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 도 관 의 역 사
남대문 장로교회 박태선 집사는 교회 문 앞에서 교인들에게 허리를 90도 각도로 숙이면서 일일이 안내하는 안내집사로서 충성하다가 1954년 3월부터 일어나 움직이라는 하늘의 음성을 듣고 안수 안찰하며 병 고치는 역사부터 시작하면서 당신의 존재를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하심.
1955년 1월 1일부터 개최된 서울 무학교회 집회
를 시작으로 서울 삼청동 감리교회, 마산 문창장로교회, 신당동 중앙장로교회, 서울 창신교회, 청주 외덕장로교회, 서울 도원동장로교회, 여수장로교회 등에서 하나님을 초청하는 부흥집회가 이어졌다. 집회마다 하나님의 이슬성신의 권능으로 많은 기사와 이적이 일어나 1955년 3월 2일 서울중앙방송국(HLKA) 뉴스보도, <신태양>잡지의 특집보도 등 큰 화제가 되었다. 이후 15회의 전국 부흥집회 기간 중에도 각 도시의 기성교회에서 하나님을 초청하는 부흥집회가 병행하여 꾸준히 개최되었다.
1955년 3월 26일 개최된 서울 남산집회
를 시작으로 영등포, 안동, 부산, 대구, 인천, 원주, 광주 순천, 목포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1955년 한 해 동안 15회의 전국순회 대집회가 열렸다. 순회집회의 시작인 남산집회는 하나님의 존재를 전국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는데 집회장소는 현재 남산 식물원 자리의 드넓은 광장이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2000명 이상을 수용할 만한 건물이 없었기에 천막을 치고 부흥집회 장소를 마련한 것이었다. 15회의 집회동안 참석한 인원은 연 5백만명 이상이 넘는 엄청난 숫자였다.
1955년 4월 4일 하나님을 중심으로 부흥협회가 조직되었다.
1955년 조직 당시의 임원으로는 권연호, 박영창, 이동선, 김현준, 황성수씨 등이었고 1956년 1월에는 최창순 박사(전 사회부장관), 최준호, 정기원 박사(전 국회의원), 임영신(중앙대 총장), 양성봉, 홍은혜(국방장관 부인) 등이 주요 임원으로 추대되었다. 1957년 8월에는 윤치영, 정기원, 최창순, 양성봉, 임영신, 최준호, 홍경섭 등으로 임원진을 새로 구성하였다. 사무실은 서울시 중구 남대문로 5가에 있었다.
초교파 순수지를 지향하며 1955년 2월 7일 창간호를 발행했던 주간신문을 1955년 9월 28일 18호부터 우리 교단이 인수하여 발행하였다. 1981년 9월 21일 1125호부터 신앙신보로 제호가 바뀌었고, 이 때 신문 제호는 一中 김충현 선생이 쓰셨다. 이후 1982년 7월 12일 1161호부터 가로쓰기를 하여 2004년 4월 18일 현재 2098호를 발행하였다.
1955년 전국 순회 부흥집회가 열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와 은혜의 가치를 깨닫게 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하나님 자택 기도실(용산구 원효로 3가 52번지)로 모여들었다. 모여드는 교인들이 나날이 늘어나자 2500명 수용의 건물을 준공하여 <서울임시중앙전도관>이라는 이름으로 1955년 12월 24일 개관하고 다음 날인 25일부터 1956년 1월초까지 일주일간 개관집회를 열었다. 이 교회는 이만제단 건립 후 흔히 ‘구제단’이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전도관 명칭이 처음 사용된 천부교 최초의 교회였다. 이 곳을 필두로 1956년 1월 12일 인천 전도관, 5월 11일 부산 전도관 등 전국 방방곡곡에 전도관 개관이 시작되었다.
1956년 3월부터 생수축복을 시작하였다.
생명물(생수)은 이슬성신이 담긴 물을 말한다. 물통에 수돗물을 받아 놓고 마개로 막은 후에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면 그 물에 이슬성신이 들어가 생명물로 화한다. 이 세상의 물이 하늘세계의 물이 되어 몇 십년을 놔두어도 썩지 않고 구원의 권능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종교의 목적은 구원이다. 인간의 구원은 사망의 구성체가 썩지 않는 성신의 구성체로 변해야 되는 것인데, 그 예로 하나님께서는 생명물을 축복해 주시며 시신이 피는 것을 보여 주셨다. 생명물을 통한 기사이적은 수없이 나타났으며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1956년 10월 16~17일 현재 동대문 축구장인 서울운동장에서 전국 전도관 교인들이 한 자리에 모여 대규모 체육대회가 열렸다.
