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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한강문학》 13호, 〈위당 정인보의 精神〉에 이어 두 번째 분재하는 글이다. 원본은 《조선사 연구》(정인보/ 박성수 편역, 서원 刊)이며, 지면을 할애하여 분재하는 까닭은 위당爲堂(1893∼사망 미상) 선생과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1880~1936) 선생 두 분은 ‘한민족의 뿌리찾기’에 남다른 열정으로 보이신 선각자였기 때문이다(단재의 《朝鮮史論》 또한 게재 예정). 그동안 우리 민족의 고대사 연구는 부실한 중국 사서史書를 기본사료로 활용해 왔다. 한족漢族은 과거부터 자국의 유, 불리를 잣대로 주변 민족에 관한 기록에서 선택과 누락, 왜곡을 전단專斷해왔다. 12호에 《후한서》, 13호에 《삼국지》를 게재한 것은 그 증좌를 독자의 입장에서 용이하게 판단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최근 중국의 ‘동북공정’도 명칭만 다르지, 한족이 과거부터 늘 해오던 수단과 방법이기에,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놀랄 필요조차 없다. 또한 일제식민지 때, 중국 사적들을 사용하던 일본대학에 유학을 하고 돌아온 학자들에 의하여 우리의 근대적 역사학의 기초가 마련되었고 그 폐단이 아직까지 지속되고 있다. 일본학자들 또한 한족漢族보다 더하면 더했지, 비뚤어진 애국심으로 자국보다 앞 선 극동지역의 문화! 그 중에서도 특히 우리민족의 문화를 노골적으로 외면, 왜곡했다. 그 증좌는 역동적인 만주지역의 고대사, 곧 우리의 고구려, 백제, 발해와 만주에서 궐기하여 중국 본토를 정복하여 대제국 청淸을 건국한 여진족의 내력을 선별적으로(?) 능숙하게(?) 외면한다. 《사고전서四庫全書》는 상세히 다루면서도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 대해서는 “만주족의 한화풍조漢化風潮를 막고 여진족의 고래古來 무력문화武力文化를 무시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간단한 언급에 그친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부한 일본유학파들이 우리민족에 대한 관심을 제대로 갖거나 연구를 할 수 없었던 것은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된다(《흠정만주원류고》남주성 역주, 2010, 글모아 刊). 그리하여 오늘날, 위당과 단재의 중요성이 한층 부각되는 것이다.〈편집자〉 |
5천년간 조선의 ‘얼’
누구나 어릿어릿하는 사람을 보면 얼빠졌다고 하고 멍하니 앉은 사람을 보면 얼이 하나도 없다고 한다. 사람이 고도리는 ‘얼’이다. ‘얼’이 빠졌을진대 그 사람은 거플 사람이다. 이것은 그리 신기한 말이 아니다. 초동樵童이나 목수牧豎라도 다 아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보는가. 눈으로. 무엇을 가지고 듣는가. 귀로. 무엇을 가지고 맡는가. 코로. 무엇을 가지고 먹는가. 입으로. 무엇을 가지고 다니고 무엇을 가지고 들고 쥐는가. 발로, 손으로. 그러나 손이 있으나 쥐지 아니하고 발이 있지만 가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서 ‘얼’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남들이 ‘우우’ 하면 셈하지도 않고 그리로 몰리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남들이 그렇게 하니까 얼빠진 자가 그리 하는 것이 아닌가. 오직 셈이 너무나 많아서 일동 일정이 타산 아닌 것이 없어 자기 이해 이외에는 한 치도 못 보는 자도 있다. 이것이 심하면 이것이 무상한 것이라고 믿고 다시는 돌아설 가망이 없는 사람도 있다.
사람의 존재는 육체로서의 존재를 말하지 않는다. 얼의 존재가 이른바 존재이지 지우智愚와 현불초賢不肖를 따질 것 없이 누구나 얼빠진 사람을 꺼플 사람이라는 데 이론의 여지가 없다. 세상 사람은 대개 불행을 당하여 낙심하고 실의에 빠진다. 어릿거리는 사람이 되고 멍한 사람이 된다. 남이 그를 이르되 “저 사람은 그가 당한 불행으로 인하여 저렇게 되었다”고 하면서 나무라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다. 환경과 조건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또 그것이 나를 궁하게도 하고 욕되게도 하지만 ‘얼’만은 빼앗아가지 못한다. 누구나 빼앗아가지 못하기 때문에 얼을 귀하다고 하는 것이다. 이처럼 얼은 남이 빼앗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만일 누가 얼을 잃었다면 그것은 스스로 자실自失한 것이지 누가 약취해 간 것이 아닐 것이다.
제(자기)가 남이 아닌 것과 남이 제가 아닌 것을 어떻게 아는가. 그것은 무엇을 한다 하면 ‘저로서’ 하고 무엇을 아니한다 하면 ‘저로서’ 아니하여야 제가 저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는 저로서’가 바로 ‘얼’인 것이다. 그러니 여기에 무슨 오묘함이 있으며 미묘함이 있으랴.
어떤 사람은 이 말을 반박하여 제가 남이 아닌 것을 누가 모르는 가라고 하며, 이것을 ‘얼’이라 하면 얼빠진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제가 남이 아닌 것을 아는 사람은 누구냐. 알고든 나서라. 알되 뚫어지게 알아야 안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또 반박하기를 사람의 수행修行은 ‘저’를 극복하는데 있다고 하며 이를 극기克己라 하고 멸사滅私라 하는 것이니, ‘제는 저로서’만을 내세우면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 즉 창광망행猖狂妄行을 권장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지 않느냐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때의 ‘저로서’의 ‘저’는 멋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창광망행의 ‘저’가 아니라 극기되고 자기를 죽인 멸사滅私된 순수한 ‘저’를 말하는 것이다.
