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파 방정환(1899-1932:33세)과 색동회
소파 방정환 선생은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우리 나라 소년운동과 아동문학의 선구자로서, 1899년11월9일에 서울 야주개(현 서울 종로구 당주동)에서 싸전과 어물전을 경영하는 아버지 방경수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집안은 넉넉하였으나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어린시절을 가난한 환경에서 보냈다. 당시 살림이 얼마나 어려웠던지 12살 누나를 시집 보내야 할 형편이였다.
그는 어린시절 가난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오히려,'가난하고 슬픈 아이가 어찌 나 뿐이랴. 우리도 뜻을 모아 내일을 향한 일꾼이 되어야 한다.'며 동네 아이들을 모아 '소년입지회'를 조직, 모임의 회장을 맡았다. 방정환은 연극놀이를 하거나, 동화구연, 토론회, 연설회 등을 여는 모임으로 가꾸었다.
미동공립보통학교(현 미동초등학교)를 졸업한 방정환은 사업가가 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희망에 따라 선린상업학교에 들어갔다. 땔나무를 해다 팔아 학비를 벌어야 하는 고달픈 학교생활이었다.
이때 춘원 이광수 선생이 펴내던 잡지 '청춘'에 투고한 글이 실려, 글 쓰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어머니의 병환으로 학교마저 그만두어야 했던 방정환은 열일곱살의 나이에 한 달에 5원을 받는 토지조사국에서 일했다. 여기서 만난 유광열과 함께 '청년구락부'라는 단체를 만들어 연극을 만드는 등의 문화운동을 펼쳤다.
열아홉 살 되던 해 그는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자 천도교 3대 교주였던 의암 손병희 선생의 셋째 딸인 용화씨와 결혼하면서 천도교의 지원을 업고, 본격적인 소년 운동에 나섰던 것이다. 스무 살에 첫아들 운용 을 얻고,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해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1919년 3.1운동 때 천도교 비밀신문인 '조선독립신문'을 찍다가 일본경찰에 잡혀 일주일 동안 모진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이 일을 겪고 나서, '이 땅의 소년소녀들을 바르게 키우는 일이 이 나라를 살리는 길'이라는 생각으로 그는 3.1운동 직후인 1919년 말, 동경으로 건너가 토오요오(동양)대학 철학과에 적을 두고 아동 문학과 아동 심리학을 공부했다.
1920년 천도교에서 종합잡지인 "개벽"지를 창간하자 이 잡지의 일본 특파원으로 활약하면서 '잔물'이란 필명으로 아동문학 관련 글들을 쓰기 시작하였다. 1920년 8월 25일 선생은 '개벽 3호'에 번역동시 '어린이 노래 : 불 켜는 이'를 발표함으로써, 이 땅에 처음으로 '어린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1921년 방학을 맞아 서울에 온 선생은 '천도교 소년회'를 만들고, 당시만 해도 읽을 거리가 없었던 어린이들에게 외국동화를 번역한 '사랑의 선물'을 펴냈다. 이 책의 첫머리에 선생은 다음과 같이 썼다.
'학대받고, 짓밟히고, 춥고, 어두움 속에서도 우리처럼 또 자라는 불쌍한 어린 영들을 위하여 그윽히 동정하고 아끼는 사랑의 첫 선물로 나는 이 책을 짰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소파의 소년운동의 동기를 엿볼 수 있다. 1923년 3월 1일, 그의 소년운동과 아동문학의 결정체인 소년잡지 월간 '어린이'가 창간되었으니 바로 색동회 창립 직전의 일이다.
이 "어린이"지는 소파와 초기 색동회원의 소년운동 활동무대였다.
소파는 "어린이"잡지의 창간과 색동회조직의 동기와 관련하여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짓밟히고, 학대받고, 쓸쓸스럽게 자라는 어린 혼을 구원하자. 이렇게 외치면서 우리들이 약한 힘으로 일으킨 것이 소년운동이요, 각지에 선전하고 충동하여 소년회를 일으킨 몇 가지 일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소년회가 바로 천도교 소년회와 같은 각 소년단이고 소년문제연구회가 바로 색동회인 것이다. 색동회의 창립정신은 바로 소파가 이야기한 "어린 홍익 구원"인 것이다.
선생은 1924년 전국 소년지도자대회를 열어 어린이 단체를 하나로 뭉치게 했고, 이듬해 40 여 개 단체를 모아 '조선소년운동협회'를 조직했다.
1927년에는 어린이 단체를 통합한'조 선소년연합회'위원장을 맡았다. 이처럼 지칠 줄 모르게 어린이 운동에 앞장선 선생은 동요·동화·소년소설·동극 창작에 힘쓰고, 많은 외국 동화를 번역해 어린이들에게 마음의 양식을 제공하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뚱보'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뚱뚱했던 선생은 1931년 7월 23일 오후 6시 34분, "말도 마부도 새까만 흑마차가 나를 데리러 왔어. 어린이들을 두고 가니 잘 부탁하오." 라는 말을 남기고 33 세의 짧은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났다. 선생은 평생 어린이를 잘 키우는 것만이 우리의 살길이라 믿었다.