경기종목은 배구, 농구, 릴레이 등이었고, 시합은 토너먼트로 진행되었다. 기타 종목으로는 어린이의 찬조 유희와 교인들의 달리기가 있었다. 우승은 마산팀이 차지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시는 방법의 하나로 체육대회를 열어 주셨고, 운동을 통해 선의의 경쟁과 협동심을 길러 주셨다.
1957년 4월 25일~5월 4일,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마포구 청암동 언덕 위에 건설된 천부교 최초의 초대형 교회 2만명 수용을 목표로 건설되어 일명 <이만제단>이라고도 불렀다.
외국 선교사의 원조에 의지하던 당시 우리나라 교회에 비해 이만제단은 외부의 도움없이 자력으로 건축된 것으로 당시 교회 건물로는 물론이요 일반 건축물로도 국내 최대를 자랑할 만한 것이었다. 1956년 7월 기공과 더불어 신축 부지에서 12일간 심령 대부흥회가 열렸고, 약 9개월의 공사 끝에 1957년 4월 개관 되었다. 이만제단 개관을 기념하여 4월 25일부터 10일간 개관집회 및 심령대부흥회, 장로 임명식, 체육대회가 함께 열렸다.
제2회 전국 전도관 체육대회(1957. 4. 25.~4. 27.)
서울운동장(현 동대문 축구장)에서 개막 기념예배 후 3일간 경기가 진행되었다. 첫 날은 배구, 농구, 축구와 다양한 친선경기, 둘째 날은 구기종목 준결승과 100m 릴레이 예선, 각종 개인경기, 셋째 날은 축구, 농구, 배구 결승전과 마라톤, 릴레이 결승전이 있었다. 마라톤은 60여명의 선수들이 참가하여 교통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육십리를 달렸다. 마라톤 코스는 서울운동장을 출발하여 광화문, 남대문, 한강로, 영등포역을 돌아 한강로, 남대문, 을지로, 서울운동장까지였고, 우승은 1시간 46분 기록의 이상철군이 차지했다. 전체 우승은 서울팀에게 돌아갔다.
제3회 전국 전도관 체육대회(1957. 10. 22.~10. 24.)
서울 중앙전도관에서 열린 심령대부흥회와 함께 서울운동장에서는 체육대회가 동시에 열렸다. 체육대회는 개막 예배로 시작되었는데 첫날은 축구, 농구, 배구 남녀 팀에 대한 예선과 여학생회의 무용 등 각종 게임이 진행되었고, 둘째 날엔 구기 경기의 준결승전과 바늘꿰기를 비롯하여 15종목이 진행되었다. 셋째 날에는 구기종목 결승전과 마라톤경기가 열렸다. 우승은 서울팀, 준우승은 부산팀, 3위는 진해팀이 차지했다.
소사 신앙촌 건설 착공(1957. 11. 1.)
현 부천시 범박동 일대 43만여평의 황무지를 개간해 만든 첫 번째 신앙촌으로 1만여명의 교인이 입주하였다. 주택과 공장, 학교 뿐 아니라 전기, 급수, 상점, 각종 공공시설 등 도시가 갖추어야할 모든 시설을 완비하고 소방도로까지 완벽하게 갖춰져 있어 새마을 운동의 모델이 되었고, 시온별장, 꽃마을 등으로 불리며 관광지로 이름이 나기도 하였다. 자립경제확립, 건실한 양심재건, 신앙혁신의 이념으로 외부의 원조없이 자력으로 건설한 신앙촌 기업은 신앙인들이 합심하여 자립경제의 기틀을 마련하고, 그 경제적 기반 위에서 더욱 건전한 신앙생활을 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신앙인의 정직한 양심으로 만들어진 신앙촌 제품들은 당시 소비자들에게 대단한 선풍을 일으키면서 국산품의 품질향상을 주도했다. 신앙촌은 기업을 통한 경제적 자립 위에서 올바른 신앙생활을 영위하려는 신앙단체로 건설된 것이다.
