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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풍제월(光風霽月)... 비가 갠 뒤의 바람과 달처럼 마음결이 명쾌하고 집착이 없으며 시 원하고 깨끗한 인품이라는 뜻으로 북송 시인이자 서가인 황정견이 주돈이를 기려 쓴 글을 조광조의 인품에 비겨 천옹 이재泉翁 李縡가 바위에 썼다. 李縡(1680~1746)는 경종 때 한 성판윤을 지낸 노론의 대표인물로 말년에 소론과의 정쟁에 밀려 용인의 한천(寒泉)에 은 거하며 후학을 길렀다. 광풍제월은 주돈이의 인품을 칭하는 말인데 조광조의 인품을 주돈이에 빗댄 표현이다 이 '염락정파(濂洛正派) 수사진원(洙泗眞源)' 8자는 도봉산 도봉서원 앞 계곡에 자리한 바위에 새겨져 있는 송준길(宋浚吉 1606-1672)의 필적(筆跡)이다.
무우대 논어에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 쏘이다’에 근거한 글씨이다
제월광풍갱별전 료장현송답잔원(霽月光風更別傳 聊將絃誦答潺湲)은 우암송시열의 글씨로 비가 온 뒤 맑고 청명한 하늘의 모습으로 염계(溓溪) 주돈이의 인품을 칭송한 것이며 14자의 시구는 주자(朱子)가 백록동 서원 강회에서 학생들에게 오직 유학에 전념하여 도덕적 품성을 기르고, 절대로 출세를 위한 과거공부나 현실을 도피하는 망상을 하지 말도록 권고한 두편의 시 가운데 한 구절씩 발췌한 것 고산앙지(시경(詩經)에 나오는 것으로 “높은 산처럼 우러러 사모한다”는 뜻. 김수증이 정암 조광조의 학덕을 사모한다는 의미에서 새긴 것으로 추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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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재 지: 서울시 도봉구 도봉동 ❏배향인물: 조광조(趙光祖) 송시열(宋時烈) ❏창건연도: 1573년(선조 6) ❏사액연도: 1573년(선조 6) ❏향 사 일: 음력 3월10일(춘향제) 9월10일(추향제) |
도봉서원은 서울에 소재한 현존하는 유일한 서원으로 도봉산 입구 등산길에 오르면 우측 옛 영국사 터에 위치 해 있다. 남언경이 양주목사로 부임하여 1573년(선조 6) 지방유림의 공의로 조광조(趙光祖)의 학문적 사상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고 위패를 모셨다.
창건과 동시에 ‘도봉(道峯)’이라는 사액을 받았으며 송시열(趙光祖), 권상하(權尙夏), 이재(李縡) 등이 이곳에서 유학을 경마하였고 1696년 송시열(宋時烈)을 추가 배향하였다.
1775년(영조 51) 어필사액을 다시 받아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400여 년간 양주, 파주, 포천, 서울지역에 있는 선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하나 홍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 훼철되었으며 위패는 땅에 묻었다.
1903년 지방유림에 의해 단을 설치하여 봄, 가을에 향사를 지내 오다가 6.25전쟁으로 다시 중단되었다. 1970년 도봉서원재건위원회가 구성되어 1971년 복원 매년 음력 3월10일(춘향제) 9월10일(추향제)에 전국 유림 및 지역유지가 모여 전통향사를 지내고 있다.
1)주벽-조광조(趙光祖, 1482∼151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菴). 한성 출생. 개국공신 온(溫)의 5대 손이며, 육(育)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충손(衷孫)이고, 아버지는 감찰 원강(元綱)이다. 어머니는 여흥 민씨(驪興閔氏)로 의(誼)의 딸이다.
17세 때 어천찰방(魚川察訪)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가, 무오사화로 화를 입고 희천에 유배 중이던 김굉필(金宏弼)에게 수학하였다. 학문은 ≪소학≫·≪근사록 近思錄≫ 등을 토대로 하여 이를 경전 연구에 응용했으며, 이때부터 성리학 연구에 힘써 김종직(金宗直)의 학통을 이은 사림파(士林派)의 영수가 되었다. 이때는 사화 직후라 사람들은 그가 공부에 독실함을 보고 ‘광인(狂人)’이라거나 혹은 ‘화태(禍胎)’라 하였다. 친구들과도 자주 교류가 끊겼으나, 그는 전혀 개의하지 않고 학업에만 전념하였다 한다. 한편, 평소에도 의관을 단정히 갖추고 언행도 성현의 가르침을 따라 절제가 있었다.
1510년(중종 5)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1506년 중종반정 이후 당시 시대적인 추세는 정치적 분위기를 새롭게 하고자 하는 것이 전반적인 흐름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성균관 유생들의 천거와 이조판서 안당(安塘)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1515년(중종 10) 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라는 관직에 초임되었다. 그 해 가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전적·감찰·예조좌랑을 역임하게 되었고, 이 때부터 왕의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는 유교로써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아야 한다는 지치주의(至治主義)에 입각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역설하였다. 이와 함께 정언이 되어 언관으로서 그의 의도를 펴기 시작하였다.
