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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일 째 5월 13일 오늘부터는 회귀 여행이다. 로만탕 에서 좀솜까지 가야 하는 것이다. 지프를 이용하기 위하여 대절한단다. 축제기간이라 차가 있을지 모르겠단다. 트랙터를 보내고 요리사들 까지 같이 가야 하기 때문에 3대가 필요 하단다. 차가 있느니 없느니 하더니 어렵게 3대를 구했단다. 2대는 우리가 이제까지 이용하던 수준이고 1대는 새 차 같았다. 이왕이면 새 차를 타고 싶었지만 우리 차례로 올 것 같지는 않았다. 어차피 험한 길을 좁게 앉아 비비대며 가야한다. 어쨌든 이제부터는 차를 이용할거니 큰 힘은 들지 않을 것이란 기대를 했다.
한참 가다 간식 먹고, 또 한참 가다 상보체 마을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었다. 먼저 가면서 다 들렀던 곳이라 다시 와 보니 반갑고 편했다.
점심을 먹고 뒤꼍에 보니 아주 어린 송아지가 혼자 우리를 지키고 있었다. 아직 엄마를 따라 외출할 시기는 안 된 모양이었다. 너무 귀여워 머리를 쓰다듬어 주려 하니 아직 사람의 손길이 익숙지 않은지 도망갔다.
먼저 가던 쪽 보다 오늘 돌아가는 도로 쪽이 훨씬 험한 것 같았다. 하기야 거기도 걸어서 갔으니까 실감이 안 났을지 모른다. 지프로 가는 길은 그야말로 간담이 서늘할 정도였다. 그런데 앞서가던 차량이 정지해 있기에 보니 앞에서 포클레인이 도로공사를 하고 있었다. 마냥 기다려야 했다. 1시간 정도 기다렸을까? 가이드가 가서 포클레인 기사에게 뭐라 하더니 차량이 지나갈 수 있게 정리를 해 주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또 현장이 있었는데 거기도 마찬가지였다. 이쪽에서 차량이 막혀 있다 가는 걸 볼 수 있는 거리인데 그제야 정리를 시작했다. 포클레인 기사에게 엄청난 권한이 있는 가 보았다.
아무리 공사도 중요하지만 차량 통행을 할 수 있게 해 놓아야 할 것이었다. 아니면 차량이 두 대 세 대 자기 때문에 정차를 하고 있으면 지나갈 수 있게 해 주어야 할 것이었다. 차량이 언제 올지도 모르고 또 그때마다 공사를 멈출 수 없다는 건 누구나 인정한다. 임시도로를 만들어 놓고 공사를 하는 게 순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워낙 오지라서 그런지 그렇게 오래도록 기다렸는데도 오는 차량이 많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여행객들도 이 나라의 풍습이나 제도를 몰라서 그런지 아무도 항의를 하는 사람이 없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고 했던가.
5일째 먼지 구덩이를 통과하여 올라왔었는데 지프로 와서 다시 서니 기분이 훨씬 가벼웠다. 바람은 여전히 세게 불었다.
이 지프를 타고 좀솜까지 가는 줄 알았는데 츄상까지만 운행 허가가 나 있단다. 올 땐 츄상에서 점심 저녁을 먹고 하룻밤 묵었는데 오늘은 간식만 먹었다. 그동안 버스에 카고백과 짐을 다 옮겨 실었다. 이 버스는 츄상에서 좀솜까지 운행하는 노선버스인 것 같았다. 얼마나 강바닥 도로를 달렸을까 강물 가운데에 정지해 있는 차와 마주했다. 고장이 난 모양이었다. 우리가 탄 버스로 끌어내 주었다. 그동안 일행들은 강바닥에 나가서 돌을 주웠다. 언뜻 보아도 제법 문양이 있는 돌들이 눈에 띄었다. 수석인 들이 오면 아주 좋아할 것 같았다.
여기도 정비 공장이 있겠지만 산길에서 차가 고장이 나면 어찌할까 걱정스러웠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는 하던데….
그래도 버스가 지프보다는 좀 안전감이 들었다. 걸어 갈 때는 헉헉 거리며 겨우 걸어 올라갔던 길을 차들은 잘도 달려갔다. 우리가 불안해 한다는 것을 운전기사는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좀솜에 도착했다. 좀솜 공항 너머 이 닐기리봉은 조금도 변함이 없이 만년설을 머리에 올리고 여전히 우리를 반겨 주었다. 갈 때 점심을 먹었던 HOTEL TILICHO에서 하루 묵는단다.
