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 따습고 배부르면 그 다음은 편안한 잠이다. 집 떠나면 개고생이라지만 지금은 그렇지도 않다.
어디를 가나 편안한 잠자리와 맛있는 먹거리가 경상도 언어로 쌔비맀다. 부석사를 수박 겉핥기로 돌아보고 숙소가 있는 봉화로 떠났다.
꼬부랑길이 가도 가도 그 길이 그 길이다. 버스가 간신히 들어가는 곳에 토향고택(土香古宅)이
자리 잡고 있었다.
봉화군 봉화읍 해저리, 토박이말로 바래미 마을이다.
해저는 바다 밑, 즉 바다 밑이 소리 변화를 일으켜 바래미 마을이 되었다고 고택의
주인이 설명을 보탠다. 지금도 땅을 파면 해안의 모레와 조개껍데기를 볼 수 있다고 하니,
이런 산중에 이런 고택도 신기하거니와 그곳이 바다 밑이었다니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이야기다.
고택에 짐을 풀고 버스로 약간 이동하여 인하원이라는 식당으로 찾아들어갔다.
같은 경상도라 그런지 식당에 들어갈 때마다 귀가 간질간질하다.
누구 입에선가 경상도 음식을 평가 절하하는 소리가 나올까 봐서다.
나는 고향에서 24년을 살고 고향을 떠나 서울과 위성도시에서 48년을 살았다. 객지가 고향의 두 배다. 그래도 여전히 가재는 게 편이고 ‘우리가 남이가’ 사상에 젖어 있다. 싫은 소리는 싫다.
경상도 음식은 맵고 짜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럴 수밖에 없다. 경작지는 좁은 데다 해안은 있어도 항구는 발달하지 않았다.
바다에서나 육지에서나 먹을 게 부족했다. 음식문화가 발달할 조건이 못 되었다.
고향을 떠날 때까지 나는 살아있는 생선을 못 먹어봤다. 아버지가 장에서 혹 절인 갈치나 고등어를 사오시면 어머니는 그것을 토막을 쳐서 그 위에 다시 소금을 듬뿍 뿌리셨다.
그래도 파리가 알을 까면 툴툴 털어서 석쇠 위에 올렸다. 안동에 간 고등어가, 영천에 상어 돔배기가 유명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지금은 음식에 대한 편견은 많이 개선되었다. 전국이 일일 생활권에 들면서 평준화가 되었다고나 할까. 인하원의 음식도 무섬마을이나 분당 우리 마을에서 먹는 거나 거기서 거기였다.
다만 과장 광고는 절대 금물. 송이버섯 전골은 차라리 그냥 버섯전골이었다면 그런 대로 먹을 만했다. 그날 입 있는 사람들은 한 마디씩 거들었다. ‘송이가 세수한 물’ ‘송이가 장화 신고 건넌 물’ 등. 봉화는 춘양목 소나무를 알아주고 그 솔밭에서 난 송이가 유명하다. 이런 식이면 봉화 송이가 얼굴 들고 다닐 수 없다.
나는 줄곧 꽃밭에서 놀았다. 먹을 때도 차를 타고 다닐 때도. 그도 그럴 것이 남자 셋에 여자가 열여덟이다. 6대 1의 경쟁력을 가져다 생각하니 공연히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고.
그런데 이게 웬 횡재냐. 무섬마을 심청이와 식탁에서 마주앉았다.
그저 그러고 밥이 뚝딱했으면 심청이라고 하지 않았겠지만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듯 내 눈을 번쩍 뜨이게 하였으니. 내가 백미문학회에 가지는 한 가지 불만이 있다. 술이 없고 술친구가 없는 것. 옛날 문인들 중에는 두주불사 형이 많았다. 어느 때나 문인들이 생각하는 세상과 눈에 보이는 세상은 같지 않았다. 그것을 일치시키는 데 술이 필요하다. 술은 마음의 안경이다.
심청이가 내민 노란 병 하나. 간밤에 돼지꿈을 꾸었나, 오래 전에 조상님이 나라를 구했나. 온 몸에 퍼지는 더덕 향기가 백미문학회에 가졌던 불만을 일거에 해소. 마침내 세상이 내 눈앞에 바로 섰다. 이제야 문학이 싹트게 생겼다.
자, 그럼 이제 별이나 세러 갈까
‘거친 밥 먹고 팔베개 하더라도’(飯疏食飮水 曲肱而枕之,반소사음수 곡괭이침지) 누울 자리가 있다면 걱정이 없다. 그래서 논어의 다음 구절은 ‘그 속에 낙이 있다(樂亦在其中矣,낙역재기중이)’이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누울 자리가 걱정. 탕자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온 이유도 결국 누울 자리였다. 집 떠난 사람이라고 뭐가 다르랴. 발 뻗을 곳이 없으면 개고생이다.