사람의 존재는 육체로서의 존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얼’의 존재를 말하는 것이다. ‘얼’은 육체와 함께 생사를 같이하는 것이 아니므로 그 뜻하는바 한번 격발激發하게 되면 장작이 불에 다 타고 없어도 그 불이 다른 장작으로 옮겨 타 가듯이 소기의 목적을 이루기까지는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분발이란 저로서의 분발이라야 힘이 있는 것이요 힘이란 저로서 하고 싶어야 분발되는 것이다. ‘얼’이란 휴식이 없는 것이니 얼로서의 분발은 그 종국終局이 없는 것이다.
오로지 빈껍데기에 타인의 혼을 혼으로 알고 타인의 심(마음)을 심으로 하여 행동하는 것은 언제나 자주自主함이 없는 인간의 소행이라 할 것이다.
모든 학술이 ‘얼’을 주제로 삼아야 비로소 참다운 학문일 수 있다. 어떤 체련體練도 얼이 종宗이 되어야만 비로소 용장勇壯의 실實을 거둘 수 있다. 우리나라 5천년간 ‘얼’의 나타남과 숨음, 그리고 ‘얼’의 신장과 위축을 연구하여보면 곧 우리나라의 성쇠成衰와 융락隆落의 원인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 가지 기술이나 한 가지 예술에 이르기까지 이 ‘얼’이 정혼精魂이 되어야만 비로소 생명이 있는 것이니, 오호라! 쌓이고 쌓인 고질이 너무 오래 되어 우리는 다른 무엇으로도 고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느니라.
1. 시조 단군
1) 단군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다
조선의 시조는 단군이시니 단군은 신이 아니요 인간이시다. 단군은 백두산과 송화강을 터전으로 잡고 조선을 만드셨으니 조선민족의 조선민족의 여러 갈래는 모두 단군으로부터 생기고 조선의 정치와 문화는 모두 단군으로부터 열리었다. 그러니 우리 선조로서 우리 민족에 끼친 흔적과 그림자가 있다면 모두 단군의 뛰어나심을 받들어 이룩된 것이다.
우리가 조선왕조에서 고려왕조 그리고 다 나아가 삼국시대 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더라도 아직 단군시대에 이르려면 절반도 못가는 형편이다. 대개 삼국시대 이전의 역사 가운데 동북부여東北夫餘의 분규紛糾와 진개秦開의 역役, 그리고 위만의 반란 등 여러 사건이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단군이 수도를 패강浿江 유역으로 옮기기 훨씬 전인 중국의 하夏나라 시대 초에 하나라에서 사신使臣을 버냈다는 사실도 기록되어 있다. 요堯 임금의 바로 다음 대인 순舜임금이 동이족東夷族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로써 미루어 볼 때 동이족이 이미 순임금 이전에 존재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단군의 역사는 유구한 5천 년의 세월과 풍상으로 인하여 혹 문헌에 나타나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였으니 그렇다고 무얼 탓할 것이 있겠는가. 세월이 오래면 기록이야 없어지게 마련이 아닌가. 우리 후손은 후손된 도리로써 무엇이 얼마나 없어졌는지를 찾아서 그 끊어진 부분을 밝혀주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민족이 언제 ‘세움’(건국)이 있었고 언제 ‘겨룸’(전쟁)이 있었는가를 알면 된다. ‘세움’과 ‘겨룸’이 있었다면 그렇게 한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바로 그 사람이 역사의 ‘사북’(가장 요긴한 부분, 가위나 부챗살이 교차하는 곳에 박은 못)이 되어 조선 민족의 ‘살’이 되었던 것이 아닌가. 그리고 이 ‘사북’이 있음으로써 우리 마ᅟᅵᆫ족은 언제나 조선 민족으로서 변함이 없는 것이다.
2) 《삼국유사》 기록에 사실 부분이 있다
지금 단군에 관한 옛 기록을 인용하는 사람은 모두가 고려시대의 스님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事》 〈고조선조古朝鮮條〉를 인용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책의 〈고조선조〉 기사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하여 살펴보아야 한다. 즉 〈고조선조〉 기사에는 ‘사실 부분’이 있고 허황한 ‘신화 부분’이 있어 진탄眞誕이 뒤섞여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 부분은 엄격히 구분하여야 한다. 먼저 사실 부분을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고조선조〉에는 중국의 사서인 《위서魏書》를 인용한 부분이 있는데 이는 모두 사실이다.
《위서》에 말하기를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단군 왕검이 계시어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여 조선이란 나라를 개국하였으니 때가 중국의 요순시대와 같았다.
魏書云 乃住二千載 有壇君王儉 立都 阿斯達 開國號朝鮮 與高(堯)同時.
둘째 〈고조선조〉에는 우리나라의 《고기古記》를 인용하면서 환인의 서자 환웅이 늘 천하에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다스리고자 하였는데 환인은 이러한 뜻을 알고
삼위태백이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하다고 판단하여
下視三危太伯 可以弘益人間
환웅에게 3천명의 무리를 거느리게 하여 태백산 정상에 있는 신단수 아래에 내려 보내셨다.
雄 率徒三千 降於太白山頂 神壇樹下
환웅은 또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농사와 인명과 질병, 사법, 도덕 등을 다스리게 하시었다.