현 학교법인 시온학원 설립(1958. 4.)
소사 신앙촌 입주 교인들의 자녀 교육을 위해 초등교육 및 중등교육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당시는 옹진학원) 산하에는 유치원,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두었는데 유치원은 1958년 1월 18일, 초등학교는 1958년 4월 15일, 중고등학교는 1958년 4월 29일에 개교하였다.
노구산 집회(1958. 6. 30.~7. 5.)
소사신앙촌 건설 이후 교단의 큰 집회나 체육대회 장소는 소사신앙촌이 되었는데 노구산 집회 또한 소사신앙촌의 오만제단 신축부지(해발 150m 노구산 정상)에서 열렸다. 집회 도중 4일에는 전국 전도관 장로 130명의 임명식이 거행되었다. 이 집회에는 연 70만명 이상의 인파가 몰렸는데 이 군중들의 모습은 당시 정치권과 종교계를 긴장시킬 만큼 많은 수였다. 이 집회 석 달 후 10월부터 오만제단 건축이 시작되었다.
제4회 전국 전도관 체육대회(1958. 7. 3.~7. 4.)
소사신앙촌 시온고등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이 체육대회에는 전국 전도관에서 4백여명, 25개 팀의 남녀 선수들이 참가했다. 경기는 축구, 농구, 배구, 100m, 1500m 릴레이, 마라톤 등 6개 종목과 내빈들의 친목 게임으로 진행되었다. 마라톤 경기의 코스는 동대문~종로~을지로입구~남대문~한강~영등포~오류동~소사신앙촌 대운동장의 구간이었는데 마라톤 선수들이 골인 후 쓰러지자 하나님께서 안수해 주셔서 일어나기도 했다. 우승은 부산팀, 준우승은 신앙촌팀, 3위는 서울팀. 이 대회의 가장 큰 수확은 신앙촌 건설상을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직접 목격하고 새로운 인식과 희망을 품게 한 것이었다.
하나님 1차 옥고(1958. 12. 27.~1960. 3. 26.)
하나님 1차 옥고는 천부교단이 발전하는 중에 기성교단과 정치권의 음모로 생긴 사건이다. 부흥집회를 통해 나타난 성신의 역사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모이자 위기의식을 느끼던 기성종교계는 종교적인 편향을 가진 정치권과 합세하여 우리 교단을 음해하기 시작하였다. 교인이 헌금 내는 종교행위를 사기죄로, 교인을 안찰하는 고유한 종교행위를 폭행죄로 몰아 하나님께서 억울한 옥고를 치르시게 된 것이다. 1차옥고는 당시 우리 교단에 크나 큰 시련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이후로도 그 사건의 배경과 진위를 잘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 교단과 하나님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갖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5만제단 상량식 예배(1959. 12. 7)
신앙촌 입주 초기에는 100여평의 임시제단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예배실 공간이 부족하게 되자 신앙촌 주민 전체가 한자리에 모여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교회 건축을 시작하였다. 1958년 10월 노구산 상봉(해발 150m)에 5000평의 제단 터를 닦는 것을 시작으로 하여 1959년 12월 900평의 오만제단 상량식과 함께 1960년 초 완공하였다. 신앙촌의 예배실인 오만제단은 대 부흥집회나 각종 연수회 장소로도 사용되었다. 교회 시설로는 자체 15kw 발전실과 성가대 500석이 있었고, 강대상은 3층 높이 40평이며 170여만환짜리 하몬드 오르간이 비치되었다.
오만제단 집회(1960.7. 18~7. 23)
소사 오만제단에서 열린 ‘전국 성도 심령대부흥회’는 6일간 10회에 걸쳐 연 30만의 인파가 운집했다. 전국에서 모여든 교인들로 인해 900여평의 오만제단은 물론 노구산 옥외에도 입추의 여지없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 기간 중 7월 20일에는 전국전도관 학생 연합 천성회가 창립되었고, 7월 20일부터 이틀간 신앙촌 유치원(구제단)에서 신앙촌 체육회 주최로 제2회 전국 전도관 대항 탁구대회가 개최되었다. 10개팀이 출전하여 단체전과 개인전이 열렸고 경기 후 친선게임에는 하나님께서도 직접 참가하셨다.