이 해 장경왕후(章敬王后, 중종의 제1계비)가 죽자 조정에서는 계비 책봉문제가 거론되기에 이르렀다. 이 때 순창군수 김정(金淨), 담양부사 박상(朴祥) 등은 중종의 정비(正妃, 폐위된 愼氏)를 복위시킬 것과 신씨의 폐위를 주장했던 박원종(朴元宗)을 처벌할 것을 상소했는데, 이 때문에 대사간 이행(李荇)의 탄핵을 받아 귀양을 가게 되었다. 이에 대해 조광조는 대사간으로서 상소자를 벌함은 언로를 막는 결과가 되므로 국가의 존망에 관계되는 일이라 주장, 오히려 이행 등을 파직하게 하여 그에 대한 왕의 신임을 입증받았다. 이것을 계기로 원로파(元老派), 즉 반정공신과 신진사류(新進士類)의 대립으로 발전, 이후 기묘사화의 발생 원인이 되었다.
그 뒤 수찬을 역임하고 곧이어 정랑이 되었다. 1517년에는 교리로 경연시독관·춘추관기주관을 겸임했으며, 향촌의 상호부조를 위해 ≪여씨향약 呂氏鄕約≫을 8도에 실시하도록 하였다. 주자학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고려 말이었으나 널리 보급되지는 못했고, 조선 초기에 와서도 사장(詞章)의 학만이 높이 숭상되었기 때문에 과거에 있어서도 이것에만 치중했고 도학(道學)은 일반적으로 경시되었다. 그러나 조광조의 도학정치에 대한 주창은 대단한 것이었고, 이러한 주창을 계기로 당시의 학풍은 변화되어갔으며, 뒤에 이황(李滉)·이이(李珥) 같은 학자가 탄생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도학정치는 조선시대의 풍습과 사상을 유교식으로 바꾸어놓는 데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즉, 조선시대에 일반서민들까지도 주자의 ≪가례 家禮≫를 지키게 되어 상례(喪禮)를 다하고 젊은 과부의 재가도 허락되지 않게 되었다.
1518년 부제학이 되어서는 유학의 이상정치를 구현하기 위해 사문(斯文)의 흥기를 자신의 임무로 자부했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우선 인주(人主)의 마음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미신 타파를 내세워 소격서(昭格署)의 폐지를 강력히 주청,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이를 혁파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어 그 해 11월에는 대사헌에 승진되어 부빈객을 겸하게 되었다. 그는 한편으로 천거시취제(薦擧試取制)인 현량과(賢良科)를 처음 실시하게 하여 김식(金湜)·안처겸(安處謙)·박훈(朴薰) 등 28인이 뽑혔으며, 이어 김정(金淨)·박상(朴尙)·이자(李耔)·김구(金絿)·기준(奇遵)·한충(韓忠) 등 소장학자들을 뽑아 요직에 안배하였다.
그는 이와 같이 현량과를 통해 신진사류들을 정계에 본격적으로 진출시키는 실마리로 삼았다. 이들 신진사류들과 함께 훈구세력의 타도와 구제(舊制)의 개혁 및 그에 따른 새로운 질서의 수립에 나섰다. 그리하여 이들은 1519년(중종 14)에 이르러 훈구세력인 반정공신을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즉, 그들은 우선 정국공신(靖國功臣)이 너무 많음을 강력히 비판하였다. 그리고 성희안(成希顔) 같은 인물은 반정을 하지 않았는데도 뽑혔고, 유자광(柳子光)은 그의 척족들의 권귀(權貴)를 위해 반정했는데, 이러한 유의 반정정신은 소인들이나 꾀하는 것이라며 신랄하게 비난하였다.
또한, 이들은 권좌에 올라 모든 국정을 다스리는 데 이(利)를 먼저 하고 있으므로 이를 개정하지 않으면 국가를 유지하기가 곤란함을 극력 주창하였다. 이의 실천 대안으로 반정공신 2·3등 중 가장 심한 것은 개정해야 하고, 4등 50여 인은 모두 공이 없이 녹을 함부로 먹고 있으므로 삭제함이 좋을 것이라는 위훈삭제(僞勳削除)를 강력히 청하고 나섰다.
이러한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반정 초기에 대사헌 이계맹(李繼孟) 등은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많아 외람되므로 그 진위를 밝힐 것을 주장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신진사류들의 주장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미 반정공신들은 기성 귀족이 되어 있었고, 현실적으로 원로가 된 훈구세력을 소인배로 몰아 배척하려는 급격한 개혁주장은 중종도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침내 2·3등 공신의 일부, 4등 공신 전원, 즉 전 공신의 4분의 3에 해당되는 76인의 훈작이 삭탈당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급진적인 개혁은 마침내 훈구파의 강한 반발을 야기시켰다. 훈구파 중 홍경주(洪景舟)·남곤(南袞)·심정(沈貞)은 경빈박씨(敬嬪朴氏) 등 후궁을 움직여 왕에게 신진사류를 무고하도록 하였다. 또한, 대궐 나뭇잎에 과일즙으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자를 써 벌레가 파먹게 한 다음에 궁녀로 하여금 이를 따서 왕에게 바쳐 의심을 조장시키기도 하였다. 한편, 홍경주와 공조판서 김전(金詮), 예조판서 남곤, 우찬성 이장곤(李長坤), 호조판서 고형산(高荊山), 심정 등은 밤에 신무문(神武門)을 통해 비밀리에 왕을 만나고는 조광조 일파가 당파를 조직, 조정을 문란하게 하고 있다고 탄핵하였다. 이에 평소부터 신진사류를 비롯한 조광조의 도학정치와 과격한 언행에 염증을 느껴오던 왕은 훈구대신들의 탄핵을 받아들여 이를 시행하였다.