토향고택은 전형적인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가옥 형태. 토향고택은 안채에 더불어 사랑채가 둘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한집에 기거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별채에 행랑채까지.
조선시대 과객이 이런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면 큰 행운이었지 모른다. 한데 편리함에 익숙한 현대인에게 한옥체험은 체험으로서 의미 외에 다른 의미가 없다. 방은 좁고 벽은 얇았으며 화장실은 별채에 따로 있었다.
남자 셋이 차지한 방은 행랑채의 두 칸 중 하나. 바로 옆방은 여자 둘이 차지했다. 밤새 무슨 만리장성을 쌓는지 두런거리는 소리가 얇은 벽을 타고 귀에 속삭이듯 들려왔다.
바닥은 따뜻하나 이마로는 찬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출입문에 4중으로 방어벽을 쳤는데도 그 모양이다. 커튼에 미닫이 둘에 여닫이까지.
뻗을 자리로 발을 뻗었으나 잠이 오지 않는다. 옆방의 두런거리는 소리 때문만도 아니다. 꼭 이런 때는 이명증도 한 몫 한다.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옆 사람을 방해하지 않게 조심하며 4중 막을 걷고 바깥으로 나간다.
기상청 예보대로 그새 기온은 곤두박질. 온 몸에 추위가 가시처럼 박힌다. 정신이 번쩍 든다. 맑은 정신으로 하늘을 쳐다보니 별, 별 별...세상 별들이 온통 고택의 하늘을 덮었다. 당장 머리 위로 쏟아질까 아슬아슬하다.
그제야 알겠다. 내가 잠 못 든 이유는 별들의 소곤거림 때문이었다. 미워할 수 없는 별들의 소곤거림. 잠 대신 어렸을 겪었던 동화의 세계에 푹 빠져들었다.
단지 편리함을 추구한다면 한옥은 도태되는 게 맞다. 한데 그러지 못하는 것은 문화유산도 유산이지만 그 속에 옛 사람의 생활과 정신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남녀유별의 공간 배치, 풍류와 멋을 즐긴 선비문화 등등.
한옥은 손이 많이 간다. 토향고택은 정갈했다. 그만큼 정성을 들였다는 뜻이다. 척 보기에 주인 내외는 어울리는 부부였다. 돌쇠 같은 남편에 아금박진 아내에. 손발이 척척 맞는 부지런과 억척이 없고서는 이런 큰 집을 소유할 수도 유지할 수도 없다.
그 다음이 문제다. 누가 그 부지런과 억척을 이을 것인가. 안 그래도 선머슴처럼 생긴 총각이 마당을 가로지르며 인사를 했다. 아들이었다. 대를 이어야 하는데 아직 결혼을 못했다. 이미 혼기는 지났다.
안 그래도 다음날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그 이야기가 나왔다. 주인이 부탁을 했었나 보다.
전날 마당을 가로지르며 고개를 꾸벅하며 인사를 하는 총각이 있었는데 혼처를 구한다는 것이었다.
이미 결혼할 나이는 차고 넘쳤다. 아무도 솔깃해하는 사람이 없었다.
땅 부자라는 덤이 얹어져도 마찬가지였다. 시골의 땅 부자는 일만 많지 실속이 없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남의 일 같지 않지만 시대가 그런 걸 어쩌나.
떠나려는 차에 안주인이 올라와 상자 하나를 전한다. 떡이다. 떠나는 사람을 그냥 못 보내는 사대부가
안주인의 행실이 그대로 묻어난다. 안주인은 고별의 인사를 하다 목이 멘다. 나도 따라 울컥했다.
안주인은 얼른 차에서 내렸다. 내린 다음 부부가 합세하여 차가 멀어질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그 장면이 아직도 눈에 아슴아슴하다. 부모를 봐서는 방을 붙여서라도 며느리 감을 구해주고 싶건만.
여담. 그 집 별채 화장실 옆에는 큰 개 한 마리가 묶여 있다. 그 개가 나를 처음 봤을 때는 물어뜯을 듯이 짖어댔는데 다음날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꼬리를 흔들었다.
이유가 뭘까.하룻밤 새 정이 들었을 리는 없다. 아무래도 그놈이 처음은 사람으로 보여 짖었는데
다음날은 같은 개로 보여 짖지 않은 게 아닐까. 나는 띠가 개띠다. 그렇기로 개로 보다니, 에라 이 개 같은 놈! 개한테 이건 욕도 아니지 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