시온고등공민학교 설립(1960. 9~ )
1960년대의 우리나라는 경제적으로 피폐했기에 교육 여건 또한 어려웠다. 그래서 각 지역의 전도관에서는 사회봉사와 구령사업의 일환으로 중학과정인 고등공민학교 운영은 국가 경제가 발전하던 1970년대 후반까지 이어지며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각 지역 전도관 산하에 고등공민학교가 설치되었던 곳으로는 광주 일곡, 소사신앙촌, 영광, 태안, 왕십리, 흑석동, 보은, 안동, 부산, 남지, 평창, 영산포, 철원, 구포, 거창, 양양, 영동, 공주, 포항, 강진, 거진, 옥산, 동두천, 천안, 함안, 경기도 일동, 함평, 음암, 장흥 등이었다.
동아일보 사건(1960. 12. 10)
동아일보 사건은 종교계의 핍박에 언론이 가세하여 성화를 가짜라고 왜곡 보도한 것이 발단이 되어 일어난 사건이다. 성화란 하나님의 이슬성신이 내리는 것이 사람의 눈에 보이거나 사진에 찍힌 것을 말한다. 이러한 성화 사진을 1958년부터 ‘조작할 수 있다’고 수 년 동안 왜곡보도 해 온 동아일보는 1960년12월6일자에서 또 다시 같은 내용의 허위보도를 하였다. 교인들이 3일 동안 정정을 요구하며 기다렸으나 동아일보 측은 무성의한 자세로 일관하였고, 이에 12월 10일 수 천 명의 교인들이 동아일보사 앞에 모여 정정보도를 촉구하는 평화 시위를 계획했으나 분위기가 과열되고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의도와는 다르게 확대된 것이다. 이 사건의 본질은 그간의 누적된 언론의 왜곡 보도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나 진실은 외면하 채 사실을 호도하는 편향된 언론 보도로 우리 교단은 사회로부터 불필요한 곡해를 받기도 했다.
하나님 2차 옥고(1961. 1. 27~1962. 1. 10)
2차 옥고는 1차 옥고와 함께 정치권과 기성종교에 의한 천부교 탄압의 대표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3.15선거는 부정 선거였고 당시 기성교계가 공공연하게 두 후보를 지지한 것은 엄연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장면정권은 오히려 하나님을 이 사건에 억지 연루시켰다. 하나님께서 3.15부정선거에 협조하고 그 대가로 사면을 받았다는 터무니없는 혐의를 씌워 무고한 옥고를 치르신 것이다. 그러나 두 차례의 옥고에도 불구하고 영어에서 돌아오신 하나님께서는 이전보다 더 강하게 움직이시며 두 번째 신앙촌 건설을 시작하셨다. 이 정도 탄압이면 설령 혐의가 없다 해도 다시 일어나시기 힘들 터인데 옥고 이전보다 더 강하게 움직이시며 많은 사람들을 이끄시는 하나님의 모습에 국내외 지식층은 이 역사가 “보통 사람의 역사가 아닌 강한 성신의 역사다.”라는 평가를 하기도 했다.
덕소 신앙촌 건설 착공(1962. 7. 20)
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인근 10만평 부지에 두 번째 신앙촌이 건설되어 67개동의 공장과 주택에 6000여명의 교인이 입주하였다. 주택, 산업시설, 제철공업의 세 지대로 나뉘어 착공 3개월 만에 공장을 준공하여 11월 16일 55세대 200여명이 주택에 1차로 입주하였다. 시온산업에서 건설을 담당하고 설계에서 기술에 이르기까지 모두 하나님의 진두지휘 아래 교인들이 맡아 했으며 당시 건설현장은 자가발전 시설에 형광등까지 가설하여 전기 없는 덕소 마을 사람들의 구경거리였다고 한다.
