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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의 글은 소설 '총의 울음'을 발행한 도서출판 박이정의 홈페이지에 게재된
'작가와의 인터뷰'를 옮긴 것입니다.( http://www.pjbook.com/)
역사소설 '총의 울음'이 어떻게 집필되었는지 저자가 직접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자화자찬 같아서, 다소 낯 간지럽지만(^^) 눈 질끈 감고! 우리 카페에도 소개할까
합니다. 많이 읽어주세욤~ <카페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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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을 며칠 앞둔 2014년 9월 5일 오전, 곧 출간될 역사소설
'총의 울음'의 저자 손상익 선생님을 출판사로 모셔 인터뷰를 했습니다.
'총의 울음'은 손상익 선생님이 무려 5년간의 집필과정을 거쳐 탈고한
첫 소설이자, 박이정으로서도 오랜만에 발행하는 소설책입니다.
140여 년 전, 조선을 침입한 프랑스와 미국 함대를 물리친 옹골찬
범 포수들의 투혼. 소설 ‘총의 울음’에 담긴 박진감 넘치는 이야기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작가선생님께 직접 들어보겠습니다.
<대담 : 디지털사업팀 손성원>
▲ 작가님 안녕하세요. 우선 손상익 선생님의 자기소개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천직처럼 글을 써왔던 사람입니다. 대학 졸업하고 신문 기자 노릇을 하고, 신문기자로 기사를 작성한 것 외에도 서울신문 신춘문예의 만화평론 부문에 등단을 하면서 만화와 대중문화 평론과 함께 문화연구자로 다양한 이론서도 집필하고...
이럭저럭 한 열권 정도의 저서를 발표한 것 같습니다. 소설 ‘총의 울음’ 집필시간까지 포함하면 지난 25년간은 오로지 글을 쓰며 살았노라, 그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 이번에 탈고하신 '총의 울음'의 집필 계기를 간략하게 소개하신다면?
우리 개화기 역사를 재조명하고 싶은 간절함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언론학을 전공한 사람이어서, 역사학 전공자들과는 역사 자체를 대하는 관점이 조금 다를지도 모릅니다. 팩트에 치중하기보다 그 역사적 사건의 인과를 통시적으로 보고자 노력합니다. 어떤 역사적 사안들이 우리의 현재 삶에 끼친 영향, 그런 관점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고...
예를 들면 요즘 영화 등으로 화제가 되는 이순신 장군의 임진왜란이랄까, 무려 사백여년 전에 벌어진 전쟁이었지만 오늘 날의 한국과 일본 사이의 외교에서도 충분히 그 의미를 재조명할 가치가 있는 것이지요. 마찬가지 관점에서 우리의 개화기 때 조선을 지켰던 범 포수들의 투혼을 그린 ‘총의 울음’ 역시 21세기 한국과 미국의 관계 재정립을 위한 하나의 키워드가 될 수 있습니다.
신미양요나 병인양요의 그 처절했던 백두산 범 포수의 항쟁은 임진왜란의 조선 수군보다 훨씬 강한 임팩트로 제 가슴을 두들겼습니다. 오늘을 사는 대한민국 국민의 강인한 파이팅 정신. 패기와 투혼은 불과 140여 년 전 백두산 범 포수가 보여주었던 그 옹골찬 투혼과 일치한다는 생각이 들면서 곧장 '총의 울음'을 집필하리라 결심했습니다. '총의 울음'은 아주 강인한, 강한 영혼을 가진 우리 조상들의 이야기입니다.
▲ 책 제목을 '총의 울음'이라 작명한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신지요?
이 소설 ‘총의 울음’ 상․하권 원고의 약 절반 정도 분량인 전자책 ‘Tiger Hunter’(타이거 헌터)가 지난 2013년 1월에 이미 발표됐습니다. 타이거 헌터는 백두산 자락에서 고려 범을 사냥했던 범 포수를 일컫는데, 신미년에 침공한 미국군이 붙인 이름이지요.
