장도감(大藏都監)을 새로이 설치하고, 1236년(고종 23)부터 1251년(고종 38)까지 재조(再雕)대장경을 완성시켰다. 이것은 처음 강화도성(江華都城) 서문(西門) 밖의 대장경 판당(板堂)에 수장되어 있었는데 후에 강화의 선원사(禪源寺)로 옮겨졌고, 그 후 조선 초기에 서울의 서대문 밖 지천사(支天寺)로 옮겼다가 다시 합천(陜川) 해인사(海印寺)로 옮겨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
이 《재조대장경》은 구목록(舊目錄)의 천(天)∼동함(洞函)에 이르기까지 639함(函)에 엮어져 부수는 1,547부(部), 6,547권(卷)이며, 추가목록의 동(洞)∼무(務) 및 중복된 녹(祿)∼무함(務函) 24함에 들어있는 15부, 231권(혹은 236권)을 합하면, 모두 663함 1,562부, 6,778권(혹은 6,783권)이며, 경판의 수는 8만 1258판이 되고, 이것이 안팎으로 새겨져서 16만여 쪽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이것을 세칭 《팔만대장경》이라고 한다.
이 재조대장경은 초조대장경을 그대로 다시 조조한 것은 아니다. 그것을 저본으로 한 것은 사실이나, 송 ·거란본과도 대교(對校)하여 잘못된 것은 바로잡아 고쳤고, 빠진 것은 그것을 보완하였다. 그리고 초장경 때에는 없었던 《송조신역경(宋朝新譯經)》과도 대교(對校) ·고감(考勘)하였고, 《개원록(開元錄)》 《속정원록(續貞元錄)》 등의 불서목(佛書目)도 참고하여 본문을 다양하게 보완하였다. 이런 노력 끝에 이루어진 이 대장경은, 중국 북송(北宋)의 《개보칙판대장경(開寶勅版大藏經)》 이후 각종 《대장경》이 잇달아 조조되었지만, 그 어느 것보다도 본문이 충실하며 오탈(誤脫)이 적다는 것이, 국내외 학자들의 정평(定評)이다. 그래서 일본에서도 이것을 저본으로 하여 《축쇄장경(縮刷藏經)》을 만들어내었고, 잇달아 중국에서도 청나라 말에 《빈가정사장판(頻伽精舍藏板)》을 내놓았다.
《대장경》의 조조는 고려가 가장 어려웠던 국난의 시기에 초조판부터 헤아려 실로 240년이라는 장구한 시일을 통하여 이룩한 거국적 대사업으로, 대장경의 인쇄를 둘러싸고 경쟁하였던 송 ·거란에 대해 문화국으로서의 위신을 드높였을 뿐 아니라, 인쇄술과 출판술의 발전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4.종묘
1963년 1월 18일 사적 제125호로 지정되었다. 총면적 5만 6503평. 서울 종로구 훈정동에 있다. 원래는 정전(正殿)을 가리키며, 태묘(太廟)라고도 한다. 중국의 우(虞)나라에서 처음 시작된 종묘제도는 은(殷)·주(周) 시대에는 7대조까지 묘(廟)에 봉안하는 7묘제가 시행되다가 명(明)나라 때에는 9묘제로 바뀌었다. 한국의 경우 종묘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392년(고구려 고국양왕 9)에 보이며, 신라에서는 5묘제, 고려에서는 7묘제로 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7묘제도를 따르다가 중기 이후부터는 치적이 많은 왕은 7대가 지나도 정전에 그대로 모셨으며, 그 밖의 신주는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영녕전(永寧殿)으로 옮겨 모셨는데, 이를 조천(遷)이라고 하였다.
종묘의 정전에는 19실(室)에 19위의 왕과 30위의 왕후 신주를 모셨으며, 영녕전에는 정전에서 조천된 15위의 왕과 17위의 왕후 및 의민황태자(懿愍皇太子)의 신주를 모셨다. 신주의 봉안 순서는 정전의 경우 서쪽을 상(上)으로 하고 제1실에 태조가 봉안되어 있고, 영녕전에는 추존조(追尊祖)인 4왕(목조·익조·탁조·환조)을 정중(正中)에 모시고 정전과 마찬가지로 서쪽을 상으로 하여 차례대로 모셨다. 이를 소목제도(昭穆制度)라고 한다.
