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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설야 《설봉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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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열의 《두만강》과 쌍벽을 이룬 것으로 평가되는 한설야의 《설봉산》은 1930년을 전후한 적색농민조합운동을 중심한 항일무장투쟁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변모·계승되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미 20년대부터 프롤레타리아 혁명문학에 투신했던 한설야는 8·15를 전후하여 함흥에 머물면서 북한문학의 주도역을 맡았었다. 카프문학 제1세대에 속하는 한설야는 이기영 등과 함께 8·15후에는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인맹 결성을 주도했으며, 1946년 3월에는 북조선 문학예술총동맹 결성에 앞장섰다. 이에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1948), 조선무학가총동맹 위원장(1951)을 맡을만큼 분단 이후 북한문학의 주역으로 이기영과는 달리 당대의 가장 정치성이 강한 작가로 일약 떠올랐으나, 1963년 모든 공직으로부터 쫓겨난 뒤 문학사에서는 한때는 자취를 감추게 된다. 그런데 북한으로서는 무척 드물게 80년대 이후 한설야에 대해서는 이따금식 재평가되는 경우가 있어, 그의 문학적 복권은 시간문제로 보인다. (한설야의 작품세계나 일반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장편《황혼》, 동광출판사, 1989에 실린 정은회의 〈1930년대 노동소설의 백미〉를 참조할 것).
한설야는 8·15 공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소련파나 연안파를 제외하고는 국내파 문학인으로서는 가장 치열하게 당대적 정치권력의 핵심에 뛰어들어 야심에 찬 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그의 작품 속에 그대로 드러난다. 즉, 그는 단편 〈혈로〉(1946)를 비롯하여 〈개선〉(1948), 그리고 장편《역사》(1953)등에서 김일성을 형상화하는데 가장 앞장서는 작가의 한사람으로 나섰으며, 단편〈승냥이〉(1951)나 장편《사랑》등에서는 미국에 대한 비판의식을 가장 신랄하게 전개하고 있다.
아마 항일빨치산 회상 기류의 작품이 일반화되기 이전 시기에 한설야처럼 일제 식민지 시대의 민족해방투쟁사를 뜨겁게 다룬 문학인은 그리 흔하지 않을 것이며, 더구나 그를 능가할 만한 뛰어난 형상성을 이룩한 작품의 예는 더욱 드물 것이다. 이런 점 때문에 북한에서 한설야의 문학적 재평가는 기대해 봄직한 예견이 된다. 더구나 6·25를 전후한 시기를 배경한 작품〈황초령〉(1952)과 장편소설《대동강》(1952)까지 그 목록을 추가한다면 작품의 질과 양에서 근대문학사 이래 이기영과 단연 쌍벽을 이룰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된다.
한설야에게 중요한 항일의식의 뿌리는 고향의 파괴와 이를 말미암은 농민계급의 분해과정, 그리고 만주에서의 체험이 준 절망 속에서 귀향, 그 귀향이 안겨다 준 산업화 과정에 처한 피식민지적 수탈에 대한 저항의 일환으로 접근할 수 있다. 그러나 일제 식민지 시대 때의 한설야의 작품은 《귀향》에서 새로운 저항을 시도하는 농민적 노동자상의 부각에 그치고 있다.(김윤식·정호웅 편《한국 근대 리얼리즘 작가 연구》 문학과 지성사 1988에 실린 서경석의 〈한설야론: 한국 경향소설과 ‘귀향’의 의미를 참고할 것〉).