조선 후기 함경도, 평안도 지역 백두산 자락에서 활약한 범 포수들의 용감무쌍함은 중국과 러시아에까지 그 명성을 떨쳤습니다. 17세기 중엽 효종 임금의 북벌 계획도 사실은 범 포수를 염두에 두고 구상됐음이 여러 정황으로 확인됩니다. 효종 임금은 은밀하게 북벌을 추진하면서 현재의 함경도 청진에다 북병영을 설치하고 산포수 자원, 즉 언제라도 동원할 수 있는 범 포수들을 관리했습니다.
애석하게도 효종 임금이 일찍 승하하는 바람에 북벌은 수포로 돌아갔지만, 그러나 효종 임금 재위기간에 파병했던 두 차례 나선정벌(羅禪征伐: 1651-1654)에서 흑룡강 유역의 러시아 군과 총격전을 벌여 거의 궤멸상태로 몰고 가는 대승을 거뒀지요. 그때부터 조선의 군부는 백두산 범 포수들을 ‘최정예 조선군’으로 여겼습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때도 조선의 주력부대는 전국에서 차출된 화승총 산포수였고, 그 가운데서도 핵심인 강화도 수비군은 백두산 범 포수를 중심으로 편성됐습니다. 화승총의 개량형인 부싯돌화승총(燧石銃)으로 무장했던 러시아군과는 달리, 프랑스와 미군은 첨단 라이플과 거대 함포로 무장했습니다. 그럼에도 백두산 범 포수들은 임진왜란 때 들어왔던 그 구닥다리 화승총으로 맞섰습니다.
항복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노라며 눈을 홉떴던 범 포수의 화승총 총성은, 그야말로 눈물이었습니다. 적군의 라이플에 비하면 딱총보다 못했던 화승총이었지만, 범 포수의 기개만은 침략군을 새파랗게 질리게 했고 끝내는 조선을 떠나게 만들었습니다. 소설 제목 ‘총의 울음’은 한없이 약했던 당시 조선의 군사력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론 서구열강의 침략을 물리친 범 포수가 흘린 ‘희열의 눈물’이기도 합니다.
▲ 표지와 부록의 그림이 인상적인데요. 이 그림을 그린 분은 누구신지요?
지금의 젊은 세대는 잘 모르겠지만, 90년대 황석영 씨의 원작소설 ‘장길산’을 만화로 그려 20권 전집의 ‘만화 장길산’을 발표했던 사실체 그림 작가, 백성민 화백입니다. 백성민 선생은 지금의 중앙대학교 전신인 서라벌 예술대학 회회학과에서 동양화를 전공하셨는데 리얼한 붓 터치와 펜 터치 그림으로 “한국적 토종 화풍”이라는 화단의 평가를 받습니다.
백 화백은 작가와 이십여 년 째 호형(呼兄呼弟)하는 사이여서 ‘총의 울음’ 원고를 전해드리자 흔쾌히 “그림을 그려 주겠다”고 약속 하셨고, 그 약속을 지켰습니다. 백 화백은 지금도 한국화 창작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 화승총과 범 포수가 주인공인 역사소설, 색다르고 흥미롭습니다. 집필 계기나 배경, 혹은 집필 목적을 간략하게 소개해 주셨으면 합니다.
2009년 가을에, 인터넷 서핑 도중 흥미로운 사진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신미양요 광성보 전투(1871. 6) 당시에 미군 포로로 잡혔다가 석방된 조선군 사진이었는데, 그 사진은 미국의 종군사진작가 페리스 비토가 찍었어요. 우리 땅에서 벌어진 국제전쟁을 기록한 최초의 보도사진으로 언론사에서도 꽤나 의미 있는 사진입니다.
광성보를 지킨 조선군은 전원 순국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실은 부상병가운데 실신했던 분들은 포로가 됐습니다. 사진 속 앞줄의 무릎을 꿇은 분, 그분 표정이 참… 석방이 되는데도 기쁜 표정이 아니에요. 분명히 뭔가 사연이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자 궁금증은 더욱 증폭됐습니다. 결국 그분에게 ‘정복길’이라는 이름을 지어 드렸어요. 그렇게 시작한 소설이 바로 ‘총의 울음’입니다.
