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전주이씨인데 왕족인가요?
2012.09.28 23:58
안녕하세요?
저는 전주이씨 양도공파 22대손인데요 인터넷에 떠도들 글을 보면 모두다 전주이씨 왕족은
아니라해서 제가 왕족이 맞나요? 맞으면 좀 자세히 설명해주세요 내공 100겁니다
* 완풍대군(完豊大君) 파의 항렬자 중 병용(항렬)자입니다.
*22 대 善○(선)=東○(동)=秉○(병)
re: 제가 전주이씨
2012.09.29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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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양녕대군에 대해서 알아보죠
1394년 태종 이방원의 장자로 출생하였다. 어머니는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閔氏)이며, 부인은 광산 김씨김한로의 딸이다. 이름 이제(李褆)이고 자 후백(厚伯), 시호는 강정(剛靖)이다. 1404년(태종 4) 10세 때 세자로 책봉되었다. 1406년 부왕 태종이 어린 세자에게 양위의 뜻을 밝히자 정치적 파장을 일으켰으며 외삼촌 민무구, 민무질이 어린 양녕에게 의탁하여 권세를 탐하다 처형당하는 사건이 일어나는 등 어린시절부터 정치적 파장이 있었다.
양녕은 성품이 자유분방하여 유교적 교육과 엄격한 궁중생활, 특히 왕세자로서 지켜야 할 예의법도에 잘 적응하지 못하였고 사냥을 좋아했고 기생을 탐하여 궁궐 내 처소에 여자를 불러들여 태종의 노여움을 사기도 했다. 그리하여 부왕인 태종은 물론 엄격한 규범적 생활을 강조하는 유학자들의 우려 대상이 되었고, 부왕은 세자로서 모범을 보이도록 타이르고 벌을 내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끝내 그 뜻에 부합하지 못하고, 남의 첩인 아리라는 여자를 탐하여 임신까지 시키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결국 궐 밖에서 아이를 낳게되었고 그의 비행을 감싸주던 장인 김한로는 귀양을 가게되었다. 황희도 세자 양녕을 두둔하다 처벌을 받았다. 결국 유정현(柳廷顯) 등의 상소로 폐세자되어 경기도 광주로 물러나 살게되었다. 양녕이 폐세자 되자 뒷날 세종이 된 셋째 아들 충녕대군(忠寧大君)이 책봉되었다. 당시 양녕은 자신의 비행을 충녕이 태종에게 고한 것으로 알고 충녕을 원망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세종은 이러한 양녕의 자유분방한 기질을 잘 알았기에 그에 대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는데 양녕을 탄핵하는 상소는 모두 물리고 받지 않았다고 전한다.
양녕이 궁궐을 나와서는 타고난 그의 기질대로 한량으로 생활하였는데 시, 서예, 음악 등 예술에 관심을 가졌고 일생을 풍류객으로서 자유분방한 생을 지냈다. 호탕한 기질로 술을 좋아하고 기생들과 어울렸으나 이러한 기질이 정도를 지나쳐 그의 문란함은 세종에게 여러차례 상소로 올려지기도 했다. 특히 여자와 어울린 간통사건이 많았으며 양녕의 자녀들도 방탕한 생활로 세간에 회자되었다.
문종이 사망하고 어린 단종이 보위에 오르자 정치적으로는 세조를 지지하였고 그가 일으킨 계유정란에는 직접적 개입하지 않았지만 세조가 조카(단종)와 정적(김종서 등 사육신)을 살해하는데 동조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에도 그의 방탕한 생활은 계속되었지만 정치적으로 세조를 지지한 덕분에 오히려 보호를 받았다. 69세를 일기로 사망하여 세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서울 남대문의 편액(扁額) '崇禮門(숭례문)'이 그의 필적이라는 설이 있다.
그리고 전주이씨에 관한 정보도 있네요
시조는 신라 때 사공(司功)을 지낸 이한(李翰)이다.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시조로부터 22세, 즉 한의 21대손이다. 그러나 성계의 고조부인 목조(穆祖) 안사(安社) 이전의 사적(事蹟)은 전혀 기록에 전해지지 않는다. 안사는 원래 전주 사람이었는데, 그곳 지주(知州:지금의 知事)와 사이가 나빠 강원도 삼척(三陟)으로 옮아갔다가 얼마 뒤 지주가 다시 그곳으로 부임해 오자 가족을 데리고 간도(間島)지방으로 가서 원(元)나라의 다루가치[達魯花赤:地方官]가 되었다. 그의 아들 익조(翼祖) 행리(行里:성계의 증조부), 또 그 아들 도조(度祖) 춘(椿:성계의 조부)도 때때로 두만강 지방의 천호(千戶)로서 원나라에서 벼슬했고, 춘의 아들 환조(桓祖) 자춘(子春)도 원나라의 총관부(摠管府)가 있던 쌍성(雙城:永興)의 천호를 지냈다. 자춘은 공민왕의 북강(北疆) 회수운동에 내응하여 쌍성 함락에 결정적인 공을 세워 이 지방의 만호(萬戶) 겸 병마사(兵馬使)로 임명되었다.
