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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본인의 정체성을 '시민'이나 '노동자'나 '생산자'로 두기 보다는 '소비자'로 두는 경우가 많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소비자라는 정체성이 사회적으로 만들어내는 효과가 무엇인지, 또 그런 정체성으로 자신을 정치영역의 소비자로 자임할 때 정치개혁의 차원에선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심도 깊은 고민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는 아마도 '울림'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느냐의 문제와도 연결이 되겠지요. 그런데 제가 새로 긴 글을 쓸 시간이 없어서, 제가 쓴 글들 중에 '소비자'란 키워드로 검색을 해봐서 나오는 글의 조각들을 붙여서 문제의식을 드러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소비자'라는 정체성이 사회문제에 미치는 영향
부정적 영향 : "소비자는 왕이다"라는 의식의 효과
//(...) 먼저 던져야 할 질문은 “소비자를 ‘왕’으로 대우하는 것은 소비자에게 도움이 되는 것일까?”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나는 “알 수 없지만, 나라면 아니라는 쪽이 걸겠다.”고 답변하겠다.
한국의 자영업자들은 그들의 소비자들에게 ‘살인적으로’ 친절하다. 반면 유럽의 동네 자영업자들은 소비자들에게 무뚝뚝한 것으로 악명이 높다. 그 결과는 무엇일까? 한국의 자영업자들과 회사원들이 각각 그들의 소비자를 챙기기 위해 노동강도를 늘리고 자존심의 훼손을 감수하는 데에 비해서, 유럽의 자영업자들은 비교적 널럴하게 살고 있지 않은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소비만 하고 사는 게 아니라 재화든 서비스든 생산을 해야 한다는 점을 기억하자. 결국 ‘소비자는 왕’이라는 구호는 서로가 서로를 효율적으로 착취하는 방법을 가르치면서 극소수 부르주아를 제외한 만인을 고통에 빠뜨리고 만다.
이런 식의 ‘소비자 대접’이 ‘소비자 주권’과는 큰 관련이 없다는 것도 직관적으로 금방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경우 ‘소비자는 왕’이라는 말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보편타당한 공리처럼 인지되고 있지만, 제도적인 차원에서의 ‘소비자 주권’이 올바로 행사되고 있다고 보기에는 미비한 점이 많기 때문이다.(...)// http://weirdhat.net/xe/ahriman/23575
//(...) 우리는 종종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손님이 종업원을 불러내서 음식의 질이나 불편한 서비스에 대해 비난하는 광경을 본다. 슬픈 것은 그렇게 불려나와 경을 치는 종업원도 대개 소비자와 비슷한 또래의 젊은이란 사실이며, 그 소비자는 자신의 파트타임 노동 경험을 근거로 그 종업원을 더 효율적으로 괴롭힌다는 거다(이를테면 ‘당신이랑 말할 생각 없으니 점장 불러 주세요!’라고 다그친다든지). 물론 그 소비자는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광경은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 우리 같은 평범한 시민들이 무언가에 대해 불만을 품어 봤자 괴롭힐 수 있는 것은 비슷한 우리들 밖에 없다는 참혹한 진실을 보여 준다. 소비자일 때는 말단의 노동자나 자영업자들을 괴롭히고, 내 노동 시간엔 또 다른 소비자들에게 괴롭힘을 당한다.
우리의 삶을 훨씬 강력하게 규정하는 자본 권력과 정치권력은 대개 이들의 ‘사적인 복수극’에 신경 쓰지 않고 마치 자신들은 이 문제에 대해 아무런 관련도 없다는 듯이 뒤로 숨는다. 공적으로 제기되어야 할 문제를 사적인 문제로 만드는 것이다. 군대를 가지 않는 사회 지도층에 쌓인 박탈감을 나이 어린 외국 국적의 연예인들에게 분노를 터뜨리며 해소하는 온라인상의 세태도 실은 이와 비슷한 범주에 속한다.(...) // http://weirdhat.net/xe/ahriman/32475
--> 요약하자면 "소비자는 왕"이란 의식 자체에서 나온 상호봉사는 오히려 우리의 삶을 괴롭히는 요인으로 작용할 뿐더러, 자본권력이나 정치권력에 책임을 묻기에는 부족함이 있고 다른 종류의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죠.
긍정적 영향 : 정치적 소비
//(...) 좀 더 쉽게 말하자면 <디 워>의 흥행은 ‘정치적 소비’의 결과라고 봐야 한다. 유럽에서 ‘정치적 소비’라는 것은 가격경쟁력이나 품질경쟁력이 아닌 다른 정치적 요인에 의해 소비할 상품을 결정하는 소비자들의 행태를 의미한다. 가령 유럽의 노동자들은 노동자에 대한 처우가 좋은 기업의 제품을 소비함으로써 연대의식을 과시하고 장기적으로는 자기 자신의 복리후생을 도모한다. 또 많은 유럽의 시민들은 친환경적인 기업의 제품을 소비함으로써 생태주의에 대한 지지의사를 드러낸다.
