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두면 안돼’하면서 기계자수를 시켰다. 공부에 굶주린 그는 너무너무 공 부가 목말라 그만 우울증에 걸렸다.
“엄마, 공부가 하고 싶어요!” 그의 간절함은 생존까지 위협할 정도였다. 그렇 게 하여 가게 된 곳이 속성 야간학교(Adult school)로, 1년 6개월만에 중등학교 과정이 끝나는 곳이었다. 19세에 중학교 1학년에 입학한 것이다. 그곳도 얼마나 감사했던지!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그의 부모는 대판 싸움이 붙었다. 그 지긋지긋한 싸움 에 그만 집을 뛰쳐나왔다. 그러나 막상 갈 데가 없었다. 그 순간 불현듯 학교에서 만난 ‘중국 아이같이 생긴 한국 아이’가 생각났다. 늘 그에게 교회 나오라고 권 하던 남학생이었다. 바로 조금 전에도 그 남학생은 교회에 부흥회가 있으니 꼭 나 오라고 부탁하기도 했었다.
“집을 뛰쳐나온 날이 바로 부흥회 날이었어요. 얼떨결에 교회가 생각났고, 그 날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때가 제 나이 스물한 살이었는데, 예수님을 영접한 후 너무너무 기뻐 3일 동안은 잠도 못자고, 매일 밤, 매일 새벽 교회에 나갔습니다. 그 때 부 모님은 너무 크게 싸운 탓인지 말리지 않았어요.”
3일째 되던 날, 드디어 일이 터졌다. 대판으로 부부싸움을 한 뒤 잠시 휴전 상 황에 있을 때였다. 부부싸움 끝에 그의 모친은 시집간 딸에게로 가고, 집에는 부 친만 있었다. 은미 양이 예배 마치고 집에 들어서자마자 신발짝으로 그를 후려쳤 다.
“당신은 완벽히 천주교인으로 생각하셨어요. 그렇다고 성당에 나가시는 것도 아니면서 말입니다. 그 때 저는 처음으로 아버지 말씀에 대꾸를 했습니다. ‘아버 지 저는 예수님 믿겠습니다’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천주교는 예수 안믿나 이년아!”
예수와 남편의 만남
처음으로 부친에게 대꾸한 이 한 마디는 그 인생에서 가장 새로운 전환점이 되 었다. 그 일을 계기로 자유롭게 교회에 나갈 수 있었고, 그 해 3월 예수님을 인격 적으로 영접했다. 그 해 6월엔 약혼식까지 하게 되었다. 그가 부친으로부터 교회 나간다는 이유로 모진 매를 맞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터져나오며 삼킨 말이 있었 다.
‘하나님, 교회 나가게 해주시면 은철 씨와 결혼하겠습니다.’ 바로 교회로 인 도해준 중국 아이처럼 생긴 그 남학생이었다. 그 남학생은 5대째 내려오는 백년 신앙가정 출신이었고, 아들을 주신다면 목회자로 키우겠다는 부모의 서원으로 태 어난 ‘태생적 목회자’였다.
그러나 브리질 이민 이후 부모의 병환으로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고 있는 중이었 다. 당시 그는 당뇨로 다리가 썩어가는 부친과, 폐병 3기에 든 모친을 두고, 열아 홉 살에 속성 중등과정을 마치는 야간학교에 입학할 정도로 ‘사연 많은 가슴’을 안고 있었다. 그가 집을 비운 사이, 그 남학생이 그의 모친을 찾아왔다.
“은미하고 결혼하겠으니 제 어머니가 되어주세요.”
갑작스레 찾아온 한 남학생의 당돌한 요청에 당황한 모친은 저녁에 그를 불러 앉혔다.
“은미야, 너 은철이와 연애했니?”
“아니에요. 어머니!”
“오늘 낮에 찾아와 너랑 결혼하겠다고 하더라.”
이리하여 그의 모친은 둘을 불러 약혼식을 해주었다. 이어서 결혼하고 그의 생 활은 급박하게 굴러갔다.