將風伯雨師雲師 而主穀主命主病主刑主善惡 凡人間三百六十餘事
환웅은 아들을 얻으셨으니 이름을 단군왕검이라 하였다.
生子 號曰檀君王儉
환웅의 아들 단군은 당뇨 즉위 50년 경인에 평양에 도읍하여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하였다.
以唐高卽位50年庚寅 都平壤城 始稱朝鮮
그는 또 백악산, 아사달 등지로 도읍을 옮기었고 통치 기간은 1천 5백년이었다.
又移都於 白岳山阿斯達 御國一千五百年
그런데 《고기》를 인용한 부분에는 이런 사실 기사에다 일부 믿기 어려운 신화 기사가 섞여 있으니 이것으로 인해 읽는 이가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에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같은 굴속에서 살고 있으면서 그들은 항상 신웅에게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빌거늘 환웅이 쑥과 마늘을 주면서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되리라 하였다.
時有一雄一虎 同穴而居 常祈于神雄 願化爲人 時神遺靈艾一炷蒜二十枚曰 爾輩食之 不見日光百日 便得人形
웅녀는 그와 혼인해 주는 이가 없어 늘 신단수 아래에서 아이 낳기를 축원하였다. 환웅이 이를 알고 거짓으로 사람으로 변하여 그녀와 혼인하여 아이를 낳았다.
熊女者 無與爲婚 故每於壇樹下 祝願有孕 雄乃假化而婚之, 孕
《삼국유사》의 이 기록이 현존하는 문헌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라 하여 모두가 단군에 관한 전거典據로 삼고 있다. 물론 일연의 이 기록이 단군에 관한 전거가 아니라는 것은 아니나, 설혹 이 일연의 가록이 없다 할지라도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우리의 시조가 단군이시라는 사실을 알면서 그렇게 믿고 있다. 대대손손 부모님의 가르침으로 다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단군에 관한 한, 굳이 문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인용한 《위서魏書》란 책은 탁발씨拓拔氏가 쓴 《위서魏書》가 아니라 왕심王沈이 쓴 《조위서曹魏書》라는 책이었다. 그것은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위서》와 《위지魏志》를 엄연히 구별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혹자는 말하기를 왕심이 쓴 ‘조위서’가 지금 남아 있었으면 단군에 관한 사실이 더 분명하게 드러났을 터인데 하면서 아쉬워하고 있지만, 설사 왕심의 ‘조위서’가 지금 없다 하더라도 단군이 분명치 않은 것이 아니다. 단군이 계셨다는 사실의 증거는 그것을 알고 있는 우리가 그 산 증인이 아니고 무엇인가. 굳이 없어진 왕심의 ‘조위서’를 찾을 것이 무엇인가.
‘삼국유사’를 보더라도 일연이 결코 거짓을 꾸미려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또한 ‘삼국유사’의 다른 곳에서도 일연이 인용한 사서史書, 예를 들어 《위지魏志》, 《전한서前漢書》, 《통전通典》 등의 내용이 대체로 일치하고 있으니 《위서》의 경우도 틀림이 없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단지 《삼국유사》가 단군의 ‘단’자를 박달나무 ‘단檀’ 자로 쓰지 않고 제단 ‘단壇’ 자로 쓴 것은 특이하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한 오자이다. 왜냐하면 《삼국유사》는 다른 곳에서 위만衛滿을 위만魏滿으로 오기하고 있는데다가 또 찬璨 자를 찬讚 자로 잘못 쓰고 있다. 그러므로 단군의 단 자를 제단 단 자로 오기한 것도 그런 여러 오류 중의 하나로 볼 수 있다. 또 신단수의 단 자도 신단수神檀樹가 되어야 하는데 역시 신단수神壇樹로 잘못 쓰고 있다.
3) 《세종실록》 〈지리지〉와 권근의 《응제시주》
‘고기’를 인용한 전적으로는 《삼국유사》 이외에 다른 두 권이 더 있다. 그 하나는 《세종실록》〈지리지地理志 평양부조平壤府條〉요, 다른 하나는 권근權近의 《응제시주應製詩註》〈시고개벽동이주조始古開闢東夷主條〉이다. 이 두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그 내용이 《삼국유사》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
《세종실록》 〈지리지〉
단군 ‘고기’에 상제 환인에게 환웅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환웅이 인간이 되기를 원하여 태백산 신단수 아래 내려 보냈으니 이가 환웅천왕이다. 환웅이 손녀에게 약을 먹여 사람의 몸이 되게 하였으며 단수신과 혼인케 하여 아들을 낳았다. 이름을 단군이라 하고 나라를 세우니 그 국호가 조선이었다. 조선은 물론이요 시라, 고례, 남북옥저, 동북부여, 그리고 예와 맥국은 모두 단군이 다스리던 나라였다. 단군이 비서갑의 하백녀를 취하여 아들을 낳으니 부루이다. 이가 동부여왕이다. 단군은 당뇨와 같은 때 건국하였고 우왕이 도산에 모임을 가지니 태자 부루를 보내어 조회하였다. 나라가 1천 38년 계속되었다.
檀君古記云 上帝桓因 有庶子 名雄 意慾下化人間 降[太白山) 神檀樹下 是爲桓雄天王 [令孫女 飮藥 成人身與檀樹新婚而生男] 名檀君 立國號曰朝鮮 [朝鮮 尸羅 高禮 南北沃沮 東北夫餘 濊與貊 皆檀君之理] [檀君 聘娶非西岬河伯之女 生子曰 夫婁] 是爲東夫餘王 檀君 與唐堯同日而立 [至禹會塗山 遺太子夫婁朝焉] 亨國一千三十八年
위와 같이 《세종실록》〈지리지〉는 《삼국유사》 기사와 사뭇 다른 기록을 남기고 있다.