우리나라가 예사로운 나라는 아니지요. 오천년 역사를 통해 끈질긴 민족혼이 이어진 탓이랄까, 수많은 외침으로 말미암아 고난으로 점철된 세월도 많았지만 가슴 펴고 당당하게 지냈던 자랑스러운 때도 있었습니다. 만주 들판을 호령했던 광개토 대왕도 계셨고... 조선시대만 보더라도 북방 여진족을 몰아내고 6진을 개척한 김종서 장군이 있었고, 침노하는 왜적을 바다에서 와장창 때려 부순 이순신 장군님도 계셨습니다.
근대사가 시작되던 무렵의 우리나라는 동북아시아 한 귀퉁이의 자그만 반도 국가였습니다. 독재왕권이 절대 권력을 휘둘러서 백성들은 근근이 명줄을 이어가던 참으로 보잘것없는 빈국이었습니다. 그 시절은, 우리의 상전이던 중국은 물론 조선에 비해 국력이 월등했던 일본도 서구함대의 함포에 찍소리 못하고 제 땅과 항구를 내어준 ‘생쥐몰골’을 하고 있었지요.
그러나 조선만은, 프랑스와 미군의 침공을 차례로 물리쳤습니다. 백두산 범 포수의 그때 그 용맹스러웠던 투혼은 아무리 자랑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때의 기개를 모두의 가슴에 담고 새롭게 다져, 대한민국을 세계의 강국으로 우뚝 세워야 합니다. 국력이 하찮아서 괄시받는 나라의 꼴은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 말아야합니다.
‘총의 울음’을 집필하게 된 가장 큰 목적이 바로 개화기 역사의 재조명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처지를 위축시켜 볼품없는 모습으로 전락시켰던 역사. 그것의 잘못을 바로잡고 올바른 역사관을 정립하려 합니다. 소설 ‘총의 울음’이 그 출발점 노릇을 했으면 합니다.
▲ 이번이 첫 소설이신데요, 어떤 준비과정을 거쳤는지 소개해 주십시오.
병인양요나 신미양요는 우리나라가 개화의 여명기, 근대화 초입 부분에서 겪은 국제 전쟁이었습니다. 1866년 병인양요를 일으켰던 프랑스의 군대는 나폴레옹 3세가 인준하고 파병시킨 정예 육전대(해병대) 병사들이었죠.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랜트 대통령이 의회의 인준을 받아서 한국에 정식 원정군을 파병시킨 겁니다.
이런 국제 전쟁이었음에도, 그 전쟁을 기록하고 있는 우리의 자료는 조선왕조실록의 단편적인 기술을 제외하면 객관적으로 기술한 사료가 전무한 실정입니다. 역사소설의 관건은 고증입니다. 얼마나 정확하게 그 시대와 사회상을 묘사하는가에 따라 소설의 질적 수준이 결정되지요. 모자라는 우리 기록은 어쩔 수 없이 전쟁당사자였던 프랑스와 미국 측 기록에 기대기로 했습니다.
하하하... 인터넷 세상이 참으로 위대함을, 프랑스와 영국의 관련 자료를 서치하면서 통감했습니다. 전 세계를 거미줄(www)처럼 엮는 인터넷 정보망의 고마움을 정말로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거기에다 구글의 무료 번역 툴(tool)을 쓸 수 있었기에, 미국과 프랑스의 관련 자료들은 너끈히 소설의 참고자료가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측 기록과 프랑스, 미국의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데만 2년이 소요됐습니다. 그 뒤에 우리나라 역사를 기준삼고 그네들이 기록한 역사를 변수(變數) 삼아 한 가닥의 이야기로 묶어내는 작업에 꼬박 3년을 매달렸습니다. 탈고하기까지 약 5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 소설책이 상․하권 한 질로 다소 긴 분량이어선지 등장인물도 많습니다. 간략하게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이 책에 등장하는 캐릭터는 크게 나누어 두 부류입니다. 첫 번째는 우리 역사에 실재하셨던 조상 분들입니다. 나이어린 고종 임금은 물론 섭정하셨던 흥선대원군, 신미양요 때 강화도 진무영 진무중군으로 조선군 총사령관을 맡으셨던 어재연 장군님, 안동 김씨 출신의 실권자였던 김병국 대감이라든가 병인양요 당시의 순무사 이경하, 부평부사 이기조 등은 한 시대를 풍미하셨던 분들입니다. 또 로저스 제독이라든가 미국 해병대 지휘관 틸턴 대위, 최초로 한국에서 전사한 해군 중위 맥키 등의 미군들도 현존했던 인물들입니다.
