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농사 아리랑
중국이 개혁개방이라는 새로운 정책을 펴면서 수십년간 굳게 닫았던 국문을 서서히 국제사회에 열게 되였다. 따라서 많은 외국사람들이 중국을 찾기 시작하였는데 그속에는 한국인들도 끼여있었다.
이들은 광복이 되면서 헤여졌던 혈육을 찾기 위하여 그리고 민족의 성산이라고 불리우는 백두산과 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위해 일제와 총칼을 들고 싸웠던 독립군들의 전적지를 찾아보기 위해 조선족들이 살고있는 마을로 찾아들었다.
그런데 이들을 제일 먼저 맞아준것은 아담하게 들어앉은 재래식의 초가집들과 마을앞에 늬연히 펼쳐져있는 논밭이였다. 험난했던 이주의 행적을 밟으면서도 고향의 정취와 습관을 고이지키면서 살아온 이주민들이였다. 연길에서 백두산으로 가는 관광길을 한번쯤 다녀본 사람이면 한눈에 알아볼수 있듯이, 산기슭에 남향으로 집을 짓고 바람벽까지 하얗게 회칠을 하는 백의민족이였고 동시에 조선족이 살고있는 마을이면 손바닥만한 크기래도 꼭 논을 가지고 있었다. 그만큼 벼농사는 우리민족에게 없어서는 안되는 생존수단이였다.
중국의 저명한 시인인 하경지는 50년대에 연변을 돌아보고는 "산마다 진달래요, 마을마다 렬사비"라는 시구를 남겼다. 하지만 이 시에 "산기슭엔 하얀 마을이요, 앞벌마다 그윽한 벼향기"라는 시구를 첨가하였더면 조선족의 생의 정취를 더욱 드러냈을것이다.
우리민족과는 떨어질수 없는 벼, 그리고 논농사. 언제부터 시작이 되였을가.
력사기재에 의하면 천여년전인 고구려와 발해시기에 동북에서는 벼농사를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고구려와 발해가 잇따라 멸망하고 그후 료, 금, 원, 명, 청 등 몇개 왕조를 거치면서 무려 900여년간에는 동북에서 벼농사를 했다는 기록을 찾아 볼수 없다. 그렇다면 동북에서의 벼농사는 19세기 중엽부터 시작된 조선의 이주민에 의해 다시 시작되였음을 알수 있다. 말하자면 조선족은 근대 동북의 벼농사의 개척자인것이다.
동북에서의 조선족들의 수전개척력사를 돌이켜보기 전에 벼에 대해 잠간 알아보자. 벼는 북위 53°의 중국 북부지방에서부터 남위 40°의 아르헨티나 중부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 그리고 평야지대에서 해발 2,400m가 되는 히말라야 고산지대, 그리고 물이 없는 밭 상태에서부터 물의 깊이가 1.5m가 되는 강변에 이르기까지 재배, 생육되는 농작물이다. 학술계의 견해를 따르면 벼농사의 기원에 관해서는 인도 기원설, 동남아 기원설, 운남[雲南]-아삼 기원설, 중국 기원설 등이 있는데 6,500-1만년전인 신석기시대부터 이들 여러 지역에서 벼농사가 시작되였고 이 지역에서 세계 여러 곳에 전파된것으로 보고있다.
한반도에는 지금부터 3,4천년전에 중국의 중북부지방을 거쳐 벼가 전파된것으로 추정하고있다. 경기도 여주군 흔암리, 김포군, 평양의 대동강가, 충청남도 부여, 전라북도 부안, 경상남도 김해 등지에서 발견된 탄화미(炭化米)를 통해 이를 알수 있다. 중국에서는 5천년전에 황하 중류에서, 4천년전에 산동반도에서 각각 벼농사를 했음이 밝혀졌고 산동반도를 통하는 바다길 또는 료동반도를 통하는 륙지나 바다길을 거쳐 한강 또는 대동강 연안에 벼가 전파되였을것으로 추정하고있다. 이렇게 전파된 벼는 한국만 보더라도 현재 총농경지면적의 59%를 차지하고있다.
중국에서 한반도로 전파된 벼는 다시 19세기말에 이르러 이주민들에 의해 중국의 동북 즉 바람 세찬 만주땅으로 전파된다. 청나라의 봉금령과 조선조의 월강죄가 있었음에도 살길을 찾아, 일제의 탄압을 피해 날따라 늘어가는 이주민들의 발길만은 막지 못했다. 1881년에 청나라의 봉금령이 해제되고 이민실변정책이 실시되면서 이주민들의 수는 급증하였다.
