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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밸리가 잡스를 만들었다 "
1955년 2월24일 한 밤중이었다.
사우스 샌프란시스코의 폴과 클라라 잡스 부부의 집에 전화벨이 울렸다.
입양기관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예정에 없던 아들이 태어났어요. 그래도 입양하시겠어요?”
잡스 부부는 딸을 입양하고 싶었다.
하지만 딸 아들을 가릴 형편이 아니었다.
그들은 10년 동안 아기를 낳으려 했지만 실패했고 임신을 포기한 상태였다.
“물론이죠.” 잡스의 아버지가 될 폴 잡스는 이렇게 말했다.
잡스의 친 어머니는 대학원에 다니던 젊은 미혼모였다.
아버지는 시리아계 수학과 객원교수였다.
아이를 키울 여력이 없었던 그녀는 잡스를 입양시키기로 결심한다.
그녀는 아들의 미래를 위해 양부모가 대학 나온 사람이길 원했고, 자신의 아들 또한 대학까지 교육받길 원했다.
친 어머니의 희망대로 잡스는 태어나자마자 어느 변호사 가정에 입양되기로 예정돼 있었다.
그런데 변호사 부부는 마지막 순간에 딸을 원한다고 마음을 바꾸었다.
그래서 대기자 명단에 있던 클라라 부부가 전화를 받게 된 것이다.
친 어머니는 양부모가 될 사람들이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입양서류에 사인하는 걸 거부했다.
잡스 부부가 아이를 꼭 대학에 보내겠다고 약속을 한 뒤에야 입양을 할 수 있도록 한다.
아이는 스티브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양부모인 폴과 클라라 잡스 부부는 매우 가정적인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어린 스티브에게 애정과 관심을 쏟았다.
잡스는 성인이 된 뒤에도 누가 그에게 양부모라는 표현을 쓰면 바로 ‘부모’라고 바로잡곤 했다.
그러나 잡스 역시 친부모가 누구인지를 알고 싶어 했다.
그는 가끔 친어머니가 보고 싶어 울었다고 한다.
잡스의 한 친구는 “잡스는 친부모를 찾고 싶어 하는 열망이 정말 깊었죠.
부모를 알아야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알 수 있으니까요”라고 말했다.
잡스는 입양되었기 때문에 좋은 점도 있다고 말한다.
“제 독립심을 좀 더 강하게 해주었죠.”
변호사의 가정이 아닌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 입양된 건, 어찌 보면 잡스에겐 행운이었다.
실리콘밸리라는 특별한 환경은 양부모가 그에게 준 선물이었다.
실리콘밸리의 소년에게 컴퓨터를 만날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1938년 빌 휴렛과 데이브 패커드라는 두 젊은이가 허름한 차고를 빌려 휴렛패커드라는 이름으로 사업을 시작한 뒤,
실리콘밸리는 벤처기업의 요람이 됐다.
이곳에 사는 엔지니어들은 차고에 온갖 잡동사니를 쌓아놓고 일요일이면 뚝딱뚝딱 전자부품을 만들곤 했다.
어린 시절 잡스에게 이 풍경은 전자기기에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잡스는 어릴 때부터 호기심이 많았다. 그 호기심은 전자기기를 향했다.
전자기기는 어린 잡스에게 장난감이었다.
전자기기를 놓고 아버지의 차고에서 하루 종일 혼자 시간을 보내곤 했다.
전자제품 내부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또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됐다.
무엇보다 전자제품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집에 있는 전자제품들이 더 이상 잡스에게 마법의 상자가 아니었다.
TV를 보면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한번 만들어 볼까?’ 어린 시절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 그에게 큰 행운이었다.
전자부품은 어떻게 조립하느냐에 따라 모양이 예쁠 때도 있었고, 못생길 때도 있었다.
잡스는 부품을 갖고 놀면서 사람에 따라 부품이 여러 형태로 바뀌게 되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부품을 갖고 놀면서 집중력도 키울 수 있었다.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다 보니, 또래 친구들과 잘 사귀지 못했다.
대신 잡스는 차고에서 ‘지구 백과 The Whole Earth Catalog'란 책을 탐닉하기도 했다.
PC나 전자출판이 존재하기 전인 1960년대 후반에 나온 이 책은 타자기, 가위, 폴라로이드로 만든 책이었다.
훗날 잡스 역시 자신의 집 차고에서 애플이라는 벤처기업을 차리게 된다.
이 지구백과 사전 역시 그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는 호기심을 보였지만, 그렇지 않은 것은 따분해했다.
학교 수업이 그랬다.
잡스는 때로 선생님에게 대들기도 하며 말썽도 많이 피웠다.
훗날 잡스는 학교생활이 매우 따분했다고 고백했다.
틀에 박힌 공부법은 맞지 않았던 것이다.
잡스의 6학년 성적표에는 “잡스는 뛰어난 독서가다. 하지만 독서를 하느라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한다.
잡스는 공부에 의욕을 갖거나 목적을 세우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때때로 규율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다”고 적혀 있다.
잡스는 어릴 때부터 한번 한일은 끝까지 해결하려 했다.
잡스가 여느 날처럼 차고에서 주파수 측정기를 만들고 있었다.
그런데 부품 하나가 빠진 걸 알게 됐다.
다른 아이였다면 포기했을 것을, 잡스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전화번호부를 뒤져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전 스티브 잡스라고 해요.
제가 주파수 측정기를 만들려고 하는데, 부품이 하나 모자라서요.
저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부품이에요.
사장님은 저에게 도움을 주실 것 같아서 전화를 걸었어요.”
전화를 받은 사람은 휴렛패커드의 공동창업자인 빌 휴렛이었다.
그는 이 맹랑한 꼬마와 20여분 동안 친절하게 통화해 주었다.
그리고 잡스에게 부품을 주고, 여름방학 동안 휴렛패커드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바로 주파수 측정기 조립라인이었다.
큰일은 아니었다.
단지 나사만 박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휴렛패커드에서 일하고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 잡스는 행복했다.
이때쯤 잡스는 전자공학에 푹 빠진 스티브 워즈니악을 만난다.
잡스는 자신보다 5살이나 많았다.
그리고 고등학교 선배이기도 했다.