그 결과 조광조는 김정·김구·김식·윤자임(尹自任)·박세희(朴世熹)·박훈 등과 함께 투옥되었다. 처음 김정·김식·김구와 함께 그도 사사(賜死)의 명을 받았으나,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의 간곡한 비호로 능주에 유배되었다. 그 뒤 정적인 훈구파의 김전·남곤·이유청(李惟淸)이 각각 영의정·좌의정·우의정에 임명되자 이들에 의하여 그 해 12월 바로 사사되었다. 이 때가 기묘년이었으므로 이 사건을 ‘기묘사화’라고 한다.
그 뒤 선조 초 신원(伸寃 :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되어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묘에 배향되었다. 그 뒤 그의 학문과 인격을 흠모하는 후학들에 의해 사당이 세워지고, 서원도 설립되었다. 1570년 능주에 죽수서원(竹樹書院), 1576년 희천에 양현사(兩賢祠)가 세워져 봉안되었으며, 1605년(선조 38)에는 그의 묘소 아래에 있는 심곡서원(深谷書院)에 봉안되는 등 전국에 많은 향사가 세워졌다. 또한, 이이는 김굉필·정여창(鄭汝昌)·이언적(李彦迪) 등과 함께 그를 동방사현(東方四賢)이라 불렀다. 저서로 ≪정암집≫이 있는데, 그 중 대부분은 소(疏)·책(策)·계(啓) 등의 상소문과 몇 가지의 제문이고, 그 밖에 몇 편의 시도 실려 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2)송시열(宋時烈, 1607~1689)
조선후기의 학자·명신으로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庵)·화양동주(華陽洞主),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송갑조의 아들이며 사계 김장생과 신독재 김집으로부터 사사(師事)받았다. 27세에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635년에는 봉림대군의 사부가 되어 훗날 효종과 깊은 유대를 맺는 계기가 되었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일체의 관직을 사양하고 향리에 낙향하여 10년간 학문에만 몰두하던 중 1649년에 효종이 즉위하자 기용되어 북벌 계획의 핵심인물이 되었다. 이후 송시열의 정치 생활은 북벌·예송과 관련하여 부침(浮沈)을 계속하였다.
조정에 나아가기보다는 향리에 은거한 기간이 대부분이었으나 사림의 중망 때문에 서인의 거두로, 혹은 노론의 영수로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1689년의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재집권하면서 유배와 사약을 받은 이후, 송시열의 행적에 대해서는 당파 간의 칭송과 비방이 무성하였다. 그러나 1716년의 병신처분과 1744년의 문묘 배향으로 그의 학문적 권위와 정치적 정당성은 공인되었고 영조 및 정조대에 노론의 일당 전제가 이루어지면서 그의 역사적 지위는 더욱 견고하게 확립되고 존중되었다.
송시열의 서원 제향은 1694년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잡자 대대적으로 추진되어 청주의 화양서원을 비롯, 수원 매곡서원, 영동의 초강서원, 제주의 귤림서원, 강릉의 오봉서원, 경주의 인산서원 등 전국적으로 약70여개 소에 이르며 사액(賜額) 서원만도 37개소가 된다. 저서로는 주자대전차의 주자어류소분 이정서분류 논맹문의통고 경례의의 심경석의 찬정소학언해 주문초선 계녀서등이 있고, 문집으로는우암집(167권)·송자대전(215권) 송서습유(9권) 속습유(1권) 등이 간행되었다.
경내 건물로는 3칸의 사우(祠宇), 유도문(由道門)이라 편액된 신문(神門), 동협문(東夾門), 서협문(西夾門) 등이 있다. 사우의 오른쪽은 조광조 위패가 왼쪽에는 송시열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서원 정면에는 홍살문과 하마비가 있으며, 서원 오른편에는 성균박사 노은 남궁복 선생기념비가 있다.
1)도봉동문
이 바위글씨는 송자 또는 대노(大老)의 존칭을 받으신 대현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 1607~1689) 선생의 친필이다. 우암 선생이 도봉서원에 이르자 많은 선비와 주민유지들이 모여와서 강의를 요청하므로 며칠을 머물며 학문을 강론하였고 재학생들의 요청으로 붓을 들어 글씨를 남기니 “道峰洞門” 과 “霽月光風更別傳 聊將絃誦答潺湲-제월광풍갱별전 요장현송답잔원”이다.
2)무우대와 제월광풍갱별전 요장현송답잔원(霽月光風更別傳 聊將絃誦答潺湲)
우암 송시열 선생은 현종 9년(1668) 10월, 62세 때에 도봉서원에 와서 정암 선생을 추모하며 사당을 참배하였는데, 우암 선생이 도봉서원에 이르자 많은 선비와 유지들이 모여와서 강의를 요청하므로 며칠을 머물며 학문을 강론하였고, 또한 재학생들의 요청으로 붓을 들어 도봉산입구에 새겨놓은 “道峰洞門”과 또한 “霽月光風更別傳 聊將絃誦答潺湲”라는 글씨를 썼주었고 이 14자의 글씨는 서원 앞 계곡의 바위에 깊이 새겨졌다.