두만강을 사이에 둔 함경도의 변민들은 강을 건너 북간도땅 즉 오늘의 연변땅에 발을 들여놓았고 압록강을 사이에 둔 평안도의 백성들은 강건너 남만, 즉 오늘의 료녕땅에 발을 들여놓았다. 이들이 자리를 잡고 생계를 유지할 즈음 후에 이주한 이주민들은 발붙일 자리가 없어 계속 북으로 북으로 발길을 옮겼다. 이들이 발길을 멈춘곳은 흑룡강, 즉 북만이였다. 현재 연변에는 함경도의 후손들이, 료녕에는 평안도의 후손들이 대부분 살고 흑룡강에는 지역에 따라 함경도, 평안도, 경상도 및 그외 여러 도의 후손들이 살고있는 리유는 여기에 있다. 중국에서의 조선족들의 고향분포도를 알려면 한반도지도를 두만강과 압록강을 축으로 하여 중국땅에 뒤집어놓으면 된다는 말도 일리가 있다.
조선이주민들이 이주할 당시 이들의 행색은 말이 아니였다. 심양에 있던 한 외국인 선교사는 이주민들의 참상을 이렇게 적고있다. "겨울날 령하 40도의 혹한중에 백의를 입고 말없는 군중은 혹 십여명 혹 이십명 혹 오십명씩 떼를 지어서 산비탈을 넘어온다.""녀자들은 제대로 옷을 못입어 허리께가 퍼렇게 들어났는데 어린애를 등에 업어 피차 조금은 따스하게 할수 있었으나 어린애들의 보선 없는 발목이 새파랗게 로출되여 얼어있었다." 이미 중국의 관내에서 동북에 이주한 중국인들은 이처럼 옷차림이 람루한 이주민들이 떼를 지어 몰려오자 저들이 개척한 땅을 빼앗을것이라는 념려로 이들을 배척하고 쫓아냈다. 그리하여 중국인과 이주민간에 무리싸움이 일어났고 심지어 사람들이 죽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한전농사를 짓는 중국인들이 버리는 소택지나 수렁을 이주민들이 개척하고 논으로 개간하는것을 보고는 이들도 입을 벌리지 않을수 없었다. 중국인들에게는 아무 쓸모도 없는 땅이 이주민들에 의해 옥답으로 바뀌는것이였다. 논농사를 모르던 중국인들도 이주민들의 도움에 논농사를 익히기 시작하였다. 현재 동북지역에서 한족들이 짓는 논농사는 조선족들에게서 배운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북에서의 조선족들의 수전개발은 1875년에 처음으로 시작되였다. 통화지구에 정착한 조선족농민들은 처음으로 수전을 개척하여 벼농사에 성공하였다. 이는 동북에서의 수전개발의 첫시작으로 되였다. 이후 수전농사는 흥경, 환인 등 여러 지구로 전파되였다. 이후 1883년에 통화일대의 조선족들이 류하현으로 이주하면서 휘발하상류, 혼하상류의 논농사가 시작되였다. 1890년 단동부근에서 수전개발에 성공하였고 심양, 신민 등 지역에서 1908년에 벼농사에 성공하였다.
길림, 장춘 지역에서는 1900년에 처음으로 수전농사를 지었고 북만지역에서는 1911년에 동녕현에서 논을 개간하면서 수전농사가 시작되였다. 그후 목릉, 녕안, 해림 등 지역으로 수전농사가 전파되였다.
연변에서는 1900년에 해란강연안의 세전벌인 동성용에서 수전경작이 시작되였고 1906년에는 룡정에서 회령으로 가는 연도인 대교동에서 수전을 개발하였다. 이로부터 수전농사는 연변각지로 전파되였다. 20세기 10년대에 이르러서는 평강벌, 부르하통하 류역, 가야하 류역, 훈춘강 연안으로 확대되였다. 20년대에 이르러서 연길현(현재의 룡정시)은 동북에서 논이 가장 많은 현이 되였다.
초기의 수전개발은 그야말로 쉬운 일이 아니였다. 토지가 비옥하여 거름을 주지 않아도 되기에 영농비용이 적게 드는 리점이 있기는 하였다. 하지만 한반도보다는 기후가 차거웠고 또한 청나라의 봉금정책으로 하여 200여년간 사람의 발길이 닿지 못한 탓으로 곳곳에 갈대밭과 버드나무 그리고 잡목들이 우거졌었다. 이주민들은 중국인들이 이미 개간해놓은 땅을 차지할 엄두는 내지 못하고 그들이 사용하지 않는 황무지나 소택지를 개간해야 했기에 버드나무와 잡목들을 뽑아내야 하는 고역이 만만치 않았다.