워즈의 친구이자 잡스의 친구이기도 했던 빌 페르난데스라는 친구를 통해서였다.
페르난데스는 워즈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봐, 네가 만나 봐야 할 친구가 있어. 스티브라는 친군데, 너처럼 기발한 장난을 좋아하고 전자 기기를 조립해.”
얼마 지나지 않아 잡스와 워즈는 페르난데스의 집에서 처음 만나게 된다.
잡스와 워즈는 각자가 벌였던 기발한 장난과 설계했던 전자 기기에 대해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또 스티브와 나는 밥 딜런의 노래를 듣고 가사를 음미하면서
딜런과 비틀즈 중에 누가 더 뛰어난 가수인지 이야기하며 서로를 향한 이해의 폭을 넓혔다.
잡스와 워즈는 함께 전화 회사의 컴퓨터를 속여 공짜 전화를 걸 수 있는 기계인 ‘블루박스’를 만들기도 했다.
잡스나 워즈니악에게 전화 회사는 무언가 못마땅한 기성세대의 상징이었다.
때문에 그런 전화 회사를 속이는 일이 그들에게는 매우 신나는 경험이었다.
잡스와 워즈는 고등학교 선후배 관계와 나이차이가 있었지만, 둘은 이를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은 수직적인 관계를 맺지 않는다.
다분히 수평적인 관계로 발전한다.
이런 수평적인 관계를 맺지 못했다면 애플 창업도 없었을 것이다.
잡스는 자신과 워즈가 나이와 성격이 차이가 나는데
어떻게 친구가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이렇게 농담처럼 말했다.
“저는 나이에 비해 좀 더 성숙했고, 그는 나이에 비해 좀 덜 성숙했죠.”
잡스는 17살 때 책을 읽다 너무나 강렬한 구절을 만나게 된다.
‘하루하루를 인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산다면, 언젠가는 당신이 분명히 옳을 것이다’
잡스는 이 문장에 감명 받았다.
그 뒤 매일아침 거울을 보면서 자신에게 묻곤 했다.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지금 하려고 하는 일을 할 것인가?”
“아니오!”라는 답이 계속 나온다면 다른 것을 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잡스 “대학 중퇴는 내 인생 최고의 결정”
잡스가 선택한 대학은 오리건 주 포틀랜드의 리드대학교였다.
잡스는 태평양 북서부에 자리 잡은 이 학교에서 짧지만 의미 있는 대학생활을 경험한다.
대학에 다니면서 그가 얻는 것은 바로 직관이었다.
그의 전공은 철학이었다.
리드대학은 규모가 작았지만 인문대학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하지만 사립대여서 등록금이 비싼 편이었다.
잡스의 어머니 클라라는 이렇게 회고했다.
“잡스는 자신이 가고 싶은 대학은 리드대학교 밖에 없으며,
그 곳에 가지 못하면 아무 데도 가지 않겠다고 했었죠.”
비싼 학비가 마음에 걸렸지만 잡스의 양부모는 그를 입양할 때 아이를 대학에 보내겠다는 약속을 저버릴 수 없었다.
폴과 클라라는 돈을 모아서 스티브를 리드대학교에 보낸다.
1972년 신입생이 된 잡스는 캠퍼스 곳곳에 붙어 있는 각종 포스터와 손으로 직접 쓴 글씨에 빠져들었다.
그는 포스터의 글씨가 참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언젠가는 서체수업을 듣겠다고 마음먹는다.
그러나 정작 대학을 다닐 때는 그는 서체수업을 듣지 못했다.
그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당시 리드대학은 선(禪)사상과 히피 문화의 중심지였다.
그 곳은 히피와 외톨이, 괴짜들의 캠퍼스였다. 잡스도 자연스럽게 그 물결에 동참하게 되었다.
자신이 입양아라는 사실을 알고부터 방황하던 차에 점점 선과 동양적 깨달음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잡스의 대학 친구는 이렇게 잡스를 기억했다.
“잡스는 항상 맨발로 다녔어요. 캠퍼스의 괴짜였죠. 잡스가 뛰어난 건, 집중력이었어요. 무엇이든지 비상식적으로 집중했죠.”
당시 학생과장 잭 더드먼의 기억은 이렇다.
“잡스는 호기심이 아주 강했다.
그냥 평범한 말은 그에게 통하지 않았다.
그는 자동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진실은 결단코 거부했다.
모든 것을 직접 해보고 싶어 했다.”
잡스의 정식 대학 과정은 단 6개월 만에 끝났다.
1학기만 수강한 뒤 중퇴한 것이다.
잡스는 대학이 그만한 가치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대학교육이 그의 인생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 판단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잡스의 첫 학기 성적도 형편없었다.
잡스의 양부모가 평생 모은 재산이 전부 자신의 학비로 들어가고 있는 것도 부담이었다.
잡스는 그때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그래서 모든 것이 다 잘 되라 믿고 자퇴를 결심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참 두렵고 힘든 순간이었지만, 그건 제 인생 최고의 결정 중 하나였습니다.”
대학교수들이 들었다면 기분 나쁜 말이겠지만, 대학중퇴는 그에게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게 만들어 주었다.
물론 그것이 낭만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기숙사에서 잘 수 없었기 때문에 친구네 집 마룻바닥에서 자기도 했고,
한 병당 5센트 하는 콜라병을 팔아서 먹을 것을 사기도 했다.
또 매주 일요일이면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 7마일이나 걸어서 힌두교 성당에 가서 예배를 드렸다.
당시 호기심과 직관을 믿고 저지른 일들은 나중에 그에게 큰 도움이 된다.
학교를 중퇴하면서 잡스는 학교 곳곳에 붙어 있는 포스터와 아름다운 서체를 다시 보게 됐다.
당시 리드대학교는 미국에서 가장 뛰어난 서체 교육을 하고 있었다.
그는 평소에 흥미 없던 필수 과목 대신 서체 강의를 청강하게 된다.
그때 잡스는 세리프(명조체)와 산세리프체(고딕체)를 배웠다.
서로 다른 문자끼리 결합될 때 다양한 형태의 자간으로 만들어지는 멋진 글씨체였다.
그건 과학적인 방식으로 따라 하기 힘든 아름답고 유서 깊고 예술적인 것이었다.
잡스는 서체에 푹 빠지고 말았다.