① 태백산의 백 자가 맏 ‘백伯’ 자가 아니라 흰 ‘백白’ 자로 되어 있다.
② 손녀에게 약을 먹여 사람이 되게 하여 단수신과 혼인하였다고 되어있다.
③ 조선은 물론 시라, 고례, 남북옥저, 동북부여, 에맥이 모두 단군이 다스리던 나라라고 명기하고 있다.
④ 단군의 아내가 하백녀요 그 아들이 부루요 부루가 도산회의에 참가했다고 되어있다.
권근의 《응제시주》
‘고기’에 이르기를 상제 환인에게 환웅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환웅이 인간이 되고 싶어 하여 천인 3개와 3천명의 무리를 주어 태백산 신단수 아래에 내려 보냈다. 이가 환웅천왕이다. 환웅의 환을 혹 단이라 하여 단웅이라고도 한다. 태백산은 지금의 평안도 희천군 묘향산이다.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곡식과 생명, 질병 그리고 선악을 다스렸으니 므릇 인간 삼백 육십여 사를 다스려 세상을 순화한 것이다. 이 때에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동굴 속에 살고 있었는데 항상 기원하기를 사람이 되기를 바랐다. 이에 환웅은 신령스런 마늘 한 단과 쑥 20매를 주면서 말하기를, “이것을 먹고 1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 모습이 될 것이니라” 하였다. 이에 곰과 호랑이는 이를 먹었는데, 호랑이는 금기를 지키지 못하고 곰은 금기를 지켜 삼칠일(21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아니하였더니 여자 몸이 되었다. 그녀는 혼인할 사내가 없으므로 신단수 아래에서 잉태하기를 기원하니 환웅이 거짓으로 사람이 되어 아들을 잉태하게 하였다. 이가 바로 단군이다. 단군은 당뇨와 같은 날에 나라를 세워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다. 처음 평양에 도읍을 정하고 후에 백악으로 옮겼다. 그는 또 비서갑의 하백녀와 혼인하여 부루라는 이름의 아들을 얻었다. 이가 뒤에 동부여왕이 되는 분이다. 우가 도산회의를 열자 단군이 아들 부루를 보내어 조회하였다. 단군은 무정 8년 을미에 아사달에 들어가 신이 되었다. 아사달은 지금의 황해도 문화현 구월산이다. 그 묘가 지금에도 남아있으며 1048년까지 사셨다. 그 뒤 164년 기묘에 기자가 와서 왕으로 봉해졌다.
古記云 上帝桓因 有庶子 曰雄 意慾下化人間 受天三人 率三千 降於[太伯山] 神檀樹下 是謂桓雄天王也 [桓 或云檀] 山 卽今平安道熙川郡妙香山也 將風伯雨師雲師 而主穀主命主病主善惡 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 在世理化 時有一熊一虎 同穴而居 常祈于雄 願化爲人 雄遺靈艾一檀 蒜二十枚曰 食之 不見日光百日 便得人形 熊虎食之 虎不能忌 而態忌 三七日 得女身 無與爲婚 故每於檀樹下 呪願有孕 雄乃假化而爲人 孕 生子 [曰檀君 與唐堯同日立 國號朝鮮] 初都平壤後都白岳 聚非西岬河伯之女 生子夫餘 是爲東夫餘王 [至禹會塗山檀君 遺子夫婁朝焉] 檀君虞 夏 至商武丁八年乙未 入阿斯達 化爲神 今黃海道文化縣九月山也 廟 至今存焉 享年一千四十八 年 厥後一百六十四年己卯 箕子來封
권근의 《응제시주》 가운데 《삼국유사》와 다른 부분은
① 태백산의 백 자가 맏 백자로 되어있다. 이는 《삼국유사》와 같고 《세종실록》과 다르다.
② 환웅을 일명 단웅이라고도 한다는 부분이 다르다.
③ 단군이 당뇨와 같은 날 즉위했다는 부분이 다르다.
④ 단군의 아들 부루가 도산회의에 참가했다고 되어있다. 이는 《세종실록》과 같다.
그러나 이같은 상이점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세종실록》과 《응제시주》의 단군 기사는 삼국유사의 기사와 대동소이하다고 할 수 있다. 이로 미루어 그 출처가 거의 한 곳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할 점이 있다. 《세종실록》은 단종端宗 갑술甲戌(1454)에 편찬된 것이고 《응제시주》는 세조世祖 7년(1461)에 조판된 것이다. 그런데 현존하는 《삼국유사》는 도리어 중종中宗 7년(1512)에 다시 개간改刊된 것이다. 이처럼 ‘삼국유사’ 원본이 없기 때문에 기장 일찍이 나온 책이 가장 늦게 나온 것이 되어버려 잘못된 부분은 앞에 나온 ‘세종실록’이나 ‘응제시주’를 보고 고쳤을 것이다. 《응제시주》는 “환桓은 혹或 단檀으로도 씀”이라 하면서 다른 글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는데, 이것은 ‘고기’를 조심스럽게 전해주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하면 나무 목변의 박달나무 단檀 자나 흙 토변의 제단 단壇 자나 모두 상고시대의 고어를 그대로 사음한 한자이니 나무 목木변이든 흙 토土변이든 가릴 것이 없는 것이다.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4) 단군은 어느 때 사람인가
첫째 문제가 단군의 생존 연대, 즉 구근久近 문제이다. 이 문제의 발단은 《삼국유사》〈왕역王曆 제1〉에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東明王이 단군의 아들이라고 기록한 데서 비롯되고 있다.