이 무렵의 한설야가 이룩한 최서해적 한계성(가난, 그것에 함몰된 계급의식의 이기주의화) 의 극복이란 성과는 다른 한편으로는 한설야 자신의 한계성을 노출시킨 것이기도 하다. 즉 , 항일무장투쟁의 현장이었던 만주로부터의 귀향이라는 복귀의 사건 전쟁이 주는 역사적 의미는 작품〈과도기〉에 서철 마하나의 전환기적 뜻은 있으나 투쟁의 간접화를 상징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즉 〈과도기〉는 일제 식민지적 수탈방법론에서 본 시대적 과도기로서, 이에 대응하는 민족해방투쟁의 방법론에서는 전환기를 요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당연히 심한 검열 때문이겠지만, 한설야는 이 무렵 무척 쓰고 싶었을 항일무장투쟁에 뛰어든 농민상을 그릴 수 없었을 것이다. 식민지적 문화정책의 제도권 안에서 지닐 수밖에 없었던 이런 한계성은 물론 당대적 상황으로 감안되어야 할 전제조건이겠으나 만주에서의 항일무장투쟁 현장의 대중문학과는 거리가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런 한계성을 절감케 된 계기가 한설야에게 언제쯤이었을까? 8·15 이전이었던 것으로 추론이 가능한 것은, 8·15 직후 그의 활동은 한가하게 항일투쟁의 지난날의 역사기록이나 들출 만큼 여유롭지는 못했는데 이내 이에 대한 작품들을 써냈다는 사실은 이를 입증하는 것이 아닐까, 《설봉산》도 그 좋은 한 예이다.
2
적색 농민조합 여맹원이 자기 어머니가 조합원을 밀고했다는 이유로 친모를 살해했다는 이른바 ‘살모(殺母)사건’을 소재로 만들어진 《설봉산》은 일제 식민지 시대 때의 농민운동사에 대한 가장 현장성 강하고 역사적 증언도가 높은 실록적 요소를 지닌다.
1920년대 후반기부터 소작쟁의 위주의 농민운동은 한계를 드러내어 그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두 갈래의 흐름으로 나뉘어진다. 하나는, 농민 자신의 지위향상을 위한 실력배양 운동으로 천도교와 깊은 관계에 있었던 유파들이 추진한 것으로, 이는 지주나 일제와의 투쟁보다는 농민 자신의 의식 개혁과 경제적 지위 향상에 운동의 초점을 두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에 비하여 다른 하나는, 코민테른 12월 테제에 그 이념적 바탕을 둔 적색농민조합운동으로 이는 항일 민족해방의 성취가 없는 농민해방은 없다는 입장에서의 투쟁노선 이었다. 이는 다시 적색노동 운동과 함께 30년대 전후에 항일투쟁의 국내적 성과를 담아 낸 가장 선진적인 활동으로 최근 들어 재평가되고 있다.
특히 이 운동이 중요한 것은 그 이전까지 전개했던 단순한 소작쟁의적 차원을 넘어 농민의 인간해방 투쟁까지를 두루 수렴한 단계로 승화해서 나타났다는 점이다. 농민조합이 당시 내걸었던 행동강령이나 여러 투쟁활동을 보면 당시 우리 문학이 그렸던 농민운동 작품이 얼마나 당대적 사회운동의 반영에서 뒤지고 있었던가를 느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계몽적 차원에 머물렀던 농민문학이 지닌 허구성이 실천적 운동사 속에서 얼마나 관념적이었던가를 명백히 드러낸다. 이런 실천적인 농민운동의 실상이 밝혀지기 이전까지는 오히려 식민지적 억압 아래서 과연 농민운동이 어느 정도의 수준에다 어느 정도의 규모로 이루어졌을까를 회의하면서 농민운동의 투쟁적 장면 묘사에 대하여 공공연히 관념적 작품의 성과로 몰아쳐 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설봉산》을 읽음으로써 이 시기의 농민문학은 전면 재검토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적색농민운동에 대한 증언은 거름 편집부 엮음. 《1930년대에 민족 해방 운동》에 실린 (농민운동 1·2)을 참고할 것).
《설봉산》은 함경도 성진 지방을 중심한 농민운동을 그리면서 그 규모를 전 군(郡)내 조합원이 4천여 명이라고 기록한다. 이 숫자는 이내 5천여로 불어났으며, 이들은 고도의 정치의식과 강철같은 투지로 단련되어 항일운동의 무장투쟁화에 앞장선다. 농민조합은 ‘소작투쟁, 소작권 이동 반대 투쟁, 채권 반대투쟁, 그리고 뽕나무, 아마, 귀밑의 재배 반대 투쟁’을 비롯하여 ‘제사는 아주 간소하게 보통 농민들이 먹는 그 음식으로 기념만 하면 된다’는 운동, ‘조혼·축첩 반대’, 종교적 미신 비판, 가정생활 개조 등 인간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들을 개조시키는 데 앞장선 것으로 그려진다. 따라서 농조는 단순한 농민운동이 아니라 인간과 민족해방투쟁의 단계로 승화된 정서로 형상화되어 나타난다.