당시 그 수업이 잡스 인생에 어떤 도움이 될지는 그 스스로도 상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때의 경험은, 10년 뒤 그가 매킨토시 개발에 고민하고 있을 때 직감으로 다가온다.
그 수업은 이후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개발하면서 수려한 글씨체를 만들어 내는 데 기여하게 된 것이다.
짧은 대학생활이었지만 잡스는 그 때의 경험을 잊지 못한다.
그리고 그는 결혼해 낳은 아들의 이름을 리드라고 짓는다.
1974년 봄 워터게이트 스캔들이 터졌고, 베트남전이 막바지에 접어들 무렵이었다.
잡스는 1년6개월 만에 집으로 돌아온다.
무작정 대학에서 좀비생활을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뭔가 일을 해야 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온 잡스는 할 일이 없었다.
대학졸업장이 없는 그는, 일자리를 찾기 힘들었다.
집에서 백수생활을 하다 무심코 <산호제이 머큐리 뉴스>를 뒤적이다 우연히 ‘아타리’(Atari)라는 게임회사 구인광고를 보았다.
아타리는 비디오 게임을 만드는 회사였는데, ‘퐁’이라는 게임을 개발해 대박을 터뜨리고 있었다.
잡스는 무작정 그 회사에 찾아간다.
긴 머리, 허름한 옷의 히피차림이었다.
“써주지 않는다면 돌아가지 않겠다는군.
아주 괴상한 친구가 찾아왔어.
경찰을 부르든지 채용을 하든지 해야겠어.”
아타라의 한 직원은 이렇게 말하며 인사부 직원에게 이 엉뚱한 히피 청년을 처리하라고 요청했다.
경찰은 오지 않았다.
비록 밤에만 일한다는 조건이 붙긴 했지만 아타리는 잡스를 채용했다.
잡스가 인사부 직원에게 무엇이든 반드시 해내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회사에 적응해갈 즈음 잡스는 인생의 의미를 찾기 위해 인도여행을 떠나고 싶었다.
6개월 동안의 인도여행은 그의 인생에 전환점이 된다.
긴 여정 동안, 인도의 현실과 성스러운 분위기가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을 그는 눈여겨봤다.
인도는 그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가난하다는 것도 알게 됐다.
여행이 계속될수록 잡스는 이상도 중요하지만, 그 이상을 실현하는 게 더 중요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실용적이고 기술적인 혁신이야 말로 세상에 실질적인 도움이 될 거란 생각을 굳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열망이 움트기 시작했다.
잡스는 인도 여행을 이렇게 기억한다.
“토머스 에디슨이 칼 마르크스와 님 카롤리 바바(인도의 유명한 영적 스승)를 합친 것보다
세계를 개선하기 위해 더 많은 일을 했다고 처음으로 생각하게 되었죠. “
다시 캘리포니아로 돌아온 뒤에도 그는 아타리에서 계속 근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게임은 그가 하고 싶은 게 아니었다.
어느 주말 집에서 빈둥대고 있을 때, 책 한권이 보였다.
눈에 익숙한 책이었다.
‘지구 백과 The Last Whole Earth Catalog'였다.
어릴 적 차고에서 읽었던 바로 그 책이었다.
그런데 제목에는 최종판이라고 붙어 있었다.
최종판의 뒤쪽 표지에는 이른 아침 시골길 사진이 있었다.
모험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히치하이킹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대학중퇴 뒤 마음을 못 잡고 하릴없는 생활을 하고 있는 그의 심리를 대변해 보여준 사진이었다.
그 사진 위에는 이런 말이 있었다.
‘갈구하라, 우직하게(Stay hungry, stay foolish).’
잡스는 한참 동안 그 글을 말없이 보고 서 있었다.
"일생에 한번, 회사를 차려 보는 거야 "
1975년 3월5일 캘리포니아 외곽지역 멘로파크의 한 차고.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한 컴퓨터 개발자의 차고였던 그 곳에 30여명의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다.
사람들 사이에는 친구의 손에 이끌려 온 스티브 워즈니악(워즈)도 끼여 있었다.
컴퓨터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의 모임이었다.
그들은 부품을 사다가 조립하면 자기만의 컴퓨터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꿈을 갖고 있었다.
동호회 이름 역시 그 뜻에 맞게 정했다.
홈브루 컴퓨터클럽(Homebrew Computer Clubㆍ수제컴퓨터 동호회)이었다.
첫 모임에서 그들은 신분이 높지 않아도, 재산이 많지 않더라도 누구나 컴퓨터를 갖게 되는 그런 세상을 얘기했다.
허황된 생각처럼 보였다. 당시에는 대기업만이 컴퓨터를 가질 수 있었다.
당시 IBM과 같은 컴퓨터 대기업은 몇몇 엔지니어들이 만들어 내는 개인용 컴퓨터를 ‘아이들의 장난감’이라며 비웃었다.
하지만 6년 뒤 IBM은 그들의 생각이 틀렸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대학을 중퇴한 뒤 아타리(Atari)라는 게임회사에서 일하고 있던 잡스도 워즈의 손에 이끌려모임에 참석하곤 했다.
잡스는 동호회 회원들이 개발한 컴퓨터 부품들을 눈여겨 봤다.
그가 주로 살펴 본 건, 집적 회로나 저항기, 스위치 같은 부품들이 납땜되는 얇은 판인 회로기판이었다.
몇 차례 모임에 참석한 뒤인 그해 추수감사절 무렵, 잡스는 워즈에게 멋진 제안을 한다.
“워즈, 모임에 나오는 사람들은 컴퓨터를 만들 시간도, 능력도 없는 사람이야.”
“당연하지, 스티브. 그들은 비즈니스맨이 아니거든.”
“워즈, 우리가 컴퓨터를 만들어 파는 것은 어떨까?”
“뭐?”
“20달러짜리 인쇄 회로기판을 만들어 그것을 40달러에 팔자구.”
“하지만 우린 돈이 없잖아. 제품을 팔기 위해선 부품을 사야 하는데…….”
“워즈, 우리가 손해를 본다고 해도 회사를 차려볼 수 있잖아. 일생에 한번, 회사를 차려 보는 거야.”
‘일생에 한 번 회사를 차린다’.