종묘의 조영(造營)은 1394년(태조 3) 12월 태조가 한양(漢陽)으로 천도할 때 중국의 제도를 본떠 궁궐의 동쪽에 영건(營建)을 시작하여 다음해 9월에 1차 완공하였다. 그 뒤 1546년(명종 1)까지 계속되었으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8년(광해군 즉위년)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정전의 남문을 들어서면 동쪽으로 문의 동쪽으로 공신당(功臣堂), 서쪽으로 칠사당(七祀堂)이 있고, 곧바로 정전에 이른다. 정전의 서문을 나서면 영녕전의 동문과 이어지고, 영녕전에도 정전과 같이 서문·남문·동문이 있으며, 영녕전의 북동쪽에 제기고(祭器庫)가 있다. 정전의 북동쪽에는 전사청(典祀廳)이 있고, 그 주위에 제정(祭井)·판위대(版位臺)·수복방(守僕房)이 있으며, 정전 남동쪽에 재실(齋室)이 있다. 1995년 유네스코에 의해 팔만대장경, 석굴암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5.창덕궁
1963년 1월 18일 사적 제122호로 지정되었다. 1405년(태종 5) 완공되었으며, 면적 43만 4877㎡이다. 태종(太宗)이 즉위한 후 1404년(태종 4) 한성(漢城)의 향교동(鄕校洞)에 이궁(離宮)을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 완공하고 창덕궁이라 명명하였다. 그 후 계속 인정전(仁政殿)·선정전(宣政殿)·소덕전(昭德殿)·빈경당(賓慶堂)·여일전(麗日殿)·정월전(淨月殿)·옥화당(玉華堂) 등 많은 전당을 건립하였는데, 1412년 돈화문(敦化門)을 건립하여 궁궐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 궁전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는데, 1607년(선조 40)에 그 복구가 시작되어 1610년(광해군 2)에 중건이 거의 끝났으나, 1623년 3월에 인정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이 실화로 불탔으므로 1647년(인조 25)에야 그 복구가 완료되었다. 그 후에도 크고 작은 화재가 여러 차례 있었는데, 특히 1917년 대조전(大造殿)을 중심으로 내전 일곽이 소실되어 그 복구를 위하여 경복궁 내의 교태전(交泰殿)을 비롯하여 강녕전 동·서 행각 등의 많은 건물이 해체 전용되었다.
창덕궁은 많은 재앙을 입으면서도 여러 건물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왔는데, 1912년부터는 후원인 금원(禁苑)과 아울러 인정전을 관람할 수 있게 하였고, 8·15광복 후에도 창덕궁과 금원을 공개하고 있다. 창덕궁은 금원을 비롯하여 다른 부속건물이 비교적 원형으로 남아 있어 가장 중요한 고궁의 하나이다.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6.수원화성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3호로 지정되었다. 둘레 5,743m, 길이 5,520m, 높이 4.9m~6.2m이며, 면적은 18만 8048㎡이다. 수원성은 단순히 토축(土築)된 읍성(邑城)이었으나, 조선 정조 때 성곽을 새로이 축조함으로써 이후로는 화성(華城)이라 하였다. 성내에 어목헌지(禦牧軒池)·관청전지(官廳前池)·문루전지(門樓前池)·객사후지(客舍後池) 등의 못이 있었다.
화성이라 할 때는 그 안에 장안문(長安門)·팔달문(八達門)·화홍문(華虹門)·장악당(長樂堂), 북동(北東)·북서포루(北西砲樓), 봉수당(奉壽堂)·낙남헌(洛南軒)·서장대(西將臺)·방화수유정(訪花隨柳亭)·강무당(講武堂)·북옹성(北甕城)·북포루(北鋪樓)·남암문(南暗門)·적대(敵臺)·남옹성(南甕城)·만석거(萬石渠)·남장대(南將臺)·영화정(迎華亭)·창룡문(蒼龍門)·남공심돈(南空心墩)·화서문(華西門)·남수문(南水門)·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북암문(北暗門)·동북노대(東北弩臺)·서포루(西砲樓) 등을 갖추게 되었다.
정약용(丁若鏞)의 성설(城說)을 설계지침으로 하고, 채제공(蔡濟恭)을 중심으로 조심태(趙心泰) 등의 진력으로 이룬, 뛰어난 과학적인 구조물이다. 돌과 벽돌을 혼용한 과감한 방법, 거중기(擧重機) 등의 기계를 크게 활용하고 용재(用材)를 규격화한 점, 화포를 주무기로 하는 공용화기 사용의 방어구조 등은 다른 성곽에서 볼 수 없는 새로운 것이다.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7.훈민정음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었다. 목판본으로 2권 2책이다.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 소장에 소장되어 있다. 책으로서의 훈민정음에는 "나라말씀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 서로 통하지 않으니…"라고 한 《훈민정음예의본》과, 글자를 지은 뜻과 사용법 등을 풀이한 《훈민정음해례본》이 있다.
전자에 대해서는 《세종실록》과 《월인석보(月印釋譜)》 첫권에 같은 내용이 실려 있어 널리 알려졌으나, 후자에 대하여는 1940년 발견될 때까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한글의 형체에 대하여 고대글자 모방설, 고전(古篆) 기원설, 범자(梵字) 기원설, 몽골문자 기원설, 심지어는 창살 모양의 기원설까지 나올 정도로 구구한 억설이 있었으나, 이 책의 출현으로 모두 일소되고 발음기관 상형설(象形說)이 제자원리(制字原理)였음이 밝혀졌다.
