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스포츠로서의 양궁경기의 시작
양궁이 스포츠로서 행해진 시기를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어렵다. 다만 양궁을 스포츠로 가장 일찍 시작한 나라는 영국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영국에 있어서 양궁은 다른 스포츠보다도 오랜 역사를 지니고 행해져 왔는데 “아처리대회”가 그것이다. 양궁의 발상지라고 하는 영국은 1538년 Henry Ⅶ세때 오락용 경기로서 스포츠화 하여 몇 차례의 양궁경기를 열어 널리 보급 되었고 이어서 전 유럽에 스포츠화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양궁을 경기로 행하는 방법은 그 지역 또는 각 나라에 따라 경기방법이 다양하였다. 예를 들어, 영국에서는 오직 몇 야드를 날릴 수 있느냐 하는 경기를 하였고, 네덜란드 25m 거리에서 표적을 두고 경기를 하였으며, 벨기에서는 30m 거리에서 목재 새들을 만들어서 새를 맞추는 경기가 있었으며, 스위스에서는 석궁을, 또한 미국에서는 최신의 양궁과 아메리칸 인디언의 전통적인 활로 헌팅을 연결하는 방법의 경기가 있었다. 유럽을 비롯한 각국에서 거행되는 양궁은 경기방식에 있어서 많은 차이가 있었다. 그것은 양궁경기가 각 나라의 역사적 문화적 특성에 맞게 접목되고 발전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양한 양궁경기 방식은 국가와 국가 사이에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스포츠로서 자리 잡는데 장애가 되었다. 더구나 스포츠가 국가 간의 이해와 교류를 증진하는 차원에서 양궁경기 방식의 통합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기방식을 통합하려는 시도와 국제적인 경기로 진행하기 위한 연구가 시작되어 1900년에 개최된 제2회 파리올림픽에서 처음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것이 올림픽에서 시행된 최초의 양궁경기였다.
나. 근대스포츠로서의 양궁
양궁이 근대스포츠로서 발전하게 된 시기는 1900년 제2회 파리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되면서 부터이다. 파리올림픽에서는 50m, 30m 경기와 30m 조류표적 경기방식으로 경기가 진행 되었다. 그러나 당시 올림픽에 참가한 국가는 영국, 프랑스, 벨기에, 오스트리아, 스웨덴, 미국 등이 참가 하였다. 1904년 미국 세인트루이스에서 거행된 제3회 올림픽대회에서는 영국식과 미국식으로 경기가 진행되었으나 참가자는 미국선수 23명이 전부였으며 여자선수도 6명이 참가 하였다.
1908년 제4회 런던올림픽대회에서는 남자선수 61명 여자선수 14명이 참가하여 성대하게 경기를 진행하였으나 런던올림픽대회 이후 양궁이 올림픽에서 제외 되었다. 그 후 1920년 제7회 엔트워프올림픽대회에서 채택되었다. 엔트워프올림픽에서는 28m, 33m, 50m에서 개인전과 단체전 경기로 진행 되었다. 그러나 엔트워프올림픽 대회를 끝으로 양궁이 올림픽에서 거행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양궁이 올림픽에서 다시 시행된 것은 그로부터 52년 후인 1972년 제20회 뮌헨올림픽에서 채택되어 지금까지 거행되어 오고 있다.
다. 양궁의 올림픽 부활 및 한국양궁의 올림픽 성과
1972년 제20회 뮌헨올림픽에서부터는 양궁이 정식종목으로 채택되면서 세계양궁은 획기적인 발전의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양궁의 올림픽에서의 부활은 1960년대 들어와 급속히 확대된 양궁의 국제화 추세가 작용한 때문이라고 이해된다. 뮌헨올림픽에서 양궁경기는 1957년 이래 세계대회에서 행해지고 있던 FITA 더블라운드 방식을 채택하여 시행하였다. 또한 참가 규모는 27개국 여자40명, 남자55명의 선수가 참가하였는데 우리나라는 참가를 하지 않았으나 북한 여자팀이 처음으로 올림픽에 참가 하였다. 당시 북한은 여자개인 7위, 12위, 20위라는 성적을 기록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1975년 제28회 스위스 세계선수권대회와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도 참가를 하였다. 특히 몬트리올 올림픽에서는 북한의 장순영선수가 마지막 50m, 30m를 앞두고 4위보다 15점을 앞서 3위를 달리고 있었으나 50m에서의 기록 저조로 구 소련 Rustamova, Zebiniso 선수(2,407점)에게 2점이 뒤진 2,405점으로 4위를 하였다. 이후에도 북한은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에서 5위와 17위를 하는 등 좋은 성적을 올렸으나 이후 올림픽에 출전을 하지 않았으나, 남, 북 공동입장을 통한 화해무드에서 열린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 북한의 최옥실 선수가 4위를 하였다. 이때까지 한국은 올림픽에는 참가하지 못했다. 1984년 제23회 로스앤젤레스 올림픽경기대회에는 우리나라 여자팀이 올림픽에 첫 출전한다. 국제대회에 처음 등장한 서향순 선수가 금메달을 차지하고 유력한 금메달 후보였던 김진호 선수가 동메달을 획득했으며 박영숙 선수가 17위를 하였다.특히 LA올림픽 여자부 경기에서 2위는 중국의 LI Lingiuan가 차지하여 아시아 양궁이 세계에 우뚝 서는 계기가 되었다. LA올림픽은 그동안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시행 되어온 FITA 더블라운드 방식으로 경기가 진행되어 큰 이변이 없이 양궁 강국이입상이 하는 대회였다.