워즈는 그 말에 넘어갔다.
워즈는 당시 휴렛패커드에서 일하고 있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창업한다는 건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잡스와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부모의 얼굴도, 컴퓨터에 빠져 산다며 핀잔하는 아내(워즈는 그해 결혼했다)의 잔소리도 떠올랐다.
하지만 잡스는 끈질기게 잡스를 설득했다.
결국 워즈는 제시하는 장밋빛 미래에 매료돼 오래지 않아 HP를 그만두게 된다.
워즈는 잡스의 아이디어와 열정에 이끌린 것이다.
CEO의 능력이 누군가를 설득하고 소통하는 일이라면 잡스는 그때부터 매우 뛰어난 CEO의 자질을 보인 셈이다.
지금도 잡스는 매년 열리는 맥월드에서 수많은 관객을 앞에 두고 애플의 전략과 제품을 설명하고 설득하고 있다.
회사를 차리기로 한 이상, 그들에겐 회사 이름도 필요했다.
스티브가 회사 이름을 제안했다.
“애플컴퓨터 어때?”
“애플레코드가 있잖아?”
비틀즈를 좋아했던 워즈가 반사적으로 반박했다.
맞는 말이었다.
1968년 이미 비틀즈는 애플레코드사를 설립해 놓았다.
“…….”
침묵이 흘렀다.
둘은 좀 더 기술적인 분위기가 나는 이름을 생각해 내려고 애썼다.
'이그제큐택 Executex’이나 ‘매트릭스 일렉트로닉스 Matrix Electronics’ 등등이 후보로 오갔다.
하지만 마음을 사로잡는 이름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더 좋은 이름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생각할수록 애플이라는 이름이 점점 더 마음에 들었다.
잡스는 전혀 다른 사업 분야여서 애플레코드와 문제가 없을 거라고 말했다.
그래서 애플로 하기로 했다. 애플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
1976년 4월1일 만우절 날 애플컴퓨터는 탄생한다.
워즈는 잡스와 회사 지분을 똑같이 45퍼센트를 나눠가졌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애플의 공동창업자는 한명이 더 있었다.
잡스의 친구였던 론 웨인이었다.
웨인은 지분 10퍼센트를 가졌다.
웨인은 애플I의 사용설명서를 만들었다.
그는 사용설명서 앞장에 사과나무 아래에 아이작 뉴튼이 책을 읽고 있는 그림을 그린 뒤
윌리엄 워즈워드의 시를 인용해 ‘사유의 신비로운 바다를 홀로 끝없이 항해하는 정신이여’라는 글을 써 넣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도, 심지어 창업자들마저도 이것이 거대한 사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웨인은 애플I의 만들어지자 곧바로 자신의 지분을 800달러에 워즈와 잡스에게 팔아버렸다.
이 선택으로 그는 백만장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놓쳐 버리고 만다.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그 사과의 가치는 오늘날 돈으로 환산하기 어려울 정도가 돼 버렸으니 말이다.
시작할 자금 마련을 위해 잡스는 밴형 폭스바겐을 팔아야 했고,
워즈니악은 프로그래밍이 가능한 전자계산기와 이별해야 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창업자금 1000달러를 모았다.
회사는 잡스의 부모집 차고였다.
그것이 바로 세계적인 IT 회사 애플의 출발이었다.
첫 주문은 잡스가 따냈다.
그의 배짱과 사업가적 마인드가 첫 주문을 이끌어 냈다.
애플 창업 뒤 잡스는 홈브루 모임에서 컴퓨터 매장을 갖고 있는 사장을 만났다.
그 사장은 잡스에게 인사치례로 한 번 연락하자는 말을 했다.
하지만 잡스는 그 말을 그냥 넘기지 않았다.
다음날 잡스는 무턱대고 그의 사무실 앞에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연락 한번 하자고 해서요.”
그리고 잡스는 그에게 회로기판을 팔면 어떻겠냐고 제안한다.
그 사장은 일단 100개 정도 만들어 보라고 허락한다.
하나당 500달러로 계약을 맺었다. 애플 자본금의 50배였다.
잡스는 곧바로 워즈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왜 전화했을까? 5만달러어치 수주를 받았어.”
“뭐라고? 5만달러? 내 연봉의 2배가 넘는 거잖아.”
애플을 세우고 난 뒤 처음 거둔 성공이었다.
워즈는 회로기판 만들기에 몰입했고 드디어 제품을 만들어 냈다.
애플I로 이름붙인 이 컴퓨터는 모니터도 없는 상태에서 탄생했다.
워즈가 개발한 컴퓨터는 사실 납땜질로 가득한 조악한 회로기판에 불과했다.
당연히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조잡하기만 한 컴퓨터였다.
애플I을 다른 사람들에게 팔려면 케이스도 있어야 했다.
하지만 워즈는 디자인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개인용 컴퓨터를 발명한 천재였지만, 사람들이 매력적으로 여기도록 제품을 디자인하는 능력은 없었다.
반면 스티브는 처음부터 디자인을 고민하고 있었다.
잡스는 애플I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들은 첫 제품을 애플I로 이름 지었는데, 앞으로도 후속 제품을 만들겠다는 의도였다.
홈브루의 컴퓨터광들은 보다 많은 사람들이 컴퓨터를 쓸 수 있는 사회를 꿈꿨다.
하지만 그들은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하지만 잡스는 그들과 달랐다.
홈브루의 친구들이 이상을 얘기했다면 잡스는 실행을 생각했다.
홈브루의 친구들이 아이디어를 떠올렸다면, 잡스는 아이디어를 비즈니스로 옮겼다.
잡스는 이때부터 경영자의 능력을 발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잡스는 대기업 IBM이 비웃었던 개인용 컴퓨터 시대가 반드시 올 것이라고 확신하게 된다.
"매킨토시의 아버지는 누구일까?"
1980년 12월 둘째 주, 애플 주식이 공개모집에 들어간다.
1950년대 중반 포드의 주식 공개 이래 모집 신청률이 가장 높았다.
상장된 지 한 시간 만에 주식이 모두 팔리는 진기록을 세웠다.
잡스와 워즈는 20대의 나이에 억만장자가 됐다.
잡스는 애플 신화를 이끈 주인공으로 떠오른다.