한편 한국에서는 유럽과는 다른 종류의 비경제적 소비 행태가 존재했다. 바로 박정희의 산업정책에 부응하는 소비였다. “국산품을 애용하자.”로 대변되는 이러한 소비형태를 ‘정책적 소비’라고 부를 수 있을 텐데, 크게 보아 ‘정치적 소비’로 봐도 될 것 같다. 유럽과 한국의 차이가 있다면 유럽에서는 비경제적 소비의 판단의 준거가 개인의 정치성이었지만, 한국에서는 독재자의 산업정책이었고 이에 대한 시민들의 자발적/비자발적 호응이었다는 것일 테다.(...)// http://weirdhat.net/xe/ahriman/16632
//(...) 하지만 나는 “어떻게 라면이 ‘보수라면’과 ‘진보라면’으로 나뉠 수 있나? 라면맛에 보수맛과 진보맛이 따
로 있나?”라는 주장에 깔려 있는 세계관에 동의하지 않는다. 거칠게 말하면 이들은 라면에는 ‘정치’가 있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과연 그러한가? 물론 라면맛에 진보니 보수니 하는 것들이 있을 리 없다. 하지만 라면을 생산하는 방식, 판매하는 방식, 홍보하는 방식에는 정치적인 평가가 따를 수 있다. 나는 농심의 옹호자들이 “라면에는 정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GMO와 미국산 쇠고기를 사용하지 않는 농심은 삼양에 비해 정치적으로 못할 것이 없다”고 말하기를 희망한다.
우리가 따라잡기를 염원하는 선진국에서는 ‘정치적 소비’라는 것이 있다. 그것은 가격경쟁력이나 품질경쟁력이 아닌 다른 정치적 요인에 의해 소비할 상품을 결정하는 소비자들의 행태를 의미한다. 가령 노동자들은 노동자에 대한 처우가 좋은 기업의 제품을 소비함으로써 연대의식을 과시하고 장기적으로는 자기 자신의 복리후생을 도모할 수 있다. 또 많은 시민들은 친환경적인 기업의 제품을 소비함으로써 생태주의에 대한 지지의사를 드러낸다.
전경련 같은 단체나 한국의 시장주의자들은 이런 얘기를 들으면 기업에 ‘이윤 추구’ 이외의 다른 의무가 부과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할 것 같다. 하지만 “기업은 이윤을 추구한다”는 명제는 사실명제다. 그렇기 때문에 소비자들이 ‘정치적 소비’를 하면 그들은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 소비자들의 요구에 정치적으로 반응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저들은 이 명제를 마치 당위명제로 취급하여 기업은 가격경쟁력이나 품질경쟁력 이외의 것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이는 소비자들의 정치적 각성을 억누르는 어떤 형태의 근본주의에 불과하다. 농심을 위한 변명에 좀 찝찔한 구석이 있다면, 오직 품질에만 신경 쓴다는 그 ‘장인정신’이 바로 이런 형태의 근본주의를 소비자에게 강요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조·중·동 광고기업 불매운동의 구체적인 실현과정에 비판받을 부분도 있겠지만, 나는 이러한 조류에서 정치적 소비의 의미를 키워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돈을 냄으로써 투표를 합니다. 세상을 해치는 인간들을 더 부유해지지 않도록 하는 거죠.” <죽음의 밥상>에 나오는 어느 소비자의 인터뷰다. 이 ‘마트에서의 투표’는 정치적 민주주의를 보완하는 하나의 대안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 http://weirdhat.net/xe/ahriman/21590
---> 요약하자면, 자본주의 사회가 요구하는 방식과 다른 방식의 '정치적 소비'가 가능하고, 이것은 정치적 민주주의를 보완하는 어떤 긍정적인 역할을 산출해낼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2) '정치소비자'라는 유비는 어떤 효과를 만들어낼 수 있나.
부정적인 부분 : 경제분야와 정치분야의 맥락이 달라지는 부분을 놓칠 수 있음
//(...) 그것은 정확하게 시장논리의 유비추리다. 정치인과 지식인이 생산자의 위치에 있고, 시민 혹은 대중이 소비자의 위치에 있다. 그러므로 정치인과 지식인에게 필요한 실천적 훈계는 모든 기업인이 체득하고 있는 바, “손님은 왕이다.”는 명제에 굴복하라는 것이다. 물론 내가 보기에도 최소한 정치인에겐 “손님은 왕이다.”는 명제에 굴복하라는 윤리적인 요구가 가능할 듯 싶다. 그것은 한국의 정치인에게 부족한 덕목이며, 정치인들이 그 덕목을 체득한 사회는 한국 사회보다는 훨씬 살기 좋을 것이다.