잠깐 다녀 갈 때는 몰랐는데 방 배정을 받고 들어와 보니 이만 해도 최상급 호텔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일단 씻기부터 했다. 이제는 고산병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였다. 씻고 나니 기분이 좋았다.
여기 사람들이 원래 피부색이 이런 게 아니라 잘 씻지 않다보니 굳어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까지 식사 때 마다 밥 한 공기, 누룽지탕, 현지식 디저트에 과일 등 아주 과식을 했었다. 잘 먹어야 고산병 예방이 된다고 해서였다. 타고난 식성이지만 깨끗한 기분으로 저녁을 먹으니 훨씬 맛이 좋았다. 행복한 밤이 될 것 같았다.
5월 14일 11일째 날이 밝았다. 어제 깨끗이 씻고 잘 자서 그런지 일행들 표정이 밝아 보였다. 오늘은 좀솜 공항에서 그 작디작은 경비행기를 타고 포카라까지 이동하는 일정이다. 열시 비행기라고 하여 좀솜 시내를 더 구경해 보기로 했다.
공항을 지나니 강을 건너는 현수교가 설치되어 있었다. 거길 건너가니 마을이 있었다. 좀솜 주민들은 여기서 사는 것 같았다. 또 경찰서 같은 것도 있었다. 정문에 경비를 서고 있어 POLICE STATION? 하고 물으니 OK 하였다.
공항에서 수속을 끝내고 비행기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오지 않을 수도 있단다. 포카라 현지에 비가 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포카라에서 비행기가 와야 그걸 타고 여기서 포카라로 갈 수 있는 것이다. 활주로 끝에 비행기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대했건만 끝내 오지 않았다.
만약을 대비하여 가이드가 버스를 예약 했단다. 다행히도 가이드가 아는 기사가 있었단다. 지프가 아닌 버스로 가는 것만도 훨씬 좋을 것이란 생각을 했다. 버스를 한 번 타 보았으니 그만큼 여유가 생긴 것이다.
아들들인지 조수가 2명이 있었다. 우리의 6∼70년대 버스 차장이 생각났다. 그때는 대부분 누나들이었다. 그 차장 누나들은 대단했었다. 완전히 만원 버스인데 자신의 몸으로 대여섯 명은 끌어안고서 버스를 일단 출발시키면 운전사와 합작으로 금방 문을 닫곤 했었다.
여기는 그런 것도 아닐 텐데 무슨 버스에 조수가 있나 생각을 했는데 가면서 조수가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길은 좁고 험하고 앞에서 차가 와 마주치면 조수가 잽싸게 뛰어 내려가 차량을 유도하며 교행을 시켰다.
그래도 이 버스 조수라고 항상 이 버스에 유리하게 했다. 버스 기사가 완전 난폭운전 대가였다. 무조건 추월이었다. 빵빵 경적을 울리고 전조등을 반짝 거려대며 앞차 옆으로 붙으면 조수가 손발로 그 차를 제지하여 추월하곤 했다. 추월하지 못할 상황은 없었다.
어떤 차들은 지지 않으려고 틈을 주지 않았지만 이 기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기어코 추월을 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을 해 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야 포카라에서 내리면 그만이지만 이 기사와 조수는 또 좀솜까지 되돌아 와야 하는 것이다. 여기도 도로공사를 하고 있어 마냥 기다려야 하는 상황까지 겹치다 보니 기사는 정말 답답할 것 같았다.
포카라에 도착하니 열한시가 넘었다. 아! 이 사람들은 어찌한단 말인가? 조수 둘은 이미 진작부터 하나는 의자에 또 하나는 엔진 뚜껑에 엎드려 잠을 곤하게 자고 있지 않은가? 아직 어린애들인데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올 때 음료수를 주니 아주 좋아 하면서 받아 마시는 걸 보았다.
하기는 우리나라도 그 차장 누나들이 있던 시절 초등학교 졸업만 하고 화물트럭 조수로 일하러 간 형들이 있었다.
귀국
5월 15일 열이틀 째 포카라의 HOTEL MILA REPA에서 두 번째 아침을 맞이했다. 이제 네팔의 일정은 오늘로 끝이다. 아침을 잘 먹었다. 호텔 측에서도 잘 차려준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침을 먹고 시간이 좀 있어 안쪽 동네를 구경했다. 길가에는 상점과 주택들이 있었다. 사람 사는 모습은 거의 비슷한 거 같았다. 카드만두에서도 보았지만 상점이 일찍 문을 여는 것으로 보아 네팔 사람들이 좀 부지런한 것 같았다.