많은 젊은 사람들은 잡스에게 희망을 보았다.
그는 부모에게 재산을 물려받아 성공한 것이 아니었다.
오로지 창의력과 열정으로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다.
그러나 잡스는 이런 성공에 만족하지 않았다.
리사 프로젝트에서 물러나 이사회 의장 자리를 앉게 된 잡스는 새로 할 일이 필요했다.
뭔가 창의적인 제품을 만들어 세상을 놀라게 하고 싶었다.
바로 그때 잡스의 눈에 들어온 것이 매킨토시였다.
매킨토시는 리사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교수출신의 엔지니어 제프 라스킨이 출범시킨 프로젝트였다.
플러그만 꽂으면 바로 빵을 굽을 수 있는 토스터처럼 사용하기 쉬운 컴퓨터를 만든다는 게 팀의 기치였다.
라스킨은 사과 매킨토시의 철자 ‘McIntosh'를 살짝 바꾼 ’Macintosh'로 프로젝트 이름을 정했다.
사과 매킨토시는 타자하기 힘들고 오디오 장비 제조사 이름이어서 철자를 바꿔 상표권 침해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나중에는 사과 보다 매킨토시 컴퓨터가 훨씬 유명해져서 많은 사람들이 사과 품종의 이름을 틀리게 쓰는 일도 일어났다.
잡스는 ‘리사 프로젝트를 더 이상 진행할 수 없다면 리사에서 하고 싶었던 것을
매킨토시에 접목시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사에서 구현하려고 했던 GUI와 멋진 디자인을 매킨토시에 접목시키고 싶었다.
매킨토시는 누구나 쉽게 쓸 수 있는 쉬운 컴퓨터를 만든다는 콘셉트로 개발 중이었지만,
그래픽 기능이나 마우스를 갖추지는 포함시키지 않았다.
하지만 잡스는 매킨토시가 리사처럼 그래픽 기능과 마우스를 갖고 있어야 한다는 뜻을 강하게 제기했다.
잡스와 라스킨은 기술 개발을 놓고 여러 차례 의견 충돌을 빚고, 라스킨은 애플을 떠나게 된다.
결과적으로 잡스가 매킨토시 프로젝트를 맡게 된 것이다.
잡스는 매킨토시에 열정을 쏟아 부었다.
마찬가지로 매킨토시팀에게도 불만을 퍼부었다.
잡스는 리사팀원들에게 그러했듯이 매킨토시팀원들에도 완벽을 요구했다.
그리고 잡스는 3년 계획이었던 개발 일정을 1년 반 만에 마쳐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매킨토시를 향한 잡스의 열정에 혀를 내두른 개발자들은 ‘현실 왜곡장’(reality distortion field)이라는 말까지 만들어 냈다.
물리학 용어처럼 보이는 이 말은, 잡스가 현실에서 전혀 이뤄질 것 같지 않는 일을 주변사람들에게 믿게 만든다는 뜻이다.
사람들에게 열정과 비전을 불어넣어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도록 하게 하는 잡스의 열정과 비전을 보여주는 말이기도 했다.
잡스는 매킨토시를 완벽하게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보이지 않을 곳까지도 완벽을 요구했다.
어느 날 잡스는 컴퓨터 안에 들어가는 메모리칩을 보고 난 뒤 이렇게 말했다.
“메모리칩을 봐. 아름답지 않잖아. 선이 너무 가깝게 붙어 있어.”
“컴퓨터 안에 들어가는 보드를 신경 쓸 사람이 어디 있어요? 얼마나 잘 동작하느냐가 중요하죠.
아무도 컴퓨터 안의 보드를 보지 않을 거예요.” 개발자는 이렇게 대꾸했다.
“내가 본다니까! 보드가 케이스 안에 있어도 최대한 아름다워야 해.
훌륭한 목수는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해도 장식장 뒷면에 형편없는 나무를 쓰지 않아.” 잡스는 곧바로 이렇게 응수했다.
잡스가 개발자들을 들볶았지만, 그 역시 완벽한 제품을 만들기 위해 무척이나 애를 썼다.
그는 어떻게 하면 매킨토시가 보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고객에게 다가설 수 있을까라고 고민했다.
디자인뿐만 아니었다. 소프트웨어 역시 아름다운 모습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첫 번째 컴퓨터를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매킨토시가 한창 개발되는 어느 날 오후, 잡스는 자신의 책상에서 잠깐 눈을 붙였다.
그러다 섬광 같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대학을 중퇴하고 나서 마음을 못 잡고 방황하던 시절, 리드대학교에서 들었던 서체 수업이었다.
“그래! 매킨토시를 아름다운 서체를 지원하는 첫 번째 컴퓨터로 만드는 거야.”
잡스가 대학 중퇴 뒤 들었던 그 서체수업은 애플과 컴퓨터 이용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그 스스로도 몰랐다.
하지만 현재의 순간은 과거와 미래에 어떤 식으로 이어졌다.
만약 잡스가 그 수업을 듣지 않았다면 맥은 아름다운 서체를 지원하는 첫 번째 컴퓨터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아름다운 서체가 없었더라면 애플은 전자출판 시장을 열어가지 못했을 것이다.
애플 역시 인텔과 마이크로소프트의 협공으로 결국 망하거나 인수당했을 것이다.
만약 맥이 아름다운 서체를 지원하지 못했다면, 맥을 따라한 윈도도 그런 기능이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개인용 컴퓨터가 그런 서체를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잡스는 매킨토시팀원을 100명 이상으로 늘리지 않았다.
100명 이상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또 잡스는 매킨토시팀원을 뽑는 면접에 반드시 참가했다.
그가 신입사원 후보를 면접할 때 던지는 질문은 정해져 있었다.
그중 한 가지는 “환각제는 몇 번 해봤냐?”와 ”언제 총각 딱지를 떼었냐? “이었다.
잡스는 대답 내용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순발력 있게 대처할 수 없는 겁쟁이들을 솎아내는 게 질문의 의도였다.
그렇게 매킨토시 개발이 진행되고 있을 때,
잡스는 1982년 시사주간지 <타임>이 매년 선정하는 올해의 인물이 될 것이라는 소문을 듣게 된다.
잡스는 은근히 기대했다.
하지만 타임은 잡스의 기대를 저버렸다.
