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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행6:1-7
남 태평양에 있는 펜테코스트 제도에는 ‘골’이라는 의식이 있습니다. 이 의식은 사나이들이 발목에 덩굴 줄기를 단단히 묶고 대나무와 덩굴로 엮은 30m 높이의 다락집에 올라가서 바닥으로 다이빙을 합니다.
종교적인 색채를 띤 이 의식은 남자의 용기를 과시하는 목적도 있습니다. 지면에 머리가 아슬아슬하게 접근할수록 더 용감한 사람으로 여기므로 발에 맨 줄의 길이를 낙하한 토인의 머리가 땅 바닥보다 불과 몇㎝위에서 멈추도록 해 놓습니다. 때로는 줄기의 길이가 늘어나서 뛰어내린 사람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기도 합니다.
이 의식은 요즘 번지점프를 연상하게 합니다. 발에 맨 줄이 뛰어내리는 사람의 생명을 살려주는 생명 끈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의 끈은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에게 있는 줄 믿습니다. 예수님의 끈은 굵고 짧으며 안전합니다.
우리의 삶이 힘들고 어려울 때 낙심하지 말고, 자신을 포기하기하지 말고 예수님에게 나와서 생명의 줄을 잡읍시다. 내가 힘들고 어려운 것은 내 마음대로 살았기 때문에 당하는 경우가 있고, 또 내 마음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로 결심하고 열심히 주님의 뜻대로 살고 있는데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 마음대로 살았기 때문에 당하는 고난과 여려움은 누구를 한 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주님의 뜻에 순종하여 당하는 고난은 반드시 주님께서 갚아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내 뜻대로 살다가 어려움 당하는 것보다는 주님의 뜻대로 살다가 어려움을 당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우리에게 더 큰 은혜로 보답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내 욕심으로든, 아니든 내가 지금 겪는 힘든 일들은 모두가 내게 유익한 것이라고 믿으시고 승리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초대교회에도 교회로 모인 성도들이 다 좋은 일들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사도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임을 증거하였을 때 수천 명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교회가 세워졌고, 단 시일에 대형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어지니 사도들은 바빠졌습니다. 말씀을 가르쳐야 되지요, 성도들의 생활을 파악하여 구제하여야 되지요, 성도들이 많아지니까 성도들을 심방하면서 관리를 해야되지요, 교회의 행정도 해야되지요, 얼마나 바빴겠습니까?
그렇게 바쁘게 일해도 교회 안에는 문제들이 속속 들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 헬라파 유대인들의 불만이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난 것 같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이 히브리파 유대인들보다 홀대를 당한다고 불만입니다. 왜 홀대를 당하는가 하면요, 히브리파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태어난 유대인들 즉 우리들 말로 토백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반해 헬라파 유대인들은 이방(헬라지역)에서 태어났거나, 부모 중에 주로 모친이 유대인의 혈통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을 말하는데, 이 헬라파 유대인들이 전도를 받아 교회에 들어왔는데, 교회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구제를 하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의 과부들과 히브리파 유대인들의 과부들에게 했어요. (당시 고아나 과부는 가난한 사람들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상징성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추측컨대 예루살렘 교회에서 주로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주축이 되어 교회에 봉사를 하다보니 자연히 히브리파 유대인 과부들에게 더 많은 구제비가 지급되는 거예요.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말이 있듯이 자연히 같은 동네에 사는 사람에게 관심을 더 갖는 것이 인지상정이잖아요? 그래서 헬라파 유대인들이 가만히 보니 자기들의 과부들에게 구제비가 지급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기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외지에서 온 헬라파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히브리파 유대인에 비해서 찬밥이라는 피해의식을 갖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기들 끼리끼리 또 모였던 것 같습니다. 이럴 수가 있느냐 하고 좀 흥분한 것 같습니다. “외지에서 온 것도 서러운데 교회에서 봉사해도 구제에서 빠질 수 있느냐?” 하는 등의 불만들이 교회 이곳 저곳에서 터져 나오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구제, 그 자체에 대해서 불평하거나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구제는 우리가 해야 합니다.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구제하는 것은 마땅한 것입니다. 여기에 아무도 반대하거나 불평할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 교회도 마땅히 이웃들에게, 그리고 우리 교우들 중에도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교우가 있다면 마땅히 구제하여야 합니다. 구제와 선교에는 반대할 이유가 없습니다. 아니 반대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구제의 방법에 있어서는 불평이나 원망이 있을 수 있습니다. 다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좀 더 나은 방법을 찾으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초대교회가 이 문제에 있어서 분쟁이 생겼습니다.
이렇게 되면 교회 내에서 분열이 생기게 되고, 교회가 어렵게 되어지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교회의 본질적 사명을 수행해 낼 수가 없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교회가 교회의 본질적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데, 그 본질적 사명이 무엇입니까?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고, 믿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의 말씀을 보존하고, 후대에 전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신학적으로 표현한다면 사도전승을 전하고, 가르치고, 보존하여 전수하는 것을 교회의 본질적 사명이라고 합니다.