온 농민들의 골칫거리였던 건달 최폐단이 농조에 가입한 뒤부터는 주먹과 힘을 농민을 괴롭히는 ‘지주나 순사나 이와 비슷한 패거리에게로 돌려 쓰게 되었다는 사실이나, 후처에게 빠져 본처의 달을 학대하는 병춘이를 농조에 가입시켜 개과천선 시킨 일, 길남 어머니가 재혼한 남편 칠복이에게 억눌려 매를 맞고 학대받는 것을 구출하여 칠복이를 쫓아내어 주는 일 등등 사소한 가정사로부터 민족적인 활동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을 토론을 거쳐 결정하는 민주적 기구로 농조는 부각된다. 고등계 형사의 능란한 시선으로 본 농조원의 모습은 이렇게 표현된다.
“……농조 일꾼들이 그 전의 사상운동가이던 가두 분자와는 아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두분자 중에는 쥘 수 있는 사람이 간혹 있었다. 그러나 농조 일꾼들은 그들과는 달라서 좀채 휘어들지 않았다. 더욱 그 가족들까지도 여간 속이 단단한 것이 아니었다. 또 농조원이 아닌 일반 농민도 농조 내막에 대해서나 그 지도 인물에 대해서 경찰에 밀고하는 일이 전혀 없었다.”
농조는 그 조직과 운동방법론에서 “나인 든 지도자와 청년 간부들 사이에 의견 차이가 생기게 되었는데, 나이먹은 지도자들은 자체 역량의 부족과 일제 탄압의 가중을 고려하여 어느 시기까지 순전한 합법단체로서의 자체의 역량을 축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이에 대하여 청년 간부들은 자체 역령이 약하고 일제 탄압이 심하기 때문에 농조를 광범한 대중운동으로 전개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단순한 합법조직으로 둘 것이 아니라 합법조직과 비합법조직을 배합시켜애 한다고 주장하였다.”
청년층의 주장대로 조직화된 농조는 《설봉산》에서 일제와 그 앞잡이 세력으로 지주와 그 기독교인을 들고 있다는 점이 분단 이후 추가된 이념적 경직성으로 나타난다. 기독교인 지주인 김상초는 자기 이익을 지키기 위하여 우리 농민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악의 화신으로 부상하는데, 특히 그는 “돈을 벌고 지키기 위해서는 무슨 무기와 방패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교회를 세우고, 일변으로는 교인을 걷어쥐고, 일변으로는 관청출입을 하기 시작하였다.”
김상초의 고발로 200여 명이나 체포된 농조는 끝내 그를 죽음으러 몰아넣는 보복을 감행하지만 김상조는 죽는 그 순간까지 일제 경찰의 앞잡이 역할에 충실한 것으로 그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김상초는 전도부인을 내세워 가장 악랄한 사건조작을 각색케 한다. 농조원 경덕이 체포되자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석방을 위해 덕종을 밀고하여 피체케 만든다. 경덕의 여동생 순덕이 밀고 사실을 알고 다그치자 어머니는 우물에 빠져 자살하고 만다. 순덕 어머니가 이런 과정에서 이르기까지의 배후에는 김상초와 그의 지시를 받는 전도부인이 끼여 있었다. ‘하느님만 믿으면 아들도 구할 수 있고 복도 받고 잘 살 수 있다’는 말로 귀를 솔깃하게 만든 전도부인은 순덕 어머니로 하여금 아들의 동지를 밀고하며 엄청난 사고를 내도록 만들었다.
순덕 어머니가 자살한 뒤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일제 경찰은 이 좋은 꺼리를 놓칠세라 전도부인으로 하여금 ‘순덕이가 어머니를 죽였다는 소문을 넌즈러 놓고 그담은 그가 뿌려논 풍설이 마치 아낙네들 입에서 나온 것처럼 되넘기치게 하였다’ 물론 이것은 경찰이 먼저 순덕 어머니의 자살을 농조원들의 타살로 조작하려고 순덕을 잡아다가 족치다가 실패하자 그 다음에 꾸며 낸 술책이었다.