후자는 예의(例義)·해례(解例)·정인지 서문 등 3부분 33장으로 되었는데, 예의는 세종이 직접 지었고, 해례는 정인지(鄭麟趾)·박팽년(朴彭年)· 신숙주(申叔舟)·성삼문(成三問)·최항(崔恒)·강희안(姜希顔)·이개(李塏)· 이선로(李善老) 등 집현전(集賢殿) 학사가 집필하였다. 정인지가 대표로 쓴 서문에는 1446년 9월 상순으로 발간일을 명시하고 있어, 후일 한글날 제정의 바탕이 되었다.
1940년까지 경상북도 안동군 와룡면(臥龍面) 주하동(周下洞) 이한걸가(李漢杰家)에 소장되었던 해례본은 그의 선조 이천(李 )이 여진을 정벌한 공으로 세종으로부터 직접 받은 것이었다. 이 책이 발견되어 간송미술관에 소장되기까지에는 김태준(金台俊)의 숨은 노력이 있었다. 발견 당시 예의본의 앞부분 두 장이 낙장되어 있었던 것을 이한걸의 셋째 아들 용준(容準)의 글씨로 보완하였다. 용준은 안평대군체(安平大君體)에 조예가 깊었으며, 선전(鮮展)에 입선한 서예가였다.
낙장된 이유는 연산군의 언문책을 가진 자를 처벌하는 언문정책 때문에 부득이 앞의 두 장을 찢어내고 보관하였다고 하며, 이를 입수한 전형필은 6·25전쟁 때 이 한 권만을 오동상자에 넣고 피란을 떠났으며, 잘 때에도 베개 삼아 베고 잤다는 일화가 전한다.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8.조선왕조실록
1973년 12월 31일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었다. 활자본(필사본 일부 포함)으로 1,893권 888책이다. 1413년(태종 13)에 《태조실록》이 처음 편찬되고, 25대 《철종실록》은 1865년(고종 2)에 완성되었다. 《실록》의 편찬은 대개 전왕이 죽은 후 다음 왕의 즉위 초기에 이루어지는데, 춘추관 내에 임시로 설치된 실록청(또는 撰修廳·일기청)에서 담당하였다.
실록청의 총재관(摠裁官)은 재상이 맡았으며, 대제학 등 문필이 뛰어난 인물이 도청(都廳) 및 각방 당상(各房堂上)으로 임명되었다. 시정기(時政記)와 사관(史官)이 개인적으로 작성한 사초(史草), 각사 등록(謄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가 실록편찬의 기본자료였고, 문집·일기·야사류 등도 이용되었으며, 후기에는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과 《일성록》도 사용되었다.
실록편찬 작성과정은 초초(初草)·중초(中草)·정초(正草)의 3단계로 나누어졌다. 초초는 각방의 당상과 낭청(郎廳)이 자료를 분류하고 중요자료를 뽑아 작성한 초안이며, 중초는 도청에서 그 내용을 수정·보완한 것이고, 정초는 총재관과 도청 당상이 중초를 교열하고 최종적으로 수정·첨삭을 하여 완성한 것이다.
정초본을 인쇄하여 사고(史庫)에 봉안하고 편찬에 이용된 시정기·사초 및 초·중·정초는 모두 세초(洗草:없애는 것)하였는데, 이는 앞으로의 필화를 막자는 것이었다. 초기에는 실록청의 기사관이 편찬 작업 중 알게 된 사실을 누설하여 처벌받은 일도 있었고, 사초에 사관의 이름을 명기하도록 하여 문제가 되었던 적도 있었으나, 대체로 편찬과정의 공정성과 익명성은 보장되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사고에 수장시킨 《실록》은 충해와 습기에 의한 오손을 막기 위하여 정기적으로 포쇄(曝 )하도록 하였고 이상 유무를 확인하기 위하여 형지안(形止案)을 작성하였다. 실록은 선왕 및 신하들의 행적과 정책의 득실을 기록한 것이었으므로 국가의 제례나 사신 접대 등 주요 행사가 있을 때 전례(前例)를 참고하기 위해 사관이 내용 일부를 확인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누구의 열람도 허용되지 않았다.
조선 전기에는 춘추관과 충주·전주·성주 등 4곳에 사고(史庫)가 있었는데 임진왜란으로 전주 사고를 제외한 모든 사고가 불에 타버렸으며, 1603년(선조 36)에서 1606년까지 전주 사고본 실록을 근거로 태조에서 명종까지 13대에 걸친 《실록》을 다시 4부씩 인쇄하였다. 춘추관·묘향산·태백산·오대산·강화도 마리산에 새로 사고를 설치하여 《실록》을 보관하였는데, 춘추관실록은 이괄(李适)의 난(1624)으로 모두 소실되었다. 마리산 사고의 실록은 1636년 병자호란의 피해를 입어 현종 때 보수하여 1678년(숙종 4)에 가까운 정족산(鼎足山) 사고로 옮겨졌으며, 묘향산 사고본은 1633년에 전라도 적상산(赤裳山) 사고로 옮겨졌다.