3)성균박사 노은 남궁복 선생기념비
고종 9년(1871년)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300년의 역사를 이어온 유서 깊은 도봉서원도 철패됨에 따라 정암 선생은 용인의 심곡서원에, 우암 선생은 여주의 대로사(大老祠)에 배향하였다가 1970년에 양주향교의 전교인 남궁복씨의 발의로 도봉서원재건위원회를 창립하여 경내에 사우를 다시 세우고 정암 및 우암 선생의 위판을 병향하여 춘추제향을 받들어 오고 있다. 도봉서원 옆에는 검은색의 기념비가 하나 서있는데 "성균박사노은남궁복선생기념비"라고 되어 있고 측면에는 작은 글씨로 그의 치적이 새겨져 있는데 1970년에 도봉서원재건위원회를 발의한 남궁복 선생의 기념비이다.
도봉서원 문화재 지정사유
도봉서원은 1573년 정암 조광조(趙光祖·1482∼1519)를 추존하기 위해 세워졌으며, 현재 서울시 기념물 제28호 ‘도봉서원과 각석군(道峰書院과 刻石群)’으로 지정되어 있다.
도봉서원과 각석군(道峰書院과 刻石群)은 서울특별시 도봉구에 있는 조선시대의 서원과 각석군이다. 2009년 10월 22일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28호로 지정되었다.
[지정사유]
도봉서원은 조선 전ㆍ후기의 가장 대표적인 성리학자인 조광조와 송시열을 배향(配享: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냄)한 사액서원(賜額書院)으로 백사 이항복 등 저명한 시인ㆍ묵객들이 시문을 남긴 오늘날 서울 지역 내 가장 대표적인 서원이다. 비록 1871년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어 유적의 대부분이 멸실되었으나 서울 지역 내 다른 서원과 달리 사당의 기단과 옛 사료상의 도봉서원 유적으로 소개된 각석군(刻石群)이 서원 터 앞 계곡에 대부분 원형대로 남아 있어 유적의 경계를 비교적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들 유적들을 차치하고서라도 각종 문헌이나 시에서 경치가 아름다운 것으로 손꼽히던 경승지(景勝地)에 해당하므로 보존가치가 크다. 따라서 도봉서원과 통합된 경관을 형성하고 있는 도봉동문(道峰洞門)에서 복호동천(伏虎洞天)까지의 계곡, 그리고 이들 계곡 안팎에 분포하고 송시열 등 명필들의 글씨 또는 시문이 새겨진 각석(刻石)들을 일괄 서울특별시 기념물로 지정, 보존하고자 한다.
[조사 보고서]
서원(書院)은 학덕이 높은 유학자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올리고, 지역의 인재들을 교육하던 지방의 고등교육기관이다. 오늘날 서울 지역 내에는 도봉서원(道峰書院)ㆍ사충서원(四忠書院)ㆍ노강서원(鷺江書院)ㆍ민절서원(愍節書院)ㆍ구암서원(龜岩書院) 등 총 5개의 서원이 분포했다. 그 가운데 도봉서원은 1573년(선조 6)~1574년(선조 7) 양주목사(楊州牧使) 남언경(南彦經)이 조선 중종때 신진 사림(士林) 세력을 배경으로 도학정치(道學政治)를 실현하고자 했던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1482~1519)가 자주 찾던 도봉산 자락에 사당 등을 세워 조광조를 모시고 기린 데서 출발해 1696년(숙종 22)부터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1607~1689)의 위패까지 함께 모시던 서원이다.
율곡(栗谷) 이이(李珥 : 1536~1584)의 「도봉서원기(道峰書院記)」에 따르면 도봉서원이 세워진 터는 원래 영국사(寧國寺)라고 하는 사찰이 있던 곳인데 어느 시기엔가 절은 폐사(廢寺)되었지만 일대가 절의 이름을 따 여전히 영국동(寧國洞)이라고 불려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조광조가 젊었을 때 그곳의 경치〔泉石〕를 몹시도 좋아해 자주 찾았고, 조정에 나아가서도 공무(公務)를 마치고 나면 수레를 몰아 찾아가 놀았다 한다. 이곳의 아름다운 경치는 송시열의 수제자로 도봉서원 운영에도 직접 참여한 바 있는 한수재(寒水齋) 권상하(權尙夏:1641~1721)의 「소광정기(昭曠亭記)」나 시문에 뛰어났던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1564~1635)의 「도봉서원기(道峰書院記)」ㆍ택당(澤堂) 이식(李植:1584~1647)의 「題道峰書院」등에도 언급되어 있는데 권상하는 ‘물과 돌이 맑고 깨끗하여 본래부터 경기 일원에서 제일 이름난 곳〔水石朗潔, 素稱畿內第一名區〕’이라고 했고, 이정구는 ‘성곽을 등지고 있는 명산이라고 하면 꼭 도봉산과 삼각산을 말하게 되는데 그 계곡과 수석(水石)이 아름답기로는 영국동(寧國洞)과 중흥동(重興洞)이 가장 뛰어나다.
모두 두 산의 하류에 있다〔負郭名山, 必稱道峰三角 其溪壑水石之勝, 寧國洞重興洞爲最, 皆兩山之下流也〕’라고 썼으며, 이식은 ‘도봉서원은 본래 사찰이 자리잡고 있던 곳인데 경치가 아름답기로 경기(京畿) 안에서 으뜸으로 꼽히고 있으니 이곳에 몸을 담고서 옛 사람의 글을 읽는다면 그 즐거움이 어떠할지 알 수 있다 하겠다〔道峯本因寺基。泉石林木之勝。冠絶圻內。寓此而讀古人書。其樂可知矣。〕’라고 하였다.