이 소설이 지닌 가장 숨막히는 장면의 하나인 어머니의 자살과 그 뒤처리는 이 작품을 단순한 운동소설이 아닌 인간적 고뇌를 담은 본격문학으로 승화시켜 주는 디딤돌이 된다. 농조의 지도적 인물인 학철은 순덕을 사랑하는 관계로 그녀 어머니의 밀고사건이 터지자 가장 곤혹스런 입장에 놓인다. 순덕 역시 마찬가지다. 작품에서 순덕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조직을 배신한 어머니의 가혹한 처단에 주저 없이 떨쳐나서는 인간상으로는 그려지지 않는다. 혁명가이기 이전에 순덕은 한 인간이었기 때문에 어머니를 증오만 했다면 이 작품은 도식적인 선동은 될 지 몰라도 인간의 영혼을 다루는 예술적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순덕은 밀고자일지라도 그 대상이 자신의 어머니였기에 부끄러움과 책임감을 가졌어야만 했고, 이로써 자신은 더 한층 강한 농조원으로서의 투지를 다지는 계기를 삼아야만 되었다. 그녀는 잔혹한 고문 아래서 어머니의 자살이 농조원이 타살이었음을 증언할 것을 강요당한다.
이제 거절되자 경찰 어머니를 죽인 파렴치범으로 몰아간다. 이 혹독한 위선과 고문을 이겨내는 과정에서 순덕은 새로운 혁명적 여인상으로 부상되어 간다.
순덕과 어머니의 대화나 둘 사이에 놓인 서로 다른 관점과 입장에 대한 심리적 묘사는 이 작품에서 인간적 갈등이 내면을 파헤친, 사실성이 두드러지는 장면이다. 순덕이 어머니의 비행사실을 뻔히 알고서는 ‘어머니가 과연 첫마디에 순순히 털어 내놀까. 내놓지 않는다면 어쩔까……이렇게 생각하고 보니 사람의 마음을 장악하는 일이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아무리 쑥맥같은 사람이라도 한 번 제맘의 문을 닫아걸고 남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들면 좀체 풀어헤치기 힘든 것이었다’는 대목에 이르면 ‘운동’이란 것이 사람을 얻는 작업이며 그 핵심이 무엇인가를 새삼 절감케 한다. 이어 순덕은 운동에서 사람의 마음 얻기의 어려움을 생각한다.
그러니 아무리 어머니라 하더라도 한 금을 그어 놓고 그 금을 넘어서려 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넘게 하는 일이 결코 용이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니 모든 사람을 한 맘 한 뜻으로 묶어 세우는 일이 얼마나 어려울 것인가…하나 순덕이는 생각만은 모든 사람을 한 길로 끌고 나가는 운동에 나선 사람이오, 거기서 자기는 어느만큼 보람도 냈고 자신도 얻었다.
순덕과 어머니의 대화는 이어진다. 끝까지 자식들 걱정 때문에 조합 앞에서 자신의 과오를 인정치 않는 어머니와 고백할 것을 강요하는 딸의 대화는 진솔성을 더한다. 특히 궁지에 몰린 어머니가 “인제 내게는 아무것도 없다”고 토해낼 때 이미 그녀는 생에 대한 모든 기대와 가치를 잃은 모습으로 내팽겨쳐진다.
“우리는 사회의 나쁜 것과 동시에 인간의 나쁜 것을 고쳐야 한다. 인간이 나쁜 것을 고치지 않고는 사회의 나쁜 것도 고칠 수 없다”는 농조운동의 기본 이념은 《설봉산》에서 탄압의 작혼암에서 꿋꿋하게 자신의 신념을 다져나가는 인간상들 속에서는 당연히 나타나지만 이처럼 부정적 인간상 속에서까지도 그 끝마무리를 깨긋이 해주었다는 점에서 한결 돋보이게 한다.