이 믿음에 따라 어린이와 어린이 사랑 운동에 온 몸을 바쳤다. 애국자이자 교육자, 아동문학의 선구자인 선생은, 어린이들의 마음 속에 영원히 살아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2. 초기 색동회의 주요활동
1)어린이날 제정과 행사
색동회의 창립일을 5월1일로 정한 것은 앞서도 말한 바 있는 어린이날 행사와의 관계 때문이었다.
색동회가 동경에서 태동하고 있을 무렵 색동회 동인들(소파와 진장섭)의 발의에 의하여 어린이날 행사가 논의되었는데, 당시 색동회가 아직 정식 창립되기 전이기 때문에 색동회 단독으로 행사를 처리하기 어려워 소년운동협회를 만들어 공동으로 국내에서 행사를 치루었다.
당시 5월1일은 메이데이(노동절)로서 휴일이었으며, 따라서 어린이들이 많이 참여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당시 성대하게 치러진 어린날 행사에 뿌려진 선전지의 내용에는 "젊은이나 늙은이는 일의 희망이 없다. 우리는 오직 나머지 힘을 다하여 가련한 후생되는 어린이에게 희망을 주고 생명의 길을 열어주자"는 취지문이 있었으며, 선언문에는"어린이는 어른보다 더 새로운 사람입니다. '내 아들놈', '내 딸년'하고 자기의 물건같이 여기지 말고 자기보다 한결 더 새로운 시대의 새 인물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굴리려 하지 말고, 반드시 어린 사람의 뜻을 존중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어린이를 어른보다 더 높게 대접 하십시요. 어른이 뿌리라면 어린이는 그 싹입니다."라는 말도 하였다.
세계 최초의 어린이 헌장인 셈이었다.
제2회, 3회의 어린이날 행사에도 색동회가 큰 역할을 하였음은 말할 것도 없다.
2)어린이"잡지 합평회
1923년3월에 창간호가 발간된 "어린이"지는 사실 동경에서 편집된 책이다.
당시 소파가 동경에 있었던 관계였는데, 이 당시 소파는 앞서 말한 대로 색동회 회원을 모집 중이었다. 따라서 색동회와 "어린이"지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할 것이다.
"어린이"지 초창기의 내용은 색동회 회원들의 작품으로 거의 메워졌으니 "어린이"는 색동회원들의 활동 무대였던 것이다.
색동회원들은 단지 작품만 실었던 것은 아니고 "어린이"지의 편집에까지 의견을 제시하였는데, 당시 색동회원들이 모여 그 책의 작품평과 표지, 목차등 모든 분야에 걸쳐 그들의 의견을 본사의 주간이었던 소파에게 보냈던 것이다.
당시 동인들의 집필 내용은 동화는 방정환, 마해송, 진장섭씨가 주로 맡았으며, 동요는 윤극영, 정순철씨가 동극은 고한승, 정인섭씨가 훈화는 조재호씨, 역사 이야기는 손진태씨가 맡았다.
그리고 그들은 합평회에서 어린이들의 육체적 발달과 지성, 감성의 발달 단계를 조화시켜야 된다는 견해도 제시되었다.
이를 보더라도 "어린이"지는 단순히 흥미만을 생각한 잡지가 아니라 교육적 내용이 풍부한 교육잡지라고 할 수 있으며, 실제 당시 학교의 참고교재로 쓰이기까지 했다.
3)전국소년지도자대회
전국소년지도자 대회는 1923년7월23일부터 일주일간 색동회와 "어린이"사가 공동 주최한 대회이다.
전국소년지도자대회의 개최 계획은 색동회의 모임에서 결의 되었는데, 전체사회는 정병기, 동요이론에 진장섭, 동요실제에는 윤극영, 정순철, 동화에 방정환, 동극에 조준기, 소년문제 강연에 방정환, 교육문제와 소년회 강연은 조재호가 맡기로 계획되었다.
또 참가자격은 지방 소년회 대표자와 유치원, 소학교 선생, 색동회 회원이 추천한 자로 정해졌는데, 실제 16개 소년회와 유치원 단체가 참가하였고, 개인적 참가자도 많았다.
당시 윤극영은 회고에서 "독립운동에 멍든 사람들이 악혈을 풀겠다고 대회로 몰려 들었다. 이때 우리의 강의는 추상적이 아니었던가, 그때 나는 강단에 올라서자 형님이나 아저씨 같은 연로한 앞전에 현기를 느꼈다. 그렇지만 그네들이 우리들을 받아 들였고, 우리는 동심문화 전달의 총역량을 기울였다. 새로운 교육관을 비롯하여 동화,동요,동극 등 각 분야에 걸쳐 우리들의 전공은 과시되었던 것이다."고 했다.