그러나 기업인에게 “손님은 왕이다.”는 윤리적인 덕목이라기보다는 거부할 수 없는 물리학적 법칙에 가깝다. 이윤추구를 위해 소비자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기업인이 정치인보다 특별히 더 윤리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은,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강제되지 않은 그들 기업의 노동자에 대한 정당한 대우에 매우 무심하다는 사실만으로도 간단히 증명된다.
반면 정치인, 몇몇 정치학자들의 표현을 빌자면 ‘여의도 정치계급’은 기업과 달라서 지지율의 극대화를 추구하지 않는다. 다만 상대정파보다 지지율이 높기를 바랄 뿐이다. 무슨 얘기냐 하면 전국민의 50%가 정치에 극도로 실망하여 기권을 하더라도, 그것은 ‘여의도 정치계급’에 문제가 되는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투표하는 50% 국민들 중에서 다수 정파가 되기만 하면 된다. 기권이 늘어나는 걸 걱정하는 이들은 여의도 정치계급이 아니라 한국정치나 민주주의를 걱정하는 사람들이다. 반면 정치자금의 문제로 가면 그들 역시 기업처럼 이윤의 극대화를 추구한다고 볼 수 있는데, 모두 알다시피 이 부분에서 그들은 손님을 왕처럼 대우하는데 남들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다. 시종일관 돈을 낼 수 있는 이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윤리적 명제가 아니라 정치인의 행동을 강제할 수 있는 어떤 체제다. 그리고 그런 체제를 고안하고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정치적으로 각성된 시민 이외엔 없다. 하지만 자신을 소비자의 위치로 상정하고, 정치인에게 “나를 왕처럼 대우해 주세요. 그게 당신의 의무에요.”라고 요구하는 사람은 ‘여의도 정치계급’에게 결코 소비자로 대우받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대의받지 못하는 대중’으로 전락하게 된다.(...)// http://weirdhat.net/xe/ahriman/14991
//(...) 물론 ‘소비자는 왕’이라는 말이 니 말처럼 결국엔 모두를 괴롭히는 것으로 작동하는 것일 수는 있겠으나 적어도 어떤 미덕은 있는 것이고 그 점을 배우라고 요구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있겠다. 소비자를 왕으로 대접하라고 말하는 이들은 기업은 소비자에게 그런 대접을 하는데 정치인들은 유권자에게 그럼 대접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불만’으로 내세우는 것 같다. 그런 ‘불만’을 품을 수도 있다. ‘마케팅’ 운운하는 조언은 딱 그만큼의 맥락에서만 타당하다. (사실 좌파진영의 마케팅 능력이 조악한 것은 사실이며 재고되어야 한다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결국엔 현실적인 효력을 지니는 조언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그것은 정치의 영역을 규준하는 원리가 시장원리와는 좀 다르기 때문이다.
기업이라면 소비자의 숫자를 되도록 늘려 그들의 이윤을 극대화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그러나 정치인이나 정치세력이라면 상황은 다르다. 그들은 되도록 많은 유권자의 지지를 얻어야 할 필요는 없고, 단지 상대편보다 더 많은 유권자의 지지만 얻으면 된다. 정치에 실망하여 기권자가 되는 시민들의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그들은 타격이 없다는 뜻이다. 정치인들도 지지자의 숫자에 구애받지만, 기업인과 꼭같은 방식으로 구애받는 것은 아니다. 결국 “이놈도 저놈도 내게 친절하지 않으니까 난 아무런 ‘정치적 상품’도 구매하지 않겠어!”라는 식의 판단은, 감정적으로는 이해가 되지만 정치집단들에게 어떤 타격도 입히지 못하고 스스로에게 손해만 끼칠 가능성이 높다. (기권율이 아무리 높아도 싫어하는 정치인이 계속 권력을 휘두를 거라는 점에서 그렇다.) 정치집단들에게 영향력 있는 ‘소비자’로 인정받으려면 그냥 물건을 안 사는 것만으로는 안 되고 다른 제품을 직접 구매해서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소비자의 입장에서라면 “나는 여기 편하게 앉아 있을 테니 옷을 벗든 똥을 싸든 내게 물건을 사도록 해봐.”라는 식의 접근으로도 원하는 물건을 얻을 수 있겠지만, 정치적 영역에서는 결코 그렇지 않다. (...)// http://weirdhat.net/xe/ahriman/23575
---> 요약하자면, <안철수 밀어서 잠금해제>에서도 썼던 것인데 경제영역에선 '소비자의 소비하지 않음'이 큰 문제가 되지만 정치영역에선 '유권자의 기권'이 정치세력이 얻을 수 있는 파이의 크기를 줄이지 않음. 따라서 소비자라고 유비하더라도, 정치영역의 소비자는 경제영역의 소비자보다 훨씬 더 적극적인 활동을 해야 함. 소비자(유권자)가 이런 활동을 충분히 하지 못하고 생산자(정치세력)가 그들을 대의하려는 역할을 방기한 상황에서 '안철수 현상'이란 화산의 분출이 이루어졌다는 것이 정확한 분석. 즉 '안철수 현상'은 (이제는 많은 이들이 하는 얘기지만) 대의되지 못한 이들의 크기가 기성 정당 두 개의 크기에 맞먹을 정도로 거대해진 맥락에서 발생. '안철수 현상'을 단순한 바람으로 치부하고 폄하하는 태도가 적절하지는 않은 이유.