1988년 제24회 서울 올림픽경기대회에서는 김수녕·왕희경·윤영숙의 여고생 궁사가 개인 금·은·동메달과 단체전 금메달을 차지했으며, 남자부에서는 박성수가 은메달을 획득하였다. 또한 전인수, 이한섭이 가세한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여 남녀 모두 우승을 함으로써 세계 정상임을 재확인하였다. 서울올림픽에서는 종전 FITA 더블라운드에서 개인전 288발을 쏘던 경기를 36발로 승부를 가리는 그랜드 FITA라운드로 경기를 진행하여 세계 양궁계의 많은 변화가 있었다.
1992년 제25회 바르셀로나 올림픽대회에서는 조윤정이 개인 1위, 김수녕이 개인2위를 하였으며
이은경이 가세한 단체전에서 1위를 하였다. 그러나 남자부에서는 단체전에서 4강에 진출하지 못했으며 개인전에서 정재헌 선수가 은메달을 획득하였다.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는 그동안 기록경기였던 양궁을 토너먼트 경기로 진행하는 획기적인 방식으로 진행하여 아주 많은 이변이 발생했다. 특히 메달결정전은 12발로 승자를 가리는 경기방식으로 텔레비전 중계로 양궁의 새로운 장을 마련하는계기가 되었다.
1996년 제26회 아틀란타올림픽에서는 김경욱이 금메달을 획득하고, 김조순, 윤혜영이 가세한 단체전에서 우승하였으며, 남자는 오교문이 3위, 김보람이 5위, 장용호가 7위를 하는데 그쳤으며 단체전에서는 2위를 하였다. 아틀란타올림픽경기에서 양궁은 진정한 드라마와 감동을 주는 스포츠임이 입증되었다. FITA는 일반 대중뿐 아니라 IOC 위원회, TV 관계자, 미디어 관계자들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다. 아틀란타 양궁 보도국은 IOC로부터 올림픽 스포츠 최고 보도국으로 선정되어 Golden Rings상을 수여 받았다. 특히 경기 동안 54,680명의 관중이 입장 하였다. 2000년 제27회 시드니 올림픽경기대회 여자부 경기에서는 단체전 금메달과 함께 개인전에서도 윤미진·김남순·김수녕 선수가 금·은·동메달을 차지하였고 북한의 최옥실 선수가 4강에 진출하여 4위를 하였다. 특히 기록면에서도 세계신기록 2개, 올림픽 신기록 5개를 작성하는 대 기록을 수립했다. 남자부에서도 단체전에서는 금메달을 획득 했으나 개인전에서 김청태 5위, 오교문 6위, 장용호 선수가 11위를 하였다.