현 한국천부교전도관 부흥협회 사회단체 등록(1963. 5. 31)
1960년 7월 6일 현 한국천부교전도관 유지재단 법인 설립 허가를 거쳐, 덕소 신앙촌 건설이 끝나갈 무렵인 1963년 5월에 현 한국천부교전도관부흥협회가 사회단체로 등록(등록번호 262) 되었다. 그 후 1969년 2월 25일 유지재단의 법인 설립 허가증을 교부받았다. (허가번호 41호, 종무1-41)
제5회 전국 전도관 체육대회(1965. 10. 26)
1960년대에 들어오면서 신앙촌을 중심으로 빙상, 탁구, 배구, 야구, 농구 등 각종 친선경기가 꾸준히 개최되어 생활체육이 활성화 되었다. 덕소 신앙촌 공장지대 운동장에서 열린 5회 체육대회에는 전국 전도관에서 모여 온 만 여명의 교인들이 참석하였다. 경기종목은 농구, 배구, 줄다리기였다. 이 날의 경기전적은 농구는 소사 신앙촌, 배구는 광주 전도관이 각각 우승을 차지했다.
덕소 신앙촌 전도관 준공(1966. 4. 10)
덕소 신앙촌 초기에는 450여평의 임시 제단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1963년 중반부터 7000평의 부지 조성을 시작하였다. 1965년 12월 착공하여 1966년 4월 1층이 완공되었다. 제단의 위치는 중공업 지대와 경공업 지대를 내려다보는 주택지대 후면으로 한강을 한 눈에 내려다보는 곳이다. 건평 1천평에 2층 건물로 최고 1만명까지 수용이 가능하였다. 덕소 신앙촌 제단 건축 양식은 1980년 초까지 각 중앙 전도관 건축 양식의 본보기가 되었고, 개관 이후 기장 신앙촌 건설 이전까지 축복일 등 교단 행사의 중심 교회가 되었다.
서울 제2중앙 전도관 개관예배(1967. 5. 7)
성북구 동암동 미아리에 제2중앙 전도관이 발족되면서, 마포 이만제단에 출석하던 교인들 중 성북구와 종로 일대의 교인들은 주일에 이 곳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3월6일 착공하여 연 200여평의 2층 제단을 5월 6일 준공하였고, 7일 일요일에 하나님께서 주일 대예배를 인도하시며 중앙전도관 탄생의 출발점이 되었다. 2중앙전도관의 발족으로 일요일에는 덕소제단, 소사 오만제단, 마포 이만제단, 서울2중앙 순으로 하나님께서 대예배를 인도하셨다. 이 후 중앙전도관이 발족될 때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예배시간이 추가되었다. 중앙전도관은 산하에 10개 이상의 교회를 거느리고 있었다.
서울 제3중앙 전도관 개관예배(1967. 8. 6)
2중앙전도관이 이만제단에서 분리된 것을 시작으로 8월에는 제3중앙전도관이 분리되어 중구, 동대문구, 성동구 내 20개 지관이 주일 대예배를 따로 보게 되었다. 3중앙전도관은 1957년 동대문구 숭인동에 동대문전도관으로 개관되어 발전해 오다가 1967년 3월 공사에 착공하여 5개월 만에 연500평의 2층 제단을 신축하였다. 개관예배는 대성황을 이루어 3천여명이 상하층 제단을 가득 채웠다. 3중앙전도관은 덕소신앙촌 제단 건축양식을 맨 처음 도입한 교회 건물이었다. 이후 서울4중앙(1968.5.1.), 5중앙(1968.4.27.)이 차례로 개관되었다.
제49회 전국 체전 시온 중.고 탁구부 우승(1968. 9. 12.~9. 17.)
교단의 활발한 체육활동 중 대표적인 것이 시온 중고 탁구부이다. 1965년 3월 소사 시온중고등학교에서 창단한 시온 탁구부는 1966년 전국대회 입상을 비롯하여 각종 대회를 석권해 왔다. 49회 전국체전에서도 시온중 탁구부는 금메달, 시온여중 탁구부는 은메달, 시온고 남자 탁구는 동메달을 수상하여 시온 탁구의 전국 제패가 시작되었다. 이후 1999년까지 각종 대회에서 입상한 실적이 무려 430회에 이르고, 단체 우승을 65회, 전국 규모대회에서 3연패를 3회나 차지하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시온중고 탁구부는 최승국, 이재철, 박이희, 지용옥, 김경자, 이수자, 김승환 등 국가대표도 많이 배출했으며 많은 졸업생들이 실업팀이나 각급 학교의 코치, 또는 생활체육 지도자로 활동하며 한국 체육발전에 기여한 바 크다.