남편은 브라질 가톨릭 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하고, 신학교에 진학하고 전도사가 되었다. 그러자 그도 교회에서 자연스레 ‘사모님’이 되었고, 비록 초신자였지 만,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사모라고 하니 아이들 가르치라고 하면 가르쳐야 했고, 성가대 지휘하라고 하 면 콩나물 대가리도 읽을 줄 몰랐지만 해야 했어요. 마침 어머니가 피아노를 하셔 서 어머니에게 배워서 배운 그대로 했는데, 얼마나 이것저것 맡겨지는 일이 많던 지요. 그래도 시키는 대로 열심히 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은혜가 크게 임했음을 느꼈다고 한다. 자신이 겪었던 똑같은 아 픔들을 그들도 겪고 있음을 발견한다. 그들에게 드리워진 가정의 큰 그늘을 보면 서, 열정 하나만으로는 구체적으로 도울 수 없는 한계에 안타까워했다. 그들을 도 울 수 있는 방법을 두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한 책과의 만남
바로 이때 앞서 밝힌 A장로가 한국을 다녀오면서 그에게 책을 한 권 선물로 주 었다. 양은순 사모의[사랑과 행복에의 초대]라는 책이었다. 가정에 대한 수십 권 의 책을 번역한 양은순 사모가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론과 사례가 풍부 한 책이었다. 이 책 한권이 그에게 필생의 연구과제를 줄 줄이야!
“기도의 응답으로 받아들였어요. 장로님이 주신 책을 통해 가정도 연구하고, 공부해야 한다는 개념을 잡았어요. 그 때부터 가정을 공부하고 싶었는데 그것을 가르쳐주는데가 없었어요. 그래서 상담학이나 심리학을 공부해서 연결시켜 보려고 했습니다.”
그 사이 남편은 신학교를 마치고 미국으로 공부하러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남 편에게 진지하게 의논했다.
“여보, 나 공부 못한 게 한이 된 사람인데. 미국가면 나도 공부하면 안될까?”
“그럼, 당연히 해야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이들에게 현실적인 장벽은 맨손으로 풀베기였다. 양가에 서는 전혀 경제적으로 뒷받침할 형편이 못되었다. 오히려 병약한 시어머니를 미국 으로 모셔야 할 판이었다. 미국 가서 1년 동안 소위 ‘밥 먹고 살기 위해’ 일을 해야 했다.
“일 년 동안 하나님께 공부할 수 있는 길을 달라고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 님께서 용기를 주셨어요. 일을 팽개치고 공부할 준비를 했습니다.”
남편이 공부하던 풀러신학교에 상담학부가 있었지만 돈이 너무 많이 요구되었 다. 선교학부를 보니 많은 혜택이 있음을 발견한다.
“남편이 공부하면 배우자는 학비의 30%만 내면 되었어요. 남편이 먼저 공부했 으니 책 다 있지요. 또 남편이 공부하는 방향을 가르쳐 주는 그대로 공부하니 석 사과정 2년 과정을 1년에 끝낼 수 있었어요.”
박사과정을 지원하는 중에 각 학부의 커리큘럼을 훑어보던 중 결혼과 가정학과 상담치유 등의 학과목이 눈에 확 뜨였다. 그렇게 하고 싶었던 과목들이었다. 하나 님의 계시같았다. 서슴지 않고 그곳에 들어갔다. 너무너무 행복했다. 가정의 시스 템을 공부하면서, 그 시스템이 대인관계, 교회와 사회에서도 그대로 작동되고 있 음을 발견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부모의 수치 시스템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 다.
22불의 추억
공부는 행복했지만, 생활은 여전히 풀기 어려운 난제였다. 병약한 시부모의 간 호, 거기에다, 돈이 없어 아이를 차일드 케어에 맡기지 못하고 학교로 데리고 가 야 했다. 태어나자마자 학교를 다니기 시작한 그 아이가 학교 다니는 일을 숙명으 로 알았는지, 질렸는지 ‘난 학교에 안갈거야’하고 투정부리기도 했다고 한다.
거기에다 도서관에서 성실성을 검증받는 ‘엉덩이와의 싸움’은 박사학위를 받는 데 필수요건이었다.
태산처럼 보이는 학비, 모두가 가난한 유학생 부부에게 건너기 불가능해 보이는 홍해였고, 광야였다. 척박한 이민생활로 고생에 단련된 이들이었지만 여전히 난제 였다. 이 때 그는 엘리야의 까마귀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다. 당시 샹 파울 로 동양선교교회의 모교회이자 남편이 전도사로 사역하던 LA동양선교교회 성도들 의 도움과 사랑이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통해 당신의 금고를 털어서 도와주시는 경험을 했 어요. 금요기도회를 마치고 나면, 성도들이 성경책 속에 봉투를 넣어두었어요. 처 음엔 편진가 해서 뜯어보니 돈이었어요. 꼭 그 때에 필요한 것만큼 말입니다. 그 래서 저희들이 미국을 떠날 때는 한 푼도 빚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이 기간 중 이들에게 가장 큰 기억은 ‘22불의 추억’이다. 시어머니와 부부, 그리고 아이들까지 다섯 식구의 ‘화려한 외식’을 위하여는 22불이 있어야 했다.
그 외식처는 다름 아닌 맥도날드이었고, 22불이란 다섯 식구의 맥도날드 값이었 다. 그것도 컵은 집에서, 콜라는 슈퍼마켓에서 사갖고 가야 하는 오직 ‘맥도날드 값’이었다.