동명왕은 갑신년에 즉위하였고 20년을 다스렸다. 성은 고씨요 이름을 주몽이라 한다. 일명 추몽이라고도 하는데 단군의 아들이다.
東明王 甲申立 理二十年 姓高 名朱蒙一作鄒夢 檀君之子
권근의 《응제시주》에도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부여왕 해부루는 단군의 아들이다.
夫餘王解夫婁 檀君之子也
이러한 오류는 《세종실록》〈지리지〉도 마찬가지인데 이것은 단군이 하백녀河伯女를 얻었다는 기록과 해모수解慕潄의 고사古事가 혼합된 탓이다. 그래서 단군이 감국시대 직전의 인물처럼 되어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간단하다. 즉 《삼국유사》에는 단군이 나라 다스리기를 1038년, 살기를 1908세라 했고, 《세종실록》에는 단군이 나라 다스리기를 1038년, 《응제시주》에는 단군이 살기를 1048년이라 하면서 마치 단군 한 분의 재위 기간이나 나이가 1천년이 넘는 것처럼 썼다. 그러나 이것은 권근이 《응제시주》에서 말한 것처럼 단군이 대대로 물려서 전한 햇수, 즉 전세傳世를 말한 것이지 몇 년을 살았다는 형수亨壽가 아니다. 다시 말해서 단군 조선이 역대 임금이 1천년이 넘도록 나라를 다스렸다는 뜻이지 단군 한 분이 1천년이나 살았다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마치 1세 단군이 1천년이나 살고 그 단군이 하백녀와 혼인하여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을 낳은 것처럼 오해한 것이다.
5) 단군은 불교신앙에서 나온 분이 아니다
다음은 단군의 연원淵源 문제, 즉 단군은 불교신앙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이다. 《삼국유사》에 보면 “옛날에 환인이 있었으니(昔有桓因)”라 하면서 거기에 주註를 달아 설명하기를 “환인은 곧 제젓이니라(謂帝釋也)”고 하였다. 그러니 이것은 불교 경전에 나오는 말, 석가제환釋迦提桓 인다라因陀羅의 약자인 석제환인釋帝桓因과 유사하다는 것이고, 필시 이는 우리나라에 불교가 유입된 뒤에 불승들이 만들어낸 말이라고 하면서, ‘고기’에 나오는 말 전체를 의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큰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환인이란 말은 한자가 아니라 한자가 들어오기 전에 쓰던 우리 민족의 고유어였다. 그 음을 따서 한자로 표시한 이두문인 것이다. 이두문의 예를 들면 가령 사람 이름 가운데 고구려의 고국양왕故國壤王을 일명 고국천왕故國川王이라 하는데 이는 고국양왕의 양壤과 고국천왕의 천川이 다같이 ‘내’ 또는 ‘라’, 즉 강江이라는 우리 고유어에서 비롯된 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이라고 하건 ‘천’이라고 하건 같은 뜻이 되는 것이다.
또 하나 예를 들면 지면 가운데 음봉현陰蜂縣을 일명 아술현牙述縣이라 하는데 그 이유는 ‘아술’이란 말이 ‘엄수리’란 우리 고유어에서 유래했기 때문에 엄수리의 ‘엄’이 음봉현의 ‘음’으로 변하고 엄수리의 ‘수리’가 ‘봉’으로 변한 것이다.
우리나라 고유어가 한자로 바뀌어 가는 광정을 살펴보면 대체로 3단계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제1단계는 문자의 뜻이 어찌되었건 음만 맞으면 사음寫音하는 단계였다. 그러나 제2단계로 들어서면서 한자를 쓰되 우리나라 말과 그 뜻이 비슷한 글자를 골라 썼다. 예컨대 신라 시조를 박불거내朴弗炬內라 하지 않고 박혁거세朴赫居世로 고쳐 쓴 것이 그 좋은 예이다. 불거내나 혁거세나 모두 그 뜻은 광명이세光明理世이다. 제3단계에 들어서면 음은 제쳐놓고 뜻만 따져서 글을 만든다. 가령 고려를 산고수려山高水麗라 하는 것이 그 한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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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고조선의 도읍지는 어디인가
다음 문제는 단군의 국도國都 문제이다. 단군이 나라를 연 곳은 백두산이다. 일연은 ‘고기’를 인용하면서 이미 환웅이 태백산太伯山에 하강하였다고 하면서 다시 주를 달아 태백산을 묘향산妙香山이라 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도읍을 평양에 정했다고 하면서 평양을 서경西京이라 하였다. 물론 이 주가 일연이 친히 단 주註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잘못된 기록이다.
먼저 태백산이 묘향산이 아닌 것은 《삼국사기》〈최치원전崔致遠傳 태사장太師狀〉에 “고구려의 잔당이 북의 태백산 아래에 의지하여 국호를 발해라 하였다”는 기록을 비롯하여 《통고通考》〈발해전渤海傳〉에 “고구려의 여종이 요하를 건너 태백산의 동북 조오루하로 달아났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확실하고, 《성경통지盛京通誌》〈산천조〉에 보면 더욱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장백산은 즉 가이민 상견 아린이다. 《산해경山海經》은 불함산이라 하고 《당서》에는 태백산 또는 도태산 혹은 백산이라 한다.