이후 각 사고의 모든 《실록》은 조선 말까지 완전히 보관되었는데, 일제강점기에 들어 다시 큰 변화를 겪었다. 일제는 정족산·태백산 사고의 실록을 조선총독부로 이관하였다가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학)으로 이장하였고, 적상산 사고본은 장서각으로 옮겼으며, 오대산 사고본은 도쿄제국대학으로 반출하였는데 1923년의 간토대지진 때 대부분 불타 없어졌다.
장서각 소장의 적상산본은 1950년 6·25전쟁 때 북한으로 옮겨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태백산본은 서울대학 규장각에 소장되었다가 정부기록보존소에 이관되었고, 정족산본은 서울대학 규장각에 보관 중이다. 1929~1932년 경성제국대학에서 태백산본을 1/4축쇄판(縮刷版) 888책 한장본(漢裝本)으로 30절(折)을 영인(影印) 출간하였으며, 1958년에는 역시 태백산본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다시 1/8축쇄판(A4판) 48책 양장본으로 간행, 보급하였다.
북한에서는 1980년대에 조선왕조실록 번역을 완료하였으며, 남한에서도 1968년부터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민족문화추진회에서는 1972년부터 분담하여 국역작업을 시작하여 1994년 4월에 마무리지었다. 조선왕조실록은 왕실 중심의 서술방식과 명분론적 시각, 당론(黨論)에 의한 곡필(曲筆)의 문제 등이 한계로 지적될 수 있으나 조선시대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다방면에 걸친 역사적 사실을 망라하여 수록하고 있는, 세계적으로 귀중한 문화유산임은 물론, 조선시대를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기본적인 사료이다.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9.경복궁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17호로 지정되었다.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조선을 세운 이성계(李成桂)와 그 지지자들은 고려의 서울인 개경(開京)으로부터 도읍을 한양성(漢陽城)으로 옮겨 신도(新都) 경영에 착수하는 동시에 궁궐의 조성도 착수하였다. 1394년(태조 3) 9월 신궐조성도감(新闕造成都監)을 두고 청성백(靑城伯) 심덕부(沈德符), 좌복야 김주(金湊), 전정당문학 이염(李恬), 중추원학사 이직(李稷) 등을 판사에 임명하여 실무를 담당, 해산(亥山:北岳山)을 주산(主山)으로 삼고 임좌병향(壬坐丙向:北北西에 앉아 南南東을 바라다봄)의 터를 잡았다.
원래 태조는 고려시대 남경(南京)의 이궁(離宮:宮井洞 일대) 터를 마음에 두고 있었으나 새로운 왕조의 뻗어나는 기세를 수용하기에는 너무 좁은 터전이라 하여 그 남쪽에 따로 자리잡았던 것이다. 10월에 한양으로 도읍을 일단 옮긴 태조는 수도 건설에 박차를 가하여, 12월 3일에 궁궐과 종묘를 짓겠다고 산천신(山川神)에게 고사하고, 이튿날 개기(開基)하여 주야로 작업을 진행, 1395년 9월에 낙성을 보게 되었다. 명칭은 《시경》의 ‘군자만년 개이경복(君子萬年 介爾景福)’이란 글귀에서 따서 경복궁이라 하였다. 궁내에 준성된 전각은 총 390여 칸이었다.
1. 태조때
경복궁의 전체적인 모습은 남북이 길고 동서가 짧은 직사각형의 윤곽으로 둘러싸여 있고 정남에 광화문, 정북에 신무문(神武門), 동에 건춘문(建春門), 서에 영추문(迎秋門)을 세웠다. 근정전(勤政殿)은 수조지소(受朝之所)로서 경복궁의 정전(正殿)으로 남북이 길고 동서축이 짧은 직사각형 터전에 조성하였으며, 보평청(報平廳)의 남쪽에 위치한다.
이 건물은 상하의 월대(越臺) 위에 세워졌는데, 월대는 입심(入深)이 50척, 너비가 112척 5촌의 규모이고, 동 ·서 ·북에 돌계단을 설치하였다. 각각 그 너비가 15척, 상층으로의 돌계단 높이 4척, 층층다리 5급, 같은 규모의 돌계단 세 쪽이 남쪽에 큼직하게 설치되었다. 아래층 월대의 계단도 너비는 15척, 높이 4척이고 딛는 보석(步石)의 수는 5단이다.
근정전이 있는 직사각형 터전 윤곽과 그 시설에 여러 부속 건물이 있어 북행랑(北行廊) 29칸, 천랑(穿廊) 5칸, 정전(근정전)의 북쪽으로 수라간 4칸, 동루(東樓) 3칸(상하층의 다락집)이 있고, 그 밖에 북행랑 19칸이 있어 정전의 북행랑에 이어져 있었다. 그 동쪽 모서리로부터 동랑(東廊)이 이어지고, 그 남쪽에 9칸이 있어 근정문의 동각루(東角樓)와 연결되어 서루(西樓) 3칸(상하층의 다락집)이 되었다.