그해 타임은 잡스 대신 ‘개인용 컴퓨터’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타임은 올해의 인물 기사와 관련해 ‘스티브 잡스의 최근 근황’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기사를 읽은 잡스는 타임을 집어 던져버렸다.
기사에서 워즈는 “스티브는 회로판 하나, 디자인 하나, 코드 하나도 직접 만들지 않았다”고 말했다.
잡스 때문에 애플을 떠난 제프 라프킨은 “프랑스 왕이 되었다면 아주 잘할 사람”이라고 비꼬았다.
잡스는 이 기사로 그해 연말과 연시를 우울하게 보냈지만, 결코 좌절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더 강하게 드라이브를 걸었다.
잡스는 매킨토시를 선보이기 직전, 회사에 광고를 제안했다.
물론 그가 생각하는 광고는 혁신적인 광고였다.
매킨토시의 텔레비전 광고는 <블레이드 러너>의 감독인 리들리 스콧이 맡았다.
광고는 조지 오웰의 유명한 소설 <1984>에서 아이디어를 따 왔다.
오웰이 암울하게 그렸던 1984년에 매킨토시가 탄생해 세상에 희망을 준다는 메시지였다.
잡스는 미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슈퍼볼 경기 기간에 거액을 들여 공격적인 광고를 내보내려 했다.
하지만 애플 이사회는 매킨토시 소개는 전혀 없고, IBM을 비꼬는 내용의 이 광고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이사회는 이 광고에 75만 달러가 들었다는 것에 놀랐다.
광고를 한번 하는데 100만 달러나 들어간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랐다.
애플 이사회는 광고를 취소하려 했지만 방영날짜가 며칠 남지 않아 그렇게 하지 못했다.
행운은 잡스에게 있었다.
광고는 1984년 슈퍼볼 경기의 3쿼터 시작 직전 전국에 방송됐다.
어둠침침한 곳을 사람들은 획일화된 모습으로 빅 브라더를 향해 일렬로 걸어간다.
행진하던 사람들이 커다란 강당 안으로 들어서자,
강당에는 비슷한 모습의 사람들이 공허한 눈으로 스크린에 나온 빅브라더의 연설을 듣고 있다.
이때 어디선가 빨간색의 옷을 입은 여자가 커다란 망치를 휙휙 돌리더니 스크린 한 가운데로 던진다.
거대한 스크린은 눈부신 섬광을 일으키며 산산조각이 난다.
바로 이 순간 화면에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뜬다.
‘1월24일 애플 컴퓨터가
매킨토시를 소개하는 날입니다.
그때 당신은 왜 우리의 ‘1984년’이
조지 오웰의 <1984년>과 다른지 알게 됩니다. ‘
빅브라더는 IBM PC였고, 매력적인 금발 여성은 매킨토시를 뜻했다.
애플이 선점해 온 개인용 컴퓨터 시장에 대기업 IBM이 뛰어들어 사람들을 획일화 시키고 있지만,
애플은 이를 돌파하겠다는 것을 암시한 것이다.
광고는 대박을 쳤다. 58초의 광고 내용은 충격 이상이었다.
기존 광고와 완전히 차별화했고 워낙 독창적인 내용을 담았기 때문에
방송국은 뉴스시간마다 이 광고를 틀어주었다.
20개 이상의 잡지와 미국의 주요 신문들이 이 광고를 다루었다.
1984년 1월24일, 애플의 연례주주총회에서 매킨토시는 베일을 벗는다.
이날 더블재킷에 물방울무늬의 나비넥타이를 맨 한 남자가 무대에 들어섰다.
마치 라스베이거스의 흥행사처럼 보였다. 잡스였다.
잡스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부드러운 말투로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밥 딜런의 노랫말 ‘시대는 변해 가네‘(The Times-They are a Change)를 인용하면서 개회 연설을 했다.
작가와 비평가들 Come writes and critics
펜으로 예언하는 사람들아 Who prophesize with your pen
눈을 크게 떠 봐 And keep your eyes wide
변화의 순간은 다시 오지 않아 The chance won't come again
섣불리 말하지 마, And don't speak too soon
(변화의) 수레바퀴가 계속 돌고 있으니 For the wheel's still in spin
갓 싹튼 변화를 섣불리 말하지 마 And there's no tellin' who that it's namin'
지금의 패자가 For the loser now
훗날 승리할 거야 Will be later win
시대가 변하고 있으니까 For the times they are a-changin'
무대 중앙에는 작은 가방이 놓여 있었다.
잡스가 다가가 가방을 열고 손으로 맥을 번쩍 들어 올리며 가방에서 꺼냈다.
맥이 세상에 처음으로 선보였다.
잡스가 맥을 꺼내 플로피를 집어넣고 마우스 버튼을 누르자 컴퓨터 합성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안녕하세요, 저는 매킨토시입니다.
가방에서 나와서 정말 기분이 좋군요.
저는 연설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IBM 컴퓨터 본체를 처음 보았을 때 생각해 둔 격언 한마디만 여러분께 들려드리겠습니다.
‘손으로 들 수 없는 컴퓨터는 절대 믿지 마라.’
분명히 저는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뒤로 물러나서 가만히 듣기만 하지요.
저에게 아버지와 같은 분을 소개하게 돼서 영광입니다.
여러분, 스티브 잡스입니다! “
맥의 탄생에 모두가 잡스에게 기립박수를 보냈다.
잡스는 금방 태어난 맥의 아버지가 되는 듯해 보였다.
잡스가 IBM PC가 들어가기에는 작은 가방에서 손으로 맥을 들어 올린 건, 뛰어난 무대연출이었다.
작지만 아름다운 제품을 지향하는 그의 영원한 콘셉트이기도 했다.
이날부터 매킨토시는 미국 전역에서 팔리기 시작했다.
광고가 예언했던 것처럼 이 혁신적인 제품이 나오자 전국에서 주문이 폭주했다.
매킨토시를 사려는 사람들의 줄이 컴퓨터 상점마다 길게 늘어섰다.
잡스는 다시 한 번 영웅이 되는 듯했다.
하지만 광고의 대박은 매킨토시의 대박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초기 인기는 처음 시장에 나왔을 때 누린 반짝 특수였을 뿐이었다.
