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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6. 탐진최씨는 해주최씨에서 분파했는가? 그렇지 않다. 1921년 장경공의 墓誌銘이 출현함으로써 해주최씨에서 분파했다는 설은 거짓으로 판명되었다. 그 전까지는 강진문중에서 강진이 탐진최씨의 관향임을 들어서 강진에 장경공의 묘소를 축단하고 장경공은 해주최씨 시조인 崔溫(950년생?)공의 증손으로서 조부는 崔沖, 부친은 崔惟吉이며 崔思諏의 아우라고 하며 해주최씨 분파설을 주장해 왔다. 최사전공이 최사추공과 휘자 중 생각"思"자가 돌림자처럼 보이고 장경공의 선대를 알 수 없으며 최사추공이 고려 명문가인 해주최씨이므로 최사추공의 아우로 계보잇기를 한 것이다. 그러나 최사추공은 1034년생, 장경공은 1067년생으로 33년의 나이차이는 한세대 차이로서 친형제라고 보기 어렵다. 해주최씨 족보에는 최유길공에게 최사전이란 아들이 있지 않는다. 묘지석 출현 전까지는 장경공의 선대를 모르던 강진문중이 선대 계보를 연장시키고 명문으로 미화시키기 위해서 남의 조상을 우리 조상이라고 조작한 것이다. 이해는 가지만 부끄럽고 가슴아픈 일이다. 이제는 국내의 족보관련 거의 모든 기록에 해주최씨 분파설이 올라있어 정정하기 조차 어렵게 되어있다.장경공의 字는 恤世이셨고 諱 思全은 선종임금이 내려주신 이름이며 생각할 <思>자는 돌림자가 아니다. <중서령공파 화성문중> 중조 최응규공이 해주 최온공과 동시대 인물인 것으로 보아서는 탐진최씨가 해주최씨보다 결코 늦게 출현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혹시 모를 일이다. 탐진최씨가 고려 이전, 통일신라 이전부터 탐진에 세거하던 씨족일 줄을 누가 알겠는가? Q7. 장경공의 묘지명 출현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장경공의 묘지석은 <朝鮮金石總攬>이라는 책에서 장경공의 開城 墓所가 도굴되고 묘지석이 동경제국대학 박물관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어서 1921년에 광주문중에서 전남도청과 협력하여 일본에서 반환 받아옴으로써 세상에 그내용이 알려지게 되었다. 묘지석은 현재 國立光州博物館에서 보관 전시 중이다. 묘지석의 출현으로 그전까지 모르고 있던 장경공에 대한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장경공의 선대가 불명하고 후손의 분파계보가 실전된 상태에서 강진문중은 강진이 관향지라는 이유로 1) 장경공이 은퇴 후 강진으로 낙향하여 묘소가 강진 비파산에 있다. 2) 장경공이 탐진백에 봉해져서 탐진최씨의 시조가 되었다. 3) 장경공은 해주최씨에서 분파했다. 라고 족보에 기록하고 주장해 왔으나 3가지 모두가 허위임이 명확해 졌다. 아직도 이러한 허위 기록을 믿고 고집을 꺽지 않는 탐진최씨 분파가 있음을 뭐라 해야 할까? 해주최씨 홈페이지에는 이런 허위기록, 즉 탐진최씨/ 나주최씨가 그들의 지손이라고 자랑하는 듯 올라와 있다. 묘지석의 출현은 우리의 거짓없는 진실한 뿌리를 찾는데 큰의미가 있다 하겠다. Q8. 장경공은 두 아드님을 두셨다는데 사실일까? 장경공은 장자 변(弁)공과 차남 열(烈)공의 두 아드님을 두셨는데 두분 이후의 세계는 알 수 없다고 했다.그런데 아드님 두분이 동일인일 거라는 기록이 유희춘의 <眉巖日記>에 보이는데 잘못인 것으로 생각된다. 장경공의 妾과 두아드님, 그리고 銀盞, 賜名 孝仁 등에 얽힌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두 아드님을 두신 것으로 보인다. 두 아드님 이후의 세계는 누차의 병란으로 고증할 문헌들이 실전되어 알 수 없다는 것이 여러 문중의 정설이었고 錦南公 崔溥의 묘비에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금남공은 그분의 저서 <漂海錄>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당대 최고의 학식을 갖춘 유학자 중의 한분이셨다. 그런분이 자신의 조상을 몰라서 변(弁)공과 열(烈)공 이후의 世系를 모른다고 그냥 넘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Q9. 장경공의 두 아드님의 후손은 어디에 있을까? 장자 변(弁)공은 吏部尙書(정3품?)를 지냈다고 했다. 그 정도 벼슬가문이라면 특별한 사유가 없는한 계보가 실전되기도 힘들 것이다. 차남 열(烈)공도 효심이 깊어서 임금이 孝仁이라고 賜名하셨다고 <장경공 열전>에 기록되어 있는 정도 인데 두분 이후의 세계를 알수 없다는 것이 참으로 이상하다. 열(烈)공의 아드님으로 준량공을 모시던 강진 준량공파는 1892년 壬辰譜까지는 그렇게 해오다가 근래에는 두분 사이에 3대를 추가 하였다. 3대를 추가한 고증이 필요하지 않을까? 장경공이 三韓後壁功臣이 되고 후손은 과거를 거치지 않고 벼슬을 할 수 있도록 蔭敍의 특전을 받았다고 한다. 장경공의 직계는 개성에 세거하며 대대로 조정에 입사하였을 것(나는 이 문중을 <탐진최씨 장경공파 개성문중>이라고 부르고 싶다)으로 생각되는바 조선조의 최고 지성인이신 금남공조차도 찾지 못한 족보가 혹시 통일이되면 북한 지역 문중에서 나타나는 날이 있지도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