“하나님의 은혜였어요. 그렇게 먹는 맥도날드였지만,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외식을 위해 기도하지 않으면 생기지 않았어요. 아이들은 그렇게 콜라를 마시는 것 을 창피해 했지만, 아이들에게 이해시켜 주었어요. 저 사람들이 콤프레인하면 엄 마가 가서 이해시키겠다고 말입니다.”
마치 일본에서의 ‘우동 한그릇’을 나누는 가족들이 미국판으로 개정된 것같은 풍경이다. ‘가난한 날의 행복’이었고, 그날의 ‘화려한 외출’의 추억이기도 하다.
두란노에서 대화학교, 아버지학교, 가정사역학교 등을 설립하다.
이런 가난한 사람이 겪을 수 있는 거의 모든 과정을 거쳐 ‘박사 부부’가 된 이들은 일단 서울에서 1년 6개월 동안 인턴십을 거친다. 황은철 목사는 서울의 온 누리교회에서 부목사로, 당시 장신대 선교학 교수였던 서정운 박사가 총장으로 선 임되면서, 서 박사의 과목을 맡아 강의하기도 했다. 도 사모는 두란노서원 가정상 담실에서 태아교육, 대화학교, 아버지학교, 가정사역학교 등을 개설하여 그동안 배운 것들을 먼저 한국 교회를 위하여 풀어놓았다.
지금은 이런 강좌가 수없이 개설되어 있지만, 그 당시 한국교계는 거의 개척단 계였고, 도 사모는 개척자였다.
브라질의 ‘고향’으로 돌아가다
인턴십을 마친 후 이들은 앞서가는 세계 교회의 현장을 돌아보며 그들을 키워준 샹 파울로 동양선교회로 돌아갔다. 때마침(95년 6 월) 문명철 목사가 원로목사로 추대되고 남편 황은철 목사가 담임목사로 부임하게 된 것이다.
그들의 ‘금의환향’은 예기치 못한 복병도 많이 감수해야 했다. ‘야간 학교 다니던 애들’, ‘같이 옷 팔러 다니던 아이’라는 과거의 아픈 추억들과 연결시 키는 이들도 적지않았다. 박사가 되어 신데렐라처럼 나타난 그들을 대하는 냉소적 인 눈길도 감수해야 했다. 그들이 이제껏 학교와 한국교회에서 배우고 익힌 프로 그램들이 기존의 교회관을 갖고 있던 교인들에게 충격파가 되기도 했다.
“교회는 자라지 못했고, 저희만 자랐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지요. 당연히 박수 칠 것이라고 생각한 기대가 허물어지기도 했지요. 그러나 그곳 상황에 맞춰 보폭 을 조절할 줄 아는 지혜도 필요했었지요.”
선지자는 고향에서 환영받기 어렵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게 한다. 그러나 작 년에 목회 1기(6년)를 끝내고, 2기 사역으로 들어온 지금은 보다 성숙해진 모습으 로 웅비하고 있는 중이다. 그의 외부 사역은 1년에 전반기 8주, 후반기 8주 도합 4개월씩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무너진 가정을 세우고, 교회를 세우는 가정사역 을 하고 있다.
“저를 다들 박사라고 하는데, 저는 박사보다 사모가 더 좋아요. 얼마나 영광스 럽고, 아름다운 자리입니까? 박사는 공부만 잘하면 되지만, 사모는 공부만 잘해가 지고는 못돼요.” †
하나님은 우리 안에 소망을 두시고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나의 뜻대로 구하고 받는 것은 순수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일 순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나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좀 더 공부를 잘하고, 좀 더 부유해지며, 회사일이 더 잘 되기를 구할 때가 많습니다.
'배를 읽으면 밥만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의 배를 구하는 사람에게는 밥만 보인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구하느냐에 따라 우리가 볼 수 있는 세상은 달라집니다.
우리가 살아오면서 받은 상처는 어쩌면 우리의 욕심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뜻을 안다면, 자신의 배를 읽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읽는다면 우리의 인생은 변화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만일 구원받은 후에도 나에게 고통이 온다면 그것은 또 무엇일까요?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해 내시고는 마라의 쓴 물을 주셨을까요?
당신의 상처를 치유받고 싶으십니까?
도은미 사모는 마지막으로 모두에게 한 마디를 던집니다.
"하나님은 이미 당신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시고 계십니다.....
."
[도은미 사모 소개]
브라질 상파울로동양선교교회 황은철 목사 사모
결혼과 가정치료학 박사((Fuller 신학교)
두란노에서 아버지학교와 대화학교 설립자
Jama, Costa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