長白山 卽歌爾民商堅阿隣 山海經 作不咸山 唐書 作太白山 亦曰 徒太山 或作白山
여기서 ‘가이민’과 ‘상견’은 만주어로 장백이란 뜻이요 ‘아린’은 산이란 뜻이다. 또한 가歌는 만주어음으로 ‘아’이니 《위서》에서 말한 ‘아사阿斯’는 아리(長) 또는 센(白)이란 뜻이다. 또 《삼국유사》는 “백악白岳 아사 ‘달’ 阿斯 ‘達’(‘대’ 또는 ‘재’)로 도읍을 옮겼다”하였는데 이 때의 백악 아사달이란 백‘산“을 사음한 것이다. 그러면 평양의 본음은 무엇인가. 평양의 ‘평’은 벌(평야)로 읽었을 것이고 ‘양’은 ‘라’ 또는 ‘내’라는 말이었을 것이다. 즉 ‘벌내’가 평양의 본음이었다고 생각된다. 이 ‘벌내’란 말은 고구려의 국내성이라 할 때의 ‘국내國內’, 백제의 ‘부리夫里’, 신라의 ‘라羅’ 또는 ‘벌伐’이란 말이 되어 결국 상경上京이란 뜻이 되었다. |
《삼국지三國志》〈동이열전 진한조〉에 보면 이런 구절이 보인다.
나라를 부르기를 ‘방’이라 하고 활을 부르기를 ‘호’라 한다.
名國爲邦 弓爲弧
여기서 호弧란 우리나라의 고어인 활을 말하는 것이며 방邦은 벌을 말하는 것이다. 어찌 되었건 요수遼水 강변의 평양도 단군의 처음 도읍지가 아니거든 하물며 평안도의 평양을 백두산과 흑룡강(白山黑水) 사이에 있던 원양原壤, 즉 원래의 평양과 혼동할 수 있단 말인가.
7) 단군은 죽어서 신이 되었는가
다음 문제는 단군의 신화神化, 즉 단군이 끝내 신이 되었다는 문제이다. 단군은 조선의 시조요 아사달 즉 장백산은 조선의 발상인 본토이니 단군이 쇠퇴한 후 아사달의 주신으로 숭앙된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한 단군을 후대의 사란들이 신으로 모시고 제사를 지낸 것인데, 그것이 마치 단군이 스스로 운차풍마雲車風馬를 타고 아사달 산중으로 들어가 신이 된 것처럼 전해져 이상하게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그러므로 하등 의심할 것이 못된다. 여기서 우리는 다른 사례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박제상朴堤上의 부인이 치술상신鵄述上神이 되었다고 전하고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부인이 신이라 할 수 있는가. 또 탈해왕脫解王이 동악산신東岳山神이 되었다고 전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탈해왕을 신이라 할 수 있는가. 그와 마찬가지로 단군도 아사달에 들어가 신이 되었다고 해서 단군을 신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이상의 논술은 ‘고기’를 가지고 문제되는바 몇 가지를 논한 것인데 그것은 ‘고기’에 관한 문헌상의 검토를 해 본 데 지나지 않는다. 단군 자신에 관한 검토는 아니었으니 단군이 조선의 시조라는 사실과 조선을 단군이 탄육誕育하였다는 사실은 의심할 바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역사적 문헌으로 말하면 재난을 당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심지어 문헌이 없어졌다는 사실까지도 문헌으로 고증할 수 없는 실정이다. 특히 동천왕 20년(246)에 고구려를 침략한 관구검毌丘儉이 우리의 전적典籍을 훔쳐간 것이 많았다. 《삼국지》의 기록으로 미루어 진수陳壽의 〈동이전東夷傳〉 자료가 모두 관구검이 탈취해 간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어떻게 왕심의 《조위서》에 단군조선의 역사가 서술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런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문헌이 하나도 남지 않고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거꾸로 《위서》가 중국에서 우리나라에 유입된 것이 고려시대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고구려 말년의 전란에 다시 한 번 전적이 없어졌으며 그 뒤에도 신라가 망할 때 재삼 전적이 없어졌다. 그래서 고려 성종이 서경西京에다 수서원修書院을 설치할 때 “국가 초창시에는 신라가 쇠망한 직후의 일인지라 문서는 불에 타고 도첩圖帖은 진흙탕에 버려졌다. 그러니 여러 대에 걸쳐 없어진 문서와 전적들을 베끼고 연서連書하라”(《고려사》권3,성종9년)는 교서를 내렸다. 이 교서를 보더라도 우리나라 전래의 문헌들이 얼마나 많이 없어졌는가 알 수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만 해도 후대에 비하여 고문헌을 채집하기 쉬웠을 것이다. 그런데 성종이 고심하여 채집한 장서가 서경의 수서원과 개성 궐내의 임천각臨川閣 그리고 청연각靑讌閣에 보관되었으나 그것도 얼마 못가서 전국적인 반란이 일어나 그마저 남은 문헌이 없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세종대왕 이후로 모아놓은 소장도서가 지하창고에서 불타버리고 말았다.
대개 나라에서 귀중하게 소장한 도서는 깊숙이 잘 보관되게 마련이었으나 없어질 때는 굴러다니던 것만 못하게 쓸어내듯이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거기다 더해서 사대주의에 기울어진 유학자들은 조선의 전통문화를 업신여겨 《삼국사기》부터가 박혁거세를 중국의 외손으로 알고 귀중하게 여기는가 하면 우리 고어古語를 오랑캐 말이라 하여 수치스럽게 여겼던 것이다.