제1회 시온합창단 정기연주회(1969. 12. 23.)
전도관부흥협회와 한국일보사 후원 아래 신앙신보사 주최로 서울 시민회관에서 제1회 정기연주회가 열렸다. 7백명으로 구성된 시온합창단은 김동진 지휘, 국립교향악단 협연으로 헨델의 메시아 53곡 전곡을 연주했다. 7백명이라는 시온합창단의 규모는 당시 최고 많아야 3, 4백명에 그쳤던 우리나라 합창 공연사에서 새로운 기록이었다. 연주 막간에는 시온어린이합창단이 찬조 출연해 독특한 두성음 창법을 선보였고, KBS TV, MBC TV 등에서 연주실황을 5백만 서울 시민에게 중계하기도 했다. 이날 연주는 5천명이 넘는 청중들이 감상했다.
기장 신앙촌 건설 착공(1970. 2. 28.)
현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 인근 130만평 부지에 50개 생산 공장과 주택을 건설하고 5000여명의 교인이 입주했다. 2년 4개월의 공사기간을 거쳐 1972년 6월경까지 1동, 2동, 3동의 대형 공장 건물, 각 공장 건물, 기숙사, 주택 등의 건설이 거의 완료되었다. 현재 신앙촌이라고 할 때는 기장신앙촌을 말하는 것이며, 매월 축복일 예배 등 교단의 주요 행사가 이 곳에서 열리고 있다.
서울 제7중앙 전도관 개관예배(1970. 7. 5.)
서울역 서편 경의선 철로와 서소문 고가도로변 서대문구 합동에 위치한 연건평 850평의 제단으로 12층 높이의 종각을 포함한 4층 건물이다. 1969년 11월 11일 기공한 후 8개월의 공사기간을 거쳐 1970년 7월 4일 준공하였다. 일요일에는 7중앙 산하 서대문, 후암, 홍제, 신촌, 남대문, 서부, 가좌, 홍은 등 14개 지관과 제10중앙 산하 6개 지관이 함께 예배를 드렸다. 덕소신앙촌 제단 형식으로 지어졌으며 2,3,4층에는 예배실, 1층에는 1개의 지관과 3개의 사무실, 차고, 앰프실, 사택 등의 시설을 갖추었다.
제2회 시온합창단 정기연주회(1970. 12. 22.)
부흥협회와 신앙신보사가 주최하고 한국일보가 후원하여 시민회관 대강당에서 열린 정기연주회. 합창단만 무려 1500여명에 달해 스테이지가 객석 일부까지 차지했고, 청중은 시민회관 통로까지 메워 개관이래 최대의 성황을 이루었다. 80여명의 시립교향악단 협연 아래 1부에서는 시온어린이합창단의 찬조출연이 있었고, 2부와 3부에서는 김동진 교수의 지휘로 시온합창단의 헨델의 오라트리오 메시아 대합창이 있었다. 김옥자(소프라노), 이영애(알토), 박성원(테너), 전봉구(베이스) 등 한국 성악계의 중진들도 출연하였고, KBS TV, TBC TV 전파를 타고 전국으로 방송되었다.
서울 제8중앙 전도관 개관예배(1971. 5. 23.)
현 동작구 본동에 위치한 서울 제8중앙전도관은 1970년 5월 착공하여 만 1년만인 1971년 5월22일에 3층 1120연건평의 제단이 준공되었다. 종각은 12층 높이로 내부 1층은 기도실, 본동지관, 차고, 사무실, 앰프실, 회의실과 3개의 응접실, 4개의 숙소 그리고 2, 3층은 약 만명 수용의 제단으로 되어 있다. 8중앙 산하에는 본동, 노량진, 상도동, 봉천동 대방동, 대림동, 흑석동, 신림1동, 시흥1동, 사당동 등 14개의 지관이 있었다. 이후 서울에 57중앙 전도관까지 세워졌다.
제1회 신앙촌 종합 체육대회(1974. 6. 13.)