대회 참가자들은 이 대회가 인간운동임을 느꼈다고 했으며, 서울 시내 각 학교 참관 후 교육기관의 부실함을 실제로 체험하면서 사회 교육의 필요성을 깨달았다고도 했다.
1924년8월에는 제2회 전국소년지도자대회가 개최되어 전국 140여개소의 소년회가 참가하여 흩어진 단체들의 통합을 꾀하였고, 1925년에도 소파가 중심이 되어 소년지도자 강습을 위한 소년문제강연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4)세계아동예술전람회
세계 아동예술 전람회는 1928년10월 경성에서 열렸던 행사로서 "어린이"사가 주최하고 색동회가 후원한 우리나라 최초의 아동예술 전람회였다.
이 '세계아동예술전람회'는 1925년부터 계획된 행사로서 처음에는 '세계소년작품전람회'라는 이름으로 1925년5월에 열 생각이었으며, 그 취지는 "오리 짓밟히고 눌려온 그 귀엽고 어린 싹에 물주고 북돋우기 위하여"였다.
그러나 몇 차례 연기를 거듭하던 전람회는 1928년10월에 '세계아동예술전람회'라는 이름으로 열리게 되었다. 전람회가 수 차례나 연기된 까닭은 역시 작품 수집과 장소 등 대회 준비 관계에서 오는 어려움 때문이었지만 그래도 그때 정인섭씨 등 '색동회' 동인의 도움이 컸었다.
이러한 어려움 끝에 열리게 된 '세계아동예술전람회'의 행사 내용은
제1부:전조선 아동 작품
제2부:세계각국 아동작품(10여개국)
제3부:국내외 유치원 아동작품
제4부:아동국, 인형극, 가면극
제5부: 내외국 아동영화 사진, 세계저명 아동극 사진
제6부:각국 아동신문, 각국 아동서적
제7부: 각국 아동생활 풍속사진
제8부:세계각국 아동예술가 초상(동화작가, 동요작가 기타)
제9부:각지 소년 회합 포스터 및 프로그램
제10부:내외국 아동장난감, 특별관:일본화가협회 걸작원화, 특작 원화 40점 등이다.
이 '세계아동예술전람회'를 열게 된 배경을 소파는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유익한 지식이라 하며 수신과 산술만 구역구역 먹고 좋은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이요. 예술이라 하는 좋은 반찬을 잘 구해 먹어야 비로소 빠진 구석 없이 완전한 좋은 사람 - 전적생활을 잘 파지해 갈 수 있는 인물 - 이 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를 두고 동아일보 사설에서는
"어린이 운동이 실질적으로 일어난 지 만5년 만에 이룩된 최대의 결실'이라고 평가하고 '세계아동예술전람회'의 교육적인 의미에 대해서 "조선에서 처음 되는 계획인 '세계아동예술전람회'는 금일부터 열리게 되었다.
이것이 조선의 교육계 및 소년운동 선상에 다대한 참고 내지 자금이 될 것을 오인은 확신한다.
출품국의 수도 20에 달하여 비록 간단한 작품에서라도 각기 색다른 민족의 독특한 기품과 재질을 간취할 수 있음도 흥미있는 사실이려니와, 일반에 있어서 그 공통점을 발견함으로써 천지의 세계를 통하여 세계일간의 실정을 감득함도 이익일 것이다.
더욱이 소년소녀의 자유로운 상상력을 하여금 광활한 지구의 저 끝까지 자유롭게 놀게 함으로써 그 안목과 포괄력을 확대케 하는 등 일상 교과 이상의 다대한 효과가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중략..)
아동예술전람회에 있어서 교육자 된다, 일반 소년지도자로 자처하는 자, 또는 부모 된 자, 배움을 받을 점이 다대하리라고 생각한다.
더욱이 조선에 있어 일반 가정 또는 사회가 아동에 대하여 비교육적 태도를 가지는 일이 많은 것은 식자가 항상 통한을 불금하는 바다.
이 까닭에 소년애호 운동으로 어린들을 중심으로 하여 점차 진행 중에 있거니와 금회의 예술전람회가 조선의 아동에 대한 관념을 세계적인 수준에 올리는데 가장 유효한 한 방법임을 우리는 확신하다. 이것이 재래의 각 학교의 학예회에 비기어 이번의 계획이 더욱 의미 깊은 일이라 하는 바이다.."
라고 평한 바 있다.
이 사설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이 전람회 성과는 어린이의 전인교육에 대한 관심의 고조에 있다.
* 동화의 날은
색동회가 소파 방정환 선생이 태어난 날을 기념하고, 동화 들려 주기를 통해 어린이에게 꿈과 사랑을 심어 주자는 뜻에서
지난 1991년 제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