두 번째 부류는 작가가 창조해낸 순수 가공인물입니다. 천애고아 출신의 범 포수 정복길과 그의 친구 부뜰이, 회령의 허초시와 강계포수 등은 대표적 인물입니다. 소설 ‘총의 울음’은 실존했던 조상과 가공한 인물들이 마치 실제로 교류하는 듯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예를 들자면 어재연 장군이 정복길을 친자식처럼 여기도 허초시와 어재연 장군이 동년배의 우정을 쌓고, 심지어는 미군 틸턴 대위가 정복길의 생명을 구해주는 등의 이야기 설정이 그러합니다.
실제 역사와 소설의 가공이 어울려 이야기를 만들지만, 모든 결말은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 시공간으로 수렴됩니다. 가공인물이 없었던 사실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의 기존 가치를 보편타당하게 설명하는 디테일(detail)의 역할을 맡습니다. 이 소설에는 틸턴 대위가 미국의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글 두 통이 소개됩니다. 그 편지는 실제 편지였고 단어나 문장도 원문 그대로를 실었습니다. 소설의 형식을 빌었지만, 역사만큼 정직하고 소설보다 더 감동적인 이야기를 만들려고 노력했습니다.
▲ 특히 애착이 가는 등장인물이 있다면, 어떤 부분을 강조하고 싶었는지 알려주시겠습니까.
흠... 두 분의 어른, 허 초시와 강계포수입니다. 열네 살에 천애고아가 된 정복길을 거두었던 허 초시는 관북제일의 염초장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정복길을 떠맡아 건장한 청년으로 성장시킨 강계포수는 조선 제일의 백두산 범 포수였습니다.
이 두 분 어른은 정복길이 올바른 심신을 갖추도록 이끌어줍니다. 허 초시는 외동딸 은연이를 정복길과 혼인시키고, 정복길을 백두산 범 포수로 키웠던 강계어른은 그와 함께 강화도로 출정하여 미군 해병대와 맞서는 강렬한 투혼을 일깨웁니다. 진무중군 어재연 장군도 정복길을 마치 자식처럼 건사합니다.
시대가 아무리 험한들 그 사회를 지탱하는 어른들이 제 자리를 지킨다면, 우리 사는 세상은 편안합니다. ‘총의 울음’은 풍전등화 같던 개화기의 조선을 지켜낸 범 포수 이야기와 함께 그 범 포수들을 넉넉하게 품었던 ‘어른’의 이야기도 풀어놓습니다.
▲ 상.하권 전체를 통틀어 어재연 장군에 대한 이야기가 상당히 많은 부분을 차지합니다. 어재연 장군은 어떤 분이셨나요?
조선의 역사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 역사를 통 털어도 그 분만 한 리더십을 가졌던 명장(名將)은 흔치않습니다. 고려나 조선시대에는 상비군을 조직하여 내우외환에 대비하기보다, 난리가 벌어져야 비로소 왕이 사령관을 임명하고 임시 토벌부대를 만들었습니다. 조선은 한양에 오군영을 두었지만 전쟁을 대비하는 실전 전투조직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상비 육․해군 전투사령부가 설치된 것은 병인양요 직후입니다. 프랑스군의 강화도 점령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조선 군부가 “뒷북치기 토벌부대 편성은 더 이상 안 되겠구나”깨달은 결과였습니다. 그래서 중무장 편제의 상비군체제로 강화한 강화진무영을 구축했습니다. 거기에 배치된 직업군인과 병장기는 서울의 오군영을 모두 합친 것보다 강력했습니다.