남언경(南彦經)이 도봉서원을 처음 세웠을 때의 상황과 건물들의 배치 양상은 이이의 「도봉서원기(道峰書院記)」에 가장 상세히 나와 있다. 그에 따르면 1573년 양주목사 남언경이 조광조가 즐겨 찾던 골짜기를 찾아가 보고 선생의 유적을 애처롭게 생각하던 끝에 지역 선비들에게 자문하여 우러러 사모할 곳을 의논하였는데 모든 사람들의 뜻이 모아져 곧 절터에 사당을 건립하고 서원을 세웠다고 한다. 고을 사람들이 몸소 참여하고 많은 기술자들이 부지런히 힘써서 다음해(1574년) 여름 사당과 서원이 완공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목수의 일은 1574년 거의 다 완성되었지만 모든 것이 다 갖추어지지는 않은 상황에서 남언경이 질병으로 양주목사를 그만두게 되자 새로운 목사로 오게 된 이제민(李齊閔:1528~1608)과 이정암(李廷馣:1541~1600)이 그 일을 이어받아 추진해 서고(書庫)와 주방(廚房)을 차례로 완성시키니 사우 건립 착수 이후 6년만인 1579년(선조 12) 비로소 서원 전체가 완성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와 같이 조성된 도봉서원은 서울 동교(東郊 : 동쪽 교외)의 대유원(大儒院)으로 발전하였는데 그 규모가 관학(官學)인 성균관(成均館)에 다음 가 서울의 선비들이 여기에 많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처음 세워질 무렵의 도봉서원은 일반적인 서원 배치형식을 따르면서도 지형을 고려하여 건물들을 적절히 배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서원이 처음 세워질 당시 건물의 배치양상이 잘 묘사되어 있는 이이의 「도봉서원기(道峰書院記)」를 통해 초기 배치 양상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사당은 북쪽에 있었고 그 오른쪽과 왼쪽에 각각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를 두었다. 서원은 사당의 남쪽에 있었는데 중간에 강당을 설치하고, 두 개의 협실(夾室)로써 강당의 날개를 삼았다. 행랑채〔前廊〕는 계곡가에 있고 행랑채 옆에 문을 세웠다. 이와 같이 조성된 도봉서원은 그 이후 임진왜란과 수해 등을 거치면서 몇 차례 중건(重建)되고 또 그때그때의 필요에 따라 새로운 건물이 세워지면서 아래의 겸재 정선의 <도봉서원> 등 그림에서 보여지는 것과 같은 배치형태를 이루게 되었다.
먼저, 가장 북쪽에는 조광조와 송시열의 위패가 모셔진 ‘정로사(靜老祠)’라고 하는 사당이 위치하고, 사당 오른쪽과 왼쪽으로는 유생들의 숙소인 동재〔東齋 : 습시재(習時齋)〕와 서재〔西齋 : 의인재(依仁齋)〕가 각각 자리하였다 . 사당 남쪽으로는 선비들이 모여 학문을 토론하던, ‘계개당(繼開堂)’이라고 불린 강당이 있었다. 계계당 수십 걸음 앞에는 동서 양쪽으로 누각 2개가 자리하고 있었는데 동쪽의 것이 ‘침류당(枕流堂)’이고, 서쪽의 것이 ‘광풍당(光風堂)’이었다. 침류당 약간 서쪽으로는 재임(在任)들이 거처하는 편액 없는 재각(齋閣)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침류당 남쪽 가에는 ‘영귀문(永歸門)’이 있고 조금 아래 시냇가 깎아지른 절벽 꼭대기에는 ‘무우대(舞雩臺)’가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이들 서원 건물 남쪽 계곡 건너편에 는 초가지붕으로 된 정자〔‘모정(茅亭)’이라고 한다.〕인 ‘소광정(昭曠亭)’이 자리하고 있었다. ‘존경각(尊經閣)’은 서원 담장 동쪽, 계류(溪流) 북쪽에 세워졌다.
주요 건물별 연혁과 모습에 대해 보다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사당의 경우, 오억령(吳億齡:1552~1618)의 「도봉 사우 상량문(道峯 祠宇 上梁文)」과 이경석(李景奭:1595~1671)의 「도봉서원 강당 중건상량문(道峯書院 講堂 重建 上梁文)」을 볼 때 임진왜란 때 강당과 함께 소실되어 16년 동안이나 제사를 지내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오억령의「도봉 사우 상량문」에는 강당은 그대로 둔 상태에서 사당이 먼저 재건되었던 것으로 보인다〔講堂猶虛。雖嫌制度之未備。廟宇如故。幸見神明之有憑。續十六年旣廢之祠。〕. 사당이 지어짐으로써 16년 동안 지내지 못한 제사를 다시 지내게 되었다는 것으로 판단해 보면 1608년 전후로 사당 재건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동안 도봉서원의 사당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김창업(金昌業:1658~1721)이 쓴 「도봉서원(道峯書院)」이라는 시를 보면 사당의 이름이 ‘정로사(靜老祠)’였던 것을 알 수 있다. 1779년(정조 3) 북한산ㆍ삼각산ㆍ도봉산을 유람한 바 있는 농은(農隱) 이엽(李燁:1729~1800)의 「북한도봉산유기(北漢道峯山遊記)」에서는 사당과 주변 모습을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사당 곁 서쪽 바위와 바위 가에는 푸른 등나무가 서로 엉켜 있고,
고목 너댓 그루의 푸른 잎이 하늘을 가릴 정도였다.