초창기부터 이어져온 체육활동의 전통은 1970년대 기장신앙촌을 중심으로 더욱 활성화 되었다. 특히 농구는 실업팀을 포함하여 15개팀이 있어 매달 친선경기를 가질 정도로 매우 활발하였다. 이런 분위기를 바탕으로 하여 기장신앙촌 운수부 운동장에서 제1회 신앙촌 종합체육대회가 열렸는데, 소사, 덕소, 기장 신앙촌의 대표선수 천 여 명이 참석하였다. 이날의 하이라이트는 174명이 참가한 마라톤이었는데 우승은 오정운군이 차지하였다. 종합우승은 제3신앙촌 농구부, 준우승은 제1봉제가 3위는 봉제상의부가 각각 차지했다.
미주 지역 전도관 개관(1976. 3.~ )
1975년 1월20일 미국 L.A에 첫 선교사를 파송하여 1976년 3월 전도관 건물을 마련했다. L.A 1중앙을 중심으로 1979년경에는 기존의 밸리 지역의 L.A 2중앙, 오렌지 카운터의 L.A 4중앙 등 4개의 중앙전도관으로 확대되었다. 1976년 11월21일에는 콜로라도주 덴버시에도 전도관이 개관되었고, 1978년에는 텍사스 킬린에 전도관이 개관되었다. 뉴욕전도관은 1978년1월에 개관되었다.
제1회 전국 전도관 학생 청년 전도대회(1976. 8. 12.~8.13.)
4천 여 명의 청년 학생이 참가한 가운데 배구, 웅변, 음악 등 다양한 분야의 실력을 겨루는 전도대회가 열렸다. 배구경기는 119개 남녀선수 배구팀이 참석했는데 각 파트별 우승팀은 부산3, 수원, 울산, 제주 중앙이었다. 음악 부문은 성악과 기악으로 나누어 경연을 벌였고 웅변은 60명이 참가한 가운데 8명이 본선에 진출하여 시상을 받았다. 전도대회의 종합우승은 울산도관이 차지했다. 이날 하나님께서는 전국학생연합회 및 청년연합회 상임위원을 임명하시고 이들을 불러 격려하셨다.
기장 시온중학교 개교(1978. 3. 28.)
시온합성섬유공업(주)에서는 종업원들의 복지향상 사업으로 정규 중학교 교육과정 야간 특별 중학교를 설립하였다. 1977년11월23일 시온중학교 설립 인가를 받아 1978년3월28일에 개교하였다. 학교시설로는 과학 실험실, 도서실, 시청각실, 5백평의 실내체육관, 3천평의 체육장, 상담실 등을 갖추었다. 시온중학교는 실기교육과 적성교육에 중점을 두었고 정서순화를 위해 합창단도 조직하였다.
제1회 이슬성신절(1981. 1. 3.)
하나님께서는 구원은 썩을 것을 썩지 않게 하는 이슬성신으로만 가능함을 깨우쳐 주시며 이슬성신절을 정해 주셨다. 이슬성신절은 천부교 최대의 절기로 1981년 1회부터 이슬성신절을 기념하는 축하예배와 음악행사가 매년 기장신앙촌에서 개최되고 있다. 1회부터 7회까지는 음악경연대회로 진행되다가 1988년 8회부터는 축하 음악행사로 변경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초창기 5월 하순에 가장 많은 이슬성신이 내렸다는 말씀에 따라 1983년 3회부터 5월로 제정되었다.
제16회 시온합창단 정기연주회(1985. 2. 27.)
여성단원 650명이 서울시향 상임지휘자인 정재동씨의 지휘로 서울시향과 협연하였다. 공연장소는 세종문화회관. 연주곡목은 청산에 살리라, 가고파, 내마음,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평화의 기도 등이다. 독창에는 국내 정상급 성악가인 정영자, 신영조, 김성길 교수 등이 출연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초창기부터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방법의 하나로 음악을 장려하셨다. 천국은 음악의 세계라고 하시며, 음악 자체가 목적이 아닌 음악을 하는 과정을 통해 그 이상의 가치를 깨우쳐 주셨다.
제17회 시온합창단 정기연주회(1985. 8. 21.)
청소년 하계 음악회의 일환으로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정기연주회. 코리아 심포니 음악감독인 홍연택씨의 지휘로 코리아 심포니와 협연하였다. 여성단원 1500명의 공연은 당시 여성 단일 합창으로는 한국에서 처음 시도된 것이어서 음악계는 물론 연주회에 참석한 청중들도 그 규모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제18회 시온합창단 정기 연주회(1986. 1. 27.)