서쪽에도 같은 규모의 행랑이 만들어져 서각루(西角樓)에 이르며 여기에서 남행랑이 구성되는데, 그 중앙에는 근정문 3칸이 설치되고 근정문 좌우행랑 각 11칸이 남행랑이 되었다. 또 동서 각루 각 2칸씩이 배치되었으며, 근정문 남쪽에 3칸의 오문(午門)이 있고, 좌우의 각 17칸의 행랑, 수각(水閣) 3칸, 그 남쪽에 명당수가 서쪽에서 동으로 흐르고 있으며 돌다리가 있었다.
오문 좌우의 행랑은 동서로 꺾이어 근정전 남행랑에 연결되었으며, 그 규모는 각 17칸씩이고 동서 각루가 2칸, 행랑에 각각 일화문(日華門:東門)과 월화문(月華門:西門)이 열려 있다. 근정전 북쪽에 임금이 평상시 집무하는 보평청(報平廳)이 있어 이곳을 시사지소(視事支所)라 하는데, 그 규모는 5칸이다. 동서에 이방(耳房)이 각 1칸씩 딸렸고, 남천랑(南穿廊) 7칸, 동천랑 15칸, 서행랑 5칸, 동행랑 15칸이 윤곽에 설치되었다.
왕의 침전은 강녕전(康寧殿)이며 이 구역은 보평청 북쪽에 구획되었다. 강녕전은 7칸, 동서의 이방(耳房)이 각 2칸씩, 북천랑 7칸, 북행랑 25칸, 그 동쪽 귀퉁이에는 3칸이 계속 되고 서쪽에도 이와 같은 3칸이 있으며 남천랑 5칸이 구조되어 있었다. 강녕전 남쪽에 3칸의 연생전(延生殿)과 강녕전 남천랑에 이어지는 천랑 7칸과 동행랑에 이어지는 천랑 5칸이 있고, 또 이웃에 경성전(慶成殿) 3칸과 그 둘레의 천랑 7칸과 5칸이 이어져 있었다.
그 밖에 등촉인자방(燈燭引者房) ·상의원(尙衣院) ·양전사(兩殿司) ·옹방(甕房) ·상서사(尙書司) ·승지방(承旨房) ·내시다방(內侍茶房) ·경흥부(敬興府) ·중추원(中樞院) ·삼군부(三軍府) 등의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2. 창건이후
경복궁 공사는 1398년(태조 7) 1월에 궁성을 쌓을 터전을 간심(看審)하기 시작하여 2월에 책임자로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박위(朴)가 임명되고 문무 각품(文武各品)에게 쌓을 돌을 바치게 하여 진척되었다. 6월에 궁성 남문(光化門)을 착공하고, 7월에 경기좌도와 충청도 군인 3,700명으로 공사를 진행시켰다. 8월에 무인난(戊寅亂)이 벌어지고 태조가 정종에게 양위하자 공사는 모두 중단되었다가 99년(정종 1)에 재개하여 완성하였고, 1426년(세종 8) 10월에야 각 문과 다리의 이름이 정하여졌다.
근정전 앞 제1문이 홍례(弘禮), 제2문이 광화(光化), 근정전의 동쪽 협문(夾門)이 일화(日華), 서쪽이 월화(月華), 궁성 동쪽이 건춘, 서편이 영추, 근정전 앞 돌다리를 영제(永濟)라 하였다. 정종이 개성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면서 경복궁은 공궐(空闕)이 되고 집들은 창고 등으로 이용되어, 1405년(태종 5)부터 13년까지 근정전 서랑(西廊)이 사기(史記)를 장치(藏置)하는 사고(史庫)로 이용되고, 1406년부터 12년까지는 군량미의 비축창고로 이용되었다.
태종은 12년 4월 경회루(慶會樓)를 개조하고, 태조 때의 궁궐 북서쪽에 있는 소규모의 건물을 궁궐 서쪽으로 옮겨 지었는데, 연못도 새로 파고 누각도 새로 지었다. 태종은 서울에 다시 도읍을 옮기면서 창덕궁(昌德宮)을 지어 머물렀기 때문에 경복궁은 계속 빈 궁궐로 남아 있었으나, 명나라 사신의 접대 등은 경복궁에서 하였고 그들과의 연회를 위하여 경회루의 확장이 절실하여졌다. 이 작업은 여러 신하들의 반대가 있었고, 물 가운데 큰 집을 짓는 일의 기술상의 어려움을 말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태종은 박자청(朴子靑)으로 하여금 완성하도록 하였다.
한편 세종은 경복궁에 주로 머물렀다. 따라서 경복궁 여러 건물의 보수가 시행되어 29년에 사정전(思政殿:태조 때의 報平廳)과 경회루의 중수공사가 착공되어 사정전은 4월에 중수공사가 완료되었으나 경회루는 계속되었다. 이 때의 작업은 《성종실록》에 세종시소창(世宗時所創)이라 할 만큼 대규모이고 완벽한 시공이 진척되었다.