평양은 본시 삼조선의 옛 수도로서 당뇨 무진년에 신인이 단목 아래 내려오시니 나라 사람들이 그를 임금으로 모셨다. 도읍을 평양에 정하고 단군이라 칭하니 이것이 전조선이다.
《삼국유사》, 《세종실록》〈지리지〉, 《응제시주》 이외에도 《용비어천가》 제9장 주, 《동국여지승람》〈평양 본조〉, 《고려사》〈지리지 서경유수관조〉 등등 모든 문헌이 단군을 기록하였으나 단군이 건국한 곳을 굳이 서경西京(지금의 평양) 이라 추정하였으니 백두산과 송화강변에 단군조선의 터가 있었던 사실을 상상도 하지 못했단 말인가.
단군이 조선의 시조란 사실은 본래 구전으로 세상에 전해 내려온 것이었다. 태조 이성계가 여말麗末에 동녕부東寧府를 토벌할 때 금주金州와 복주福州 등지에 다음과 같은 방문榜文을 붙인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우리나라는 당요와 같은 때 건국하였다.(《용비어천가》 42장 주)
이는 우리가 우리의 시조를 말할 때 으레 하던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기록된 문헌은 많지 않다. 고려 공민왕 때의 백문보白文寶가 언사소言事疏를 올리기를 “우리 동방은 단군 이후로 지금에 이르기까지 3천 6백년이 되었다(《고려사》〈열전〉)”라고 한 것도 우연이라 할 수 있을까. 《삼국유사》를 쓴 일연은 고려 희종熙宗 병인생丙寅生(1206, 민적閔適 찬讚 비명碑銘 참조)인데 희종 병인년은 고종高宗 초년初年 갑술년(1214)과 8년의 차가 난다. 이 고종조(1213∼1257)에 등제登第한 사람이 이승휴李承休(1224∼1301)인데 이승휴는 《제왕운기帝王韻紀》(1287)라는 운어韻語로 된 동양사를 썼다. 당시로서는 세계사였다. 그 안에 동국편東國篇 즉 국사를 넣었는데, 거기서 유명한 단군 기사가 나온다.
처음 누가 나라를 세워 역사를 엮었는가. 석제釋帝의 손자로서 이름은 단군이라 하였네. (주)“본기本紀에 이르기를 상제 환인桓因에게 아들이 있었으니 환웅桓雄이라 하였다 한다. 상제上帝가 이르기를 삼위태백三危太伯에 내려가서 홍익인간弘益人間하라 함으로 환웅은 천인부天印符(※天符印으로 교정〈편집자〉) 세 개를 받아 귀신 삼천 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정상 신단수 아래에 내려오니 그가 곧 환웅천왕이라는 것이다. 환웅은 손녀에게 약을 먹여 사람이 되게 한 다음 단수신檀樹神과 혼인하여 남자 아이를 낳으니 이름이 단군이었다. 단군은 조선 땅을 차지하여 왕이 되었으며 시라尸羅, 고례高禮, 남북옥저南北沃沮, 동북부여東北夫餘, 예맥濊貊은 모두 단군이 다스리던 지역이다. 왕이 된지 1천38년 만에 아사달에 들어가 신이 되었다. 고로 죽지 않은 것이다.” 요堯 임금과 더불어 무진년에 일어나서 우禹나라 하夏나라가 다 지나도록 왕위에 있다가 은殷나라 무정 8년인 을미년에 아사달阿斯達에 들어가 신이 되었다네.(주)“아사달은 지금의 구월산九月山이다. 일명 궁홀산弓忽山 또는 삼위산三危山이라 하며 사당이 아직도 있다.” 1038년 동안 나라를 지탱하였으니 환인에게 물려받은 것일까. 그런지 164년이 지난 후 어진 분이 또다시 군신관계君臣關係를 열었네. 일설에는 그 뒤 1044년간 부자지간父子之間은 있었으나 군신 관계는 없었다고 전하네.
《제왕운기》의 기록은 《삼국유사》와 동시대이면서도 서로 내용이 다르고, 도리어 후대의 《세종실록》〈지리지〉와 상통하는 점이 많다. 그런데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단군이 다스렸다(檀君之理)라고 하였는데 《제왕운기》에서는 단군의 후손(檀君之裔)이라고 되어있다. 또한 단군이 아사달에 들어간 뒤 기자가 와서 이륜彛倫을 전하였다고 하나 “군신지간이 없는 시대가 되었다”고 한 구절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이처럼 많지는 않지만 시조 단군에 대한 기록이 간혹 보인다.
그러나 비록 문헌에 단군 기록이 없다 하더라도 단군의 역사적 사실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니 그 좋은 예가 김부식金富軾(1075∼1151)의 《삼국사기三國史記》〈東川王條〉에 나오는 다음 구절이다.
평양은 본시 선인 왕검의 댁으로 혹 말하기를 왕의 도읍지를 왕검이라 하였다.
平壤者 本仙人 王儉地宅也 或云 王之都王儉
이것은 결코 김부식이 단군을 기록하려 했던 글이 아니다. 《동사강목東史綱目》의 저자 안정복安鼎福(1712∼1791)이 비판한 것과 같이 사마천의 《사기》〈조선전朝鮮傳〉에서 위만衛滿을 언급하다가 ‘왕지도왕검王之都王儉’이란 글귀가 나오는데 이 글귀를 김부식이 표절한 것이다. 선인仙人이라면 산 속에서 수련하던 도인道人을 연상하게 된다. 그러나 왕검이란 말을 검토해보면 향찰법鄕札法으로 왕검을 읽을 때 임금으로 읽어 틀림이 없다. 굳이 왕王을 임壬 자로 고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
한편 단군선인설檀君仙人說에 대해서는 이승휴가 인용한 본기本紀 말에 “단군이 1천38년을 다스리다가 아사달에 들어가 신이 되었다(理一千三十八年 入阿斯達山 爲神)”고 하면서 주기註記하기를 단군이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不死故也)”고 덧붙이고 있다.