‘의인재(依仁齋)’는 사우의 앞 왼쪽 가에 있고,
또 그 왼편에는 ‘습시재(習時齋)’가 있는데
유관(儒冠)을 쓴 두 사람과 관동(丱童)
두 사람이 그 가운데서 글을 읽고 있었다”
임진왜란 때 사당과 함께 훼손된 강당은 이경석(李景奭:1595~1671)이 쓴 「도봉서원 강당 중건 상량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건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사우 중건 때까지 강당이 폐허 상태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사당이 다시 세워지는 1608년 이후, 그리고 상량문을 쓴 이경석이 세상을 떠나는 1671년(현종 12) 이전까지는 강당 중건이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사실을 우선 짐작할 수 있는데, 윤순거(尹舜擧:1596~1668)의 「도봉서원 석지기(道峯書院 石池記)」를 보면 윤순거가 경오년(庚午年)에 도봉서원을 방문하여 강당과 침류당을 본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바 경오년인 1630년(인조 8)에 강당은 이미 중건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엽(李燁)의 「북한도봉산유기」와 류군필(柳君弼:1732~1799)의 「유삼각산기(遊三角山記)」에 따르면 강당의 이름은 계개당(繼開堂)이었는데 강당 서쪽 처마에 현판이 걸려있었다고 한다. 계개당이라는 이름은 『대학장구서(大學章句序)』에서 ‘가신 성인을 이어서 오는 후학을 열어준다〔繼往聖開來學〕’고 한 말과 『근사록(近思錄)』의 ‘가신 성인을 위하여 끊어진 학문을 잇고 만세를 위하여 태평성대를 연다〔爲去聖繼絶學, 爲萬世開太平〕’이라는 구절에서 취한 것이다. 강당에는 ‘도봉서원(道峯書院)’이라고 크게 쓴 어필(御筆)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영조실록을 보면 이 어필은 1759년 영조가 직접 써서 걸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강당의 북쪽 벽에는 송시열의 「제도봉서원(題道峯書院)」이란 시가 걸려 있었다.
蒼崖削立洞門開 푸른 절벽은 깎아 세운 듯하고 동문은 열렸네
澗水潺湲幾曲回 계곡물 잔잔히 몇 굽이나 돌아왔나
堯舜君民當世志 태평성대 만들려던 당시의 뜻을
廟前空有後人來 사당 앞에 온 후인들이 기리네
서원에서 서책과 목판을 보관하는 곳인 존경각(尊經閣)은 서원 초창 당시에는 재력이 부족해 세우지 못하고 조선 후기에 비로소 세워졌는데 강당의 중건 상량문을 쓴 이경석이 존경각의 상량문〔도봉서원 존경각 상량문(道峯書院 尊經閣 上梁文)〕을 함께 쓴 것을 보면 강당 중건과 거의 같은 시기에 신축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1556~1618) 등 여러 문인들이 남긴 시 속에 자주 등장하는 누각인 침류당(枕流堂)은 강당 남쪽 계곡에 인접해 세워진 누각인데 언제 처음 건립되었는지가 명확하지 않다. 다만,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1564~1635)의 「유도봉서원기(遊道峯書院記)」를 보면 임오년(壬午年) 가을 영국서원(寧國書院 : 도봉서원의 별칭)에서 수학하던 이정구가 30여년이 지난 을묘년(乙卯年) 가을 당시 도봉에 머물던 이항복을 찾아가 그와 함께 도봉서원을 다시 찾는 일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때 ‘침류당(枕流堂) 동루(東樓)에 돌아가 앉았다.
누(樓)는 옛날에 없었는데 지금 증축된 것이다. 밤에 침류당에서 자는데 물결 소리가 침상을 뒤흔들었다〔倦歸坐枕流堂東樓, 樓卽舊無而今增, 夜宿枕流堂, 波聲撼床〕’라고 되어 있어 침류당이 임진왜란 이전인 1582년(선조 15) 이미 건립되어 있었고, 1615년(광해군 7) 동루가 증축되었던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침류당의 누(樓)로 많은 시 속에 등장하는 ‘제월루(霽月樓)’는 바로 동루를 말한 것으로 보인다. 이엽(李燁)이 도봉서원을 유람했을 때의 침류당은 규모는 작았지만 단청이 칠해졌던 것으로 나타난다.