이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에 집착하여 매달린다면 교회가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런 문제로 갈등이 생기는 일이 없기를 축복합니다. 우리 교회는 항상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고, 서로 사랑하면서 하나 되어지기를 축복합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처음부터 어려움에 처하지는 않았습니다. 사도행전을 처음부터 읽어보면 초대교회가 어떻게 성장하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행1:4에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고 하였고, 행2:4에는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라고 했습니다. 또 행2:46에는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라고 했습니다. 행5:12에는 “사도들의 손으로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초대교회인 예루살렘 교회는 성도들이 한 마음을 가졌고, 한 목적을 향하여 달려갔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헌신하는 일에 다른 이유나 다른 의견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이웃을 섬기는 일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부산에 가면 이사벨 여고가 있습니다. 이 학교 설립에 얽힌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렇습니다.
미국에 사는 이사벨이라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아이를 낳다가 하반신 마비라는 불치의 병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부인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많은 재산을 들었지만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부인은 병치료를 포기하고 식구들 몰래 자신의 치료비를 한국전쟁으로 고생하는 부모 잃은 어린이를 위한 일을 하도록 보냈습니다.
일년 후 이사벨 부인은 세상을 떠났고, 장례식에 모인 가족들은 아사벨의 아름다운 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 이사벨의 남편인 데이비드 씨가 그 학교를 방문하였습니다.
자신의 아내에 의하여 세워진 학교에 많은 학생들이 공부하는 것을 보고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는 그 때 학교가 건축으로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보고는 자신의 재산을 저당 잡히고 6만불의 돈을 보냈습니다. 이렇게 하여 성장한 이사벨 여자 중·고등학교가 지금은 4천5백여 명의 학생들이 교육받고 있습니다.
참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자신을 하나님을 위해 내 놓을 줄 아는 사람은 두고두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도 규모가 커지게 되면 처음의 의도에서 벗어나게 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처음의 정신을 지켜나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잘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목회자가 아무리 교회를 잘 운영해도 문제는 발생하게 됩니다. 예루살렘 교회도 규모가 커지게 되고 사도들이 외적인 일에 정신없이 일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에는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세상에 있는 어떤 교회도 우리를 완벽하게 만족시키는 교회는 없습니다. 교회를 잘 지어 이용하기 편리한 곳이면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까? 그런 교회에 가면 신앙이 저절로 생길 것 같습니까?
음악을 하는 가정에는 항상 음악이 있으니까 행복할 것 같습니까? 피아노 치고, 바이올린 켜고, 노래하면서 사는 것이 행복할 것 같습니까? 매일 노래하면 행복할 것 같습니까?
한 시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만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고상한 것이 아니라 시만 생각하니 시시해진다” 웃어넘기기에는 의미가 있는 말이라 생각합니다.
장미는 보기에 아름답지만 동시에 가시도 가지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는 우리가 보기에 아무런 문제도 없는 곳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오히려 세상의 다른 조직체보다도 더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교회에 오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문제를 가지고 오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실패한 사람, 영적으로 어둠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 등등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남으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교회에 오기 때문에 교회는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하는가가 지도자의 관건인데 어떤 지도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더 어렵게 만들 수 있습니다.
지금 교계에서는 광성교회가 큰 문제로 삼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교회의 문제가 비단 구제에만 있는 것이 아님을 파악하고 수습에 나섰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모든 제자들을 불러 놓고 대안을 말씀합니다.
2-4절 ‘ 열 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사도들은 우리가 뭔가 잘못 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열심히는 하고 있는데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우선순위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본질적인 문제와 비 본질적인 문제가 섞여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을 수정하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무슨 문제든지 어려운 문제나 갈등이 생기면 제일 먼저 본질로 돌아가는 것이 좋습니다.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습니다. 신앙의 갈등이 있으면 첫 은혜 받았던 때로 돌아가야 되고 결혼생활에 문제가 있으면 처음 사랑하던 때로 돌아가야 합니다.
자신을 잘 돌아 보고 처음과 지금이 변화된 것이 무엇인지를 분석하고, 좋게 변화 되었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나쁘게 변화되었다면 빨리 시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본래의 의미를 살릴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놔두면 상황은 더 악화되어지고 나중에는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되어집니다.
언제나 처음이 좋습니다. 처음의 가졌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에도 마찬가지로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처음에 가졌던 마음은 순수합니다. 주님의 은혜가 너무나 감격하여 그저 주님께 나와서 기도하고 감사하는 찬송을 하고, 영광을 돌리던 그 마음으로 돌아가려고 하여야 합니다.