어재연 장군은 기존의 순무사와 다른 개념의 토벌대장 역할을 맡았습니다. 신미양요가 발발하기 직전에 제수된 진무영 진무중군으로서 당시 조선군부 육․해군의 총사령관 직책이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전시 사령관 즉 원수(元帥)에 해당합니다.
▲ 어재연 장군이 수자기(帥字旗)를 고종 임금으로부터 하사 받아 찰주소에 내걸고 신미양요 전투에 임했다고 합니다. 수자기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있는지요?
2014년 9월 초에 1,700만 명에 가까운 관객을 동원하여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한국영화 '명량'을 보셨는지요. 이순신 장군이 단지 열두 척의 배로 330여 척의 왜선을 맞아 승리를 거둔 전투신이 한 시간이 넘도록 박진감있게 전개돼 참 볼만했는데... 그 장면을 눈썰미 있게 지켜본 사람이라면, 장군이 승선한 대장선에 게양된 수자기를 발견하셨을 겁니다.
나라의 명운이 오로지 이순신 장군의 어깨에 걸렸고, 그런 막중한 임무를 맡은 장군에게만 비로소 수자기가 하사됐습니다. 조선 전쟁사에서 이순신 장군 이후 어재연 장군이 처음으로 그 수자기를 내걸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판옥선에 수자기를 나부끼게 했다면, 어재연 장군은 찰주소(札駐所; 장군지휘대) 상공에서 그 깃발이 펄럭이게 했습니다.
▲ 신미양요 때 순절한 어재연 장군을 비롯하여 범 포수들로 편성됐던 무명용사들은 현재 어떻게 기억되고 있는가요?
... 참 안타까운 부분입니다. 미국의 사례를 들춰보면, 신미양요에 참전했던 로저스 제독 이하 1,400여명의 모든 장병의 전투기록이 객관적으로 서술되고 지금도 남아있습니다. 비록 이등병일지라도 공훈을 세운 군인에게는 훈장을 수여하여 충정을 기렸습니다.
참으로 인상적인 부분은, 미군 장교가 아무리 큰 전공을 세워도 훈장을 받지 못했습니다. 전공은 오로지 병사들의 몫이었지요... 모든 공적을 몇몇 장수가 차지하고 휘하 병사들은 죽거나 말거나 ‘무명용사’ 로 대접하던 조선과는 참으로 대비됐습니다.
조선왕조의 신미양요 기록에서 무명용사에 관한 부분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합니다. 전상자 숫자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않았고, 미군이 철수한 뒤의 손돌목 돈대 참호에서 발견한 사체 수십 구에 관한 기록이 전부입니다. 그나마 공적이 알려지고 신원이 파악된 분은 어재연 장군을 비롯한 군관급 장수 예닐곱 명에 불과합니다.
신미양요의 주인공이었던 350여명의 백두산 범 포수. 그 분들은 순절하고서도 106년 동안 역사의 뒤안길에 사라져있었습니다. 1977년에 이르러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강화도 전적지 유적의 복원사업을 지시하고 나서야 비로소 명예회복이 이뤄졌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신미양요 무명용사 순절비를 세우라”는 지시를 내렸고 그 다음해 광성보에 순절비가 준공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백두산 범 포수들은 제단에 올린 술 한 잔을 받았습니다.
▲ 소설이 역사적 배경인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이 두 전쟁에 대한 손상익 선생님의 역사적 판단이 어떠한지 들어보고 싶습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따로 떼놓고 그 자체만을 평가하는 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습니다. 그 전쟁을 평가하기 전에 우선 19세기의 중국과 일본, 조선 등 소위 동아시아 3국에 불어 닥친 서세동점의 기류를 먼저 살펴야하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1840년대에는 영국군이 수천여 명의 군대를 광동성에 투입해 수만 명 중국군을 학살하다시피 했지요. 그 이후로는 온갖 억지를 부려 중국의 노른자위 땅과 항구를 빼앗아 버렸습니다. 1, 2차 아편전쟁이 그것이었지요. 서구의 총포 앞에 거인 중국도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 10여년 뒤인 1853년, 이번엔 미국의 페리제독이 이끈 원정함대가 일본을 덮쳤죠. 바쿠후의 비실비실하던 사무라이들이 흑선이라 불린 미국전함의 함포소리에 오줌을 지렸고 결국 화친조약을 맺었습니다. 그 후에 미군에게 덤벼들었다가 무자비한 총포공격을 받아 수백 명의 일본군이 죽어나갔고 쇼군은 다시 무릎을 꿇어 일본이 강제 개항을 하게 됐죠. 사무라이들에겐 참 자존심 상하는 노릇이었습니다.