농민들은 음력설이 지나면 일제히 동원하여 산에 가서 잡나무나 버들을 베여다가 얼어붙은 강우에 쌓아놓고 그 우에 큰 돌들을 올려놓군 하였다. 해토무렵이 되면 나무단이 돌무게에 눌리여 물속에 가라앉으면서 강물을 막아버렸다. 그러면 농민들은 물길을 째고 강물을 끌어들이고 논두렁을 쌓고 써레를 치고 벼씨를 뿌렸다. 여름이면 궂은 날, 마른 날을 가리지 않고 김을 매고 물을 대기도 하고 빼기고 하면서 수위를 조절하여야 하였다. 그러다가도 자연재해가 덮치기만 하면 한해 농사는 나무아미타불이 되여버리기가 상수였다.
수전개발에서 제일 어려운 문제는 수로확보였다. 한마을의 장정을 다해야 수십명밖에 안되였고 이런 적은 인력으로 논을 개답하고 또한 멀리 있는 강물에서 수로를 빼서 논에 물을 댄다는것은 벅찬 일이 아닐수 없었다. 이들은 추위가 풀리지 않은 초봄부터 살을 에이는 만주의 칼바람을 무릅쓰면서 언땅을 뚜지고 물길을 빼야 했다. 하지만 단지 자연과의 싸움만은 아니였다. 원주민들의 리익에 손상이 갈때면 곧바로 이주민과 원주민의 모순으로 번지기도 하였다. 일본놈들에 의해 과장되고 조작되기도 한 사건이지만 장춘부근의 만보산에서 있은 사건을 보아도 알수 있다. 1931년에 있은 만보산사건은 곧 조선족농민들이 논을 풀기 위해 이통하의 물길을 빼다가 원주민들의 리익을 건드려 결국은 조선족과 한족간의 민족모순으로 격화된 사건이다. 이런 사례는 아마 많이 있었을것이다.
하지만 한전농사보다는 수전농사에 익숙하고 쌀밥에 몸이 절은 조선족농민들은 수전개발을 멈추지 않았다. 고향을 떠난 외로움, 원주민과의 모순, 마적떼들의 끝없는 수탈과 그들이 가져다주는 재난, 수토가 맞지 않아 자식을 잃는 괴로움, 어려운 개척에서 뼈를 깎는 아픔을 모두 묵묵히 받아내면서 수전개발만은 멈추지 않았다.
광복전에 창작된 《벼》라는 소설에서는 원주민과의 싸움에서 아들을 죽이고도 만주땅에 끝내는 정착하면서 수전개발에 성공한후 넘실거리는 벼파도를 바라보면서 마을사람들이 부르는 쾌지나 노래를 이렇게 적고있다.
만주땅 넓은 들에도
쾌지랑 칭칭 노네
벼가 자랐네 벼가 자라
쾌지랑 칭칭 노네
우리가 가는 곳에 벼가 가고
쾌지랑 칭칭 노네
벼가 있는 곳에 우리가 있네
쾌지랑 칭칭 노네
우리가 가진것 그 무엇이냐
쾌지랑 칭칭 노네
호미와 박아지밖에 더 있나
쾌지랑 칭칭 노네
고작 고거냐 비웃지 마라
쾌지랑 칭칭 노네
호미로 파고 박아지에 담어
쾌지랑 칭칭 노네
만주땅 좋은 땅에다
쾌지랑 칭칭 노네
우리 살림 이룩해보자
이렇게 개간된 논에서 나는 입쌀은 풀기가 많고 구수하고 맛이 좋아 그전부터 소문이 났었다. 연변의 평강벌에서 나는 입쌀은 위만주국시절에는 부의황제에게 진상되는 품목의 하나였다고 하고 현재 녕안에서 생산되는 입쌀은 북경에 들어간다고 한다. 우리 선조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반죽된 고난의 수전개발이 없었다면 오늘날 동북의 벼농사는 있을수 없었을것이라고 단언할수 있을것이다.
아리랑은 우리민족의 정서를 잘 담은 민요이고 누구나 부를줄 아는 노래이다. 동시에 아리랑은 기쁠때도 부르고 슬플때도 부르는 노래이다. 그러하기에 남북이 만나면 부르는 노래가 아리랑이다. 이주초기 우리선조들이 논을 풀기 위해 언땅을 파헤치면서 아리랑을 많이 불렀을것이지만 그보다도 수전개발이란 고역자체가 구슬픈 아리랑이 아닐가 생각한다.
저자: 리광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