한편 강당을 중심으로 보았을 때 침류당과 대비를 이루는 방향에는 광풍당(光風堂)이 자리하고 있었다. 한수재(寒水齋) 권상하(權尙夏:1641~1721)의 「답도봉원규(答道峯院規)」에 보면 ‘광풍당은 여러 재임(在任)들이 재숙(齋宿)하는 곳이다. 유사(有司)는 서쪽 방에 거처하고 장색(掌色)은 동쪽 방에 거처해야 하나 동쪽 방이 협소하여 장색(掌色) 4명을 모두 다 수용할 수는 없으니 유사의 방과 서로 바꾸지 않을 수 없다.〔光風堂是諸齋任齋宿之所。有司處西室。掌色處東室。而東室狹小。不可容掌色四員。不可不與有司房相換〕’라고 기록되어 있어 광풍당의 주요 용도와 규모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도봉서원을 방문한 적이 있는 김노겸(金魯謙:1766~1853)의 「유도봉기(遊道峯記)」에는 ‘날이 저물어 너럭바위에서 각기 술을 한 잔씩 마시고 서원으로 돌아와 글을 읽으려고 하는데 선비들이 강사(講舍)로 몰려들어 수용하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남쪽 모퉁이에 있는 침류당은 적적하고 사람 소리가 없었다. 이에 이상히 여겨 물어보니 서원의 민생(閔生)이 말하기를 서원의 재사 가운데 광풍당은 고직(庫直)이가 사는 곳과 거리가 아주 가깝고 거처와 음식이 편리한 까닭에 선비들이 다투어 거처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침류당의 경우에는 가장 구석지고 여러 재실들과 멀리 떨어져 있어 매서운 추위에는 음식도 싸늘해서 먹기 곤란하고 더구나 건물도 높아서 찬 기운이 사람을 힘들게 하니 글을 읽는 선비들이 거처하려고 하지 않습니다.〔日已反, 會坐盤石各飮一觴還院, 將留讀書時靑衿麏集, 講舍不能容准, 南偏一閣枕流而堂寂無人聲, 余怪問之, 院儒閔生曰, 院齋中□光風堂, 距庫人處甚邇, 居處飮食便, 故士爭居, 若枕流堂則最深僻與群齋遼絶, 故隆寒飮食冷難食, 且屋宇穹崇寒氣逼人, 讀書之士不處焉〕’라고 되어 있어 광풍당이 침류당에 비해 도봉서원 유생들에게 인기가 높았던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건물 자체가 언제 건립되고 어떠한 변화 과정을 거쳤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다.
한편, 강당의 서쪽으로 100 걸음 이내 거리의 시내 위에는 무우대(舞雩臺)가 축조되었고, 대의 동쪽으로 는 영귀문(咏歸門)이 있었다. 증점(曾點)이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 쐬고 읊으며 돌아오겠다던 뜻을 취한 것이라고 한다. 한수재(寒水齋) 권상하(權尙夏:1641~1721)의 「소광정기(昭曠亭記)」에 따르면 대 남쪽 시내 건너편에는 푸른 절벽이 우뚝 서 있었는데 여기에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1606~1672)의 글씨 여덟 자〔‘염락정파 수사진원(濂洛正派 洙泗眞源)’을 말한다〕가 있었고, 그 아래에는 큰 바위가 시내 위에 가로로 뻗쳐 있는데 여기에는 우재(尤齋) 송시열이 회옹(晦翁)의 시 두 구〔‘제월광풍갱별전 요장현송답잔원(霽月光風更別傳, 聊將絃誦答潺湲)’을 말한다〕를 한데 써서 모아놓은 것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계사년(癸巳年 : 1653년) 여름 큰 홍수로 절벽이 갈라지고 암석이 빠져나감으로써 무우대와 영귀문은 주춧돌이 뽑히고 송준길과 송시열의 필적도 어지러이 표류하게 되었는데 권상하의 친구인 서응(瑞膺) 윤봉구(尹鳳九:1681~1767)가 주관하여 침류당 남쪽 가 빈 땅에다 영귀문을 다시 세우고, 조금 아래 시냇가 깎아지른 절벽 꼭대기를 평평하게 닦아서 무우대를 다시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소광정기(昭曠亭記)」를 보면 ‘무우대 아래에 두어 길쯤 되는 폭포가 있고, 폭포 밑 오목한 암석 바닥에는 물이 돌아들어 담(潭)을 이루었으며, 담 남쪽에는 울퉁불퉁한 흰 암석이 있어 오륙십 명이 앉을 만하니 맑은 경치가 이전에 건축한 곳보다 나았다. 담 북쪽에는 기수(沂水)라는 두 글자를 새겼으니 이는 무우(舞雩)와 영귀(咏歸)의 뜻이 본래 기수에서 목욕한다는 데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두 선생이 옛날에 쓴 진본 필적을 돌에 새기고 또 무우대(舞雩臺) 세 글자를 그 곁에 새겨 놓으니 이에 문(門)과 대(臺)의 필적이 한결같이 다 복구되어 사람들이 모두 새롭게 복원한 것임을 모를 정도이다.〔臺下有數仞懸瀑。瀑底石坳開函。水滙爲潭。潭之南。白石盤陀。可坐五六十人。淸致勝似前築。潭北壁刻沂水二字。以其舞雩詠歸之意。本出於浴沂也。遂摹出兩先生舊筆眞本刻于石。又刻舞雩臺三字於其傍。於是乎門臺筆蹟。一復其舊。人不知其重新。〕’라고 쓰여 있는 바 이로써 오늘날 ‘무우대(舞雩臺)’ㆍ‘염락정파 수사진원(濂洛正派 洙泗眞源)’ㆍ‘제월광풍갱별전 요장현송답잔원(霽月光風更別傳, 聊將絃誦答潺湲)’이라는 글자와 싯귀가 새겨진 바위 인근이 윤봉구에 의해 다시 세워진 무우대와 영귀문의 터임을 알 수 있다.