사람은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변해야 합니다. 그러나 변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처음에 가졌던 마음입니다. 이것이 인생의 참된 행복을 찾는 비결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이 그랬습니다. 사도들이 본래 예수님을 증거하였습니다. 교회를 세우려는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자신들이 3년 동안 따라다니면서 본 것과 배운 것을 잘 정리하여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는 것이 그들의 사명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사도들이 선포하는 말씀을 듣기 위해서 모였고, 그곳에서 함께 기도하면서 자연히 교회라는 공동체가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사도들은 모였던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다보니 실제로 중점을 두고 해야할 것을 소홀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우선순위가 잘못되어 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이제는 주먹구구식으로 이 공동체를 운영할 것이 아니라 조직을 이용해서 공동체를 질서있게 바로 잡아가야겟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도들은 본래의 모습을 찾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모아놓고서 우선순위를 바로잡아 나갔습니다. 그리고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사도들이 어떻게 문제를 해결했습니까?
사도들은 제자들을 불러 놓고 말을 했습니다. "지금까지 음식을 나누어 주는 일에 관심을 두다 보니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소홀하였습니다. 이것은 분명 옳지 않는 일입니다."하면서 문제를 풀어나갔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방법을 제시하였습니다.
“여러분들 중에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다고 인정을 받는 사람 일곱 명을 뽑으시오. 그 사람들에게 이 일을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일과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온 힘을 기울이겠습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사도들은 하나님의 지혜로 자신들의 본래의 사명을 깨닫게 되었고, 교회의 본질을 살렸습니다. 교회는 그 본질이 분명해야 합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가르치고, 말씀을 보존하고, 전수하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할 것입니다. 더욱 분명한 것은 목회자들은 더욱 이 일에 우선순위가 분명해야 합니다. 교회 행정, 행사 프로그램, 심방, 등등은 비본질적인 것들입니다. 이것들도 물론 중요하지만 앞에 것보다는 덜 중요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이 모든 제자들 앞에서 내 놓은 문제 해결 방안을 들은 모든 제자들은 다 좋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모든 제자들 중에서 일곱 명을 뽑았습니다. 그리고 그 일곱 명을 사도들 앞에 세웠습니다. 사도들은 일곱 명에게 기도하고, 안수하였습니다.
이렇게 뽑힌 일곱 명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첫째, 믿음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둘째는 지혜가 충만하고, 성령의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셋째로는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덕망이 있는 사람이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에게도 덕망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덕망이 있는 사람은 어디를 가든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격이 잘 겸비한 사람은 덕망이 있습니다. 인격이 뭡니까? 지, 정, 의를 가지고 인격이라 말 합니다.
여러분들은 앞으로 풍성한 교회의 평신도 지도자들이 되어야 할 성도입니다. 요즘은 여자들도 장로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서 장로도 되고, 권사도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인격을 갖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도들이 왜 ale음이 있고, 성령이 충만하여 사람들에게 칭찬듣는 사람 일곱 명을 뽑았을까요? 뽑은 이유가 무엇인가요?
그것은 이 사람들로 하여금 사도들의 협력자가 되어 사도들이 다 하지 못하는 일을 돕도록 하는데 그 이유가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가 작을 때는 목회자 한 사람이 교회 일을 다 할 수 있지만 좀더 규모가 커지면 목회자 한 사람이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입니다. 그래서 일을 분담해서 교회 공동체를 원활하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 성도들 중에서 지도자들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일곱 명이 뽑혔습니다. 이 일곱 명은 사도들이 뽑은 것이 아닙니다. 모든 제자들이 뽑았습니다. 교회의 일군을 뽑는데는 목회자가 선별해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에 의해서 뽑아져야 하고, 세워져야 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우리 서로가 잘 알아야 합니다. 내가 지명한 사람이 뽑혔을 때 그 사람이 교회 일에 잘 할 수 있을까를 기도하면서 고민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에게 맡기고 뽑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미 준비된 사람을 세워서 일할 수 있게 하십니다.
그 결과가 어떤가요? 7절에 보면 잘 나타나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아 멘
첫째,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갔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말씀이 계속 퍼져 나가서 부흥을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졌다고 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조직이 정비되고 교회의 일을 분담하게 되니 훨씬 발전을 보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날마다 부흥하고 발전을 하여야 합니다. 아울러서 성도들도 신앙의 발전이 있어야 합니다. 발전은 성장을 말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진리와 뜻 앞에 서서 일할 수 있는 변화를 받아 일하는 일꾼들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을 통해 일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영적수준이 낮아도 괜찮습니다. 성장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무리 높은 영적수준에 있다고 할지라도 성장하지 않으면 별 의미가 없습니다. 영적수준은 우리가 평가할 수 없기 때문에 내가 이정도면 되겠지 하는 생각은 위험한 생각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성장하여야 합니다. 성장은 변화를 줍니다. 변화에 민감할 줄 알아야 합니다.
변화되어 가면서 나타나는 새로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조직을 키우시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저와여러분들을 통하여 신앙이 성장하여 하나님의 일군으로 삼으시기를 원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여 가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이 초대교회의 일곱 명의 지도자들처럼 믿음이 있고, 지혜와 성령에 충만하여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자들이 되어 하나님의 일군이 되어 목회자와 협력자로서 크게 쓰임을 받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