이승휴의 말을 검토해 볼 때 단군의 역년歷年, 즉 단군의 역대 치세가 단군 한 사람의 나이로 변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다 보니 단군의 죽음이 단군왕조의 쇠망기에 붙게 되고 조선이 천년 장수의 나라, 동방불사국東方不死國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마침내 단군이 선인仙人으로 전해 오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단군의 역대 치세가 오래되었다는 것은 단군을 선인으로 보는 이설異說과 유관할 뿐만 아니라 역으로 생각해 볼 때 단군을 선인이라 본 이설이 단군왕조의 역년이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고려사》〈묘청전妙淸傳〉에 보면 정지상鄭知常(?∼1135)의 팔성제문八聖祭文이 나온다.
그 사이에 팔선을 봉안하니 백두 선인을 첫째로 모심이라.
妥八仙於其間 奉白頭而爲始
그러니 여덟 선인(八仙) 가운데 백두악白頭嶽 태백선인太白仙人이 제일 앞인 것을 알 수 있다. 이 선인은 백두산신을 말하는 것으로서 아사달에 들어가 신이 된 단군 바로 그분인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후세에 단군을 산신으로 모셔 숭앙하였다 하더라도 단군이 조선의 첫임금이라는 사실에는 이상이 없다. 이곳에서는 단군이란 말도 없고 아울러 선인왕검이란 말도 없는 데에서 뚜렷한 단군의 전형을 찾을 수 있다.
단군 기술에 대하여 첫째로 생각하여야 할 점은 ‘고기’ 또는 ‘본기’에 신화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나 신화 부분은 신화로 돌아갈 것이로되 신화 아닌 부분까지 신화로 끌어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가령 《삼국유사》로 말하면 “옛날에 환인이 있어(昔有桓因)에서 아들을 잉태하여 낳았으니(孕生子)”까지는 신화로 치자. 그러나 “이름하여 단군왕검이라 하였다. 이 때가 중국의 당뇨 즉위 50년인 경인년에 해당하는데 도읍을 평양성에 정하고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다(號曰檀君王儉 以唐高卽位五十年庚寅 都平壤城 始稱朝鮮)”는 부분까지 신화라 할 수 없지 않는가.
이승휴의 《제왕운기帝王韻紀》로 말하면 이승휴 자신이 환인 문제로 인하여 무던히 불쾌하였던 것 같다. 그래서 “어찌할 수 없이 환인으로 전한 것일까(無奈變化傳桓因)”라고까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환인은 어찌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 이름이 단군이었다. 단군은 조선 땅을 차지하여 왕이 되었으며 시라, 고례, 남북옥저, 동북부여 모두 단군의 후예들이다(名檀君 據朝鮮之域 爲王 故尸羅高禮 南北沃沮 東北夫餘 皆檀君之裔)”라는 것이야 무슨 변화가 있겠는가.
단군에 관한 고전古傳은 그야말로 기구한 우여곡절을 겪어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는 사이에 단군 실사實事에 터무니없는 가상假想이 섞여 들어가 시대와 지역에 따라 여러 가지 덧붙임을 받았던 것이다. 거기다가 우리 옛말이 한자로 번역되기에 이르러 유교, 불교, 도교의 왜곡을 받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군의 역사적 사실은 마치 굳고 굳은 연금鍊金과 같아서 결코 신화와 혼합될 수 없고 유교나 불교 속으로 끌려들어갈 수 없는 실체實體가 되었던 것이다. |
문헌으로 고사古事를 입증하는 것이야 누가 모르는가. 그러나 문헌에 기술된 연대와 고사 발생의 연대를 비교하여 보면 문헌의 기술이 사실 발생보다 훨씬 뒤이다. 단군 사실만 하여도 어디선가 고구려의 《유기留記》가 나오고 별안간 어디서 부여의 고문헌이 튀아나왔다 하자. 그렇더라도 그것이 단군시대의 문헌이 아닌 바에는 시대가 뒤지기는 매일반이다. 《삼국유사》나 《제왕운기》보다 앞 선 시대에 쓴 기록이 없다 하여 한탄하지만 설혹 이전의 문헌이 나온다 손치더라도 늦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고려의 고종 연간에 쓴 책이라 하여 유감 될 것이 없는 것이다.
마냥 문헌이 없다고 탓할 것이 아니다. 부모님의 가르침(父詔母敎)으로 대대로 전해 내려온 구전이 문자로 기록된 것보다 훨씬 살아있는 그야말로 활문헌活文獻이다. 이것을 헤치면 저것이 응하고 여기를 뒤지면 저기가 비추어지니 문헌 즉 서書가 비문헌 즉 속俗과 그대로 일단一團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실實 즉 사실은 언제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제 단군 이후 조선 역사의 줄기와 가지를 따라 살펴보는 동안에 그 퍼짐이 아무리 넓고 멀어도 그 ‘사북’은 한 곳에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그것을 추통진합推通溱合(통하게 하고 합하게 함)하여 진眞을 밝히고 서속일단書俗一團(문헌과 비문헌을 하나로 묶음)으로서 실實을 밝히려 하는 바이다.〈16호에 계속,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