매킨토시는 IBM PC와 비교해 값이 비쌌으며, 응용 프로그램도 적었다.
확장슬롯이 없어 업그레이드가 되지 않았다. IBM PC와 호환도 되지 않았다.
매킨토시 매출은 1984년 내내 하락했다.
당시 잡스는 고객보다 기술을 보다 믿었다.
중요한 것은, 엔지니어 기술에 대한 만족이 아니라 실제 컴퓨터 사용자를 얼마나 만족시키느냐였다.
이 같은 실패는 그가 애플에서 쫓겨나게 되는 근본적인 이유가 됐다.
지금까지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게 있다.
매킨토시의 아버지는 누구인가.
매킨토시 개발자였던 앤디 허츠펠드는 이렇게 말한다.
“라스킨이 애플에서 매킨토시 프로젝트 창시자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매우 쓰기 쉽고 값이 싼 고성능 컴퓨터는 그의 명확한 비전 때문에 시작됐다.
하지만 라스킨은 마우스도 끔찍하게 싫어했다.
매킨토시는 잡스가 없었다면 어떤 형태로든 결코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잡스는 비전과 열정, 의지, 설득력으로 팀을 이끌어 불가능한 기준을 넘어설 수 있었다.
잡스는 매킨토시를 이끌어낸 원동력이었다.
내 의견으로는 (그가 매킨토시의 아버지로 인정받을)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 “
"잡스, 첫사랑에 버림받다 "
“최근의 조직 개편에서 저는 아무런 직무도 없는 사람이 되었고
정기적인 경영 보고서조차 받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저는 이제 겨우 서른 살이고 아직도 많은 기여를 하고 싶고 훌륭한 성과를 남기고 싶습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함께 이루었습니다. 이제 헤어지더라도 우의와 품의를 잃지 않고 작별 인사를 하시기 바랍니다…….”
1985년 9월17일 스티브 잡스는 사직서를 쓰다 말고 물끄러미 매킨토시를 바라봤다.
매킨토시가 모니터에서 만들어내는 글씨는 빼어나도록 아름다웠다. “휴우~” 긴 한 숨이 나왔다.
잡스는 자신이 만든 매킨토시 컴퓨터로 사직서를 쓰고,
자신이 매킨토시에 딱 들어맞는다며 도입한 레이저 프린터로 사직서를 뽑았다.
달랑 한 장의 종이를 남겨두고 그는 20대의 열정을 보낸 애플을 떠나야 했다.
애플과 함께 보낸 10년이 파노라마처럼 그의 기억을 스쳐 지나갔다.
애플은 그에겐 첫사랑이었다.
작은 우주이기도 했다.
그 우주에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그곳에서 그는 해적왕의 열정을 쏟아냈다.
보상도 받았다.
애플이 상장되면서 그는 20대에 억만장자의 반열에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지금, 아무도 떠나려는 그를 붙잡지 않았다.
애플을 떠난다는 건, 명백한 실패를 뜻했다.
잡스는 세상의 중심에서 변방으로, IT기업의 떠오르는 루키에서 괴팍한 행동의 경영자로 추락했다.
갓 서른의 실리콘밸리의 이 젊은 기업에겐 난생 처음 맛보는 처절한 패배였다.
그의 마음은 뭐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착잡했지만,
그날 오후 사무실 너머 보이는 노을은 불게 물들어 너무 아름다웠다.
그가 애플에 남더라도 더 이상 할 일은 없었다.
조직 개편 뒤 그에겐 ‘프로덕트 비저너리(product visionary)’라는 이름뿐인 직책만이 주어졌다.
더 이상 그는 매킨토시의 기술개발을 지휘할 수 없었다.
사무실도 옮겨야 했다.
애플 건물과 한참 떨어져 있는 길 건너편의 작은 건물이었다.
그는 이 사무실을 ‘시베리아’라고 불렀다.
거기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몇 차례 전화 통화와 우편물을 확인하는 것뿐이었다.
매일 책상 위에 올라오던 경영보고서는 더 이상 올라오지 않았다.
몇몇 사람들이 주차장에 있는 그의 차를 보고 위로차 들릴 뿐이었다.
잡스는 임원들에게 전화를 돌려 “내가 도울 일이 있으면 전화를 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모두들 따뜻한 말을 건네주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다시 전화를 걸어주지 않았다.
그리고 사무실에서 두어 시간 앉아 있다 풀이 죽어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첫 사랑 애플과의 이별 조짐은 1984년 1월 매킨토시가 나온 뒤부터였다.
잡스는 매킨토시가 출시되면 2년 안에 200만대 넘게 팔릴 것이라고 큰 소리쳤다.
‘고객의 고객을 위한, 고객에 대한’ 제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할 만큼 열정과 인력과 돈과 시간과 사람을 투입했다. 희망은 신념처럼 굳어졌다.
하지만 잡스의 예상은 빗나갔다.
매킨토시는 나오자마자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지만, 그 시간은 100일을 넘지 못했다.
기계적인 성능이야 매킨토시가 대기업 IBM이 만든 PC 보다 월등히 나았다.
텍스트에서 명령어를 쳐야했던 IBM PC와 달리,
매킨토시는 아이콘을 마우스로 클릭만 하면 간단하게 쓸 수 있었다.
문제는 소프트웨어였다.
매킨토시에는 달랑 6개의 소프트웨어만 굴러갔다.
게다가 매킨토시는 IBM PC 보다 값이 비쌌고 스크린이 작은데다 하드 드라이브의 기억 용량도 충분치 않았다.
잡스가 자신의 직관을 너무 믿은 게 화근이었다.
고객이 원하는 것을 자신만이 알고 있다고 생각한 자만심이 문제였다.
매킨토시 매출은 갈수록 뚝뚝 떨어졌다.
잡스는 이럴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여름 비수여서 그렇다고 받아들였다.
하지만 시장은 냉혹했다. 회사간판을 내건 뒤 처음으로 분기 적자를 기록할 판이었다.
애플 최고 경영진들은 이 실망스런 결과를 놓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에 들어갔다.
게다가 잡스의 친구이자 애플의 공동창업자인 스티브 워즈니악(워즈)이 회사를 떠나버렸다.