성계는 영흥 태생으로, 22세 때 처음으로 고려에 벼슬했으며, 아버지의 뒤를 이어 동북면의 병마사가 되어 원군(元軍)과 왜구 토벌에 공을 세워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이 되었고, 이 때부터 고려 말 중앙정권의 중추로 등장하였다. 전주이씨의 분파는 122파로서 거의 왕자대군(王子大君:嫡)과 왕자군(王子君:庶)을 파조로 하고 있으며, 시대 구분에 따라 크게 세 갈래로 나누어진다. 즉, 이태조의 고조부인 안사의 상계(上系)에서 갈라진 파, 안사 이후 이태조 이전에 갈라진 파, 이태조의 후손으로 왕자대군과 왕자군을 파조로 하는 파이다. 안사(18世) 이전의 분파로는 시조 한의 14대손인 단신(端信)을 파조로 하는 문하시중공파(門下侍中公派), 15대손 거를 파조로 하는 평장사공파(平章事公派), 17대손 영습(英襲)을 파조로 하는 주부동정공파(主簿同正公派), 안사의 종손 윤경(允卿)을 파조로 하는 대호군공파(大護軍公派), 한의 21대손 귀을(歸乙)을 파조로 하는 문하평리공파(門下評理公派) 등이 있다.
안사 이후 이태조 이전의 분파로는 안사의 아들인 안천(安川)·안원(安原)·안풍(安豊)·안창(安昌)·안흥(安興)의 5대군파(五大君派), 행리의 아들인 함녕(咸寧)·함창(咸昌)·함원(咸原)·함천(咸川)·함릉(咸陵)·함양(咸陽)·함성(咸城)의 7대군파(七大君派), 춘의 아들인 완창(完昌)·완원(完原)·완천(完川)·완성(完城)의 4대군파(四大君派), 자춘의 아들이며 태조의 서형제(庶兄弟)인 완풍대군파(完豊大君派)와 의안대군파(義安大君派) 등 18개의 파가 있다. 태조의 후손 분파(고종 이전까지)는 일반적으로 99파(25大君·74君)로 알려져 있지만 미취졸(未娶卒), 즉 미혼으로 죽었거나 무후(無後), 즉 후사(後嗣)가 없는 대군·군이 20명 정도가 되므로 실제로는 그 수가 줄어든다. 2003년 현재 전주이씨대동종약원(全州李氏大同宗約院)에 등록된 파종회는 모두 86개이다.
조선의 왕권은 전주이씨인 왕족(王親·宗親)을 주축으로 하고 왕대비·왕비·왕세자비의 동성친(同姓親:外戚)과 이성친(異姓親), 그리고 왕녀의 배우자와 그 근친 등 광범위한 혈연관계를 왕권의 일차적인 토대로 하여 발전·유지되어 왔다. 따라서 왕위를 둘러싸고 벌어진 골육간의 다툼은 조선 500년을 통해 계속되었다. 역사적으로 전주이씨는 방대한 씨족기반 위에서 정치권력 또는 정치세력의 중추를 이루었다. 즉, 상신(相臣:三議政) 22명, 문형(文衡:大提學) 7명을 배출하여 타씨족을 압도했으며, 문과 급제자 873명을 내어 이씨의 문과 급제자 총 3,190명의 27%를 차지하였다. 전주이씨 100여 파 중에서 으뜸가는 명가는 밀성군파(密城君派:琛, 世宗의 아들)로서 6명의 정승과 3대 대제학을 배출했으며, 덕천군파(德泉君派:厚生, 정종의 아들)가 부자 대제학 등 3명의 대제학과 영의정 1명을 내어 밀성군파에 버금간다. 그 다음으로는 3명의 정승을 배출한 광평대군파(廣平大君派:璵, 세종의 다섯째 아들), 정승 2명을 배출한 선성군파(宣城君派:茂生, 정종의 아들), 정승 1명과 많은 문·무관을 배출한 효령대군파(孝寧大君派:補, 태종의 둘째 아들) 등이 뛰어나고, 무림군파(茂林君派:善生, 정종의 아들)와 덕흥대원군파(德興大院君派:線,선조의 生父)는 무관(武官) 집안으로 유명하다.
오늘날 100여 파 가운데 후손이 가장 번창한 파는 효령대군파이고 광평대군파·덕천군파·밀성군파·양녕대군파 등이 뒤를 잇는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80만 8511가구에 260만 989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본관별 인구조사에서는 김해김씨(412만 5000명)·밀양박씨(303만 1000명)에 이어 3위를 차지하였다. 인구 구성비로는 전체 인구 가운데 5.7%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단은 전주이씨가 왕족인 건 맞습니다...
거기서 파가 또 갈리니 님은 일단은 왕족의 피를 잇는 후손인 거 맞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