그 10여년 후, 이번엔 프랑스가 조선을 침략했지요. 1866년의 병인양요입니다. 그때 프랑스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함포와 라이플도 겁내지 않고, 죽을지언정 항복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 이상한 조선군을 맞닥뜨렸기 때문입니다. 정족산성에서 범 포수로 편성된 조선군의 기습공격을 받고 이십여 명의 사상자가 생겨나자 프랑스군은 야반도주하듯 조선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 5년 뒤 신미년에는 미국이 또 조선에 쳐들어왔습니다. 로저스 제독은 그랜트 대통령과 미국의회가 승인한 조선군 원정함대를 이끌고 강화도 초지진에 해병대원을 상륙시켰습니다. 이번에도 광성보를 지켰던 범 포수들이 “죽일 테면 죽여 봐라!” 눈을 치뜨곤 한 치도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그 범 포수의 투혼에 질린 미군들은 광성보를 함락하고 성조기까지 게양했음에도 불구하고, 5년 전 프랑스군과 마찬가지로 조용히 조선 땅을 철수했습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는 조선의 승리였습니다. 19세기 서세동점의 역사에서 서구의 대규모 원정군을 두 차례나 잇달아 물리친 경우는 아시아 전체를 통 털어도 조선이 유일했습니다.
지금도 미국이나 프랑스는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에 관한 평가자체를 꺼립니다. 미군은 신미양요를 ‘승리한 패전(Victorious Failure)’이라 기록합니다. 우리로서는 자랑스러워야 마땅한 전쟁입니다. 범 포수의 투혼과 파이팅은 지금의 후손 모두가 본받아야 마땅합니다.
▲ 상.하권 말미에 각각 부록이 달려 있는데요. 특히 상권 부록의 화승총에 관한 역사는 마치 논문처럼 정리가 잘 돼있어서 정말 재밌게 읽었습니다. 그에 관해 덧 불일 이야기가 있으시다면.
우리나라에서 몇 년 째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는 책 가운데 하나가 캘리포니아 대학의 지리학과 교수 제레드 다이아몬드가 지은 '총 균 쇠'입니다. 인류의 역사를 뒤바꾼 총과 세균 그리고 제철의 힘, 거기에 지리적 환경의 중요함을 설파한 책이지요.
그 책 내용가운데 하나인 ‘총’이 바로 화승총입니다. 물론 이 소설의 화승총이야기는 다이아몬드 교수의 저작물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소설 상권의 부록에 담긴 화승총 내용은 우리나라의 ‘강화 화승총’을 기준으로, 그것이 어떤 경로를 통해 조선의 범 포수를 무장시켰는지를 추적했습니다. 이 자료를 수집하는 데에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됐음은 물론입니다.
소설 ‘총의 울음’에 등장하는 주인공 가운데 사람을 제외한다면, 그 나머지 주인공은 단연코 ‘강화 화승총’입니다. 그 뒤를 떠받치는 조연이 범 포수의 화승총 한 방에 속절없이 나가 떨어졌던 ‘고려 범’이고요.
▲ 작가께서 ‘강화화승총 동호인회’ 카페를 직접 운영하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어떤 활동을 하시는지요?
소설 집필을 시작하면서 자료 수집과정에서부터 참으로 안타까운 부분이 하나 있었습니다. 불과 140여 년 전 강화도를 지킨 백두산 범 포수들의 화승총임을 입증할 만한 유물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병인양요나 신미양요 당시의 강화진무영에는 수천 명의 육군이 주둔했으므로 최소한 수천 정의 화승총이 진무영 무기고에 수장돼 있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 총들은 병인양요 때 도망친 프랑스 군은 물론이고 5년 뒤 신미양요의 미군들이 싹쓸이하듯 노획해갔고, 또다시 무기고에 채워놓은 화승총들은 일제 침략군이 모조리 노략질해간 것이 뻔했습니다.