워즈는 “애플 경영진이 애플Ⅱ를 지원하지 않고 매킨토시에만 열을 올린다”며 비난하고 난 뒤 짐을 싸버렸다.
사실 애플의 모든 수익은 매킨토시가 아니라 애플Ⅱ에서 나오고 있었다.
잡스가 애플CEO로 데려온 존 스컬리는 궁여지책으로
펩시 시절 써먹었던 ‘팹시 챌린지’와 비슷한 마케팅을 활용한다.
애플 대리점에 신용카드를 갖고 와 서류에 사인만 하면
누구나 매킨토시를 집으로 가져가 24시간 자유롭게 써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져올 수 있게 한 것이다.
참가자가 20만명에 이르렀지만 대부분이 되가져왔다.
대리점에는 매킨토시 중고 컴퓨터가 쌓여갔다.
책임을 짊어질 희생양이 필요했다.
매킨토시 개발을 진두지휘한 잡스가 1순위였다.
게다가 잡스의 독불장군식 스타일은 회사 안에서도 반감을 샀다.
개성이 강한 잡스와 스컬리와 갈등의 골도 깊어만 갔다.
잡스가 선공에 나섰다.
잡스는 스컬리가 중국 출장을 떠나 있는 동안,
이사회 임원들에게 자신의 편이 되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이런 움직임은 곧 스컬리에게 보고됐다.
그리고 잡스는 스컬리한테서 전화를 받았다.
“모든 게 끝났네, 스티브.
나는 곧 이사회 투표를 거쳐 조직 개편을 단행할 걸세.
자네가 회사에 남은 것은 상관없지만 더 이상 어떤 부서의 책임도 맡기지 않을 거야.”
그리고 이사회가 열렸다.
스컬리는 이사회에서 자신한테 회사 운영의 전권을 달라고 요구했다.
그래야만 자기 생각에 올바른 방향으로 회사를 정상화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이사회 의장을 뒤흔든다는 모습으로 비쳐지면
CEO로서 역할을 제대로 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사회 의장이었던 잡스는 스컬리가 컴퓨터 사업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가 회사를 맡아야 한다고 반박했다.
오직 자신만이 애플을 구할 수 있으며
자신이 CEO를 맡아야 한다고 필사적으로 설득했다.
하지만 상황은 몇 분 만에 종료됐다.
스티브의 편을 들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스컬리가 실권을 장악했다.
잡스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스컬리는 노골적으로 잡스가 회사에서 나가길 바랐다.
스컬리는 애널리스트에게 애플의 미래계획을 설명하다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회사 운영에서 잡스가 맡을 일은 업다”고 말했다.
신문은 큼직하게 보도했고, 잡스도 신문을 보았다.
이사회가 열린 며칠 뒤 인사개편이 있었다.
조직도에는 이름이 하나 빠져 있었다.
잡스는 그 어떤 직책도 받지 못했다.
곧바로 신문들은 1면에 ‘애플 공동창업자 잡스 강등’이라는 기사를 쏟아냈다.
기자들과 지인들이 잡스의 집에 끝도 없이 전화를 걸었다.
끊임없는 전화벨 소리가 울렸지만 그는 전화를 받지 못했다.
단지 어둠이 깔린 집안에서 그가 정말 좋아하는 밥 딜런의 노래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어둠 속에서 잡스는
“난 세상을 바꿔놓기를 바랬지만 사람들은 나를 부적응자,
반항아, 문제아로 여겼어. 하지만 말이야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미친 사람들이야말로 진정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라는 말을 몇 번이나 되뇌었다.
그때 그가 되뇌던 독백 같은 말은 13년이 흐른 뒤 밥 딜런과 함께 다시 세상에 등장한다.
잡스는 인생 절반을 바친 애플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애플은 그를 원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그는 스탠퍼드대 교정을 하릴없이 어슬렁거렸다.
뜬금없이 우주왕복선 챌린저호에 탑승하고 싶다는 뜻을 NASA에 전달했다.
요청은 거절당했다.
챌린저호는 발사 뒤 곧바로 폭파됐다.
정치에 입문해볼까라는 생각을 내비치기도 했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의 미래를 점쳤다.
그가 벤처자본가로 나설 거라는 둥, 조지 루커스 제국의 컴퓨터 그래픽 부서를
맡을 것이라는 둥의 얘기가 나왔다.
오랜 고민의 시간이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 잡스는 자신의 주차장에서 시작한 애플을 떠올렸다.
그는 ‘그때 왜 애플이라는 회사를 만들려고 했을까?’라고 자신에게 되물어 보았다.
그건, 바로 새롭고 혁신적인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래, 내가 제일 잘하는 일은 새롭고 혁신적인 제품을 만드는 거야.”
오랜 고민의 시간 끝에 잡스는 결심한다.
자신이 제일 잘하는 것을 하기로 마음을 정한 것이다.
바로 새롭고 혁신적인 제품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렇게 사직서를 낸 뒤, 그는 자신이 갖고 있는 주식을 차례로 팔아치웠다.
달랑 한주만을 남겨두었다.
애플의 경영보고서를 받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는 회사를 그만두면서 기자들에게 10년 뒤를 암시하는 듯한 말을 건넸다.
“나에게 애플은 첫 사랑이다.
모든 남자가 처음 사랑했던 여자를 기억하는 것처럼 나도 언젠가 애플을 기억할 것이다.
내 마음은 언제나 그 곳에 있을 것이다.”
잡스가 애플에서 쫓겨나게 된 건, 매킨토시의 판매 부진이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매킨토시는 애플이라는
기업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한 최고 공로자였다.
잡스는 매킨토시의 글씨체를 아름답게 하는데 온갖 노력을 다했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글씨체를 제대로 뽑기 위해
매킨토시보다 훨씬 고가인 레이저프린터도 제작했다.
애플의 모든 사람들이 정신 나간 짓이라고 여길 정도였다.
잡스가 떠난 뒤 매킨토시는 빼어난 인쇄 품질을 자랑하며
본격적인 전자출판 시대를 열어 나간다.
디자인 업계와 출판업계를 중심으로 매킨토시는 단숨에 확산된다.
매뉴얼부터 카탈로그, 회보, 비즈니스 서식에 이르는
다양한 간행물을 편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와 인텔의 공세 속에서 애플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 역시
바로 이런 틈새시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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