2004년 제28회 아테네올림픽 여자부 경기에서 단체전 금메달과 함께 박성현선수가 금메달, 이성진 선수가 은메달, 윤미진 선수가 5위를 차지했으며, 남자부에서는 단체전에서 금메달, 박경모 5위, 임동현 6위, 장용호 11위를 하였다. 고등학생으로 참가한 임동현 선수는 퀄리피케이션라운드에서 세계신기록을 작성하는 등 좋은 기록으로 본선에 진출했으나 메달 사냥에 실패했다. 아테네올림픽에서는 기원 전329년에 폐허가 된 고대 경기장에 새로 세워진 제1회 올림픽이 열렸던Panathinaiko
경기장에서 양궁선수들만이 시합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됐다. Panathinaiko 경기장의 아름다운 대리석 경기장에서 경기를 할 수 있는 것은 올림픽 역사상 유일무이한 경우일 뿐 아니라 선수 한 명 한 명이 소중히 새길 또 하나의 역사가 되었다. 또한 청중뿐 아니라 전 세계 TV시청자들에게도 아주 특별한 의미를 갖는 대회였다 2008년 북경올림픽 여자부에서 단체전 금메달과 함께 박성현선수가 은메달, 윤옥희 선수가 동메달, 주현정선수가 7위를 하였다. 남자부는 단체전 금메달, 박경모 선수가 은메달, 임동현 9위, 이창환선수가 13위를 차지하였다. 1984년 LA올림픽에 첫 출전해서 여자개인전 6연패를 했던 우리 여자양궁은 24년 만에 개인전 금메달 획득에 실패했다. 북경올림픽에서는 그동안 양궁장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응원 문화가 보였던 대회다.
라. 세계양궁연맹(FITA) 창설과 세계선수권대회
1931년 8월 23일부터 9월 6일까지 폴란드의 Lwow에서 폴란드, 프랑스, 스웨덴,체코슬로바키아 등 4개국 21명이 참가한 가운데 1회 세계양궁선수권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경기는 표적경기로서 남,여 구분 없이 30m, 40m, 50m에서 직경 80cm의 표적을 사용하여 경기가 열렸다.
경기가 진행 중인 9월 4일 대회에 참가한 폴란드, 프랑스, 스웨덴, 체코슬로바키아를 비롯해 미국, 이태리, 헝가리 등 7개국 대표가 참가하여 1차 FITA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초대회장에 핀란드의 Mr. M. Fularski를 선임하였다. 그리고 당시 진행중이던 양궁대회를 제1회 세계양궁선수권대회로 공식 인정 하였다. 이로써 국제양궁연맹(FITA. Federation Internationale De Tir AL'arc)의 역사적인 출범이 이루어졌다. 그 이듬해인 1932년 폴란드에서 개최된 제2회 세계선수권대회부터는 남자부와여자부로 경기가 분리되어 남자는 90m, 70m, 50m, 30m의 거리에서, 여자는 70m, 50m, 30m 거리에서 양궁경기가 실시되었다. 이후 매년 세계선수권대회가 개최 되었으며 1937년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7차 총회에서는 새로운 양궁규정으로 장거리에서 여자는 70m 120발, 60m 96발, 50m 72발을, 남자는 90m 144발, 70m 96발, 50m 48발을 직경 122cm 표적에 쏘도록 하였다. 그리고 단거리에서는 남, 여 공통으로 50m와 35m에서 공히 직경 80cm 표적에 각각 60발씩, 25m에서 직경 60cm 표적에 60발을 쏘게 하는 경기방식을 도입했다. 장거리와 단거리에서 쏘는 표적 크기는 현재 사용하고 있는 표적크기와 동일하나 그 당시에는 상당히 많은 화살을 쏘도록 규정하였다. 국제양궁연맹에서는 1940년부터 1945년까지 세계 2차 대전으로 대회를 개최하지 못하였고 1946년부터 세계선수권대회를 다시 열기 시작하였다. 또한 매년 개최되는 대회를 1953년 제16회 노르웨이 세계선수권대회부터 2년마다 홀수 해에 열어 지금까지 실시해 오고 있다. 그동안 FITA에서는 몇 번의 경기방식의 변화가 있었으나 1957년 제18회 체코 세계선수권대회부터는 Double FITA Round 방식을 채택하여 1985년 제33회 서울 세계선수권대회까지 유지해 왔다. 이후 30여 년간 유지해온 경기방식이 1987년 제34회 호주 아델라이드 세계선수권대회에서 Grand FITA Round 경기방식으로 바뀌면서 그동안 세계 최강이었던 미국과 소련의 경기력이 떨어지고 한국과 유럽이 새로운 양궁 강국으로 떠올랐다. Grand FITA Round 경기방식으로 바뀐 후 양궁경기가 재미있는 스포츠로 발전 하였으나, 양궁 경기의 대중화 및 관중이 흥미를 느끼고 시청자들과 같이 호흡할 수 있는 TV 중계
방송 등 시대적 요구에 따라 1993년 제37회 터키 세계선수권대회부터는 Olympic Round라는 토너먼트 경기방식으로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와서 지금까지 실시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