여기서 기거를 하면서 사람들을 접해봐야 제대로 아는데 하룻밤 묵은 걸 가지고 무얼 알겠는가. 지난번에도 저녁 먹고 빗길에 걸어오느라 다른 걸 돌아볼 기회가 없었고 이번에는 너무 늦게 도착하여 아예 시내 구경을 못 했으니 아쉬움만 남는 것이다. 그나마 이렇게라도 돌아보고 가는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지.
내가 해외여행을 기피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이런 것도 있다. 패키지를 이용하여 단체로 가면 일정에 따라 가이드가 안내하는 대로 따라 다니기 바쁜 것이다. 일단 말이 안 통하니 어쩔 수 없을 테고 모험심이라도 있으면 무작정 가고 보겠지만 그렇지도 못하니 감히 나서고 싶지 않은 것이다. 유명 관광지를 답사하는 걸로 만족할 수도 있겠으나 그런 건 제대로 된 여행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스마트폰 하나에 의지해서 숙식에 길안내 등을 받으며 해외여행을 한 사람과, 마을버스를 가지고 세계 일주한 사람이 있었는데 정말 대단한 용기를 가졌다고 생각만 하고 있는 것이다.
포카라에서 경비행기를 타고 카트만두로 왔다. 한 번 타 본 거라 그렇게 신기 하지는 않았다.
대 불탑을 구경하러 간단다. 시내 한 복판에 있었다. 대 불탑 이라는 이름답게 그 규모가 엄청났다. 많은 사람들이 마니차를 돌리며 자신의 소원을 빌고 있었다. 우리도 따라 했다. 마니차가 너무 밑에 있어서 고개를 숙여야 하고, 커튼이 쳐 있어서 손을 디밀어야 돌릴 수 있었다. 또 어떤 것은 잘 돌지 않았다. 한 바퀴 도는데 30분은 걸리는 것 같았다. 세 바퀴를 돌았다. 굳이 세 바퀴를 돈 것은 왠지 삼배, 삼세번에 익숙해 있기 때문일 것이었다. 땀이 났다.
대 불탑 주위는 전부 상점이었다. 특히 기념품점이 대부분이었다. 거의 귀국하기 전 마지막 코스로 들르는 곳인가 보았다. 우리도 구경을 했다. 거의가 불교용품이었다. 몇 군데 돌아보다가 적당한 상점 한 곳을 골라 기념품을 대량 구입하면 좀 더 싸게 살 수가 있단다.
우린 올 때부터 아무것도 사지 않기로 했었다. 지금은 우리나라 물건만큼 좋은 게 없다는 이유가 첫째다. 기념품이라고 사다 줘 봐야 처음 받을 땐 좋아 할지 몰라도 처치 곤란이라는 게 두 번째 이유다. 또 현재 근무지에 있는 분들이 불자가 아닌 사람도 많은 것 같은데 불교 기념품 사다 준들 좋아할 리가 없다는 게 세 번째 이유였다.
점심을 먹으러 갔다. 한국 사람이 운영하는 식당은 아닌 것 같은데 한식 위주로 하는 것 같았다. 우린 두부찌개와 김치찌개를 시켰다. 생두부도 김치와 함께 시켰는데 가져오지 않았다. 어떤 건지를 모르는 것 같았다. 그냥 두부찌개에 넣는 두부를 추가로 달라고 했다. 그리고 밑반찬으로 나오는 김치를 얹어서 먹었다. 사실 생두부가 별건 아니다. 그렇게 먹어도 되고 아니면 양념간장을 끼얹거나 찍어 먹으면 되는 것이다. 네팔에서 마지막 식사라고 생각하니 아쉬움이 남았다. 잘 먹었습니다. 하고 모든 것에 감사 인사를 했다.
카트만두 공항으로 왔다. 19:40발 KE696 편이었다. 올 때와 똑같은 비행기인 것 같았다. 아마 이 한 대 가지고 네팔을 왕복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이제는 밤새 갈 테니 자리에 신경 쓸 필요도 없을 것이었다. 카트만두 공항은 특이한 게 비행기를 탈 사람이 아니면 대합실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대합실로 들어가기 전에 환송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공항 밖이 엄청나게 붐볐다. 대합실이 작아서 이거나 출국 수속에 혼잡을 주지 않으려는 것으로 생각 되었다.