세종문화회관에서 신년 음악회로 열린 18회 정기 연주회에서는 임원식의 지휘로 인천시향과 협연하였다. 17회와 마찬가지로 여성합창단원 1500명이 출연하자 무대 뒤의 방음벽까지 뜯어 이들의 무대를 마련하기도 했다. 이 대규모 합창단과 더불어 독창자 송광선 교수의 연주가 있었다. 하이든의 오라토리오 <사계>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연주되어 음악계의 많은 주목을 끌었고, 이외에도 핀란디아, 알렐루야, 아침기도 등의 합창이 있었다.
신앙촌 고객 초청 집회(1986. 7. 14.~10. 7.)
부산동광초등학교 어머니회 80명을 시작으로 만3개월 동안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수 만 명의 고객들이 신앙촌을 방문하였다. 방문객들 중에는 우리 교단과 신앙촌에 대해서 오해와 편견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으나 신앙촌을 직접 방문하고 우리 교단과 신앙촌에 대해 오히려 호감을 갖게 된 분들이 많았다. 현재까지도 신앙촌에는 고객들과 어린이 견학생, 외부인의 방문이 끊이지 않고 있다.
기장 신앙촌 실내체육관 개관식(1987. 8. 2.)
기장신앙촌에서는 다양한 종목의 생활체육이 활성화되었다. 특히 농구는 1973년 시온합성 여자농구단이 창단되면서 붐을 이루어 교단 내의 15개 농구팀이 매달 친선경기를 가질 정도였다. 이처럼 체육활동이 활발해지자 사원들과 교인들의 운동 장소로 실내체육관을 짓고 이를 축하하는 개관식을 가졌다. 이날 이병희(아시아 농구연맹 회장), 조동재(대한농구협회 부회장), 박치노(한국여자실업농구연맹 사무국장)씨 등 농구계의 원로들이 초청받아 왔고, 하나님께서도 친히 참석하셨다. 개관식 후에 진행된 축하 농구경기에는 상업은행과 코오롱, 삼천포여상, 동주여상 팀이 초청되어 실업팀은 상업은행이 학생팀은 삼천포여상이 각각 우승했다. 시온 일반팀과 교단팀은 이들과의 친선경기도 가졌다. 개관식 행사를 모두 마친 후에는 실내체육관 개관 기념집회도 있었다.
시온 입사생회 발족(1987. 8. 7.)
더 맑고 깨끗하게 살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취지로 기장신앙촌에서 시온 입사생회가 발족되었다. 시온 입사생들은 일과 공부를 병행하면서 관악부, 현악부, 합창단, 탁구부 등 다양한 서클활동과 함께 시온의 곳곳에서 일익을 담당하며 꾸준히 발전해 왔다. 서울대 한상복 교수는 2001년 추수감사절에 참석하여 시온 입사생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음악회를 관람한 후 “입사생들이야말로 신앙촌 사관생도이며 인류학이 지향하는 미래의 주역들”이라며 입사생의 설립취지에 적극 공감을 표시했다.
시온 실업고등학교 개교(1988. 3. 7.)
시온 입사생의 교육을 목적으로 현 한일물산(주) 부설 시온실업고등학교가 1988년 2월2일 설립 되었다. 개교 이래 소수정예의 인원을 선발하여 개별 지도를 통해 알찬 교육을 실시하고 있으며, 매년 80% 이상의 대학진학률을 보이고 있다. 시온실고는 기업이윤의 사회 환원과 인재양성의 차원에서 시온그룹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다. 학생들은 재학 중에는 물론 대학 진학시에도 전원 장학금을 지급받고 통학버스 운행 등 여러가지 편의를 제공받고 있다.
제1회 성신사모일(1991. 2. 7.)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을 기리는 날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몸을 벗으시고(1990년2월7일 새벽3시경) 낙원에 계신 지금도 인류구원을 위해 이슬성신 은혜를 허락하시고 계신다. 그 크신 은혜와 한없는 사랑을 감사드리며 성신을 사모하는 경건한 마음으로 천부교인들은 매년 2월에 성신사모일 예배를 드리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