그러던 중 2011년에 재일교포 사업가 이석조 씨란 분이 일본의 골동품 점을 전전하던 조선 화승총 하나를 안타까운 마음에서 사재로 구입, 한국 박물관에 기증했지요. 그 화승총 총목에는 ‘辛丑改備江華庫藏(신축개비강화고장)’, 즉 1901년 강화도의 무기고를 개수하며 보유했다'라는 붓글씨가 또렷이 적혀 있었습니다.
강화 화승총의 사진을 접하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강화도를 지켰던 범 포수의 혼령만 기릴 것이 아니라, 범 포수의 아우라(aura)가 박혀있는 그 강화화승총을 복원해보자”는 생각이 스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탄생된 것이 다음 카페 ‘강화화승총 동호인회’였습니다.
(웃음) 회원자격이 까다로워 아무나 동호회원이 되지는 못합니다. 지금 준회원 이상의 자격을 갖춘 분은 80명가량입니다. 소설 ‘총의 울음’이 대중적인 인기를 얻게 된다면, 강화화승총 동호인회의 활동도 더욱 활성화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덧붙이자면, 화승총 동호인회 활동가운데 하나로 국립중앙박물관의 배려로 실물 강화화승총을 두 차례나 실측했고 ‘실물복제 허가’까지 받아냈습니다. 2011년 가을부터 시작된 화승총 복원작업은 수백만 원의 경비를 투입했으나, 아직 완전한 형태를 만들어내지 못한 상태입니다.
* 링크 : 다음카페 ‘강화 화승총 동호인회’
▲ 소설 집필에 도움 주신 분을 소개하신다면.
집필방향 설정과 소설책 발행에 대하여 전직 언론인인 유준상 씨와 간호윤 인하대 교수님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제 주변의 문인, 역사학자들과 많은 토론을 가졌고 그 결론들은 소설에 담았습니다. 또 작가의 집안어른인 손병환 아저씨의 원고내용 평가가 집필에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어재연 장군의 행적을 취재하고 그 내용을 검증받기 위해 4대 족손인 어흥선 씨와 5대 혈손인 어준 씨, 함종 어씨 중앙종친회장을 지낸 어달선 씨 등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 외에도 이미 발간된 전자책 ‘타이거 헌터’를 읽은 많은 독자들이 책 내용에 관한 질의를 해주었고 그 분들의 따끔한 지적도 소설책 내용보완에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 '총의 울음' 작가로서, 집필활동 이외에 특별히 준비하시는 일이 있다면?
강화도에 남겨진 백두산 범 포수의 그 처절했던 투혼, 죽음을 불사했던 파이팅의 정신을 이어받는 문화 사업을 한번 벌여 보았으면... 그런 생각이 간절합니다. 백두산 범 포수라는 무형의 문화자산은, 강화도에 남아 있는 그 어떤 유형의 문화유적보다 값지고 선명하다고 자부하니까요.
후대에 전해줘야 할 값진 정신 유산, 백두산 범 포수의 자취가 남아있는 초지진과 덕진진, 광성보를 한데 묶은 ‘특화 유적지’를 우선 개발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강화화승총도 다수 복원하여 광성보 개펄에다 전용 사격장을 만들었으면 합니다. 그리하여 신미양요를 기억하려고 몰려온 사람들이 그곳에서 “쾅! 꽝!” 화승총 실 사격을 체험했으면... 그럼 꿈도 꿉니다, 하하하!
▲ 마지막으로 독자에게 당부할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대한민국은 위대합니다. 극도로 가난했던 나라에서 불과 반세기 만에 세계의 강국 반열에 올랐습니다. 역사에서 교훈을 찾지 못하는 민족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의 역사를 쉽게 잊어버리는 민족은 결코 승리할 수 없습니다.
- 감사합니다. 이것으로 인터뷰를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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