30년에 광화문의 개구(改構)의 역사(役事)가 시작되어, 31년 4월에 완성되었으나 전혀 새롭게 지었던 모양이다. 또 32년 문소전(文昭殿)을 새롭게 지었는데, 이는 정월에 착공된 것으로 선공감 제조 안순(安純) ·홍리(洪理)와 예조판서 신상(申商), 지리(地理) 이양달(李陽達)이 원묘(原廟)의 터전을 궁의 북쪽에 잡아 공역을 일으켰다. 원묘 문소전(원래의 仁昭殿)과 광효전(廣孝殿)이 따로 있었던 것을 모아 한곳에 통합 경영하기 위한 공사였는데, 후전(後殿) 5칸, 정전(正殿) 3칸(四面에 補)의 규모로 그 해 11월에 완공되었다.
이듬해인 33년에 강녕전(康寧般)이 좁고 어두워 임금 처소로 마땅하지 못하다고 하여 고쳐 짓기 시작하여 9월에 준공하였다. 또한 이 해에 궁성 북쪽에 있다가 없어진 북문을 다시 짓는 작업을 진행하여 신무문(神武門)을 다시 두었다.
37년 7월에 과학적 구조물인 신루(新漏)가 제작 완료되어 사용하게 되었으므로 경회루 남쪽에 보루각(報漏閣)을 준공시켰고, 또 대호군 장영실(蔣英實)이 고심하여 완성시킨 자격루(自擊漏)를 설치하기 위하여 38년 1월에 천추전(千秋殿) 서쪽에 흠경각(欽敬閣)을 지어 완성하였다. 그 해 5월에는 정선방(貞善坊) 종부시(宗簿寺) 서쪽 언덕 위에 있던 선원전(璿源殿)을 문소전(文昭殿)의 북동쪽으로 옮겨 짓는 일이 완료되었으며, 56년(세조 2) 3월 후원(後苑)에 취로정(翠露亭)을 짓고 연(蓮)을 파종하였는데, 총책임자는 금천군(錦川君) 박강(朴薑)이었다.
61년 11월에 수리도감(修理都監)을 열고 영천부원군(鈴川府院君) 윤사로(尹師路)를 도제조로 삼아 세자궁(世子宮) 짓는 일에 착수하여 이듬해 12월에 준공하였으며, 73년(성종 4) 7월경 경회루 수리공사가 시작되어 이듬해 3월에 완료되었고, 이 때에 근정전 ·홍례문 ·광화문에 청와(靑瓦)를 덮고자 하는 논의가 대두되었으나 반대에 부딪혀 중지되었다.
74년 8월 경회루 공사가 다시 시작되니 수리만으로는 흡족하지 못하여 헐어내고 다시 짓는 공사를 시작, 75년 5월 준공하였다. 이 때 돌기둥에 용을 조각하여 화려하게 치장하였다. 이 해 10월에는 덕종(德宗)으로 추존된 분을 위하여 옛 세자궁을 수리하여 연은전(延恩殿)을 설치하였으며, 1505년(연산군 11) 11월에 경복궁의 보루각(報漏閣)을 창덕궁으로 옮기고 간의대(簡儀臺)도 철거하였다.
이듬해 연산군은 경회루 못에 만수산(萬壽山)을 만들고 못 안에 수십 척의 배를 띄우고 흥청(興淸) ·운평(運平) 등과 더불어 즐겼다. 그러나 43년(중종 38) 정월에 큰 불이 나서 동궁이 불탔고 그 복구가 아직 착수되기도 전에 경복궁에 다시 불이 나니 53년(명종 8) 9월이었다. 이로써 1394년에 창건한 강녕전 ·사정전과 세종 때의 흠경각(欽敬閣)이 모두 회신되고 말았다. 곧 복구공사에 착수, 동궁까지 복구가 시작되어 이듬해 8월에 흠경각이 중건되고, 9월경에는 대내(大內)의 모든 전각들을 복구하였다. 선수도감(繕修都監)에서 공사를 맡았고, 제조는 영의정 심연원(沈連源) 등이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년 4월에 왜군이 쳐들어와 13일에 부산성이 함락되더니 29일엔 충주에서 패하였다는 소식이 서울에 전하여지고 30일에 임금은 창황히 파천의 길에 올랐는데, 임금이 성문을 빠져나가자 뒤미처 난민들이 불을 지르기 시작하여 도성은 불바다가 되고 경복궁도 모두 불타버려, 태조 이래의 경복궁은 이때 터전만 남긴 채 소멸되고 말았다.
3. 복구논의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터전만 남긴 채 소실되자 1606년 11월에 경복궁 복구가 논의되었으나 실천되지 못하였고, 1616년 말과 1617년에도 중건이 논의되기는 하였으나 역시 중지되었다. 현종(顯宗)도 재건을 염원하긴 하였으나 공역에까지 이르지는 못하였으며, 단지 1669년(현종 10)에 신덕왕후(神德王后) 부묘 때 그 제주소(題主所)를 강녕전 터에 장전(帳殿)을 설치하여 봉안한 바 있을 뿐이다.