빨간 모자를 쓴 젊은 사람들이 가족들과 눈물의 환송식을 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 산업연수생으로 가는 사람들이란다. 우리나라가 이제 세계 각국에서 이런 식의 취업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었다. 이것도 각 나라마다 할당제를 도입하여 몇 명씩 할당을 하고 있단다. 한 명이라도 더 보내기 위하여 당국에서는 애를 쓰고 있는 것이다. 즉 이렇게 보낸 사람들이 성실하게 일을 해서 인정을 받아야 한 명이라도 더 보내달라는 요청을 받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7∼80년대 중동에 근로자를 파견할 당시 이랬던 것이다. 그나마 우리나라가 좀 나았던 게 우리는 회사가 진출해 있으면서 근로자를 데려와 일을 시켰으니 그렇게 열악한 처우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경험이 있던 사람들이 지금 외국 근로자들을 쓰면서 온갖 행패와 임금착취 등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개구리 올챙이시절 생각 못한다는 속담에 너무도 들어맞는 현실인 것이다.
우리와 동행하고 있던 요리사 한 명도 2013년도에 군산 농장에서 일을 했었는데 숙식 제공해 주고 한 달에 20달러를 받았다고 하였다. 그런 기억이 있으면서도 한국 사람들을 위하여 일을 하는구나 생각을 하니 고맙기도 하고 너무 부끄러웠다. 그래도 우리한테 그렇게 친절하게 잘 대해주는 그들의 심성이 부처님 법을 실천하는 국민성에 있지 않을까 하는 짐작을 하게 했다.
우리 불자들도 국내에서뿐만 아니라 성지순례나 해외관광여행을 다닐 때 기초질서나 공중도덕을 잘 지켜 외국인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치고
아내와 해외여행을 같이 한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그런데 스님까지 모시고 불자들과 함께 한 것은 처음인 것이다. 오래 전에 대만이나 백두산에 갔을 때도 절에서 불자들과 같이 갔지만 아내는 함께 하지 않았었다.
아내가 동티벳이나 안나푸르나 갈 때도 같이 가자고 하였지만 난 해외에 별 관심이 없다며 가지 않았었다. 정말 해외에 가고 싶은 마음이 없다. 아마도 개척정신이나 모험심이 결여된 탓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즈음 TV에서 방영하는 프로 중에 ‘걸어서 세계 속으로’ ‘세계테마기행’ ‘하늘에서 보는 세계’ 등등 세계 곳곳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많이 있다. 그것을 아주 즐겨본다. 그것은 참 좋아한다. 편히 집에 앉아서 오지의 미개함이나 도시의 발전된 문물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의 말을 우리가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번역을 해서 자막으로 띄워주니 쉽게 이해를 할 수도 있다.
사람들이 사는 모습은 거의 비슷한 것 같은데 왜 어떻게 해서 모든 나라가 말이 달라졌을까? 따지고 보면 마을에서 마을로 계속 이어진 것이 결국 세계인데 국경선을 달리 하고 있으면 완전히 다른 말을 쓴다는 게 이해 할 수 없는 것이다. 너무 답답하기만 하다.
연휴만 되면 해외여행을 나가는 사람들이 무척 많아진지 오래다. 세계화 시대이니 만큼 거기에 어깨를 나란히 하려는 것인데 그렇게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그 경비의 10%만 국내에 소비해도 경제 활성화에 엄청난 기여를 할 수 있단다. 그걸 누구라도 바꿔 놓을 수는 없는 것이고, 우리 국민들의 무분별적인 부화뇌동성에 변화가 오기만을 바랄뿐이다.
이번 여행의 명칭은 경선트레킹명상이었다. 전체 일정 중에 다섯 번의 경선실습에 대한 수행일지를 작성했다. 경선실습이 아니더라도 저절로 경선을 하는 마음가짐으로 임했으리라 생각했다. 그럼으로써 무난히 통과할 수 있는 코스인 것이다. 모든 것이 이론으로 무장을 하고 실습으로 체험을 해야 완전한 합일체를 이룰 수 있다. 보리마을자비선명상원에서 스님으로부터 강의를 듣고 또 거기서 경선실습을 하지만 진짜 이번과 같은 험난한 코스에서 체험을 해야만 제대로인 것이다. 운동선수들이 비싼 돈 들여가며 전지훈련 하는 것과 똑같은 이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동행했던 모든 분들이 아주 실한 체험을 했을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겠다. 다만 어느 한 구간에서라도 전체가 경선 실습을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기도 했다. 만끽한 여행이었고 가슴 벅찬 환희의 경선트레킹이었다.
"무스탕의 신비"를 마치며, 후기를 작성해주신 거사님께 감사드립니다. _()_