무우대 맞은편 층암(層巖)에는 기둥 네 개를 세운 모정(茅亭)이 세워졌는데 새로 지은 무우대의 위로 그늘을 드리워줄 소나무와 노송나무가 없어 이곳에 오르는 사람들이 이를 불평하자 윤봉구가 계곡 맞은편 층이 있는 암반 위에서 조그마한 돈대(墩臺)를 찾아내 계곡과 무대, 서원 건물, 우뚝 솟은 산봉우리들을 한 데 조망할 수 있는 모정(茅亭)을 하나 세웠다.「소광정기(昭曠亭記)」를 보면 이 모정의 이름은 ‘소광정(昭曠亭)’인데, 윤봉구의 부탁을 받은 권상하가 ‘학자가 학문을 끝까지 힘써 연구하다가 확 트이는 경지에 이르는 것을 옛 사람들이 소광(昭曠)의 근원을 보았다고 하였는데 지금 이 동(洞)에 들어온 이들도 언덕을 지나 골짜기를 찾아서 여기에 오르고 나면 가슴이 시원하게 탁 트일 것이니 그 기상이 저 소광의 근원을 본 것과 같을 것이다’하고 ‘소광정(昭曠亭)’이라 이름 지었다 한다.
이와 같이 도봉서원은 조선 전ㆍ후기를 대표하는 두 유학자인 조광조와 송시열을 배향하고, 도성의 많은 유생들이 다투어 모여들어 학문을 익혔으며, 백사 이항복 등 저명한 시인 묵객들이 시문을 남긴 오늘날 서울 지역 내 가장 대표적인 서원이었지만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이 왕권 강화 차원에서 단행한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현재는 원래의 기단 위에 1970년 복원한 사당만이 남아 있으나 도봉서원의 터임은 도봉서원 관련 옛 사료들의 기록과 동 기록에 등장하는 바위들이 현재까지 남아 있어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상태이다.
한편 도봉서원 앞 계곡은 수석(水石)이 경기에서 으뜸으로 꼽힐 만큼 경치가 수려하기로 이름난 곳인데 이곳에는 이름난 유학자들이자 명필가들이기도 한 송시열(宋時烈:1607~1689)ㆍ송준길(宋浚吉:1606~1672)ㆍ권상하(權尙夏:1641~1721)ㆍ이재(李縡:1680~1746)ㆍ김수증(金壽增:1624~1701) 등의 글씨가 새겨진 바위들이 다수 분포하고 있다. 특히 류군필(柳君弼:1732~1799)의 「유삼각산기(遊三角山記)」에도 등장하고 도봉서원의 진입부를 이루는 도봉동문(道峯洞門) 바위에서부터 도봉서원 상부 복호동천(伏虎洞天) 바위까지는 14개의 글씨 또는 싯귀가 새겨진 총 11개 바위가 분포하고 있다. 이들 글씨 또는 시문이 새겨진 바위들을 각석(刻石)이라고 하는데 이들 각석들을 계곡 상류에서 하류 방향으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전통적으로 경치가 특히 아름다운 곳이나 별서 정원 등에 커다란 바위가 있는 경우 이들 바위에 글씨나 그곳의 경치를 노래한 싯귀를 새겨놓는 것이 경물 처리에 있어 주요한 요소를 이루어 왔다. 도봉서원 주변 계곡에 분포하는 각석들도 경승지에 자리 잡은 도봉서원과 그곳 주변의 아름답고 빼어난 경치를 노래하거나 유학자로서 추구하는 이상 등을 새겨 넣은 것이 대부분인데 도봉서원 및 폭포ㆍ수석 등이 있는 계곡 등과 하나의 통합된 경관을 이루고 있어 보존가치가 크다.
도봉서원은 조선 전ㆍ후기의 가장 대표적인 성리학자인 조광조와 송시열을 배향(配享: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냄)한 사액서원(賜額書院:조선시대 국왕으로부터 편액·서적·토지·노비 등을 하사받아 그 권위를 인정받은 서원)으로 백사 이항복 등 저명한 시인 묵객들이 시문을 남긴 오늘날 서울 지역 내 가장 대표적인 서원이다. 비록 1871년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어 유적의 대부분이 멸실되었으나 서울 지역 내 다른 서원과 달리 사당의 기단과 옛 사료상의 도봉서원 유적으로 소개된 각석군(刻石群)이 서원 터 앞 계곡에 대부분 원형대로 남아 있어 유적의 경계를 비교적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들 유적들을 차치하고서라도 각종 문헌이나 시에서 오랫동안 경치가 아름다운 것으로 손꼽히던 경승지(景勝地)에도 해당하므로 보존가치가 크다.
서울특별시는 위와 같은 문화재적 가치가 인정되는 도봉서원과 각석군이 주변 계곡과 통합된 경관을 형성하고 있으므로 서원 터와 도봉동문에서 복호동천까지의 계곡, 그리고 이들 계곡 안팎에 분포하는 각석(刻石)들을 서울특별시 기념물로 지정하여 보존하고자 한다.
발굴조사는 도봉구청이 수립한 복원정비계획에 따라 2012년 5월부터 9월 초까지 진행됐다. 문화재청에서는 이 유물들에 대해 “상태가 매우 양호해 최소 보물로 지정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또 수년간 문화재위원으로 활동했던 나선화 문화재청장은 “국보 지정까지 가능하다”는 의견을 조심스럽게 내비쳤다.
참고-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도봉문화·관광타운 http://tour.dobong.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