숙종도 황폐한 경복궁에 가서 살피면서 감회에 젖었으며, 영조도 또한 그 복구를 생각하고 1772년(영조 48)에는 문소전 터에 비를 세우고 비각을 건립하였으나, 끝내 경복궁의 중건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4. 재건
경복궁의 중건은 1865년(고종 2) 4월 2일 대왕대비인 신정왕후가 대원군의 건의를 받아들임으로써 이루어졌다. 영건도감을 설치하고 도제조에 조두순(趙斗淳)·김병학(金炳學)을 임명하고 제조로 흥인군(興寅君) 이최응(李最應)·김병기(金炳冀)·김병국(金炳國)·이돈영(李敦榮)·박규수(朴珪壽)·이재원(李載元)·임태영(任泰瑛)·이경하(李景夏)·허계(許棨)·이현직(李顯稷)·이주철(李周喆)이 차하(差下)되었다.
4월 4일에 개기(開基)를 위한 영건고유제(營建告由祭)를 거행하고 4월 8일에 대왕대비는 10만 냥을 중건역비로 하사하였으며, 4월 12일에 경복궁을 중건할 터전의 친심(親審)이 있었다. 이에 앞서 4월 8일에 궁성을 쌓고 5월 2일에는 광화문을 비롯한 궁성문의 상량 날짜를 정하였다.
담장과 문의 석축부분은 임진왜란 때 재화를 면하고 남아 있어서 이것들을 헐고 다시 지어야 하였다. 중건공사에 소용되는 경비를 원납전(願納錢)이라 하여 거두었는데, 4월 말까지 1차로 수납된 것은 일반인이 바친 75만 7086냥 4전 9푼과 왕족들이 기부한 7만 6450냥이었다.
이후 이 기부금의 징수는 계속되었으며, 6월 20일에 강녕전·연생전의 정초(定礎), 10월 9일에 입주(入柱), 10월 10일에 상량하였다. 10월 24일에는 함원전(含元殿)·인지당(麟趾堂)이 입주되고, 11월 16일에는 상량이 있었으며 12월 24일에는 천추전(千秋殿)의 정초가 있었다.
이듬해 3월 6일에는 큰 사건이 일어났는데, 5일 밤 이경(二更)에 동십자각 근처 훈국화사(訓局畵師)의 가가(假家)에서 불이 나서 목수간 800여 칸과 다듬은 재목들이 타버리고 말았다. 1867년 2월 10일에도 불이 나서 재목을 불태웠다. 그래도 공사는 진척되어 3월 27일에 경회루의 상량이 준비되고 5월 2일에는 수정전(修政殿) 상량문의 제술관(製述官)을 선정하였다.
8월 18일에는 전각과 문의 이름들을 지었고, 11월 8일에는 완성된 건물의 당호(堂號)를 지었다. 11월 14일에 백관들이 경복궁 출입시 승지(承旨)는 영추문을, 문관은 정문인 광화문의 홍예문 중 동쪽문을 이용하게 하고 무관은 서쪽으로 드나들도록 제도화하였다.
1868년(고종 5) 6월 10일 경복궁 재건공사가 사실상 끝난 단계에 이르렀으므로 임금의 이어(移御)에 대비하여 병조에서 입직(入直)을 준비하였고, 7월 2일에 드디어 임금은 대왕대비를 모시고 새 궁궐에 이사하니 비로소 경복궁은 정궐(正闕)로서의 위엄을 다시 갖추게 되었다.
1869년 9월 16일에 경복궁 재건을 위하여 설치되었던 영건도감이 철폐되었는데, 이 때에 집계한 원납전 등의 내용은 내하전(內下錢) 11만 냥, 단목(丹木) 5,000근, 백반 5,000근, 왕족이 바친 돈이 34만 913냥 6전, 일반인들의 원납전 727만 7780냥 4전 3푼과 백미 824석이었다. 준공된 전각은 합계 5,792칸 반이었다.
5. 중건이후
경복궁이 중건된 이후 1872년 4월 7일 신무문(神武門)을 개건하고 1873년 봄부터 건청궁(乾淸宮)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창덕궁의 주합루(宙合樓)와 서향각(書香閣)을 본떠 어진(御眞)을 봉안하기 위한 시설이다.
그해 12월 10일 사시에 순희당(純熙堂)에서 불이 나서 인지당·자경전·복안당·자미당·교태전·복도·행각 등 합계 364칸 반이 연소되는 대화가 있었다. 이듬해 정월부터 복구공사가 착공되었으나 공비의 부족으로 지지부진, 1875년 3월이 되어서야 공사가 본격화하여 1876년 4월에 대체적인 복구공사가 완료되었다. 그러나 그해 11월 4일에 또 불이 나서 먼저보다 더 큰 피해를 입었으니, 침전 일각 830여 칸이 소진되고 말았다. 이 재해의 복구는 상당히 늦어져서 1888년 2월 25일에야 교태전·강녕전·인지당·자미당의 상량문의 제술(製述)이 있었다. 1890년 6월에 경성전(慶成殿)의 화재가 있었으나 곧 진화되었다.