어린 아이들 세계에서까지도 그 집안의 빈부격차에 따라 부르는 노래가 달리 나타나는 일, 어머니의 약을 사기 위해서 자식들이 헌신적으로 희생하는 일화들 등등은 삭막한 식민지 시대의 흐뭇한 서정미를 느끼게 하는 장면들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일경들에 의한 끔찍한 고문 장면과 형무소의 살벌한 내부생활에 대한 치밀한 묘사는 근대 이후 우리 문학에서 보기 드문 옥중생활 묘사의 문학으로 평가받을 만하다.
한설야는 일제 식민지 시대 때의 작품에서도 민속놀이를 민중 운동과 연관시켜 적절히 삽입시켜 성공적인 효과를 자아냈는데 여기서도 그런 수법이 반복되고 있다. 특히 단오절 행사의 하나인 씨름은 한설야의 장기로 《설봉산》의 농조활동을 좌우하는 소재로 적절히 활용되고 있다. 타관의 건달인 백장군을 힘으로 꺾어서 농조에 동조하도록 만드는 공작적 차원으로서의 씨름대회나, 그네타기에서는 고의로 패배에 주어서 상대를 설복시키는 등은 대중조직의 공작이 지닌 배후를 읽을 수 있는 좋은 예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설봉산》은 일종의 첩보형식의 소설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탐정과 역탐정이 뒤얽힌 박력을 느끼게 한다. 투옥 중 그 안으로 내보내진 경찰 앞잡이들을 가려내는 일이나 역정보와 경찰정보의 빼내기 작전 등등은 이 소설은 어느 투쟁소설 못지않게 운동의 치열성을 맛보게 만든다.
3
농민문학을 민족해방 운동의 차원으로 승화시킨 이 작품은 단순한 경제투쟁에서 정치의식화해 간 농민들이 그 노선을 어느 쪽으로 잡아갔느냐는 데 시선의 초점을 맞춘다. 그것은 이 소설에서 지역적 농민투쟁 운동이 범국민적 투쟁조직으로 연계되어 가는 연결고리로서 만주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것으로 이어진다. 김일성의 항일무투로 연계되는 이 연결점은 비단 농민운동에 국한되지 않고 노동운동에까지 연계되어야 함은 끝장면에서 역설케 만든다. 이래서 길남의 집안 일을 작품 앞머리에 내세운 이 소설은 사건이 차츰 전개되어 가면서 이웃들로부터 마을 전체, 이웃 동네, 사회 구성원, 나라와 민족의 일로 그 시선이 확대되어 가면서 투쟁의 주체세력으로 농민―소자산계층을 포함하는 한편 중국에 이르러서는 노동자와의 연대성을 강조하게 된다. 일본인 공장주에게 빚을 진 채 파산지경에 처한 최인학의 경우나 그의 아들 남산은 이른바 소자산층의 각성된 민족의식의 한 전형으로 부각된다. 물론 최인학의 경우는 소친일파적 경향을 버릴 수 없으나 아들 남산은 아버지의 잘못을 깨닫고 오히려 농조원들의 집안 아이들 말에 따르는 것으로 그려진다.
이런 계급적 연대성의 강화는 한설야에게 8·15 뒤의 통전적 이념을 그대로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이것은 당대의 정치적 풍향계에 가장 민감했던 이 작가의 배려였겠지만 이 작품에서는 또한 러시아 혁명기념일을 맞은 각종 농민운동 행사가 무척 화려하게 묘사되고 있다. 노동절, 단오, 광주 학생운동 기념 등등과 함께 각종 기념행사 중 엄청난 비중으로 러시아 혁명 기념행사가 펼쳐지는데, 이는 물론 역사적 기록에 충실한 작가적 자세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즉, 적색농민운동의 기록들에 따르면, 러시아 혁명기념 행사가 무척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었던 것으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봉산》의 경우는 다른 장면과는 달리 이 장면에서만은 가장 농민 대중드의 현실과 거리감을 느끼게 하는 기념행사 장면의 묘사가 노옴을 부인할 수 없다.
도한 이 작품은 아이들의 싸움에 농조가 휩쓸려 들어가 버린 장면 역시 농조가 지닌 이성적 측면보다 감정적 측면에 치우친 묘사란 점을 느끼게 만든다. 그러나 8·15 이후의 어느 작품에서도 느낄 수 없는 식민지 시대의 치열한 농민운동의 증언으로 이 작품을 재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