긍정적인 부분 : '소비자 단체'의 필요성, 정치세력이 무력해진 시대의 중간단체의 필요성, 조직화의 필요성 등등.
// (...) 그래서 선진 민주주의 국가의 시민 사회는 국가 권력이나 자본 권력을 대신 호출해 낼 수 있는 중간 단체들을 조직해 왔다. 언론은 정당, 이익 집단, 운동 단체들과 함께 그런 중간 단체들 중 하나다. 만일 우리가 신문 한 부를 600원에 구입하지 않고 5천 원을 주고 사게 된다면 그러니까, 월 15만 원의 구독료로 신문을 구독하는 독자가 10만 명만 존재한다면, 우리의《경향신문》과 《한겨레신문》은 정부와 삼성의 비리를 낱낱이 까발리고 양질의 대안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현재의 매체 환경에서 이런 가정은 현실적이지 않다. 사라져 가는 《르몽드》나 《가디언》에 해당하는 매체를 한국 사회에서 만들어 내자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적어도 그런 목표를 염두에 두고 활동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신문 광고 시장의 현실상 《경향신문》과 《한겨레신문》을 단순히 구독하는 것이 도움이 안 된다면, 주간지 구독 운동이라도 벌여야 한다. 《오마이뉴스》과 《프레시안》에 대해 우리는 소정의 구독료를 납부하는 독자 모임이 콘텐츠의 독립성과 질에 대한 평가를 하는 식의 제도적 변혁을 상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비록 블로고스피어와 트위터 세상이 공론 형성에 적대적이라도, 블로거 연대나 트위터리안 연대가 공론 형성에 기여할 가능성은 충분하다.(...) // http://weirdhat.net/xe/ahriman/32475
//(...) 즉 ‘소비자로서의 자세’를 벗어던지는 것이 정치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는 개인의 입장에서 훨씬 더 유리한 길이라는 것이다. 좌파정당이 마케팅 전략을 가지고 행동해야 한다고 요구하면 그것은 타당한 지적이 되겠지만, 정치에 관심을 지니는 시민들에게 당신들의 처지에서 마케팅 운운해봤자 아무 의미도 없다는 사실을 얘기하는 것 역시 타당한 지적이다. 우리는 정치집단에 거액의 후원금을 쾌척할 수 있는 부르주아가 아니라 겨우 한 표의 권리와 당원이 되어 약간의 당비와 후원금과 노동력을 제공할 수밖에 없는 시민들이기 때문이다. 진중권은 촛불 시위를 정리하면서 시민들에게 “한나라당이라도 좋으니 입당해라.”고 권유했는데,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정치적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선 ‘소비자’보다는 훨씬 더 적극적으로 행동해야 하는 것이다.(...) // http://weirdhat.net/xe/ahriman/23575
---> 요약하자면, 결국 중앙정치와 시민을 매개할 수 있는 중간단체들이 필요함. 우리가 흔히 상상해왔던 매개는 정당, 언론, 노동조합, 운동단체 등이었음. 그런데 진보정당 운동의 몰락으로 시민들에게 권유할 수 있는 매력적인 정당이 사라지고, 언론은 불신을 받으며, 노동조합으로 조직하기 쉬운 정규직 노동자 비율이 현저하게 줄어든 이 시점에선 다른 종류의 중간단체가 필요할 수 있음. '대의되지 않은 영역'에 대한 조직화가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이것들을 통해 정당이나 언론이나 노동조합이나 기타 운동단체들에도 힘을 싣거나 강화할 수 있을 것임. '협동조합 경제'라는 실험이나 그중에서도 '정치소비자 협동조합'이라는 시도도 대체로 이런 지점에서 그 필요성을 인정할 수 있을 것임.
그러나 '정치소비자 협동조합'이란 것이 정당, 언론, 노동조합, 운동단체 등과 구별되는 어떤 활동을 할 수 있는지, 그 활동들을 통해 기존의 매개단체들을 강화하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인지, 어떤 종류의 사람들을 어떤 전략으로 조직화하려고 노력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좀 더 구체적이고 심층적인 고민과 논의가 필요할 것.
첫댓글 긴 글 잘 읽었습니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글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