1896년(건양 1) 2월 16일 경복궁의 수리공사에 착공하고 97년 5월 20일에는 경복궁의 만화당(萬和堂)을 경운궁(慶運宮)에 이건하였다. 1899년 9월 21일에 영보당(永保堂)에 불이 나 28칸이 소진되었다. 그후 고종이 주로 경운궁에 시어하게 되면서 경복궁은 소강상태로 들어가는데, 이것으로 경복궁의 공역은 일단 마무리되고 또 나라가 멸망함으로써 궁궐로서의 수명을 다하고 말았다.
1917년에 창덕궁 대조전(大造殿)을 비롯한 대내 일곽이 불에 탔다. 이것의 복구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일본인들은 경복궁의 교태전(交泰殿) 일곽을 헐어다 재건에 썼다. 이때에 철거된 전각은 교태전·강녕전·연길당·경성전·연성전·인지당·흠경각·함원전·만경전·홍복전 등 400여 칸에 달하였다.
그후 일인들은 광화문을 비롯하여 여러 건물들을 철거하거나 이건하였고, 조선총독부 청사를 비롯하여 공진회 건물 등 낯선 건축물을 지었다. 또 각 지역의 석탑 등의 석조물을 반입하여 요소에 배열하여 일반에게 공개하도록 하였다.
8·15광복 이후에는 국립중앙박물관이 경복궁 안의 북동쪽에 건축되었으며, 6·25전쟁 때 문루가 불탔던 광화문육축의 석대를 궁 남쪽에 옮겨 시멘트로 문루를 세웠다.
1996년에는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였으며, 2009년까지 총 1,789억 원이 투입되어 경복궁 복원사업이 이루어진다. 1995년에는 강녕전이, 1999년에는 자선당 등이 복원되었으며, 2001년 10월에는 흥례문(홍례문)이 복원되어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10.판소리
1964년 12월 24일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었다. 이는 곧 조선 중기 이후 남도지방 특유의 곡조를 토대로 발달한, 광대 한 명이 고수(鼓手) 한 명의 장단에 맞추어 일정한 내용을 육성(肉聲)과 몸짓을 곁들여 창극조(唱劇調)로 두서너 시간에 걸쳐 부르는 민속예술형태의 한 갈래이다. 남도의 향토적인 선율을 토대로 진양조·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휘모리·엇모리·엇중모리 등 일곱 가지 장단에 따라 변화시키고, 또 아니리(白:말)와 발림(科:몸짓)으로 극적인 효과를 높이는데, 이 때의 대사만을 가리켜 극가(劇歌)라고 한다.
판소리의 발생기는 여러 평민문화가 발흥하기 시작한 조선 숙종(肅宗) 무렵으로, 《춘향가》 《심청가》 《흥부가(박타령)》 《토별가(수궁가:토끼타령)》 《적벽가(赤壁歌:華容道)》 《장끼타령》 《변강쇠타령:가루지기타령:橫負歌》 《무숙이타령(曰者타령)》 《배비장타령(裵將打令)》 《강릉매화타령(江陵梅花打令)》 《숙영낭자전(淑英娘子傳:가짜神仙타령)》 《옹고집타령(雍固執打令)》 등 무당의 12굿처럼 12마당으로 이루어졌다.
가곡의 창법이 보급되어 유행함에 따라 영·정조(英正祖) 연간에는 하한담(河漢潭)·최선달(崔先達)·우춘대(禹春大) 등 명창이 나와 판소리의 기틀을 잡았고, 순조(純祖) 때와 그 이후에는 권삼득(權三得)을 비롯한 고수관(高壽寬)·송흥록(宋興祿)·염계달(廉季達)·모흥갑(牟興甲)·신만엽(申萬葉)·박유전(朴裕全)·김제철(金濟哲) 등 이른바 판소리 8명창이 나와 조와 장단을 확대시킴으로써 그 음악성을 충실히 발전시켜 판소리를 크게 번성하게 하였다.
이어 조선 후기에는 동리(桐里) 신재효(申在孝)가 그 때까지의 체계를 가다듬어 광대소리 12마당을 《춘향가》 《심청가》 《박타령》 《가루지기타령》 《토끼타령》 《적벽가》 등 6마당으로 개산(改刪)하고 그 대문과 어구도 실감나도록 고쳐 이후로 광대들은 이 극본에 따라 부르게 되었다. 이 밖에 이선유(李善有)의 오가(五歌)도 있는데 이는 판소리 6마당에서 《변강쇠타령》이 빠진 것으로 현재 남아 있는 판소리 5마당이 바로 이것이다.
원래 판소리는 중부지방 이남에서 발달하였고, 또 광대도 전라도 무인(巫人) 출신이 많았으며 신재효 이후 근 1세기에 걸쳐 연창(演唱)되어 왔다. 광무(光武) 연간의 원각사(圓覺社) 이후 서양 연극의 영향을 받아 판소리가 창극이라는 형태로 연출되면서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으나 이는 엄격히 보아 판소리와는 다르다.
첫댓글 좋은 역사자료 고맙습니다 공부 하려고 모셔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