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9.14. 강진신문 [고려청자와 최사전(탐진최씨)]
개경간 활발한 정치·경제 교류, 성전 등에 유적 산강진~개경의 뱃길에는 단순히 청자운송만 있었을까. 물론 일정한 상품이나 여객운송이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관심을 끄는 것은 고려 정권 핵심부와 강진지역간에 있었던 교류 흔적들이다.
12세기는 고려정권을 최씨 무신정권이 좌지우지 할 때이다. 이 시기에 강진청자는 최고 전성기를 누린다.이런저런 정황을 살펴보자. 탐진최씨의 시조인 최사전(1067~1139)이란 사람이 있다. 그는 강진 군동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그의 무덤은 현재 군동 시목에 있다.
그는 고려시대 인종의 어의(御醫)였다. 인종이 14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외조부였던 이자겸이 난을 일으켰다. 유명한 '이자겸의 난'이다. 당시 이자겸의 난을 결정적으로 제압하도록 도운 사람이 최사전이었다.
인종 임금은 이자겸을 영광군으로 귀양 보내고 최사전에게는 지금의 국무총리에 해당되는 문화사랑 평장사라는 최고의 벼슬을 주었다. 1126(인종4)에 이자겸이 물러나자 이자겸의 딸이자 인종의 어머니는 폐비가 되었다. 그 후를 잇은 사람이 당시 장흥 관산읍 출신의 임씨였다.
잘 알려진대로 그녀는 공예태후가 되었다. 공예태후를 추천한 사람이 바로 최사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공예태후는 1127년 의종(毅宗)을 낳는등 5남4녀를 낳았는데 이중에서 의종, 명종, 신종등 세명이 왕위에 올랐다. 이 시기에 고려청자는 소위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공예태후는 1184년 79세의 나이로 죽기까지 1170년부터 시작된 최씨 무신정권을 견제하며 왕권을 지켜 낸 고려왕조의 큰 할머니 예우를 받고 있다.관심을 끄는 것은 인종이 관산출신의 왕비를 지극히 사랑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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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구에서 조금 떨어진 관산읍 옥당리 상동마을에 있는 공예태후의 생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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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은 왕비를 위하며 '수시로 은전을 베풀고' 장흥에 사는 왕비의 친정어머니가 죽자 소복을 입는 예를 갖추었다고 한다. 영암에 소속되었던 장흥이 장흥이란 이름을 얻고 지사부로 승격된 것도 바로 인종2년 (1124년)때 였다.
왕실과 관산지역을 중심으로 한 주변지역의 관계가 다른 지역과 달랐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공예태후의 고향인 관산은 대구 청자촌에서 산 하나를 넘으면 닿는 곳이다.
청자촌과 가까운 관산에서 탐진사람 최사전의 추천으로 왕비가 나온 것과 함께 그 이후 공예태후가 낳은 아들들이 세명이나 왕위에 오르는 기간 동안 강진청자가 가장 번성한 점등은 고려청자가 고려왕실과 너무나 깊은 관계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공주대 역사학과 이해준 교수는 "이 시기에 강진지역의 탐진최씨와 장흥 회진의 장흥임씨, 장흥마씨들이 대표적인 그룹을 형성하며 중앙정계에 괄목할 만큼 빠른 속도로 진출했다"고 말했다.
여러 가지 정황을 보면 강진에서의 청자는 중앙정치권과 긴밀한 관계속에서 발전했고, 중앙정치권은 왕비의 고향인 관산과 탐진에 깊게 의지하면서 성장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정도였을 것이다.
강진과 개경은 어떤 방법으로 교류했을까. 다시말해 공예태후의 주변사람들이 개경을 갈때는 어떻게 갔고, 개경의 정치인들이 관산이나 탐진을 찾을 때 어떻게 왔느냐 하는 것이다. 뱃길이 대부분을 차지했을 것이다.
강진을 출발해 땅끝을 지나 우수영과 군산앞바다, 충남 태안앞바다를 지나는 전형적인 서해안 해로가 이용됐을 것이다. 그 뱃길을 따라 물자가 오갔고 문물이 오갔으며, 사람의 발길이 오갔을 것이다.
강진~개경간의 뱃길은 단순히 청자가 이동하는 통로가 아니라 개경의 문화가 강진으로 유입되고 강진의 문화가 개경으로 올라가는 '해상청자실크로드' 였던 것이다.
1196년 최씨 무신정권의 최고 권력자 최충헌이 권력을 잡은 후에도 강진과 개경의 교류는 더욱 강화됐다. 최충헌은 공예태후의 아들 신종을 왕위에 올리며 실권을 장악한 인물이었다.
성전 월남리에는 최씨 무신정권과 강진의 관계를 나타내는 중요한 역사자료가 있다. 무신정권기에 이름을 날린 이규보와 최자의 글이 새겨져 있는 월남사진각국사비(보물 313호)가 그것이다. 비석은 1250년에 세워졌는데 비석에는 진국국사의 행적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이규보(李奎報 11168-1241)는 최충헌이 권력을 잡은 후 무신정권으로 피폐해진 학문을 부흥시키려고 발탁한 고려시대 최대 학자였다.
강진에 세운 비석에 고려의 최고 권력자 최충헌이 발탁한 이규보의 글이 새겨진 것이다. 이규보는 왕이 비문을 적으라고 명령했다는 것을 비문에 직시하고 있다. 뒷면의 글은 최자(崔滋1188-1260)가 지었다고 한다.
최자는 이규보가 그의 문장을 극찬하면서 무신정권의 최우(?-1249)에게 자신의 뒤를 이을자라 천거한 사람이었다. 최자는 비석이 세워지기 전인 1241년 전라도 안찰사를 지낸적이 있었다. 당시 최씨무신정권의 실세였던 최우의 아들인 최득전이 스님이되어서 월남사에 머물고 있었는데 방자하고 포악하기가 이를데 없었다.
그러나 최고 권력자의 아들인 최득전에게 누구하나 대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최득전을 따끔하게 혼내주면서 잔학함을 막은 사람이 바로 최자였다.최자의 올곧음을 설명해주는 대목이기도 하지만, 한가지 확인되는 사실은 최고 권력자의 아들이 강진에서 출가생활을 했다는 점이다.
강진과 개경간에 그만큼 다양한 계층과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이 교류를 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또 한가지는 비석에 새겨진 사람들의 이름이다. 비석의 마지막 부분에는 130여명의 직책과 이름이 새겨져 있다. 직책은 고려시대 고위 문관과 무관을 나타내는 이름들이다.
국왕의 고문인 승통이 제일 위쪽에 자리잡고 있고, 고려시대 최고 정무기관인 중서문하성의 수상직으로 종1품에 해당는 시중, 정2품관직이였던 평장사등 고위관리들이 수두룩 하고 대장군이라고 쓰인 사람이 6명, 그냥 장군이라고 쓰인 사람 9명 등 고려의 최고 관리를 총 망라한 분위기가 역력히 보인다.
강진이 고려왕실과 권력층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공곰히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강진이 단순히 고려왕실에서 필요한 청자정도만 구워내는 곳이었다면 이 정도의 역사적 유물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800여년전, 고려수도 개경과 남쪽의 끝자락 조그만 땅 강진사이에서 과연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
바다속 어디엔가 묻혀있는 청자들이 그 비밀을 알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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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전면 월출산 인근에 있는 월남사지각국사비는 청자의 전성기인 12세기를 전후해 강진과 고려무신정권이 교류한 상징물로 평가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